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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2)- 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887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출생한 이대영 목사는 시대를 앞서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 힘든 유학이 강한 마을과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혹독했다. 그는 더 이상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객지로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일정한 훈련을 거친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향으로 보내셨고, 뛰어난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 후 전도인, 조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기독청년면려회와 주일학교를 통해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갈 뿐 아니라 지역복음화와 교회 부흥을 선도했다. 그가 시무할 때 시작된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은 3·1운동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던 이 땅의 청년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고 미래를 준비하게 만들었다. 총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안동을 떠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 선교사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한 이대영은 그 땅에 머무는 동안 중국인들과 함께 중국인처럼 살았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선교를 포기하고 1955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 까지 이대영 목사는 33년 동안 중국인을 동족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서 산동반도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산동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재중동포들을 잘 돌보았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1954년 4월 산동성에서의 완전 출수 후 오직 하나님 나라, 교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1968년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선배이다. 1. 이대영, 금당실 마을에서 출생하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손인 이대영(李大榮)은 1887년 4월 23일,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李裕成)과 김도혜(金道徯)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대영이 출생한 마을은 금당실로 불러졌는데 선교사가 동네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다. 예천 땅을 처음 밟은 선교사는 부해리(傅海利, Henry Munro Bruen, 1874~1959)로 조사 이희봉과 함께 1907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7년은 평양에서 시작한 대부흥으로 전국에 뜨겁게 부흥의 열기가 확산되고 있던 때이다. 따라서 인근지역인 안동, 영주, 문경, 상주, 의성에 선교사들과 조사들의 활동으로 이미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있었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에 따라 예천 최초의 신자인 나만기(羅萬基)에 의해 당교회가 시작되었다. 특히 금곡(금당실)교회의 시작은 이러하다. 1893년 낙향해 금당실에 머물 던 이유직(李裕稙)은 양주 목사를 한 형 이유인(李裕寅)을 추모하며 99칸의 한옥 저택을 지어 생활했다. 하지만 동학혁명에 가담해 도망하던 이유직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고, 그 때 복음을 전해 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교전통이 유독 강하고 불교 중심의 마을이었던 금당실은 복음이 전파되기 대단히 어려웠다. 따라서 이유직은 때를 기다리며 1899년 전후, 자신의 집에서 은밀하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금곡교회의 첫 출발로 알려져 있다. 금곡교회는 선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상곡교회라는 공식 교회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금곡교회는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선교사가 직접 복음을 전하기 전에 쪽 복음과 전도지를 읽고 복음을 접한 평신도에 의해 세워진 자생적 교회인 것이다. 그 후 점차 예배드리는 수가 늘어가 교회는 계속 부흥하게 되었다. 예천지역 초기 3대 교회는 상곡교회, 괴당교회, 그리고 상락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대영은 괴당교회가 설립될 당시인 1907년 경, 복음을 소개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와 금당실의 영적 분위기에 의해 자신이 예수 믿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이대영 목사는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자신의 고집 때문임을 배태준 장로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내가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우리 집안에서 ‘양반 가정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하고 못 믿게 하는 것을 참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기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고 죽기로 하고 고집을 피워서 된 것이고, 일제 말엽 신사참배 문제로 그렇고 극성을 피울 때에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것도 내 고집 때문이었고.” 한번은 아버지가 이대영에게 소의 여물인 짚을 자르는 작두에 목을 대라고 해서 그대로 대었더니 아버지는 결국 자식을 포기하는 길을 선택했다고도 한다. 이대영은 부모의 반대로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과 함께 1910년 연일군 흥해면으로 이사하였다. 흥해에 도착한 이대영은 가족과 함께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선교사로부터 신앙훈련과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후예인 이대영은 비록 가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복음사역을 위해 철저히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비록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버림을 받아 객지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품으셨고, 훗날 당신의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 가셨고, 결국 하나님의 때에 한국 땅에서 중국 땅에서 복음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2. 