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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우리나라 14번째국내 9개 대표적 서원... 도내 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등 4개 서원 포함 ‘95년 석굴암․불국사 첫 등재에 이어 도내 5번째 등재 쾌거 ‘한국의 서원’이 7월 6일(아제르바이잔 현지시각) 유네스코(UNESCO, 국제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6월 30일부터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개최된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는 우리나라가 신청한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에 등재키로 최종 결정했다. 이로써 ‘한국의 서원’은 우리나라의 14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 결정된 ‘한국의 서원’은 16∼17세기에 건립된 국내 9개 서원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건립된 서원이자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영주) ▲지역 출판문화를 주도하는 등 서원의 출판과 장서의 기능을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인 옥산서원(경주) ▲한국의 서원 중 학문 및 학파의 전형을 이룬 대표적인 서원인 도산서원(안동) ▲자연과 조화된 한국 서원 건축을 대표하는 병산서원(안동) 등 도내 4개 서원을 비롯해 경남 함양의 남계서원,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 대구 달성의 도동 서원,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 등이다. ▲영주 소수서원 전경. 소수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중종 38년(1543년)에 ‘백운동서원’이라는 이름으로 건립한 서원으로 서원 교육, 제향과 관련한 운영 규정을 처음으로 만들어 이후 세워진 서원 교육 규정에 영향을 미쳤다. 소수서원은 13세기 말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원나라(1260-1368)에서 도입한 인물로 이 지역 출신인 안향이 생전에 공부했던 장소다. 주요 배향인물로는 안향, 안축, 안보, 주세붕이 있다. 회재 이언적 선생을 배향한 옥산서원은 누마루 건축물을 처음으로 서원에 도입하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중 하나다. ▲경주 옥산서원 전경. 옥산서원은 입학규정, 교육 평가 내용과 관련된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어 서원의 교육 방식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옥산서원에는 서원의 교육제도와 관련하여 원생의 선발과 평가에 대한 자료가 잘 보존되어 있다. ▲안동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은 안동 출신으로 중국에서 전래된 성리학이 우리나라에서 정착되고 체계화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 지어졌다. 1614년에는 이황의 제자였던 조목(1524-1606)도 함께 종향되었다. 서원이 학문과 학파의 중심 기구로 발전하는 한국 서원발전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이 비대칭으로 구성된 특징이 있으며 탁월한 자연경관으로 인하여 일대의 경관을 묘사한 다양한 작품들이 남아 있다. ▲안동 병산서원 전경.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으며 1572년 서애 류성룡 선생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겼다. 1662년에는 류성룡의 아들이자 그의 학문을 계승한 류진(1582-1635)을 종향하였다. 서원을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만인소를 조선시대에 최초로 작성하는 등 공론장으로서의 서원 역할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곳이며 많은 학자의 수용이 가능한 큰 규모의 만대루는 자연경관과 조화의 탁월성을 보여준다. 병산서원 목판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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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이희호 여사 향년 97세로 별세“사랑과 화합”, “평화통일” 유언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창천감리교회 장로,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가 지난 6월 10일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이희호 여사는 “우리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유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이희호 여사는 이화여고, 이화여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한 후, 귀국해서는 YWCA 초대 총무를 맡는 등 여성인권 향상에 앞장선 인물이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혼하면서 야당 정치가의 아내로, 정치적 동지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해왔다. 