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용문산에 울린 ‘회복’의 기도기독교대한감리회 삼남연회(감독 권영화) 주최 ‘2017 영적각성연합대성회’가 ‘성령의 역사로 날마다 부흥하는 삼남연회’라는 주제로 지난달 31일 오후 4시부터 지난 2일까지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김천 용문산기도원(원장 나서영 목사)에서 연회 소속 목회자와 성도 등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잘못된 신앙관으로 인한 영적 혼란과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 속에 바른 영성과 바른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용문산기도원에서 열린 이번 집회에는 150만 감리교도들의 수장인 전명구 감독회장을 강사로 초청, 큰 은혜 받고 믿음으로 살기를 결단하는 시간이 됐다. 첫날 개회 예배는 경북서지방 김동규 감리사의 인도와 창원서지방 김기범 감리사의 대표기도로 시작됐다. 김기범 감리사는 기도를 통해 “우리민족이 위기에 처하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기도하던 자리인 용문산기도원에, 첫사랑은 물론 기도와 열정마저 잃어버린 이들이 위기를 맞아 갈 길을 잃어버린 나라를 위해 다시금 기도하러 나왔다”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나라를 살려달라”고 간구했다. 김생녀 장로(여선교연합회장)의 성경봉독과 대구지방 교역자의 특별찬양 후 전명구 감독회장의 ‘회복’(겔36:25~31)이란 제목의 설교가 이어졌다. 전 감독회장은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는 예수의 보혈로 씻김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이며 “그러한 이들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자녀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시고, 자녀 또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고 전했다. 따라서 하나님께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가 ‘승리자’이며, 기도하여 응답받는 이가 ‘성공자’, 말씀에 순종하여 성령님의 통치를 받는 이가 ‘행복자’(축복자)라고 강조했다. 이어 현지은 학생의 봉헌 찬양 후 삼남연회 권영화 감독의 축도로 예배 순서를 모두 마쳤다. 한편,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된 2017 영적각성연합대성회는 새벽 5시와 오전 10시 30분, 저녁 7시에 걸쳐 진행됐으며, 회복, 아침에 돋는 해 같은 삶, 열리는 복, 저절로 열린 문, 그곳으로 가라, 멋지게 살자, 여기가 좋사오니 등의 제목으로 메시지가 선포됐다. ※ 2017 영적 각성 연합 대성회 조직표 ▲자문위원: 정양희 감독(전), 석준복 감독(전), 김진흥 감독(전) ▲대회장: 권영화 감독(현) ▲부대회장: 이영기 목사, 황병원 목사, 박준선 목사, 이성우 목사, 양진수 목사 ▲상임회장(준비위원장): 장성만 목사(부흥단장) ▲사무총장: 장석재 목사(연회 총무) ▲상임총무: 김종복 목사(부흥단 총무) ▲서기: 현철승 목사(부흥단 서기), 강태봉 목사(부흥단 부서기) ▲회계: 박두식 목사(부흥단 회계), 유길호 목사(부흥단 부회계)
-
설립 113년을 맞은 ‘칠곡 숭오교회’(1904)경북 칠곡군 지역교회 가운데 1904년 4월 27일 설립됨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경복노회 숭오교회 113년 약사 1962년 1월 12일 칠곡군 시찰 사경회 기념사진 1950년대의 숭오교회 정경 2017년 현재의 교회정경- 우측에 증축된 모습(엘리베이터 4층 운행 및 화장실 2개 층)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진 1906년도 당시 사진(숭오동 715번지) 건평 18평 토관 예배당 여성도 두 사람이 찬송 부르는 모습과 둘러앉은 당시 성도들 정경 ‘행복과 미래가 있는 공동체’ 서성수 목사 숭오교회 숭오교회는 칠곡군 북삼읍 태평1길 21-8번지에 위치한 교회로 1904년 4월 27일 설립되어 올해로 113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 서성수 목사가 담임하고 시무장로 김태영 장로, 조영복 장로, 이상근 장로, 한광현 장로, 김경식 장로, 이재학 장로로 당회가 구성되어 있고 원로장로에 김장우 장로, 이상인 장로, 이시역 장로 은퇴 장로로 한재학 장로가 현재 출석하며 장립 집사 9명, 은퇴 권사 11명, 시무권사 10명과 서리집사 남녀 40명과 성도들이 섬기고 있다. 2017년 현재 세례교인 약 160명, 주일학교(유치부, 유초등부, 중고등부, 청년부)포함 약 220여 명이 금오산 뒷자락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다. 교회 장기 표어는 ‘행복과 미래가 있는 공동체’이며 2017년 표어는 ‘복음 진리로 삶의 우선 가치를 바로 세우자’(마6:33) 실천사항으로 ①진리의 말씀에 길들임 받는 성도. ②축복의 통로 되어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성도. ③열방과 이웃을 품고 선교에 주력하는 성도. 숭오교회의 설립 유래는 1901년 선산군 구미면의 상모교회 정인명 전도인의 전도로 당시 창립교인이 된 장운환 씨가 최초 신자가 되어 동년에 이해기, 조수근, 안명석, 박원실, 김성환, 한복동, 홍년표 등 제씨의 남신도와 이달선, 김분이, 이달년, 박두리 등 제씨의 여신도들이 매주일 30여 리의 먼 거리를 걸어서 선산 상모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03년 정재봉, 오제세, 오인종, 장교린, 배암이, 한경빈 등 제씨와 다수의 여신도를 더 얻었으며, 동년 가을부터 많은 인원이 주일마다 상모교회로 가는 것이 불편하고 거리가 먼 관계로 김천의 월명교회로 출석하기로 의논하고 출석하게 된다. 그러던 중 성도들이 뜻을 정하고 기도하면서 이 지역에 교회설립을 작정하여 본격적인 기도와 함께 구체적인 추진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1904년 4월 27일에 교회가 세워지는데 교인은 약 50여 명이었다. 당시는 아직 예배당이 마련되지 못했기에 성명 미상이지만 성도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것이 오늘날 숭오교회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후 교인의 수는 나날이 늘어 가고 개인 집에서 예배드리기에 비좁고 불편하여 교회건축을 위해 온 성도들이 정성 들여 헌금하고 힘을 모아 1906년 숭오동 715번지에 건평 18평의 토관으로 예배당 건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숭오교회 설립 연월일 구체적인 자료는 소실되었지만 연로하신 분들의 구전을 통해서, 1904년 4월 27일이라고 전해지게 된다. 설립연도는 1904년이 확실하고 4월 27일 역시 오랜 역사 가운데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연로하신 교우들의 증언을 취합하여 4월 27일로 확정하게 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교회사’에 보면 총회에 보고한 것이 1905년도에 숭오교회가 창립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우리 교회가 설립 될 그 당시 1903년도에 선산의 상모동 교회와 금릉의 월명교회가 설립되었고, 1904년도엔 칠곡의 왜관교회, 1905년도에는 칠곡의 숭오교회 외 20여 개 교회가 개척되었으며, 1906년도엔 칠곡의 복성교회가 설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숭오교회가 왜관교회보다 1년 늦게 기록된 것은 필자의 견해로 볼 때, 왜관교회는 당시 군청과 읍사무소와 인접한 관계로 행정적인 보고와 함께 설립연도의 기록이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상대적으로 숭오교회는 당시 칠곡군과 금릉군과 경계선에 있는 관계로 행정적인 보고와 기록 등이 늦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보면 북삼면에 숭오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1905년 선교사 부혜리(傅惠利)의 전도로 신자를 얻어 설립자로 정재봉에게 성수로 인도자가 되면서 교회가 시작되었는데, 오제세를 집사로 하고 조사에는 정윤삼이 시무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계속되는 특기할만한 숭오교회의 역사는 차기 호에 연재하기로 한다. 주소: 경북 칠곡군 북삼읍 태평1길 21-7번지 전화:054-973-1071
