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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9·끝)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9·끝)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 16. 지역의 중심(中心) 교회를 섬기다 17.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다 18. 최고의 한학자(漢學者)가 되다 19. 은퇴 후에도 목회를 계속하다 20. 후학을 위해 매진하다 결론 결론 임학수 목사는 1884년 안동 녹전면 매정리에서 출생했다. 한학에 능했던 임학수는 20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리로 등용되었지만, 관직을 포기하고 후학을 기르기 위해 낙향하여 있다가 1909년 장터에서 노방 전도하는 선교사의 복음을 듣고 회심하였다. 그 결과 그는 한 가정, 심지어 매정이라는 한 마을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임학수는 그 자리에서 상투를 자르고 예수님을 영접한 결단력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기독교에 입문한 임학수는 녹전에서 20리 떨어진 영주 내매교회에 다니다가 고향인 매정교회를 개척했다. 그 후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었고, 권 선교사의 조사(助事)로 아곡교회, 원림교회, 예천군 섭밧교회, 장사리, 국곡, 덕봉, 아탑실, 수동, 하화교회 등에서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집을 섬겼다. 38세인 1921년 평양신학교 입학하여 1925년 제18회로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안동교회를 시무할 때 임학수 목사는 주일학교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소년·소녀부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임학수 목사는 모든 일을 성경과 교회 규칙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합당하게 적용하여 처리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유연하게 사역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목회자였다. 그가 시무할 때 안동교회는 공식적으로 신학교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게 된다. 이 장학금은 안동교회가 지출한 최초의 장학금이다. 더욱이 임 목사는 환등사진을 통한 혁신적인 전도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노방전도를 통해 지역을 복음화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 사경회를 중심으로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에 집중함으로써 안동교회와 지역 교회를 말씀에 기초한 든든한 교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었다. 임 목사는 열심히 기도하는 주의 종이었다. 특별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온 교회가 함께 기도시간을 가질 정도로 기도사역에 집중했다. 임학수 목사는 교인들이 안동 읍내 전역에 퍼져 있음을 감안하여 교인들의 편의와 지역 전도를 생각하며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동·서편에 새로운 교회를 설립할 의지를 갖고 안기교회(현 안동서부교회)와 신세교회(현 안동동부교회)를 분립함으로써 안동의 복음화를 앞당겼다. 또한, 임 목사는 성탄헌금의 1/2은 노회로 보내 노회 경내의 가난한 교회를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 1/2은 교회 내의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1934년 7월 안동이 대수해로 큰 피해를 당했을 때 신속하게 수해연보를 하고, 그것을 노회로 보내 수해를 당한 교회를 도왔다. 임 목사는 전형적인 부흥강사는 아니었지만 인기 있는 성경사경회 강사였다. 그의 설교는 성령 충만했다. 언변도 뛰어났지만 그의 설교에 인품이 묻어났기 때문에 회중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웃고, 눈물을 흘렸다. 또한, 임 목사는 자신의 장점인 한학을 목회 현장에 도입하여 성도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회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현재 안동교회의 돌집예배당은 임학수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하실 때인 1936년 초여름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1937년 4월에 준공되었다. 건축을 위해 임 목사는 사재(私財)를 하나님께 드리는 솔선수범을 보였다. 성도들도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 정성스럽게 건축헌금을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다른 교회들과 선교사, 선교부도 건축에 협력했다. 교회를 건축하는데 무려 8,000여 개의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착공한 지 330여 일이 지나, 웅장하고 신비스러운 돌집예배당이 마침내 준공되었다. 임 목사는 경북 북부지역에서 풍요로운 영적 자산을 간직하게 될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 건축을 시작하고 완성한 리더였다. 임학수 목사는 경안노회 경내의 중심교회를 섬기며, 교회들이 본연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교회들을 든든히 세웠다. 안동의 안동교회, 영양의 영양읍교회, 풍기의 풍기교회, 예천의 예천교회와 상락교회 등이다. 임 목사는 작은 교회도 최선을 다해 섬겨 사명을 감당했다. 목사 임직 후 하화·옹천·지곡·연당·매정·안흥·녹내·방하교회 등을 섬겼다. 은퇴 후에도 당시 목회자가 없는 교회인 용상교회, 문수교회, 태화교회, 예천교회 등을 돌보았다. 일제 말엽 경안노회장이었던 임 목사가 일제의 정책에 협력한 것은 분명한 오점이지만, 당시 노회장으로서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려 했던 노력은 뒤늦게라도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한학자인 임 목사가 남긴 흔적은 오늘까지도 강하게 남아있다. 경안성서학원, 경안학원, 도원교회, 영광학원 등의 이름이 바로 임 목사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임 목사의 신앙은 무척 포용적이었다. 6·25 전쟁으로 먹을 것이 없던 1950년대, 열린 집 대문으로 탁발 승려가 들어와 시주하라는 말에 승려를 보지 않고 굶주리고 있는 한 사람을 먼저 보고 그에게 시주할 정도로 폭넓고 열린 신학을 갖고 있었다. 