이대영,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다 안동을 포한한 경북북부지역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93년으로 당시 부산선교부에 있던 배위량(William M. Baird) 선교사가 부산을 출발하여 밀양, 청도, 대구, 상주, 안동, 영천, 울산을 순회하며 전도하고 부산으로 귀환한 것이다. 이후 1902년 3월에 대구선교부에 있던 안의와(James E. Adams) 선교사가 안동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 “두 차례의 봄철 선교여행을 다녀온 후 곧 3차 여행을 시작했다. 1차는 3월과 4월에 경상도 북부지방을 다녔다. 이들 지방은 선교사들이 전혀 방문한 적이 없는 곳이었다. 이들 9명의 관리들을 만나고 많은 전도 서적을 팔았으며 장터에서 전도를 했다. 1개월 이상 장터를 돌며 전도하고, 약 1천 권 이상의 책을 팔았다.” 안의와 선교사의 안동 방문의 결과 안동지역을 포함한 경북북부 지방은 선교사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안의와 선교사 안동 방문 후 1903년 봄 대구선교부의 방위렴(William M. Barrett)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가 안동을 직접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부해리 선교사는 1892년 미국 장로교 기숙학교인 블레어 홀 아카데미(Blair Hall Academy)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22세 때인 1896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부친과 조부가 졸업한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마친 후 1899년 졸업하고 그해 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미국 북장로교로 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99년 10월 26일 대구에 도착하여 초창기 대구·경북 지역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추방되기 까지 40여 년 한국선교에 평생을 바친 부해리 선교사는 경북 북부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부해리 선교사를 포함한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의 결과,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연회보고에 의하면 경북·대구 지역 7개 고을에서 12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1904년 보고에는 12개 고을에서 6개 교회에 7명의 학습교인, 33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으며, 1905년 보고에는 20개 고을에 8개 교회에 2명의 세례교인, 19명의 학습교인, 79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다. 복음의 불모지와 다름없던 경북북부 지방에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짐으로써 복음화의 불씨가 발아(發芽)할 날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이대영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로 나뉘어진다. 우선 박용규는 1907년 경, 이대영은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소개받고 예수를 믿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미 예천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그가 복음을 전달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박용규의 추측처럼 1900년대 초 예천의 3대 교회 중의 하나인 괴당교회(槐堂敎會)를 설립한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이대영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당시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있던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대영 목사가 1956년 9월 41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할 당시 회계로 수고한 배태준 장로도 이대영이 20세 때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밝힌 적이 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기록한다. “이대영 목사는 부해리 선교사에게서 복음을 들었으며 신앙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고집을 가지고 추진하였기에 중국 산동성에서도 중국인 목사나 외국인 선교사들에 비해 큰 부흥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를 통해 전도를 받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부해리 선교사와의 역사적 만남으로 이대영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했으며, 이후 전도인, 조사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한 이후 한국교회와 중국선교의 거룩하고 위대한 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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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6)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6)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첫 번째: 기독서원(基督書院) 2. 두 번째: 선교사 임시주택 3. 세 번째: 선교사 주택 4. 비공식 예배처소: 텐트 교회 5. 네 번째: 16칸 ‘ㄱ’자 예배당 6. 다섯 번째: 목조 2층 예배당 7. 여섯 번째: 2층 돌집 예배당 결론 6. 다섯 번째 예배처소 : 목조 2층 예배당(2) 교회 외적으로는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의 신축에 따라 경북북부 지방에 여러 교회가 모일 수 있는 대형집회를 가능하게 했다. 신축 예배당은 많은 성도들이 한꺼번에 모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14년 공식적으로 조직된 안동교회 여전도회는 1917년 1월 31일, 처음으로 인근 교회의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부인도사경회가 열렸는데 참석자의 수는 230명이었다. 1924년에는 남자도사경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1928년 3월에는 1주일 동안 여전도회 주최로 당대의 대부흥사인 길선주 목사를 초청하여 도사경회가 열렸으며, 1934년 6월의 두 번 도사경회에는 400명, 317명이 각각 참석하였다. 또한, 경북 북부지역 교회의 교사교육을 위한 집회도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에서 열렸는데, 가장 큰 규모의 집회는 제1회 경안주일학교대회로 1928년 9월 21일부터 26일까지 8일간 개최되었다. 열기가 대단하여 정회원 1,300여 명 외 방청인원 1,000여 명 등 도합 2,300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2층 목조예배당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외부에서도 강단이 보일 수 있도록 출입구 쪽 남쪽 벽을 헐고 교회 마당에 대나무로 비닐하우스처럼 지지대를 세우고 광목을 덮어 천막을 만들었다고 한다. 