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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중국 난핑시와 온라인 ‘우호도시 협정’ 체결코로나 위기 속 싹튼 우정, 온라인 우호도시 협정 체결 꽃피워··· 협정식 경주시 유튜브 채널과 페이스북에서 온라인 동시 생중계 ▲경주시와 중국 난핑시 간 우호도시 협정 체결 온라인 화면. (사진=경주시 제공) 경주시가 코로나19로 인해 대면교류가 힘든 상황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국제교류를 추진해 주목받고 있다. 경주시는 13일 중국 난핑시와 온라인 우호도시 협정을 체결했다. 이날 협정 체결식에는 주낙영 경주시장을 비롯해 서호대 경주시의회 의장, 이원식 前 시장, 최기환 경주향교 전교 등이 참석해 그 의미를 더했다. 중국 푸젠성(福建省) 북부에 있는 난핑시는 회암 주희의 고향으로 그가 성리학을 집대성한 곳으로 유명하다.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된 우이산(武夷山)과 같은 빼어난 자연과 우이정사(武夷精舍)로 대표되는 인문학적 토대를 두루 갖춘 세계적 관광명소이다. 경주시는 지난 2016년에 동국대학교의 제안으로 난핑시와 유교문화 교류의 물꼬를 튼 이후 경주 양동마을-난핑 우푸전(五夫鎭)마을 교류협정 체결, 한·중 성리학 국제학술대회 개최 등 꾸준히 교류를 이어왔다. 지난 2019년 8월에 우호교류 의향서에 서명한 양 도시는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교류가 중단된 상황에서도 난핑시의 방역물품 지원, 경주시의 코로나19 극복 응원영상 발송 등 비대면 교류를 지속해왔다. 이 같은 우호적 교류의 결과로 이번에 양 도시 간 온라인 협정이 성사됐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이번 우호도시 협정 체결은 내년 한중수교 30주년을 앞두고 양국과 양 도시의 미래지향적 협력을 위한 발걸음”이라며, “앞으로 문화·관광·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교류를 통한 상생발전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에 위안차오훙 난핑시장은 “앞으로 양 도시 간 교류를 더욱 강화해 자매도시 결연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나아가 한·중 우호협력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경주시 관계자는 “경주시와 난핑시는 상호 공무원 연수파견, 청소년 교류 등 인적 교류 추진으로 상호 이해를 증진하고 서로의 선진 분야를 벤치마킹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한편 경주시는 코로나19 사태로 국제교류가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11개국 18개 자매우호도시와 시장 온라인회의를 개최하고, 국제협력팀 페이스북을 통해 자매우호도시 랜선투어를 실시하는 등 온택트 방식으로 해외도시와의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경주 김치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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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4)나의 출애굽기(24) 드보라 59. 신앙을 갖게 된 막내 동생··· 북으로 가다 함께 슬퍼하다가 정신이 들었다. 막내에게라도 꼭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막내를 타이르고 예수님을 믿자고 했다. 그렇지만 막내는 형이 죽었는데 이딴 것이 다 무슨 소용이냐며 성질을 내며 행패를 부렸다.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어서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선생님은 막내를 보호 처소로 데리고 갔고 그곳에서 막내는 성경 통독을 하며 지냈다. 당장 머물 곳이 없으니 따라는 갔지만 막내는 여러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신지 억지로나마 통독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치유 역사로 굽었던 팔이 펴지는 기적을 경험했다. 다시 만난 막내는 새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행패를 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나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확실하다며 자신의 팔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집사님께 나를 잘 부탁한다며 신신당부를 하고 막내는 북으로 들어갔다. 막내와는 그 후로 한동안 연락을 하다가 연락처가 바뀌면서 소식을 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최근에 나는 다른 친척을 통해 막내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막내는 그 안에서도 신앙을 잘 이어갔으나, 안타깝게도 모종의 일로 신앙이 발각되어 끌려갔고 그 이후로 소식이 없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나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아파왔다. 그렇지만 이미 이 땅을 떠났다면 순교자의 영광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셨을 것이고, 혹시나 살아있다면 그 어려운 곳에서도 기도로 이겨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 땅은 복음을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멈춤 없이 나아가고 있음을 믿으며 나는 오늘도 막내 동생과 고향 땅을 위해 기도한다. 60. 