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4)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 (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 5.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 6. 다음세대 전문사역자 7. 안동교회 최초의 전도사 8. 경안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리더 9. 일제에 저항한 애국운동가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5. 김정숙,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2) 임학수 목사는 전도, 교육과 봉사로 교회를 부흥시켰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2층 석조예배당을 건축하며 헌신했다. 현재 안동교회의 돌집예배당은 임학수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할 때인 병자년 1936년 초여름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정축년 1937년 사월에 준공되었다. 이 예배당의 건축과 준공 현장에 김정숙 전도사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정숙 전도사는 석조예배당 건축 과정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교인들을 돌보고 사역을 감당하면서 교회의 안정에 적지 않은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어느 교회나 교역자의 위치는 중요하다. 특히 교역자가 떠나고 부임하는 사이의 기간은 교회가 불안정할 가능성이 크다. 안동교회 역시 담임목사가 비어있는 기간 당회와 안동선교부의 선교사들은 교회의 안정을 위해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담임목사 부재 시 안동교회는 다른 교회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부교역자를 둔 교회는 거의 없었지만, 안동교회는 담임목사와 여성교역자가 동역하고 있는, 당시로 보면 매우 특별한 교회였다. 김정숙 전도사는 2대 이대영, 3대 정재순, 4대 박상동, 5대 임학수 목사와 함께 전도사로 교회를 섬겼으며, 초대 담임목사를 역임한 이후 6대 담임목사로 다시 부임한 김영옥 목사, 그리고 7대 김광현 목사와 함께 평신도로 교회를 섬겼다. 그가 전도사로 또는 평신도로 안동교회를 섬긴 기간은 60년에 이른다. 특히 담임목사의 이임과 부임 사이의 공백 기간 동안 여성 교역자인 김정숙은 전도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심방을 통해 교회의 사역을 중단 없이 이어가고 교회의 안정을 지켰을 것이다. 안동교회 당회록은 그가 담임목사 부재(不在) 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맡겨진 역할을 잘 감당함으로써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음을 알려준다. 김정숙의 영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6. 김정숙, 다음세대 전문사역자 1) 청년사역 김정숙은 1922년부터 안동교회의 전도사로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특히 그의 사역 기간은 기독청년면려회의 태동과 성장 기간과 겹친다. 이대영 목사가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시무를 시작한 1921년, 3·1운동의 좌절 이후 의식 있는 청년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독청년면려회는 기독교 청년운동의 첫 출발을 알리는 교회 조직으로 1921년 2월 5일,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로 안동교회가 공식적으로 승인하여 출범할 수 있었다. 청년면려회 운동은 청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일본 식민지하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독립된 국가의 내일을 준비할 수 있게 한 역사적 청년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기독청년면려회는 놀랍게 성장해 나갔다. 안동교회 당회가 조직을 승인한 후 경북 지방으로 신속히 확산되어 4개월이 지난 그해 6월 7일부터 9일까지 기독청년들이 안동교회에 모여 경북지역연합대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무려 26개 지회에 600여 명의 면려회원들이 참여해 교회와 사회를 위한 헌신을 결의했고 실제로 자신들의 삶에서 그 다짐을 실천했다. 다시 그해 9월 10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에서는 청년면려회를 전국 교회에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선교부 내에 면려청년위원회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후 면려운동은 더욱 확산 일로를 달렸고, 마침내 1924년 12월 2일부터 8일까지 서울 피어선성경학원에서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안동지역에서 기독청년면려회의 출범과 활동, 그리고 성장에 있어서 여성 교역자인 김정숙 전도사는 일정한 역할을 감당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청년면려회는 남·여가 함께 모였는데, 모든 목사가 남성이었던 시대에 안동지역의 유일한 여성 교역자였던 김정숙 전도사가 여성 회원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정숙 전도사의 나이는 40대 후반이었다. 때로는 청년들의 어머니로, 때로는 이모로, 때로는 고모 역할을 통해 청년들의 삶을 돌보고 기독청년면려회 중심의 안동지역 청년운동이 신앙과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지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2) 어린이·청소년 사역 안동교회 4대 담임 박상동 목사는 주일학교를 통한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처음으로 어린이 주일에 유아세례를 베풀었음을 안동교회 80년사는 언급한다. 또한 그는 주일학교 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오늘날의 교회학교 조직과 거의 동일한 조직을 갖추게 하였다. 주일학교 교장은 담임목사, 부장은 평신도로 개편하고 조직을 새롭게 정비함으로써 주일학교 발전에 새로운 기틀을 놓았다. 이것은 박상동 목사가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에 깊은 관심과 연구를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여름성경학교와 동일한 하계아동성경학교의 경우, 평신도가 교장을 맡게 함으로써 평신도와 함께 동역하는 성숙한 모습을 안동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유년주일학교를 거친 청소년의 신앙 교육을 위하여 오늘날의 중·고등부에 해당하는 안동기독소녀회를 창립하여 어린이와 장년 신앙교육 사이에 끼여 방치되었던 청소년의 신앙교육에 교회가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김정숙 전도사는 박상동 목사의 중점적인 사역인 어린이·청소년 사역의 지도교역자로 활동했다. 1927년에 김정숙 전도사는 당회의 허락을 받고 소녀회 고문으로 소녀들을 지도하였음을 당회록은 적시한다. 고문은 아마 소녀회 지도교역자의 다른 표현일 것으로 추측된다. 