-
영천 자천교회(永川 慈川敎會)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2호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773 이 교회는 1903년에 미국인 선교사 어드만(Erdman)이 신자(信者)들과 합심(合心)하여 지은 것으로 전국에서 보기 드문 한옥교회이다. 건물은 동서쪽으로 약간 긴 네모형태의 우진각(모임)지붕이며, 주 출입구는 양 측면에 두었다. 내부는 후면의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중앙부는 칸막이를 설치하여 남·녀석을 구분한 예배공간을 마련하여 구한말의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였다. 구조는 나지막한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세워 절충식 지붕틀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양식의 건물은 선교 초기에 구미인(毆美人) 선교사들이 지은 한·양 절충식(韓·洋 折衷式)으로, 개신교사(改新敎史)와 건축사(建築史) 연구의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안이와 선교사와 권헌중 장로의 노고재에서 만남 자천교회 설립 이야기 자천교회 이야기는 1898년 안의와 선교사의 경북 동부와 동북 지방의 2개월 전도여행에서 시작한다. 그는 대구에서 출발하여 영천을 거쳐 청송으로 전도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 권헌중은 안의와 선교사와 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었다. 원래 자천교회 설립자 권헌중 장로는 경주의 작은 마을의 선비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 훈장이었다. 그가 서당 훈장으로 살아가고 있던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지배를 당하고 있는 시절이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 헌병들이 각 군 소재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며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지사들은 일본 헌병들과 맞서 싸웠다. 이러한 탓에 낮에는 일본 헌병의 천국이요. 밤은 의병 천지였다. 일제로부터 당하는 고통은 면소재지에 있는 양반과 천민들이나 할 것 없이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때문에 견디기 힘든 일제의 고통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자신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권헌중에게 있어서도 고통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경주에 있는 한적한 곳의 선비로서 서당 훈장의 생활을 접고 청송군 현서면 수락이라는 곳에 이주하여 살게 된다. 하지만 수락에서의 생활도 길지 않았다. 그곳의 생활도 접고 또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 현서면 수락에서 대구를 향하고 있었다. 안의와 선교사는 영천을 거처 청송으로 선교 여행을, 권헌중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서 대구로 각자의 목적을 향하여 길을 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던 이들의 만남은 영천시와 청송군의 경계를 잇는 ‘노고재’라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권헌중은 노고재에서 휴식을 하던 중 안의와 선교사를 만나게 된다. 권헌중은 당시 처음 만나는 외국 사람이었고, 모양새도 우리나라 사람과 달리 키와 눈과 코가 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말을 서툴게 한 탓에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또 권헌중과 함께 동행하던 가족들과 노비, 머슴들은 자신들의 모습과 많이 다른 안의와 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괴물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한바탕 웃는 일도 벌어졌다는 우스운 일화도 있다. 권헌중은 노고재에서 안의와 선교사와 첫 만남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에 관해서 듣게 되었다. 안의와 선교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관하여 들은 권헌중은 대구로 이주 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보현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신촌면 자천리에 작은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그곳에 머물며 안의와 선교사와 왕래하면서 성경 말씀을 배웠다. 한국 초기 교회들의 역사가 대부분 그러하듯 자천교회 역시 작은 초가집의 사랑방에서 시작이 되었다. 권헌중은 자기가 살고 있는 초가집을 예배당 겸 서당으로 사용했다. 낮에는 서당으로 사용하며 한문을 가르쳤다. 저녁에는 함께 성경을 공부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된 자천 교회의 당시 교인은 서당에 다니는 문동과 권헌중을 따라온 노비와 머슴들이 전부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권헌중은 당시 나라에서 처음으로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자신이 먼저 상투를 자르므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개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데리고 있던 노비들의 문서를 태워버리고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계급과 신분을 타파하고, 그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었다. 복음에 대한 권헌중의 열심에 안의와 선교사도 덩달아 신이 나서 대구에서 자천까지 열악한 도로 상황을 뒷전으로 하고 자주 방문하여 성경에 관하여 토론하며 확실한 교인들로 만들어 나갔다. 초가집 사랑방의 자천교회의 모임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신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공간이 협소하였다. 따라서 초가집 사랑방이 아니라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대구 지방의 기독교 사립학교인 희도학교가 안의와 선교사에 의해서 대구제일교회 구내 초가집에서 1900년 11월 11일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1907년 10월 23일에는 신명학교가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서 개교하게 된다. 대구를 중심으로 학교를 개교한 후 안의와 선교사는 1902-1910년 사이에 경북 각처 교회들에게 400원씩 보조하여 학교를 설립하게 하였고, 각 교회는 학부대신(현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얻어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당시 영천지방에 있는 교회도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름이 밝혀진 학교는 평천교회의 기독양덕학교, 신령교회의 흥화학교, 우천교회의 기독진도학교와 더불어 권헌중은 운영하던 서당을 폐하고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2년제 학교인 신성소학교의 설립을 하였다. 