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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노회, 21일(주) '제150회 기념 연합집회' 개최한다▲강사로 나선 이승희 총회장(좌)과 소강석 목사(우) 예장합동 경동노회(노회장 류광하 목사)는 ‘경동노회 제150회 기념사업’으로 오는 21일(주) 저녁 7시 포항 큰숲교회(장성진 목사 시무) 본당에서 연합집회를 개최한다. 이번 집회에서는 예장합동 이승희 총회장(반야월교회)이 개회예배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으라”는 제목으로,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가 연합집회에서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다. 1부 개회예배는 장재덕 목사(영천서문)의 인도, 부노회장 박문균 장로(소동)의 기도, 이호현 목사(대광)의 축사, 류광하 노회장(오천사랑의)의 축도 등의 순서가 있다. 2부 연합집회는 김중석 목사(경주성광)의 인도, 장성진 목사의 기도, 이관영 목사(영천문화)의 축도 등의 순서가 있다. 3부는 김중석 목사의 인도로 모범교회 및 성도에게 표창패를 수여한 후 박성환 목사(동해성남)의 기도로 모든 순서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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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2)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 정재순 목사 (鄭在淳, 1878~1948) 4. 선교사의 동역자인 조사(助事), 정재순 부해리 선교사의 전도로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된 정재순은 기독교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다가 교회를 돌보는 조사로 사역하게 된다. 1908년에는 방혜법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상주 속산교회, 사산교회, 금혼교회, 등 상주지역에서 시무했다. 1909년에는 안의와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경산 삼복교회(현 경산교회), 사월교회, 전지교회(현 남산교회), 금곡교회, 복사교회(현 자인교회)를 섬겼으며, 1912년 경산 사월교회, 전지교회, 복사교회, 대구신정교회(현 서문교회)에서 조사로 활동했다. 그 당시 조사(助事, Helper)는 초기 한국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들은 선교사의 가옥,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나 병원에서 일했으며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교사들의 따뜻한 사랑과 헌신을 발견하고 최초의 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적으로 복음전파에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선교사들의 통역자 역할을 했고, 선교사 대신 일정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훗날 많은 조사들이 교회를 전적으로 섬기는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고 목회자가 되었다. 장로교 선교사의 조사요 지역 교회의 장로로 수년 동안 이미 교회사역에 충성을 다하고 있던 정재순도 이 공식에 예외 없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5.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노(老)학생, 정재순 정재순은 1912년 봄, 35세 나이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정재순은 1912년 3월 6일 대구남문교회당에서 모인 제1회 경상노회에 입학을 청원하였고, 허락을 받았다. 이때 경상노회에 신학입학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은 사람은 정덕생, 김기원, 서성오, 김공명, 박영조, 정재순, 김상삼, 박성애, 박덕일, 김응진 제씨였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정재순은 3년간의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1915년 6월 15일 평양신학교 제8회로 졸업하였다. 평양신학교는 ‘신령(神靈)한 목사’라는 교육목표처럼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1901년 평양 대동문 옆 마포삼열 자택에서 개교되었다.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폐교되기까지 34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37년 동안 총 79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제8회 평양신학교 졸업생은 28명이다. 