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3)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5) 김승학 목사 논문 연재(5)-김점향 권사(3)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 (1907~1998) 목차 1. 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아기 2. 믿음의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결혼한 여성 3. 안동 3·1 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든 어린이 4. 여자성경학교에서 공부한 교회의 재원(才媛) 5. 성전건축을 위해 쌀 한가마를 헌금한 가정 6. 안동교회 첫 권사 3인 중 한 명 7.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산 증인(證人) 8. 개척교회를 적극적으로 도운 여성 9. 여교역자 복지의 효시인 경안성로원 첫 원장 10. 90년 동안 안동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7.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산 증인(證人) 안동교회는 첫 예배를 드린 후 부인전도회가 조직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3년 2월 7일 여전도회가 조직되었고, 1년이 지난 1914년에 다비다회란 이름으로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다가 수개월 후 당회의 허락을 받아 정식 여전도회로 발족했다. 인근 교회들에 화제 거리가 될 정도로 안동교회 여전도 회원들은 전도와 봉사에 적극적이고 열성적이었다. 특히 매주일 마다 회원들끼리 우승을 겨룰 정도로 회원 전원이 열심히 활동했다. 당시 여전도회 회원 자격은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여성이 아니라 세례 받은 여성에 제한했다. 자격을 갖춘 성도들이 참여케 함으로써 처음부터 질(質) 높은 여전도회가 되게 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점향을 키운 외조모 김남홍은 안동교회의 초대교인으로 여전도회 활동에도 열심을 낸 여성이었다. 아마 김점향은 외조모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거의 일평생 안동교회 여전도회에 헌신한 김점향 권사는 1920년대 안동교회 여전도회 회원이 30~40명 정도 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때 중심회원은 원홍이, 원화순, 김남홍, 정선희, 이인홍 장로 모친, 장경영 권사의 모친과 고모 등 제씨였음을 김점향은 기억한다. 이들은 본래 여전도회 목적대로 일상에서 개인적으로 전도하는 일에 힘을 쏟았고, 이들의 전도는 초기 안동지역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게 했다. 1928년 2월 19일 안동교회에서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가 창립되었다. 그러나 이미 안동선교부는 경안노회 경내의 여전도회 회원들을 위한 사경회를 1917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었다. 사경회는 처음에 교회 단위로 실시되다가 지역 내 여러 교회들이 연합해 연합사경회로 모이게 되었고, 이것을 도사경회라고 불렀다. 이런 배경 속에서 안동지역의 첫 도사경회는 1917년 1월 21일에 열렸는데, 강사는 이희봉 목사와 맹의와 선교사였다. 이 때 모인 수는 남녀 합하여 230명 정도나 되었다. 경안노회 여전도회는 안동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되었다. 당시 발기인은 권애라 선교사, 안동교회 김정숙 전도사, 안동교회 성도 김향란, 김정희, 안주봉, 김순애 제씨, 그리고 권신희 집사와 김화석 은퇴 장로의 조모인 권순옥 집사가 포함되었다. 특히 초대회장에 김정숙, 회계 김정희, 부서기 김순애, 회계 권신희, 부회계 권순옥 등 임원 대부분을 안동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맡았다. 또한, 1929년부터 안동교회 임학수 목사가 고문을 맡음으로써 안동교회는 노회 내 여전도회 사역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10주년 기념사진. 맨 아래 왼쪽 네번째가 김점향 권사. 김정숙 전도사는 둘째줄 정중앙. 아래 두번째 줄 좌측에 4명의 여선교사.(왼쪽부터 매켄지 선교사, 권애라 선교사, 옥호열 선교사의 부인, 안두조 선교사의 부인) 1928년 2월 19일 창립된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제10회 총회 때 사진을 보면 당시 경안노회 여전도회를 이끌었던 여성 지도자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특히 여성선교사들이 보이는데, 그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헌신했다. 연합회는 비록 여성선교사들의 도움은 받았지만 지역출신 여성들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여전도회를 이끌어 갔다. 당시 22세인 김점향도 사진에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이미 연합회에서 책임 있고 적극적인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점향은 거의 일평생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를 위해 헌신했는데, 1932년부터 1956년까지 무려 24년 동안 연합회 서기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서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장은 단 일회에 그쳤다. 그는 겸손히 낮은 자리에서 여전도회를 섬긴 여종이었던 것이다. 