특히 경북노회로부터 분립된 경안노회가 1921년 12월 20일 경안성서학원에서 조직을 위한 모임을 한 후, 제1회 경안노회는 1922년 1월 18일부터 19일까지 안동교회 목조 2층 함석지붕 예배당에서 회집되었다. 경안노회가 1936년 12월, 30회로 회집되기까지 30회의 노회 회집 장소 중 안동교회 17회, 성서학원 8회, 예안만촌교회·영주교회·영덕교회·예천교회·풍기교회 각 1회씩으로 안동교회에 집중되었다. 이처럼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목조 2층 함석지붕 예배당은 교회 내적으로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와 교회성장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지역 복음화의 산실이 되었던 것이다. ▲사진 뒷면에는 1923년 성탄절 안동교회(Christmas 1923, Andong Church)라고 권찬영 선교사가 친필로 쓴 글이 있다. 예배당 지붕 바로 아래 ‘祝聖誕(축성탄)’이란 글을 볼 수 있다. 중앙 가운데 검은색 양복을 입고 앉아 있는 분이 권찬영 선교사이다.(사진 11) 7. 여섯 번째 예배처소 : 2층 돌집 예배당(1) 안동교회의 돌집 예배당 신축 명분은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예배당을 건축할 당시 일제의 수탈이 더욱 심해지고 1934년 7월 안동시가 물에 잠기는 대수재(水災)로 인해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안동교회가 대형 예배당을 신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계속된 교회 부흥 때문이었다. 예배 시 성찬 참여 수는 두 번째 예배당인 목조 2층 예배당의 준공 이후 계속 증가하였다. 경안노회록에 따르면 1931년 6월 1일부터 1932년 5월 31일까지 안동교회 교인 수는 장로 4명, 세례교인 198명, 유아세례인 73명, 교인 총수 549명으로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다. 또한, 여성성경공부반, 장년성경공부반, 어린이와 소년소녀반, 청년 모임 등을 위해 더욱 넓은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안동교회는 당시 경안노회 지역의 중심교회였고, 경상북도 북부지역 교회의 성장과 함께 노회의 모임이 주로 안동교회에서 회집되었기 때문에 더욱 넓은 공간이 필요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1914년에 건축된 목조 2층 함석지붕 예배당은 20여 년이 경과하면서 노후 되어 수리의 빈도가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새로운 예배당 신축의 필요성이 검증되었고, 안동교회는 1926년부터 준비를 시작하여 병자년인 1936년 더운 여름에 2층 돌집 예배당을 기공할 수 있었다. 경안노회 중심교회의 상징으로서 2층 돌집 예배당 건축계획은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배당 건축 추진은 후임인 5대 임학수 목사 시무 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1929년 1월 부임한 임학수 목사는 동년 3월 4일 제직회에서 그동안 신세교회 분립을 위해 저축해오던 것을 본당 건축비로 전용하기로 결의하고 본당 신축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예배당 신축을 위해 임학수 목사는 선교사들을 꾸준히 설득했으며, 그 결과 다른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도 건축에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당시에는 선교회에서 노회 중심의 교회 건축에 건축비의 1/3을 보조해 주는 규정이 있어서 보조를 받을 수 있었다. 아울러 임학수 목사가 가가호호(家家戶戶) 방문하는 등 건축을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해서 교인들이 건축헌금을 작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돌집 예배당은 본격적으로 건축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돌집 예배당의 터는 이미 계명학교가 폐교가 된 후였기 때문에 계명학교가 서 있던 위치에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었다. 당시 계명학교를 다녔던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돌집 예배당을 신축하기 위해 계명학교를 철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계명학교의 위치는 본당 출입구의 서편 벽과 큰 소나무 위치로 추정된다. 더욱이 오늘날 교회의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돌집 예배당 전면의 넓은 마당은 전에 계명학교의 운동장으로 쓰던 자리였기 때문에 계명학교의 폐교 후에는 자연스럽게 넓은 부지를 교회가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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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5)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5)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첫 번째: 기독서원(基督書院) 2. 두 번째: 선교사 임시주택 3. 세 번째: 선교사 주택 4. 비공식 예배처소: 텐트 교회 5. 네 번째: 16칸 ‘ㄱ’자 예배당 6. 다섯 번째: 목조 2층 예배당 7. 여섯 번째: 2층 돌집예배당 결론 6. 다섯 번째 예배처소 : 목조 2층 예배당(1) 16칸 ‘ㄱ’자 예배당이 준공된 1910년 10월 30일 이후 안동교회는 계속해서 부흥했다. 그 결과 새로운 예배처소를 물색하다가 오늘의 안동교회가 서 있는 부지로 이사하게 된다. 사실 이 위치는 안동선교부가 세워진 1908년, 처음으로 선교사가 임시 주택으로 사용하던 터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폭발적인 성장 속에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신축예배당은 1913년 11월에 공사를 착수하여 1914년 2월에 준공되었다. 공사가 겨울에 시작되었음에도 비교적 공사는 빠르게 진행되어 이듬해인 1914년 봄이 되기 전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참고로 이곳은 지금의 100주년 기념관이 서 있는 위치다. 그 결과 1914년 봄에 안동교회는 ‘ㄱ’자 예배당에서 새로 준공한 예배당으로 이사했다. 목조 함석지붕 2층 예배당은 길이 40-50척 크기의 비교적 큰 규모의 건축물이었다고 김형태 목사는 증언한다.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이 예배당이 존속되어 있을 때인 1924년 6월 1일~1925년 5월 31일까지의 교인 수는 장로 3인, 세례교인 152명, 교인 총수는 380명이었고, 1934년에는 159명의 아동을 포함해 총 549명으로 경안노회록에 밝히고 있으며, 따라서 평소 주일예배 시 300~4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경험이 있는 분들에 따르면 최대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보통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나 다른 형태의 집회 시에 강대상까지 올라가 앉는 것을 볼 때 더 많은 인원이 앉을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914년 2월에 준공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신축 예배당은 목조 함석지붕을 가진 건물로 반(半) 2층 구조형식으로 약 50~60평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사진 8) 두 번째 예배당 건축에도 모든 교인들이 힘을 모았을 것이다. 