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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석보교회, 이웃돕기 성금 100만원 기부영양 석보교회(담임목사 최근상)는 5월 20일 이웃돕기 성금 100만원을 석보면지역사회보장협의체에 기부했다. 석보교회는 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번 기부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달식에 참석한 최근상 목사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이웃 주민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자 교인들이 정성을 모았다”라며, “앞으로도 지역의 어려운 이웃과 온정을 나누며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겠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김초한 석보면장은 “항상 지역 발전을 위해 협력하며 도움을 주시는 석보교회에 감사드린다”라며 “코로나19 장기화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지역의 소외계층을 위해 보내주신 성금을 잘 사용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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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영주한국선비문화축제’ 3년 만에 열린다▲2019년 선비문화축제 덴동어미 공연.(사진=영주시 제공) 가정의 달 5월, 2022영주한국선비문화축제가 선비도시 영주에서 3년 만에 다시 열린다. 11일 영주시에 따르면 내달 5일부터 8일까지 4일간 영주 대표 관광지인 소수서원과 선비촌, 한국선비문화수련원 일원에서 ‘한국 정신문화의 뿌리, 선비정신’이라는 주제로 ‘2022영주한국선비문화축제’를 개최한다. 영주시가 주최하고 영주문화관광재단이 주관하는 이번 축제는 영주가 한국의 대표 정신문화인 선비정신의 본향임을 대내외에 알리고, 그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과 근거에 기반한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열린다. 핵심 프로그램에는 △소수서원 졸업자(입원록 기록자) 후손을 찾고, 소수서원 입원록 제1권 봉환 기념행사인 ‘Home Coming Day’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사액 봉안례 재현을 하는 ‘소수(紹修)1543, 사액 봉안례’ △한복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 위한 ‘K-Culture한복런웨이’ 등이 열릴 예정이다. 이 외에도 △선비세상 문화관 △야경을 즐기는 선비 △고유제 △한복맵시대회 △지역 문화예술공연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 퍼포먼스 △선비공감 흥(興)콘서트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온‧오프라인으로 펼쳐진다. 특히 이번 축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새로운 축제 모델을 정립하기 위해 메타버스 축제장을 조성하고, 유튜브 채널 ‘영주문화관광재단’을 통한 온라인 축제를 병행하는 등 비대면 요소를 추가해 3년 만에 재개되는 이번 축제에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강화했다. 하천수 관광진흥과장은 “이번 축제는 코로나19로 인한 정부 거리두기 방침에 따라 오프라인 행사가 일부 조정될 수 있으며,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이 찾는 만큼 방역 관리에 철저를 기할 방침”이라며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어린이날이 포함된 기간에 개최되는 선비문화축제에 가족 모두가 참여해 코로나19로 지친 심신을 달래고, 선비정신의 함양과 재미를 동시에 얻어가는 유익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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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직면 소호리교회 ‘성탄절 이웃사랑 나눔행사’늘 주민들과 함께하려고 노력 안동시 일직면 소재 소호리교회(목사 김진현)에서 성탄절을 맞이하여 관내 독거노인 및 저소득 계층 100가구에 500만 원 상당의 식료품을 전달하는 이웃사랑 나눔을 실천했다. 평소 소호리교회는 늘 주민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며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지난 5월 소호리교회 100주년을 기념하며 그 의미를 이웃과 함께 나누고자 100가구에 라면과 쌀을 전달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소외된 이웃에게 재차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신도들의 뜻에 따라 나눔행사가 계획됐다. 김진현 목사는 “성탄절을 기념하여 코로나로 더욱 소외되신 어르신과 이웃들에게 작은 정성이지만 온기를 전해드리고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뜻을 밝혔다. 이원경 일직면장은 “관내 주민들을 위한 소호리교회 목사님 및 신도분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정성에 감사드리고, 관내 소외되는 이웃이 없도록 앞으로도 적극적인 행정을 펼치겠다”라고 말했다. 안동 한상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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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1)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1)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1. 