또 임 목사는 가정에서도 믿음의 삶을 살았다. 그는 날마다 새벽에 가정예배를 드림으로써 후손들에게 믿음을 유산으로 남기는 데 최선을 다했다. 특히, 임학수 목사는 은퇴한 후 쉬지 않고 후학을 위해 경안고등성경학교(현 경안신학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친 교육자였다. 안동에서 출생한 임학수 목사는 안동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경안노회 경내의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안동 땅을 사랑했고, 안동에 살고 있는 영혼을 사랑했으며, 안동의 교회들을 사랑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엇보다 귀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한눈팔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임학수 목사의 올곧은 신앙과 신실한 삶은 오늘의 교역자들과 성도들에게 거룩한 떨림과 울림을 동시에 준다. 오늘의 교회는 임학수 목사가 남긴 거룩한 흔적을 기억하며 새로운 비전과 도전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거룩한 사역을 용기 있게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안동교회 100주년기념예배에 참석한 故 임학수 목사의 가족과 금승학 목사(뒷줄 왼쪽 세번째).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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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8)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8)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 16. 지역의 중심(中心) 교회를 섬기다 17.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다 18. 최고의 한학자(漢學者)가 되다 19. 은퇴 후에도 목회를 계속하다 20. 후학을 위해 매진하다 결론 20. 후학(後學)을 위해 매진하다 예천교회를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은퇴한 임학수 목사는 안동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섬기고 돌보았을 뿐 아니라 후학을 양성하는 사역에도 매진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수년간 경안신학원 전신인 경안고등성경학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쳤다. 임학수 목사로부터 여호수아서를 배웠던 경안노회 은퇴목사 권영택 목사는 많은 연구에 기초한 임 목사의 강의는 역사학자처럼 전후 맥락을 잘 연결시켜 여호수아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더욱이 임학수 목사가 언제나 제자들에게 존댓말을 썼으며, 제자들을 나무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았을 정도로 고매한 인격을 갖춘 선비로 권영택 목사는 임 목사를 기억한다. 역시 제자인 장세문 목사는 임 목사가 말년에 한문을 가르쳤는데,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정갈한 모습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77세 할아버지 목사님이 칠판에 반듯반듯 정자체로 한자를 한 자 한 자 쓰실 때엔 양복저고리 왼쪽 어깨가 밑으로 축 처져 있어서 쓰시기를 마친 목사님은 학생들 쪽으로 돌아서시면서 저고리를 바로 입으시곤 하셨다.” 임 목사가 사랑하고 가르친 경안신학원은 1912년 여자성경학원으로부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앞으로 지역교회를 지도해 갈 여성 지도자를 양육할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그러다가 1914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한 인노절 선교사는 보다 체계적이고 확대된 성경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여자성경학교는 1920년 4월 10일 남녀성경학교로 확대개편 되었다. 인노절 선교사가 1922년 별세한 뒤에는 그의 부인 캐더린 선교사의 노력으로 ‘성경학교(Bible Institute)’란 이름으로 새로 건축됐으며, 1925년 새로운 교사와 생활관 건물이 준공된 후에 ‘인노절기념성경학교’로 개명되었다. ▲1922년 인노절 선교사가 하늘나라에 간 후 부인 캐더린 선교사의 모금과 경안노히 교회들이 힘을 합해 1925년 준공한 인노절기념성경학교로 반지하 1층, 지상 1층 건물로 건축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강제로 학교가 폐쇄되었지만, 해방 후에 교장인 이원영 목사는 무너진 교회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1946년 9월, ‘경안고등성경학교’란 이름으로 다시 개교했고, 1962년 3월 ‘경안성서학원’으로 개명되었다가 ‘경안신학원’으로 다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05년 3월 10일 개교한 경북 북부지역 유일한 대학원 대학교인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는데, 여자성경학교가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던 것이다. 비록 경안신학원은 안동이라는 소도시에 위치했지만 한국교회에 끼친 거룩한 영향을 생각한다면 진정으로 큰 학교라고 할 수 있다. 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공부하고 신학훈련을 받았던 사람 중에 한국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70회를 넘도록 배출한 경안신학원의 총 동문은 무려 2,000명 가까이 된다. 이들은 국내에서, 혹은 세계 열방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바로 이 역사적인 경안고등성경학교에서 임학수 목사는 당시 소명과 사명에 불타는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신학생들에게 임학수 목사는 사랑과 정성과 고매한 인격으로 제자들에게 본이 된 스승이었다. 신학생들은 임학수 목사의 강의를 통해 성경과 한문을 배웠을 뿐 아니라 인격과 목회를 배웠다. 그가 목회 실습과 같은 과목을 가르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강의에는 50여 년 넘는 동안 섬긴 열정과 사랑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임학수 목사의 제자들은 선지동산인 신학교에서 육신적으로는 노쇠했지만 영적으로 충만한 믿음의 선배요 스승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제자들은 임학수 목사를 여전히 위대한 스승으로 흠모하고 있었다. 