지난 14일 치러진 창천감리교회 장례예배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우리는 한 시대와 이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례는 ‘여성지도자 영부인 이희호 여사 사회장(社會葬)’으로 엄숙히 치러졌고,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곁에 안장됐다. 윤형구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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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4‧끝)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5) 김승학 목사 논문 연재(5)-김점향 권사(4‧끝)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 (1907~1998) 목차 1. 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아기 2. 믿음의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결혼한 여성 3. 안동 3·1 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든 어린이 4. 여자성경학교에서 공부한 교회의 재원(才媛) 5. 성전건축을 위해 쌀 한가마를 헌금한 가정 6. 안동교회 첫 권사 3인 중 한 명 7.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산 증인(證人) 8. 개척교회를 적극적으로 도운 여성 9. 여교역자 복지의 효시인 경안성로원 첫 원장 10. 90년 동안 안동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9. 여교역자 복지의 효시인 경안성로원(慶安聖老院) 첫 원장 경안노회는 복지에 관한 한 국가나 다른 노회보다 앞서간 노회다. 복지에 관한 지대한 관심은 은퇴 여성교역자를 위해 1953년 경안성로원을 설립하게 했다. 경안성로원은 은퇴 여교역자의 생계와 여생을 돌보아줌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성로원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으로는 경안노회와 영주노회에 소속된 은퇴 여교역자로서 경안노회 또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에서 추천을 받아 성로원 이사회의 입원 승낙을 받아야 했다. 현재 운영은 경안노회 보조, 이사의 후원회비, 여교역자회의 후원, 여전도회 연합회와 지 교회에서 보내온 성탄헌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현재 경안성로원에는 5명의 은퇴한 여교역자가 생활하고 있다. ▲경안성로원은 반피득 선교사가 기증한 금곡동 183-1번지 소재 52평의 한옥에서 시작되었다. 이 가옥에는 처음으로 여교역자 4명이 거주했으며, 현재 안동성소병원 신관 입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진의 우측 초가집이 경안성로원 첫 가옥으로 알려져 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경안노회에서는 노쇠하고 병약하며 무의무탁한 은퇴 여교역자들의 노후를 배려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당시 은퇴한 김순애 전도사가 당장 거처할 처소가 없게 되자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경안성로원 설립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53년 제24회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총회는 은퇴 여교역자를 위한 생활관을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1953년 8월 금곡동 183-1번지 가옥에서 경안성로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당시 반피득 선교사가 기증한 52평의 한옥에는 처음으로 여교역자 4명이 거주했으며, 현재 안동성소병원 신관 입구에 위치했다. 1954년에는 2명이 거주했고, 이후 입주자는 김순애, 김정숙, 양정애, 안주봉 등이 있었다. 후에 김구암, 권성찬, 김병규, 윤손흥, 권귀출, 김순교, 문초야 등도 입주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의 기존 가옥으로 인해 성로원 신축건물의 요청은 계속되었고, 1956년 금곡동 138번지에 경안성로원이 준공될 수 있었다. 당시 조운선·설의돈 선교사가 건축비와 운영비를 담당하였고, 안동 선교부, 미국 인디아나교회,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안동교회, 안동동부교회 등이 건축을 위해 후원했다. 1956년 제27회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조운선 선교사를 경안성로원 원장으로 선출했다. 그 후 1978년, 금곡동 180-3번지에 소재한 경안신학원 여기숙사를 매입하여 이전하였다. ▲경안성로원은 성소병원 옆 금곡동 2차선 도로 건너편 주차장인 금곡동 180-3번지에 소재한 경안신학원 여기숙사를 매입하여 이전하였다. 