서문 1893년 5월 5일 장로교 부산선교부 소속의 배위량(W.M.Baird) 선교사는 안동에 복음을 처음으로 전했다. 그 후 안동을 포함한 경북 북부지방의 복음화는 1899년 설립된 대구선교부에 의해 주도되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안의와(J.E.Adams), 부해리(H.M.Bruen), 방위렴(W.M.Barrett) 등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도보로 사흘 길에 위치한 대구선교부의 경북 북부지역 복음사역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908년 안동선교부의 설립이 결정되었으며, 안동, 의성, 영주, 봉화, 청송, 영주 등 경북 북부지방의 복음화를 가속시켰다. 특히 안동선교부 초기에 부임한 사우대(C.C.Sawtell), 오월번(A.G.Welbon), 권찬영(J.Y.Crothers), 인노절(R.E.Winn), 안대선(W.J.Anderson) 선교사 등은 순회 전도를 통해 많은 교회를 개척함으로써 안동지역 복음화에 기여했다. 1917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한 안대선 선교사는 3·1운동의 실패로 좌절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기독청년면려회(基督靑年勉勵會) 운동을 소개함으로써 청년들이 성경과 신앙으로 훈련되어 희망을 갖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안대선 선교사가 소개한 기독청년면려운동을 안동교회는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전국 최초로 조직된 임원을 당회가 허락함으로써 한국에서 기독청년면려운동 효시 교회가 되었다. 2021년은 한국교회 최초로 안동교회 당회가 기독청년면려회를 승인한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기독청년면려회는 시대에 따라 명칭을 달리하며 한국교회를 위해 봉사해 왔다. 청년면려회가 한국교회의 개혁과 부흥에 끼친 선한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본 소고는 기독청년면려회에서 가장 큰 역할을 감당한 안대선 선교사에 관한 연구 논문이다. 한국으로 오기 전 안대선 선교사의 미국 생활,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안동선교부의 부임과 주된 사역, 특히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에 끼친 그의 영향력, 면려운동 이외에 그가 활동한 사역들, 그리고 그의 가정에 관한 글이 본 소고에 포함되어 있다. 1. 안대선의 출생지 안대선 선교사는 1890년 6월 10일 미국에서 출생했다. 하지만 그의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진 바 없으나 그가 졸업한 대학과 대학원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안대선은 미네소타주 매캘러스터 칼리지(Macalester College)를 졸업했다. 졸업 후 안대선은 캘리포니아주의 유일한 미국 북장로교 신학교인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안대선은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인이 될 안의리(L.E.B.Anderson)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안대선이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별세하기 전까지 생활한 곳은 로스앤젤레스 듀알트(Duart) 시(市)였다. 안대선이 미네소타주 출신인지, 캘리포니아주 출신인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미네소타 출신이기 때문에 가까운 매캘러스터 대학에 입학했는지, 아니면 캘리포니아 출신이지만 매캘러스터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멀리 미네소타주까지 갔는지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매캘러스터 대학 졸업 후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 입학했고,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 다니면서도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안의리와 교제를 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안대선이 로스앤젤레스 출신이거나 혹은 매캘러스터 대학 졸업 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매캘러스터 대학은 미네소타주 램지군 세인트폴에 있는 4년제 사립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대학으로 미국 남북전쟁에서 군종목사로 종군한 목사 에드워드 더필드 닐(E.T.Neil)이 1874년에 세웠다. 그는 1849년 복음 전도를 위해 미네소타주를 여행한 후 두 교회처를 세우고 미네소타 대학교의 첫 총장이 되었다. 그는 장로교와 관계를 맺되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대학을 구상하다가 필라델피아 출신의 사업가이자 독지가 찰스 매캘러스터가 건물을 기부하고, 장로교 교회와 새 대학의 이사회로부터 받은 추가 기부금을 바탕으로 다섯 명의 교수와 여섯 명의 신입생, 52명의 예비 학생들과 함께 매캘러스터 칼리지를 1885년에 문을 열었다. 