임학수 목사는 날마다 새벽에 가정예배를 드림으로 자녀·손들에게 신앙을 훈련시키고 전수(傳授)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손녀인 임순오 권사에 의하면 예배 시에는 항상 찬송가 58장인 ‘지난밤에 보호하사’를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오래 참고 항상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을 다해 주님을 섬기라는 조부의 말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신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칠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믿음의 후배를 양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임학수 목사는 가족에게 인격과 신앙의 롤 모델과 같았다. 또한, 안동교회 후임자인 김광현 목사에게도 직·간접적으로 목회를 전수했을 가능성이 있다. 임학수 목사는 불편한 몸으로 노년을 보냈다. 그때 김광현 목사는 거의 매일 임학수 목사의 집을 방문해 문안하면서 임 목사가 좋아했던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두 분은 마치 부자관계처럼 사이좋게 지내면서 전임자와 후임자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동교회의 전임 담임목사와 후임자의 아름다운 관계는 이미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두 목사님은 만나 바둑도 두었겠지만 자연스럽게 교회와 성도들, 노회와 목회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이때 안동교회 전임 담임자요 목회 선배, 그리고 인생 선배인 임학수 목사는 여러 면에서 직·간접적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김광현 목사가 경안노회와 총회, 그리고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게 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1969년 1월 7일, 임학수 목사는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경안노회는 임 목사의 공적을 인정하여 경안노회장(葬)으로 결정하였고, 그가 11년 동안 헌신한 안동교회에서 장례예식을 치르고 운구하여 안동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1969년 1월 안동교회 예배당 앞에서 진행된 임학수 목사의 장례식.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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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영주성서신학원 졸업식 개최▲졸업생들에게 졸업증서 수여. 예장(통합) 영주성서신학원(김창진 목사, 동산)은 지난 1월 30일(목) 영주노회회관에서 제31회 졸업식을 개최했다. 이번 졸업식에는 원장 김창진 목사를 비롯한 신학원 관계자, 영주노회장 송인화 장로, 교우 등 많은 내빈과 축하객이 참석해 졸업생들을 축하하고 격려했다. 개회예배는 원감 문병조 목사(대촌)의 인도, 이사 김주섭 목사(영동)의 기도, 재학생의 특송, 목사회장 김권환 목사(고항)의 ‘스스로 개척하라’는 제목의 말씀 선포가 있었다. 이어서 원감 문병조 목사의 학사보고, 원장 김창진 목사의 졸업증서 수여, 상장 수여(이사장상 김제선, 원장상 이향숙, 노회장상 최명순, 동문회장상 권영택), 영주노회장 송인화 장로(성내)의 축사, 이사장 황강섭 장로(성남)의 치사, 기념품 증정 후 설교자의 축도로 모든 행사를 마쳤다. 제31회 영주성서신학원 졸업생 11명 명단은 다음과 같다(지금까지 졸업생은 총 344명이다). 권영택(춘양), 김순남(춘양), 강지수(영동), 권태성(영주동산), 김선숙(삼전), 김승권(영주동산), 김제선(영주제일), 이민숙(영주동부), 이향숙(오계), 최명순(호명제일), 홍성계(장수) 한편, 영주성서신학원은 2020년도 신입생을 3월 2일까지 모집 중에 있으며 1학기 개강은 3월 2일(월) 저녁 7시이다. ▲졸업식을 마치고 참석한 내빈들과 졸업생들의 기념 촬영.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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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2)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2)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2. 예수 믿기로 결단하다 3. 고향 매정에 교회를 설립하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5. 목사로 임직(任職)하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1908년 안동에 선교부가 조직되고 최초의 주재선교사로 소텔 선교사가 부임했다. 그러나 1909년 가을, 소텔 선교사는 안동에서 북쪽으로 전도를 떠난 지 10일 만에 장티푸스에 걸렸고,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지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10년 1월, 권찬영 선교사가 안동에 부임함으로써 안동선교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권찬영 선교사는 안동에 부임한 후 무려 40년 동안 안동에 머물며 지역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안동을 사랑했고, ‘Mr. 안동’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안동 땅의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임학수는 1910년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書記)로 일했는데, 아마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권찬영 선교사가 한국의 문화와 언어에 서툴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권찬영 선교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설교도 하고 예배도 인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임학수는 빨리 조사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는 권찬영 선교사의 선교 구역인 아곡교회, 원림교회, 예천의 지보 섭밧교회에서 조사로서 사역을 잘 감당했다. 그 후 1919년 제6회 경북노회에서 공식적으로 조사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1922년 경안노회가 조직된 후에는 장사리, 국곡, 덕봉, 아탐실, 수동, 하화교회 등 6처 교회에서 조사로 봉사했다. 1923년 5월, 임학수 가족이 안동교회로 이명한 후에도 임학수는 조사의 직분을 가졌기에 주일마다 여러 교회를 찾아다니며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했을 것이다. 