당시 서기는 여전도회의 사업을 추진하고 살림살이를 챙겨야 하는 실무 책임자였다. 그는 지 교회의 여전도회가 본연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가 김점향은 1965년에 개회된 제37회 총회 때 제9대 회장으로 피선되어 오래 동안 얻은 노하우로 여전도회를 잘 섬겼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수면 밑에 감춰진 안동지역 교회의 실질적인 여성 지도자였던 것이다. ▲1965년 9월 13~16일 까지 있었던 여전도회대회 사진. 1965년 1월 제37회 경안노회여전도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된 김점향은 경안노회여전도회 회장의 신분으로 참석했다. 8. 개척교회를 적극적으로 도운 여성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설립된 이후 지역의 교회들을 개척하는 데 앞장서 왔다. 1933년 의성 뒷골교회, 1948년 봉화군 물야교회, 1949년 임동면 사월교회, 1952년 월곡교회를 개척했다. 또한, 1955년부터 안동교회는 김수만 장로와 김금이 전도사를 개척지에 파송하여 길안 지역 전도를 시작했다. 이 때 연합회는 이를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연합회는 또 1955년 제26회 총회에서 신덕교회 개척, 사월교회 전도인 파송, 물야교회 전도사 파송을 결의했다. 이어 1956년 제28회 총회는 도산교회와 관덕교회를, 제31회 총회는 임하교회를, 제34회 총회는 송사교회를, 제40회 총회는 신촌교회를 돕기로 결의했다. 여전도회연합회는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건축비 후원, 그리고 전도인 파송과 사례비까지 보조했다. 연합회는 지역을 복음화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개척한 이후에도 교회들을 든든히 세우는 데 사명을 잘 감당했다. 오랜 세월동안 연합회를 서기와 회장으로 섬긴 김점향은 당연히 여전도회의 도움을 통해 세워진 교회들과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김수만 장로가 길안 지역의 여러 교회를 개척할 때 연합회와 안동교회 여전도회에서 후원했다. 김수만 장로에 의해 송사교회와 금곡교회는 동시에 개척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송사교회를 개척할 때 김점향은 교인 4명과 함께 건축을 도왔다. 또한, 김점향은 길안의 금곡교회 개척을 여러 성도들과 함께 도왔다. 특히 그는 장남이 길안으로 발령을 받자 금곡교회에 나가도록 권면했으며, 다리가 불편한 김수만 장로를 금곡교회까지 이정자 집사(안동교회)의 남편이 지게에 지고 가도록 권면했다고 한다. 또 오산교회를 건축할 때는 너무 작은 예배당을 보고는 조금 넓은 공간의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오산교회가 준공된 이후 안동교회 여전도회는 계속해서 교역자의 사례를 일정 부분 책임졌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영국 앤드류 왕자, 어머니 발자취 따라 대한민국 선비의 고장을 찾다!▲경북도청에 방문한 앤드류 왕자(우)를 맞이한 이철우 도지사와 장경식 경상북도의회 의장(사진제공=경북도청)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의 차남 앤드류 왕자가 14일(화) 안동을 방문했다. 경상북도는 ‘영국여왕 안동방문 20주년’을 기념해 앤드류 왕자가 도청과 하회마을, 농산물 도매시장, 봉정사, 한국국학진흥원을 차례로 방문한다고 밝혔다. 앤드류 왕자는 이날 오전 경북도청에 도착해 이철우 경상북도지사, 장경식 도의회 의장, 김용삼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 사이먼스미스 주한영국대사와 함께 도청 정원에서 기념식수를 하고 안민관 1층 로비에 전시된 작품들을 관람했다. 앤드류 왕자의 안동 방문은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안동을 찾은 후 20년만이다. 당시 ‘가장 한국적인 곳을 보고 싶다’는 여왕의 뜻에 따라 안동 하회마을과 봉정사가 여왕의 방문지로 선정 되었으며, 당시 언론들은 여왕의 안동 방문을 ‘영국 신사’와 ‘한국 선비의 만남’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도청 방문을 마친 앤드류 왕자는 어머니가 방문한 발자취를 따라 여왕이 다녀가신 하회마을, 농산물 도매시장, 봉정사를 차례로 방문한다. 왕자는 하회마을 충효당에서 왕자가 다시 찾은 것을 기념해 ‘로열패밀리’가 찾은 길이라는 뜻의 「로열 웨이(The Royal Way)」표지판을 관람하고, 20년전 여왕의 생일상이 재현되는 자리에서는 여왕의 감사 메시지를 대신 낭독한다. 또한 농산물 도매시장을 방문해 실제 공판장의 경매현장을 관람하고 농민들을 격려한다. 이어 왕자는 봉정사로 이동해 이 곳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범종을 타종하고 대웅전을 관람한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가진 봉정사는 지난해 한국의 산지 승원으로 유네스코세계유산에 오른 곳으로 우리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2015년 유교책판을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여 우리의 전통기록문화유산을 세계화한 곳으로 유명한 한국국학진흥원을 방문해 장판각을 관람하고 성학십도 목판인쇄를 시연한다. 이철우 경상북도지사는 “이번 왕자의 방문은 여왕과 왕자가 대를 이어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아오는 매우 이례적인 방문”이라고 언급하며 “20년 전 여왕이 다녀간 로열 웨이(Royal Way)를 재현함으로써 안동을 국제관광지로 부각시키고 세계문화유산에 걸 맞는 경북의 역사문화가 대한민국 대표관광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도청 정원에서 기념식수를 하고있다.(사진제공=경북도청)