이때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됐는데, 이자익, 방효원, 정재순 제씨가 바로 그들이다. 1915년 제8회 평양신학교 졸업 앨범으로 사진 중앙에 교사로 수고한 선교사들이 있고, 그 주위로 졸업생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정재순 목사는 맨 아래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이다. 6. 대구·경북지역의 복음 전도자(前導者), 정재순 정재순 목사는 조사로 사역할 때도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했다.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칠곡 지역에 설립된 16곳 교회 중 2곳이 정재순 목사가 개척한 교회이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정재순 목사는 1915년부터 1922년까지 대구 신정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면서 대구 침산교회, 남산교회, 대구 범어교회에서도 사역을 감당했다. 1919년 대구 3·1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어 있다가 출옥한 후에는 신정교회를 사임하고 1922년 안동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5월 안동교회를 사임하고 다시 대구로 돌아온 정재순은 1925년부터 1938년까지 대구 동산병원(현 대구 동산의료원) 직원 전도회 담당 목사로 시무했다. 비교적 주일에 자유로웠던 정재순 목사는 한 교회에 매여 있지 않고 약한 교회들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가 섬긴 교회는 경산 고모교회(폐지), 영천 사창교회(폐지), 영일 기계교회, 달성 덕지교회, 금릉 봉곡교회, 성주 구릉교회, 영천 삼귀교회(폐지), 청도 예리교회, 칠곡 금암교회(현 동명교회), 달성 조암교회(폐지), 달성 방촌교회, 청도 구촌교회(폐지), 청도 대천교회, 영천 대제교회(폐지), 칠곡 기성교회, 월성 입실교회, 상주 양촌교회, 경주 유담교회, 경산 경동교회, 고령 유동교회(현 운수제일교회), 외동교회(폐지), 군위 삼산교회(폐지), 고령 평지교회(폐지), 선산 석우교회, 청도 음지교회(폐지), 상주 화령교회, 의성서제교회, 오로교회 등이다. 이후 정재순 목사는 1938년부터 1946년까지 신정교회에서 두 번째 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한편 정재순 목사는 기존의 경상노회에서 분리된 경북노회에서 1919년, 1939년, 1945년 세 번에 걸쳐 노회장을 역임하며 대구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로 영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7. 대구 3·8만세운동의 주역(主役), 정재순 대구지역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 3월 10일, 3월 30일에 걸쳐 총 세 차례 있었다. 당시 기독교 지도자인 남성정교회의 이만집 목사와 신정교회의 담임목사이며 당시 경북노회장인 정재순 목사, 남산교회의 김태련 조사, 백남채 장로, 계성학교 교감선생인 김영서 등이 시위를 주도했다. 이 만세운동으로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는데, 당시 동원 담당이었던 정재순 목사도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정재순의 아들인 정원조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정원조는 당시 계성학교 학생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6개월 동안의 징역으로 오래 살지 못하였다. 부자가 함께 3·1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는 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남을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정재순 목사는 일제 말엽, 친일(親日)에 가담하게 된다. 1938년 6월 중순경, 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자발적인 총후봉사활동을 내세우며 조직한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간섭과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던 1939년을 지나면서 노회장이란 직함으로 인해 이 단체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활동은 정재순 목사의 분명한 과오이지만 그는 회심한 이후 40여 년 동안 신앙, 사역과 헌신을 통해 교회와 민족과 역사에 긍정적인 기여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초창기 대구에 소재한 교회의 지도들로 좌측으로부터 박영조, 이만집, 김기원, 정재순 목사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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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3)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9. 