이후 그의 조사 사역은 계속되어 1924년에는 국곡, 아곡, 수동, 장사리, 소호리, 원림, 구미교회에서 역시 조사로 사역했다. 5. 목사로 임직(任職)하다 1901년 5월, 마포삼열 선교사는 자신의 사랑채에서 김종섭, 방기창 등 2명을 모집하여 신학교육을 시작했다. 이어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북장로교, 미국남장로교 등 4개의 장로교선교회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학교 설립이 요청되었고, 1904년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평양신학교의 당시 입학조건은 까다로운 편으로 상당한 학식과 자격을 갖춘 자로 제한했다. 평양신학교는 총 5년간의 교육과정으로 진행됐는데, 매년 3개월은 학교에서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나머지 9개월은 거주하고 있는 교회에서 사역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20년에 이르러 1년 2학기 3년 과정의 학제를 가진 전문학교 제도를 도입했다. 조사로 교회를 돌보던 임학수는 1921년 가을, 비교적 늦은 37세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제9회 경북노회에서 특별 신학생으로 임학수의 평양신학교 입학이 허락되었으며, 별(別) 신학과에 입학한 지 3년 후인 1925년 1월 7일, 제7회 경안노회가 회집된 안동교회에서 문답을 거치고 나서 임학수는 목사 임직을 받았다. 임학수는 임직 후에 소호리교회 등 5개 교회를 섬겼으며, 고향인 녹전교회에서도 목회를 했다. 또한 경안신학원의 전신인 인노절 기념 성경학원 강사로 수년간 제자들을 양성했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1926년에 대한제국의 순종황제가 별세한 후에 6·10만세 운동이 발생했다. 6·10만세 운동에서 학생운동 조직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이후 학생은 독자적인 운동 주체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기독교는 더욱 일제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임학수 목사는 조국의 미래가 다음 세대의 교육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인재양성에 매진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주일학교에 관한 관심이 지대했다. 1930년에는 새롭게 주일학교 임원을 구성했는데, 담임목사를 주일학교 교장으로 결의했다. 이것은 담임목사가 주일학교 신앙교육에 책임을 지고 지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임학수 목사가 부임하기 1년 전인 1928년 9월 경안노회 역사상 처음으로 제1회 경안주일학교대회가 안동교회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이 대회는 안동, 영주, 예천, 봉화, 의성, 청송, 영양, 영덕 등 지역에서 2,300여 명이 참석하는 등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되었다. 이후 5년이 지난 1933년 4월 6일부터 5월 3일까지 제2회 경안주일학교대회가 역시 안동교회에서 열렸다. 임학수 목사는 5년 동안 중단되었던 안동지역의 주일학교 교사대회를 복원함으로써 교사들의 사명감을 회복시키고자 했으며, 각 교회의 주일학교가 든든히 서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또한, 임학수 목사는 청소년에 관해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교회 주일학교는 초등학생을 양육하는 유년부와 장년 성도를 교육하는 장년부만 존재했다. 그래서 임학수 목사는 ‘안동 기독소녀회’(1928년 조직)란 기구를 1930년 ‘기독 소년·소녀회’로 규칙을 제정하고 그 대상을 남학생으로까지 확대했다. 또 청소년 활성화를 위해 소년·소녀 현상(懸賞) 동화대회를 열 수 있도록 협력했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가 시무할 때 안동교회는 구체적인 청소년 사역을 시작하고 지원함으로써 청소년의 체계적인 신앙교육과 양육이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 제2회 경안주일학교대회.(1933년 4월 6일부터 5월 3일까지 안동교회에서 열렸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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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4‧끝)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5) 김승학 목사 논문 연재(5)-김점향 권사(4‧끝)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 (1907~1998) 목차 1. 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아기 2. 믿음의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결혼한 여성 3. 안동 3·1 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든 어린이 4. 여자성경학교에서 공부한 교회의 재원(才媛) 5. 성전건축을 위해 쌀 한가마를 헌금한 가정 6. 안동교회 첫 권사 3인 중 한 명 7.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산 증인(證人) 8. 개척교회를 적극적으로 도운 여성 9. 여교역자 복지의 효시인 경안성로원 첫 원장 10. 90년 동안 안동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9. 여교역자 복지의 효시인 경안성로원(慶安聖老院) 첫 원장 경안노회는 복지에 관한 한 국가나 다른 노회보다 앞서간 노회다. 복지에 관한 지대한 관심은 은퇴 여성교역자를 위해 1953년 경안성로원을 설립하게 했다. 경안성로원은 은퇴 여교역자의 생계와 여생을 돌보아줌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성로원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으로는 경안노회와 영주노회에 소속된 은퇴 여교역자로서 경안노회 또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에서 추천을 받아 성로원 이사회의 입원 승낙을 받아야 했다. 현재 운영은 경안노회 보조, 이사의 후원회비, 여교역자회의 후원, 여전도회 연합회와 지 교회에서 보내온 성탄헌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현재 경안성로원에는 5명의 은퇴한 여교역자가 생활하고 있다. ▲경안성로원은 반피득 선교사가 기증한 금곡동 183-1번지 소재 52평의 한옥에서 시작되었다. 