온화하고 차분하며 자상한 성품을 갖고 있던 김정숙 전도사는 주일학교의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지도하는 데 매우 적합한 교역자였을 것이다. 김정숙 전도사는 어린이와 청년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칭찬하며 격려하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다. 따라서 어린이와 청소년에 관한 사랑, 관심과 열정, 그리고 헌신과 전문성을 갖고 있는 김정숙 전도사에게 교회가 소녀회 고문의 직을 맡긴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1954년 4월 23일부터 27일까지 안동교회에서 개최된 제3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시 독립운동가 이원영 목사가 총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기독청년면려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날인 4월 22일에 제5회 전국대회를 개최했다.(사진5)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척곡교회, 교회 창립 114주년 및 척곡면려회 창립 100주년 기념세미나 통해 ‘청년면려회 정신’ 재조명해 ▲피아노를 치며 ‘금주가’를 부르고 있는 김영성 원로장로(97세). 봉화 척곡교회(담임목사 박영순)가 5월 16일(주일) 본교회당에서 ‘교회 창립 114주년 및 척곡 청년면려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감사예배를 드렸다. 박영순 목사 인도로 드린 1부 예배에서는 경안대학원대학교 박성원 총장이 ‘역사의 저장과 재생’이라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전했고 최갑도 목사(풍기성내교회 원로)가 축도했다. 2부 기념행사는 김영성 장로(척곡교회 원로) 회고사, 이교남 목사(한국기독교교회사 주영연구소 대표)와 임만조 장로(안동교회 원로) 기념사, 조승호 목사(춘양교회) 축도 순서가 있었다. 3부 세미나에서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임희국 명예교수가 ‘늘푸른 청년 봉화척곡교회’라는 주제로 강의하며 청년면려회의 역사와 정신을 재조명했다. 김영성 장로는 “1921년 5월 19일 척곡교회 청년면려회 창립 당시 회의록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문화재 자료로 지정돼 남아있는데,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아 제1회 기념예배를 드리게 돼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역사에 따르면, 1907년에 창립된 척곡교회는 청년 교회로 시작했으며 향후 기독청년들의 독립운동 회합장소로 사용됐다. 1920년대 장로교회는 교회 부흥회, 주일학교운동, 청년면려회운동을 진행했고, 이후 전국적으로 면려회가 확산 조직됐다. 당시 청년들은 면려회운동을 통해 신앙성숙과 성경읽기, 절제와 경건 생활을 도모했다. 청년면려회는 오늘날 남선교회로 이름을 바꿔 활동하게 됐다. 한편, 이날 행사 마지막에는 97세인 김영성 장로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당시 면려회가인 ‘금주가’를 다같이 불렀다. 김영성 장로는 “나라가 어지럽고 교계가 침체된 오늘, 1세기 전 척곡기독청년들의 뜨거운 열정이 되살아난 듯한 감동을 받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척곡교회는 5월 16일(주일) ‘교회 창립 114주년 및 척곡 청년면려회 창립 10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 영주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
코로나19와 교회 – 가정예배(2‧끝)코로나19와 교회 – 가정예배(2‧끝) 김승학 목사 안동교회 더욱이 안동교회는 2021년에 접어들면서 매주 목요일마다 개선(upgrade)된 온라인 가정예배를 추진하였다. 예배를 위해 정해진 시간과 형식을 지켜나가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서 매주 목요일 오후 8시에 시작하여 30분 동안 온라인으로 온 가족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준비과정으로 목요가정예배의 이름(Title)과 가정예배 사행시를 공모하였는데, 많은 교인이 적극적으로 동참함으로써 관심의 정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선 목요가정예배의 공식 이름은 공모를 통해 ‘홈드림 가정예배’로 최종 확정되었다. 홈드림 가정예배의 의미는 1)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대신 가정(홈, Home)에서 온 가족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2)우리 가정(홈, Home)을 통째로 하나님께 드리는(드림) 예배, 3)우리 가정(홈, Home)이 갖고 있는 꿈(드림, Dream)을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라는 의미다. 또한, 가정예배의 의미를 담은 사행시를 58명이 68개 작품에 공모한 결과 순위가 결정되었다. 공동 1위는 3명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 가정예배 드릴 시간이에요! 정: 정말 다 모였나요? 예: 예수님을 만날 시간이에요! 배: 배에 힘을 주고 찬송가를 높이 불러요! 가: 가가호호 정: 정성모아 예: 예수님만 배: 배우자 가: 가정예배 시간은 정: 정말 행복한 시간 예: 예수님을 만나서 배: 배부른 시간 온라인 목요 홈드림 가정예배는 삶의 근간이 되는 가정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상처 입은 가정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꿈꾸고 있다. 예배순서로는 찬송가나 CCM 찬송, 가정에서 부모가 대표기도, 준비된 가족창 후 8분 내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주제는 삶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하되 어린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설교를 마친 후 2가지 기도제목으로 합심기도를 하는데, 첫째는 설교 내용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둘째는 가정의 기도제목을 갖고 합심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 후 부모가 자녀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하는데, 교회에서 준비한 축복기도문을 사용할 수도 있고, 부모들이 소원하는 제목으로 축복기도를 할 수 있다. 이후 다시 찬양하고 주의 기도로 예배를 마친다. 그리고 공모하여 당선된 사행시를 매주 다르게 온 가정이 함께 읽음으로써 가정예배의 의미를 되새긴다. 모든 순서를 마치고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포옹하면서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축복합니다’라고 말하며 예배를 마친다. 온라인 목요 홈드림 가정예배는 분주한 일상을 보내는 가족 구성원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예배, 기도,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나누고 용서, 격려와 칭찬을 통해 서로가 하나 되는 귀한 시간이 되고 있다. 