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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1)나의 출애굽기(1) 드보라 1. 어린시절 우리집 나의 아버지는 동네 유명한 깡패였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를 보더니 홀딱 반해서 따라다니다가 나중에는 억지로 결혼하자고 했다고 한다. 단순한 억지 수준이 아니라 결혼 안 해주면 집에 해코지 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는 반면에 그 당시 여자들이 가기 힘든 대학도 나오신 분이었고 외할아버지도 해외에 유학을 다녀온 학식 있는 집안이었기에 길길이 뛰면서 반대를 하셨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너무 무섭고 겁이 나서 할 수 없이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다. 이렇게만 이야기가 이어졌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일 뿐이지만 다행히 아버지는 결혼 후에 마음을 고쳐먹으셨다. 결혼한 순간부터 싸움을 그만두고 깡패 친구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항상 잘해주셨다. 아버지는 직장으로 한 화학 공장에 다니셨다. 그 공장은 살인무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공장이었다고 기억한다. 인체에 나쁜 매연과 환경 때문에 건강이 계속 나빠지셨다. 그렇지만 마음대로 직장을 옮길 수 없는 군수품 공장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으셨다. 그러다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벌목공으로 해외 노동을 하러 가는 것이었다. 비록 몸은 고되다하지만 3년 정도만 일하고 오면 다른 곳으로 배치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벌목공으로 지원해서 가셨다. 낯설은 타향의 추운 지방에서 콧구멍에서 얼음을 뜯어내면서 당과 수령을 위해 온몸 바쳐 충성했다. 2. 노동력을 착취당한 아버지 아버지가 해외로 간 후 우리 가족은 시골 외갓집으로 이사를 갔고 그 후로 계속 거기서 살았다. 언니와 동생들은 해외의 추운 곳에서 고생하는 아버지에게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써서 한 달에 한 번씩 아버지에게 보냈다. 그렇지만 나는 무슨 심술이었는지 한 번도 편지를 안 썼다. 돌이켜보면 예쁜 짓 사랑스러운 짓을 한 번도 안 했다. 벌목공으로 가셨던 아버지는 3년 만에 돌아오셨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우리 가족은 충격에 빠졌다. 가기 전에는 건장하고 듬직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몰라보게 핼쑥해졌기 때문이다. 진하게 검었던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물이 맞지 않고, 1년 내내 여름 한번 없는 북극의 추운 지방에서 너무 고생하여서 머리카락이 다 빠져 대머리가 되어 버리셨고 두툼했던 얼굴 살은 다 어디 갔는지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일을 했지만 북한 당국의 당자금으로 몽땅 착취당했고, 단 1원 한 푼도 못 받고 러시아 빵 3박스만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오신 것을 위안 삼아야 했다.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고생하고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학교에서 집에만 오면 언니와 동생들과 맨날 싸움박질을 해댔다. 이렇게 나는 학교에서는 공부도 잘하고 칭찬을 잘 받는 모범학생이지만 집에만 오면 천덕꾸러기가 되는 생활을 하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갔다. 3. 일요일에 수상한 외할아버지 그 당시 우리가 살았던 외할아버지 댁은 함경도 산 속 시골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산에 감자나 밀, 보리 등을 심어서 생계를 유지하며 사셨다. 듣기로는 유학도 다녀오시고 원래는 평양에 계셨다고 한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 시골에 계시는지 어린 나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상하게 외할아버지는 일요일만 되면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 놀러 오는 나와 외할머니에게 오전에는 옆집에 가서 놀다가 오라고 보내셨다. 그 날은 꼭 인근에 몇 십리 떨어진 산골짜기의 다른 집에 어른들 몇 분이 와서 회의를 한다고 하면서 오전에는 다른 집에 가서 놀다가 오후에 오라고 하곤 하였다. 우리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전처와 사별하고 이후에 재혼하셨다고 했는데 평소에도 순종적인 분이라 외할아버지 말씀에 묻지도 않고 하라는 대로 옆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셨지만 나는 괜히 불만이었다. 그 당시에는 일요일만 텔레비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봐야 되는데 왜 자꾸 딴 데 가라 하시는지, 빨간 날은 휴식하는 날인데 왜 집에서 무슨 회의를 하는 건지… 궁금은 했지만 워낙 어릴 때라 짜증만 내고 말았다. 4. 크리스천이었던 외할아버지 나중에 탈북을 해서 남한에까지 온 다음에야 나는 왜 외할아버지께서 그러셨는지 알 수 있었다. 하루는 탈북 성도들 모임이 있어서 갔는데 그 모임을 인도하시던 목사님께서 자신이 선교 사역 중에 입수한 북한에서 나온 중국어 성경책을 사진으로 보여주셨다. 한글성경이 아니라 한문으로 기록된 옛날 성경이다. 그런데 그 책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전에 어디서도 그 책을 본 적이 없어야 할 터인데 분명 내가 확실히 본 적이 있는 책이었다. ‘왜일까? 