이 가옥에는 처음으로 여교역자 4명이 거주했으며, 현재 안동성소병원 신관 입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진의 우측 초가집이 경안성로원 첫 가옥으로 알려져 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경안노회에서는 노쇠하고 병약하며 무의무탁한 은퇴 여교역자들의 노후를 배려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당시 은퇴한 김순애 전도사가 당장 거처할 처소가 없게 되자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경안성로원 설립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53년 제24회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총회는 은퇴 여교역자를 위한 생활관을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1953년 8월 금곡동 183-1번지 가옥에서 경안성로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당시 반피득 선교사가 기증한 52평의 한옥에는 처음으로 여교역자 4명이 거주했으며, 현재 안동성소병원 신관 입구에 위치했다. 1954년에는 2명이 거주했고, 이후 입주자는 김순애, 김정숙, 양정애, 안주봉 등이 있었다. 후에 김구암, 권성찬, 김병규, 윤손흥, 권귀출, 김순교, 문초야 등도 입주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의 기존 가옥으로 인해 성로원 신축건물의 요청은 계속되었고, 1956년 금곡동 138번지에 경안성로원이 준공될 수 있었다. 당시 조운선·설의돈 선교사가 건축비와 운영비를 담당하였고, 안동 선교부, 미국 인디아나교회,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안동교회, 안동동부교회 등이 건축을 위해 후원했다. 1956년 제27회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조운선 선교사를 경안성로원 원장으로 선출했다. 그 후 1978년, 금곡동 180-3번지에 소재한 경안신학원 여기숙사를 매입하여 이전하였다. ▲경안성로원은 성소병원 옆 금곡동 2차선 도로 건너편 주차장인 금곡동 180-3번지에 소재한 경안신학원 여기숙사를 매입하여 이전하였다. 현재 서후면 저전리에 위치한 경안성로원을 신축하여 이전하기 전까지 22년 동안 사용하였다. 김점향은 여기숙사를 구입하기 위해 예전의 성로원과 성로원 소유의 밭을 팔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현재 임만조 장로가 사는 주택은 예전에 성로원 소유의 밭이었는데 임 장로가 구입하게 되었다. 결국 처음의 성로원 가옥과 성로원 소유의 밭을 판 것으로 여기숙사를 살 수 있었다. 이곳은 20여 년 동안 은퇴한 여교역자의 휴식처로 사용되었다. 그 후 2000년 2월 서후면 저전리 292-1번지에 건평 148평 규모의 경안성로원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로원의 원장은 누리는 높은 자리가 아니다. 인내하며 겸손히 섬겨야 하는 가장 낮은 자리이다. 노쇠하고 병에 걸린 여성 교역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점향의 자부인 박춘희 권사(안동교회)의 증언에 따르면 초기 성로원의 재정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기관 등을 방문하여 후원을 받아 성로원을 어렵게 운영하다가 시(市)에서 배급하는 식량을 받게 되어 어느 정도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로원이 설립된 1953년부터 1978년까지는 조운선 선교사가 원장으로 근무했지만 김점향은 실질적인 원장의 자리에 있었다. 김점향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참고 인내하면서 무려 25년 동안 원장으로 은퇴 여교역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김점향과 가까이 살고 있던 임만조 장로는 김점향이 성로원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헌신했음을 기억하고 있다. 임 장로가 1972년 경안여자중학교의 교감이 되었을 때, 성로원 일로 김점향에게 밤낮없이 전화가 왔고 그때마다 옆에 사는 김점향에게 연결해주었다고 한다. 숨기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던 김점향의 통화를 듣게 된 임 장로는 자연스럽게 성로원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1970년대 중‧후반 임 장로는 성로원의 이사로, 또한 이사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힘이 남아있을 때까지 김점향이 붙들고 헌신한 것은 성로원에서 은퇴한 여교역자를 돌보는 일이었다고 임 장로는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께 은혜를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이웃에게 갚는 것이 바로 섬김이라는 사실은, 김점향으로 하여금 무려 4반세기 동안 경안성로원장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했다. 10. 90년 동안 안동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김점향은 교회의 모든 일에 앞장서서 헌신한 분이었다. 그는 맡겨진 일에 적극적으로 임한 인물이다. 일평생 안동교회 여전도회의 중심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주일학교 교사, 부장으로 수고했다. 그는 안동교회의 여러 분야에서 여성 평신도의 리더였다. 또한 그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존경받는 여성지도자였다. “비록 나보다 연배가 20세 정도는 어렸지만 김 권사님을 존경할 만한, 본 받아야 할 만한 영적 어른으로 삼았다.” 한 집사님의 이와 같은 증언은 김점향의 영적 권위와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김점향은 여전도회 회원들에게 있어서 선배나 후배들의 롤 모델이었다. 김점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를 여걸로 기억하고 있다.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기골이 장대했으며, 음성도 우렁차 여장부로서 손색이 없었다는 것이다. 전경상 장로는 김점향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탁월한 여성지도자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청년연합회 활동으로 당시 경안신학원 원장이었던 김기수 목사님께 인사하기 위해 사택에 갔을 때 김점향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인사했을 때 김점향은 “잘하라”라고 격려했는데, 그 말이 어떤 사람의 말보다 존경할 만한 권위와 강한 힘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이유는 김점향에게 지도자로서의 덕망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점향은 교회 안과 밖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남성과 여성에 관계없이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는 잊을 수 없는 여성지도자였다. 