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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1)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정재순 목사 鄭在淳, 1878~1948) 1900년 초 어느 날 정재순 목사는 부해리(傳海利, H.M. Bruen) 선교사와 만났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났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정재순이 20을 갓 넘은 나이에, 경산 어느 마을에서 부해리 선교사를 만났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이후 정재순은 단 한 번도 교회를 떠난 적이 없이 초창기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교회 안에 세워진 기독교학교의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며,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함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는 일을 했다. 조사로 여러 교회를 섬기던 정재순은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던 1914년, 그가 섬기고 있던 대구 신정교회(현 대구 서문교회)에서 신정교회 초대장로로 임직하게 된다. 이후 1915년 평양신학교 제8회로 졸업한 후 목사임직을 받고 신정교회 첫 한국인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초임지인 대구 신정교회에서 정재순 목사의 사역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역이었다. 여자 청소년을 위한 야간 학교를 개설했고, 대구 3·1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1922년 6월 안동으로 사역지를 옮긴 후, 그는 전도중심의 사역을 통해 안동 땅을 기경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계속적인 그의 관심사인 학원선교를 위해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학교를 설립했으며, 교회분립을 통해 안동 땅의 부흥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안동을 떠난 이후 대구를 근거지로 둔 정재순 목사는 본격적인 복음전파자의 길을 걸었다. 청도, 영천, 경산, 달성, 고령, 월성, 경주, 영일, 칠곡, 상주, 군위, 선산, 의성군 등에 28개 예배처소를 개척했다. 이때 그의 부인인 손주안 사모는 함께 교회를 개척하고 함께 성도를 섬기고 돌봄으로써 그의 소중한 동역자가 되었다. 정재순 목사는 60세에 그의 첫 담임 목회지인 대구 신정교회로 돌아가 사역을 마무리했다. 정재순 목사는 목회 전반전과 후반전을 똑같은 열정과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불꽃을 불사르며 살았을 뿐 아니라 성도들의 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믿음의 사람이었다. 1. 목사 임직 이전의 인간(人間), 정재순 정재순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며 극히 단편적인 것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 교회역사 주영연구소장 이교남 목사의 연구에 의해 2013년 새롭게 밝혀진 정재순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부해리(傅海利, H.M. Bruen) 선교사 정재순은 1878년 5월 24일, 경북 경산군 남천면 신기동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정진호, 모친은 김소사의 2남 4녀 중 장남이며, 부인은 손주안이다. 정재순은 외동아들을 두었는데 아들은 정원조, 자부는 손기순이며, 그의 후손은 현재 대구에서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정재순 가문은 당시 여느 가문처럼 유학의 집안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우고 한학을 수학하며 유학을 따르는 집안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묘는 칠곡에 있었는데, 1982년에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재순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할 때 교인으로 생존한 성도들이 기억하고 있는 정재순 목사는 천성이 어질고 중후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성도들은 후덕하고 인정이 많은 교육자요 목회자인 그를 신앙과 인격 모든 면에서 존경하며 영적 리더십에 순종했을 것이다. 정재순 목사는 교인들을 포함한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주는 주의 종이었다. 2. 선교사를 만나 회심(回心)한 사람, 정재순 유교가 뿌리 깊은 가정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정재순은 처음에 기독교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증손자에 따르면 정재순이 선교사를 구타하고 쫒아내려고 선교사를 찾아갔다가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전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정재순 목사는 부해리 선교사를 찾아갔을 때 선교사의 사냥개가 빵을 다리 위에 놓고 주인이 먹으라는 명령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개도 기도하고 난 후에 밥을 먹는데, 사람인 나는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지 않겠는가?”하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1900년 초 대구·경북 지방은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이 지역을 정해 선교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 부해리 선교사, 안의와 선교사, 방위렴 선교사는 각각 경북 서부지방, 동부지방, 북부지방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선교사들은 다른 지역의 선교와 교회에 어느 정도는 관여하고 있었다. 정재순의 거주지인 경산 사월교회는 1898년 4월 안의와 선교사가 설립했으며, 부해리 선교사와 맹의와 선교사가 뒤이어 2대, 3대 담임 목사를 맡았다. 부해리 선교사는 1905년 사월교회에 부임했지만, 이미 1903년 이전에 경산을 방문해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따라서 정재순은 1903년 이전에 부해리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회심했다고 보여진다. 3. 어린이 기독교학교의 교사(敎師), 정재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정재순은 당시 어린이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교사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정재순의 증손자의 증언에 따르면 1905년 그는 경산 사월교회가 문을 연 계동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계동학교의 초대교사는 정재순, 전기식, 문사인 제씨였다. 계동학교는 오늘날 초등학교 수준의 학교로 신교육에 힘쓰며 인재양성에 앞장섰다. 