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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종교계,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에 ‘모범’안동교회, 안동서부교회, 안동동부교회 등 방역수칙 지키며 부활절 예배 드려 ▲예배 장소에 들어가는 신도 수를 제한하고 예방수칙을 따르고 있는 안동교회. 안동시 종교계가 사회적 거리 두기에 모범을 보이며,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힘을 보태고 있다. 지난 주말 시에서 점검한 결과에 따르면, 지역 교회 총 204개소 중 부활절 예배를 한 교회는 113개소, 55.4%였으며, 예년마다 진행했던 연합예배는 하지 않았다. 부활절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교회에서 예배를 자제했으며, 지역사회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2월 말부터 계속 예배를 중단했다가 지난 주말에 처음 예배를 한 교회도 다수 있었다. 천주교 10개소는 미사에 신도들이 참석하지 않고 영상예배로 생중계했으며, 코로나 사태 이후 불교계에서도 법회를 개최하지 않는 등 사회적 거리 두기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지난 주말 부활절 예배를 한 교회도 코로나19 전파 예방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방역수칙을 준수했다. 안동교회는 실내 예배 장소에 들어가는 신도 수를 제한하고 1~2m 거리 유지를 위해 선착순으로 쿠폰을 발행하기도 했다. 안동동부교회는 입장하는 신도들에게 번호 스티커를 붙여 지정된 좌석에 앉도록 했으며, 좌석마다 손 소독제를 비치하는 등 예방 수칙을 철저히 이행했다. 안동수상교회는 신도 간 접촉을 줄이기 위해 자동차를 탄 상태로 예배하는 자동차 예배(Drive-in Worship Service)를 했다. 안동서부교회와 안동용상교회 외 다수 교회에서는 입구에 테이블을 설치하고, 교회 직원들이 업무를 분담해 발열 체크, 손 소독 실시, 출입자 명단작성 등 체계적으로 예방 수칙을 이행했다. 한편, 시는 부활절인 지난 주말 예배를 하는 교회를 중심으로 입장 전 발열 체크, 마스크 착용, 손 소독제 비치, 책임자 지정 및 출입 대장 작성 등 7개 예방수칙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예방수칙 준수를 홍보했다. 권영세 안동시장은 “코로나19로 인해 지역 종교계에서 장기간 예배, 미사, 법회 등을 중단하고, 방역수칙을 준수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리며, 조기 종식을 위해 끝까지 예배 자제, 예방수칙 준수 등 적극 협조해 주실 것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자동차 예배(Drive-in Worship Service)를 드리고 있는 안동수상교회. ▲교회 입구에서 발열 체크, 손 소독 실시, 출입자 명단 작성 등을 실시하는 안동서부교회. ▲지정 좌석에 스티커를 붙이고 손 소독제를 비치한 안동동부교회. 한상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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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5)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5)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 13. 구제 사역을 시작하다 14. 안동교회 돌집 예배당을 건축하다 15. 사경회 강사로 활동하다 16. 지역의 중심 교회를 섬기다 …………………………… 20. 후학을 위해 매진하다 결론 13. 구제 사역을 시작하다 1929년 1월, 임학수 목사가 부임하여 사역을 시작한 이후 안동교회에는 여러 변화가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초대교회에도 중요한 사역의 하나였던 구제사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932년 1월 제직회에서는 1931년 성탄절 감사헌금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할 것을 결의했다: “성탄헌금을 반으로 나누어 반은 노회 회계에게 보내고 반은 교회 가난한 교우에게 구제하기로 가결하다.” 1936년 1월 6일에 있었던 첫 제직회에서는 구제헌금을 장려하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교회 경상비 연도말 차인액의 1/3을 구제비로 쓰기로 하고 교인들에게 구제연보 장려하기로 하다.” 1936년은 석조 예배당을 기공하는 해로 건축비로 인한 재정적인 부담이 엄청났음에도 불구하고 임학수 목사는 구제헌금을 장려하여 상대적으로 가난한 교인들을 구제하고, 또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근 지역의 교회들을 돕고자 했던 것이다. 1930년 11월에는 어려운 형편에 있는 해외 동포를 위한 헌금도 결정하기도 했다: “만주에서 박해받고 있는 동포를 위해 헌금을 하기로 가결하다.” 만주에 있는 동포들 중에는 독립운동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가 시무하던 안동교회는 인근 지역을 넘어 해외로 까지 구제를 통한 섬김의 사명을 감당했다. 이것은 이 지역의 모교회인 안동교회가 당연히 감당해야할 넓은 어머니의 사랑과도 같았다. 또한 1934년 7월, 영·호남에 큰 수해가 발생했을 때 교회는 구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당시 홍수로 인해 경부선, 호남선, 경남선, 마산선 등의 철도가 끊겼으며, 88명이 죽고 170명이 다치는 큰 피해가 있었다. 7월 23일, 안동에도 폭우가 쏟아져 안동시내 대부분의 가옥이 침수되고 낙동강 제방이 무너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안동교회는 신속하게 수해연보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것을 노회로 보내 수해를 당한 교회를 도왔으며, 또한 교회 내 수재를 입은 가정도 제직회에 보고했다. 교회와 지역사회는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사실을 안동교회는 이미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렵고 힘든 교회와 성도들, 나아가 지역주민을 위한 구제사역은 임학수 목사의 리더십을 돋보이게 한다. ▲1934년 7월 23일, 안동에 쏟아진 폭우로 낙동강 제방이 무너져 안동시내 대부분의 가옥이 침수되고 문화재가 소실되는 등 큰 홍수 피해를 입었다. 14. 안동교회 돌집 예배당을 건축하다 안동교회는 1926년 중반부터 몇 가지 이유 때문에 2층 석조예배당을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추진했다. 예배당을 건축할 당시 일제의 수탈이 더욱 심해지고, 1934년 7월 안동시가 물에 잠기는 대 수재로 인해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동교회가 대형 예배당을 신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계속된 교회 부흥 때문이다. 또한 안동교회는 당시 경안노회 지역의 중심교회였고, 경상북도 북부지역 교회의 성장과 함께 노회의 모임이 주로 안동교회에서 회집되었기 때문에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경안노회 중심교회의 상징으로서 2층 예배당 건축계획은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건축 추진은 후임인 5대 임학수 목사 시무 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예배당 신축을 위해 임학수 목사는 선교사들을 꾸준히 설득했으며, 그 결과 다른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도 건축에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당시에는 선교회에서 노회중심의 교회 건축에 건축비의 1/3을 보조해 주는 규정이 있어서 보조를 받을 수 있었다. 