하지만 자천교회가 설립한 신성소학교의 설립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권에서 ‘1913년 남학교를 설립하여 생도(生徒) 50명을 교육하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 ‘경북교회사’에서는 ‘1914년 자천교회는 학교를 설립하여 생도 50여 명을 교육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연대를 학교의 설립 연대로 볼 수 없다. 이는 학교가 설립한 후에 노회나 총회에 보고된 연대이기 때문이다. 노회 보고 연대를 기준과 2년 재 학교라는 것을 고려하고, 초가집 교회에서 목조건물 교회 건립을 고려해 볼 때 신성소학교 설립 연대는 대략 자천교회 목조 건물을 헌당 하던 때와 비슷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권헌중 장로가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세운 신성소학교는 처음 남자 반을 모집했다. 그러던 중 안의와 선교사가 여자반도 모집할 것을 권헌중에게 권유했다. 그는 권유를 받아들여 여학생을 모집했지만 지원자가 없었다. 아무리 설득해도 지원자가 없어서 자신의 딸인 권수기씨를 입학시켜 여학생 1호가되었다. 후에 권수기씨는 신명여교에 입학하여 제2회 졸업생이 되었으며, 그 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권헌중은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신성소학교를 설립하므로 복음의 요람으로 자천교회뿐만 아니라 교육의 요람으로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용한 시골에서 글을 가르치던 선비 권헌중은 안의와로부터 받은 복음에서 출발하여 자천이라는 시골 동네에 초가집 예배당과 서당, 그리고 목조 기와의 ‘一子’형 예배당을 건립하여 복음 전도와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어 왔다. 권헌중은 새롭게 건립된 예배당에서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영수의 직분을 가지고 교회를 섬겼다. 1915년 당시 권헌중과 더불어 서석희와 정해민이 자천교회 영수로 섬기고 있었다. 세 명의 영수를 중심으로 교회가 든든히 서가던 중 첫 번째 장로를 장립 할 수 있는 시기가 자천 교회에 찾아왔다. 교회는 권헌중을 장로로 세워줄 것을 결정하고 1920년 6월 11일 제8회 경북 노회에 청원을 하여 허락을 받은 후 공부하였다. 노회의 절차를 밟아 권헌중은 장로 청원이 있은 후 1년 반이 조금 넘은 1922년 2월 26일 오전 11시 새롭게 건립된 본교회 목조 예배당에서 위철지 목사의 주례로 장로 장립을 가지게 됨으로 교회 설립이후 첫 장로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자천교회는 처음으로 당회가 조직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권헌중이 장로로 임직하던 해인 1922년 5월 13~18일까지 자천교회는 새롭게 건립된 목조 예배당에서 김성로 목사를 초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부흥회에 참석한 사람은 본 교회 성도들 50여 명과 각처 교회에서 온 신자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중에 풍성한 은혜를 받았다. 또 저녁에는 200명이 넘는 신자들이 말씀을 청강하는 동시에 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60여 명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가 40여 명이 되었다. 부흥회를 통하여 교회를 보수하기 위해서 헌금 5백10여 원이 드려지므로 더 풍성한 은혜와 결실이 있었다. 권헌중은 장로 장립을 기점으로 하여 교회의 활동도 왕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경북노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
‘전도하지 않는 교회, 불 꺼진 교회는 희망이 없다’ ‘행복한 전도세미나’ 칠곡 약목중앙교회에서 개최 취재: 편집부장 최영열 장로 새봄을 맞아 각 지역·교회별로 전도에 관심이 높아지고 ‘전도 집회’와 ‘전도 세미나’가 속속 개최되고 있다. 지난달 19일 칠곡군 약목면 소재 약목중앙교회(담임목사 박종환) 본당에서도 국민미션 주관 ‘2016 행복한 전도세미나’가 개최, 150여명의 참석자들 가슴속을 주님 사랑과 뜨거운 전도 열정으로 불붙게 했다. 행복한 전도세미나는 교회에서 쉽게 적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전도법을 하루 동안 무료로 진행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7시간 동안 진행된 세미나에는 ‘복음의 능력전도'이란 제목으로 황일구 목사와 ‘모유전도법'이란 제목으로 엄호섭 장로, ‘안 될 수 없는 부흥'이란 제목으로 박재열 목사, ‘전도에는 방학이 없다’란 제목으로 박상철 목사가 강사로 나섰다. 아래에는 이날 강의들을 간추려 정리했다. ‘성도님 전도가 너무 쉬워요’의 저자 새대구교회 황일구 목사 “문 닫는 교회가 늘어나고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낮아지는 이유는 교회와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하지 않고 이론과 방법으로만 전도하기 때문이다.” 황 목사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가장 큰 죄이며 그런 자에게 주님은 촛대를 옮겨 버린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계2:5)고 전했다. ‘유럽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유럽인들이 복지로만 사용하면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무너져 가고 있다. 어려워지는 것이 정치를 잘못해서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예수를 안 믿기 때문이다’고 분석했다.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5천년 동안 가난하게 살던 대한민국에 하나님께서 촛대를 꽂으시자 이 나라가 부유하고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아무리 미개한 나라도 주님이 촛대만 꽂으시면 잘 사는 나라가 된다. 그 촛대가 미국을 떠나려 한다. 현재 미국에는 동성애를 비판하는 설교와 길거리 전도를 하면 감옥에 가야 한다. 나와 이 나라 모든 성도도 첫사랑의 감격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그런데 지난 고난주간을 지나며 십자가의 주님을 얼마나 묵상했고, 감격과 통곡의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가? ‘전도하지 않는 교회, 불 꺼진 교회는 희망이 없다.’ 전도해야 믿음이 변질되지 않고 첫사랑이 식지 않는다. 전도는 사실 그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하는 것이다. 첫사랑을 유지하는 방법은 전도 외엔 없다. ‘성도가 가진 온 부동산을 다 팔아 헌금하는 것보다 더 많이 헌금할 수 있는 방법은 전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한국작은교회살리기운동본부장 박재열 목사(동선교회) “‘전도는 불신자를 데리고 와 예수 믿게 하는 것’이지, 작은 교회 교인을 데리고 오는 것은 ‘양 도둑질’일 뿐이다”라고 일갈(一喝)한 후 전도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을 것을 강조했다. 