-
하회마을,‘전통에 전통을 더하다’섶다리 설치▲하회마을 섶다리.(시진제공=안동시) 안동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하회마을에 ‘전통 섶다리’를 설치한다고 밝혔다. 옛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고, 관광객들에게는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고자 계획됐다. 섶다리는 통나무와 솔가지, 흙, 모래 등 자연적 재료를 활용해 소박하게 짓는 전통방식의 다리이다. 하회마을 섶다리는 만송정에서 강 건너 옥연정사 앞 모래사장까지 길이 123m, 너비 1.5m, 수면으로부터 약 60cm 높이로 설치되며, 6월 초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특히,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방문 20주년 기념행사 기간 중 앤드루 왕자 방문일인 오는 14일 완공 예정으로 축하의 의미를 더할 예정이다. 이날 개통일에는 풍물, 국악 공연을 시작으로, 하회마을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첫 발자취를 남길 예정이다. 이후 꽃가마를 타고 가는 전통혼례 재현, 옛 장꾼 재현 등 전통문화 재현행사뿐만 아니라 작은 음악 콘서트, 버스킹 등 다양한 관광마케팅으로 섶다리를 활용할 계획이다. 무엇보다, 하회마을 섶다리는 오롯이 보존된 한옥, 하회마을 강변길, 휘돌아나가는 물길, 드넓은 모래사장 등 하회마을 특유의 고즈넉한 정취와 함께 예스러운 풍광을 자아낼 것으로 보인다. 다시없는 절경을 ‘인생샷’으로 남기려는 관광객이 전국에서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만송정에서 섶다리를 건너면 옥연정사를 지나 바로 부용대 정상까지 걸어서 관람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이전보다 약 30분의 시간을 절약하면서도 최적의 하회마을 관광코스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안동시에서는 강물의 수위는 높지 않으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사전 안전조치를 철저히 해 안전한 도보 관광이 이루어지도록 준비할 계획이다. 하회마을 섶다리는 옛 문헌에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에 따르면, 1828년 화공 이의성이 안동 도산서원에서 예천 지보에 이르는 낙동강 줄기의 명승지를 여덟 폭 병풍에 묘사했다. 그중 한 폭이 하회마을이다. 여기에는 종택인 양진당과 충효당 등 와가에 딸린 초가의 원형배치, 하회 16경에 나오는 강섶의 바위들, 특히 강촌마을의 교통수단이었던 나룻배와 섶다리(홍교)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다. 이 병풍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섶다리를 설치한 곳이 몇몇 있지만, 이번 하회마을 섶다리처럼 100m가 넘도록 설치한 예는 드물다. 하회마을의 한 주민은 “아직도 하회 주민들의 기억 속에는 땔나무 지게를 지고 기나긴 섶다리를 건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옛 섶다리를 다시 보게 된다니 설렌다.”고 했다. 정길태 관광진흥과장은 “섶다리는 마을 사람들이 농한기에 힘을 합쳐 만들고, 홍수에 떠내려가면 가을에 다시 만들었던 옛사람들의 공동체 정신의 산물이다.”며, “하회마을이라 전통의 의미가 더 남다른 섶다리에서 공동체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란다.”고 했다.
-
영국여왕 방문 20주년 기념, 앤드류 왕자 안동 방문▲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요크 공 앤드루 왕자 안동시에서는 1999년 영국 여왕 방문 20주년을 기념해 차남 앤드루(Andrew) 왕자가 오는 5월 14일 안동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4월 19일 한국을 국빈 방문해 “가장 한국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다며 안동 하회마을과 봉정사를 방문한 바 있다. 당시 여왕이 방문한 하회마을과 봉정사는 2010년과 2018년 나란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돋움했다. 안동시는 여왕이 다녀간 퀸스로드(Queen's Road)를 기념하고 알리기 위해 오는 5월 11일부터 15일까지 다양한 이벤트 행사를 개최하고, 이 행사에는 차남 앤드루 왕자가 퀸스로드를 따라 함께 할 예정이다. △ 대를 이은 영국 왕실의 안동 퀸스로드 방문 20년 전,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한국 방문은 1883년 한-영 수교 116년 만에 이루어진 영국 국가원수의 한국 방문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4월 21일 73세 생일을 맞이해 “가장 한국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다”는 뜻에 따라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했다. 당시 “세기의 진객(珍客)”을 맞이한 하회마을에서는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여왕의 기념 식수는 물론, 충효당 내당에서의 김치, 고추장 담그기, 농부가 소를 끌고 쟁기로 밭을 가는 이국적인 모습을 여왕에게 선사했다. 담연재에서 마련된 생일상에는 궁중에서 임금에게만 올리던 “문어오림”과 매화나무로 만든 꽃나무 떡 등 47가지의 전통음식을 준비하였고, 하회별신굿탈놀이를 관람했다. 