아울러 임학수 목사가 가가호호 방문하는 등 건축을 위한 본격적인 행보에 교인들이 건축헌금을 작정하기 시작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금반지를 바치는 여성 성도들도 있었다. 많은 교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 돌집 예배당 건축에 어린 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드리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특히 임학수 목사는 자신의 사재 대부분을 예배당 신축을 위해 봉헌했으며, 노회 경내의 여러 교회들을 순방하면서 경안노회 중심인 안동교회 신축 예배당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경안노회는 1933년 2월 23일 경안노회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본당 신축에 모든 교회가 힘써 헌금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 신축은 노회 경내 교회들의 협력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돌집 예배당의 터는 이미 계명학교가 폐교가 된 후였기 때문에 계명학교가 서 있던 위치에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었다. 1936년 6월 8일에 있던 제직회에서는 예배당 기초 공사를 배원달 씨에게 맡기기로 하고 교섭위원은 권중필씨로 정함으로써 본격적인 건축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임학수 목사는 예배당의 정밀한 설계가 교우들의 생각에서 나왔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돌집예배당의 설계자는 미국인 보리스로 알려져 있다. 이 설계도를 기초로 성도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약간 변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돌집 예배당의 주석공(主石工)은 순천 매산학교 강당을 지었던 중국 기술자로 전해진다. 상량식(上梁式) 할 때 피로연을 하기로 결정했을 정도로 돌집예배당은 모두의 기쁨이었고 감사의 제목이었다. 1936년 초여름에 착공하여 1937년 4월 6일에 준공된 돌집 예배당은 기초면적 160평의 2층 건물은 당시로 보면 대규모 예배당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사 기간은 삼백 삼십 여일이었고, 공사비 총액은 이만 이천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건축위원장인 임학수 목사를 중심으로 온 교우의 피와 땀으로 건축된 독특한 형식과 외모를 가진 돌집 예배당이 준공되기 까지 건축기간 동안 작은 부상이나 상처는 없었는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다. 또한 지난 80여 년 동안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선교 중심지로 사용되었기에 돌집 예배당의 준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라고 할 수 있다. ▲1937년 4월 6일 돌집예배당이 준공된 후의 사진으로 81년이 지난 오늘의 예배당과 동일하다. 다만 두 개의 굴뚝이 예배당 좌측 지붕에 있고, 예배당 좌측 언덕에는 종탑이 서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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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코로나19 피해 및 예방 지원금 1천만 원 전달코로나19 피해 지역민의 생계지원금 등으로 사용될 예정 ▲안동교회는 27일 안동시에 코로나19 피해 및 예방 지원금 1천만 원을 전달했다.(왼쪽 두 번째부터 권영세 안동시장, 김승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예장통합 안동교회(담임목사 김승학)는 2월 27일 안동시를 방문해 이번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도움이 필요한 지역의 취약계층과 피해민을 위해 써달라며 지원금 1천만 원을 안동시에 전달했다. 이날 전달된 지원금은 마스크, 손 세정제, 방역물품 등 취약계층의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물품 구매비와 코로나19 피해로 어려움을 겪는 지역민의 생계지원금 등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안동교회는 안동경로대학, 다문화가정 섬김이, 안동노인종합복지센터 등을 운영, 지역 취약계층을 위한 다양한 복지서비스를 지원하고 있으며, 매년 명절 때 쌀, 라면 등 생필품을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등 나눔 문화 실천에 앞장서는 교회이다. 김승학 안동교회 담임목사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더는 확산되지 않고, 지역 안정화에 보탬이 되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코로나19 예방에 다양한 지원활동을 진행할 예정이다”고 전했다. 권영세 안동시장은 “시민들의 소중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상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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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4)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11. 전교인 기도회에 힘쓰다 12. 교회의 분립을 결의하다 13. 구제 사역을 시작하다 14. 안동교회 돌집 예배당을 건축하다 15. 사경회 강사로 활동하다 …………………………… 20. 후학을 위해 매진하다 결론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교회는 집중적으로 교인들에게 성경 교육을 하기 위해 매년 사경회를 개최했다. 개최되는 사경회에 많은 성도가 참여했으며, 참석한 성도들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안동교회의 최초 사경회는 1917년 1월 초에 열렸으며(강사는 이희봉 목사와 맹의와 선교사), 성경을 올바로 알고 배우기 위해 시작한 사경회는 해를 거듭할수록 열기가 더해 갔다. 많은 성도는 사경회를 통해 일제 강점기에서도 소망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었다. 임학수 목사는 부임한 해인 1929년, 9월 18일부터 저녁부터 8일 동안 남자 성도를 위한 사경회를 열었다. 또한, 1930년 4월 14일 저녁부터 14일 동안 교회 진흥 전도회를 갖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1930년대 초 있었던 사경회는 1년에 상·하반기 두 차례 열렸으며, 기간은 6일~8일로 요즘과 비교할 때 긴 시간이었다. 특히 한 명의 강사가 초빙된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강사가 사경회를 인도했다. 또한, 참석자의 수도 당시 교인의 숫자와 비교할 때 높은 비율의 성도들이 참석했음을 알 수 있다. 때로는 달(月) 사경회라 해서 한 달간 혹은 2~3개월 장기간에 걸쳐 성경 전체나 혹은 몇 권씩 집중적으로 공부하기도 했다. 임학수 목사는 시무 기간 동안 사경회를 중심으로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사역에 집중함으로써 안동교회와 지역의 교회를 말씀에 기초한 든든한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기초를 마련했다. 11. 