이후 1910년경 경산에서 대구로 온 정재순은 대구 남성정교회가 운영하는 기독교 초등학교인 희도보통학교 전신(前身) 대남소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당시 교회 중심으로 세워진 기독교 학교들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백성들에게 복음 뿐 아니라, 근대교육의 통로로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정재순은 경산에 이어 대구에서도 기독교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다음세대의 기독교 교육에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인 다음세대 신앙교육에 관한 애정은 안동교회에 부임한 이후 곧이어 기독교 학교를 설립한 것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1911년 개교한 계동학교를 포함한 사월교회의 예배당과 종탑, 교회 정문과 화장실을 기억을 되살려 추정하여 그린 사진이다. 종탑을 사이에 두고 예배당과 계동학교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아마 계동학교를 통한 다음세대의 교육을 그만큼 중시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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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지를 찾아서(2)-엄주선 강도사경북 유일 6.25전쟁 순교자 ▷ 엄주선 강도사 순교 이야기 엄주선 강도사는 1919년 5월 23일 경북 의성군 다인면 봉정동에서 출생했으며, 1935년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부친과 함께 고향 다인면 봉정동에서 예천 상락교회까지 걸어서 믿음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일제의 수탈로 부친과 함께 만주 봉천(현, 심양)으로 건너가 봉천에 있는 서탑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를 섬기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엄 강도사는 대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을 위한 소명감에 불타 1949년 12월 장로회신학교(현,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제43회), 1950년 5월 목사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1950년 12월 청송 화목교회를 시무하다가 1951년 2월 17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홀로 기도하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공산군 패잔병들에 의해 납치를 당했다. 엄 강도사는 함께 납치돼 끌려가던 내복 차림의 신중건 씨에게 대한(大寒)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입혀주는 사랑을 베풀었다. 또한, 엄 강도사는 인민군 10사단장 김두봉에게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했으며, “예수를 안 믿겠다고 약속하면 죽이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회유를 거절했다. 결국, 엄 강도사는 춘산면 옥정동(바랑골)에서 죽창으로 19군데를 찔린 채 순교를 당했다. 이후 공산군이 퇴각하자 화목교회 박치환 장로, 양재관 장로, 엄규영 영수(부친)가 사체를 찾아냈으며 박도선, 양원석, 김상정 집사 등이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 청송군 화목교회로 운구하여 경북노회 순교자장(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 엄주선 강도사 순교사적지 지정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는 지난 2012년 5월, 엄주선 강도사의 숭고한 사랑과 순교 정신을 기리고자 의성군 춘산면 순교지와 청송군 현서면 순교테마공원을 한국기독교사적지 10호, 10-1호로 각각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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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어디까지 가봤니? 울진 야야[野夜]놀자!울진군은(군수 전찬걸) 가족 및 친구 연인 등과 함께 즐기고 체험하는 ‘2018 야간관광상품 울진 야야(野夜)놀자’를 6일부터 7일과 9일까지 3일 동안 운영했다. 울진 야야놀자 사업은 지난 1월 경북도 야간관광상품 공모 사업에 응모하여 최종 선정된 사업으로 울진의 자연환경과 관광지 등을 활용하여 울진군의 매력적인 밤을 밖에서 보낸다는 의미로, 경상도 사투리로 친구나 친한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이를 통해 울진관광의 긍정적 이미지 제공한다는 뜻이다. 3일에 걸쳐 총 120여명이 참가하는 이번 투어에서는 울진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떠오르는 후포 등기산 스카이워크를 비롯 월송정 등 울진의 주요 관광지를 체험하고 울진은어다리에서 버스킹 공연 등 다채로운 일정으로 진행 되었다. 이번 울진 야야놀자에는 전체 1,000여명이 응모하여 사연을 바탕으로 선정하였으며, 인근 대구 뿐만아니라 서울, 부산 지역에서도 참가하는 등 앞으로 울진군 홍보와 외부 관광객들 유치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금용 문화관광과장은 “문화예술 활동과 연계하는 체험 및 다양한 관광상품을 개발하여 전국의 관광객들이 울진에서 몸과 마음을 힐링하고 머물러 쉴 수 있는 체류형 관광도시를 만드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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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수당 어떻게 쓰시나요…사진 공모전보건복지부는 10월 10일부터 11월 5일까지 ‘아동수당 사진 공모전’을 개최한다. 지난 9월 21일 아동수당 첫 지급에 따라 실제 아동수당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사진으로 사례를 공유하고 아동수당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려는 취지다. 아동수당 홈페이지. 공모전에는 아동수당을 수령한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아동수당 홈페이지(www.ihappy.or.kr)의 이벤트 참여 게시판에 간단한 사연과 함께 아동수당을 활용하는 단란한 가족 사진 등 주제와 관련된 사진을 올리면 된다. 참여자 중 4개 부문별 15명, 총 60명을 선발해 5만원 상당의 모바일 상품권을 지급한다. 당첨자는 11월 16일 아동수당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할 계획이다. 한편, 9월말까지 0~5세 아동 총 195만명에게 아동수당이 지급됐다. 9월 30일까지 신청한 사람 중 소득조사 미완료로 9월 아동수당이 지급되지 못한 경우 지급여부 확정 시 10월에 9월분까지 소급 지급된다. 성창현 복지부 아동복지정책과장은 “9월 첫 지급된 아동수당이 우리 아동들에게 어떻게 활용됐는지를 사진을 통해 국민과 공유하고자 한다”며 “이를 통해 보다 많은 국민이 아동수당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의미를 함께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문의: 보건복지부 아동복지정책과 044-202-3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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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4‧끝)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대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1. 