현재 서후면 저전리에 위치한 경안성로원을 신축하여 이전하기 전까지 22년 동안 사용하였다. 김점향은 여기숙사를 구입하기 위해 예전의 성로원과 성로원 소유의 밭을 팔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현재 임만조 장로가 사는 주택은 예전에 성로원 소유의 밭이었는데 임 장로가 구입하게 되었다. 결국 처음의 성로원 가옥과 성로원 소유의 밭을 판 것으로 여기숙사를 살 수 있었다. 이곳은 20여 년 동안 은퇴한 여교역자의 휴식처로 사용되었다. 그 후 2000년 2월 서후면 저전리 292-1번지에 건평 148평 규모의 경안성로원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로원의 원장은 누리는 높은 자리가 아니다. 인내하며 겸손히 섬겨야 하는 가장 낮은 자리이다. 노쇠하고 병에 걸린 여성 교역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점향의 자부인 박춘희 권사(안동교회)의 증언에 따르면 초기 성로원의 재정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기관 등을 방문하여 후원을 받아 성로원을 어렵게 운영하다가 시(市)에서 배급하는 식량을 받게 되어 어느 정도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로원이 설립된 1953년부터 1978년까지는 조운선 선교사가 원장으로 근무했지만 김점향은 실질적인 원장의 자리에 있었다. 김점향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참고 인내하면서 무려 25년 동안 원장으로 은퇴 여교역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김점향과 가까이 살고 있던 임만조 장로는 김점향이 성로원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헌신했음을 기억하고 있다. 임 장로가 1972년 경안여자중학교의 교감이 되었을 때, 성로원 일로 김점향에게 밤낮없이 전화가 왔고 그때마다 옆에 사는 김점향에게 연결해주었다고 한다. 숨기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던 김점향의 통화를 듣게 된 임 장로는 자연스럽게 성로원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1970년대 중‧후반 임 장로는 성로원의 이사로, 또한 이사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힘이 남아있을 때까지 김점향이 붙들고 헌신한 것은 성로원에서 은퇴한 여교역자를 돌보는 일이었다고 임 장로는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께 은혜를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이웃에게 갚는 것이 바로 섬김이라는 사실은, 김점향으로 하여금 무려 4반세기 동안 경안성로원장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했다. 10. 90년 동안 안동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김점향은 교회의 모든 일에 앞장서서 헌신한 분이었다. 그는 맡겨진 일에 적극적으로 임한 인물이다. 일평생 안동교회 여전도회의 중심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주일학교 교사, 부장으로 수고했다. 그는 안동교회의 여러 분야에서 여성 평신도의 리더였다. 또한 그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존경받는 여성지도자였다. “비록 나보다 연배가 20세 정도는 어렸지만 김 권사님을 존경할 만한, 본 받아야 할 만한 영적 어른으로 삼았다.” 한 집사님의 이와 같은 증언은 김점향의 영적 권위와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김점향은 여전도회 회원들에게 있어서 선배나 후배들의 롤 모델이었다. 김점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를 여걸로 기억하고 있다.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기골이 장대했으며, 음성도 우렁차 여장부로서 손색이 없었다는 것이다. 전경상 장로는 김점향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탁월한 여성지도자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청년연합회 활동으로 당시 경안신학원 원장이었던 김기수 목사님께 인사하기 위해 사택에 갔을 때 김점향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인사했을 때 김점향은 “잘하라”라고 격려했는데, 그 말이 어떤 사람의 말보다 존경할 만한 권위와 강한 힘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이유는 김점향에게 지도자로서의 덕망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점향은 교회 안과 밖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남성과 여성에 관계없이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는 잊을 수 없는 여성지도자였다. 아니 그를 굳이 여성지도자라고 국한할 필요가 없다. 그는 안동교회가 낳은 지도자였다. 