예배당을 신축할 때 담임인 김영옥 목사는 선교사가 사준 주택을 팔아 헌금했을 정도로 김영옥 목사의 교회 사랑과 목회 철학은 헌신적이며 희생적이었다. 두 번째 예배당을 신축하기 불과 4개월 전 안동교회는 당회가 조직된다. 당회조직은 예배당 신축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때 장로로 장립한 김병우는 이 지역 최초의 장로였고, 안동교회에는 경안지역에서 최초로 당회가 조직되었다. 당회 조직을 마친 후 1주일이 경과한 1913년 8월 14일, 안동교회는 최초의 당회가 소집되어 6명에게 세례를, 3명에게는 학습을 주기로, 또한 다음 주일인 8월 17일 성례를 베풀기로 결의했다. 교회가 설립된 후 당회가 조직되기 전까지 세례와 성찬은 오직 선교사에 의해 베풀어졌지만, 8월 17일 성례전에서 떡을 나눈 사람은 김영옥 목사, 포도즙은 오월번 선교사가 베풀었고, 성찬예식이 마쳤을 때 김영옥 목사가 축복기도를 한 후 폐회되었다. 이처럼 안동교회는 담임인 한국인 목사와 선교사들이 서로 동역하는 아름다운 교회였다. 이러한 역할분담을 통해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는 안동교회 담임으로서의 권위와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목조 2층 예배당 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당시 교회 지도자들. 앞줄 왼쪽부터 권찬영 선교사, 인노절 선교사, 김영옥 목사, 오월번 선교사로 추측된다. 뒷줄 왼쪽 첫 번째는 김병우 장로이고, 나머지 분들은 이중희, 엄응삼 장로를 비롯해 평신도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사진 9)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이 신축됨으로써 교회와 경북북부 지역은 영적 지형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우선 교회 내적으로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넓은 공간의 확보로 인해 예배와 주일학교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예배당 신축은 주일학교가 양적으로, 또한 질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 안동교회의 주일학교는 유년부, 남장년부, 여장년부 3부서가 존재했다. 1920년 7월 제1회 여름성경학교가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에서 실시되었다. 매년 여름성경학교는 양적, 질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당시 교회 행사 중 가장 큰 규모의 행사였다. 1921년 당회록에 의하면 초기 주일학교가 조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교장, 부교장, 남장년부 반장을 임명하였지만 담임목사가 교장을 역임하지는 않았다. 담임교역자가 교장이 되어 전체 주일학교를 관장하기 시작한 것은 1926년 1월부터이다.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평신도는 부교장과 남장년부, 여장년부에 임명되었다. 주일학교는 예배당에서 아침 9시 예배를 시작하여 1시간 동안 예배를 드린 후 계속해서 분반하여 지정된 교사에 의해 성경공부를 계속했다. 1920년대 두 번째 예배당인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가운데 남녀 분리 휘장이 존재했다. 일반적으로 강대상을 바라보며 오른쪽은 여성이, 남성은 왼쪽을 사용하였다. 남장년부에는 청·장·노년의 광범위한 연령층이 함께 모여 성경공부를 했으며, 공부시간은 주일 아침 유년부(오늘의 초등학생부)의 예배와 성경공부가 끝난 뒤 곧바로 10-11시부터 예배당을 이용하여 모였다. 성경공부교재는 아동부와 마찬가지로 선교본부로부터 가져온 교재 원본을 등사하여 담임목사와 선교사들이 교사들에게 가르친 후에 학생들과 분반공부를 하게 하였다. 여장년부는 3부서 중에서 가장 활성화된 부서였으며 유년부 예배가 끝난 후 남장년부와 동일한 시간에 휘장으로 분리된 예배당에서 운영되었다. ▲목조 2층 예배당의 위치는 오늘날 안동교회가 서 있는 바로 그곳이다. 예배당 앞쪽에 많은 성도들을 볼 수 있으며, 뒤쪽 좌측은 계명학교, 뒤쪽 우측은 경안성서학원이다. 우측 언덕 위에는 종탑이 보인다. 두 번째 예배당이 준공된 1914년 2월 이후 안동교회는 경북 북부지역의 중심교회로 자리 잡게 된다.(사진 10)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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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4)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첫 번째: 기독서원(基督書院) 2. 두 번째: 선교사 임시주택 3. 세 번째: 선교사 주택 4. 비공식 예배처소: 텐트 교회 5. 네 번째: 16칸 ‘ㄱ’자 예배당 6. 다섯 번째: 목조 2층 예배당 7. 여섯 번째: 2층 돌집예배당 결론 5. 네 번째 예배처소 : 16칸 ‘ㄱ’자 예배당 당시 인구 15,000명의 안동은 불교, 유교, 무교의 대표적 도시였다. 하지만 척박한 안동 땅에도 복음의 씨가 뿌려졌고, 결국 안동교회는 8명이 모여 1909년 8월 둘째 주일에 첫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새디(Sadie) 선교사가 ‘Korea Mission Field’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약 1년 전에 리더들과 7명(5명의 남성과 2명의 여성)의 성도로 시작한 안동교회는 첫 예배 당시 어느 누구도 세례를 받은 사람은 없었지만 1년이 지난 지금은 무려 75명의 성도로 성장했다”고 기록한다. 그 결과 비좁은 기독서원과 선교사 사택 등에서 예배를 드리던 안동교회는 예배당 신축이 현안으로 대두되었을 것이다. 안동교회 80년사는 네 번째 예배장소가 1911년에 건축된 안동시 광석동 214번지에 소재한 ‘ㄱ’ 자형의 16칸 크기 건물이었다고 기록한다. 정확한 위치는 100여 년 전 구한말 진영(陣營)이 있던 터로 현재 안동여고 올라가는 사거리의 농협 뒤편에 있는 건영화물 자리이다. 당시 안동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첫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 정성껏 헌금했다. 그 결과 첫 삽을 뜬지 1개월 후에 감격의 준공을 맛볼 수 있었다. 16칸 예배당은 약 30평 정도로 결코 작지 않은 규모였다. 공사비에 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건축비를 알 수는 없지만, 선교사들이나 교인들의 헌신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안동교회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는 자신의 노새를 팔아 건축헌금을 한 것으로 손자 김형태 목사는 밝히고 있다. 드디어 준공된 첫 예배당에서 안동교회 교인들은 1910년 10월 30일 주일, 역사적인 입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1910년 11월 1일 권찬영 선교사가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그동안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ㄱ’자 예배당의 형태와 규모를 밝히고 있다: “교회는 “L”자 모양이고, 각 부문은 16x24 피트 면적이다. 각 부문 맨 끝에는 8x16피트 면적의 방들이 있는데, 한국식 화로(아궁이, 역자주)가 설치되어 있어서 저희가 여러 날에 걸친 성경공부반을 열 때면 사람들이 그곳에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어 있다.” ▲권찬영 선교사의 편지를 기초로 16칸 ‘ㄱ'자 예배당의 구조를 다시 설계한 것. 양쪽으로 남·여가 따로 출입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양 끝에 방 하나씩을 둠으로써 특별한 집회가 있을 경우 숙박할 수 있도록 했다.(그림 1) 당시 선교사들은 8x8 피트를 한 칸으로 생각했으며, 이 도안을 따르면 정확히 16칸 건물이 된다. <그림 1>은 16칸 ‘ㄱ’자 예배당을 재구성한 도안이다. 