이대영, 사역을 통해 일본에 저항하다 3·1운동 이후 민족혼을 배우기 원했던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나라 기독교 청년운동의 출발이자 상징이 된 기독청년면려회는 1921년 2월 5일 이대영 목사가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교회를 섬길 때 안동교회에서 최초로 조직되었다. 면려회에 가입한 청년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봉사했으며, 복음을 들고 전도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고, 헌신을 다짐하는 예배 순서를 가졌다. 또한, 야간학교를 개설했으며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 농촌사업 등 범국민운동을 다각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대영 목사가 1921년 안동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이런 성격을 갖고 있는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은 비록 그가 목회자였지만 어떤 정신을 갖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927년에 준공된 선도당. 선교센타로 이대영 선교사가 예배 인도와 성경 교육을 했다. 이와 같은 이대영 목사의 대일관(對日觀)은 산동반도에서 선교하던 시절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약 10여 년 동안 이대영 목사와 동역했던 방지일 목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당시 일본교회는 일제치하에 있던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선교에 힘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인 목사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면서 함께 선교하자고 했고, 이대영 목사는 ‘우리가 너희 마루는 닦아 줄 수는 있지만 목사로서는 함께 못 한다’고 거절했다. 이후 일본 목사에 의해 고발되어 일본경찰에게 밤새도록 조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 억울해서 이대영 목사와 손을 잡고 통곡하며 운 적이 있다.” 이대영 목사는 일제의 압제 하에 있는 조국을 위해 무력 투쟁은 할 수 없었지만 조선의 국민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목사로서 최소한의 저항정신을 갖고 드러내었던 것이다. 12. 이대영, 일평생 기도의 사람으로 살다 이대영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의 은사가 있었고, 한 번 무릎을 꿇으면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던 기도의 종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5시부터 9시나 10시 까지 계속해 기도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이 목사와 아침 식사를 할 수 없었으며, 점심이나 저녁식사만 함께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사역을 시작할 때 반드시 기도로 시작할 정도로 기도의 사람이었다. 특히 ‘성령을 충만히 받자’는 설교에서 이대영 목사는 중국 화북신학교 교장 가옥명 박사의 말을 인용하여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성령의 능력이 많고, 기도를 적게 하면 성령의 능력이 적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성령의 능력이 없다.” 누구보다 기도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영 목사는 쉬지 않고 기도했으며, 그의 사역 역시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는 기도의 사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13. 이대영,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인 김영옥을 만나다 이대영 목사는 1921년 1월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고시위원 중에는 안동교회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대영의 목사 임직에 김영옥 목사가 깊이 관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목사 임직 후 1달도 경과하지 않은 1921년 2월, 이대영 목사는 김영옥 목사 뒤를 이어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칭따오 신의로에 있는 이대영 선교사 사역 병원과 학교. 그러나 이대영 목사는 이때 김영옥 목사를 처음으로 만난 것이 아니다. 훗날 김영옥 목사의 손자인 김형태 목사가 결혼식 장소를 부탁하기 위해 승동교회 이대영 목사를 찾았을 때 그는 자신이 김영옥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음을 김형태 목사에게 밝혔다고 한다. 이처럼 김영옥 목사는 이대영 목사의 세례와 목사 임직에 관계가 있었으며, 후에 1957년 9월 그의 손자 결혼식 주례를 이대영 목사가 승동교회에서 함으로 그 긴밀한 관계가 이어졌던 것이다. 14. 이대영, 중국을 떠나 한국교회를 섬기다 이대영 목사는 첫 번째 담임사역지인 안동교회에서의 14개월, 1948년 가족을 남겨둔 채 상해를 거쳐 귀국함으로써 두 번째 사역지인 중국 산동에서의 33년을 마치고 마지막 사역지인 서울 승동교회에 67세인 1952년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3년 후인 1955년 위임목사가 되었다. 1955년 4월 7년 동안 중국에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귀국하였고, 총회는 선교사역 30주년 기념예배 및 환영회를 개최하여 주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1956년 9월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4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신앙의 대선배로서, 인격자로서, 또한 총회장으로서 이대영 목사는 은혜롭게 회의를 진행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1959년 장로교단 분열 시에 이대영 목사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승동교회에서 개최된 제59회 총회에서 교단분열의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교단 분열의 여파는 승동교회의 분열로 이어졌고, 이후 4년 동안 계속된 분쟁으로 70세가 넘은 이대영 목사는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분쟁이라는 난제를 잘 마무리 하고 안정을 찾은 이후 1968년 11월 2일 만 81세로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였다. ▲본국에서 개회된 장로교 총회에서 선교보고를 하기 위해 선교지인 산동성을 떠나기 전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결론 이대영 목사는 2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61년 동안 묵묵히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감당한 신실한 종이었다. 