전교인 기도회에 힘쓰다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새벽기도회는 1906년 가을, 평양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장로에 의해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전부터 새벽기도를 드리는 교인들이 많이 있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배당에서 혹은 산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새벽을 깨우며 또는 밤을 새워가며 기도했다. 이후 새벽마다 울려 퍼지는 교회당 종소리는 새벽 기도시간을 알렸으며, 밤마다 부르짖는 철야기도는 한국 교회의 부흥을 이룬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이와 같은 기도의 열정은 안동교회에서도 동일했을 것이다. 1910년 11월에 안동교회에서 있었던 길선주 목사가 인도한 특별부흥집회에도 새벽기도회 순서가 있었다. 임학수 목사는 열심히 기도하는 주의 종이었다. 때때로 그는 특별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온 교회가 함께 기도의 시간을 가졌음을 안동교회 제직회의록은 기록한다. 1929년 1월 안동교회는 새해를 맞이하면서 1주일 동안 신년기도회를 했다: “만국 연합신년기도회 매일 저녁 1주간 회집하기로 하였으며.” 만국 연합신년기도회는 세계 열방을 위해 중보(仲保) 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1935년 추수감사절에 1주일 동안 특별기도회 시간을 가졌다. 이것은 장로교 공의회의 결정 사항이기도 했으며, 임학수 목사는 이 결의를 잊지 않고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한 해 동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특별기도회를 했던 것이다. 임학수 목사는 기도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은 종이었다. 그래서 교회를 기도하는 교회로, 성도들을 기도하는 성도들로 훈련했고, 그 결과 안동교회는 기도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다. 12. 교회의 분립을 결의하다 1909년 8월 8일 세워진 안동교회는 지속적으로 부흥하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913년 66명에서 1932년에는 장로 4명, 세례교인 198명, 유아세례인 73명, 교인 총 수 549명으로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 이때 안동교회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안동 읍내에 안동교회 하나의 교회만으로는 안동을 복음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결과 안동 읍을 세 개 지역으로 나누고 분가식(分家式)으로 교회를 분립하기로 결정했다. 안동교회의 첫 분립시도는 교회가 설립된 지 10여 년이 지난 후 시작되었다. 안동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안기동 지역에 전도인을 파송하여 집중적으로 전도를 했고, 그 결과 1924년 1월 초가 6칸을 포함한 160평 대지를 매입할 수 있었다. 이 가옥을 안동교회 안기기도실로 명명했으며, 안동교회에서 이명하여 간 성도들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후 안기교회가 안동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분립하여 독립적 교회가 된 것은 임학수 목사가 시무하던 1932년 8월이었다. 이때 안기동 130번지 100평 대지 위에 30평 규모의 예배당을 새롭게 건축하고 안기교회(현 안동서부교회)라 칭하게 되었다. 신세교회(현 안동동부교회)의 분립도 안기교회 분립과 같은 맥락으로 이루어졌다. 안동교회는 1932년 2월, 안동교회 교인 중 경계 동편에 거주하고 있던 남성 20명, 여성 40명, 어린이 50명, 총 110명을 이명함으로써 신세교회가 분립되었다. 이후, 신세동 99번지에 대지 100평을 구입하여 건평 40평의 함석지붕의 목조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 이름을 신세교회라고 명명했다. 이처럼 안동 땅의 복음화는 분쟁에 의한 분열이 아닌 창조적인 분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 중심에 안동교회가 있었다. 그 결과 안동·안동서부·안동동부 이 세 교회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협력해 훗날 목격할 안동지역의 복음화를 위한 기초를 다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교회분립에는 임학수 목사의 역할이 매우 컸으며, 그 결과 척박한 땅인 안동지역의 복음화를 앞당길 수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는 경안노회 여전도회 도사경회로 많은 여전도회 회원들이 사경회를 마치고 안동교회 본당 앞에서 모여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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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북한결식 어린이 한 생명 살리기’ 캠페인국제사랑재단·국민일보 협약 … “☎ 060-300-0022 동참을” ▲국제사랑재단 김영진 대표회장, 김승학 이사장, 변재운 국민일보 사장(왼쪽부터) 국제사랑재단(총재 김삼환 목사·이사장 김승학 목사)과 국민일보는 2월 13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사순절 북한결식 어린이 한 생명 살리기’ 캠페인 협약식을 하고 북한 어린이를 돕기로 했다. 이 캠페인은 사순절 기간(2월 26일~4월 11일) 한국교회 성도들이 한 끼 이상 금식한 돈을 모아 배고픔에 고통받는 북한의 결식 어린이를 돕는 것이다. 재단은 북한 어린이들에게 ‘사랑의 빵’과 분유 등을 보내고 있다. 신임 이사장 김승학 목사(안동교회)는 “사순절 기간에 한국의 많은 교회가 동참해 북한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소망을 주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취임식을 했다. 김영진 재단 대표회장도 “교단을 초월해 많은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헌금해야 할 사역”이라고 강조했다. 재단은 캠페인 취지를 설명하고 참여를 요청하는 공문을 전국 교회에 발송할 예정이다. 북한 결식 어린이를 쉽게 도울 수 있도록 ‘ARS 누르기 캠페인(060-300-0022)’도 한다. 캠페인에 참여하려면 국제사랑재단 홈페이지(ilf2004.org)나 전화(02-744-7607)로 연락하면 된다. 한상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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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3)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3)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2. 예수 믿기로 결단하다 3. 고향 매정에 교회를 설립하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5. 목사로 임직(任職)하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임학수 목사가 시무할 때 안동교회는 공식적으로 신학교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써 신학생을 키우는 일에 협력하는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이 장학금은 안동교회가 지출한 최초의 장학금이다. 