당시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인 충효당에서 우리 방식대로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오른 모습에 대한 일화는 상당한 화제였는데, 서양에서 발을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하는 문화에 생소한 국내 기자들은 여왕이 신발을 벗는 순간 플래시 세례를 터뜨리는 외신 기자들의 모습에 어리둥절해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방문 당시(사진제공=안동시) △ 안동시, 퀸스로드를 활용한 국제관광도시 마케팅 나서 이어 안동농산물도매시장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사과 선별작업과 딸기, 참외, 단감 등 인근 지역에서 출하된 농산물 경매 장면을 지켜본 뒤, 다음 코스인 봉정사를 방문했다. 고려시대에 건축되어 현전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은 극락전 앞 돌탑에 돌멩이 하나를 올려놓고 “돌탑을 쌓았으니 복을 많이 받겠다”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당시 봉정사 주지스님인 문인 스님은 “일념만년거(一念萬年去, 좋은 생각 한 번이 만 년을 간다)”라는 글의 족자를 선물했다. 여왕은 방명록에 “조용한 산사 봉정사에서 한국의 봄을 맞다”는 글귀 아래 영어로 Elizabeth라고 서명하고 산사를 떠났다. 안동시에서는 여왕의 발자취를 기억하고자 2009년에도 10주년 기념 행사와 퀸스로드라는 명칭으로 홍보하여 왔으며, 20주년을 맞이한 2019년에는 왕실 가족을 초청하여 20주년 행사를 개최한다. 이번에 방한하는 앤드류 왕자는 20년 전 여왕이 방문했던 하회마을, 농산물도매시장, 봉정사를 방문하는 일정을 진행한다. 여왕이 다녀간 이후 하회마을은 매년 1백만 명 이상 관광객이 방문하는 관광지로 발돋움했고, 2010년에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국제적인 관광지로 변화했다. 이후 2015년에는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하고 있는 “유교책판”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봉정사는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안동시는 이러한 세계적인 문화유산 자원과 가장 한국적인 도시의 전통 문화유산을 활용하여 다양한 관광자원으로 개발해 나갈 방침이다. △ 20주년 기념행사, 어떻게 진행되나 5월 11일부터 15일까지, 이와 같은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명소인 하회마을과 봉정사를 중심으로, 20년 전 여왕이 다녀가고, 차남 앤드루 왕자가 대를 이어 방문하는 장소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행사가 준비된다. 우선 무엇보다도 차남 앤드루 왕자 환영 행사가 14일 하회마을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앤드루 왕자의 방문을 맞이해 20년 전의 생일상 재현과 여왕이 방문한 하회마을, 농수산물도매시장, 봉정사를 잇는 퀸스로드를 차남 앤드루 왕자가 그대로 밟는다. 또한 5월 10일과 11일에는 주말을 맞이해 하회마을을 방문한 관람객들을 위해, 가을 탈춤축제에서만 시연되는 “선유줄불놀이”가 시연된다. 또한 특별 장터와 체험 이벤트, 포토존 설치 등 여왕 방문 20주년을 맞이한 다채로운 이벤트가 마련된다. 또한 행사 이후에는 국내 대형여행사와 제휴를 통해 “퀸스로드 체험 코스” 여행상품을 만들고, 안동을 방문한 역사적 인물들을 재조명하는 “안동로얄관광포럼”을 개최하여 국내외에 홍보할 예정이다.
-
제7회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 개최발제자로 나선 김승학 목사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이 지난 5일 안동교회 100주년기념관 영곡아트홀에서 열렸다(사진=임만조 장로) 제7회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이 지난 5일 안동교회(김승학 목사 시무) 100주년기념관 영곡아트홀에서 개최됐다. 2012년에 시작해 올해 7회째를 맞은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은 안동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발자취를 복원하고 연구하는 사역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포럼은 이교남 목사(한국기독교 교회역사 주영연구소 대표)와 김대성 장로(안동교회 역사위원장), 안동교회 김승학 목사가 연구 발제를 맡아 진행했다. 안동교회 김승학 목사는 포럼에 앞서 “한국선교 130년을 넘어선 오늘, 이땅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선배들이 남긴 믿음의 역사가 점차 사라지고 있어 그들의 거룩한 발자취를 복원하고 정리하고자 한다”며, “초창기 안동지역 교회를 위해 수고한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을 연구함으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깨닫고자 한다”고 그 의미를 밝혔다. 첫 강의를 맡은 이교남 목사는 ‘오월번 선교사 연구’와 관련해 “1900년 입국해 서울과 원주 등지에서 사역하다 안동선교부의 발족과 함께 안동으로 와 복음화에 전념하던 중 1928년 61세의 나이로 장티푸스에 의해 순교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대성 장로는 ‘안동교회 석조예배당 연구’를 발제에서 “안동교회 석조예배당은 1937년 4월 6일 준공됐으며, 설계자는 일본에서 건축선교사로 활동하던 미국의 평신도 선교사 보리스(W. M. Vories)이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김승학 목사는 ‘사우대 선교사 연구’를 통해 “1907년 한국에 입국해 대구선교부에서 사역하다가 안동선교부 설립으로 부임했으며, 1909년 28세 나이로 장티푸스에 의해 순교함으로 그는 안동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린 최초의 선교사였다”고 설명했다.