코로나19는 그동안 잃어버린 가정예배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19는 가정 제단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 코로나19로 인해 신앙적 관점에서 가정의 역할이 이전보다 훨씬 중요해졌음을 모두가 깨닫고 있다. 따라서 코로나19 시대에 가정예배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가정예배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가정예배가 우리 가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온 성도는 코로나19로 인해 초래된 위기의 시간인 요즘, 오히려 가정을 살릴 수 있는 가정예배에 집중해야 한다. 코로나 시대에 부모의 신앙뿐 아니라 자녀의 신앙을 견고히 하는 방법이 가정예배이다. 또한, 가정예배가 회복될 때 가정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화목하여 작은 천국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가정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교회와 가정이 긴밀하게 협력하여 그동안 잊혀진 보물인 가정예배가 회복되어 가정의 신앙이 살아나고, 상처 입은 가정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은혜가 넘치는 가정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편집부 www.gbhana.com
-
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3)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3)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 (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1. 출생과 결혼 2.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媤宅) 3. 여성 복음전도의 선구자 4. 평양여자성경학원의 유학생 5.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 ...................................................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4. 김정숙, 평양여자성경학원의 유학생(2) 참고로 내한(來韓)한 선교사들은 1900년대부터 여성 교역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남녀 구별과 차별이 심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순회 전도하는 일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처음에 여교역자는 전도부인(傳道婦人, Bible Woman)으로 불렸다. 전도부인들은 선교사들과 함께 지방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사경회 시 보조역할을 했다. 1907년 평양여자성경학원은 본격적으로 여교역자를 양성하는 훈련원으로, 1910년에는 정식으로 평양여자성경학원이 되어 보다 체계적인 교육을 시킬 수 있었다. 1923년에는 미국북장로회 선교부의 설립 허가를 받아 여교역자 양성을 위해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로 개교하였다. 1938년에는 평양여자신학원으로 개명되었다가 1943년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당시 미국장로교에서 세운 여자성경학원의 수업기간은 3년이었고, 교과과정도 성경뿐 아니라 일반 고등학교와 같이 교양과목도 가르쳐 교역자와 평신도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을 갖추게 하였다. 김정숙의 입학 당시 평양여자성경학원은 3년 과정으로 1년에 봄, 가을, 겨울 3학기로 이루어졌으며, 교과과정은 성경 외에 교회사, 설교학, 윤리, 심리학, 영어, 음악 등 성경교사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것들로 꾸며졌다. 위에 언급된 과목들은 오늘날 4년제 신학대학교에서도 개설하고 있는 과목들이며 평양여자성경학원은 당시 우수한 신학교육을 받은 여성 교역자를 배출하는 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김정숙은 입학한 지 5년 만인 1920년, 당시 여성 신학교 중에서는 가장 공신력 있는 여자성경학원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사역의 현장인 교회에서 섬길 수 있게 충분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5. 김정숙,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1) 1920년 평양여자성경학원을 졸업한 김정숙은 안동으로 내려와 교회와 노회를 위해 헌신적인 복음 사역을 시작하였다. 1922년부터 김정숙은 안동의 공식적인 첫 여성 교역자로 안동교회를 섬기면서 교회의 여러 사역에 참여하였다. 초대 김영옥 목사가 사임한 후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대영 목사는 1921년 1월 부임해서 헌신하던 중 1921년 9월 10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제10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국의 부름을 받았다. 이대영 목사가 중국선교사로 파송 받은 후 정재순 목사가 안동교회 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됐다. 1922년 7월 20일에 개회된 제83회 당회록은 정재순 목사가 당회에 참석한 것으로 기록한다. 따라서 짧게는 5월과 6월, 2개월을, 길게는 3~4개월 안동교회는 담임목사가 공석으로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때 전도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던 김정숙은 비록 2개월에서 4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한된 범위 내에서 담임목사의 공백을 잘 메웠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담임목사가 교회에 부임해서는 그와 의견을 맞추어가며 사역에 충성을 다했을 것이다. 아마 교회의 분위기와 성도들을 소개하고 교회가 진행하고 있던 이전 사역을 소개함으로써 새로운 담임목사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을 것이다. 안동교회 3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정재순 목사의 최우선 목회방침은 지역전도였다. 그는 안동교회를 전도중심의 교회로 만들어 나갔다. 그가 추진한 강력한 전도사역을 통해 안동 땅은 영적으로 기경되기 시작되었다. 전도의 결과로 호암교회(현 송현교회)와 수하리교회(현 수상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또한, 그의 주도로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훗날 안동 땅에서 수확할 풍성한 구원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정재순 목사가 시무하던 시기는 처음으로 현지 교회인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이 널리 전파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정숙 전도사는 누구보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뜨거운 구령의 열정을 갖고 있던 김정숙 전도사는 정재순 목사와 뜻을 같이하여 지역을 복음화하는 일에 앞장섰을 것이다. 