매캘러스터 대학은 미국 장로교와 관계를 맺긴 했으나 미션 스쿨로 개교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안대선은 장로교 출신이라 할지라도 대학교 4년의 교육 기간 동안 한 교단에 국한된 사고가 아니라 초교파적 사고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안대선은 대학을 졸업하고 북장로교 직영신학교인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1885년부터 1910년까지 미국에서 한국에 온 선교사의 출신 신학대학원 분포는 맥코믹 신학교 18명, 프린스턴 신학교 16명, 유니온 신학교(리치몬드)는 9명, 오번 신학교는 6명, 유니온 신학교(뉴욕) 4명, 샌프란시스코 신학교는 3명 등이다. 참고로 19세기 미국 북장로교회의 신학은 프린스턴 신학으로 대변되는데, 개혁주의적 전통을 계승한 프린스턴 신학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매우 강조했다. 그리고 신학교육의 목적은 “성경을 진실하게 믿고, 적절히 이해하며, 진정으로 사랑하고 명쾌하게 주해하는 복음 사역자, 그리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복음적인 구속을 철저히 전력을 다해 설파하는 복음 사역자를 훈련시키는데 있다”고 한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의 신학적, 목양적 훈련은 안대선을 복음주의적 신앙으로 무장시켜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1871년 개교한 샌프란스시코 신학대학원(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SFTS)은 미국 서부지역을 담당하는 미국 장로교(PCUSA) 직영신학교로 알려져 있다.(사진1)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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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이중직” 또 다른 목회 유형으로 수용해야 할까?이중직 목회자의 47%, 교회 사례비 “0원”··· 평균 사례비 40만원 불과 목회데이터연구소, 지난 25일 이중직 목회자 실태조사 발표 ▲목회데이터연구소는 지난 8월 25일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관에서 이중직 목회자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목회자가 이중직을 갖는 것에 대한 찬반의견에는 ‘목회의 새로운 유형으로 적극 시도해야 한다’는 찬성의견이 40.1%를 차지했다. 한국교회에서 출석 교인이 50명 이하인 교회의 담임목사 중 절반은 목회 이외에 다른 직업을 수행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문제 때문으로, 이중직 목회를 수행하고 있다는 목회자의 48%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전혀 받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목회데이터연구소(소장 지용근)는 지난 8월 25일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관에서 이중직 목회자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소는 지난 6월 10일부터 7월 1일까지 예장합동, 예장통합, 횃불회 소속 교회 중 출석교인 50인 이하 교회의 담임목사 400명과 이중직 담임목사 22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현재 이중직을 수행하고 있다’(31.7%)와 ‘과거에 이중직을 수행하다 지금은 목회만 하고 있다’(16.9%)를 더하면 48.6%의 목사가 이중직을 수행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이중직을 가져본 적이 없다’(51.5%)는 응답자 중에서 45.8%가 ‘이중직에 나설 의향이 있다’고 답변했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 전체적으로 목회자 이중직에 대해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의견(10.4%)보다는 ‘새로운 목회유형으로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한다’는 찬성의견(40.1%)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절반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는 조건부찬성의견(49.4%)이 차지했다. 50인 이하 교회 담임목사 49% … “이중직 수행 경험 있다” 적극 시도해야(40.1%), 조건부 찬성(49.4%), 반대(10.4%) 이중직을 찬성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경제문제 해결을 위해서’(45.2%)라는 응답이 절반 가까이 됐고,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소신껏 목회할 수 있어서’(23.3%), ‘믿지 않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선교적 교회를 위해서’(12.4%) 순이었다. 이중직 목회자 중 교회에서 사례비를 전혀 받지 못하는 경우도 무려 47.7%에 달했다. 사례비가 50만원 이하는 19.5%, 51만원~100만원은 20.9%였다. 평균 사례비는 40만원에 불과할 정도로 경제적 여건은 매우 심각했다. 이중직을 하더라도 수입이 100만원 이하인 목회자는 48.6%를 차지했다. 가족 소득이나 후원 등 기타 수입이 아예 없다는 응답도 60.9%나 됐다. 작은 교회 목회자와 가족들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요청된다. 이중직 목회자의 54.5%는 ‘목회에 지장을 주지 않는 이중직을 찾기 어려웠다’고 답했다. 지금까지 수행한 업종으로는 노무직(22.3%)이 1위였고, 자영업(15.9%), 택배·물류(15%), 학원강사 ·과외(14.1%) 대리운전·택시(9.1%) 순이었다. 이중직 목회자들의 대부분은 ‘일터도 사역지다’라고 생각하면서 목회자로서 활동 영역을 넓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중직을 계속 수행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교회 재정이 넉넉해지면 그만두겠다’는 답변이 55.5%를 차지했다. 