새디 선교사가 1910년 10월 25일 쓴 편지에 따르면 신축한 ‘ㄱ’자 예배당에는 무려 450명 정도가 앉을 수 있었고, 아직 바닥이 깔리지 않은 상태에서 흙바닥에 자리를 깔고 예배를 드렸지만, 곧 다가올 겨울을 위해 난로를 준비함으로써 성도들을 위해 배려하는 모습도 보였다는 것이다. ‘ㄱ’자 예배당이 준공된 후 곧이어 특별집회가 열렸다. 신축된 ‘ㄱ’자 예배당에서 1910년 11월 13일부터 20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목사의 특별부흥집회가 있었다. 길선주 목사는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의 기수로 이미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강사였다. 안동교회는 이 집회를 위해 체계적인 준비를 했다. 이 집회에서 98명이 결신을 했는데, 이 수는 이미 안동읍에 존재하는 것으로 언급된 그리스도인의 수보다 많았다. 매 집회 시간마다 예배당에는 많은 사람이 모였다. 길선주 목사는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 이유를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집회 마지막 날 오전 10시 30분에 시작된 집회는 만원을 이루었다. 예배당은 꽉 찼다. 길선주 목사의 설교 후 한 남성이 죄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깨지는 일이 발생했다. 다음날 새벽기도회 후 집회는 마무리되었는데, 시내에서 유력한 두 명의 남성을 포함한 98명의 새 신자가 얻어졌다. 길선주 목사의 특별부흥집회는 안동지역 선교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새디 선교사는 1911년 6월 8일 여성성경공부반 모임을 마친 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여신자들과 교회에 갔다. 아서(오월번 선교사)가 그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여성들과 어린이들 뒤의 초가집이 안동교회가 처음으로 건축한 16칸 ‘ㄱ'자 예배당으로 추정된다.(사진 7) 신축된 예배당은 이런 형태의 집회를 위해 계속 사용되었다. 특히 ‘ㄱ’자 예배당의 신축은 여성과 소녀를 위한 성경공부반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사진 7>의 ‘ㄱ’자 예배당 앞에서 찍은 사진에는 여성성경공부반을 마친 후 많은 여성을 볼 수 있으며, 이전 예배처소인 기독서원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는 많은 남성을 볼 수 있다. 더욱이 1910년 11월 26일 의료선교사인 장인차가 쓴 편지에 따르면 안동교회의 첫 번째 예배당의 준공 이후 안동복음화는 보다 활성화되었다: “안동장은 아주 큰 장으로, 항상 수천 명의 상인과 손님들로 북적북적합니다. 장날에 150명이 넘는 열성적인 한국인 신자들이 성경책, 찬송가, 소책자 뭉치들을 들고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은 목도합니다. 그들의 열심과 불과 같은 열정, 반대에 직면하게 될 때 보여지는 천성적인 선한 인내심은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날이 바로 안동에 구원이 임한 날이므로 즉시 믿을 것을 강권합니다. 그들의 전도를 받은 많은 사람이 비가 온 하루를 제외하고 매일 저녁 예배에 왔습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밖에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안동교회는 창립된 지 불과 1~2년 만에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오월번 목사의 조사였던 김영옥은 1911년 6월 평양신학교 4회로 졸업하고 동년 11월 대구제일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후 안동교회에 부임했는데 그는 안동교회의 초대목사인 동시에 경북 북부지방 최초의 한인 목사였다. 안동교회는 경북에서는 대구제일교회 다음으로 한인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가 되었고, 김영옥 목사의 뛰어난 영적 지도력은 안동 지역의 복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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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코로나19 가운데 더 많은 영혼 구원, 15명 세례식코로나19 팬데믹 가운데 방글라데시 북동부 마을 오픈도어 파트너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온다고 하며 9월에 15명이 세례를 받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는 개인성경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특히 이들 중 일부는 오픈도어의 성인글자교실에 다니면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성경을 선물로 받은 기쁨이 더욱 큽니다. 이제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지 사역자는 올해 2월에도 10명이 세례를 받았고, 또 10명이 세례받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코로나19 봉쇄가 시작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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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우치고 말씀에 순종할 때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28~30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31~32절)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불복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는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로, 순종하려 하지 않는 자는 그 교만 때문에 패망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잠16:18) 그러나 그 잘못을 회개하고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예수님에 대해 종교지도자들의 도발 오늘 본문 앞서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가 모여들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또한,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에게 저주하자 그렇게 생기발랄했던 우거진 나무가 하룻밤 사이에 뿌리부터 말라 죽어버렸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보고 두려우면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볼 생각은 하지않고 여러 모양으로 흠집을 찾아보자고 안달을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 갈수록 자기네들의 입지가 급속도로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에 대해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누가 너에게 그런 권세를 줬느냐고 예수님께 따지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너희가 답변하면 나도 너희에게 답변하겠다고 하고,(24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아니면 사람으로부터냐?”라고 물었습니다.