외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에 처음으로 출석한 1909년 8월 8일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1998년 10월 19일까지 90년 동안 안동교회를 떠나지 않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김점향은 교회에 출석한 이후 90년 중 오랜 세월 동안 안동교회와 경안노회를 위해 헌신한 믿음의 사람으로 남녀 성도 모두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래서 이런 지도자를 안동교회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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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인 줄 알았죠? 영주시청 직원이에요”영주시, 직원(가족) 모델 통한 홍보 ‘차별화’ 나섰다 ‘현장감 잡고 신뢰감 높이고’…초상권 문제도 해결 “모델인 줄 알았죠? 영주시청 직원이에요” 경북 영주시청 직원들이 시정 홍보자료의 초상권 문제 해결과 홍보콘텐츠 다양화를 위해 직접 홍보서포터즈로 나서 화제다. 시는 직원(가족) 홍보서포터즈 제도를 도입해 인물이 들어간 현장감 있는 홍보사진 촬영과 SNS 콘텐츠 발굴에 적극 나서고 있다. 시는 지난 5월 지역 관광지, 축제 등을 비롯한 각종 시정소식을 널리 홍보할 ‘직원 홍보서포터즈 인재풀’ 제도를 도입 25명의 직원들과 12명의 가족을 선발해 홍보사진과 영상 등에 직접 출연하도록 했다. 얼굴보다 ‘미소’가 아름다운 직원,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직원, 영주 홍보에 열정과 자부심을 가진 직원들로 구성된 홍보서포터즈는 개인 참여부터 3대 가족(부부공무원, 조부모, 3자녀), 다자녀, 부부, 커플, 자매, 직장동기 등 그룹참여까지 구성원도 다양하다. 희망 홍보매체도 사진, 영상, SNS, 유튜브, 지역방송 출연 등 다채롭다. 특히 다양한 연령층과 그룹으로 구성된 직원 홍보서포터즈는 앞으로 힐링도시, 선비도시, 아동친화도시 등 영주이미지 홍보는 물론 지역의 축제, 관광, 특산물, 볼거리, 시정 소식 등을 알리는 대표 얼굴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앞서 직원 홍보서포터즈들이 2019영주 한국선비문화축제, 숨은 관광지 소개, 여름 인기상품 풍기인견 홍보 사진(영상) 촬영 등에 참여해 SNS상에서 큰 인기를 얻은 바 있다. 박용진 홍보전산실장은 “시정 홍보 사진촬영과 영상 제작에 직원 및 가족이 직접 서포터즈가 돼 참여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며 홍보 효과를 높이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향후 시민대상 홍보서포터즈 선발로 확대해 친근하게 다가서는 시정홍보를 펼쳐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편, 시는 SNS캐릭터 ‘힐리’를 개발해 페이스북과 블로그 등을 통해 동영상과 웹툰 등의 콘텐츠를 선보여 쌍방향 소통으로 지자체 홍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 공직자 한 명 한 명이 영주 홍보맨이 되어 SNS 홍보채널을 강화해 나가겠다는 방침이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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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출신 판소리의 거장 명창 박록주선생, 도로명으로 다시 기억되다▲구미출신 판소리의 거장 명창 박록주선생, 도로명으로 다시 기억되다. 구미시는 구미 출신 판소리의 거장 명창 박록주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구미시 고아읍 관심리에 있는 박록주 생가 인근 도로인 ‘관심로’를 ‘박록주로’로 변경했다고 밝혔다. 명창 박록주(朴綠珠. 1905년~1979년) 선생은 구미시 고아읍 출신으로 동편제 창법의 국보적 존재로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흥보가, 춘향가)의 예능 보유자이다. 또한,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설립하여 판소리를 보존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여 현대 판소리계를 이끈 대표적인 여성 명창으로, 판소리계에 우먼파워를 심은 인간문화재로 잘 알려졌다. 이번 도로명변경은 (사)명창 박록주기념사업회(이사장 정택균)와 지역주민들의 적극적인 관심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며, 주소사용자의 혼란을 최소화하고자 생가 인근에 있으면서도 기존 주소사용자 수가 적은 관심로의 도로명을 변경하게 되었다. 이번에 도로명을 변경한 박록주로 이외에도 구미시에는 역사적(대표적)인 인물을 딴 도로명으로, 여헌로(여헌 장현광), 경은로(경은 이맹전), 야은로(야은 길재), 왕산로(왕산 허위), 단계동(서)길(단계 하위지), 박정희로가 있다. 