임학수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하던 기간에 교회에서 중심 역할을 하던 권중한·박두영 두 장로와 권중한 장로의 아들 권태희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게 되어 권중한 장로는 1934년에, 박두영과 권태희는 1936년에 각각 목사로 임직받았다. 그리하여 1936년 2월 안동교회가 박두영과 권태희에게 장학금으로 후원했던 것이다. 임학수 목사는 당시 정규 신학교를 졸업한 교역자가 부족한 시절에 안동교회 출신 3명을 후원하여 목사를 양성하여 배출시켰다. 더욱이 안동교회 80년사는 권찬영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미국 후원자의 도움으로 권태희를 목사로 육성하고, 그의 형인 권태호를 일본에 유학시켜 성악가로 키웠음을 기록하고 있다. 신학생을 후원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임학수 목사와 권찬영 선교사가 뜻을 모아 함께 힘썼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38년 제33회 경안노회에서 권중한 목사는 노회장으로 피선되었고, 박두영 목사는 후에 경동노회로 이명했으며, 권태희 목사는 임직과 동시에 동부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다가 대구로 가서 이후의 사역을 감당했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유능한 한학자에서 예수쟁이로 변한 임학수의 사고는 자유로웠다. 사실 한학을 공부한 사람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기독청년면려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는데, 예배 이외의 행사도 예배당에서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1921년 청년면려회가 시작된 이후 안동교회는 적극적으로 청년들의 사역을 도왔다. 1925년 2월 17일 예배시간에 청년면려회가 주최한 “현세에 유행하는 이혼의 폐습이 남자에게 있느냐 여자에게 있느냐”는 주제의 토론회를 허락했다. 특히 임학수 목사가 시무할 때인 1929년 청년면려회가 금주·금연 강연을 위해 안동교회 예배당을 사용하게 허락해 달라는 장소청원을 허락했다. 본 예배당을 순수 예배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90여 년 전, 안동교회는 예배만을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토론회나 세미나, 행사라면 언제든지 예배당의 문을 열 정도로 열린 교회요, 당시 담임인 임학수 목사도 열린 목회자였다. ▲1938년 결혼식 주례 후 안동교회 예배당 앞에서 기념 촬영.(뒷줄 중앙 임학수 목사) 또한, 안동교회는 교회예식을 준수하며 결혼예식을 한다면 언제든지 예배당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오늘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주(主) 예배실이 교회의 특정한 기관이나 행사를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만 지금부터 90~100년 전의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성경과 교회 규칙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합당하게 적용하여 처리한 목회자가 바로 임학수 목사이다. 임학수 목사는 성경과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유연하게 사역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목회자였던 것이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임학수 목사의 부임은 온 교회가 합력하여 환경에 맞는 새로운 전도를 시도하게 했다. 안동교회 제225회 당회록은 “오늘 저녁부터 6일 저녁까지 예배당에서 환등사진 전도를 하기로 가결하다”고 기록한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은 환등사진을 통한 전도는 당시로 보면 혁신적인 전도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환등사진 전도는 불신자들을 교회로 초청하여 예배당에서 환등사진을 보여주며 전도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영화, 사진 등 영상을 통해 전도하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는 문명의 이기에 배타적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효율적인 도구로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목회자였다. 또한, 임학수 목사는 체계적으로 전도대를 조직하여 노방전도에 최선을 다했다. 1929년 3월 4일 제직회의록에 따르면 부활주일을 전후에 마을마다 가가호호 방문하여 전도지를 배부하기로 결의했다. 이것은 임학수 목사가 이전과는 다른 보다 과학적이고 치밀한 전도계획을 세워 지역의 복음화를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31년 7월 6일 제직회는 안동을 방문하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의 전도활동을 돕기로 하고 이들을 맞이할 위원까지 구성했다. 당시 숭실전문대학교 학생들로 조직된 전도대는 안동교회가 매진하고 있던 전도에 큰 힘을 보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1935년 4월 8일의 제직회의록은 계명학교에 나오는 학생 중에 예수를 믿지 않는 학생의 가정을 방문해 복음을 전하도록 의논했다. 이 전도방법 역시 오늘의 맞춤 전도와 흡사한 방식으로 타겟(Target)을 정해 집중적으로 전도하여 높은 결신율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임학수 목사는 수하리 교회에 신실한 믿음을 가진 서무선 집사를 권찰로 임명하고, 주일학교의 헌신자로 권돌석을 파송해서 수하 지역이 부흥되어 기도처에서 벗어나 비로소 교회가 되게 했다. 그 교회가 수하교회(오늘날의 수상교회)이다. 또한, 안동교회가 세운 삼마골 기도실(오늘의 이하교회)에 김성진, 전계원을 집사로 임명해 보내기도 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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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2)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2)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2. 예수 믿기로 결단하다 3. 고향 매정에 교회를 설립하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5. 목사로 임직(任職)하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1908년 안동에 선교부가 조직되고 최초의 주재선교사로 소텔 선교사가 부임했다. 그러나 1909년 가을, 소텔 선교사는 안동에서 북쪽으로 전도를 떠난 지 10일 만에 장티푸스에 걸렸고,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지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10년 1월, 권찬영 선교사가 안동에 부임함으로써 안동선교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권찬영 선교사는 안동에 부임한 후 무려 40년 동안 안동에 머물며 지역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안동을 사랑했고, ‘Mr. 