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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하면서천석길 목사 구미남교회 2019년 한해를 뒤돌아보니 보람된 일이 많았지만 아쉬운 일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2020년 새해를 선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똑같은 24시간을 보내지만 여느 날과는 다른 마음이기에 우리의 마음을 한 번 다잡아 보기를 원합니다. 일반적으로 회사에서 사용하는 마케팅 분석 기법 중에 3C가 있습니다. 3C는 C로 시작하는 세 가지, 즉 Consumer(고객), Company(자사), Competitor(경쟁사)를 늘 살펴보라는 전략입니다. 이 전략을 우리의 교회와 신앙에 적용해 보면 우리의 시야가 조금은 더 넓혀질 것입니다. 우선 고객(Consumer)은 우리가 마음에 품는 VIP와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영업을 위해서 가장 먼저 고객의 형편을 살피듯이 우리의 VIP는 어떤 사람인지, 연령, 직업, 교육수준부터 시작해서 그 VIP가 어떤 행동 특성을 보이며, 필요가 무엇인지, 어떤 것에 반감을 보이고, 무엇에 관심을 보이는지를 알면, 그 VIP를 훨씬 효과적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객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영업이 불가능하듯이 VIP가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힘을 잃게 됩니다. 두 번째의 요소인 자사(Company)인 우리 교회의 현주소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교회의 현주소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의 동향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화란 ‘내가 깊이 고려하지 않아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분위기’입니다. 우리교회가 지금까지 형성해 온 성경적인 문화인 섬김의 사역에 나는 얼마나 적응하고 있으며 그것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해 왔는지를 점검해 보고 부족하다면 새해에는 더 적극적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의 요소는 경쟁사(Competitor)로서 우리 교회 사역에 직접적으로 방해가 되는 어떤 것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목장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인지 그 방해 요소를 뛰어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으며, 실제로 신선한 아이디어는 무엇이 있었는지를 진지하게 연구해 보는 일입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이 살면 나도 모르게 끌려가는 사람이 되지만, 진지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멋진 사람이 됩니다. 열심히 살아온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새해에는 기본에 충실하여서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새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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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출발 합시다!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2020년 희망찬 새해를 맞았습니다. 1000년대에서 2000년대 새로운 밀레니엄(Millennium)을 맞이할 때의 감격이 엊그제 같은데 그 후 20년이 흘렀습니다. 바라기는 2020년을 맞이하며 또 다른 설레임과 희망을 간직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임을 뜻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련을 두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새로운 사람은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기보다는 변질되고, 퇴색되고, 힘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신앙인들의 삶은 해가 바뀐다고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을 힘입을 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100주년을 맞이했던 한국교회는 곳곳에서 종교개혁 정신을 외쳤습니다. “Ad Fontes(아드 폰테스)” 즉, “본질로 돌아가자”였습니다. 이것은 핵심의 회복을 말합니다. 신앙인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바로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기본을 다시 붙잡는 사람이 다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올해는 특별히 찬양과 말씀으로 한 해를 활짝 열어나갑시다. 말씀의 조명 아래서 우리 삶의 먹구름은 사라질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다시 회복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렁찬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가 되어 믿음의 승리를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0년은 찬양과 말씀과 기도로 새 희망을 노래합시다. 말씀으로 승리하고 찬양으로 영광 돌리는 모든 교회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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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소년 40%, “성인되면 교회 떠날 수 있다”정재영 교수, ‘기독청소년들의 신앙과 교회 인식 조사’ 발표 교회 이탈 시기 중학생 시절 50%로 가장 높아 현재 교회에 출석하는 청소년 중 61%만이 “성인이 되어도 교회에 계속 다니겠다”고 말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교회탐구센터(소장 송인규 교수)와 실천신대 21세기교회연구소(소장 정재영 교수)는 지난 6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기독 청소년들의 신앙과 교회 인식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전국의 기독교 중·고등학생 5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으로 이뤄졌다. 이번 조사에서 ‘교회에 계속 다니겠다’고 응답한 청소년들은 학생과 부모가 모두 교회에 다니는 비율이 높아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이 중요한 것으로 분석됐다. ‘그만 다닐 것 같다’고 응답한 학생들은 부모 모두가 비기독교인인 비율이 가장 높았다. 