그의 신앙여정은 핍박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집안의 핍박을 피해 흥해에서 목회자로서 훈련을 받은 그는 결국 고향인 예천 금곡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이 되었고, 여러 교회의 전도인과 조사로 사역하다가 평양신학교를 마친 후 목사안수를 받고 안동지역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의 제2대 담임목사로 사역하였다. 비록 14개월이라는 짧은 시무 기간에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나나낸 뛰어난 목회자였다. 특히 그는 거룩한 비전을 쫓는 순종의 종이었다. 1922년 총회의 부름을 받고 중국 산동반도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한인들을 돌보았던 탁월한 리더였다. 중국이 공산화된 후 선교사역을 중단하고 철수한 후 서울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41회 총회장으로 교회와 총회를 섬긴 영적 거인이었다. 이대영 목사는 넓은 포용력이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뿐아니라 중국에서도 많은 이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었다. 또한 재중동포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애국자였다. 그는 때때로 오늘 해야 할 것과 하지 못할 것을 용기 있게 일본인 앞에서 증언했다. 그 결과 일본 경찰에 여러 날 동안 취조를 받아야 했다. 또한 그가 말씀을 전한 마을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겼던 안동에서 어린이, 청년, 그리고 장년의 부흥이 일어났다. 중국 땅에서도 그가 섬겼던 중국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성장하고, 교회는 든든히 서 갈 수 있었다. 이대영, 그는 쉬지 않고 믿음으로 간구하는 기도의 종이었기 때문이다. 이대영 목사는 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예수님을 위해 헌신했던 하나님의 종이었다. 믿음의 선배인 그가 우리 마을, 안동지방에서 출생하고, 안동에서 교회를 섬겼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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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3)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9. 이대영, 중국선교를 향한 부르심에 순종하다 이대영 목사는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교회에 충성을 다하던 중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국의 부름을 받고 중국 산동 반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1913년 한국교회 최초로 해외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목사는 중국 산동지방 선교사로 파송된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현지 부적응과 건강문제로 1917년 귀국하였다. 위기에 처한 선교를 위해 총회는 1917년 홍승한과 방효원을 산동에 다시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1918년 박상순, 1922년 이대영, 1931년 김순호, 1937년 방지일을 산동에 파송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초기에 파송된 선교사는 이대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북출신이었다. 따라서 이대영은 영남지역에서 세계에 파송한 첫 선교사인 것이다. 이대영 목사는 우선 가족을 두고 홀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하였다. 평북노회 여전도회는 이대영 선교사의 선교비를 후원함으로써 선교에 동참하였다. 그는 래양에 도착한 후 10개월 동안 언어공부와 현지적응에 열중했으며, 이듬해인 1923년 4월 즉묵(卽墨)을 선교지로 정하고 한국을 떠나 중국에 도착한 가족과 함께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중국선교에 헌신하고자 중국 교역자 모임에 참석할 뿐 아니라 경안노회에서 이명하여 중국 산동성 중회기독교회 교동(嵺東)노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현지인과의 이질감을 불식하기 위해 항상 중국인 옷을 입고 중국인들과 더불어 생활했으며, 특히 표준중국어와 산동어를 익혀 중국말로 설교할 수 있을 즈음에는 왕성한 전도와 교회개척에 전력투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회의 심각한 재정압박과 선교지의 어려움으로 선교사의 소환 문제가 총회의 중요한 안건으로 상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시 귀국한 이대영 선교사의 끈질긴 설득으로 1925년 9월 제14회 총회는 이대영 선교사의 연임을 결정했다. 이에 힘을 얻은 이대영 목사는 즉묵으로 돌아가 조선인 교회를 돌보며 1927년 8월 즉묵예배당과 전도기관 건물을 준공할 수 있었다. 이대영 목사는 뜨거운 복음의 열정으로 교회개척과 돌봄 사역, 전도지 배부 및 순행, 매서사역, 강연 및 사경회 인도 등 즉묵, 궁가장, 박자, 오산위, 대인관, 지방, 풍성, 곽리 등 즉묵현 주변 8개의 지방교회들을 돌보았다. 또한 파송 받은 지 6년 동안 열심히 사역을 감당한 결과 1928년 11월 그가 속한 교동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되었고, 한국장로교회가 1923년 외국에 최초로 설립한 성경학교인 내양화동 성경학교 교장으로 사역하였다. 이대영은 선교사역을 총회에 보고하기 위해 가족을 남겨 둔 채 홀로 1948년 7월 일시 귀국했다. 하지만 총회를 마치고 출국을 기다리던 중 10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을 세우게 되어 중국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국내 중국인 교회인 중화기독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기도 했다. 그는 다시 중국에 선교의 문이 열릴 때까지 당분간 선교사 신분을 유지한 채 국내에서 순회사역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54년 4월 중국에 남아있던 가족이 무사히 귀국하였고 영락교회에서 이대영 선교사 선교 33주년 기념 및 가족 환영예배가 성대히 거행되었다. 10. 이대영, 선교지의 동역자와 함께 전력투구하다 이대영은 동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고 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총회에서 파송한 여러 선교사들과 동역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1937년 파송되어 산동에 온 방지일 목사와 무려 10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중국선교에 전력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후에도 이대영 목사는 방지일 목사와 동역을 통해 현지에 거류하고 있던 동포들을 도와 무사히 한국으로 귀환할 수 있게 했다. 