안동’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안동 땅의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임학수는 1910년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書記)로 일했는데, 아마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권찬영 선교사가 한국의 문화와 언어에 서툴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권찬영 선교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설교도 하고 예배도 인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임학수는 빨리 조사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는 권찬영 선교사의 선교 구역인 아곡교회, 원림교회, 예천의 지보 섭밧교회에서 조사로서 사역을 잘 감당했다. 그 후 1919년 제6회 경북노회에서 공식적으로 조사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1922년 경안노회가 조직된 후에는 장사리, 국곡, 덕봉, 아탐실, 수동, 하화교회 등 6처 교회에서 조사로 봉사했다. 1923년 5월, 임학수 가족이 안동교회로 이명한 후에도 임학수는 조사의 직분을 가졌기에 주일마다 여러 교회를 찾아다니며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했을 것이다. 이후 그의 조사 사역은 계속되어 1924년에는 국곡, 아곡, 수동, 장사리, 소호리, 원림, 구미교회에서 역시 조사로 사역했다. 5. 목사로 임직(任職)하다 1901년 5월, 마포삼열 선교사는 자신의 사랑채에서 김종섭, 방기창 등 2명을 모집하여 신학교육을 시작했다. 이어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북장로교, 미국남장로교 등 4개의 장로교선교회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학교 설립이 요청되었고, 1904년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평양신학교의 당시 입학조건은 까다로운 편으로 상당한 학식과 자격을 갖춘 자로 제한했다. 평양신학교는 총 5년간의 교육과정으로 진행됐는데, 매년 3개월은 학교에서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나머지 9개월은 거주하고 있는 교회에서 사역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20년에 이르러 1년 2학기 3년 과정의 학제를 가진 전문학교 제도를 도입했다. 조사로 교회를 돌보던 임학수는 1921년 가을, 비교적 늦은 37세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제9회 경북노회에서 특별 신학생으로 임학수의 평양신학교 입학이 허락되었으며, 별(別) 신학과에 입학한 지 3년 후인 1925년 1월 7일, 제7회 경안노회가 회집된 안동교회에서 문답을 거치고 나서 임학수는 목사 임직을 받았다. 임학수는 임직 후에 소호리교회 등 5개 교회를 섬겼으며, 고향인 녹전교회에서도 목회를 했다. 또한 경안신학원의 전신인 인노절 기념 성경학원 강사로 수년간 제자들을 양성했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1926년에 대한제국의 순종황제가 별세한 후에 6·10만세 운동이 발생했다. 6·10만세 운동에서 학생운동 조직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이후 학생은 독자적인 운동 주체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기독교는 더욱 일제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임학수 목사는 조국의 미래가 다음 세대의 교육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인재양성에 매진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주일학교에 관한 관심이 지대했다. 1930년에는 새롭게 주일학교 임원을 구성했는데, 담임목사를 주일학교 교장으로 결의했다. 이것은 담임목사가 주일학교 신앙교육에 책임을 지고 지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임학수 목사가 부임하기 1년 전인 1928년 9월 경안노회 역사상 처음으로 제1회 경안주일학교대회가 안동교회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이 대회는 안동, 영주, 예천, 봉화, 의성, 청송, 영양, 영덕 등 지역에서 2,300여 명이 참석하는 등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되었다. 이후 5년이 지난 1933년 4월 6일부터 5월 3일까지 제2회 경안주일학교대회가 역시 안동교회에서 열렸다. 임학수 목사는 5년 동안 중단되었던 안동지역의 주일학교 교사대회를 복원함으로써 교사들의 사명감을 회복시키고자 했으며, 각 교회의 주일학교가 든든히 서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또한, 임학수 목사는 청소년에 관해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교회 주일학교는 초등학생을 양육하는 유년부와 장년 성도를 교육하는 장년부만 존재했다. 그래서 임학수 목사는 ‘안동 기독소녀회’(1928년 조직)란 기구를 1930년 ‘기독 소년·소녀회’로 규칙을 제정하고 그 대상을 남학생으로까지 확대했다. 또 청소년 활성화를 위해 소년·소녀 현상(懸賞) 동화대회를 열 수 있도록 협력했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가 시무할 때 안동교회는 구체적인 청소년 사역을 시작하고 지원함으로써 청소년의 체계적인 신앙교육과 양육이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 제2회 경안주일학교대회.(1933년 4월 6일부터 5월 3일까지 안동교회에서 열렸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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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1)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1)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2. 예수 믿기로 결단하다 3. 고향 매정에 교회를 설립하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5. 목사로 임직하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서론 임학수 목사는 안동 땅에서 출생하고 안동 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에 갔다. 그는 안동 땅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안동지역에 있는 교회를 섬겼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교회, 크고 작은 교회를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섬겼다. 그래서 그가 시무한 교회는 든든히 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교회를 섬긴 시대 상황은 결코 만만한 세월이 아니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강압적으로 통치하던 시대였다. 특히 임학수 목사는 단순한 성도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더 큰 믿음과 용기, 그리고 인내와 소망이 필요했다. 그러나 임 목사는 어려운 시기에 교회의 지도자와 경안노회의 중심인물로 그 사명을 잘 감당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황금만능주의와 세속화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위기를 맞고 있다. 