이대영, 중국선교를 향한 부르심에 순종하다 이대영 목사는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교회에 충성을 다하던 중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국의 부름을 받고 중국 산동 반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1913년 한국교회 최초로 해외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목사는 중국 산동지방 선교사로 파송된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현지 부적응과 건강문제로 1917년 귀국하였다. 위기에 처한 선교를 위해 총회는 1917년 홍승한과 방효원을 산동에 다시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1918년 박상순, 1922년 이대영, 1931년 김순호, 1937년 방지일을 산동에 파송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초기에 파송된 선교사는 이대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북출신이었다. 따라서 이대영은 영남지역에서 세계에 파송한 첫 선교사인 것이다. 이대영 목사는 우선 가족을 두고 홀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하였다. 평북노회 여전도회는 이대영 선교사의 선교비를 후원함으로써 선교에 동참하였다. 그는 래양에 도착한 후 10개월 동안 언어공부와 현지적응에 열중했으며, 이듬해인 1923년 4월 즉묵(卽墨)을 선교지로 정하고 한국을 떠나 중국에 도착한 가족과 함께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중국선교에 헌신하고자 중국 교역자 모임에 참석할 뿐 아니라 경안노회에서 이명하여 중국 산동성 중회기독교회 교동(嵺東)노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현지인과의 이질감을 불식하기 위해 항상 중국인 옷을 입고 중국인들과 더불어 생활했으며, 특히 표준중국어와 산동어를 익혀 중국말로 설교할 수 있을 즈음에는 왕성한 전도와 교회개척에 전력투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회의 심각한 재정압박과 선교지의 어려움으로 선교사의 소환 문제가 총회의 중요한 안건으로 상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시 귀국한 이대영 선교사의 끈질긴 설득으로 1925년 9월 제14회 총회는 이대영 선교사의 연임을 결정했다. 이에 힘을 얻은 이대영 목사는 즉묵으로 돌아가 조선인 교회를 돌보며 1927년 8월 즉묵예배당과 전도기관 건물을 준공할 수 있었다. 이대영 목사는 뜨거운 복음의 열정으로 교회개척과 돌봄 사역, 전도지 배부 및 순행, 매서사역, 강연 및 사경회 인도 등 즉묵, 궁가장, 박자, 오산위, 대인관, 지방, 풍성, 곽리 등 즉묵현 주변 8개의 지방교회들을 돌보았다. 또한 파송 받은 지 6년 동안 열심히 사역을 감당한 결과 1928년 11월 그가 속한 교동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되었고, 한국장로교회가 1923년 외국에 최초로 설립한 성경학교인 내양화동 성경학교 교장으로 사역하였다. 이대영은 선교사역을 총회에 보고하기 위해 가족을 남겨 둔 채 홀로 1948년 7월 일시 귀국했다. 하지만 총회를 마치고 출국을 기다리던 중 10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을 세우게 되어 중국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국내 중국인 교회인 중화기독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기도 했다. 그는 다시 중국에 선교의 문이 열릴 때까지 당분간 선교사 신분을 유지한 채 국내에서 순회사역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54년 4월 중국에 남아있던 가족이 무사히 귀국하였고 영락교회에서 이대영 선교사 선교 33주년 기념 및 가족 환영예배가 성대히 거행되었다. 10. 이대영, 선교지의 동역자와 함께 전력투구하다 이대영은 동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고 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총회에서 파송한 여러 선교사들과 동역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1937년 파송되어 산동에 온 방지일 목사와 무려 10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중국선교에 전력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후에도 이대영 목사는 방지일 목사와 동역을 통해 현지에 거류하고 있던 동포들을 도와 무사히 한국으로 귀환할 수 있게 했다. 