박 목사는 매년 2,400여개 교회가 설립예배를 드리는 것에 비해 3,000여개 교회가 문을 닫고 있는 실정이라 국내 교회의 수는 자연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음과 전국 교회 중 75% 교회가 자립이 어려운 교회임을 인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15년 전 ‘작은교회 살리기운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박 목사는 “예수님께서 만드신 교회는 구원선(한국 교계의 0.5%에 불과)이지 유람선이 결코 아니며, 구원선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 성도들이 유람선에 탄 승객처럼 편안함과 재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2년 전 학생들을 비롯한 310여명이 세월호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온 국민이 심한 좌절에 빠졌고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있다”며 “생명 존중의 마음이 존귀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매일 죽어가는 사람(750여명이 사망)이 얼마인지, 예수님을 알지 못해 지옥 가는 이들(불신자의 죽음 650여명)이 얼마인지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에서 불에 타 죽어가는 이를 돕지 않고 40여 초 동안 동영상을 촬영해 비난을 받는 이가 있었다”며 “주변의 죽어가는 불신자들의 영혼을 보면서도 안타까워 않는다면 이와 다를 바가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김 목사는 특히, 불신자의 영혼은 사탄이 잡고 있기 때문에 뜨거운 기도, 많은 기도, 감동받을 정도의 사랑 베풀기, 맛있는 음식(먹어야 맘이 부드러워짐), 악착같은 전도를 실천하라고 당부했다. 어부가 물고기떼를 만나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소리를 지르며 난리가 나는 것처럼, 경북은 ‘물 반 고기 반’의 상황이므로 전도자는 낚고, 잡기만하면 된다며 적극적인 헌신을 촉구했다. 반면, 마귀와 좌파들도 ‘영혼 구원’ 없는 ‘밥퍼’와 ‘나눠주기’, ‘자선 사업’을 좋아한다면서 영혼 구원을 우선하지 않는 어떠한 자선행위도 하나님과 관련이 없다고 못 박고 주의를 당부했다. 모유전도법으로 전교인 전도대를 만들고 있는 엘림전도훈련원장 엄호섭 장로 모유전도법은 어린아이가 태어나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때까지 모유를 먹여 키우듯이 한 영혼이 교회에 등록해 서리집사가 될 때까지 ‘천번의 기도와 백번의 만남’을 가질 것을 강조하는 전도법이다. 하나님께서 전도에 대해 축복을 약속해 주셨지만, 사람들이 전도하지 않는 이유는 ‘전도를 은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도는 은사가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다. 마28:18 이하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가 전도하고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전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물질, 건강, 직장 등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 3가지 생활전도법의 첫째는 ‘무릎의 전도’이다. 전도할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둘째는 ‘손의 전도’이다. 전도 대상자를 사랑으로 섬기고 도와주는 것이다. 사랑의 수고는 ‘저 사람이 우리 형제보다, 우리 가족보다 고맙다고 할 때 복음이 전해진다. 셋째는 ‘발의 전도’이다. 전도대상자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3년 이상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찾아보는 것을 말한다. ‘전 교인 전도대’는 전교인 모두가 전도대가 되어 모두가 움직이면 자연히 모두가 스스로 움직인다.(환경순응의 법칙)는 법칙에 따라 전교인을 기도, 물질, 노방전도대로 조직한다. 기도전도대는 1주일에 10번 이상 교회에 나와 기도하는 전도대이며, 물질 전도대는 1~2끼 금식하여 남긴 물질로 헌금하는 전도대를 말하며, 노방전도대는 나가서 말하기보다 들어주는 역할을 감당하며, 예수님 자랑과 교회 자랑, 목사님 자랑을 반드시 들려준다. 교회가 지역에 좋은 소문이 나지 않으면 전도는 끝이다. 전도에는 방학이 없다고 외치는 ‘호떡 목사’ 박상철 목사 인천의 온제자교회를 섬기는 박상철 목사는 교회 개척과 함께 겪었던 목회 사역을 진솔하게 나누며 그 가운데 역사하셨던 주님의 사랑과 능력, 예수님의 마음을 전했다. 지하 예배당을 마련해 개척 예배를 드리고 전도를 열심히 다녔지만 10개월 동안 교인이 단 한명도 찾지 않는 상황, 한 영혼의 소중함과 주님의 애타는 마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후 동역자를 보내 주셨고 호떡 전도를 통해 초등학생들과 지역 사회의 호의적인 이미지를 구축, 전도의 열매를 거두기 시작했다. 7년째 계속되는 초등학교 정문 앞 호떡 전도는 아이들의 가슴 속에 “호떡 먹고, 예수 믿고, 천국가자, 온제자교회 가자”란 구호를 새겨 놓게 했다. 박 목사는 주님의 강권에 따라 밤 12시에 전도지를 갖고 밤거리에 나서게 된 간증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예비된 동역자, 복음을 기다리는 안타까운 영혼들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이 꼬이거나 영적으로 그늘이 질 때, 열정이 식고 무기력해질 때 전도지를 들고 밖으로 나가면 성령 충만함과 문제 해결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박 목사는 우리 인생의 남은 기간이 너무 짧고 촉박하기에 세상 것 다 가지려고 세월 허송하지 말고, 적당히 벌고 새벽기도 지키고 자녀 위해 기도하자고 당부했다. ‘커피 향에 취해 마음이 즐거워지고, 목구멍이 열림으로 마음이 열린다’ 커피와 한잔과 함께 복음을, 연천 군남교회 이재은 목사 ‘이게 뭐지, 이게 뭐야?’ 설립 60년 된 교회에 처음 부임 받아 예배당을 들어서면서 이재은 목사가 받은 첫 느낌이었다. 냄새나는 고무 실내화와 물새는 예배당에서 배어나오는 악취에 이 목사는 양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성도가 중심인 노년층 성도 구성,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 갈라진 벽채, 비새는 지붕, 물 올라오는 바닥, 침울한 교회 분위기 등 어느 것 하나 가능성이 엿보이지 않는 교회. 새는 비를 막으려니 벽이 부실하고, 벽을 고치려니 바닥마저 습기로 예배당 전체를 공사해야 할 상황. 암담해서 기도하며 울고 있는 이재은 목사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비전을 보여 주셨다. ‘기도실을 리모델링해 카페를 만드는 것’이었다. 공사를 시작하자 ‘교회가 망해서 업종 변경 한다’고 소문이 나고 ‘돈 많은 목사가 왔다’는 소문 등등 이 목사를 더욱 힘들게 했다. 카페 공사를 마치고 일터에 나가고 사람이 보이지 않는 시골 동네, 이 목사는 커피기계를 준비해 주민들을 찾아 다녔다. 절대 전도지를 지참하지 않고, 일단 사람을 만나면 준비해간 가방 속의 소형 커피 기계로 커피부터 내렸다.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고급 커피향에 주민들의 마음이 열려 먼저 말을 건네 오기도 했다. 가족 중에 신앙을 가진 이를 이야기하고, 옛날 어린시절 교회 다닌 이야기 등을 스스럼없이 건네는 등 주민들의 말을 다 들어주고 기도해주길 여러번, 결국 그들이 먼저 교회를 찾아 왔다. 이 목사는 “1년에 뿌리는 수만장의 전도지와 전도 물품으로 교회를 찾는 이가 없는 반면, 커피 전도는 먼저 커피 향에 취해 마음이 즐거워지고, 목구멍이 열림으로 마음이 열린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음이 열린 상태로 1~2분간 간단히 전하는 복음이 훨씬 효과적이었다고 간증했다. 이후 교인들로 운영되는 카페는 ‘주님께 섬기듯 하자’는 이 목사의 뜻을 실천, 입 소문이 나면서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 되었고 더불어 교회도 한층 더 밝아졌다. 교회는 차를 타지 않고선 올 수 없는 시골에 있지만 하루 150~200여명이 커피와 함께 복음을 듣고 가는 카페 교회가 됐다. 한편, 국민미션은 ‘신바람나는 세상, 희망을 노래하는 교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문화콘텐츠를 통하여 한국교회 부흥과 성장 발전에 기여하고자 설립된 선교단체이다. 교회 창립행사, 새성전입당, 새생명전도축제, VIP 초청 전도, 이웃주민을 위한 음악회 등 각종 집회를 기획·제작, 건전한 문화 공간을 제공하는 교회 모습을 통해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지역복음화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행복전도세미나는 광고 및 강사비, 포스터, 전단지, 현수막, 순서지 등 모든 경비를 국민미션에서 무료로 지원해 주고 주최하는 교회는 중식과 장소만 제공하면 된다. 세미나를 원하는 교회는 전화(02-782-7153)로 접수하면 된다.