정재순 목사 역시 복음의 열정을 갖고 있는 김정숙 전도사와 동역하면서 고을마다 전도인을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통해 안동 땅은 예수 마을로 바뀌고 있었다. 정재순 목사가 사임한 후 의성 출신으로 1925년 일본 고베신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한 박상동이 안동교회 강도사로 부임했다. 박상동 목사는 1926년 9월 제11회 경안노회 임시노회에서 안수 후 안동교회 제4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박상동 목사는 전임 정재순 목사처럼 교회의 부흥뿐 아니라 안동읍의 성시화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였다. 1925년 7월 6일 제직 회의록에 따르면 오늘의 안동서부교회인 안기기도실을 세웠을 뿐 아니라 안동 읍을 4개 권역으로 나누어 복음전파의 책임을 가진 권찰을 두었다. 1926년 접어들면서 전도대를 조직하고 안동읍 동·서 양편에 파견하여 안동복음화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특히 1928년 9월 18일부터 26일까지 제1회 경안주일학교대회가 안동교회에서 개최되어 유년부, 소년소녀부, 청년부, 남·여장년부, 여전도회 교사 및 교역자 등 정회원 1,300여 명과 방청객 1,000여 명 등이 참석했다. 안동지역에서 개최된 최초의 대중 집회였는데, 참석한 인원은 당시 교회가 신앙교육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때 안동교회 소년소녀부의 고문이며, 다음세대를 지도했던 김정숙 전도사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김정숙은 정재순 목사가 사임한 후 박상동 강도사가 부임하기 전까지의 공백 기간에 교회의 안정을 위해 힘썼을 뿐 아니라 그 후 박상동 목사를 도와 안동지역 복음화에 최선을 다했다. 또한, 박상동 목사가 사임한 이후 1929년 1월 안동교회 5대 담임목사로 임학수 목사가 부임하기까지 김정숙은 다시 전도사로 자리를 지키며 교회와 교인의 안정을 도모했다. ▲1928년 9월 18일부터 26일까지 제1회 경안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한 교사들과 교역자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으로, 사진 왼쪽 위에 있는 기와집은 안동 최초의 여성전문초등학교인 계명학원으로 안동 3‧1만세운동 당시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등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사진4)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영주제일교회 금교성 목사 위임예식 열려금교성 목사,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 이루어가겠다” ▲금교성 목사 부부가 위임국장 조영광 목사 앞에서 서약하는 모습. 예장통합 영주제일교회에서는 지난 4월 11일 오후 4시 금교성 목사의 위임예식이 열렸다. 이날 1부 예배는 위임국장 조영광 목사(영주노회장, 동촌교회) 인도로 드렸다. 부노회장 김영수 목사(예천교회) 기도, 영중시찰장 남동권 목사 성경봉독, 중창단의 찬양 후 박은조 목사(은혜샘물교회 은퇴)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라’는 주제로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자”고 말씀을 전했다. 2부 위임식은 조영광 위임국장의 집례로, 영주노회 서기 황현석 목사의 금교성 목사 경력 및 가족 소개, 위임받는 목사 서약, 교우 서약, 위임기도, 선포, 위임패 증정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3부 축하와 권면에서는 전 노회장 김창진 목사(영주동산교회)의 권면, 주현신 목사(과천교회)·변창배 목사(총회 사무총장)·김승학 목사(안동교회)의 축사, 최갑도 목사(풍기성내교회 원로목사) 격려사, 금교성 목사 답사, 교인대표 예물 증정, 당회서기 정병찬 장로 인사 및 광고 등의 순서가 있었다. 이후 영주제일교회 허승부 원로목사 축도로 모든 위임예식을 마쳤다. 금교성 목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믿음과 품성에서 성숙전한 교회, 그리스도의 몸인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교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성도님들과 교회를 섬기겠다”고 인사했다. ▲위임식을 마치고 기념촬영하는 모습. 영주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
코로나19와 교회 – 가정예배(1)코로나19와 교회 – 가정예배(1) 김승학 목사 안동교회 코로나19로 인해 가족 구성원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2020년 10월에 발표된 ‘코로나 전후 가족 시간 비교’에 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혼남녀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일주일 평균 7.76시간이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남녀는 코로나19 이후 가족과의 시간에 대해 ‘늘었다’는 56.9%, ‘줄었다’는 2.9%로 응답했다. 가족과의 시간이 늘어났다고 응답한 사람 중 59.4%는 ‘가족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답했다. 부정적이란 응답은 9.8%에 불과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우울, 불안, 외로움 등으로 정신건강을 위협받는 사례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제한된 환경은 가족들 사이에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를 주어 이전보다 갈등의 빈도수가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른 대안의 하나로 안동교회는 그동안 잊고 있던 가정예배의 의미를 재조명하며 실행에 옮기고 있다. 지금은 80을 넘긴 부모세대는 가정예배를 중요시하였다. 필자의 부모도 가정예배를 고집했다. 하지만 이후 세대에게 가정예배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고, 거의 잊혀진 지난 세대의 유산에 불과했다.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풍조가 만연되어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모임을 가질 기회가 감소하고 있는 현실은 교회로 하여금 침체에 빠진 영성훈련을 위한 대안으로 그동안 잊혀진 가정예배를 주목하게 하고 있다. 코로나19는 교회의 여러 사역을 위축시키기도 하지만, 그동안 잊고 있던 사역을 발굴하여 상황에 맞게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유익한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코로나19는 부모와 자녀들에게 가정에서의 예배를 통해 자녀의 신앙을 점검하고, 부모의 신앙을 전승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가정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은혜를 간증함으로써 부모와 자녀 사이의 믿음이 성장하고 신앙적 유대를 견고하게 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하고 있다. 