이때 이대영 목사는 한국교민회를 조직하여 교류민 단장을, 방지일 목사는 교포중학교 교장을 하였다. 1913년 산동반도 선교가 처음으로 시작된 이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로부터 파송된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1919년의 교세는 예배처소는 6곳, 학교는 3개교, 49명의 세례교인, 학습이 40명, 평균 출석 60여명의 교회로 성장했다. 1922년 6월에는 이대영이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1923년에는 선천에서 일하던 의사인 주현칙 장로가 합류해 래양에 병원을 개설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늘어나고 사업이 확장되면서 산동선교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다. 1920년 래양에 새 교회당 건물을 마련했으며, 1921년부터는 래양에 성경학원을 설립하여 본토인 목회자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이대영 목사는 산동에서 사역할 당시 동역자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많이 줄 정 도로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성경학자로 교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반쉰청 목사, 행정가인 쇼요섭 목사와 동역함으로써 중국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갔다. 특히, 그는 현지인을 목회자로 영성하고 세우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 결과, 1929년에는 산동선교의 결실로 얻은 중국인 류수파(劉書法)가 목사로 장립되기까지 했다. 류수파는 방효원 선교사가 제로(濟魯)대학에 보내 공부시키고 목사로 키워 중국교회를 위해 동역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이대영 목사는 범순청 목사와 서로의 선교담당지역을 같이 돌보며 협렸했다. 이대영 목사는 현지인 리더와 동역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피선교지에서 주종의식을 가지고는 결코 복음의 확장성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현지인들을 교육하고 양육하여 현지인 리더십을 세우는 일에 누구보다 우선했고, 그 결과 산동지역의 교회들은 선교사들과 현지인 지도자들이 대등한 관계에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앞줄 왼쪽부터 반쉰청 목사, 쇼요섭 목사, 류수파 목사 뒷줄 왼쪽부터 이대영 선교사, 방효원 선교사, 박상순 선교사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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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4·끝)김 승 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영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9. 한국교회의 목사 대가족 · 명문가문을 이룬 사람, 김영옥 김영옥 목사의 아들 故 김은석 목사 김영옥 목사의 손자 故 김형태 목사 김영옥 목사 가문은 목사 대가족과 명문가문을 이루었다. 1대 김영옥 목사로부터 4대에 걸쳐 무려 9명의 목사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1대 김영옥 목사, 2대 김영옥 목사의 장남 김은석 목사, 3대 김은석 목사의 자녀인 김형칠 목사, 김형일 목사, 김형태 목사, 김형달 목사, 김형숙 목사, 4대 김형규 목사, 김대규 목사 후보생 등 4대에 걸쳐 9명의 교역자가 배출되었다. 김영옥 목사의 장남인 김은석 목사는 193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풍기성내교회(1909년 설립)를 담임으로 섬겼다. 김영옥 목사도 풍기성내교회 3대 담임목사로 섬긴 적이 있었는데, 부친의 뒤를 이어 그는 4대 담임목사로 5년 동안 풍기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성내교회를 사임한 후 일본 나고야 한인교회에 부임하여 나고야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목양했다. 하지만 1941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던 날 새벽, 나고야 민족주의 및 종교그룹 사건인 조선독립단사건에 연류 되어 일본 경찰에 검거당해 1년 넘게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1944년 8월에는 여운형이 중심이 된 건국동맹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르면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해방과 함께 출옥한 김은석 목사는 경북 문경으로 내려가 정치일선에 나섰다가 낙선한 후 다시 목회현장으로 돌아왔다. 그 후 김은석 목사는 자신이 여러 차례 감옥생활을 경험한 탓으로 수감자를 전도하는 사역에 헌신했다. 1956년 김천의 소년원 교화사로 시작하여 1966년 정년으로 퇴임하기 까지 10년을 수형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사명을 감당했다. 정년퇴임 후에 인천에 거주한 김은석 목사는 계속해서 인천 소년원생들의 선도에 힘쓰면서 별세하기 전 까지 25년 동안 교도소 전도에 온 힘을 다 쏟았다. 2대 김은석 목사 자녀들은 대부분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김은석 목사의 자녀는 모두 6남 1녀로 이중 5형제가 목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더욱이 외동딸의 남편인 사위까지도 목사였다. 