아니 그를 굳이 여성지도자라고 국한할 필요가 없다. 그는 안동교회가 낳은 지도자였다. 외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에 처음으로 출석한 1909년 8월 8일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1998년 10월 19일까지 90년 동안 안동교회를 떠나지 않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김점향은 교회에 출석한 이후 90년 중 오랜 세월 동안 안동교회와 경안노회를 위해 헌신한 믿음의 사람으로 남녀 성도 모두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래서 이런 지도자를 안동교회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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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종교집단이 운영하는 불법 신학원 폐쇄해달라”국민청원 7월 4일까지 진행 … 20만 명 동의 시 청와대 답변 “사이비 종교집단이 운영하는 불법 신학원을 폐쇄시켜달라”는 청원이 지난 6월 4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왔다. 청원인은 “교육부는 사이비 종교집단인 ***(‘신천지’로 게시되었으나 운영 규정에 의해 무명으로 수정)가 운영하는 무인가 학원인 복음방, 문화센터, 신학원에 대해 전수 조사하여 불법, 무인가 학원으로 드러나면 폐쇄조치를 하라!”고 촉구했다. 청원인은 지난해 10월 국민신문고를 통해 교육부에 질의하고 받은 답변을 공개했다. 청원인은 “‘종교단체가 종교시설 이외의 장소에서 학원 형태로 운영하는 교육기관(신학원, 복음방, 선교센터, 문화센터 등)이 적용 법률에 의한 학원등록 대상인지 알고 싶다’고 질의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교육부로부터 ‘10인 이상의 학습자에게 30일 이상의 교습과정에 따라 지식, 기술, 예능을 교습하는 시설이면 관할청에 학원으로 등록하도록 하고 있다. 민원께서 종교단체가 종교시설 또는 이외의 시설에서 학원 형태로 운영하는 교육기관이라고 한다면 현행 학원법상 학원 등록 대상임을 알려드린다’라는 답신을 받았다고 청원인은 밝혔다. 청원인는 “사이비 종교집단 ***에서 운영하는 신학원, 복음방, 선교센터 등에서 교육받은 자들은 납치 감금 폭행 방화 등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며, “2004년 전남 광주에서 상담사역을 하는 임** 전도사 납치감금 집단폭행” 등 3가지 사례를 들기도 했다. 한편, 이번 청원은 6월 21일 오후 3시 40분 현재 5,334명이 동의했다. 청원은 오는 7월 4일까지 한 달간 진행되며 동의 인원이 20만 명이 넘어갈 경우 정부 및 청와대 책임자가 답변하게 된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인터넷 캡처.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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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2)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1907~1998) 4. 여자성경학교에서 공부한 교회의 재원(才媛) 1908년 안동선교부가 세워진 후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성경공부 열풍이 불었다. 안동선교 초기인 1910년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영주 내매에서 개설되었던 6일간의 성경공부 모임에 무려 270여 명의 남자들이 참여했다. 또한 이듬해인 1911년에는 더욱 빈번한 성경공부 모임이 있어, 8차례에 걸쳐 1,340명이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했다. 이것을 본 선교사들은 앞으로 지역교회를 지도해 갈 지도자를 양육할 목적으로 1912년 여자성경학원을 세웠다. 여자성경학원은 선교사 사택을 이용했다. 여성성경공부반은 일주일에 두 번씩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모여 새디 선교사가 월요일에는 젊은여성반, 목요일에는 중년여성반을 인도하였다. 특히 1914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한 인노절 선교사는 보다 체계적이고 확대된 성경학교 운영을 위해 1920년 4월 여자성경학교를 남녀성경학교로 확대개편 하였다. 이때 인노절 선교사는 성경학교의 교장, 권찬영 선교사와 안대선 선교사는 교사였다. 개교 첫해인 1920년 가을, 비록 독립된 학교 건물은 없었지만, 무려 130명이 등록했으며 성소병원 진료실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성경 외에 위생, 산수, 한문, 음악, 개인전도법도 가르쳤다. ▲1920년 4월 10일 개원한 안동남녀성경학교 학생 중 1926년 촬영한 여자성경반 학생들 사진.(오른쪽 남성은 당시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 배경 건물은 1925년 준공한 인노절기념성경학교로 후에 경안신학원으로 개칭하여 수많은 교역자와 장로, 권사 등 평신도를 배출했다. 김점향은 1920년 중반 여자성경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수학했다. 아마 성경학교의 졸업은 그로 하여금 보다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는 20대 초반 이미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젊은 여성의 중심인물이었다. 그 결과 1932년부터 1956년까지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서기였다. 무려 24년 동안 서기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여자성경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성경과 기초적인 신학, 그리고 교회 등에 관해 공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5. 성전건축을 위해 쌀 한가마를 헌금한 가정 지금도 예배를 드리고 있는 안동교회 예배당을 돌집 예배당이라고 부른다. 이유는 화강암을 쌓아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안동교회 예배당은 1936년 봄에 기공하여 1937년 4월 6일에 기초면적 160평의 2층 건물이 준공되었다. 예배당 건축계획은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기성회를 조직하고 1926년 9월 19일 첫 번째 회의를 했다. 