이때 이대영 목사는 한국교민회를 조직하여 교류민 단장을, 방지일 목사는 교포중학교 교장을 하였다. 1913년 산동반도 선교가 처음으로 시작된 이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로부터 파송된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1919년의 교세는 예배처소는 6곳, 학교는 3개교, 49명의 세례교인, 학습이 40명, 평균 출석 60여명의 교회로 성장했다. 1922년 6월에는 이대영이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1923년에는 선천에서 일하던 의사인 주현칙 장로가 합류해 래양에 병원을 개설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늘어나고 사업이 확장되면서 산동선교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다. 1920년 래양에 새 교회당 건물을 마련했으며, 1921년부터는 래양에 성경학원을 설립하여 본토인 목회자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이대영 목사는 산동에서 사역할 당시 동역자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많이 줄 정 도로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성경학자로 교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반쉰청 목사, 행정가인 쇼요섭 목사와 동역함으로써 중국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갔다. 특히, 그는 현지인을 목회자로 영성하고 세우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 결과, 1929년에는 산동선교의 결실로 얻은 중국인 류수파(劉書法)가 목사로 장립되기까지 했다. 류수파는 방효원 선교사가 제로(濟魯)대학에 보내 공부시키고 목사로 키워 중국교회를 위해 동역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이대영 목사는 범순청 목사와 서로의 선교담당지역을 같이 돌보며 협렸했다. 이대영 목사는 현지인 리더와 동역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피선교지에서 주종의식을 가지고는 결코 복음의 확장성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현지인들을 교육하고 양육하여 현지인 리더십을 세우는 일에 누구보다 우선했고, 그 결과 산동지역의 교회들은 선교사들과 현지인 지도자들이 대등한 관계에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앞줄 왼쪽부터 반쉰청 목사, 쇼요섭 목사, 류수파 목사 뒷줄 왼쪽부터 이대영 선교사, 방효원 선교사, 박상순 선교사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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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제일교회, 추석맞이 환경미화원 위로행사경주제일교회(정영택 담임목사)에서는 지난 9월 20일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을 앞두고 아름다운 경주의 도시 미관 정비에 애쓰는 환경미화원들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하며 위로행사를 열었다. 올해로 16회째를 맞은 이날 위로행사에는 주낙영 경주시장을 비롯해 경주시 환경미화원과 제일교회 성도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어린이 재롱잔치, 위로의 노래 등의 공연이 이어졌고, 경주제일교회의 마음을 담은 소정의 기념품 전달과 식사 나눔 시간을 가지며 서로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경주제일교회는 평소에도 지역의 어려운 이웃과 소외계층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특히 2천년 고도 경주의 경관 조성을 위해 애쓰는 환경미화원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매년 위로행사를 갖고 있다. 주낙영 시장은 “어려운 근무여건 속에서도 아름답고 살기 좋은 경주를 만드는데 노력해 온 환경미화원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며, “가장 일찍 새벽을 여는 미화원의 노력이 역사문화관광도시 경주를 다시 찾고 싶은 도시로 각인시키는 데 큰 요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경주제일교회의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과 배려에도 깊이 감사드리며, 더불어 함께하는 행복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다 함께 노력해 주길 부탁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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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1)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887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출생한 이대영 목사는 시대를 앞서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 힘든 유학이 강한 마을과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혹독했다. 그는 더 이상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객지로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일정한 훈련을 거친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향으로 보내셨고, 뛰어난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 후 전도인, 조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기독청년면려회와 주일학교를 통해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갈 뿐 아니라 지역복음화와 교회 부흥을 선도했다. 이후 총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안동을 떠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 선교사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한 이대영은 그 땅에 머무는 동안 중국인들과 함께 중국인처럼 살았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선교를 포기하고 1955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이대영 목사는 33년 동안 중국인을 동족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서 산동반도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게 하였다. 그후 그는 오직 하나님 나라, 교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1968년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선배이다. 1. 이대영, 금당실 마을에서 출생하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손인 이대영은 1887년 4월 23일,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李裕成)과 김도혜(金道徯)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대영이 출생한 마을은 금당실로 불러졌는데 선교사가 동네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다. 