장남인 김형칠 목사는 서울 신학대학교를 나와 부산노회장을 역임했으며, 2남인 김형일 목사는 고려신학교 출신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교를 거쳐 롱비치대학교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현지 한인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3남인 김형태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교, 피츠버그 대학교를 거쳐 연동교회를 섬겼다. 4남인 김형달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과 미국 풀러신학대학교를 거쳐 미국에서 외항선원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5남인 김형숙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를 졸업하고 미국 볼티모어 한인교회를 섬겼으며, 6째인 외동딸 김순자의 남편인 이성식 목사도 흑석동 교회에서 목회했다. 막내인 김형준은 연세대학교 신학과 출신으로 목사지망이었으나 전공을 경영학으로 바꿔 미국으로 건너가 장로로 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풍성한 3대와는 달리 4대에 와서는 1명이 목회자로 살고 있다. 장남인 김형칠 목사의 아들인 김형규 목사는 미국 퀸즈연합장로교회를 섬기며 목사의 길을 걸었다. 김형태 목사는 4대에 걸친 목사 집안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 대해 “목사는 다른 직업과는 달리 무언가 남다른 ‘어떤 소명의식’이 없어서는 안 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 고귀한 소명이 형제 모두에게 고루 나눠진 것을 우리 가문에 대한 하늘의 축복으로 믿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김형태 목사는 연동교회가 세워진 지 73년 후인 1967년, 연동교회 제5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볼 수 있다. 연동교회 출발에 큰 공(功)을 세운 조부 김영옥 목사(당시 조사의 신분)의 뒤를 이어 손자인 김형태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이다. 그는 1989년 조기 은퇴하기 까지 22년 동안 연동교회와 총회, 그리고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할아버지가 전도한 사람들에 의해 개척된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을 때 손자의 심정이 어땠을까? 아마 감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교회 130년 역사 가운데 다시 배출되기 힘든, 그러나 한국교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고 까맣게 잊혀진 최고의 명품 목사 중의 한 분인 동시에 그의 후손들은 신앙의 명문가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10. 아들과 손자를 돌보고 그의 사역을 도운 할아버지, 김영옥 김형태 목사에 따르면 조부인 김영옥 목사는 매우 가정적인 분으로 8명의 손자를 친히 키우셨다고 기억한다. 부친인 김은석 목사는 교회 일이나 정치에는 열심이었지만 가정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에 조부인 김영옥 목사가 거의 모든 일을 맡아 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실제로 광복 후 김은석 목사가 건국운동을 위해 서울로 상경한 다음 김영옥 목사는 김은석 목사 가정을 인솔해서 문경으로 이사할 정도로 책임감이 강했다. 한편, 김은석 목사는 풍기성내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을 때 전임자였던 부친 김영옥 목사와 함께 6개월 여 동안 동역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김영옥 목사는 아들의 목회를 염려하면서 그의 목회사역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 결과 풍기성내교회는 안정적으로 리더십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었다. 또한, 김영옥 목사는 마지막 목회지인 의성 삼분교회에서도 장손인 김형칠이 경성신학교를 졸업하고 삼분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시작할 때 장손의 목회를 도왔다. 이듬해에 발발한 6 25 한국전쟁으로 피난 갔다가 1951년 삼분으로 돌아온 후 동년 5월 10일 김형칠이 목사 장립을 받았다. 장손이 목사로 임직했을 때 조부인 김영옥 목사는 얼마나 기뻤을까? ▲1941년 안동교회 본당인 석조예배당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김영옥 목사는 당시 안동교회 6대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다. 중앙에 김 목사 부부와 장남 김은석 목사 부부, 그리고 장손 김형칠 목사 및 8남매를 볼 수 있다. 한국 땅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84년 4월 5일이다. 복음의 씨가 뿌려진 지 67년이 경과한 1951년 5월 10일, 직계로 3대 목사 가정이 탄생한 것이다. 