가정예배는 자녀의 신앙교육에 매우 유용하며, 부모는 자녀들을 축복하고 격려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가정예배를 시작할 때 반드시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함께 모여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모두 함께 모이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다 보면 가정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날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고, 결국 가정예배를 포기할 가능성이 많다. 가정예배의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가족이 순번을 정해 인도자, 기도자, 성경봉독자, 특송자를 정하고, 가족 중 악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안동교회는 2020년 7월부터 가정예배를 포함한 ‘매일묵상일기쓰기’를 통해 온 가족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매일묵상일기쓰기에 참여한 성도들은 자신의 묵상 결과를 공유함으로써 함께 은혜를 나누는 일에 동참했다. 또한, 교회는 매일 예배 순서지를 만들어 새벽기도회 시간에 홈페이지에 탑재함으로써 가정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했다. 30분 분량의 가정예배는 찬송, 본문, 주제성구, 설교내용, 본문 질문, 기도, 본문 해설, 주기도문의 순서로 진행된다. 또 나눔을 위한 질문과 기도문까지 자녀들을 포함하고 있어 온 가족들이 함께 참여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구성됐다. 안동교회는 코로나 사태 속에서 잃어버린 가정예배를 회복해야 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과감한 시도를 감행했다. 코로나19 이후 예배당에 나오지 못하는 교인들의 신앙을 독려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로 가정예배를 강조한 것이다. 편집부 www.gbhana.com
-
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2)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2)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 (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1. 출생과 결혼 2.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媤宅) 3. 여성 복음전도의 선구자 4. 평양여자성경학원의 유학생 5.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 ...................................................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2. 김정숙,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媤宅)(2) 김정숙의 시조부인 김승걸은 토마스 선교사의 처형 현장 가까이에서 순교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토마스 선교사가 죽어가면서도 평안한 얼굴로 박춘권에게 성경책을 건네주면서 “예수 믿으라”고 한 모습을 그는 잊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당시의 현장을 생생하게 가족들에게 전했다. 그러나 김승걸과 그의 가족은 사울처럼 좀처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지는 강렬했다. 김승걸의 후손이 스스로 예수를 믿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외부 사람을 동원하셨다.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신 사람이 김정숙이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김정숙은 시댁의 구원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가정의 복음화는 요원한 듯 보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집을 떠나 평양에서 5년 동안의 신학공부를 마친 김정숙은 고향으로 내려왔다. 김정숙은 이전보다 더 열정을 갖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마음과 정성을 다했다. 김정숙은 삶 속에서 식구들에게 헌신하며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날마다 전도했다. 그 결과 구원의 빛이 김정숙의 시댁에 비추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시댁은 복음을 수용하였고, 오늘날 6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충성스럽게 헌신하고 있다. ▲1909년 선교지 분할로 사역지인 강원도를 떠나야했던 오월번 선교사 가족은 안동선교부로 임명을 받은 후 대구로 갔다가 1910년 6월 현재 안동교회 부지 내에 있던 선교사 사택으로 이사했다.(사진2) 3. 김정숙, 여성 복음전도의 선구자 아낌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서라도 남편을 살리려고 했던 김정숙은 남편이 죽자 그 이듬해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29세인 1908년, 예수를 믿게 된 김정숙은 1911년 당시 안동선교부 선임 오월번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오월번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1900년 10월 내한했다. 그의 사역지는 호남과 함경도 지역을 제외한 평양, 서울, 황해도, 강원도, 경기북부, 안동, 영주 등으로 거의 한국 전역을 망라했으며, 그는 어느 지역에서나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1909년 선교지 분할을 했고, 1909년 가을 오월번 선교사는 신설이 확정된 안동선교부로 임명을 받고 그해부터 사역을 시작했으며, 가족은 1910년 6월 안동으로 이주했다. 1909년 안동에 도착한 오월번 선교사의 사역지는 봉화, 순흥, 풍기, 예천, 문경, 함창, 상주 북편, 영주 등 안동의 서북지역이었다. 오월번 선교사는 어떤 때는 하루 40㎞씩 보름 동안 4백여 명을 전도할 만큼 쉼 없이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했고, 개척한 교회들을 돌보았다. 그가 돌본 교회로는 고창교회(현 풍산교회), 흥안교회(현 안흥교회), 내매교회, 녹전교회, 장사리 교회, 척곡교회, 풍기교회, 순흥교회, 영주제일교회 등이며 그의 헌신으로 이 교회들은 든든히 뿌리내릴 수 있었다. 오월번 선교사가 소백산 기슭의 풍기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았을 때인 1911년은 김정숙이 세례를 받은 해와 일치한다. 예수 믿기로 결심한 김정숙은 거침없는 믿음의 행보를 이어갔다. 세례받은 후 1년이 지난 1912년부터 김정숙은 생활의 근거지를 풍기에서 안동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의 복음 사역을 도왔다. 김정숙은 사명감에 불타는 복음의 증인이었다. 