조사에서는 기독교 신앙은 있지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가나안 청소년’에 대한 설문 결과도 나왔는데, 가나안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난 시기는 중학생 때가 50%로 가장 많았다. 고등학교 때는 25.5%, 초등학교와 그 이전은 24.5%였다. 이런 결과에 대해 정재영 교수는 “기독 청소년들의 교회 출석 여부가 부모의 신앙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 외의 항목에서 기독 청소년들은 전반적으로 교회와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편으로 나타났지만, 한편으론 신앙생활이 가정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족 종교화’의 조짐이 관찰돼 다음 세대 신앙 운동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요청된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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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노회 남선교회연합회 총회 및 겨울수련회신임회장 황강섭 장로 추대 ▲신임회장 황강섭 장로(좌)와 송인덕 장로 제37회 영주노회 남선교회연합회 정기총회 및 겨울수련회가 지난 11월 30일(토) 오전 10시 성남교회에서 회원 1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부흥하게 하옵소서”를 주제로 열렸다. 1부 개회예배는 수석부회장 황강섭 장로 사회로 직전회장 이영재 장로 기도 후 성남교회 권성흠 목사가 ‘천국을 바라보는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으며 행동강령 낭독, 회가 제창 등의 순서가 있었다. 2부는 겨울수련회로 부회장 이재옥 장로 인도로 진행됐으며 권세문 장로 기도 후, 강사 이순창 목사(서울 연신교회 담임)가 ‘축복의 통로로서 남선교회’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3부 총회는 회장 송인덕 장로 사회로 27개 교회 120명의 성원보고로 시작하여 회무처리와 함께 임원개선이 있었다. 신임회장에 추대된 황강섭 장로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으로 알고, 지교회 남선교회와 연합회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섬기겠다”고 인사했다.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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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2)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2)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2. 예수 믿기로 결단하다 3. 고향 매정에 교회를 설립하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5. 목사로 임직(任職)하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1908년 안동에 선교부가 조직되고 최초의 주재선교사로 소텔 선교사가 부임했다. 그러나 1909년 가을, 소텔 선교사는 안동에서 북쪽으로 전도를 떠난 지 10일 만에 장티푸스에 걸렸고,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지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10년 1월, 권찬영 선교사가 안동에 부임함으로써 안동선교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권찬영 선교사는 안동에 부임한 후 무려 40년 동안 안동에 머물며 지역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안동을 사랑했고, ‘Mr. 안동’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안동 땅의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임학수는 1910년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書記)로 일했는데, 아마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권찬영 선교사가 한국의 문화와 언어에 서툴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권찬영 선교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설교도 하고 예배도 인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임학수는 빨리 조사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는 권찬영 선교사의 선교 구역인 아곡교회, 원림교회, 예천의 지보 섭밧교회에서 조사로서 사역을 잘 감당했다. 그 후 1919년 제6회 경북노회에서 공식적으로 조사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1922년 경안노회가 조직된 후에는 장사리, 국곡, 덕봉, 아탐실, 수동, 하화교회 등 6처 교회에서 조사로 봉사했다. 1923년 5월, 임학수 가족이 안동교회로 이명한 후에도 임학수는 조사의 직분을 가졌기에 주일마다 여러 교회를 찾아다니며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했을 것이다. 이후 그의 조사 사역은 계속되어 1924년에는 국곡, 아곡, 수동, 장사리, 소호리, 원림, 구미교회에서 역시 조사로 사역했다. 5. 목사로 임직(任職)하다 1901년 5월, 마포삼열 선교사는 자신의 사랑채에서 김종섭, 방기창 등 2명을 모집하여 신학교육을 시작했다. 이어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북장로교, 미국남장로교 등 4개의 장로교선교회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학교 설립이 요청되었고, 1904년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평양신학교의 당시 입학조건은 까다로운 편으로 상당한 학식과 자격을 갖춘 자로 제한했다. 평양신학교는 총 5년간의 교육과정으로 진행됐는데, 매년 3개월은 학교에서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나머지 9개월은 거주하고 있는 교회에서 사역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20년에 이르러 1년 2학기 3년 과정의 학제를 가진 전문학교 제도를 도입했다. 조사로 교회를 돌보던 임학수는 1921년 가을, 비교적 늦은 37세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제9회 경북노회에서 특별 신학생으로 임학수의 평양신학교 입학이 허락되었으며, 별(別) 신학과에 입학한 지 3년 후인 1925년 1월 7일, 제7회 경안노회가 회집된 안동교회에서 문답을 거치고 나서 임학수는 목사 임직을 받았다. 임학수는 임직 후에 소호리교회 등 5개 교회를 섬겼으며, 고향인 녹전교회에서도 목회를 했다. 