탈북자 집사님의 도움으로 생계를 이어감 우리는 한 주에 한 번씩 탈북자 집사님 집에 모여서 성경공부를 했다. 성경 필사는 집에서 해오는데 한 달에 한 번 걷어서 필사한 장수대로 1원씩 지원을 받았다. 짬짬이 십자수 하는 것도 배웠다. 십자수로 주기도문, 예수님 초상화, 십자가 액세서리 등을 만들어서 가져다 드리면 집사님과 조선족 김 선생님께서 대신 팔아주시고 판 금액을 우리에게 주셨다. 중국 내 탈북자들은 대부분 생활 형편이 매우 열악했고, 나도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집사님과 선생님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다. 시내에 나와서도 생계를 위해 부지런히 일했다. 낮에는 유치원에서 아기 보는 일을 했다. 밤에는 야시장에서 설거지와 배달 등 허드렛일을 밤 11시까지 했다. 탈북자 신분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모두 정체를 숨기고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새벽에 불을 켜놓고 성경 필사를 하고 집안일을 하다가 3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애기 아버지도 농한기 때는 고향에서 나와서 나와 딸이 있는 시내에서 지냈다. 그런데 이 양반은 내가 밤에 성경을 필사하고 있으면 옆에서 불 끄라고 난리였다. 나는 이게 다 가계에 보탬이 되는 거라고 남편을 윽박지르고 계속 성경을 필사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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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엔 청소년수련관에서 놀면서 배우자!울진군청소년수련관, 2021년 여름학기 프로그램 수강생 모집 ▲울진군 청소년수련관에서 드럼을 배우는 학생들. (사진=울진군 제공) 울진군(군수 전찬걸) 청소년수련관은 2021년도 여름학기 특기·적성 프로그램 수강생을 오는 5일 오전 10시부터 6일까지 2일간 모집한다. 여름학기 프로그램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관내 청소년들의 잠재능력을 개발하고,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고자 10일 시작하여 8월 28일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8회기로 총 8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프로그램은 매 학기마다 큰 호응을 받는 <캐리커처&팝아트>를 비롯하여 <드럼>, <교양한문>, <미니어처 세상 만들기>, <오조봇>, <어린이중국어>, <창의사고력수학>, <코딩>수업이 개설된다. 모집대상은 울진에 거주하는 초등학생 이상 청소년이며, 신청은 울진군청 홈페이지 통합예약시스템에서 가능하다. 더 자세한 사항은 울진군청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참고하거나 울진군청소년수련관 (☎054-789-6705)으로 문의하면 된다. 현재, 청소년수련관은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한 가운데 수업 별 정원 축소, 북카페, 노래연습실 등의 이용시설은 인원수를 제한하며 안전하게 운영 중이다. 전찬걸 울진군수는 “울진군청소년수련관 여름학기 프로그램을 통해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고, 청소년들의 꿈과 끼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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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농업의 미래, 청년농부와의 만남민선 7기 취임 3주년 첫 일정으로 봉산면 청년농부 농장 방문격려 ▲김충섭 김천시장이 청년농부 농장을 방문해 청년농업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김천시 제공) 김천시(시장 김충섭)는 민선 7기 취임 3주년 첫 일정으로 봉산면 청년농부 농장을 방문해 영농현장에 대한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격려하였다. 이날 청년농부 농장방문은 고령화로 활력이 줄어들고 있는 농촌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는 청년 농업인 4명의 영농 애로사항을 듣고 그들의 안정적인 영농정착을 돕기 위하여 봉산면 인의리에 소재한 청년농부 박상우 씨 농장에서 진행되었다. 청년농부 박상우 씨는 남매 농부로서 중국에서 온라인 마케팅 회사에 다니다가 2018년 청년농부로 새로운 시작을 한 여동생 박상윤 씨의 권유로 2020년 청년후계농으로 선정되어 김천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영농시작 초기라서 포도 알솎이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밝혔다. 