-
국내 자비량 목회자 김경환 목사목록 본문 국내 자비량 목회자 김경환 목사 취재·정리: 편집부장 최영열 장로 사도 바울처럼 선교사역을 자비량(장막업-Tent maker)으로 감당하는 해외 선교사들이 있기는 하지만 국내 목회에 있어 자비량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목회라면 당연히 풀타임 사역이라는 인식이 자리매김한 탓인가?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이 땅엔 아직도 많은 수의 미(未)자립교회들이 존재하고 시골 벽지엔 고령화된 성도들로 구성된 어려운 농촌교회들이 지역마다 산재해 있다. 그 삶의 터전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농촌교회 성도들을 위해 묵묵히 사역을 감당해 가고 있는 목회자들의 삶 또한 각박한 처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때, 어려운 농촌목회자의 삶을 도우면서, 시골 교회를 세워가는 자비량 목회자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에 소재한 ‘용문하금교회’ 김경환 담임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김 목사는 괴산에서 목회하던 중 고향인 울릉도에서 함께 신앙생활 했던 곽일부 목사가 용문하금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차 방문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남은 곽 목사와의 은퇴로 인해 이뤄지지 못했고, 다만 목자 없는 양떼와 허물어져 가는 예배당의 모습을 보면서 이곳을 찾은 김 목사의 마음은 아파왔다. 당시 교회는 사례금을 드릴 수 없는 형편이라 목사님을 모시지는 못하고, 다만 은퇴 시점에 갈 곳 없는 목회자가 와서 물질에 상관없이 사역해 주길 기대하는 정도였다. 김 목사가 기도 후 교인들과 다시 만나 교인들이 조건을 들어 준다면 사역을 하겠다고 말했다. 먼저, 맡아 오던 기업이 있기 때문에 사택은 필요 없다. 둘째, 사례비는 전혀 없어도 된다. 마지막으로 거처하는 숙소가 멀기에 새벽기도는 인도할 수 없다는 조건이었다. 성도들이 근근이 예배를 인도하며 지켜오던 시골교회, 목회자 모시기를 위해 기도하던 성도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2014년 8월, 김경환 목사는 용문하금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됐다. 김 목사는 먼저 비가 새는 예배당 공사를 비용을 들여 마쳤다. 이어서 공사용 철근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을 정도로 농사용 창고보다 못한 교회 식당을 리모델링해야겠다고 제안하자 대부분의 교인들이 반대했다.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김 목사는 출향 교인들의 지원과 김 목사의 부담, 은혜 받은 이들의 헌신을 합하여 결국 공사를 마무리했다. 또 외부 지원을 받아 종탑을 깔끔하게 해결했고, 식당에 비용을 들여 화목보일러를 설치, 교인들이 훈훈한 겨울을 날 수 있게 도왔다. 고난주간에는 교인들을 상대로 세족식 행사를 열어 섬겼고, 추수감사주일이 되면 김 목사가 직접 생산한 꿀을 교인들에게 선물했다. 명절엔 일체 목사에게 선물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김 목사가 준비한 현금 봉투를 교인들에게 나눠줬다. 특별한 날이 되면, 성도들에겐 김 목사가 키우는 염소를 잡아서 대접하고, 마을 잔치에는 돼지를 잡아 대접했다. 이렇게 선한 사업을 계속하다 보니 이젠 주위의 돕는 손길도 생겨 훨씬 더 즐겁고 보람되게 섬길 수 있게 됐다. 현재, 교회에서 헌금 1등은 김 목사이다. 이렇게 많은 물질로 지역 사회와 교회를 섬기고 교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김 목사가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가 있기 때문이다. 김 목사가 현재 경영하는 사업은 양봉과 염소 농장이다. 군 제대 후 울릉도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양봉을 처음으로 접했다. 몇 번의 어려움을 겪고 난 후 깨달은 것은 벌을 지으신 하나님 관점에서 벌을 키워보자는 확신이었다. 새로운 시도로 인해 당시 벌을 키우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방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었고, 현재는 많은 이들이 그를 따라 양봉을 하고 있다. 김 목사는 현재 선진 양봉을 교육하는 농업기술센터 주최 전국 강의를 제일 많이 다니는 강사이다. 목회자로서 김 목사는 양봉 강의의 기회도 놓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삼고 있다. 강의 중간중간 하나님과 인간, 구원에 관해서 설명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교육생들에 증거 하고 있다. 3박4일 강의 시엔 반드시 하루는 예배당에서 강의해 기독교엔 친근감을 느끼도록 노력하고 있다. 김 목사가 양봉(국사골양봉농원)을 통해 올리는 수익은 연간 약 1억원 이상, 그 중 1억원 가량을 선교비로 사용하고 그 나머지를 생활비로 사용한다. 생산한 꿀은 미자립 교회가 판매해 자립할 수 있도록 목회자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해 준다. 또 양봉교육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꿀 생산이 어려운 이들에겐 꿀을 나눠주고 다음 해 생산을 많이 하면 그때 갚으라고 공급해 주기도 한다.(진대법 개념, 회수율 10%에 불과) 현재 특히 김 목사가 역점을 두고 시작한 사업은 염소농장이다. 호주산 염소인 ‘보아’ 종을 70여두를 사육하고 있는데, 300마리를 목표로 하고, 우수한 형질의 보아 원종 염소를 구하고 있다. 숙소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셨다. 김 목사가 숙소와 농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집(유천면 소재)은 과거 법당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칡넝쿨이 집안으로 들어올 정도로 폐허가 된 상황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자 조차도 일반인이 살 수 없는 곳이기에 목사님 정도 되는 사람이라야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정도로 기가 센(?) 곳이었다. 그곳은 과거 전국의 무당들이 모여 큰 굿을 하던 집이었으며 집 둘레 곳곳이 촛불을 켜고 지성을 드리던 곳이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범접(?)지 못한 탓에 김 목사는 시가의 1/4 가격으로 건물을 구입할 수 있었고 지금껏 잘 사용하고 있다. 김 목사가 이렇듯 나눠주는 목회를 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다섯명의 자녀를 잃고 낙심한 아버지는 무당을 찾아가 안타까움을 호소하자 무당이 말하길 “나하고는 안 맞고, ‘오랑캐당’에 가라 ‘야수교당’” 해서 절박한 심정으로 교회를 찾았고 예수님을 만났다. 이후 5자녀를 더 낳고 건강하게 양육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신 아버지는 이후 평신도로서 교회를 개척(울릉도 중령교회)하신 것은 물론, 좋은 것은 모두 교회에 갖다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기를 시작해, 형제들과 함께 무척이나 어렵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어린 시절 점심식사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정도) 공무원으로, 성공한 사업가로 성장한 김경환 청년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실생활 적용에 많은 괴리감을 느끼고 갈등하고 방황하던 중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했다. 곧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은 것이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에서, 성경을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기록하신 하나님 심정으로 바라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은혜에 감사해 신학을 하려 했지만 고생길을 가려는 아들을 어머니가 막으셨다. 