또한 경안신학원의 전신인 인노절 기념 성경학원 강사로 수년간 제자들을 양성했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1926년에 대한제국의 순종황제가 별세한 후에 6·10만세 운동이 발생했다. 6·10만세 운동에서 학생운동 조직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이후 학생은 독자적인 운동 주체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기독교는 더욱 일제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임학수 목사는 조국의 미래가 다음 세대의 교육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인재양성에 매진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주일학교에 관한 관심이 지대했다. 1930년에는 새롭게 주일학교 임원을 구성했는데, 담임목사를 주일학교 교장으로 결의했다. 이것은 담임목사가 주일학교 신앙교육에 책임을 지고 지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임학수 목사가 부임하기 1년 전인 1928년 9월 경안노회 역사상 처음으로 제1회 경안주일학교대회가 안동교회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이 대회는 안동, 영주, 예천, 봉화, 의성, 청송, 영양, 영덕 등 지역에서 2,300여 명이 참석하는 등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되었다. 이후 5년이 지난 1933년 4월 6일부터 5월 3일까지 제2회 경안주일학교대회가 역시 안동교회에서 열렸다. 임학수 목사는 5년 동안 중단되었던 안동지역의 주일학교 교사대회를 복원함으로써 교사들의 사명감을 회복시키고자 했으며, 각 교회의 주일학교가 든든히 서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또한, 임학수 목사는 청소년에 관해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교회 주일학교는 초등학생을 양육하는 유년부와 장년 성도를 교육하는 장년부만 존재했다. 그래서 임학수 목사는 ‘안동 기독소녀회’(1928년 조직)란 기구를 1930년 ‘기독 소년·소녀회’로 규칙을 제정하고 그 대상을 남학생으로까지 확대했다. 또 청소년 활성화를 위해 소년·소녀 현상(懸賞) 동화대회를 열 수 있도록 협력했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가 시무할 때 안동교회는 구체적인 청소년 사역을 시작하고 지원함으로써 청소년의 체계적인 신앙교육과 양육이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 제2회 경안주일학교대회.(1933년 4월 6일부터 5월 3일까지 안동교회에서 열렸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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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기준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41~42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43절)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44절)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종교지도자들의 외식과 높아지려는 마음을 삼가 하라고 가르치신 후 헌금함 앞에 앉아서 무리가 어떻게 돈을 넣는지를 보시며 제자들에게 설명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평가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고 나를 살리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생의 방향이 바뀌고, 마음속 깊은 곳까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 헌금함에 헌금하는 여러 부자와 한 가난한 과부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은 와서 마치 자신을 자랑하듯이 많이 넣었습니다. 그 당시의 화폐는 금화나 은화, 혹은 구리동전을 사용했기 때문에 헌금함 안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면 얼마나 예물을 드렸는지 쉽게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즉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화폐 중에서 가장 가치가 적은 구리동전 두 개를 헌금함 안에 넣었습니다. 한 렙돈의 가치는 하루 일당의 1/16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하루 일당에도 훨씬 못 미치는 돈이지만 하나님께 기꺼이 드렸던 것입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43절) 참으로 희한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로는 금화가 은화보다 귀하고, 은화가 구리동전보다 귀한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두 렙돈을 더 높게 평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조건도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세상을 만드신 분에게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 모인 부자들이 아무리 많은 것으로 드린다 한들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실 일이 없으시고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을 보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2. 부자들의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부자들은 가난한 과부보다 훨씬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다”고 하십니다.(44절)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몫은 두둑이 챙겨 두고 일부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헌금이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마음에도 없는 보이기 위한 헌금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에 대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재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대상 29:10절부터 다윗이 감사의 신앙고백을 하였는데 11~12절에 보면,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다윗은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우리가 힘이 있어서 주께 드릴 수 있었겠는가’에 대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손에서 받은 것 중에서 주님께 