김충섭 김천시장은 “김천의 대표품목인 포도, 그중에서도 샤인머스캣을 재배하는 청년농부의 농장을 와서 보니 활력이 넘침을 느낄 수 있었다”며 “오늘 이 자리에서 청년농부들의 애로사항을 최대한 수렴하여 전국에서 청년농업인이 정착하기 가장 좋은 도시 김천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김천시는 고령화 되는 농업·농촌 현실에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미래 청년농업인 육성에 행정력을 집중해 나가겠다고 밝히고, 2018년부터 청년농업인 영농정착지원사업을 시행해 100여 명이 정착하여 영농에 종사하고 있으며, 금년도에는 경북 도내에서 최다 인원인 36명의 청년농업인을 선발하여 영농정착을 지원하고 있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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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3)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3)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 (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1. 출생과 결혼 2.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媤宅) 3. 여성 복음전도의 선구자 4. 평양여자성경학원의 유학생 5.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 ...................................................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4. 김정숙, 평양여자성경학원의 유학생(2) 참고로 내한(來韓)한 선교사들은 1900년대부터 여성 교역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남녀 구별과 차별이 심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순회 전도하는 일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처음에 여교역자는 전도부인(傳道婦人, Bible Woman)으로 불렸다. 전도부인들은 선교사들과 함께 지방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사경회 시 보조역할을 했다. 1907년 평양여자성경학원은 본격적으로 여교역자를 양성하는 훈련원으로, 1910년에는 정식으로 평양여자성경학원이 되어 보다 체계적인 교육을 시킬 수 있었다. 1923년에는 미국북장로회 선교부의 설립 허가를 받아 여교역자 양성을 위해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로 개교하였다. 1938년에는 평양여자신학원으로 개명되었다가 1943년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당시 미국장로교에서 세운 여자성경학원의 수업기간은 3년이었고, 교과과정도 성경뿐 아니라 일반 고등학교와 같이 교양과목도 가르쳐 교역자와 평신도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을 갖추게 하였다. 김정숙의 입학 당시 평양여자성경학원은 3년 과정으로 1년에 봄, 가을, 겨울 3학기로 이루어졌으며, 교과과정은 성경 외에 교회사, 설교학, 윤리, 심리학, 영어, 음악 등 성경교사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것들로 꾸며졌다. 위에 언급된 과목들은 오늘날 4년제 신학대학교에서도 개설하고 있는 과목들이며 평양여자성경학원은 당시 우수한 신학교육을 받은 여성 교역자를 배출하는 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김정숙은 입학한 지 5년 만인 1920년, 당시 여성 신학교 중에서는 가장 공신력 있는 여자성경학원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사역의 현장인 교회에서 섬길 수 있게 충분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5. 김정숙,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1) 1920년 평양여자성경학원을 졸업한 김정숙은 안동으로 내려와 교회와 노회를 위해 헌신적인 복음 사역을 시작하였다. 1922년부터 김정숙은 안동의 공식적인 첫 여성 교역자로 안동교회를 섬기면서 교회의 여러 사역에 참여하였다. 초대 김영옥 목사가 사임한 후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대영 목사는 1921년 1월 부임해서 헌신하던 중 1921년 9월 10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제10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국의 부름을 받았다. 이대영 목사가 중국선교사로 파송 받은 후 정재순 목사가 안동교회 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됐다. 1922년 7월 20일에 개회된 제83회 당회록은 정재순 목사가 당회에 참석한 것으로 기록한다. 따라서 짧게는 5월과 6월, 2개월을, 길게는 3~4개월 안동교회는 담임목사가 공석으로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때 전도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던 김정숙은 비록 2개월에서 4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한된 범위 내에서 담임목사의 공백을 잘 메웠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담임목사가 교회에 부임해서는 그와 의견을 맞추어가며 사역에 충성을 다했을 것이다. 아마 교회의 분위기와 성도들을 소개하고 교회가 진행하고 있던 이전 사역을 소개함으로써 새로운 담임목사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을 것이다. 안동교회 3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정재순 목사의 최우선 목회방침은 지역전도였다. 그는 안동교회를 전도중심의 교회로 만들어 나갔다. 그가 추진한 강력한 전도사역을 통해 안동 땅은 영적으로 기경되기 시작되었다. 