예장합동 교회자립개발원 이사장 이상복 목사는 “초대교회 선교사님들을 보면 목회자이면서 교사, 의사로서 이중직을 감당했다. 이제는 목회자 이중직을 선교적 마인드로 바라보며 현실적인 고민과 지원을 해야 할 때가 됐다”면서 “교단 차원에서 미자립 교회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갈 것”이라고 전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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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며“감사의 100년, 새 역사의 100년” 임 만 조 장로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창립 100주년 준비위원장, 안동교회 원로장로 2021년은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가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해입니다. 1921년 2월 5일 그 어려웠던 시절에 안동 선교부 주재 안대선 선교사의 지도로 한국 최초로 안동교회 기독청년면려회가 조직되고, 당회에 정식으로 허락을 받아 노회와 총회와 선교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경안지역으로, 전국으로 확산하여 100년이 지나, 여기에 근거한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창립 100주년을 맞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For Christ And The Church)’라는 표어 아래 선배들이 이루어온 역사를 잘 보존하고, 더욱 발전해 가기 위하여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장로교(長老敎) 통합 측 남선교회와 청년회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장로교단의 현존하는 청장년면려회(靑壯年勉勵會)가 경안노회 안동교회에서 시작했다고 연혁에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큰 자부심(自負心)을 품게 되고,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신 에벤에셀 하나님의 크신 은총(恩寵)을 송축(頌祝)합니다. 안동은 한국 기독청년면려회의 발상지입니다. 여기에 부응하는 탁월한 인물로 안대선 선교사와 권중윤 초대 회장이 배출되어 면려회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지사충성(至死忠誠)하여 지금도 그 업적이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배들의 아름다운 업적을 이어나가야 하는 사명을 다 함과 동시에 큰 보람을 가져 왔기에 오늘의 100주년을 뜻깊게 맞이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기독청년면려회를 허락한 안동교회 당회록이 남아있었다는 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은혜가 있었음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안동은 6·25로 시가지가 전소하다시피 한 곳이지만, 당시 김광현 담임목사님이 피난길에 오르시기 전에 당회록과 노회록 등을 땅에 묻으셨기에 역사가 살아남았습니다. 여기를 근거로 해서 금번에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100년사를 발간하게 되고, 100주년 기념교회를 필리핀에 세우고 해외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통일 후 북한선교를 위해 교회건축기금을 적립하고 있습니다. 2003년 시작한 전남노회남선교회 회원들과 매년 교차 방문해 영·호남 친선교류를 하면서 친목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학교장학금·선교비 지원, 미자립교회후원 그리고 사회봉사 기관 지원사업 등도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주요 사역들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한국 교회사적지 제17호(기독청년면려회발생지-안동교회)’를 2014년 5월 20일에 지정했고, 남선교회 전국연합회 창립 90주년 기념식과 표지석 제막을 2014년 12월 2일 안동교회에서 거행했습니다. 금번에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갖고 있습니다. 단순한 한 노회의 일이 아니라 장로교단이면 더욱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독청년면려회는 초창기 교회와 사회봉사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야간학교 개설, 금주운동, 물산장려운동, 문명퇴치, 농촌사업 등 범국민적인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어려운 일제의 강점기 시절과 6·25전쟁으로 폐허와 잿더미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복음 사역과 이웃사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기독청년면려운동은 교회의 담을 넘어 지역사회로 나가 믿음과 헌신을 통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100년 전 이 땅, 한반도를 기경(起耕)한 기독청년면려운동! 믿음의 선배들이 가졌던 믿음, 그 정신으로 돌아가 그들의 열정과 헌신을 계승해야 합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조국의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기독청년면려회를 통해 헌신했던 믿음의 선배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기독청년면려회의 선배들이 가졌던 믿음과 열정, 용기와 헌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때 오늘의 교회가 살아나고, 민족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남선교회는 보배와 같습니다. 