김정섭 토지정보과장은 “구미시 문화·예술의 대표적인 인물을 도로명에 반영함으로써 전통문화와 예술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또한 주소가 변경됨으로써 주소사용에 불편을 겪을 수 있지만 동참해주신 주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전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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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기도원 구국기도회’ 무형문화재 지정 추진56년간 릴레이 기도회, 한국교회 기도의 터전애향숙‧감리교신학대 주최 제3회 학술세미나 열려 한국기도원의 본산이자 성령운동의 진원지로 꼽히는 용문산기도원(원장 나서영 목사)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히 이뤄지는 가운데, 최근 용문산기도원이 56년째 이어오는 릴레이 구국기도회에 대한 국가 무형문화재 지정 추진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용문산기도원의 구국기도회는 지난 1963년 4월 30일 새벽에 시작되었으며, 지금까지 단 1분도 쉬지 않고 기도가 이어지고 있다. 기도를 희망하는 예정자들이 미리 순번을 받아 무더운 여름의 한낮이나 추운 겨울의 새벽에도 쉬지 않고 기도가 계속되는 한국교회 기도의 터전이다. 이에 (재)기독교대한감리회 애향숙(이사장 전명구 목사)은 지난 5월 1일 경북 김천시 용문산길에 위치한 용문산기도원(원장 나서영 목사)에서 ‘용문산기도원 제3회 학술세미나’를 열고 구국기도회를 본격적으로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용문산기도원 구국기도회 56주년을 맞아 열린 이번 학술세미나는 감리교신학대학교(오성주 총장직무대행) 주관으로 이뤄졌으며, 감신대 소요한 박사(한국교회사)와 박철호 목사(기념탑교회)가 발제자로, 감신대 이후정 박사(역사신학)가 논찬자로 함께 했다. 먼저 ‘용문산기도원 구국기도회의 역사적 고찰’을 주제로 강의에 나선 소요한 박사는 “기도가 시작된 구국제단은 설립자인 아실 나운몽 목사가 1940년 6월 13일 애향숙 창설 이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던 기도처에서 시작됐다”며 “나운몽 목사는 땅의 문제를 기도회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했던 인물로, 구국기도는 신앙에 있어 선택의 문제가 아닌 의무라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이후정 교수(역사신학)는 “아실의 삶과 사역은 이 민족의 구원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며, 오직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해 바쳐졌다는 감동적인 역사”라며 “그가 걸었던 길은 예수 십자가 고난의 길이었고, 자기 이익과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정신을 이 한반도와 한민족에 호소했던 발자취였다”고 강조했다. 이후 박철호 목사(기념탑교회)가 구국기도회의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한 절차와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박 목사는 “구국기도에 관한 것은 먼저 기네스북에 등재해 세계유산으로도 삼을 만하다”고 크게 평가하며, “용문산기도원에 관한 무형문화재 등록은 지금부터 빨리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윤형구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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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노회 구미남시찰회 ‘은퇴 원로목사‧장로 위로회’ 가져▲경서노회 구미남시찰회는 지난 17일 은퇴 원로목사·장로를 초청해 위로하는 행사를 열었다. 선배 목사와 장로들의 피땀 어린 헌신과 눈물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이러한 부분을 잊지 않기 위해 예장(통합) 경서노회 구미남시찰회(시찰장 김경연 목사)는 몇 해 전부터 5월 스승의 날을 즈음하여 은퇴 원로목사‧장로를 초청해 위로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지난 5월 17일(금) 오전 11시 금오산호텔 연회실에서는 구미남시찰회 소속 은퇴 원로목사와 장로 21명 중 정영화 목사(구미시민교회 원로)를 비롯한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위로회 행사가 진행됐다. 시찰장 김경연 목사는 “구미시 복음화를 위해 젊음을 불태워 사역하신 선배님들을 존경한다”며 “은퇴 후에도 애정 어린 사랑과 기도로 격려해주심에 감사하고, 선배님들이 개척해 놓으신 그 길을 당당하게 달려가겠다”고 말했다. 정영화 원로목사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공대해주니 고맙다”고 말한 뒤 “시찰회가 날마다 부흥되고 일취월장 발전하도록 계속 기도하겠다”고 전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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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사 터 추정지에서 쌍탑(동·서)가람(추정) 확인▲황복사 터 추정지에서 쌍탑(동·서)가람(추정) 확인(대석단) (사진제공=경주시) 경주시(시장 주낙영)가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의 허가를 받아 (재)성림문화재연구원(원장 박광열, 이하 연구원)에서 3차 발굴조사하고 있는 경주 낭산 일원(사적 제163호)에서 통일신라 이전에 만들어진 황복사 추정 금당지(법당이 있는 자리)와 쌍탑(동·서 목탑)지·중문지(中門)․회랑지(回廊, 지붕이 있는 긴 복도) 등이 배치된 것으로 보이는 추정지를 확인하였다. 