하지만 박 목사는 교회를 사임하고 새로운 임지인 일본 오사카로 떠나게 됐다. 따라서 돌집 예배당은 후임인 5대 임학수 목사로부터 본격화되었다. 또한, 경안노회는 1933년 2월 경안노회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본당 신축에 모든 교회가 힘써 헌금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돌집 예배당 신축은 안동교회 성도 뿐 아니라 노회 경내 교회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의 설계는 권찬영 선교사의 의뢰를 받아 당시 일본에 와 있던 미국인 선교사인 보리스였고, 시공은 당시 최고의 건축회사인 서울 복음건축장을 운영하고 있던 중국인 왕공온(王公溫)이었다. 임학수 목사는 예배당 신축을 위해 선교사들을 꾸준히 설득했으며, 노회 경내의 여러 교회를 순방하면서 경안노회 중심인 안동교회 예배당 신축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건축모금도 계속했다. 또한, 예배당 건축에는 어린이·어른·남녀 구분 없이 온 성도들이 마음과 뜻을 다했다. ▲역사적인 안동교회 2층 석조예배당은 교인과 지역교회, 안동주재 선교사, 타지역선교부, 안동성소병원 의사들, 뜻있는 사람들의 합력으로 완성되었으며, 오늘까지 경북북부지역 교회 부흥의 센터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다. 이때 김점향의 가족도 동참했다. 당시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온 성도들이 힘을 모을 때 김점향의 남편인 강신효는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굶더라도 교회 짓는 데 최선을 다해 헌금해야 한다.” 김점향 가정은 당시에 큰 금액인 쌀 한 가마를 건축헌금으로 했다고 한다. 또한 십 년 전 90을 넘긴 한 장로님은 예배당이 건축될 때 자신이 어렸지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예배당 건축에 사용된 돌 2개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안동교회 온 성도들은 교회를 건축하는 데 한마음이 되어 낙동강에서 모래를 파오는 사람도 있었고, 돌을 지고 옮기는 사람도 있었다. 6. 안동교회 첫 권사 3인 중 한 명 1746년 존 웨슬리는 ‘권고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권사(勸師)라는 직분을 만들었다. 권사는 목회자를 돕기 위하여 전도와 봉사, 심방, 그리고 권면 등을 위하여 선출되었다. 이 권사 직분은 미국 감리교회를 통해서 한국의 감리교회, 그리고 장로교회에서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1955년 제40회 예수교장로교총회에서 봉사를 잘 감당하는 여성의 직분으로 권사를 주기 시작했다. ▲1985년에 있었던 기관별 경창대회에 참석한 여전도회 회원의 모습.(오른쪽 끝이 김점향 권사, 오른쪽에서 4번째가 송점출 권사) 1968년 첫 권사로 임직한 3명의 권사 중 김일애 권사는 1972년에 별세하여 이 사진에서 그 얼굴을 볼 수 없다. 비록 1955년 장로교단에서 권사가 시작되었지만, 안동교회의 첫 권사는 13년이 지난 후 1968년 8월 3일에 배출되었다. 이때 취임한 권사는 3명이었으며, 송점출, 김일애, 김점향 권사이다. 이들은 이미 안동교회와 경안노회를 위해 충성을 다해 헌신해온 전설적인 여성들이었다. 이들의 권사 취임으로 안동교회는 항존직에도 여성이 포함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첫 권사로 취임한 3명의 권사 중에서 김일애 권사는 1972년 1월 16일 별세함으로, 송점출 권사는 1975년 3월 30일 정년으로 은퇴했다. 그리고 김점향 권사는 1978년 정년으로 은퇴했다. 1969년 11월 20일 경안노회 선교 60주년 기념식이 안동교회에서 있었다. 이때 경안노회 경내에 14명의 60년 이상 계속 믿음을 지킨 성도가 있었는데, 이 중에 김점향 권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안동교회에서 첫 권사가 취임 이후 두 번째 권사 취임은 1년 반이 지난 1971년 역시 3명의 권사가 취임했을 정도로 권사 취임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설립된 지 70년이 되는 1970년대까지 안동교회에서 취임한 권사의 총수가 11명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김점향의 초대 권사 취임은 그만큼 상징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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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 총회 지정 한국기독교사적 제36호 봉경(鳳卿) 이원영 목사 생가▲봉경 이원영 목사의 생가가 예장통합 103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사적 제36호로 지정되었다.(자료제공=안동서부교회) 한국기독교사적지 제36호 지정예식이 오는 4월 4일 오전 11시 생가(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706번지)에서 총회역사위원회와 경안노회, 안동서부교회 주관으로 열린다. 1부 감사예배에서는 경안노회장 이위철 목사가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며, 2부 지정식에서는 임희국 교수가 사적소개를, 총회역사위원장 서원수 목사가 지정공포와 함께 증서를 전달한다. 3부 축하식과 4부 제막식은 이정우 목사(안동서부교회 담임) 사회로 진행된다. 이 생가는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손인 봉경 이원영 목사(1886~1958)가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예안 3‧1운동을 주도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옥중에서 이상동 장로의 전도로 기독교 신앙에 입신하였다. 출옥 후, 안동 성경학교와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영주 중앙교회, 이산 용상교회, 신세교회(현, 동부교회), 안기교회(현, 안동서부교회) 등에서 목회를 사역하였다. 이원영 목사는 일제의 황민화 정책(창씨개명, 신사참배) 거부로 목사직 시무 사면을 당했으며, 이후 해방이 되기까지 4차례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과 함께 출옥한 그는 1946년 경안고등학교(현, 경안신학원)를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에 힘썼으며, 1954년에는 제3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추대되어 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발표했다. 정부에서는 예안 3‧1운동의 공로로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으며, 1999년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에 이장되었다. 