보배는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갈고 닦아야 빛을 발합니다.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쏟을 때 우리 남선교회는 발전하고,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지난 100년도 찬란한 빛을 발하였지만 보다 앞으로의 100년은 더욱 귀중하고,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단체로 발돋움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창립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준비위원장 임만조 장로가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100년 약사’를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가 필리핀에 세워질 100주년 기념교회에 동판을 전달하고 있다. ▲100주년 기념대회를 마치고 남선교회 임원들과 내빈들의 기념촬영.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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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곡교회, 교회 창립 114주년 및 척곡면려회 창립 100주년 기념세미나 통해 ‘청년면려회 정신’ 재조명해 ▲피아노를 치며 ‘금주가’를 부르고 있는 김영성 원로장로(97세). 봉화 척곡교회(담임목사 박영순)가 5월 16일(주일) 본교회당에서 ‘교회 창립 114주년 및 척곡 청년면려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감사예배를 드렸다. 박영순 목사 인도로 드린 1부 예배에서는 경안대학원대학교 박성원 총장이 ‘역사의 저장과 재생’이라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전했고 최갑도 목사(풍기성내교회 원로)가 축도했다. 2부 기념행사는 김영성 장로(척곡교회 원로) 회고사, 이교남 목사(한국기독교교회사 주영연구소 대표)와 임만조 장로(안동교회 원로) 기념사, 조승호 목사(춘양교회) 축도 순서가 있었다. 3부 세미나에서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임희국 명예교수가 ‘늘푸른 청년 봉화척곡교회’라는 주제로 강의하며 청년면려회의 역사와 정신을 재조명했다. 김영성 장로는 “1921년 5월 19일 척곡교회 청년면려회 창립 당시 회의록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문화재 자료로 지정돼 남아있는데,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아 제1회 기념예배를 드리게 돼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역사에 따르면, 1907년에 창립된 척곡교회는 청년 교회로 시작했으며 향후 기독청년들의 독립운동 회합장소로 사용됐다. 1920년대 장로교회는 교회 부흥회, 주일학교운동, 청년면려회운동을 진행했고, 이후 전국적으로 면려회가 확산 조직됐다. 당시 청년들은 면려회운동을 통해 신앙성숙과 성경읽기, 절제와 경건 생활을 도모했다. 청년면려회는 오늘날 남선교회로 이름을 바꿔 활동하게 됐다. 한편, 이날 행사 마지막에는 97세인 김영성 장로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당시 면려회가인 ‘금주가’를 다같이 불렀다. 김영성 장로는 “나라가 어지럽고 교계가 침체된 오늘, 1세기 전 척곡기독청년들의 뜨거운 열정이 되살아난 듯한 감동을 받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척곡교회는 5월 16일(주일) ‘교회 창립 114주년 및 척곡 청년면려회 창립 10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 영주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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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소호리교회, 100주년 기념 이웃사랑 나눔 행사지역주민 100가구에 라면과 쌀 전달 안동시 일직면 소재 소호리교회(담임목사 김진현)는 5월 19일 소호리교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지역의 독거노인 및 저소득 소외계층 100가구에 라면과 쌀을 전달하며 이웃사랑 나눔을 실천했다. 소호리교회는 평소에도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100주년의 의미를 이웃과 함께 나누고자 이번 나눔 행사를 하게 됐다. 김진현 목사는 ”코로나19로 더욱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어르신과 이웃들에게 작은 정성이지만 물품을 준비했다.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규채 일직면장은 “소호리교회 100주년을 축하하며, 이웃 주민들을 위한 소호리교회 목사님과 신도분들의 따뜻한 손길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안동 한상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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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 경안노회 제189회 정기노회 열려예장통합 경안노회(노회장 권헌서 장로)는 4월 6일(화) 오후 1시 안동교회(김승학 목사) 예배당에서 제189회 정기노회를 개회했다. 