전도의 결과로 호암교회(현 송현교회)와 수하리교회(현 수상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또한, 그의 주도로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훗날 안동 땅에서 수확할 풍성한 구원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정재순 목사가 시무하던 시기는 처음으로 현지 교회인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이 널리 전파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정숙 전도사는 누구보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뜨거운 구령의 열정을 갖고 있던 김정숙 전도사는 정재순 목사와 뜻을 같이하여 지역을 복음화하는 일에 앞장섰을 것이다. 정재순 목사 역시 복음의 열정을 갖고 있는 김정숙 전도사와 동역하면서 고을마다 전도인을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통해 안동 땅은 예수 마을로 바뀌고 있었다. 정재순 목사가 사임한 후 의성 출신으로 1925년 일본 고베신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한 박상동이 안동교회 강도사로 부임했다. 박상동 목사는 1926년 9월 제11회 경안노회 임시노회에서 안수 후 안동교회 제4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박상동 목사는 전임 정재순 목사처럼 교회의 부흥뿐 아니라 안동읍의 성시화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였다. 1925년 7월 6일 제직 회의록에 따르면 오늘의 안동서부교회인 안기기도실을 세웠을 뿐 아니라 안동 읍을 4개 권역으로 나누어 복음전파의 책임을 가진 권찰을 두었다. 1926년 접어들면서 전도대를 조직하고 안동읍 동·서 양편에 파견하여 안동복음화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특히 1928년 9월 18일부터 26일까지 제1회 경안주일학교대회가 안동교회에서 개최되어 유년부, 소년소녀부, 청년부, 남·여장년부, 여전도회 교사 및 교역자 등 정회원 1,300여 명과 방청객 1,000여 명 등이 참석했다. 안동지역에서 개최된 최초의 대중 집회였는데, 참석한 인원은 당시 교회가 신앙교육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때 안동교회 소년소녀부의 고문이며, 다음세대를 지도했던 김정숙 전도사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김정숙은 정재순 목사가 사임한 후 박상동 강도사가 부임하기 전까지의 공백 기간에 교회의 안정을 위해 힘썼을 뿐 아니라 그 후 박상동 목사를 도와 안동지역 복음화에 최선을 다했다. 또한, 박상동 목사가 사임한 이후 1929년 1월 안동교회 5대 담임목사로 임학수 목사가 부임하기까지 김정숙은 다시 전도사로 자리를 지키며 교회와 교인의 안정을 도모했다. ▲1928년 9월 18일부터 26일까지 제1회 경안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한 교사들과 교역자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으로, 사진 왼쪽 위에 있는 기와집은 안동 최초의 여성전문초등학교인 계명학원으로 안동 3‧1만세운동 당시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등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사진4)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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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3)나의 출애굽기(23) 드보라 57. 우리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알게됨 그렇게 창세기를 지나고 출애굽기에 접어들었다. 출애굽기에서 10가지 재앙 부분을 쓰면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10가지 재앙이 마치 북한이 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 이거 우리가 북한에서 경험한 거구나’하고 깜짝 놀랐고, 그러면서 자연과 환경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하심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북에 있으면서 항상 이런 질문이 있었다. ‘왜 강 사이에 두고 중국은 비가 잘 오고 곡식이 잘되는데 우리는 이 모양인가···.’ 나는 그 답을 출애굽기를 통해서 얻었다. 필사를 하는 와중에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마귀에게 막혀서 받지 못했습니다. 북한은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땅이 되었고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아비규환의 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완악했으면 그 땅이 이 지경이 되었겠습니까···.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나의 변화는 우리 가족에게도 큰 복이 되었다. 나를 집결소에서 꺼내준 첫째 남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기회가 되는 대로 돈을 보냈다. 그러다가 나중에 동생이 차를 한 대 사달라고 부탁했다. 차를 사면 장사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껏 돈을 모아서 중고차를 살만한 목돈을 브로커를 통해 보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보위부에서 첫째 동생을 잡아갔다는 것이다. 