특히 농민들이 논밭에서 일하는 시간, 비어있는 집에 가서 밥을 해놓고 저녁 때 일터에서 귀가하는 농민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정도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 그는 일회성 전도를 지양하고 생활 속에서 맺는 관계를 통해 복음을 전도하는 창의적이고 선진적인 전도방식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김정숙은 안동선교부에 속한 선교사들의 조사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에 소재한 교회들을 순회(巡廻)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참고로 1914년 인노절 선교사가 안동에 부임한 이후에 오월번은 북쪽 지역을, 권찬영 선교사는 동쪽 지역인 예안, 청송, 영양, 영덕 등지를, 남쪽은 인노절 선교사가 담당하였다. 안동지역의 여러 교회들은 김정숙을 초청하기도 했다. 실제로 김정숙과 종질이지만 김정숙이 아들로 생각한 김학준 장로는 조사(助事)로서 김정숙이 손수 짚신을 만들어 신고 예천, 용궁, 함창, 상주, 문경, 풍기, 순흥, 봉화, 영주, 예안, 영양, 영해, 영덕, 청송, 의성, 비안 등 경상북도 북부지방 거의 전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한 복음전도자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1911년부터 1916년 사이 안동지역 초기 대표적 조사로는 김성삼, 김병, 엄응삼, 서화선, 권수백, 김익현, 박영화, 김인옥 등으로 이들과 함께 김정숙은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함으로써 이 지역의 복음화가 앞당겨 질 수 있었다. ▲1897년 처음으로 단기성경학원으로 시작한 평양여자성경학원은 1907년 본격적으로 여성 교역자를 양성했고, 1923년에는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로, 1938년에는 평양여자신학원으로 개명하여 한국교회 여성 교역자의 산실이 되었다.(사진3) 4. 김정숙, 평양여자성경학원의 유학생(1) 안동에서 3년 동안 조사로 활동하던 김정숙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6세가 되던 해인 1915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하고 평양으로 출발했다. 평양에 있는 여자성경학원에 입학하여 신학수업을 받기 위함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시조부 김승걸은 남편이 죽으니 정신이 돌았다고 하면서 “그냥 두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숙이 공부를 마치고 5년 만에 안동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시아버지는 “네가 정신이 돌은 줄 알았는데 집에 돌아와 주어서 고맙다”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김정숙은 집안 어른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평양으로 떠났던 것 같다. 하지만 김정숙은 시댁으로부터 버림받지 않고 여전히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은 것으로 보아 평소 좋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예장통합 경안노회 제189회 정기노회 열려예장통합 경안노회(노회장 권헌서 장로)는 4월 6일(화) 오후 1시 안동교회(김승학 목사) 예배당에서 제189회 정기노회를 개회했다. 이번 노회에서는 본당과 100주년기념관을 회의장과 회의실로 활용해 330여 명의 총대를 분산 배치하는 등 방역수칙을 지키며 안전한 노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개회예배는 노회장 권헌서 장로의 사회로 부노회장 조창래 장로 기도, 전노회장 김승학 목사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란 제하의 설교, 설교자의 축도 순으로 드려졌다. 이어진 회의는 전노회장 인사, 각 부‧위원회 보고, 총회 총대 선거, 중요사항 결의 등의 순서로 진행됐으며, 목사 임직 및 목사 은퇴 예식이 있었다. 이번 노회에서는 백남훈(추목샤론) 서대천(안동동부) 목사가 임직을 받았고, 김무년(안동의료원) 김중건(신양) 김대년(소망의집) 박응현(신덕) 목사가 은퇴했다. 권헌서 노회장은 “코로나19로 한국교회가 많이 위축돼 있지만, 위기일수록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집중하며 온 노회가 힘을 모아 난관을 극복해나가자”고 인사말을 전했다. ◈총회 총대 명단 ▲목사 : 김승학 이정우 이재식 서원수 차덕현 이연숙 김종배 김원택 ▲장로 : 권헌서 권오탁 이성덕 최종섭 정동한 박우주 이희사 오상윤 ▲경안노회 제189회 정기노회가 안동교회에서 열린 가운데, 권헌서 노회장의 사회로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박은숙 기자, 사진=임만조 장로 www.gbhana.com
-
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1)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1)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 (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1. 출생과 결혼 2.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3. 여성복음전도의 선구자 4. 평양여자성경학원의 유학생 5.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 ...................................................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서론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성경 말씀 그대로 남녀노소, 빈부, 계층에 관계없이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귀족보다는 평민,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선 시대 말기의 여성은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한국 전통사회 안에 뿌리 깊은 성차별의 문화와 여필종부, 삼종지도, 칠거지악, 남녀칠세부동석, 부부유별 등의 가부장적 가치관은 여성의 인권을 철저히 억압했다. 무지와 가난, 고된 노동과 억압된 삶을 살던 여성은 한(恨)을 품은 존재였다. 조선 시대 말기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눈에는 누구보다 한국 여성들이 복음의 대상이요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보였다. 이런 환경에 있던 여성들은 한국 땅에 도착한 선교사들에게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선교대상이 되었다. 특히 1885년 4월 5일 인천항에 함께 도착한 미국 장로교와 미국 감리교 선교사는 선교대상으로서 여성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893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양 교파 연합모임에서 선언한 10가지 한국선교정책 중에서 두 번째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였다. 감리교의 경우는 의료사업, 교육사업, 자선사업, 여성의 인권회복 등에 치중했고, 여성의 계몽과 교육에 있어서 장로교에 비해 앞서 나갔다. 