장손이 목사가 된 후 김영옥 목사는 1952년 3월 27일 81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당시 삼분교회 당회장 직분으로 세상을 떠나시는 날 아침 교회 장로들을 사택으로 불러 “간밤에 하늘에서 불자동차(?)가 내려왔는데 빈자리가 하나 있어 아마도 내가 탈 자리인 것 같더라. 내 어린 손자 형칠 전도사의 목회를 잘 도와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장로들이 나간 후 자리에 누우셔서 조용히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셨다. 마지막 하늘나라에 가는 순간까지 김영옥 목사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책임을 감당한 자애로운 분이었다. 김영옥은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교회에서는 선배목사요 전임교역자로 후배목사와 후임교역자에게 교회를 잘 섬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믿음의 선배였던 것이다. 결론: 거룩한 흔적을 남긴 위대한 사역자, 김영옥 목사 김영옥 목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일평생 동안 복음전도와 교회 목회에 전념한 목회자들의 롤 모델(Role Model)과도 같은 분이었다. 따라서 경상북도 북부지역과 그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초대담임인 김영옥 목사는 당연히 존경받아야 하고 기억되어야 할 믿음의 선배인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단 한 번도 예수님을 실망시키지 않았 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았다. 교회에서는 매서인으로, 조사로, 영수로, 장로로, 그리고 목사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또 헌신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또한 하나님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 결과 일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품에 안겼다. 김영옥 목사는 일제 강점기, 광복, 건국, 6·25 전쟁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의 전 생애는 믿음 없이는 결코 설명될 수 없다. 김영옥 목사는 교회에서는 사랑의 목자였고, 지역 사회와 국가를 사랑한 공의의 지도자였다. 날마다 경건한 신앙생활을 통해 얻은 영적 통찰력과 지도력은 교회나 사회적으로나 지도자가 되게 했다. 더욱이 그는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모 교회와 같은 교회들을 든든히 세움으로써 교회가 지역사회의 중심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했다. 그가 섬긴 안동교회, 사월교회, 포항제일교회, 경주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 풍기성내교회 등은 설립된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역교회의 중심교회로서 영적인 리더십을 갖고 있는 동시에 지역사회를 잘 섬기는 교회로 소문나있다. 김영옥 목사에게는 교회를 섬기는 일이나 국가를 위한 일이 모두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긴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요 위험을 무릎 쓰고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사회 지도자요, 독립운동가요 애국자였다. 그 결과 그의 자리는 늘 고난의 자리였지만, 동시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자리였던 것이다. 우리는 충성스럽게 거룩한 사역을 감당한 김영옥 목사와 같은 믿음의 선배가 그리운 혼란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 누구보다 교회를 사랑하고 민족과 국가를 사랑했던 김영옥 목사와 그의 거룩한 사역이 그리운 시간이다. 한국교회가 김영옥 목사의 믿음과 혜안(慧眼), 그리고 용기와 끈기를 기초로 한 거룩한 삶을 믿음의 표상으로 삼을 때 거룩한 교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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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합동) 경북교직자협의회 친선체육대회 성료예장(합동) 경북교직자협의회(대표회장 최재덕 목사) 친선체육대회가 지난 9월 6일 영천실내체육관에서 경동노회 주관으로 열렸다. 올해로 16회를 맞는 친선체육대회는 매년 1,000명 이상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참여하는 예장합동 경북지역 10개 노회 연합 최대 행사이다. ‘경북의 교회여 함께 뜁시다!’는 주제로 열린 이번 체육대회에서 개회예배는 최재덕 대회장의 사회로 드려졌으며 총무 한상봉 장로의 기도 후 김관선 목사(산정현교회)는 ‘트랜스포머’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김 목사는 “세상을 바꿀 힘은 연합에서 나온다”며 “교회가 연합하여 세상의 흐름을 바꾸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자”고 강조했다. 