(25절) 그러자 종교지도자들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 대답한다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25절)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 대답하면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아는 고로 백성들을 무서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26절) 그래서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할 난처한 상황이 되자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답변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무슨 권세로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시는지 밝히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27절)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했던 선지자였습니다.(요1:29)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애타게 회개하라고 외쳤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을 미치광이로 무시해버리고 불신하며 배척했습니다. 또 이들은 세례 요한뿐만 아니라 예수님까지도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의 비난에 대해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고,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마11:18~19)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그들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큰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비하하고 예수님을 깎아내리면서 비방했던 자들이 또다시 예수님께 ‘권위’를 따지며 도발해 온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심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도발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그들의 완악하고 강퍅한 마음을 지적하고 깨우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비유를 들어,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맏아들이 ‘가겠나이다’하고 대답은 했으나 가서 일하지 않았고,(29절) 둘째 아들에게도 똑같이 말하니 둘째 아들은 ‘싫소이다’하고 대답했지만 뉘우치고 가서 열심히 일했다(30절)고 한다면, 두 아들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고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러자 종교지도자들의 대답은 둘째 아들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31절) 이 비유를 하신 것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불순종한 맏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이었고, 저들이 천대했던 죄인들을 순종한 둘째 아들로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세례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와서 복음을 전했거늘 너희는 끝까지 그를 믿지 않았지만, 너희가 손가락질하며 욕하던 세리와 창기는 믿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32절) 죄인들은 둘째 아들처럼 뉘우치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따라 말씀 듣고 회개하여 구원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잘 믿는 척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세리와 창기 같은 부류로 취급하며 죄인이라고 한 것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듣지도 아니하고, 성령의 임재도 없으며, 구원에 이르지도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 사1:19~20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즐겨 순종하면 이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해주겠지만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칼은 어떤 칼입니까? 말씀의 칼입니다. 히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주신 생명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그 말씀이 심판의 칼날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28장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라”(2절)고 말씀하십니다. 순종하는 자의 복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순종하면 복이 임할 것을 약속하고 있는 내용입니다.(3~14절) 반대로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15절) 불순종하는 자의 저주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16~44절) 이를 가벼이 여겨서는 결코 안 됩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복이요,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메시지를 마음에 깊이 새길 때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엄청난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권면의 말씀)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교만한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자기 생명을 다 바친 세례 요한을 미치광이 취급해버렸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그 권위에 도발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암4:10절에 보면, “내가 너희 중에 염병이, 전염병이 임하게 하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영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라는 말씀처럼, 불순종한 자들의 결과는 참담한 끝을 가져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악한 생각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저들은 스스로 의로운 자로 여겼지만, 실제는 악한 영에게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일이 무엇일까요? 영적으로 충만해서 악령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순종함으로 악령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모습을 보실 때, 예수님은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짜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방법이라면 그 일을 왜 못하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런 여러분들을 보시고 기뻐하실 수 있도록 오늘부터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거듭나서 성령 충만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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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 총회 창립 108주년 기념 감사예배 드려“사람들에게 힘과 위로 주는 교회 되자” ▲총회 창립 108주년을 맞아 예장통합 총회는 지난 10일 기념예배를 드렸다. 