직접적인 복음전파를 강조한 장로교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사회 계층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성들을 선교의 타깃으로 삼았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여성들이 다른 계층에 비해 더 쉽게, 더 빨리 복음에 반응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첫 10년 동안 여성 복음화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 여성들이 소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여성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복음에 응답함으로써 복음전파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회적 활동에 수동적인 여성들이 전도사역과 계몽사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일제의 압제 가운데서 애국 여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1. 김정숙, 출생과 결혼 “임진(臨津) 이북의 땅은 다시 오랑캐의 땅이 될 터이니 몸을 보전하는 것을 논할 수 없다”는 예언으로 불안해하던 이북 사람들 중에는 이남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이들이 가장 선호한 지역은 정감록(鄭鑑錄)에서 언급하고 있는 ‘십승지’의 첫 번째 승지인 경상북도 풍기였다.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 있던 북한 사람들이 실제로 이남으로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1890년대 후반부터였고, 이어서 1920년대에는 개성·평양에서 약 100여 가구가 풍기로 집단 이주를 했다. 현재 이들 후손들이 1,000가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1907년 창립된 풍기성내교회는 지역 토착 주민들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으로 성내교회 100년사는 기록한다. 김정숙(金貞淑)은 1880년 11월 10일 김병연(金秉淵)의 장녀로 풍기에서 출생했다. 그는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정숙한 여인으로 성장했다. 김정숙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단정하고 고상하며 강직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더욱이 그는 자식과 손자뻘 되는 교역자를 존경하고 귀애했다고 안동교회 김광현 원로목사는 기억한다. 김정숙은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성숙한 성품은 지역사회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부인으로, 또한 교회에서는 전도사로서 목회 사역을 빛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김정숙은 1898년 19세 때 김규립(金奎岦)과 결혼했다. 김정숙의 시부인 김수업은 성균관 진사에 합격했으나 당시 일본과 러시아 등 열강의 침입으로 인해 정국이 어수선한 1894년, 친척들과 함께 평양에서 풍기 금계리로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김수업이 이주한 시기는 북한 사람들이 풍기로 이주한 1차 때였다. 따라서 김수업의 후손은 무려 100여 년 전 풍기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생활하고 있는 셈이 된다. 김정숙은 결혼한 지 8년이 지난 1907년, 28세 때 병에 걸린 남편이 세상을 떠나 혼자가 되었다. 그는 슬하에 단 한 명의 자녀도 없이 청상과부로 홀로 남게 되었다. 중병(重病)에 걸린 남편을 헌신적으로 간호하면서 마지막까지 살리려고 했던 김정숙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던 열부(烈婦)였다. 당시 남편이 괴로워하며 숨을 헐떡거릴 때 약지(藥指)를 끊었다고 한다. 남편이 약지에서 나오는 피를 먹으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김정숙은 부엌으로 가서 문지방에 약지를 놓고 부엌칼로 내리쳐 쏟아지는 피를 그릇에 받아 남편에게 먹였지만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훗날 평양 여자성경학원에 입학한 김정숙은 선교사가 피아노를 배울 사람은 나오라고 했을 때 피아노 위에 놓은 손가락 중 왼손 넷째 손가락이 없는 것을 본 선교사가 이 손으로는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피아노 배우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2. 김정숙,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김정숙의 시댁(媤宅)은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 현장을 목격한 가문으로 전해진다. 그의 남편 김규립의 조부인 김승걸은 평양에서 발생한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R. J. Thomas, 1840년~1866년) 선교사의 순교를 직접 목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6년 8월, 토마스 선교사는 항해사 겸 통역관으로 제너럴 셔먼호에 탑승하여 대동강으로 올라왔다가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에게 붙잡혀 9월 5일 26세로 평양 대동강 변에서 처형을 당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칼을 겨누던 한 병사를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전달했는데 그가 바로 박춘권으로,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것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기도)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1840년 영국에서 출생한 토마스 선교사는 런던 선교회 파송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천주교인을 만난 계기로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변에 좌초되어 1866년 9월 5일 순교당했다.(사진1)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코로나19와 교회 - 기도회코로나19와 교회 - 기도회 김승학 목사 안동교회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없다. 모든 교회는 기도하는 일에 많은 힘을 쏟는다. 한국의 교회는 거의 비슷한 형식과 종류의 기도회를 갖고 있다. 안동교회의 기도 사역도 예외는 아니다. 안동교회의 공식 기도회는 우선 매일 갖는 기도회로 새벽 5시와 6시에 있는 새벽기도회와 오후 4시에 있는 오후기도회(vesper)다. 징검다리 중보기도대실에서 기도 용사들의 기도도 매일 오전 6시부터 밤 9시까지 거의 중단 없이 계속된다. 또 매 주 금요일마다 갖는 특성화된 기도회로 매월 첫 금요일은 항존직이, 둘째 금요일은 중보기도대가, 셋째 금요일은 묵상기도회로, 넷째 금요일은 교사기도회로, 그리고 다섯째 금요일이 있을 경우는 파송·협력선교사를 위한 선교사 기도회가 있다. 또한, 교회를 방문하는 성도들은 시간에 관계없이 가장 먼저 기도실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전교인 기도손모으기’ 기도운동이 있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여러 기도회를 중단시켰다. 교회의 문을 닫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야만 하는 때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간구하는 기도회는 부담이 되었다. 우선 새벽기도회의 경우 5시에 모이는 기도회는 중단하고 6시에만 모이고 있다. 