다시 돌려드렸을 뿐이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예수님은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들은(부자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44절)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과부는 있는 것, 즉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몽땅 다 헌금으로 드렸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다 드렸다’는 것은 앞으로 사는 문제 모두를 하나님께 맡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적인 소망과 육체의 생명, 생활의 모든 문제,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믿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잘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있는 것 전부’라는 것은 그 여인의 그 날 생활비, 즉 그날의 양식을 구입할 전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저것은 나를 위해 써야지’라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렸다면 과부는 자신의 입장과 생각은 다 버려두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마음의 고백을 보시고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그 과부가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기준 하나님은 헌금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없는 데서도 있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들과 한 가난한 과부의 사례처럼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예수님의 평가 기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자들은 자기 몫을 많이 남기고 풍족한 중에 많이 넣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실 때, ‘아 저 인생은 아직도 자기 인생을 나에게 몽땅 맡기지 않는구나. 자기 인생을 자기 생각대로 자기 입장을 따라 자기 방식대로 계산하는구나’ 이렇게 평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가 자기 가진 것 전부를, 자기 생명까지 다 드린 것을 보시며 그 마음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적게 넣었지만 부자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평가해 주신 것입니다. 잠언 23:26절에 보면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기뻐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믿음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마음을 드리지 않는 사람은 재산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하나님 앞에서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영혼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기대 가운데 쓰임 받으면서 내 마음을 주께 드립시다! 내 마음을 드린다는 것은 내 인생을 몽땅 다 드리는 것이 됩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형편을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권면의 말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드린 한 가난한 과부의 사정을 아셨으며, 없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드릴 것이 적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의 가난한 과부는 가난한 것이 오히려 복이 되었습니다. 만약 부자들처럼 많은 것을 가졌더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전부 드리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부자들의 외식과 높은 마음을 경계하고 가난한 과부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임을 알고 마음을 드릴 때 내 인생을 몽땅 다 드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말씀을 통해 깊이 깨달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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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1)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1)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2. 예수 믿기로 결단하다 3. 고향 매정에 교회를 설립하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5. 목사로 임직하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서론 임학수 목사는 안동 땅에서 출생하고 안동 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에 갔다. 그는 안동 땅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안동지역에 있는 교회를 섬겼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교회, 크고 작은 교회를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섬겼다. 그래서 그가 시무한 교회는 든든히 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교회를 섬긴 시대 상황은 결코 만만한 세월이 아니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강압적으로 통치하던 시대였다. 특히 임학수 목사는 단순한 성도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더 큰 믿음과 용기, 그리고 인내와 소망이 필요했다. 그러나 임 목사는 어려운 시기에 교회의 지도자와 경안노회의 중심인물로 그 사명을 잘 감당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황금만능주의와 세속화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위기를 맞고 있다. 거룩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교회, 영적 리더십을 가진 존경받는 주의 종,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성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보며 낙망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교회는 과거의 교회와 과거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교훈을 배워야 한다. 