이번 노회에서는 본당과 100주년기념관을 회의장과 회의실로 활용해 330여 명의 총대를 분산 배치하는 등 방역수칙을 지키며 안전한 노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개회예배는 노회장 권헌서 장로의 사회로 부노회장 조창래 장로 기도, 전노회장 김승학 목사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란 제하의 설교, 설교자의 축도 순으로 드려졌다. 이어진 회의는 전노회장 인사, 각 부‧위원회 보고, 총회 총대 선거, 중요사항 결의 등의 순서로 진행됐으며, 목사 임직 및 목사 은퇴 예식이 있었다. 이번 노회에서는 백남훈(추목샤론) 서대천(안동동부) 목사가 임직을 받았고, 김무년(안동의료원) 김중건(신양) 김대년(소망의집) 박응현(신덕) 목사가 은퇴했다. 권헌서 노회장은 “코로나19로 한국교회가 많이 위축돼 있지만, 위기일수록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집중하며 온 노회가 힘을 모아 난관을 극복해나가자”고 인사말을 전했다. ◈총회 총대 명단 ▲목사 : 김승학 이정우 이재식 서원수 차덕현 이연숙 김종배 김원택 ▲장로 : 권헌서 권오탁 이성덕 최종섭 정동한 박우주 이희사 오상윤 ▲경안노회 제189회 정기노회가 안동교회에서 열린 가운데, 권헌서 노회장의 사회로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박은숙 기자, 사진=임만조 장로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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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8)- 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 김승학(안동교회)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선교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1908년 안동에 선교부가 세워질 당시 안동의 인구는 약 15,000명 정도였다. 안동에 체류하고 있던 장인차(張仁車, Woodbridge O. Johnson) 의료선교사가 오월번(吳越璠, Arthur G. Welbon) 선교사에게 1910년 11월 26일 쓴 편지에 의하면 안동은 소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본 도시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쾌적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고 기록할 만큼 안동은 선교사들에게 매력적인 도시였다. 안동에 도착한 최초의 선교사는 부산에 주재하고 있던 배위량(裵偉良, William M. Baird)으로 그는 1893년 4월 17일부터 5월 20일 까지 경상북도 지방을 순행하며 전도했다. 이후 1899년 대구선교부가 설치되자 안동은 대구선교부의 관할 지역이 되었고, 안동을 포함하는 경북북부지역은 대구선교부의 주된 선교 타게트(Target) 지역이 되었다. 대구선교부 주재 부해리(傅海利, Henry Munro Bruen) 선교사에 따르면 함께 안동을 순회한 방위렴(邦緯廉, William M. Barrett) 선교사는 1903년 안동의 첫 학습자이자 안동의 첫 열매를 얻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특히 미국북장로회 선교회가 1908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를 설립하기 위한 예비 작업을 결정하고 1909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설립을 최종 결정한 후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진 1. 1910년대 안동시의 모습과 생활상으로 위 왼쪽은 낙동강으로 사진 아래의 대동강은 오기로 보인다. 마을과 낙동강 사이에 논이나 밭이 보이고 도로는 동에서 서로 향하는 안동-예천 도로이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린 후 몇 차례 예배처소의 변경이 있었다.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는 안동교회가 임시 처소 까지 포함해 여섯 곳에서 예배를 드렸음을 기록한다. 특히 이 기록은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의 기억을 토대로 한 것으로 김광현 목사는 안동선교부 최초의 선교사인 사우대(史佑大, Chase C. Sawtell)이 세상을 떠난 후 1910년 1월 안동선교부 선교사로 파송되어 1952년 한국을 떠난 권찬영(權燦永, John Y. Crothers) 선교사와 그 동안 안동지역에서 사역한 선교사들과 함께 오랜 세월 동역한 안동지역 교회의 리더였다. 김광현 목사는 일본 고베중앙신학교에서 유학 후 부산 초량교회를 섬기다가 1943년 1월 안동교회 7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후 당시 안동 주재(駐在) 선교사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통해 누구보다 안동 초기 선교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는 분이었다. 김목사는 9년 전인 2006년 12월 14일, 93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는데, 안동교회 80년사는 그의 기억이 생생할 때 쓰여진 책이다. 특히 안동교회 80년사에 기록된 안동선교와 안동교회의 초기 역사는 안동교회의 당회록, 제직회의록, 세례·학습명부, 경북노회록, 그리고 경안노회록을 기초로 김광현 목사가 안동선교 시작부터 함께 했던 여러 선교사들로부터 전해들은 내용과 자료들을 첨가한 공식적인 문서로써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안동교회의 예배장소는 임시 예배소까지 쳐서 여섯 번에 걸쳐 옮겨졌다. 