-
포항생명의전화 창립 25주년, 생명존중운동 확산포항생명의전화(이사장 안인수, 원장 김영걸)는 지난달 15일 오후 6시 포항동부교회(담임목가 김영걸) 글로리아홀에서 창립 25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열고 생명존중운동을 확산시켜 나가기로 했다. ‘25주년 기념 감사예배 및 기념식’은 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 이종학 포항생명의전화 초대 이사장 및 내빈과 봉사자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예배와 기념식, 친교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김영걸 목사는 ‘주의 은혜’(고전 15:10)란 제목의 설교에서 “포항생명의 전화가 걸어온 25년의 시간을 돌아보면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을 것”이라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기념예배는 안인수 이사장(포항제일교회 장로)의 인도, 고창대 이사(장로)의 기도, 성경봉독, 설교, 손병렬 목사(포항중앙교회)의 축도 순으로 이어졌다. 이어 이수현 부이사장(장로)의 사회로 시작된 기념식 및 시상은 25주년 발자취 동영상 상영과 안인수 이사장의 인사말, 시상 순으로 진행됐다. 시상식에서는 김종렬 목사, 이종학 장로, 장기순 장로에게 감사패가 수여됐고, 20년 이상 봉사활동을 해온 권경애, 김애련, 류미경, 손병관, 이희정 봉사자에게 공로패가 주어졌다. 또 2000시간 이상 전화상담 봉사한 이태승 장로(포항중앙교회) 등 23명의 봉사자에게 근면상과 개근상이 수여됐다. 포항생명의전화는 1992년 개원 이래 자살 및 가정폭력 등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24시간 365일 위기전화(054-272-9191, 1588-9191)와 상담을 운영함으로 심리적 위기에 처한 시민들을 도왔다. 또 연 1회의 시민상담교실과 자원봉사상담원 양성교육, 청소년 자살 및 폭력 예방 캠페인 등을 펼치며 생명존중과 이웃 사랑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
제6회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 개최제6회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이 지난 15일 오전 10시 안동교회(김승학 목사) 100주년기념관 영곡아트홀에서 지역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 교회 역사에 관심 있는 이 등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안동교회는 2012년부터 ‘안동지역 기독교인물 세미나’ 개최를 통해 안동지역의 초대 기독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믿음의 선배들의 거룩한 유산을 발굴하고 찾아가는 사역을 지금껏 계속해 이어오고 있다. 이번 역사포럼은 개회예배를 시작으로 제1강은 한국기독교 교회역사 주영연구소 대표인 이교남 목사가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조사(助師) 사역에 관한 연구’에 대해서, 제2강은 와룡교회 강정구 목사가 ‘경상북도 북부지역 장로교 1세대 목회자 김인옥(金仁玉) 연구’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번 포럼은 한국 선교 130년을 넘어선 오늘,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선배들이 남긴 믿음의 역사가 거의 사라지고 있기에 그들의 거룩한 발자취를 복원하고 정리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특히 1893년 배위량 선교사에 의해 안동 땅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진 후 초창기 안동지역교회를 위해 수고한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을 연구함으로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깨닫기 위해 이번 포럼을 진행하게 되었다. 첫 번째 주제인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조사(助師) 사역에 관한 연구’는 초기 안동지역선교 역사에서 선교사들을 도와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을 주거나 직접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사역을 감당함으로써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전도에 일생을 바친 조사에 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김성삼, 김병우, 김익현, 엄응삼, 서화선, 권중한, 박영화, 강병주 등 수 많은 조사들은 선교사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험지를 방문,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본 결과 빠른 시간 내에 이 땅에 교회들이 세워지고 부흥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주제인 ‘경상북도 북부지역 장로교 1세대 목회자 김인옥(金仁玉) 연구’는 경상북도 북부지역 출신으로 최초의 평양신학교 학생이었던 김인옥 목사에 관한 것이다. 의성출신이었던 김인옥 목사는 의성지역에 교회를 설립하고 돌봄으로써 의성복음화의 토대를 닦았다. 경북 북부지역 1세대 목회자인 김인옥 목사의 사역은 지금까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지만, 이번 포럼을 통해 20여 년 동안 조용히 복음사역에 헌신했던 김 목사의 사역이 알려지게 됐다. 이번 포럼을 통해 참석자들은 김 목사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척박한 지역에서 지 교회와 경안노회를 위해 헌신한 목회자였음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안동교회 김승학 목사는 “이번 포럼을 통해 안동 지역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그동안 끊어졌던 복음의 역사를 연결하며,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미리 보는 기회가 되었음에 감사하다”며 “이 포럼이 앞으로 계속되어 한국교회에 새로운 도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며 기도를 부탁했다.