총회 창립 108주년을 맞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가 지난 10일 기념예배를 갖고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교회’가 될 것을 다짐했다. 이날 총회 창립 기념 감사예배는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시행으로 총회 임원과 각 부 총무, 산하기관 대표, 직원 일부만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총회 서기 조재호 목사의 인도로 드린 이날 기념예배는 총회 부서기 윤석호 목사의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 부총회장 김순미 장로의 기도, 총회장 김태영 목사의 설교, 총회 회계 김대권 장로의 봉헌 기도, 총회 회록서기 양원용 목사의 총회연혁 낭독, 총회가 제창, 부총회장 신정호 목사의 축도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예배에서 김태영 총회장은 ‘교회의 힘’ 제하의 설교를 통해 “지금도 언론과 사회, 정부가 교회를 압박하면서 이렇게 무시당하고 있는데 교회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 교회의 힘은 어디에 있는가?” 질문을 던지고, “기도가 힘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기도의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제시했다. “교회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지역사회 봉사, 평화통일과 세계선교에 헌신하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12년 창립 당시 7개 노회, 2,054개 교회, 목사 128명, 장로 225명, 세례교인 5만 3,008명, 교인 12만 7,228명에서 현재(2019년 12월 통계) 68개 노회, 9,290개 교회, 목사 2만 775명, 장로 3만 2,511명, 세례교인 167만 4,243명, 교인 250만 7,010명으로 성장했다. 총회가 파송한 선교사는 797가정, 총 1,508명이 93개국에서 사역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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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교회 증축 건물 불법 파괴 3,000명의 교인들 항의지난 5월 20일, 이집트 나일 델타 서부의 한 마을(Koum Al Farag)에서 200명의 경찰이 한 교회 건물을 파괴했다. 이에 항의하는 교인들은 폭행을 당하고 경찰에 붙잡혀갔으며, 성직자도 폭행을 당해 기절했다. 이 건물은 15년 전에 세워졌고, 교인 수는 3,000명에 달한다. 크리스천 주민들의 결혼식과 세례식, 장례식이 행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늘어나는 필요 때문에 교회 옆에 교육관 건물을 3층으로 짓기로 하면서 무슬림들의 박해가 시작됐다. 건축을 시작하자 극단주의 무슬림들이 공격해왔고, 이미 4개의 모스크가 있는데도 분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교회 바로 옆 농지에 불법으로 모스크를 짓기 시작했다. 이 불법건축에 대해 경찰은 교회건축이 원인이라며 둘 다 철거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고, 교회 증축은 합법적인데도 철거를 단행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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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군선교회 경북지회, ‘순회헌신예배’ 드려북삼제일교회 성도들, “군복음화”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 ▲총회군선교회 경북지회가 17일(수) 오후 8시 북삼제일교회에서 순회헌신예배를 드렸다. 예장합동 총회군선교회 경북지회(회장 장성진 목사)가 6월 17일(수) 오후 8시 북삼제일교회(우봉석 목사 시무)에서 순회헌신예배를 드리고 군복음화 사역을 위해 함께 기도했다. 순회헌신예배는 한상봉 장로(상임총무) 사회, 이상영 장로(감사) 기도, 북삼제일교회 제3청년회찬양대 찬양, 경북지회 지회장 장성진 목사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십시요’(엡4:11~16) 제하의 설교, 이기우 장로(구미시민교회) 오카리나 특송, 우봉석 목사(북삼제일교회) 축도 순으로 진행됐다. 설교에서 장성진 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공동체로 부르신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다”라고 강조했다. 또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며, 온 지체가 서로 연결되어 도움을 주면서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장 목사는 “군선교회의 사명도 군 복무를 하는 자녀들이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연결되어 있도록 하는 일”이라며, “군 선교의 문이 막힘없이 열리고 더 많은 장병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도록 기도와 물질로 헌신해줄 것”을 당부했다. 총회군선교회는 ‘60만 국군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자’라는 목표 아래 군 장병 복음화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다. 군부대 진중세례식, 군부대 찬양예배지원, 군 교회 건축 및 보수지원, 군종병 보수교육지원, 군부대 위문 방문, 군 선교사 파송 등 군 관련 전문 선교 사업을 펼치고 있다. ▲예배 후 총회군선교회 경북지회 위원들과 북삼제일교회 당회원들의 기념촬영.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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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길을 열어 주시는 주님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1절)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5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8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하였느니라(10~11절) 오늘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 불안하고 또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로 위축된 심령들에게 때를 따라 주시는 말씀을 통해 이를 능히 극복하고 승리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는 내용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우리에게 이를 본보기로 삼고 동일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험을 당할 때는 피할 길을 주신다는 사실도 함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이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는데, 1절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일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홍해를 