첫 번째 예배처소는 1909년 8월 둘째 주일, 최초의 교인 8명이 창립예배를 드린 곳인 대석동 129번지로 옛 대석상회가 위치한 기독서원이었고, 두 번째 예배 장소는 1910년 선교사들의 거처했던 임시주택으로 안동교회 교육관 자리의 골기와 한옥(韓屋)이었으며, 세 번째의 임시 예배장소는 선교사들이 사택 건축을 위해 선교사들이 매입하여 잠시 거쳐하였던 구(舊) 교도소 자리에 있던 기와지붕 건물이었다. 네 번째 예배장소는 1910년에 건축된 안동시 광석동 214번지에 소재한 ‘ㄱ’자형의 16칸 크기 예배당이었다. 다섯 번째 예배 장소는 현재 100주년 기념관에 위치했던 2층 목조 함석지붕의 건물로 1914년 2월 준공되었다. 여섯 번째 예배처소는 현재도 주(主)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는 석조 예배당으로 1936년 초여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37년 4월 6일에 준공되었다. 본 소고는 1909년 8월 8일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된 안동교회의 예배처소 위치와 예배당의 변동을 연구함으로써 안동교회의 내·외적 변화와 부흥, 선교부의 정착과 선교사의 역할 및 생활상, 그리고 초기 안동지역의 복음화 진행과정을 살펴보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1. 첫 번째 예배처소 : 기독서원(基督書院) 100여 년 전 안동에는 성경과 기독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 존재했다. 서점의 이름은 기독서원으로 이 서점은 안동 최초의 근대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 80년사는 대구선교부의 안의와(安義窩, James E. Adams) 선교사가 서문 밖 초가 5칸을 사들여 기독서원을 개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독서원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교회 앞 도로 건너편 버스 정류장이 있는 대석동 129번지다. 당시 김병우(金炳宇)가 언제 안동지역의 매서(賣暑)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의와 선교사는 김병우를 기독서원의 매서로 활용했다. 하지만 기독서원의 정확한 개원(開院) 일자는 알 수는 없다. 다만 안동교회의 첫 예배가 기독서원에서 있었기 때문에 기독서원이 첫 예배일자인 1909년 8월 8일 이전에 개원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이 사실을 근거로 기독서원의 개원(開院)에 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1908년 9월 미국북장로회 선교회 정기 총회 이후 부산에서 열린 한국 선교 집행 위원회는 오월번과 그의 부인인 새디, 그리고 별리추 박사에게 안동의 새 지부 개설을 요청했고, 이들이 동의함으로써 안동선교부가 개설되게 되었다. 안동 주재(駐在) 최초의 선교사인 사우대(Chase C. Sawtell)은 1908년 12월 1일 대구를 출발해 안동에 도착했지만 1909년 11월 16일 장티프스로 별세하였다. 이어 1910년 상반기에 오월번과 별리추 선교사, 권찬영 선교사가 안동으로 내려옴으로써 안동에는 3명의 선교사가 주재하게 되어 완전한 선교부의 조직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안동의 기독서원을 위한 가옥구입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대구 주재 안의와 선교사에 의해 행해졌거나 안동선교부 주재 사우대, 오월번, 사우대 선교사 등에 의해 기독서원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모두 있을 것이다. 즉 안동에 선교부가 세워진 1908년 12월 이전이라면 안동이 대구선교부 관할이었기 때문에 안의와 선교사가 기독서원에 사용될 가옥을 구입했을 가능성이 크며, 1909년에 접어들어 기독서원이 개원되었다면 안동선교부에 의해 시작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에 의하면 안동에 교인이 증가하게 되자 대구선교부에서는 풍산교회 교인인 김병우를 매서인으로 하여 1909년 8월에 종교 서적을 파는 서점을 열게 했다고 증언한다. 사진 2는 안동교회의 첫 예배처소로 추정되는 기독서원 앞에서 성도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모임의 수나 모임 사람 대다수가 남성인 것으로 볼 때 남자성경공부반으로 추정되며, 첫 예배를 드린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때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초기 한국교회가 곳곳에 세워진 것은 각 지역에 세워진 기독서원에 속한 매서와 권서의 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 교회가 없는 산간지방이나 외딴 지역에 매서를 통해 전해진 성경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매서들은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장소를 마련하고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이것이 훗날 교회로 발전했음을 여러 초기 자료들은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1909년 8월 8일 안동교회의 첫 예배가 당시 매서인 김병우에 의해 인도되었다는 것은 당시로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안동교회는 거의 1년 동안 이 기독서원에서 예배를 드렸다. 첫 예배 후 1년이 지날 즈음 교인의 수가 70명을 초과하여 예배공간이 비좁아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어 기독서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음을 권찬영 선교사는 증언하고 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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