-
내매교회, 강신명 목사 사진전과 강진구홀 기공식 열려영주 내매교회(담임목사 윤재현)는 지난달 27일 ‘제3회 내매사람들 모임’ 및 소죽 강신명 목사 사진전과 강진구홀 기공식을 지역 목회자들과 출향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었다. 예배 설교는 산본교회 강윤구 원로목사, 기도 내매사람들 회장 배재호 장로, 축사 영주노회장 강성효 목사(장수교회)가 맡았다. 강신명 목사 사진전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강 목사의 신앙의 발자취를 재조명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아버지 강병주 목사는 한국교회의 농촌운동을 시작했고 그의 동생 강신정 목사는 기장 측 68대 총회장이었다. 한편, 내매교회는 삼성전자 강진구 장로를 기념하기 위해 봉사관 이름을 강진구홀이라고 지었다. 이 행사를 주관한 윤재현 목사는 “강신명 목사, 강진구 장로 두 분의 이름을 교회 본당과 식당 이름으로 지을 수 있어 영광”이라며,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들이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1)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들어가면서 안동교회 제4대 담임목사(1925~1928)로 시무한 박상동(朴尙東, 1894~1949) 목사는 아버지가 목사였고, 목사의 아들을 두었으며, 한국교회에서는 단 한 자릿수에 불과한 직계목사 손자를 둔 4대 목사 가문(家門)의 중심이었다. 그의 조부(祖父)·부친(父親)뿐 아니라 그 역시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래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6개월의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극일(克日)하기 위해 박상동 목사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일본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4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며 오사카와 고베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교포를 위해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귀국한 후 안동교회를 섬기면서 전도, 사회봉사, 교회조직의 변화, 다음 세대의 신앙교육 등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의 헌신을 통해 안동교회는 새롭게 리모델링(Remodeling)되어 시대에 맞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상동 목사는 이민자의 삶의 고단함과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안동교회 사역을 중단한 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와 나고야, 그리고 인근 지방의 복음화와 교회개척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당시 한국과 재일교회를 위한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제 말엽 그는 교포들의 인권개선노력과 민족독립운동의 죄목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생사(生死)의 고비에서 해방과 함께 석방되어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끝없는 복음의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상동 목사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초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등에 십자가를 지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성도와 자녀에게는 인자하고 겸손한 목사요 아버지였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자식들에게 사랑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이 글은 박상동 목사의 일생을 기록한 소고(小考)이다. 하지만 이 글에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믿음의 가문, 믿음의 사람의 거룩한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독립운동가요, 복음전도자요, 교육자요, 아버지요, 음악을 좋아한 사람이요, 목사요, 인격자인 인간 박상동을 감사한 마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만나보자. 1. 마태복음 1장의 ‘낳고, 낳고, 낳고’를 재현(再現)한 가정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그 족보는 아담에서 시작하지 않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박상동 목사 집안도 초창기 한국교회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명문가문이다. 1) 1대 박영화 목사박상동은 1894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에서 박영화(朴永和, 1859~1923)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박영화는 1902년경에 김인옥, 이성준의 전도를 받고 전 가족(부친인 박용한과 3남 8녀)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군위군 호암교회에 출석하다가 다음 해인 1903년 쌍계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는 특별히 교육에 관심을 갖고 1910년 농촌지역 복음화와 인재양성을 위해 쌍계교회에 정림학교(1920년 폐교)를 설립하여 운영한 명망 있는 지역의 지도자였다. 이런 박영화는 1914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제11회로 졸업하고 동년 6월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쌍계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그는 1919년 3·1 의성 만세운동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경남 거제시 사능교회 초대담임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박영화 목사는 거제도와 통영 등 경남지역 초기 교회의 존경받는 목회자로 자리매김하였다. 2) 2대 박상동 목사이러한 신앙적 분위기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박상동은 아버지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대구 계성학교 출신으로, 부친과 함께 3·1 만세운동의 옥고를 치른 후 일본 고베에 있는 칼빈계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1925년 귀국하여 안동교회 강도사로 부임하였다. 박상동은 안동교회 강도사로 시무하면서 평양신학교에서 별신학(別神學) 과정 1년간을 수학하였다. 박상동 목사는 1926년 9월 경안노회(제11회)에서 목사안수 후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885년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41년 만에 직계(直系)로 부자(父子)가 목사 임직자가 됨으로써 아버지, 아들 목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3) 3대 박대선 목사경북 의성군 비안면에서 박상동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한 박대선 목사(1916~2010)는 1940년 일본관서학원대학교 영문과와 1942년 동 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미국 보스톤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전공으로는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니시노미야시 한인교회의 담임전도사로 사역했으며, 귀국하여 1942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 창광산교회, 박구리교회, 중앙교회, 서평양교회 등을 섬겼다. 