이대영은 괴당교회가 설립될 당시인 1907년 경, 복음을 소개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과 함께 1910년 영일군 흥해면으로 이사했다. 그는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선교사로부터 신앙훈련과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후예로서 비록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품으셨고, 훗날 중국 땅에서 복음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이대영 목사의 가족사진 2. 이대영,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다 안동을 포한한 경북북부지역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93년 배위량 선교사에 의해서이다. 이후 1902년 3월에 안의와 선교사가, 1903년 봄에 방위렴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가 안동을 직접 방문해 복음을 전했다. 특히, 부해리 선교사는 1899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미국 북장로교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99년 10월 26일 대구에 도착, 초창기 대구·경북 지역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추방되기 까지 40여 년 동안 한국선교에 평생을 바쳤다. 부해리 선교사를 포함한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의 결과,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연회보고에 의하면 경북·대구 지역 7개 고을에서 12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1905년에는 20개 고을에 8개 교회, 2명의 세례교인, 19명의 학습교인, 79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이대영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로 나뉘어진다. 우선 박용규는, 1907년 경 이대영이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소개받고 예수를 믿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미 예천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인 나만기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복음을 들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이대영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당시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있던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부해리 선교사와의 역사적 만남으로 이대영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됐으며, 이후 전도인, 조사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한 이후 한국교회와 중국선교의 거룩하고 위대한 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3. 이대영, 경북 북부지역 전도인·조사가 되다 복음을 접한 뒤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흥해로 이사한 이대영은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인 전도인 훈련을 받게 되었다. 특히 대구선교부의 중심교회인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의 전신)에서 열렸던 겨울남자성경반에서 수 년 동안 수학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목회자로서의 전문적인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선교사의 지도와 신학훈련을 받은 이대영은 전도인으로 본격적인 전도사역을 하게 되었다.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훈련받은 6년 여 동안 이대영은 이미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고, 경북노회는 그를 유급 전도인으로 인정하고 복음전도사역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고향인 금당실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예천 신전교회를 왕래하며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오게 됨으로써 신전교회가 부흥했다. 신학 기초과정을 거친 이대영은 목사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는 당시 규정에 따라 목회자 수업을 위한 문답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경북노회에서 목사후보생고시를 치러야 했으며, 1916년 6월 대구남성정교회에서 개회된 제1회 경북노회에서 평양신학교 입학을 허락받았다. 신학 입학을 허락받은 후 처음으로 이대영이 섬긴 교회는 경주군 외동면 말방리의 장산(長山)교회다. 이 때 이대영은 전도인에서 조사신분으로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4. 이대영,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하다 이대영은 1917년 5년 과정의 평양신학교에 30세에 입학하여 목사를 위한 수학을 시작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 10살 난 아들 이 있었는데, 평양에서 공부하는 기간 동안 가족들은 섬기는 교회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대영은 혼자 기숙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생활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후 이대영은 신학공부의 적응을 위해 섬기던 장산교회를 1917년 사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18년 다시 부임하여 장산교회를 섬겼다. 평양신학교 졸업반인 1920년 이대영은 이만집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대구 남성정교회 조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이만집 목사는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된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조사로 청빙을 받은 이대영은 실질적으로 대구제일교회 전신(前身)인 남성정교회를 담임하게 된 것이다. 