건너게 하셨는데 이를 세례받은 것이라고 바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반석에서 구멍이 나게 하시고 물이 솟아 모두가 갈증을 면하는 흡족한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신령한 반석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그 반석을 예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요즘처럼 코로나 전염병이 많은 사람을 위협하고 있지만,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목이 마르고 힘들 때가 있어도 반석이신 예수님이 동행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새 힘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반석에서 물이 나와 먹고 살게 된 사건을 통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말씀을 통해서 살아야 함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광야교회의 모습을 고린도교회의 현재 모습과 동일시하여 광야교회가 어려움을 당한 일과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이유를 깨닫고 그 사건을 거울삼아 우리도 천국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 다수를 멸망하심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5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시는 과정인데, 왜 그들을 원치 않으셨을까? 그 이유에 대해 히브리서 3장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40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17~19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만 어려우면 애굽이 좋았다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외치며 원망하고 불평하기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앙의 행동을 한 것이었지요. 그들의 불신앙이 결국은 그들로 하여금 약속받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해서 광야에서 다 엎어져 죽게 한 것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당하게 된 4가지 사건 사도 바울은 구약시대 광야교회에서 있었던 불행한 일들, 4가지 사건을 열거하면서 그들이 왜 멸망당하게 되었는지 그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7절)은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된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호렙 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다가 지쳐 아론을 통해 금송아지로 우상을 만들고 숭배한 사건입니다. 두 번째 사건(8절)은 민수기 25장에 기록된 것으로 광야교회가 싯딤에 이르렀을 때 모압 여인들의 꼬임에 빠져 간음하고 우상숭배에 이르게 되므로 하루에 2만 3천 명이 죽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세 번째 사건(9절)은 민수기 21장에 기록된 것으로 광야교회가 가나안땅으로 진행할 때 에돔 땅을 지나가는 것이 쉬운 길이였으나 에돔이 거절하여 사해 오른쪽으로 돌아 산과 계곡을 지날 수밖에 없음에 백성들이 길이 험하여 불평함으로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사 그들을 심판하신 사건입니다. 네 번째 사건(10절)은 민수기 13장에 기록된 것으로 광야교회가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러 가나안땅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어 40일을 탐지하였는데, 백성들이 희망과 승리를 말한 2명의 보고를 듣지 않고 절망과 불평을 보고한 10명의 말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사건입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광야교회는 40년간 광야를 헤매다가 출애굽 할 때의 1세대는 승리의 보고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다 광야에서 죽고 20세 미만의 2세대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4.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주신 본보기 광야교회의 이러한 행적들이 오늘 코로나 전염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에게 경계의 말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6절),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11절).” 이런 일들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의 교훈거리로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기록하게 하신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나도 그러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경계거리로 삼아 분발하도록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광야교회가 불행한 사건들로 멸망당한 일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5.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피할 길을 내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13절) 하나님은 믿음직스러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당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시험당할 때 피할 길을 열어 주셔서 그 죽을 지경에서 벗어나 살아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 전염병이 돈다 할지라도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어지면 그 사람은 그 죽음의 환란에서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것을 성령으로 깨닫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회개할 때, 성령이 알게 해 주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피할 길이 무엇일까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5:13)라는 말씀처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권면의 말씀) 코로나 전염병으로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환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광야교회의 불행한 사건을 교훈으로 삼고 악에서 돌이키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 길을 주시고, 피할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전염병의 두려움으로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피할 길임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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