또한, 통일신라 이후에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과 함께 조영된 대석단(大石壇) 기단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기단 건물지, 회랑지도 확인했으며, 금동입불상, 금동판불, 비석 조각, 치미, 녹유전을 포함해 700여 점의 유물도 확인하였다. 연구원은 오는 16일 2회(오후 1시 30분과 3시)에 걸쳐 발굴현장을 출토 유물과 함께 공개한다. * 치미(鴟尾): 지붕의 장식기와로, 건물의 용마루 양 끝에 올려 건물의 위엄을 높이고 귀신을 쫓는 역할을 함 * 녹유전(綠釉塼): 전돌의 표면에 유리질의 녹유를 씌워 장식성을 높인 전돌 황복사(皇福寺)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654년(진덕여왕 8년)에 의상(義湘)대사(625~702)가 29세에 출가한 곳으로, 허공을 밟고 올라가 탑돌이를 했다는 설(說)로 짐작컨대 목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1942년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해체 수리할 때 나온 사리함(舍利函)에서 확인된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 명문을 통해 종묘의 기능을 한 왕실사원으로 추정된다. 그간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중, 2016년 1차 발굴조사에서는 제34대 효성왕(737~742)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위한 미완성 왕릉, 건물지, 남북도로 등을 확인하였다. 2017년 2차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 시대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 대석단 기단 건물지와 부속 건물지 그리고 회랑, 담장, 배수로, 도로, 연못 등 신라 왕실사원임을 추정할 수 있는 대규모의 유구와 금동불상 7점을 비롯해 약 1,000여 점의 유물을 출토했다. 지난해 12월부터 시작한 3차 발굴조사에서는 1금당(金堂) - 2탑 - 중문으로 추정되는 사찰 건물지가 남북 방향으로 난 일직선에 배치된 형태가 확인되었다. 금당지는 정면 7칸, 옆면 4칸으로, 규모는 동서 28m, 남북 16m이다. 탑지는 동서의 일직선상에 대칭되게 6×6m의 규모로 2기가 확인되었는데, 너비 1.5m의 줄기초 위에 원형 적심과 초석을 올린 형태로, 평면배치와 형태로 볼 때 목탑지로 추정된다. * 줄기초: 띠 모양으로 길게 이어진 기초 * 적심: 마루나 서까래 뒷목을 보강하기 위해 커다란 나무를 눌러 박은 것 그러나 규모가 작고 주변에 비각(碑閣)이 있으며 중문지와 가까이 있는 점으로 볼 때, 이후에 축조된 종묘와 관련된 제단일 가능성도 있다. 중문지는 초축과 중축이 이루어졌고 규모는 정면 3칸, 옆면 2칸이다. 초축 연대는 중문지 적심과 추정 목탑지에서 출토된 짧은다리굽다리접시(단각고배, 短脚高杯) 등 토기와 연꽃무늬 수막새 형식으로 볼 때, 6세기 후반으로 판단된다. * 비각(碑閣): 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건물 이후 제32대 효소왕(692~702) 때는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조영되면서 왕실사원으로서 종묘의 기능을 담당한 동서 방향의 대석단 기단 건물이 만들어졌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과 동시에 축조된 1호 대석단 기단은 현재 남아있는 길이가 남북으로 30m이고, 2호 대석단은 남북으로 길이 57.5m, 동서로 길이 20m다. 가장자리에는 단랑(單廊, 들보 사이가 한 칸으로 된)의 회랑을 돌렸다. 1호 대석단의 상단에는 삼층석탑이, 2호 대석단의 대회랑 내부에는 비각만이 존재하는 특별한 공간이 마련된 것으로 보아 신라 왕실의 종묘적 기능을 담당한 특수 시설로 판단된다. 2017년 2차 조사에서 확인한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는 동쪽에서 묘(卯, 토끼), 사(巳, 뱀), 오(午, 말), 미(未, 양)가 조각된 4구였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북쪽에서 축(丑, 소), 자(子, 쥐), 해(亥, 돼지), 술(戌, 개) 4구를 추가로 확인하였다. 십이지신상 탱석은 왕릉에서 옮겨와 건물지의 기단석으로 재사용된 것으로, 전(傳) 황복사지로 추청되는 1차 금당지 일부를 훼손하고 축조되었으며, 탱석, 면석, 갑석 등으로 판단해 볼 때, 왕릉의 크기는 지름 15~16m로 추정된다. * 탱석(撑石): 면석과 봉토가 붕괴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돌 * 면석(面石): 기둥과 기둥 사이 얇게 막은 쪼갠 돌 * 갑석(甲石): 물건 위에 뚜껑처럼 올려놓는 납작한 돌 이번 발굴조사 결과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재)성림문화재연구원(배군열 연구원, ☎054-741-2831)으로 문의하면 된다. 이번 3차 발굴조사는 통일신라 시대 가람배치와 왕실 사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문화재청은 경주시와 함께 앞으로도 황복사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이어갈 계획이다. ▲황복사 터 추정지에서 쌍탑(동·서)가람(추정) 확인(동목탑지) (사진제공=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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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2)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1907~1998) 4. 