후에 다른 친척을 통해 들으니 그 돈을 보내고 사용하는 와중에 보위부(현 보위성)에 꼬투리가 잡혀서 집결소로 붙잡혔다는 것이다. 58. 남동생의 죽음 ··· 복음을 전하지 못한 후회 돈을 보낸 내 입장에서 맘이 너무 슬프고 불편하고 안타까웠다. 하필 내가 보낸 돈 때문에 동생이 고통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사님께서는 나에게 동생에게 돈만 보내지 말고 복음을 전했어야 하지 않았겠냐고 이야기해주셨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복음은 전하지 않고 돈만 열심히 보냈던 것이 역효과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잡혀서 집결소로 갔던 동생은 4개월 만에 공사 중에 사고를 당해서 결국 거기서 죽었다. 나중에 사망 소식을 듣고 엄청 울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떡을 보내기에 급급했구나, 영혼을 구할 기회를 놓쳤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괴롭고 미안했다. 첫째 동생이 집결소에 갇히자 막내 동생이 형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막내 동생은 군대 가서 팔을 다쳐 팔을 펴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다. 그 후 막내는 성질이 사납고 술에 찌든 사람이 되었다. 막내는 형을 빼내는 데 실패하고 나서 한참 있다가 중국으로 나왔다. 중국에 나온 막내는 독기가 서려 눈이 벌겋고 옷에 칼을 숨기고 있었다. 혹시나 신변의 위협을 당할까 봐 가지고 왔다고 했다. 나를 만난 막내는 술을 마시면서 통곡을 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역시 돈을 전달한 그 브로커가 문제였다. 그 브로커 때문에 동생을 잃었던 것이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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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한지’ 2021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추진단 발대식 열려“전통한지의 유네스코 유산 등재 추진 본격화” 우리의 전통한지가 202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도록 추진하려는 추진단 발대식이 4월 29일 오후 3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됐다. 발대식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추진단 이배용 단장(전 이화여대 총장), 국회의원, 광역지방자치단체장, 기초자치단체장과 유인촌 전 문화체육부 장관을 비롯한 문화 관련 인사, 이영걸 안동한지 회장을 비롯한 한지 관련 기관단체장 등이 참석했다. 이날 발대식에서 축사를 전한 권영세 안동시장은 “중국의 선지와 일본의 화지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2009년, 2014년 각각 등재됐다”며 “천년이 가도 변치 않는 전통한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추진이 본격화되기를 기원한다”고 강조했다. 고윤환 문경시장은 축사로 국내(조선왕조실록과 고려 초조대장경 복간본 복원에 사용) 및 세계(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관심)로 뻗어 나가는 문경 전통한지의 인지도를 언급하며, 문경시도 한지의 유네스코 유산 등재라는 목표에 적극 함께할 것을 약속했다. 안동 한상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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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 에너지 재활용 ··· 하베스팅 부품소재 산업 육성저전력 지능형 IoT 물류부품 상용화 기반구축 2022년 스마트특성화사업 선정 에너지 하베스팅 핵심 부품소재 국산화로 친환경 에너지 기술 선점 노력 경상북도는 2022년 스마트특성화사업에 ‘저전력 지능형 IoT 물류부품 상용화 기반구축’ 사업이 선정되었다. 오는 2022년부터 3년간 총사업비 186억 원을 투자해 지역 산학연 협의체 중심으로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저전력 지능형 IoT 부품소재는 생활속에서 버려지는 에너지들을 하베스팅 부품소재를 활용해 수집하여 다시 전력에너지로 변화하여 사용하는 기술이다. 이른바 에너지의 재활용이라 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에너지를 수확한다는 의미에서 ‘에너지 하베스팅’이라는 용어 또는 ‘저전력 IoT기술’로 사용된다. 이러한 일련의 기술은 웨어러블 기기의 발전, 탄소중립 등 친환경 정책의 강화로 주목받고 있다. 해외에서는 대규모 호텔의 수만 개의 스위치에 에너지 하베스팅 기술을 사용하여 에너지절감을 이루어 낸 사례라든가 중국 상하이 홍차오 공항에 스마트 조명 센서를 부착하여 초저전력화 공항을 실현한 사례들이 있다. 국내에서도 부산 서면의 지하철 개찰구에 압전퍠드를 활용한 에너지 하베스팅 사례가 있다. <참고 : 에너지 하베스팅 해외사례> 해외에서는 이미 엔오션얼라이언스(EnOcean Alliance)라고 해서 에너지 하베스팅과 접목된 IoT용 무선솔루션 선도그룹이 활동하고 있으며 IBM, 오슬람(OSRAM) 등 글로벌 정보통신 기업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 기술은 스마트홈에서부터 스마트팩토리까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영국 시장 조사기관에 따르면 에너지하베스팅 시장 전망은 2020년 4억5,800만 달러에서 2028년까지 9억8천7백만 달러(한화 약 1조2천억 원)로 연평균 10% 이상 성장하는 고성장 분야로 알려졌다. 