남성정교회는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교회로 이미 이 지역의 중심교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동년 12월 2일, 17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평양신학교 제14회로 졸업하고, 이듬해인 1921년 1월 12일 대구동산성경학원에서 개회된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 임직예식을 마친 이대영 목사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청빙허락을 받아 부임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1921년 6월 15일 개회된 제10회 경북노회에 정식 노회원으로 참석하여 본격적인 노회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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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4·끝)김 승 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영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9. 한국교회의 목사 대가족 · 명문가문을 이룬 사람, 김영옥 김영옥 목사의 아들 故 김은석 목사 김영옥 목사의 손자 故 김형태 목사 김영옥 목사 가문은 목사 대가족과 명문가문을 이루었다. 1대 김영옥 목사로부터 4대에 걸쳐 무려 9명의 목사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1대 김영옥 목사, 2대 김영옥 목사의 장남 김은석 목사, 3대 김은석 목사의 자녀인 김형칠 목사, 김형일 목사, 김형태 목사, 김형달 목사, 김형숙 목사, 4대 김형규 목사, 김대규 목사 후보생 등 4대에 걸쳐 9명의 교역자가 배출되었다. 김영옥 목사의 장남인 김은석 목사는 193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풍기성내교회(1909년 설립)를 담임으로 섬겼다. 김영옥 목사도 풍기성내교회 3대 담임목사로 섬긴 적이 있었는데, 부친의 뒤를 이어 그는 4대 담임목사로 5년 동안 풍기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성내교회를 사임한 후 일본 나고야 한인교회에 부임하여 나고야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목양했다. 하지만 1941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던 날 새벽, 나고야 민족주의 및 종교그룹 사건인 조선독립단사건에 연류 되어 일본 경찰에 검거당해 1년 넘게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1944년 8월에는 여운형이 중심이 된 건국동맹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르면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해방과 함께 출옥한 김은석 목사는 경북 문경으로 내려가 정치일선에 나섰다가 낙선한 후 다시 목회현장으로 돌아왔다. 그 후 김은석 목사는 자신이 여러 차례 감옥생활을 경험한 탓으로 수감자를 전도하는 사역에 헌신했다. 1956년 김천의 소년원 교화사로 시작하여 1966년 정년으로 퇴임하기 까지 10년을 수형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사명을 감당했다. 정년퇴임 후에 인천에 거주한 김은석 목사는 계속해서 인천 소년원생들의 선도에 힘쓰면서 별세하기 전 까지 25년 동안 교도소 전도에 온 힘을 다 쏟았다. 2대 김은석 목사 자녀들은 대부분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김은석 목사의 자녀는 모두 6남 1녀로 이중 5형제가 목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더욱이 외동딸의 남편인 사위까지도 목사였다. 장남인 김형칠 목사는 서울 신학대학교를 나와 부산노회장을 역임했으며, 2남인 김형일 목사는 고려신학교 출신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교를 거쳐 롱비치대학교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현지 한인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3남인 김형태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교, 피츠버그 대학교를 거쳐 연동교회를 섬겼다. 4남인 김형달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과 미국 풀러신학대학교를 거쳐 미국에서 외항선원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5남인 김형숙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를 졸업하고 미국 볼티모어 한인교회를 섬겼으며, 6째인 외동딸 김순자의 남편인 이성식 목사도 흑석동 교회에서 목회했다. 막내인 김형준은 연세대학교 신학과 출신으로 목사지망이었으나 전공을 경영학으로 바꿔 미국으로 건너가 장로로 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풍성한 3대와는 달리 4대에 와서는 1명이 목회자로 살고 있다. 장남인 김형칠 목사의 아들인 김형규 목사는 미국 퀸즈연합장로교회를 섬기며 목사의 길을 걸었다. 김형태 목사는 4대에 걸친 목사 집안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 대해 “목사는 다른 직업과는 달리 무언가 남다른 ‘어떤 소명의식’이 없어서는 안 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 고귀한 소명이 형제 모두에게 고루 나눠진 것을 우리 가문에 대한 하늘의 축복으로 믿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김형태 목사는 연동교회가 세워진 지 73년 후인 1967년, 연동교회 제5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볼 수 있다. 연동교회 출발에 큰 공(功)을 세운 조부 김영옥 목사(당시 조사의 신분)의 뒤를 이어 손자인 김형태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이다. 그는 1989년 조기 은퇴하기 까지 22년 동안 연동교회와 총회, 그리고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할아버지가 전도한 사람들에 의해 개척된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을 때 손자의 심정이 어땠을까? 아마 감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교회 130년 역사 가운데 다시 배출되기 힘든, 그러나 한국교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고 까맣게 잊혀진 최고의 명품 목사 중의 한 분인 동시에 그의 후손들은 신앙의 명문가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10. 아들과 손자를 돌보고 그의 사역을 도운 할아버지, 김영옥 김형태 목사에 따르면 조부인 김영옥 목사는 매우 가정적인 분으로 8명의 손자를 친히 키우셨다고 기억한다. 부친인 김은석 목사는 교회 일이나 정치에는 열심이었지만 가정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에 조부인 김영옥 목사가 거의 모든 일을 맡아 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실제로 광복 후 김은석 목사가 건국운동을 위해 서울로 상경한 다음 김영옥 목사는 김은석 목사 가정을 인솔해서 문경으로 이사할 정도로 책임감이 강했다. 한편, 김은석 목사는 풍기성내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을 때 전임자였던 부친 김영옥 목사와 함께 6개월 여 동안 동역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김영옥 목사는 아들의 목회를 염려하면서 그의 목회사역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 결과 풍기성내교회는 안정적으로 리더십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었다. 또한, 김영옥 목사는 마지막 목회지인 의성 삼분교회에서도 장손인 김형칠이 경성신학교를 졸업하고 삼분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시작할 때 장손의 목회를 도왔다. 