거룩한 영향력을 끼친 믿음의 선배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그중의 한 사람이 바로 임학수 목사다. 임학수 목사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흔적을 남긴 주의 종이었다. 그래서 임학수 목사의 성품, 인격, 신앙을 포함한 삶은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도전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논문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연구되었다. 이제부터 일평생 단 한 번도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고 충성을 다한 믿음의 대선배인 임학수 목사가 걸어간 거룩한 구원사역의 흔적을 찾아보도록 하자.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임학수는 1884년 6월 23일 부친 임보현과 모친 정덕희 사이에서 장남으로 안동군 녹전면 매정리(일명 갈골)에서 출생했다. 임학수는 1894년 박계남과 결혼하여 임상경, 임상교 남매와 손자 1명과 손녀 4명을 두었다. 1911년 10월 23일, 임학수는 매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모친은 1913년에, 처는 1916년에, 장남은 1922년에 매정교회에서 각각 세례를 받았다. 임학수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 모든 식구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학수는 한 가문에 있어서 믿음의 조상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매정교회를 섬기던 임학수 가정은 1923년 5월 10일 안동교회로 이명했다. 임학수 목사의 장남 임상경은 안동교회에서 장로의 직분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제직회 서기, 당회서기로 봉사했다. 자부인 강신덕은 교회학교 교사, 청년회, 성가대에서 헌신했다. 임학수 목사의 장남 임상경은 부산 거성교회를 섬겼다. 장녀 임상교는 대구 신암교회 권사로, 손자 임재오는 거성교회 장로로 시무했으며, 친손녀 임순오는 부산 수영로교회 권사로, 임양자는 안동교회 집사로, 임화자는 서울 밀알교회 집사로 헌신하고 있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의 후손은 뿌리 깊은 믿음의 가정으로 어디서나 주님의 교회에 헌신하는 일꾼들이 되었다. 그만큼 임학수 목사는 목사로서의 삶도, 부모로서의 삶도, 또한 인간으로서의 삶도 모자람이 없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2. 예수 믿기로 결단하다 임학수는 1909년 안동에서 한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을 권정국 장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1905년 약관의 나이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궁내부 주사로 왕실에서 근무했지만, 관직을 그만두고 선비로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낙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던 중 한마을에 살고 있던 임경수와 함께 안동읍에 나갔다가 선교사를 만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임학수는 당시 안동선교부의 소텔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선교사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임학수는 자신의 상투를 자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임학수가 상투를 잘랐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다시는 예수를 모르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이었다. 예수 믿기로 결심한 임학수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크고 작은 개울과 강을 무려 9번이나 건너야 하는 영주 내매교회를 다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추운 정월 초하룻날 120Km나 떨어진 대구에서 열린 사경회에 참석하였다. 당시 안동에서 대구까지는 3일 길로 눈보라가 치는 추운 겨울에는 더 오래 걸렸다. 그럼에도 말씀에 목말랐던 그는 춥고 험한 길을 마다 않고 집을 떠날 정도의 열정이 있었다. ▲임학수 목사의 아들 임상경 장로 회갑기념. 3. 고향 매정에 교회를 설립하다 당시 매정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임학수는 임도현, 임경수와 함께 매정에서 20여 리 길인 영주 내매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게 전도하여 믿는 자들이 생겨나자 이들은 처음으로 신효균의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임학수는 신효균, 임도현, 임경수와 함께 1909년 9월 9일 매정교회를 설립했다. 기록에 따르면 임학수 임경수 두 사람의 마을 전도로 몇 달 만에 무려 70여 명이 예수를 믿고 교회를 건축하고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임학수, 임도현, 임경수가 함께 건축한 첫 예배 처소는 4칸짜리 초가집이었다. 이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소리가 매 주일마다 매정에서도 울려 퍼지게 되었다. 매정교회의 설립은 임학수가 예수를 영접한 이후 그가 얼마나 구원의 감격과 열정을 갖고 살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는 예수를 만난 이후 세상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의 참된 제자로 살았다. 교회가 설립됨으로써 매정의 복음화도 가속되게 되었다. 임학수는 매정이라는 마을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임학수 목사의 손자 임재오 장로 장로장립(부산거성교호회).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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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역사사적지를 찾아서(3) - 부산 초량교회예장합동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2호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 ▲영남 지역의 모(母) 교회 부산 초량교회 전경. ▷127년의 역사 … 민족의 수난과 아픔을 함께하다 부산 초량교회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한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가 1892년 11월 설립한 부산지역 및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다. 