거룩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교회, 영적 리더십을 가진 존경받는 주의 종,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성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보며 낙망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교회는 과거의 교회와 과거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교훈을 배워야 한다. 거룩한 영향력을 끼친 믿음의 선배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그중의 한 사람이 바로 임학수 목사다. 임학수 목사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흔적을 남긴 주의 종이었다. 그래서 임학수 목사의 성품, 인격, 신앙을 포함한 삶은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도전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논문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연구되었다. 이제부터 일평생 단 한 번도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고 충성을 다한 믿음의 대선배인 임학수 목사가 걸어간 거룩한 구원사역의 흔적을 찾아보도록 하자.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임학수는 1884년 6월 23일 부친 임보현과 모친 정덕희 사이에서 장남으로 안동군 녹전면 매정리(일명 갈골)에서 출생했다. 임학수는 1894년 박계남과 결혼하여 임상경, 임상교 남매와 손자 1명과 손녀 4명을 두었다. 1911년 10월 23일, 임학수는 매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모친은 1913년에, 처는 1916년에, 장남은 1922년에 매정교회에서 각각 세례를 받았다. 임학수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 모든 식구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학수는 한 가문에 있어서 믿음의 조상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매정교회를 섬기던 임학수 가정은 1923년 5월 10일 안동교회로 이명했다. 임학수 목사의 장남 임상경은 안동교회에서 장로의 직분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제직회 서기, 당회서기로 봉사했다. 자부인 강신덕은 교회학교 교사, 청년회, 성가대에서 헌신했다. 임학수 목사의 장남 임상경은 부산 거성교회를 섬겼다. 장녀 임상교는 대구 신암교회 권사로, 손자 임재오는 거성교회 장로로 시무했으며, 친손녀 임순오는 부산 수영로교회 권사로, 임양자는 안동교회 집사로, 임화자는 서울 밀알교회 집사로 헌신하고 있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의 후손은 뿌리 깊은 믿음의 가정으로 어디서나 주님의 교회에 헌신하는 일꾼들이 되었다. 그만큼 임학수 목사는 목사로서의 삶도, 부모로서의 삶도, 또한 인간으로서의 삶도 모자람이 없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2. 예수 믿기로 결단하다 임학수는 1909년 안동에서 한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을 권정국 장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1905년 약관의 나이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궁내부 주사로 왕실에서 근무했지만, 관직을 그만두고 선비로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낙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던 중 한마을에 살고 있던 임경수와 함께 안동읍에 나갔다가 선교사를 만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임학수는 당시 안동선교부의 소텔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선교사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임학수는 자신의 상투를 자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임학수가 상투를 잘랐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다시는 예수를 모르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이었다. 예수 믿기로 결심한 임학수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크고 작은 개울과 강을 무려 9번이나 건너야 하는 영주 내매교회를 다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추운 정월 초하룻날 120Km나 떨어진 대구에서 열린 사경회에 참석하였다. 당시 안동에서 대구까지는 3일 길로 눈보라가 치는 추운 겨울에는 더 오래 걸렸다. 그럼에도 말씀에 목말랐던 그는 춥고 험한 길을 마다 않고 집을 떠날 정도의 열정이 있었다. ▲임학수 목사의 아들 임상경 장로 회갑기념. 3. 고향 매정에 교회를 설립하다 당시 매정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임학수는 임도현, 임경수와 함께 매정에서 20여 리 길인 영주 내매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게 전도하여 믿는 자들이 생겨나자 이들은 처음으로 신효균의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임학수는 신효균, 임도현, 임경수와 함께 1909년 9월 9일 매정교회를 설립했다. 기록에 따르면 임학수 임경수 두 사람의 마을 전도로 몇 달 만에 무려 70여 명이 예수를 믿고 교회를 건축하고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임학수, 임도현, 임경수가 함께 건축한 첫 예배 처소는 4칸짜리 초가집이었다. 이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소리가 매 주일마다 매정에서도 울려 퍼지게 되었다. 매정교회의 설립은 임학수가 예수를 영접한 이후 그가 얼마나 구원의 감격과 열정을 갖고 살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는 예수를 만난 이후 세상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의 참된 제자로 살았다. 교회가 설립됨으로써 매정의 복음화도 가속되게 되었다. 임학수는 매정이라는 마을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임학수 목사의 손자 임재오 장로 장로장립(부산거성교호회).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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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4‧끝)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4‧끝)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Chase C. Sawtell, 1881-1909) 목차 1. 서론 2.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3.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4. 소텔 선교사의 소명(召命) 5. 소텔 선교사의 성품(性品) 6. 소텔 선교사의 파송(派送) 7. 소텔 선교사의 사역(使役) 8. 소텔 선교사의 순교(殉敎) 9.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10. 캐더린 선교사의 특별한 공헌(貢獻) 11. 결론 9.