이어 증경회장 이기택 목사·전국영남대표회장 설정수 목사의 격려사, 경동노회장 류광하 목사의 환영사, 증경회장 장재덕 목사의 축도 등의 순서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체육대회에서는 배구, 족구, 발볼링, 농구공 던지기, 장애물 달리기 등 다양한 종목으로 경기를 진행했으며 성도들은 소속 노회를 힘껏 응원하며 친교를 도모했다. 대회 결과 종합우승은 경동노회가 차지했고 2위는 경청노회, 3위는 경신노회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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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합동 경북교직자협의회 제7회 하기수련회 성료예장(합동) 경북지역 10개 노회로 구성된 경북교직자협의회(대표회장 최재덕 목사)는 지난 8월 23일 구미 호텔금오산 대연회장에서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7회 하기수련회를 개최했다. 오전 10시에 드린 개회예배에서는 대회장 최재덕 목사의 사회, 공동회장 윤종오 목사의 기도, 사천교회 정계규 목사의 설교, 구미노회장 정순봉 목사의 환영사, 나눔의교회 김상윤 목사의 축사, 명예회장 설정수 목사의 축도, 증경회장 이종형 목사의 내빈소개 등의 순서가 있었다. ‘경북의 교회여! 함께 뜁시다!’를 제목으로 설교한 정계규 목사는 “한국 교회는 초기부터 눈물과 피와 헌신으로 세워진 교회이다”며 “복음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의 공로가 헛되지 않게 교회가 연합하여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자”고 외쳤다. 개회예배에 이어 두 차례의 특강이 진행됐다. 이를 위해 서울두란노교회 이종철 목사와 주다산교회 권순웅 목사가 강사로 나서 ‘사명’과 ‘섬기는 자의 행복’이란 주제로 각각 강의했다. 이종철 목사는 “맏아들의 입장으로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는 목회자가 되자”고 말했고, 권순웅 목사는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주님 주시는 축복을 누리자”고 강조했다. 폐회예배는 증경회장 김승동 목사(구미상모교회)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라는 주제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큰일을 해낼 수 있다. 총회와 총신을 위해 막중한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자”고 말씀을 전해 큰 은혜를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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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대학교 임영효 신학대학장 정년퇴임고신대학교 임영효 교수(사진)의 정년퇴임 감사예배와 정년퇴임식이 지난 3일 부산 진목교회 본당에서 열렸다. 퇴임준비위위원회에 따르면 이날 행사에는 황만선 고려학원 이사장, 안민 총장을 비롯한 내빈들과 고신대 신학과 교수들, 제자들과 축하객이 참석했다. 제1부 감사예배에서 김성복 목사는 ‘끝이 아름다운 생’이라는 설교를 통해 “임 교수가 24년간 교수로 재직하고 아름답게 매듭짓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자 임 교수의 진실된 삶의 결과”라고 치하했다. 이어서 황만선 이사장은 “평생을 지켜본 친구인 임 교수는 참으로 선비 같은 학자”라고 축하했다. 또한, 안민 고신대 총장은 “임영효 교수님은 목회자로서, 신학교수로서 모두가 존경하는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특히, 이날 임 교수의 생애 및 약력 소개에서 제자인 하승무 교수(한국장로회신학교 역사신학)는 임영효 교수의 성경적 교회성장과 선교 방법론을 규명하고 신학적 업적 등을 알렸다. 임 교수는 지난 1994년도에 고신대 신학교 실천신학 및 교회성장학 전공교수로 임용된 이후, 24년의 재임 동안 기독교사상연구소 소장, 교목실장, 선교목회대학원장, 신학대학장을 역임했으며 이외에도 대구서부노회 노회장, 고신총회 선교회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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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 총회, ‘명성교회 판결’ 거부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통합, 총회장 림형석) 총회가 명성교회 세습을 인정한 총회재판국의 판결을 받지 않기로 결의했다. 또한 총회는 총회재판국원 15명을 전원 교체하고 재심을 결의해 명성교회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영적 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 되에 하소서’를 주제로 예장통합 제103회 정기총회가 지난 10일~13일까지 전북 익산 이리신광교회에서 67개 노회 1,500여 명의 총대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이번 총회에서 교계 안팎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명성교회 세습 관련 문제는 둘째 날 오후 헌법위원회 보고 시간에 본격적으로 다뤄졌다. 