이번에 선정된 사업은 에너지 하베스팅 기술을 물류분야에 적용하는 사업이다. 물류분야는 다양한 센서들이 무선으로 운용되는 환경으로 독립된 전원공급 장치가 필요한 분야이다. 이러한 분야에 선도적으로 에너지 하베스팅 부품소재를 적용하여 저전력화하여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다. <참고 : 저전력 지능형 IoT 물류부품 상용화 기반구축 추진전략> ‘지능형 IoT 부품센터’를 설치하여 에너지 하베스팅 기술이 가미된 전원소자, 센서 등을 개발하고 이를 실제 물류분야에 적용하여 데이터를 수집한다. 거기에서 수집된 데이터는 다시 부품센터의 환경정보 수집 및 전송모듈로 전송되어 수정 보완 작업을 거쳐 성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동안 경북도는 에너지 하베스팅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영천시 대구대 등과 협업하여 왔다. 지난 2020년 3월부터는 도와 영천시가 공동으로 ‘에너지하베스팅산업생태계 조성을 위한 기본계획수립용역’을 추진하여 12월 초 완료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국내 최초로 ‘에너지하베스팅 기술분류체계’를 정립하여 앞으로 체계적인 연구개발과 산업발전에 방향성을 제안했다. 스마트 특성화 기반구축 사업은 전국 55개 산업거점을 선정하여 지역특성에 맞는 연구장비 확충, 혁신기관 장비간 연계강화, 기술지원 등 지역의 혁신기반을 강화하는 사업이다. 경상북도는 지난해 ‘S/W기반 지능형 SoC모듈화 사업’을 스마트특성화 기반구축에 제출하여 선정 받았다. 본 사업이 IoT기기들의 원천이 되는 반도체 부품을 설계하는 원천디자인이었다면 이번에 선정된 IoT물류부품 상용화 기술개발사업은 이러한 설계역량을 바탕으로 에너지 하베스팅이라는 기술을 한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응용디자인에 가까운 사업이다. 수많은 부품소재의 복합체인 IoT기기들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설계부터 응용부품까지 새로운 기술들을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우리 지역에서 앞으로도 더 활발해질 전망이다. 이철우 경상북도지사는 “스마트 특성화 사업은 지역의 혁신기관간 연계와 협업이 전제되어야 성과를 낼 수 있는 사업이다”며, “그간 구축된 IoT관련 연구기반들과 협업을 강화함은 물론, 산학연 협력체계를 통해 혁신기관들이 보유한 유망기술이 대학으로 확산하여 위기 속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 지역대학들의 돌파구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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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1)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1)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 (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1. 출생과 결혼 2.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3. 여성복음전도의 선구자 4. 평양여자성경학원의 유학생 5.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 ...................................................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서론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성경 말씀 그대로 남녀노소, 빈부, 계층에 관계없이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귀족보다는 평민,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선 시대 말기의 여성은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한국 전통사회 안에 뿌리 깊은 성차별의 문화와 여필종부, 삼종지도, 칠거지악, 남녀칠세부동석, 부부유별 등의 가부장적 가치관은 여성의 인권을 철저히 억압했다. 무지와 가난, 고된 노동과 억압된 삶을 살던 여성은 한(恨)을 품은 존재였다. 조선 시대 말기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눈에는 누구보다 한국 여성들이 복음의 대상이요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보였다. 이런 환경에 있던 여성들은 한국 땅에 도착한 선교사들에게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선교대상이 되었다. 특히 1885년 4월 5일 인천항에 함께 도착한 미국 장로교와 미국 감리교 선교사는 선교대상으로서 여성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893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양 교파 연합모임에서 선언한 10가지 한국선교정책 중에서 두 번째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였다. 감리교의 경우는 의료사업, 교육사업, 자선사업, 여성의 인권회복 등에 치중했고, 여성의 계몽과 교육에 있어서 장로교에 비해 앞서 나갔다. 