안동서부교회는 지난해 1월 이원영 목사 생가를 경안노회를 경유하여 총회 사적지 지정을 신청했으며, 지난 103회 총회에서 인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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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어 같이 갑시다!제102회 예장(합동)총회장 전계헌 목사 사랑하는 총대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과 전국교회 그리고 지구촌에 흩어진 우리의 디아스포라 지체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교회만을 섬기는 미말의 부족한 종을 하나님께서는 총회장으로 뽑아 주셨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저는 총회장으로서 여러분들의 협조를 받아 다음과 같은 일에 힘쓰겠습니다. 1. 교회의 거룩성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겠습니다. 교회는 그 이름만으로도 존귀하고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팎에서 교회를 거룩하다고 인정하며 바라보는 시각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불과 500년이 지난 지금 ‘제2 종교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구동성입니다. 지금은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개혁’이 아니라 ‘교회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경적인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일에 우리의 능력을 집결시켜야 합니다. 2. 교회지도자들의 윤리회복에 힘쓰겠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의 부도덕하고 타락한 부끄러운 모습을 볼 때, 교회지도자들의 윤리회복은 우선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윤리를 회복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사탄의 시험을 이기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교회지도자는 교회로, 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에 힘쓰고 말씀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3. ‘총신’을 살리는 일에 노력하겠습니다. 총신대학교, 총신신학대학원, 총회신학원 등을 총칭하여 ‘총신’이라고 명명하겠습니다. 현재 제 눈에 보이는 ‘총신’은 중환자실에서 링거에 의지하여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중증환자의 모습으로 보여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총신문제는 현재 총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핫 이슈입니다. 총신은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법과 질서, 원망과 법적 다툼, 감정과 상처들을 다 내려놓읍시다. 새롭게 시작합시다. 모든 기득권을 다 포기하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총신이 바로 서야 우리 총회와 총회 산하 모든 교회에 소망이 있습니다. 4. 총회의 현안 타결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은급재단납골당문제, 기독신문문제, GMS(총회세계선교회)문제 및 구제 부의 신뢰회복 등은 우리가 안고 있는 총회의 아킬레스건들입니다.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대(對) 교단 관계, 동성애와 이슬람 같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법과 제도를 책임지고 있는 대정부 대 사회관계, 대북한 관계, 개혁주의 신학을 보수하기 위한 외국 교단들과의 교류와 연대 문제 등도 세계 장로교회를 대표하며, 대한민국 최대교단으로서 본 교단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만혼과 저 출산문제, 다문화가정문제, 경제적 약자를 보듬는 복지문제 등도 다음 세대를 위해 반드시 풀어내야 하는 과제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에 대해 저는 성경과 교리와 신학에 위배됨이 없는 범위 안에서 적극 협력해나갈 것입니다. 5. 성경적인 칼빈주의 개혁주의를 실천하는 일에 지혜와 힘을 모으겠습니다. 본 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는 하나님중심, 성경 중심, 교회중심이라는 개혁주의 장로교의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좋은 전통적 신앙과 신학을 교회강단이나 학교강단에서만 가르치고 외치는 신학이 아니라 실천적인 칼빈주의, 실천적인 개혁주의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용납할 수 없는 이단이나 사이비 단체 뿐 아니라 불건전한 정체불명 단체의 사상이나 술수가 교회 안에 유입되지 못하도록 영적 순수성과 신학의 정통성을 고수하겠습니다. 저는 제102회기를 ‘둘이 하나 되어’라고 풀이하고 싶습니다. 형제라고 하면서도 서로 반목하며 멸시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 모두 하나 되어 같이 갑시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총회 산하 모든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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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영주성서신학원 졸업식 개최예장(통합) 영주성서신학원(김창진 목사, 동산교회)은 지난 6일 영주노회회관에서 제29회 졸업식을 개최했다. 개회예배는 문병조 목사(원감 ,대촌교회)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황배엽 장로(이사, 예천지보교회)의 기도, 김기태 목사(영주노회장, 원리교회)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라는제목의 말씀 선포가 있었다. 이어서 문병조 목사의 학사보고, 졸업생 9명(강진순, 권정숙, 김시인, 박진숙, 송정근, 윤현정, 이복희, 임경휘, 지수찬)에 대한 김창진 목사의 졸업증서 수여, 졸업생에 대한 상장 수여, 권정호 목사(이사장, 봉화제일교회)의 축사 등의 순서 후 최갑도 목사(前 노회장)의 축도로 모든 행사를 마쳤다. 한편, 영주성서신학원은 2018년도 신입생을 3월 5일까지 모집 중에 있으며 1학기 개강은 3월 5일 저녁 7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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