영서현교회, 영주동교회, 초량삼일교회 등의 이름을 거쳐 현재 명칭으로 정착했다. 초량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후원하고, 1932년 처음으로 개척한 산리교회 예배당에서 비밀리에 회합하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추진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덕생 주기철 이약신 한상동 등 담임목사와 방계성 장로, 조수옥 전도사 등이 옥고를 치르거나 목숨까지 잃는 등 애국 신앙을 보여준 산 표본들로 기억되고 있다. 또한, 초량교회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수도로 정해진 부산으로 찾아온 수많은 피난민들에게 위로와 안식의 처소가 되어주었다. 교회 유치원은 휴원했고 뜰과 마당은 온통 천막으로 덮였다. 그해 여름 초량교회에서 전국의 목회자와 성도가 국난 극복을 위한 통회구국기도운동을 전개했고, 기도가 끝난 9월 15일 기적처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 초량교회는 1992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교회 안에 역사관을 설립했다. 설립자 베어드 선교사의 사진과 주기철 목사의 유물 등 한국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3호 지정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합동 교단은 지난 제102회 총회에서 역사적·선교사적·민족사적·교단적 측면에서 의미가 큰 초량교회를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3호로 지정했다. ▲초량교회 역사관에 있는 주기철 목사 재임 당시 강대상.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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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노회, 임희국 교수 초청 ‘설교세미나’ 열려영주노회 농어촌선교부 ‧농어촌목회자협의회 주관 세미나 영주노회 농어촌선교부와 농어촌목회자협의회는 지난 11월 12일(화) 영주 장수교회(담임목사 강성효)당에서 임희국 교수(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를 강사로 초청해 ‘설교세미나’를 개최했다. 임희국 교수는 ‘성경과 루터’를 주제로 강의했으며, 1517년 루터가 로마서를 읽으면서 로마서를 쓴 바울에게 역사했던 성령이 루터에게도 똑같이 역사해서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깨우친 사실에 주목했다. 임 교수는 “루터의 설교는 삶과 분리된 설교가 아니라 삶이 곧 설교였다”고 강조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문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항상 ‘입’으로 ‘살아있는 이야기’로 선포되어야 하며, 우리의 설교에도 루터처럼 체험적 신앙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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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 경북지역 7개 노회, 신임 임원 조직하고 새출발“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 오늘의 한국교회는 인본주의 신앙, 물질만능주의 가치관, 외적 성장 추구 등으로 속절없이 무너지고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길이 어둡고 막막할수록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초대교회의 영성으로 다시 돌아가 민족과 사회를 선도하는 교회 본연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예장(통합) 경북지역 7개 노회 신임 임원이 지난 10월 정기노회를 통해 새로 선출되었다. 이에 임원들의 당선을 축하하며,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협력으로 노회가 발전하고 교회가 안정되고 경북의 복음화가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임 노회장들의 취임사와 함께 신임 임원진을 소개한다. <취임사 - 경안노회 제186-187회기 노회장 김영윤 목사> 사도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돌아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의 그 간절한 심령이 눈물이 되고 기도가 되어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더욱 겸손할 따름입니다. 혼탁한 현시대 속에서 지금의 목회 현장에는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기도와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다시 한 번 한국교회를 선도(先導)해 나갈 수 있는 경안노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취임사 - 경북노회 제185-186회기 노회장 하동오 목사> 교회가 가고자 하는 길은 생명과 평화, 치유의 길입니다. 교회는 말씀으로 시대를 품고 위로하며,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회는 그런 교회들이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길벗 공동체,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10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교회”라는 이정표를 제시했습니다. 경북노회는 총회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온 세상에 울려 퍼질 희망을 노래하는 행복한 길벗, 아름다운 동행이 되겠습니다. <취임사 - 영주노회 제72-73회기 노회장 송인화 장로> 부족한 종이 노회를 섬길 수 있게 허락하신 하나님과 노회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노회장으로서 성경과 교단 헌법, 노회 규칙에 따라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기에 노회 기관들이 소통하고 연합하며 성장‧발전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영주노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노회, 한국교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은혜로운 노회가 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경안노회] [경북노회] [경동노회] [경서노회] [포항노회] [포항남노회] [영주노회]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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