수년이 흐른 후 37의 늦은 나이인 1997년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울릉도에서 육지로 나왔다. 사역을 시작하면서 김 목사는 물질과 관련된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목회자가 되면 나눠줄 수 있을 정도의 준비가 될 때 사역을 시작하자. 자비량 목회자가 되자. 생계도 어려울 정도로 가난한 교인 가정에서 헌금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수입원 없어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살아가는 용문하금교회 노인 성도들과 이웃 주민들이 헌금이 부담스러워 교회 못 나오는 일이 없도록 김 목사는 헌금을 하지 말라고 독려(?)한다. 헌금 부담 때문에 교회 못 나오는 것보단 차라리 하나님 말씀을 한번이라도 더 듣게 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현재, 교회는 귀농 2가정과 교회 인근 주민들, 공무원 가정 등 20여명이 출석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김 목사 1년에 1번씩 북한 땅과 철책이 보이는 통일전망대를 찾아간다. 굶주리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마음껏 먹이고 싶은데 안타까워 혼자 울고 내려온다. 또 세계 곳곳의 미(未) 전도 종족을 찾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싶은 큰 소망이 있다. 그래서 해외로 나갈 기회가 있으면 1달러짜리를 많이 바꿔서 나간다. 비판도 하는 이들도 있지만 복음을 30분 듣는 아이들에게 1달러씩 나눠줬다. 김 목사는 신령한 영적 양식인 복음을 전할 수 있어 좋고, 또한 가난한 아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어 너무 기쁘다고 했다. 그는 또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너무나 좋지만, 머릿속 이론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추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설교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씀이 실생활에 이뤄질 때까지 무슨 일에든 중간에 평가하려 말고, 말씀을 보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강조했다. 그 말씀의 열매들을 분명히 거둬 본 체험들이 확실하기에 그의 설교는 힘이 있다. 그는 이후에 하나님 주신 복음을 인근에 소재한 안동대나 경북대 상주캠퍼스 대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야 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더 많이 전해주고 싶은 열망 때문이리라. 그의 나이 50대 중반, 세월이 유수처럼 빠르다는 것을 느끼기에 더욱 시간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믿음으로 달려가길 열망하는 김 목사의 꿈이 주님 안에서 조속히 이뤄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김 목사의 가족으로는 강은숙 사모와 2남인 정혁(대전침례신학대학원 재학), 창혁(대학 2년)이 있다. 국사골양봉농원(대표 김경환 목사 010-3795-2805)
-
청송황금사과 한국시리즈 진출청송군(군수 윤경희)은 오는 11월 5일(월) 청송군의회, 청송사과 생산자단체와 농협 등 사과유통 관계자들과 함께 한국시리즈 2차전이 열리는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청송 황금 사과 한국시리즈 나들이’라는 주제로 대대적인 청송사과 홍보행사를 펼친다. 군은 청송사과의 대표 품종인 ‘부사(후지)’와 황금 사과로 불리는 ‘시나노 골드’를 프로야구팬들 앞에 선보일 계획으로, 윤경희 청송군수를 비롯한 청송사과 홍보요원 150여 명이 “청송사과 맛보세요~”를 외치며 잠실야구장 입장객 수 만큼인 청송사과 26,000여 개를 현장에서 무료로 나누어 준다. 한편, 청송사과는 농식품 파워브랜드 대상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으며, 2013년부터 6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에 선정되어 이미 국내 소비자들에게 명품사과로 인정받고 있지만, 매년 국내산 과일의 소비량이 감소하고 있는 등 과일 산업이 위기를 맞고 있는 현시점에서 무료 나눔과 시식행사를 통해 청송사과 브랜드 가치가 더욱 상승하고, 다양한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윤경희 청송군수는 “청송사과 브랜드 가치와 명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군은 이에 만족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각종 메이저 스포츠를 활용한 다양한 이벤트와 지속적인 홍보 판촉으로 청송사과 명성을 더욱 공고히 유지해 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
故 봉경 이원영 목사 生家 총회 사적지로 지정안동서부교회(예장통합, 이정우 목사 시무)는 당회 결의(2018.1.28)로 봉경 이원영 목사 생가를 경안노회(2018.2.9.)를 경유하여 총회 사적지 지정을 신청했었다. 이에 지난 3월 27일 총회역사위원회 위원장(정우 목사)과 실무자들이 사적지 지정 타당성 확인차 생가를 현장 방문하였다. 그 후 총회역사위원회에서 지정 여부를 검토한 결과 사적지 지정 요건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평가되어 사적지로 지정하기로 하였다고 통보하였다. (2018.8.7) 제103회 총회(2018.9.10.~13) 본회에서 인준(총회장 공포)을 받아 총회 역사위원회와 협의하여 지정식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원영 목사 생가 사적지 신청이유 및 근거로 신청한 내용> 이 집은 퇴계 이황의 14대손인 이원영 목사(1886 –1958)가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아버지 이관호와 어머니 김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혁신 유림으로 5세부터 한문을 사숙하였으며, 1919년 3월 18일 예안면 3.1운동을 주도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복역 중 이상동 장로의 전도로 기독교 신앙에 입신하였다. 출옥 후 안동 성경학교(1925)와 평양 장로회신학교(1930) 제25회를 졸업한 후 영주, 이산, 안기, 신세, 안동서부교회 등 안동지역 교회를 담임하였다.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대해 이원영은 1938년부터 해방이 되기까지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4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출옥한 그는 1946년 ‘경안고등성경학교(현 경안신학원)’를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54년에는 제39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으로 추대되어 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발표하였다. 정부에서는 예안면 3.1운동의 공로로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으며, 1999년 11월 2일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에 이장되었다. 이원영 목사의 생애는 애국지사요, 참된 교육자요, 사랑의 목회자요, 산 순교자로서 고난을 영광으로 승화시켜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셨다. 이러한 업적을 남기신 이원영 목사의 생가를 총회 한국기독교사적지로 지정하여 안동 지역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근대 문화유산으로서의 역사적, 교육적, 문화적, 종교적 가치와 의의를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며, 특히 지역교육청과 연계하여 자라나는 미래 세대들에게 나라사랑 교육의 장으로서의 기회를 제공하여 애국심 고취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글=안동서부교회 역사편찬위원장 김두진 장로〉 〈사진=안동서부교회 제공〉