여러 제한적인 상황이 있지만, 그럼에도 예배실을 열 수 있을 때는 방역 수칙을 지키며 어김없이 새벽기도회로 모이고 있다. 또 매일 오후 기도회(vesper)는 기도실에서 모였는데, 코로나 사태 이후 기도실이 잠정적으로 폐쇄됨에 따라 모일 수 없게 되었다. 참고로 본당 1층에 위치한 우리 교회 품음터 기도실은 24시간 개방되어 등록 교회와 관계없이 안동시 안에 있는 성도들이 자주 찾는 공간이지만 안타깝게도 코로나19 이후 문을 닫고 있다. 더욱이 “10년 걱정하는 것보다 10분 기도하는 것이 낫다”는 표어로 시작한 ‘전교인 기도손모으기’는 교회에 오는 성도는 누구나 언제든 관계없이 가장 먼저 기도실로 들어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볼일을 보자는 운동인데, 기도실이 폐쇄되어 더 이상 이 운동에 참여할 수 없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른다. 더욱이 매주 금요일마다 가진 특성화 기도회의 중단은 우리 모두의 아쉬움인 동시에 아픔이기도 하다. 안동교회 금요기도회의 특징은 기도 중심으로 전체 기도회 시간이 70분 정도 된다. 그래서 찬양도, 설교도 짧다. 대신에 참석한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길다. 일반적으로 금요기도회는 찬양, 설교, 그리고 기도회의 순서로 진행되는데, 설교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다. 그러나 안동교회의 금요기도회는 설교시간이 짧은 대신 합심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비교적 길다. 그래서 기도회에 참석한 성도들은 믿음으로, 그리고 통성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 모여 기도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한다. 그래서 교회는 통성으로 하는 금요기도회를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대신 내용과 형식을 달리하는 온라인 기도회를 새롭게 시작하였다. 특성화된 금요기도회는 환경이 호전되면 재개하기로 하고 온라인 학부모기도회, 온라인 교사 한밤기도회와 온라인 선교사 기도회를 신설하였다. 매월 첫째 월요일 저녁 8시 시작하는 줌(Zoom) 온라인 학부모 온맘기도회는 1, 2부로 나누어져 있다. 온맘기도회는 다음세대교회의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 온맘으로(with all our heart) 기도하는 시간이다. 우선 1부는 약 35분 정도 진행되는 예배 시간으로 찬양, 설교, 그리고 설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기도제목·교회·가정과 부모·자녀를 위해 합심하는 기도로 구성되어 있다. 35분으로 계획된 2부 기도회는 다음세대교회의 학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속한 다음세대교회(새싹교회, 꿈나무교회, 새순·비전터교회) 소회의실로 이동한 후 이후의 순서는 지도교역자가 운영한다. 학부모들과 전(前) 월의 사역에 대한 피드백(feedback) 시간을 갖고, 새로 시작한 사역을 소개하면서 학부모들에게 협조를 당부한다. 이후 각각 다음세대교회의 기도제목을 나누고 합심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총 70분 내외로 진행되는 온라인 학부모 온맘기도회는 지도교역자와 학부모가 서로 대화를 나눔으로써 코로나19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기도사역이 시작되고 있다. 온라인 교사 한밤기도회는 매월 넷째 주 금요일 밤 8시에 시작된다. 온라인 학부모 온맘기도회와 동일한 방식인 줌(Zoom) 화상회의에 다음세대교회 교사와 장년교회 교사들을 초청하여 기도회를 갖는 것이다. 1부는 예배시간으로 찬양, 설교, 공통의 기도제목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특히 기도제목으로는 교사를 위한 기도, 부모와 가정을 위한 기도, 그리고 교사가 맡은 영혼을 위한 기도 등이다. 교사들의 사명감을 새롭게 하여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예수님의 심장을 갖고 헌신하기를 위해 기도한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믿음으로 잘 키울 수 있도록 가정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기를 기도한다. 또한, 하나님의 비전이 다음세대의 비전이 되어 미래를 잘 준비할 수 있도록 기도한다. 2부는 소회의실로 교사들이 자기가 속해 있는 다음세대교회로 이동하여 교사회의와 함께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온라인 교사 한밤기도회는 교사들이 한마음으로 기도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매 주일 오전마다 갖는 교사회와는 성격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온라인 선교사 열방기도회는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와 협력 선교사를 줌(Zoom) 화상회의에 초대하여 가진 기도회다. 참고로 안동교회는 세계 곳곳에 14가정을 파송하고 있으며, 31가정을 후원하고 있다. 선교사 열방기도회는 한국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콜롬비아, 그리고 알바니아. 우간다, 캄보디아, 필리핀과 한국에 입국해 있던 선교사들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시차를 고려하여 저녁 늦은 시간이나 이른 새벽에 시작할 수밖에 없다. 보통 예정한 기도시간은 1시간이지만 1시간을 훌쩍 넘겨 100분 정도 이어질 때도 있다. 선교지 상황, 일반적인 기도제목과 긴급한 기도제목 등 선교사들의 보고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기 때문이다. 힘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파송·협력교회가 선교사들을 잊지 않고 중보와 협력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도회에 참여한 선교사들은 감격해 한다. 또한, 선교지의 코로나 상황과 긴급한 기도제목을 공유하여 성도들이 합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선교사들에게 큰 위로가 되고 있다. 온라인 기도회에 참석한 한 선교사는 “감동적이다. 용기와 굳은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온라인 선교사 열방기도회는 코로나19라는 암초를 만났음에도 우리 교회가 계속해서 선교의 열정을 이어갈 수 있는 큰 에너지가 되고 있다. 코로나19가 교회에 모여 기도하는 것에 큰 장애가 되고 있지만, 성도들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 기도를 중단하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신 가장 강력한 무기다. 더욱이 합심기도는 큰 능력을 가진다. 따라서 한자리에 모일 수 없다면 온라인으로라도 합심하여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사역의 에너지와 활력은 기도의 골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로나19는 어떤 형태로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하나님이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온 교회가 더욱 무릎을 세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편집부 www.gbhana.com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