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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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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1)

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5)
김승학 목사의 논문 연재(5)-김점향 권사(1)

김승학목사(서재).jpg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jpg

김점향 권사

(1907~1998)

 

안동교회 첫 예배는 4명씩 동수(同數)의 남·여가 함께 예배를 드렸다. 외할머니 등에 업혀 예배를 드린 아기를 포함하면 4명의 남성, 5명의 여성이 된다. 안동교회는 시작부터 균형 잡힌 성 비율로 하나님을 예배했던 것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남성중심의 교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래도 교회 안에서 여성의 발언권도 무시할 수 없었다. 초기부터 뛰어난 여성 일꾼들이 안동교회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교사와 남성 교인들을 도와 새롭게 출범한 안동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본 글은 3살 때 외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이래 무려 90년 동안 안동교회를 섬긴 김점향 권사님에 관한 것이다. 결혼 후 수년 동안 안동을 떠나 영주로 외도(外道)하기는 했지만 거의 100년 가까이 동안 한평생 안동교회를 섬겼으며, 안동교회 여전도회와 경안노회 여전도회의 중심인물로 여전도회를 든든히 세운 여성 지도자였다.

 

1. 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아기

 

190988, 안동교회는 감격스러운 첫 예배를 드렸다. 안동읍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당시 안동 최초의 근대서점인 기독서원(基督書院)에서 8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고, 안동 땅에 복음이 전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첫 예배를 드린 초대교인은 김병우, 강복영, 원화순, 원홍이, 권중락, 박끝인, 정선희, 김남홍 제씨였다. 다음은 88일 주일 아침의 상황에 대해 김남홍의 외손녀 김점향이 생전에 들려준 내용이다.

 

김남홍의 집은 현재 100주년 기념관 바로 뒤편 화성동 언덕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날 아침 평소에 들을 수 없는 북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다. 주일 아침 누군가 북을 치면서 마을을 돌며 동네 사람들을 모았던 것이다. 김남홍이 무슨 생각으로 동네 아래에 있던 기독서원에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발걸음은 그를 예수 믿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기독서원에 간 김남홍은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여기 오면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때 거기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아들을 낳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후부터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김남홍은 안동교회의 첫 예배에 참석한 초대교인이 되었다.

 

외할머니 김남홍은 1910818일에 학습을 받고, 1911817일에 세례를 받음으로 안동교회의 세례교인이 되었다. 특히 그는 1913년에 조직된 안동교회 여전도회의 중심회원으로 열심히 참여하였다. 또한 김남홍의 남편인 권정택은 안동교회 첫 세례자 9인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안동읍에는 그리스도인이 거의 없는 상태였지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모두 그리스도인인 가정 분위기에서 외손녀 김점향은 성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김점향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속에서 자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고, 그는 자연스럽게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2. 믿음의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결혼한 여성

 

김점향의 부친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자 김점향의 외조모는 자신의 집에서 딸과 외손녀인 김점향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김점향이 3세 되던 때 외조모는 예수를 믿기 시작했고, 그 이후부터 외조모의 등에 업혀 성장한 김점향은 자연스럽게 찬송과 기도를 듣고, 선교사들과 성도들의 예배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믿음 안에서 성장한 김점향은 23세 때 영주 내매교회 출신인 강신효와 결혼하였다. 강신효의 바로 위의 형은 강신충 목사로 당시 영주에서는 믿음을 가진 유명한 집안이었다. 김점향은 결혼 후 영주로 가서 생활하다가 나중에 안동으로 다시 왔다. 강신효의 부친은 강신효에게 많은 재산을 주었다고 한다. 영주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안동으로 이사온 강신효는 정미소를 시작했는데, 안동 최초의 방앗간이었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영을 잘하지 못하고 식구가 늘어감에 따라 가세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으며, 6·25 전쟁으로 건물이 모두 타버려서 경제적으로 점점 힘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서도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한 김점향은 교회와 노회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는 여성 지도자가 되었다.

 

영주 내매 성경공부반.jpg

1910년 영주 내매에서 열린 춘계 평신도 성경공부반 중 남자 성경공부반 모임.(중앙 맨 뒷줄에 권찬영 선교사.) 이 성경공부반이 모인 내매에는 이미 교회가 세워져 부흥하고 있었다.

 

3. 안동 3·1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든 어린이

 

안동지방의 기미년 3·1만세운동은 김재명과 강대극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김영옥 목사와 이중희 장로 등 안동교회 지도자들과 의논한 결과 3·1만세운동 날짜를 313일로 정했다. 그러나 거사 하루 전날 김영옥·이중희·강대극·김원진 등 주역 4인이 검거됨으로써 3·1만세운동은 좌절되는 듯 했다. 하지만 다음 장날을 거사일로 다시 정하고 세밀하게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318일 낮 12시경, 김병우 장로와 김익현 조사의 대한독립만세소리를 시작으로, 안동교회 교인 30여 명은 삼산동 곡물전 앞에서 온 힘을 다해 만세를 불렀다. 이때 동문통에서 내려오고 있던 유림의 시위대와 합쳐지고, 장터에 모인 읍민들도 합세하면서 안동읍 최초의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안동의 3·1만세운동에는 안동 최초의 여자 초등학교인 계명학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계명학교를 다니고 있던 김점향이 태극기를 들고 시내를 뛰어 다녔다고 김점향의 자부인 박춘희 권사는 증언했다. 어린 학생들에게는 태극기를 나누어 주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와 읍내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일제는 그가 너무 어려서인지 체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위가 격해지자 목성교에 시체가 하나 둘씩 늘어가기 시작했고 이것을 본 김점향의 할아버지는 더 이상 김점향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가 발포하기 시작했을 때 총알이 방안으로 들어온다고 하며 이불로 문을 막아놓았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였던 김점향은 자신이 외친 대한독립만세가 무슨 의미인지도 정확히 몰랐겠지만 전국에 타올랐던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안동 3.1만세운동.jpg

안동 3·1만세운동은 1919318일 열렸다. 안동교회 교인 30여 명은 삼산동 곡물전(현 신한은행 근처)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있는 힘을 다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위 사진은 1925년 당시 삼산동 곡물전 근처 안동 장날의 번잡한 모습.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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