박대선 목사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성화신학교 교장대리 역임,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역임, 1959년부터 1962년까지는 서울 광화문감리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했다. 특히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연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다가 3선 임기 중 저항 운동에 나선 교수의 복직을 반대하던 당시 정부와 심한 불화를 겪다가 사임하였다. 4) 4대 박태기 목사박대선 목사의 차남인 박태기 목사는 공학박사로서 KIST의 책임연구원으로 있다가 소명을 받고 감신대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었다. 중진 과학자로서 인정받고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일생의 여름과 같은 때에 성직의 길에 들어섬으로써 대(代)를 이어 직계 4대 목사 가문(家門)을 이어가고 있다. 2. 애국자 박상동 의성에서 3·1 독립만세가 크게 울려 퍼진 날은 1919년 3월 12일이다. 11일에 의성군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 150여 명이 학교 뒷산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쌍계리에서 쌍계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의 중심인물은 김원휘 조사, 김충한, 쌍계교회 박영달 장로, 박영화 목사, 그리고 대구 독립만세 시위운동(3월 8일)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박상동(당시 대구 계성학교 2학년생) 등이다. 이들은 3월 12일 정오, 박영신의 집 앞에 모인 2백여 명의 시위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이렇게 촉발된 의성지역의 만세시위는 4월 3일 가음면 구천시장의 ‘1인 만세시위’까지 23일간 계속되었다. 이후 박상동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부친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박상동은 함께 의성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정이었다.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박상동은 일본을 올바로 알아야 일본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일본 고배중앙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생활은 고베, 오사카, 교토 등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동포를 위해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는 기간이었다. 졸업 후 1925년 귀국하여 3년여 동안에는 안동교회를 섬겼다. 특히 이 기간에 박상동 목사의 민족의식이 나타난 것은 1928년 3월 경안노회 여전도회 도사경회와 5월 23일부터 1주일 동안 계속된 성경사경회였다. 당시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었던 길선주 목사가 안동을 방문했다. 약 200명이 참석한 성경사경회의 주제는 ‘애굽의 금자탑’으로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는 많은 백성에게 희망을 주었다. 한편, 사경회 기간 중 길선주 목사는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구류 20일 후 출소한 길선주 목사는 예정대로 사경회를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갔는데 이 사건은 사경회에 참석한 교인에게뿐 아니라 주위 교회 성도들에게도 깊은 도전을 주었다. 이후 박상동 목사는 1928년 파송 받아 다시 오사카로 돌아가 순회목사로 교회를 섬기는 일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일제 말엽 박상동 목사는 또다시 투옥되었다. 박상동 목사는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일본 각지를 순회하며 민족의식의 고취,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통치 비판, 기독교도의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반대 등의 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1941년 나고야 동부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박상동 목사는 당시 지역 교회지도자들 10명과 함께 예비 검속되어 체포되었다. 이때 박상동, 추인봉, 김은석 목사도 포함되었다. 투옥된 박상동 목사는 밤마다 구타 등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당했다. 석방과 투옥을 반복하다가 그는 옥중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정부에서는 박상동 목사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의성군 비안면 ‘3.1운동 경상북도시발지 기념공원’에 세위진 기념탑 /논문 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4)- 목사 · 애국자 · 인간 박상동 목사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들어가면서 안동교회 제4대 담임목사(1925~1927)로 시무한 박상동(朴尙東, 1894~1949) 목사는 아버지가 목사였고, 목사의 아들을 두었으며, 한국교회에서는 단 한자리 수에 불과한 직계목사 손자를 둔 4대 목사가문(家門)의 중심이었다. 그의 조부(祖父)·부친(父親) 뿐 아니라 그 역시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래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6개월의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극일(克日)하기 위해 박상동 목사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일본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4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며 오사카(大版)와 고베(神戶)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교포를 위해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귀국한 후 안동교회를 섬기면서 전도, 사회봉사, 교회조직의 변화, 다음세대의 신앙교육 등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의 헌신을 통해 안동교회는 새롭게 리모델링(Remodeling)되어 시대에 맞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박상동 목사는 누구보다 재일교포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민자의 삶의 고단함과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안동교회 사역을 중단한 채 일본으로 건너간 예민한 영성의 사람이었다. 그는 오사카와 나고야, 그리고 인근 지방의 복음화와 교회개척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겼다. 박상동 목사는 현해탄을 넘나들며 한국과 일본에 복음을 전한 위대한 전도자였던 것이다. 그는 당시 한국과 재일교회를 위한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제 말엽 그는 교포들의 인권개선노력과 민족독립운동의 죄목으로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생사(生死)의 고비에서 해방과 함께 석방되어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끝없는 복음의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상동 목사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초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등에 십자가를 지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성도와 자녀에게는 인자하고 겸손한 목사요 아버지였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자식들에게 사랑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이 글은 박상동 목사의 일생을 기록한 소고(小考)이다. 