-
“영적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 되게 하소서”예장통합 경서노회 제134회 정기노회가 10월 15일(월)~16(화)까지 상주교회당에서 열렸다. 개회예배는 곽희주 부노회장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기도는 부노회장 도영일 장로, 성경봉독은 회록서기 김경환 목사, 설교는 노회장 김영춘 목사가 “영적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 되게 하소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김 목사는 “영적부흥 없이는 민족의 동반자가 될 수 없다”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주님의 희생과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가 거룩해지고 교회가 거룩해지고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성찬예식 후 예배를 마치고 회무처리 시간에는 회원점명과 개회선언, 회순채택 후 임원 선거를 했다. 선거 결과 제134회 노회장에 곽희주 목사(상주교회), 부노회장에 정만익 목사(구미하은교회)와 박상도 장로(대광교회)가 선출돼 노회를 섬기게 됐다. 신임노회장 곽희주 목사는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부족한 저를 노회원들이 도와주신다면 노회를 은혜롭고 평화롭게 이끌어가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신임 임원진 ▲노회장 곽희주 목사(상주교회), ▲부노회장 정만익 목사(구미하은교회), ▲부노회장 박상도 장로(대광교회), ▲서기 윤석호 목사(문경시찰), ▲부서기 장영운 목사(김천동시찰), ▲회록서기 이병철 목사(구미시찰), ▲부회록서기 감기수 목사(구미남시찰), ▲회계 서정호 장로(상주시찰), ▲부회계 백평목 장로(김천시찰)
-
‘100교회 건축선교회’ 선교현장 보고-이해견 장로지난 10년 우리 선교회에서 C국 M족들에게 13개의 예배당을 지어주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갈수록 출입의 위험을 느껴 촛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나만 어떻게 되고 마는 것이 아니고, 1번부터 13번까지 내가 관계된 곳도 온전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2017년도 11월에 V국으로 옮겨서 선교 사역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손자하고 둘이 들어가 14, 15, 16호를 착공하고 돌아왔고, 이후 방송출연, 간증집회, 광고, 지인들의 후원 등으로 올해에는 5개 교회의 착공 준비를 하게 되었다. 다음은 3개 교회 헌당예배와 5개 교회 착공예배를 위해 최근 V국을 다녀온 선교현장 보고이다. 9월 17일, 목사님 두 분, 장로님 세 분, 권사님 집사님 등 모두 13명으로 이루어진 선교팀은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해마다 이쯤이면 연례행사처럼 선교지를 방문하기에 이제는 망설임, 두려움 없이 집을 나서게 된다. 그동안 혼자 가서 헌당하고 착공하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13명을 인솔하게 되서 오히려 부담되었다. 지병이 있으신 분, 노약하신 분, 해외에 처음 나가는 분 등 기도해야 할 분이 여럿 계셨다. 그러나 우리는 관광하러 가는 것도, 해외 사업을 위해 가는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선한 목적으로 가는 것이기에 크게 염려는 되지 않았다. 첫날 4시간 반 정도 걸려 하노이 공항에 도착하고, 현지 파송된 선교사님의 안내로 호텔에서 1박을 했다. 그리고 둘째 날 아침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체험했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정면으로 통과할 것으로 예보되었던 태풍 라이온의 예상 경로가 어긋난 것이다. 태풍이 북상하면서 대만과 중국 남부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날씨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태풍의 진로를 바꾸시면서까지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이 느껴졌다. 또한, 이 사역을 위해 수많은 한국의 성도들과 현지 교인들이 합심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다. 날씨가 딱 좋았다. 열대의 후덥지근한 날씨는 바람이 날려버렸고, 하늘에는 구름기둥이 덮여있었다. 7~8시간을 버스로 달려 현지 호텔 근처까지 왔을 때, 어둑어둑해지더니 금방 고산지대의 어둠이 내려 깜깜해질 무렵, 타고 간 버스가 고장이 나고 말았다. 고장 난 버스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아 현지 호텔 차를 불러놓고 바깥 깜깜한 어둠 속 길가에서 기다릴 때는 걱정 때문에 마음이 매우 힘들었다. 교회 건축은 영적 전쟁임을 실감했다. 현지 차로 응급 대치하여 겨우 호텔에 도착했다. 사역지의 첫날 밤, 힘든 여정 가운데에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며 나는 몸살약을 한 봉지 먹고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호텔에서 쌀국수 등 현지 음식으로 든든히 아침 식사를 하고 일정을 시작했다. 오전에 4개 교회, 오후에 4개 교회가 예정되었다.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는 14호 ‘넘제교회’ 헌당예배이다. 지천교회의 지원으로 건축한 교회다. 도착할 때 가슴이 뛰었다. 지난해 손자하고 와서 풀밭에서 현수막을 들고 사진 찍고 기도하던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아름답게 지어져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고 희열과 감격이 솟구쳤다.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누가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속으로 기도했다. 몰려든 현지 아이들에게 가방과 주머니에 있던 과자나 간식거리들을 나누어 주었다. 드디어 새 성전 앞에 도착했다. 출입문 기둥을 부여안고, 흐느끼며 감사의 눈물을 쏟았다. 헌당 감사예배가 시작되었다. 우리 13명은 힘차게 찬송을 불렀고, 감격해서 오열하는 권사님도 계셨다. 현지인 통역을 세워 현지 성도들과 우리 모두 은혜로운 예배가 진행되었다. 모든 진행을 맡은 나는 “N교회 성도 여러분! 교회 건축하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헌금도 많이 하셨지요? 일도 많이 하셨지요? 이렇게 아름답게 잘 지은 예배당을 볼 때마다 행복하시지요? 이곳에 와서 기도하십시오. 예배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소원에 다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나라 백성들이 다 예수 믿게 기도하십시오.”라고 당부했다. 두 번째 ‘은푹교회’로 출발했다. 이 교회는 경산계당교회 홍갑연 권사님이 12호에 이어 15호 교회를 지원하여 지으신 교회다. 내가 계당교회에 간증 갔을 때, 간증에 은혜 받았다고 하시면서 교회 헌당에 참여하신 것이다. 자동차가 현지까지 못 가서 성도들이 제공한 오토바이로 우리 13명은 ‘앵앵앵...’하며 새 성전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지원한 교회 중에 가장 넓게 잘 지은 예배당이다. 눈짐작으로 60평은 족히 될 듯하다. 권사님이 헌당 감사로 플라스틱 의자를 지원하였고, 교인도 많이 모였는데 재적 교인이 3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계당교회 이종덕 목사님은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곳에 나타나게 됨을 감사하다”며,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축복하셨다. 