직접적인 복음전파를 강조한 장로교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사회 계층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성들을 선교의 타깃으로 삼았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여성들이 다른 계층에 비해 더 쉽게, 더 빨리 복음에 반응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첫 10년 동안 여성 복음화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 여성들이 소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여성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복음에 응답함으로써 복음전파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회적 활동에 수동적인 여성들이 전도사역과 계몽사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일제의 압제 가운데서 애국 여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1. 김정숙, 출생과 결혼 “임진(臨津) 이북의 땅은 다시 오랑캐의 땅이 될 터이니 몸을 보전하는 것을 논할 수 없다”는 예언으로 불안해하던 이북 사람들 중에는 이남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이들이 가장 선호한 지역은 정감록(鄭鑑錄)에서 언급하고 있는 ‘십승지’의 첫 번째 승지인 경상북도 풍기였다.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 있던 북한 사람들이 실제로 이남으로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1890년대 후반부터였고, 이어서 1920년대에는 개성·평양에서 약 100여 가구가 풍기로 집단 이주를 했다. 현재 이들 후손들이 1,000가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1907년 창립된 풍기성내교회는 지역 토착 주민들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으로 성내교회 100년사는 기록한다. 김정숙(金貞淑)은 1880년 11월 10일 김병연(金秉淵)의 장녀로 풍기에서 출생했다. 그는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정숙한 여인으로 성장했다. 김정숙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단정하고 고상하며 강직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더욱이 그는 자식과 손자뻘 되는 교역자를 존경하고 귀애했다고 안동교회 김광현 원로목사는 기억한다. 김정숙은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성숙한 성품은 지역사회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부인으로, 또한 교회에서는 전도사로서 목회 사역을 빛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김정숙은 1898년 19세 때 김규립(金奎岦)과 결혼했다. 김정숙의 시부인 김수업은 성균관 진사에 합격했으나 당시 일본과 러시아 등 열강의 침입으로 인해 정국이 어수선한 1894년, 친척들과 함께 평양에서 풍기 금계리로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김수업이 이주한 시기는 북한 사람들이 풍기로 이주한 1차 때였다. 따라서 김수업의 후손은 무려 100여 년 전 풍기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생활하고 있는 셈이 된다. 김정숙은 결혼한 지 8년이 지난 1907년, 28세 때 병에 걸린 남편이 세상을 떠나 혼자가 되었다. 그는 슬하에 단 한 명의 자녀도 없이 청상과부로 홀로 남게 되었다. 중병(重病)에 걸린 남편을 헌신적으로 간호하면서 마지막까지 살리려고 했던 김정숙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던 열부(烈婦)였다. 당시 남편이 괴로워하며 숨을 헐떡거릴 때 약지(藥指)를 끊었다고 한다. 남편이 약지에서 나오는 피를 먹으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김정숙은 부엌으로 가서 문지방에 약지를 놓고 부엌칼로 내리쳐 쏟아지는 피를 그릇에 받아 남편에게 먹였지만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훗날 평양 여자성경학원에 입학한 김정숙은 선교사가 피아노를 배울 사람은 나오라고 했을 때 피아노 위에 놓은 손가락 중 왼손 넷째 손가락이 없는 것을 본 선교사가 이 손으로는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피아노 배우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2. 김정숙,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김정숙의 시댁(媤宅)은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 현장을 목격한 가문으로 전해진다. 그의 남편 김규립의 조부인 김승걸은 평양에서 발생한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R. J. Thomas, 1840년~1866년) 선교사의 순교를 직접 목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6년 8월, 토마스 선교사는 항해사 겸 통역관으로 제너럴 셔먼호에 탑승하여 대동강으로 올라왔다가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에게 붙잡혀 9월 5일 26세로 평양 대동강 변에서 처형을 당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칼을 겨누던 한 병사를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전달했는데 그가 바로 박춘권으로,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것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기도)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1840년 영국에서 출생한 토마스 선교사는 런던 선교회 파송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천주교인을 만난 계기로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변에 좌초되어 1866년 9월 5일 순교당했다.