총대들은 2시간여의 논쟁 끝에 “‘세습금지법’(헌법 제28조 6항)이 기본권을 침해해 개정이 필요하다”는 헌법위원회 보고를 1360명 중 찬성 511표, 반대 849표로 거부했다. 이로써 세습금지법은 완전법으로 재확인됐으며, 재판국의 명성교회 세습 유효 판결(2018년 8월 7일)은 사실상 법적인 근거를 잃게 됐다. 총대들은 또한 셋째 날 오후 재판국 보고에서 재판국원(15명) 조직을 거부하고 전원 교체를 요구했다. 이후 재판국 보고는 마지막날 폐회 직전에 다시 이뤄졌다. 공천위원장은 새로 선임된 15명의 재판국원 명단을 발표했고, 총회는 이를 수용했다. 또한 총회는 명성교회 판결을 포함한 102회 재판국의 보고를 받지 않기로 최종 결의했다. 이로써 명성교회 김하나 목사 청빙건은 새로 구성된 재판국에서 재심하게 됐다. 신임 재판국 조직은 다음과 같다. ▲재판국장 강흥구 목사(서울강남노회), ▲서기 김종성 목사(대전서노회), ▲회계 황치형 장로(전주노회), ▲목사국원 양의성(서울노회), 오양현(서울강동노회), 장의환(포항남노회), 정 우(서울북노회), 박귀환(천안아산노회), 이종문(전남노회), ▲장로국원 박현진(부산동노회), 신재찬(서울서북노회), 최부곤(전서노회), 박도규(충청노회), 홍종각(서울남노회), 박찬봉(경북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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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훈 목사 신임총회장에 추대▲유충국 전 총회장과 공로패 수상자들(왼쪽에서 두번 째가 이진호 목사). 교단 명칭 변경 건으로 화제를 모았던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 제41회 총회가 지난 10일 ‘생명, 교회를 살리자!’를 주제로 천안 백석대학교에서 개회됐다. 첫날 총회는 교단 명칭 건을 논의하고 ‘백석대신’으로 변경할 것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또한, 총회 회기는 구 예장 백석 교단의 회기인 제41회를 사용하기로 결의했다. 총대들은 분열 대신 화합을 이루는데 최우선 순위를 두고 정통성을 지키는 범위 내에서 은혜로운 교단의 모습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둘째 날 치러진 선거에서는 이주훈 목사(동탄 사랑의교회)가 신임총회장으로 추대됐으며, 부총회장에 박경배 목사, 김우환 장로를 선출했다. 4년 동안 부총회장으로 교단을 섬겨온 이주훈 총회장은 오는 11월 목회자 영성대회를 열어 교단 통합 과정에서 받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힐링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밝혔다. 한편, 첫날 총회에서 이진호 목사(경울노회, 구미새에덴교회)는 지난해 구미시기독교총연합회 회장으로 구미 지역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교단으로부터 공로패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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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라! 교회와 민족의 희망으로!예장 합동 제103회 총회, 이승희 신임총회장 추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제103회 총회가 지난 10일부터 12일(2박3일) 일정으로 대구 반야월교회에서 “변화하라! 교회의 희망으로 민족의 희망으로!”를 주제로 개회됐다. 첫날 총회 임원선거에서 총회장으로 추대된 이승희 목사(반야월교회)는 무엇보다 이번 총회에서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총회 전부터 준비위원들과 함께 창의적인 생각과 치밀한 준비로 시간 낭비 없는 깔끔한 회무를 이끈 결과 4박 5일의 총회 일정을 2박 3일로 끝낼 수 있었다. 또한, 이승희 총회장은 취임사에서 총회 발전을 위해서 ‘신속한 회무 진행, 작전총회 차단, 언론의 선한 나팔수 역할 당부, 총신 문제에 최선을 다할 것, 과감한 기구 정비와 제도 혁신 약속’ 등을 밝혀 총대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구체적으로 이승희 총회장은 “총신대 정상화를 위해서는 15인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총신 정상화를 위해 힘쓰겠다”고 했다. 또한, “소수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축소하고 상비부를 강화해 나가겠다”고 총회 기구 운영 방향을 제시했다. 새롭게 출발한 103회기 임원에는 목사부총회장에 김종준 목사, 장로부총회장에 강의창 장로, 서기는 김종혁 목사, 부서기는 정창수 목사, 회록서기는 진용훈 목사, 부회록서기는 박재신 목사, 회계는 이대봉 장로, 부회계는 이영구 장로가 각각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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