현지 성도들은 권사님 이름으로 감사패를 마련해 주었다. 준비한 헌당기념 타올을 나누어 주고 모든 행사를 끝낸 뒤 착공할 20호 ‘라오짜이교회’로 이동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1개, 2개, 또는 3개의 교회를 착공하게 해주셨다. 올해 초에도 처음에는 걱정했지만, 곧 상림교회 신일균 장로님이 은퇴기념으로 17호 ‘시온교회’를, 본회 회장 차순규 장로님도 장로은퇴기념으로 18호 ‘신짜이교회’를 지원해 주셨다. 상림교회 이종수 집사님은 100교회 건축 선교회의 광고문을 읽고 감동하여 19호 ‘쭈케오교회’를 부인 김지은 집사님 이름으로, 20호 ‘라이짜이교회’를 본인 이름으로 지원을 작정하고 건축비 전액을 입금해 주셨다. 그리고 지천교회 김귀화 권사님이 21호 ‘바오까오교회’를 결정해주셨다. 1년에 3교회 헌당에 5교회 착공이라니…. 라오짜이교회로 이동하면서 나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해외 선교는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어떤 분들은 ‘100교회 건축선교회’의 사역을 이해 못하고 조롱하는 분도 있다. 예배당 지어주는 일은 헛된 일이라고 말하는 현지 선교사도 있다. 그러나 본선교회는 지원해주신 건축비를 직접 현장에서 그 나라 돈으로 지불하고 영수증까지 받는 등 선교비 전액을 100% 선교 명목으로 지출한다. 또한, 착공하는 교회에 가서 ‘100교회 건축선교회’의 취지를 설명한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예배당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예배당을 지어가려고 합니다. 이곳에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는 여러분도 열심히 헌금 하고 땀 흘려 일도 해야 합니다. 예배당 지을 땅은 마을에서 가장 좋은 곳을 선택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성도가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원금을 한 번에 다 드리지 않습니다. 착공할 수 있게 지원 금액의 절반을 오늘 드리고, 골조 공사가 완공되면 남은 금액의 절반을 선교사님을 통해 전해드립니다. 나머지 금액은 내년 헌당 때 드립니다. 이 모든 공정을 죄송하지만 확인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똑같은 메시지를 이번에도 5개 교회에 전달했다. 본회가 지원해 헌당한 세 번째 ‘후깜교회’에서는 한 성도의 간증을 듣게 되었다. 비가 많이 오는 주일날 8시부터 예배인데 온 식구가(7~8명) 같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니까 살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산사태로 집채만 한 바위와 흙이 집을 덮쳐 버린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 가족의 생명은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다. 만약 그 집안 식구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비 오는 날 귀찮다고 식구들 중 한 명이라도 예배드리러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날 사건은 그 가족들이 큰 믿음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믿음은 곧 생명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이었다. 출국수속 후 탑승게이트에 대기하고 있을 때 권사님 한 분의 팔이 부어올랐다. 차에서 내릴 때 어딘가에 부딪혔다고 했다. 상비약을 드시게 하고 탑승구 직원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그러자 공항 의사, 담당기장, 항공사 지점장, 승무원 등이 떼로 모여들었다. 혈압측정을 하니 권사님은 당황해서 혈압이 점점 상승했다. 공항 의사는 체류하여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모두가 무사히 귀국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여러 가지 염려 속에 우리는 합심해서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채 “우리가 책임진다”는 각서를 쓰고 탑승할 수 있었다. 다행히 권사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잠이 드셨고, 우리는 4박 5일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무탈하게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100교회 건축선교회는 수많은 개미군단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이제 21개 교회가 건축돼 간다. 하나님 나라 확장에 협력하신 교회와 모든 성도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올려 드린다. 할렐루야! 100교회 건축선교회 이해견 장로 010-3531-7354 (주일오후 간증예배 나갑니다.)
-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윤형구 장로 본지 발행인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우리는 항상 소망을 주님께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은 만만치 않을 때가 많습니다. 포기하고 싶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여러 번 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이 바울보다 더 힘들까요? 예수님보다 더 힘들까요? 바울이 남긴 위 말씀은 믿음의 훈련으로 단단해진 신앙의 선배가 남긴 권면으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용기를 얻게 됩니다. 누구나 주님 앞에 흠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상황이나 혹은 인물을 만날 때도 우리는 쉽게 남 탓을 하지는 못합니다. 먼저 나를 살핍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씀이 우리를 가로막습니다.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어떤 상황을 통해 끊임없이 나를 공격한다면, 악한 행실을 멈추지 않고 계속 우리를 벼랑으로 내몬다면 우리는 잠시 그 상황 뒤에 감추어진 영적 의미를 다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한 영은 나약하거나 영적으로 타락한 자를 도구로 사용하여 믿는 자를 공격하는 것이 주특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으로 악한 권세를 끊어내고 불쌍한 그 사람에게도 경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 길을 돌이키지 않으면 결국 그는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은 방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때로는 공격을 통해 성을 쟁취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선의 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감당해야 할 시련과 연단의 무거운 덩어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고히 비난을 당하고 내어 쫓김을 당하고 세상 앞에서 수치를 당하기도 합니다. 억울한 마음으로 창자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당하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가 이르면 선과 악이 구별되고 하나님이 모든 수치를 갚아주시고 명예를 회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 안에 소망을 두고 선한 길을 끝까지 걸어갑시다.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