여자성경학교에서 공부한 교회의 재원(才媛) 1908년 안동선교부가 세워진 후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성경공부 열풍이 불었다. 안동선교 초기인 1910년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영주 내매에서 개설되었던 6일간의 성경공부 모임에 무려 270여 명의 남자들이 참여했다. 또한 이듬해인 1911년에는 더욱 빈번한 성경공부 모임이 있어, 8차례에 걸쳐 1,340명이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했다. 이것을 본 선교사들은 앞으로 지역교회를 지도해 갈 지도자를 양육할 목적으로 1912년 여자성경학원을 세웠다. 여자성경학원은 선교사 사택을 이용했다. 여성성경공부반은 일주일에 두 번씩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모여 새디 선교사가 월요일에는 젊은여성반, 목요일에는 중년여성반을 인도하였다. 특히 1914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한 인노절 선교사는 보다 체계적이고 확대된 성경학교 운영을 위해 1920년 4월 여자성경학교를 남녀성경학교로 확대개편 하였다. 이때 인노절 선교사는 성경학교의 교장, 권찬영 선교사와 안대선 선교사는 교사였다. 개교 첫해인 1920년 가을, 비록 독립된 학교 건물은 없었지만, 무려 130명이 등록했으며 성소병원 진료실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성경 외에 위생, 산수, 한문, 음악, 개인전도법도 가르쳤다. ▲1920년 4월 10일 개원한 안동남녀성경학교 학생 중 1926년 촬영한 여자성경반 학생들 사진.(오른쪽 남성은 당시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 배경 건물은 1925년 준공한 인노절기념성경학교로 후에 경안신학원으로 개칭하여 수많은 교역자와 장로, 권사 등 평신도를 배출했다. 김점향은 1920년 중반 여자성경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수학했다. 아마 성경학교의 졸업은 그로 하여금 보다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는 20대 초반 이미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젊은 여성의 중심인물이었다. 그 결과 1932년부터 1956년까지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서기였다. 무려 24년 동안 서기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여자성경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성경과 기초적인 신학, 그리고 교회 등에 관해 공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5. 성전건축을 위해 쌀 한가마를 헌금한 가정 지금도 예배를 드리고 있는 안동교회 예배당을 돌집 예배당이라고 부른다. 이유는 화강암을 쌓아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안동교회 예배당은 1936년 봄에 기공하여 1937년 4월 6일에 기초면적 160평의 2층 건물이 준공되었다. 예배당 건축계획은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기성회를 조직하고 1926년 9월 19일 첫 번째 회의를 했다. 하지만 박 목사는 교회를 사임하고 새로운 임지인 일본 오사카로 떠나게 됐다. 따라서 돌집 예배당은 후임인 5대 임학수 목사로부터 본격화되었다. 또한, 경안노회는 1933년 2월 경안노회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본당 신축에 모든 교회가 힘써 헌금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돌집 예배당 신축은 안동교회 성도 뿐 아니라 노회 경내 교회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의 설계는 권찬영 선교사의 의뢰를 받아 당시 일본에 와 있던 미국인 선교사인 보리스였고, 시공은 당시 최고의 건축회사인 서울 복음건축장을 운영하고 있던 중국인 왕공온(王公溫)이었다. 임학수 목사는 예배당 신축을 위해 선교사들을 꾸준히 설득했으며, 노회 경내의 여러 교회를 순방하면서 경안노회 중심인 안동교회 예배당 신축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건축모금도 계속했다. 또한, 예배당 건축에는 어린이·어른·남녀 구분 없이 온 성도들이 마음과 뜻을 다했다. ▲역사적인 안동교회 2층 석조예배당은 교인과 지역교회, 안동주재 선교사, 타지역선교부, 안동성소병원 의사들, 뜻있는 사람들의 합력으로 완성되었으며, 오늘까지 경북북부지역 교회 부흥의 센터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다. 이때 김점향의 가족도 동참했다. 당시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온 성도들이 힘을 모을 때 김점향의 남편인 강신효는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굶더라도 교회 짓는 데 최선을 다해 헌금해야 한다.” 김점향 가정은 당시에 큰 금액인 쌀 한 가마를 건축헌금으로 했다고 한다. 