하지만 이 글에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할 믿음의 가문, 믿음의 사람의 거룩한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독립운동가요, 복음전도자요, 교육자요, 아버지요, 음악을 좋아한 사람이요, 목사요, 인격자인 인간 박상동을 감사한 마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만나보자. 1. 마태복음 1장의 ‘낳고, 낳고, 낳고’를 재현(再現)한 가정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그 족보는 아담에서 시작하지 않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비록 아담이 인류 최초의 사람이긴 하지만 범죄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믿음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육신의 족보라기보다는 믿음의 족보요 하늘나라 백성의 계보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 4대 담임목사로 사역한 박상동(朴尙東, 1894~1948) 목사 집안도 초창기 한국교회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명문가문이다. 오늘도 박상동 목사의 가문은 한국교회의 살아있는 믿음의 역사를 중단 없이 써가고 있다. 130년의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현재까지 4대 직계목사 가문을 이어가고 있고, 곧 5대 목사가 배출될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 목사의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목사 아버지는 자신이 겪은 험난한 목회의 길을 자녀들이 겪기를 원치 않을 뿐 아니라 목사 자녀들도 목사 아버지의 좁은 목회의 길을 보며 쉽게 그 길을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상동 목사는 아버지가 걸어간 목회의 길을 걸었을 뿐 아니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목사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1) 1대 박영화 목사 박상동은 1894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比安面) 쌍계리(雙溪洞)에서 박영화(朴永和, 1859~1923)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박영화는 1902년경에 김인옥, 이성준의 전도를 받고 전 가족(부친인 박용한과 3남 8녀)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군위군 호암교회에 출석하다가 그 다음 해인 1903년, 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쌍계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박영화는 1908년 세례를 받았다. 그는 특별히 교육에 관심을 갖고 1910년 농촌지역 복음화와 인재양성을 위해 쌍계교회에 정림학교(1920년 폐교)를 설립하여 운영한 명망 있는 지역의 지도자였다. 더욱이 박영화는 당시 선교사의 조사(助事, Helper)로 활발히 사역한 인물이었다. 경안노회 70년사는 그가 의성 지역의 유력한 조사였음을 밝히고 있다. 더욱이 경상노회록에 의하면 박영화는 쌍계교회 장로로 임직 받고 노회 총대로 참석할 정도로 당시 의성 지역의 교회지도자였다. 1914년 12월 30일 부산진 여학교에서 회집된 제9회 경상노회 회의록에는 그의 이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서기가 회원을 조명하니 참석원은 목사의 방혜법, 권임함, 김기원, 홍승한, 심취명, 김영옥, 왕대선, 매견시, 맹호은, 예알배, 라대벽, 권일두, 권찬영, 인로절, 제씨요. 장로의 허 일, 황재은, 정재순, 박영화, 박상순, 최경호, 리준섭, 권덕생, 김덕경, 김응진, 김복명 제씨라. 이런 박영화는 1914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제 11회로 졸업하고 동년 6월 19일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쌍계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그는 1919년 3·1 의성만세운동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룬 후 경남 거제시 사능면에 위치한 사능교회 초대담임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박영화 목사는 거제도와 통영 등 경남지역 초기 교회의 존경받는 목회자로 자리매김하였다. 2) 2대 박상동 목사 이러한 신앙적 분위기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박상동은 아버지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학교인 대구의 계성학교 출신으로, 부친과 함께 3·1 만세운동의 옥고를 치룬 후 일본 고베에 있는 칼빈계 고베중앙신학교(神戶中央神學校)를 졸업하였다. 졸업한 박상동은 1925년 귀국하여 안동교회 강도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6월 17일 안동교회에서 소집된 제8회 경안노회록은 “신학졸업생 박상동씨를 노회장이 임시노회를 소집하는 대로 강도사로 세워주기로 가결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박상동은 안동교회 강도사로 시무하면서 평양신학교에서 별신학(別神學) 과정 1년간을 수학하였다. 그 당시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장로교 목사가 되려면 평양신학교에 가서 1년 동안 공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1926년 6월 16일 안동교회에서 회집된 제10회 경안노회에서 안동교회는 박상동 강도사를 동사목사로 청원하였고, 노회는 임사부에 맡겨 처리하도록 결의하였다. “안동교회에서 박상동 강도사를 동사목사로 청원하노니 허락 주시되 헌법대로 오는 9월에 장립허락까지 달라는 청원은 임사부로, 박상동에 목사장립을 위하여 별노회 소집은 회장에게 위임하기로 가결하다.” 결국 1926년 9월 1일 영주읍 교회에서 개회된 경안노회(제11회) 임시노회에서 안수 후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885년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41년 만에 직계(直系)로 부자(父子)가 목사 임직자가 됨으로써 아버지, 아들 목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3) 3대 박대선 목사 박영화 목사 가문의 직계 3대 목사인 박대선 목사는 1916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에서 박상동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1928년 파송 받아 오사카에서 순회목사로 일본에 파송된 부친 박상동 목사와 함께 일본에 체류하면서 1940년 일본관서학원대학교 영문과와 1942년 동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미국 보스톤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전공으로는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에 체류할 당시인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니시노미야시 한인교회의 담임전도사로 사역했으며, 귀국하여 1942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 창광산교회, 박구리교회, 중앙교회, 서평양교회 등을 섬겼다. 박대선이 어렸을 때 사람들이 “넌 이담에 커서 무엇이 될래?”라고 물으면 서슴없이 “난 목사가 될 겁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한 이 대답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을 정도로 박대선은 소명의식이 투철했다. 특히 1945년부터 1950년 까지 평양성화신학교 교장대리로 학교를 책임지고 경영하였다. 박대선 목사는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1959년부터 1962년까지는 서울 광화문감리교회 담임으로 목회를 이어갔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