(사진1)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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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2)나의 출애굽기(22) 드보라 55. 시내로 나와 살면서 교회 집사님을 만남 중국에 와서 이리저리 알아보니 하나님, 예수님은 교회를 가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워낙 외진 우리 동네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쨌든 시내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사정이 맞아떨어지면서 나는 아이를 데리고 시내로 나와서 집을 하나 얻었다. 아이 공부시키면서 뒷바라지를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내에 나와 애를 유치원에 입학시키고 집에 있는데 같은 동네에 살던 중국 친구가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먼저 자녀 교육 때문에 시내에 나와 있던 친구다. 이 친구가 시내에 나와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면서 나에게 조선족 선생님과 교회 집사님 한 분을 소개해 주었다. 그 선생님과 집사님께서는 처음 보는 나에게 “고생 많이 했죠··· 사랑해요.” 하고 나를 안아주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난생처음 듣는 터라 너무 느낌이 이상했다. ‘생판 남인데 왜 이리 반가워하고 사랑한다 하나’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특별히 함께 온 집사님은 나중에 알고 보니 탈북자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왠지 남이 아닌 것 같이 친근하고 반가웠다. 선생님은 나에게 성경책을 하나 선물해주었다. 영접기도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집사님께서 매일 집에 찾아오셨다. 원래 탈북자는 자기가 탈북자인 것을 숨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지만 이 집사님은 자기 간증을 하고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내 처지와 비슷한 점이 많아 동질감이 생기고 너무 반가웠다. 집사님과 금세 친해졌고 많은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었다. 56. 성경필사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게됨 집사님은 김일성 이야기도 해주었다. 김일성이 원래 기독교 집안이었고 교회학교도 다녔다는 사실도 알려주셨다.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집사님은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탄압했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우리가 비록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그래도 나와 당신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은 가족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심이라고 믿는다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나누셨다. 눈물이 났다. 단순히 경제봉쇄 때문에, 미제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우상숭배 때문이었구나 하는 것이 깨달아졌다. 그분이 나를 위해 기도해줄 때마다 눈물이 났다. 집사님의 권유로 성경필사를 시작했다. 에스더부터 시작해서 성경을 쓰고 이어서 신약을 썼다. 처음에는 동기부여 해준다고 페이지 1장당 1원씩 줬다. 없는 살림에 1원이 어디냐 싶어서 열심히 글을 썼다. 에스더를 쓰고 신약으로 넘어갔다. 복음서를 보니 수많은 기적이 나왔다. 물이 포도주가 되고 문둥병 낫는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솔직히 ‘이게 진짜인가? 가능한가?’ 하면서 필사를 했다. 그렇게 필사를 하다 보니 어느덧 신약을 다 쓰고 창세기로 넘어갔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셨고 사람이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전에는 원숭이가 사람 되었다고 배웠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가 새로웠다. 특히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을 보며 ‘아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땅에 파묻는구나!’ 싶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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