또한 십 년 전 90을 넘긴 한 장로님은 예배당이 건축될 때 자신이 어렸지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예배당 건축에 사용된 돌 2개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안동교회 온 성도들은 교회를 건축하는 데 한마음이 되어 낙동강에서 모래를 파오는 사람도 있었고, 돌을 지고 옮기는 사람도 있었다. 6. 안동교회 첫 권사 3인 중 한 명 1746년 존 웨슬리는 ‘권고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권사(勸師)라는 직분을 만들었다. 권사는 목회자를 돕기 위하여 전도와 봉사, 심방, 그리고 권면 등을 위하여 선출되었다. 이 권사 직분은 미국 감리교회를 통해서 한국의 감리교회, 그리고 장로교회에서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1955년 제40회 예수교장로교총회에서 봉사를 잘 감당하는 여성의 직분으로 권사를 주기 시작했다. ▲1985년에 있었던 기관별 경창대회에 참석한 여전도회 회원의 모습.(오른쪽 끝이 김점향 권사, 오른쪽에서 4번째가 송점출 권사) 1968년 첫 권사로 임직한 3명의 권사 중 김일애 권사는 1972년에 별세하여 이 사진에서 그 얼굴을 볼 수 없다. 비록 1955년 장로교단에서 권사가 시작되었지만, 안동교회의 첫 권사는 13년이 지난 후 1968년 8월 3일에 배출되었다. 이때 취임한 권사는 3명이었으며, 송점출, 김일애, 김점향 권사이다. 이들은 이미 안동교회와 경안노회를 위해 충성을 다해 헌신해온 전설적인 여성들이었다. 이들의 권사 취임으로 안동교회는 항존직에도 여성이 포함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첫 권사로 취임한 3명의 권사 중에서 김일애 권사는 1972년 1월 16일 별세함으로, 송점출 권사는 1975년 3월 30일 정년으로 은퇴했다. 그리고 김점향 권사는 1978년 정년으로 은퇴했다. 1969년 11월 20일 경안노회 선교 60주년 기념식이 안동교회에서 있었다. 이때 경안노회 경내에 14명의 60년 이상 계속 믿음을 지킨 성도가 있었는데, 이 중에 김점향 권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안동교회에서 첫 권사가 취임 이후 두 번째 권사 취임은 1년 반이 지난 1971년 역시 3명의 권사가 취임했을 정도로 권사 취임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설립된 지 70년이 되는 1970년대까지 안동교회에서 취임한 권사의 총수가 11명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김점향의 초대 권사 취임은 그만큼 상징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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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관광 어렵지 않아요, 편리한데다가 관광해설까지▲구미관광 어렵지 않아요, 편리한데다가 관광해설까지, 구미관광시티투어 운행(리플렛).(사진제공=구미시 관광진흥과) 구미시(시장 장세용)에서는 구미를 찾는 외래 관광객이 지역의 풍부한 관광․문화자원을 보다 쉽게 둘러볼 수 있도록 관광시티투어를 운행하고 있다. 타지로 여행을 떠나려는 관광객을 가장 망설이게 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아마「어디를 둘러봐야 하는지」와「교통편은 어떻게 되는지」일 것이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고 관광의 편의를 제공하고자 시에서는 3월부터 시티투어 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지역관광지 이미지를 담은 밝고 활동적인 디자인으로 랩핑된 구미시티 투어 전용버스는 매월 둘째·넷째주 토요일과 전통시장 장날 중 매월 지정일에 각각 다른 여행테마를 가지고 구미역(09:20) 앞과 구미시청 정문(09:30) 앞에서 출발하고 있다.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는 인물·불교문화 투어, 넷째 주 토요일에는 유교문화 투어를 운영하고 매월 지정일에는 전통시장 투어를 운영하고 있으며, 매회 관광해설사가 동승하여 구미의 다양한 역사·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 여행객들은 구미만의 다양한 매력을 보다 잘 느낄 수 있다. 또한, 한 달에 3번 있는 정기투어 외에 고객 맞춤형 수시투어도 진행하고 있다. 투어일자, 코스 등을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시티투어로 25명이상 단체면 신청가능하다. 수시투어는 고객이 직접 코스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구미국가산업단지 및 근대산업유산 투어, 체험관광 등 다양한 코스도 준비되어 있다. 수시투어를 이용하면 외래 관광객 뿐 아니라 지역 초·중·고 학생들의 지역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 증진을 위한 체험학습 등에도 활용할 수 있다. 시티투어 이용 요금은 1인 2,000원으로 식대와 입장료 등은 개인이 준비해야 하며 예약은 구미문화원 홈페이지(www.gumicc.or.kr) 또는 전화(054-482-4452)로 예약하면 된다. 친구, 가족, 단체 등 구미시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구미관광 시티투어를 이용하여 편리하게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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