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소텔 선교사는 1907년 8월 27일 캐더린 맥크롱과 결혼했다. 1884년 8월 2일 네브라스카 주 크레트에서 출생한 캐더린은 그곳에서 1년 동안 살다가 1885년 실버 크릭으로 이사하여 10년 동안 거주했다. 따라서 어린 시절 소텔과 캐더린은 한 교회를 다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3년이고, 실버 크릭 교회가 시골의 작은 교회였기 때문에 매 주일마다 주일학교에서 서로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캐더린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1905년 네브라스카 주 크리트에 소재한 돈(Donne)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기독교 병원인 오마하 제너럴 병원 간호학교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았다. 소텔과 결혼한 후 한국으로 파송 받던 해인 1907년, 23세의 꽃다운 나이인 캐더린은 5피트 10인치(약 178cm)로 당시에도 여성으로는 꽤 큰 키였다. 소텔 선교사 부부는 내한한 지 약 10개월 만에 딸을 출산하였는데, 이름은 메리이다. 선교지인 한국에서 딸을 얻은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1909년 남편 소텔 선교사가 별세했으며, 이후 캐더린은 선교 사역을 계속하다가 1910년 딸 메리와 함께 미국으로 귀국했다. 캐더린은 1918년 경 밴더립 목사와 재혼했고, 1930년 전후하여 오마하 소재 크리프톤 힐 장로교회를 섬기면서 사회복지와 관련된 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한 기록이 남아있다. 10. 캐더린 선교사의 특별한 공헌(貢獻) 안동의 교회음악에 처음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권애라 선교사다. 권애라 선교사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1909년 11월 소텔 선교사가 장티푸스로 순교한 후 그 후임으로 1910년 1월 안동에 파송된 권찬영 선교사의 부인인 동시에 소텔 선교사 부인 캐더린의 동생이다. 권애라 선교사는 초창기 안동에서 교회음악 외에 여러 선교사역의 중심역할을 감당했다. 남편 소텔 선교사가 순교한 후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는 대구에서 계속 사역을 감당했다. 이때 캐더린 선교사는 미국에서 만든 풍금을 안동교회에 기증했는데, 이 풍금으로 안동 땅에 교회음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캐더린이 안동교회에 기증한 풍금은 안동지역 최초의 풍금이었으며, 훗날 이 풍금은 안동교회의 교회음악과 영남지역의 음악역사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봄나들이’ ‘꽃 피는 삼천리’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음악가 권태호 선생이 어렸을 때부터 안동교회에 출석했고, 안동교회에서 권애라 선교사로부터 풍금을 배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동의 초기 기독교 음악은 캐더린 선교사가 기증한 풍금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 풍금이 훗날 안동교회 찬양대의 탄생을 도왔으며, 더 나아가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 중의 한 명인 권태호 선생을 낳게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풍금 기증자인 캐더린 선교사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11. 결론 1907년 9월 24일,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젊은 부부가 한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남편의 이름은 소텔(C.C. Sawtell)로 나이는 만으로 26세였다. 아내의 이름은 캐더린으로 만 23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한 지 22일 만인 1907년 10월 16일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소텔 선교사는 배속된 대구선교부에서 1년여 동안 맡겨진 사역에 최선을 다한 신실한 주의 종이었다. 그러나 1년 뒤인 1908년 안동선교부의 신설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미지의 땅인 안동으로 왔다. 그는 안동선교부의 첫 번째 주재선교사였던 것이다. 안동선교부를 위해 그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임무는 선교사들이 머물 수 있는 임시사택을 구입하는 일이었다. 그는 현재 안동교회 부지 안에 있는 한 채의 사택을 구입함으로써 선교사들이 안동에 머물면서 사역할 수 있는 기반시설 조성을 완료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소텔 선교사는 이후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고, 자생적인 교회들이 세워질 토양을 만드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안동에서 사역한 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가 남겨놓은 거룩한 흔적은 크고 무겁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텔 선교사는 1909년 11월 16일,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다음은 그의 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겠노라(I am going to love them).” 그는 조선을 사랑했기 때문에 내한했고,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로 갔다. 소텔 선교사는 안동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린 최초의 순교자였다. 안동 선교는 이처럼 거룩한 피를 흘림으로써 시작되어 안동 땅 곳곳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는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무려 109년 동안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선교사였던 소텔 선교사의 거룩한 삶은 교회가 침체되고 선교의 열정이 식어가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복음의 능력과 전도의 열정을 새롭게 한다. 소텔 선교사의 심장을 날마다 뜨겁게 했던 이 말이 식어 차게 변해버린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의 심장을 다시 뜨겁게 만들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겠노라(I am going to love them). ▲ 좌측 사진은 소텔 선교사가 별세한 후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가 안동교회에 기증한 바로 그 풍금 앞에 양복을 입고 연주하고 있는 권태호의 모습이다. 우측 사진은 연로한 음악가 권태호가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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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3)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3)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Chase C. Sawtell, 1881-1909) 목차 1. 서론 2.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3.