이듬해에 발발한 6 25 한국전쟁으로 피난 갔다가 1951년 삼분으로 돌아온 후 동년 5월 10일 김형칠이 목사 장립을 받았다. 장손이 목사로 임직했을 때 조부인 김영옥 목사는 얼마나 기뻤을까? ▲1941년 안동교회 본당인 석조예배당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김영옥 목사는 당시 안동교회 6대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다. 중앙에 김 목사 부부와 장남 김은석 목사 부부, 그리고 장손 김형칠 목사 및 8남매를 볼 수 있다. 한국 땅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84년 4월 5일이다. 복음의 씨가 뿌려진 지 67년이 경과한 1951년 5월 10일, 직계로 3대 목사 가정이 탄생한 것이다. 장손이 목사가 된 후 김영옥 목사는 1952년 3월 27일 81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당시 삼분교회 당회장 직분으로 세상을 떠나시는 날 아침 교회 장로들을 사택으로 불러 “간밤에 하늘에서 불자동차(?)가 내려왔는데 빈자리가 하나 있어 아마도 내가 탈 자리인 것 같더라. 내 어린 손자 형칠 전도사의 목회를 잘 도와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장로들이 나간 후 자리에 누우셔서 조용히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셨다. 마지막 하늘나라에 가는 순간까지 김영옥 목사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책임을 감당한 자애로운 분이었다. 김영옥은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교회에서는 선배목사요 전임교역자로 후배목사와 후임교역자에게 교회를 잘 섬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믿음의 선배였던 것이다. 결론: 거룩한 흔적을 남긴 위대한 사역자, 김영옥 목사 김영옥 목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일평생 동안 복음전도와 교회 목회에 전념한 목회자들의 롤 모델(Role Model)과도 같은 분이었다. 따라서 경상북도 북부지역과 그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초대담임인 김영옥 목사는 당연히 존경받아야 하고 기억되어야 할 믿음의 선배인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단 한 번도 예수님을 실망시키지 않았 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았다. 교회에서는 매서인으로, 조사로, 영수로, 장로로, 그리고 목사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또 헌신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또한 하나님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 결과 일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품에 안겼다. 김영옥 목사는 일제 강점기, 광복, 건국, 6·25 전쟁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의 전 생애는 믿음 없이는 결코 설명될 수 없다. 김영옥 목사는 교회에서는 사랑의 목자였고, 지역 사회와 국가를 사랑한 공의의 지도자였다. 날마다 경건한 신앙생활을 통해 얻은 영적 통찰력과 지도력은 교회나 사회적으로나 지도자가 되게 했다. 더욱이 그는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모 교회와 같은 교회들을 든든히 세움으로써 교회가 지역사회의 중심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했다. 그가 섬긴 안동교회, 사월교회, 포항제일교회, 경주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 풍기성내교회 등은 설립된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역교회의 중심교회로서 영적인 리더십을 갖고 있는 동시에 지역사회를 잘 섬기는 교회로 소문나있다. 김영옥 목사에게는 교회를 섬기는 일이나 국가를 위한 일이 모두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긴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요 위험을 무릎 쓰고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사회 지도자요, 독립운동가요 애국자였다. 그 결과 그의 자리는 늘 고난의 자리였지만, 동시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자리였던 것이다. 우리는 충성스럽게 거룩한 사역을 감당한 김영옥 목사와 같은 믿음의 선배가 그리운 혼란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 누구보다 교회를 사랑하고 민족과 국가를 사랑했던 김영옥 목사와 그의 거룩한 사역이 그리운 시간이다. 한국교회가 김영옥 목사의 믿음과 혜안(慧眼), 그리고 용기와 끈기를 기초로 한 거룩한 삶을 믿음의 표상으로 삼을 때 거룩한 교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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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군, 관광객 30만 명 방문 기념 이벤트 실시울릉군은 2일 도동항 여객선터미널에서 울릉군수와 관계공무원이 참석한 가운데 울릉도 관광객 30만 명 방문 기념 이벤트를 실시하고 30만 번째 관광객에게 특산품 및 꽃다발을 증정했다. 이날 30만번째 관광객은 경기도 부천시에서 온 이영순씨(64)가족으로 2박3일 일정으로 자녀들과 함께 효도관광 차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했다가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 더욱 뜻깊은 여행길이 되었다. 한편 아차상격인 299,999번째 관광객과 300,001번째 관광객 또한 경기도 부천시에서 온 김선욱(68), 이현미(41)씨가 선정되어 깜짝 행운의 기쁨을 누렸다. 이들 에게는 축하 꽃다발과 함께 울릉도 해풍이 길러낸 산채나물 세트를 비롯해 지역 관광시설물을 무료 이용할 수 있는 통합이용권이 제공됐다. 울릉도를 방문한 관광객 수는 2011년 30만명을 훌쩍 넘어선 이래 2년만인 2013년 41만명을 돌파하였으나 2014년 세월호,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주춤하였지만 2016년 이후 꾸준한 증가세를 이어오고 있다 2018년 울릉군 누적 관광객은 6월 지방선거와 7~8월 유례없는 폭염 등 전국적인 관광 불황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35만명 돌파를 위해 순항중이다 이런 성과의 배경에는 독도를 자국 영토로 명기한‘2018년판 외교청서’발간 및 14년 연속 일본 방위백서 등을 통한 지속적인 독도 주권 훼손행위에 따른 ‘범국민적 관심’과 ‘전국민 독도 밟기 운동’, ‘여객선 복수노선 취항’, ‘군차원의 다각적인 홍보 활동’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김병수 울릉군수는 “2018년 울릉을 방문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며“연간 관광객 35만을 넘어 50만을 목표로 전천후 대형여객선 유치, 울릉공항건설, 울릉일주도로 및 울릉사동항 2단계공사 등 대형 국책사업의 차질없는 완공을 통한 관광인프라 개선에 전 행정력을 집중해 대한민국 관광대島 울릉을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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