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4. 소텔 선교사의 소명(召命) 5. 소텔 선교사의 성품(性品) 6. 소텔 선교사의 파송(派送) 7. 소텔 선교사의 사역(使役) 8. 소텔 선교사의 순교(殉敎) 9.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10. 캐더린 선교사의 특별한 공헌(貢獻) 11. 결론 7. 소텔 선교사의 사역(使役) 부산선교부의 배위량 선교사가 안동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1893년 5월 5일 안동에 도착했는데, 이 날 배위량 선교사 일행이 안동에 머문 시간은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이 때 뿌려진 복음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02년 3월, 대구선교부의 안의와 선교사가 조사 김기원과 함께 안동의 시장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이후 방위렴, 부해리, 맹의와, 어도만 선교사도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방을 순행하며 복음전파에 열심을 내었다. 안동을 포함한 경북 북부지역에 그리스도인들이 급속도로 증가하자 안의와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는 안동에 선교부가 설립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소텔 선교사는 대구선교부에서 주어진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었다. 그는 다재다능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재정 서류 작성도 능수능란했고, 건물의 기계적 문제도 거뜬히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대구 동산병원에 물을 상시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작은 풍차를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소텔 선교사는 대구선교부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선교사였다. 그러나 안동, 영주, 청송 등 경북북부지역의 복음화 필요성이 대두되자 선교협의회는 1908년 안동선교부 설치를 확정하고 소텔 선교사가 초대 주재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소텔 선교사는 1908년 12월 1일 대구를 출발하여 안동에 도착하여 선교기지가 될 임시주택 한 채를 구입하였다. 또한, 1909년 2월 강원도 원주에서 사역하던 오월번 선교사가 조사인 김영옥과 함께 안동으로 내려왔다. 이후 의료선교사인 별리추가 원주에서 안동으로 전임함으로써 안동선교부는 비로소 선교부로서의 완전한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안동선교부의 초대 주재선교사로 도착한 소텔 선교사의 주된 사역은 캠프를 개설하여 성경공부반을 운영하는 일이었다. 7일 동안 계속된 캠프에는 무려 150명이 참석했는데, 소텔 선교사는 이들을 조 편성하여 낮에는 전도하고, 밤에는 집회를 열어 하루 일과를 나누었다. 그 결과 안동읍 유일한 교회였던 안동교회는 매일 밤 신자들로 가득했다. 안동선교부가 개설된 이후 1년도 경과하지 않은 상황에서 안동으로 온 소텔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결신하였고, 결신한 자들을 모아 훈련시켰으며, 훈련받은 이들을 마을로 보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했다. 소텔 선교사의 복음전도 패러다임은 전도, 양육, 파송의 방식이었다. 낮에 복음을 전하고 돌아온 사람들과 복음을 수용한 사람들, 또한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을 모아 밤에 집회를 열었는데 무려 200명이나 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비록 소텔 선교사가 안동선교부에서 활동한 기간은 길어야 1년, 짧으면 수개월에 불과했지만 안동선교부가 조직된 지 1년 만에 이루어진 놀라운 성과는 이와 같은 소텔 선교사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후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고, 훈련된 평신도들의 증가로 인해 안동 땅에 자생적인 교회들이 세워질 토양을 만드는데 소텔 선교사가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소텔 선교사가 구입한 안동선교부의 첫 임시주택. 오월번 선교사 가족도 1910년 6월 3일 안동에 도착하여 7월 7일 두 번째 주택으로 이사하기 전 까지 한 달 남짓 거처했다. 8. 소텔 선교사의 순교(殉敎) 1909년 가을, 소텔 선교사와 오월번 선교사는 안동에서 수일 동안 전력을 다해 복음을 전한 이후 소텔 선교사는 안동에서 북쪽으로, 오월번 선교사는 서쪽으로 나누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도의 길을 떠난 지 10일 만에 소텔 선교사는 장티푸스에 걸렸다. 소텔 선교사는 선교 후원금을 아끼려고 인내하면서 조랑말을 타고 대구에 도착했다. 처음에 소텔 선교사의 병은 중한 것이 아니었지만 별세하기 이틀 전부터 심각한 상태가 되어 안타깝게도 1909년 11월 16일,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의 무덤은 현재 대구동산병원 경내의 은혜정원에 있다. 남편을 먼저 보낸 부인 캐더린 선교사는 남편의 묘비에 “나는 그들(조선인들)을 사랑하겠노라”라고 적었다. 그런데 이 문구는 소텔이 오마하 신학교에 다닐 때 자신이 한 말이다. 소텔의 신학교 동창인 월트 레이놀즈가 기억하고 있다가 묘비에 새긴 것이다. 소텔 선교사는 조선을 사랑했기 때문에 내한했고,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로 갔으며,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한국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안동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린 최초의 순교자였다. 안동 선교는 이처럼 피를 흘림으로써 시작되었던 것이다. 안동선교부의 초대 선교사로 부임한 소텔 선교사가 1909년 11월 16일, 장티푸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 안동 선교부의 정상적인 선교활동이 다소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지역의 선교는 결코 지체될 수 없는 일이었다. 순교의 피가 뿌려진 지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10년 1월, 권찬영 선교사가 안동에 부임함으로써 안동선교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권찬영 선교사는 소텔 선교사가 순교한 지 1년이 지난 후 소텔 선교사의 동서가 되었다. 안동에 발령받은 그는 별세한 소텔 선교사의 처제인 엘렌과 1911년 2월에 결혼하였으며, 정년으로 1950년 미국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무려 40년 동안 안동지역의 선교에 온 힘을 다 쏟았다. 권찬영 선교사가 소텔 선교사가 졸업한 미국 오하마 장로교 신학교 동문이었다는 사실은 안동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로 안동에서의 구원사역은 큰 단절 없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09년 10월경 사진. 오른쪽이 오월번 선교사, 왼쪽이 소텔 선교사이고, 그 옆에 김영옥 조사가 서있다. 김영옥은 1911년 9월,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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