왜 내가 저 책이 낯설지 않을까’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나는 그 책이 외할아버지 댁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 북에 있을 때 골동품을 밀수해서 팔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집에 팔만한 것들을 찾다가 한자가 잔뜩 적힌 책 한 권을 보고 팔려고 했다가 못 팔았었는데, 그 책이 바로 그 사진 속의 책이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확인하자 외할아버지가 일요일마다 나와 할머니를 다른 곳으로 보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외할아버지도 남모르게 믿음을 지킨 크리스천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외할아버지가 평양에서 함경도 산골짜기로 오게 된 것도 종교적인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다행히 교회 내 주요 인사가 아니셨는지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서 고통을 당하지 않고 생명은 부지하셨지만 추방을 당해 이 산골짜기까지 오셨던 것이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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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지역아동센터 정정숙 생활복지사 구미시장 표창장 받다!▲구미시장상을 수상한 정정숙 생활복지사.(나눔지역아동센터)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봉사와 섬김으로 이웃을 돌보는 삶을 실천해온 정정숙 생활복지사의 헌신이 화제다. 정정숙 생활복지사(구미남부교회 권사)는 지난 2003년부터 구미남부교회에서 운영한 ‘나눔공동체사회복지협회’ 사무국장을 맡아 맞벌이 가정 영유아 돌봄, 미용봉사, 목욕봉사, 의료봉사 활동 등을 통해 이웃을 돌보는 일을 시작했다. 이후 2006년부터 현재까지는 나눔지역아동센터(구미남부교회 부설) 생활복지사로 재직하면서 지역의 소외계층아동돌봄서비스를 통해 아동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데 힘쓰고 있다. 정정숙 생활복지사는 구체적으로 매년 아동농촌체험 프로그램, 민속놀이 프로그램, 하계캠프 프로그램, 아동 학습지도 및 예절 교육, 학부모 및 연고자 교육 등을 진행하며 아동들이 정서적·문화적으로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성장하도록 지원해왔다. 구미시에서는 지난달 19일 ‘제19회 사회복지의 날 기념식’에서 정정숙 생활복지사와 같은 사회복지 증진 유공자 20명을 발굴·선정해 시장상, 국회의원상, 시의장상 등을 표창함으로 그 공적을 치하하고 격려했다. 구미남부교회 최성수 목사는 “교회 설립 초기부터 지역사회 돌봄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동안 묵묵히 봉사와 헌신을 다 한 정정숙 권사와 같은 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마치 내 일인 양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축하의 마음을 전했다. ▲장세용 구미시장과 수상자들.(뒷줄 오른쪽 세번째가 정정숙 생활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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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1)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 영 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1893년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안동지역에 복음이 전해진지 124년이 지났다. 오늘의 교회는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안다. 훌륭한 믿음의 선배 중에는 교역자들 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포함된다. 이 분들의 헌신의 결과로 척박한 이곳 안동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 마을마다 교회가 서게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수고임을 알기에 감사할 뿐이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선교 초기 거룩한 발걸음을 통해 거룩한 흔적을 남긴 위대한 선배이다. 필자는 그에 대한 조명이 너무 늦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그리고 경상북도에서 초개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며 교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김영옥 목사를 연구하여 탈고하니 그동안 목사님에게 가졌던 죄송스러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느낌이다. 이제 자애로운 아버지요 할아버지, 지역의 초대교회의 기초를 든든히 세워 중심교회로 서게 한 목사,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애국한 김영옥을 소개한다. 1.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결신한 청년, 김영옥 경상도의 첫 한국인 목사는 김영옥(金泳玉, 1871-1952)이다. 김영옥이 비록 영남지역 최초의 한국인 목사이지만 그의 고향은 북한으로, 그는 1871년 4월 12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했다. 가난했던 그는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갈 꿈을 갖고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18세가 되던 1888년 어느 날, 평산 누님 댁에 갔다가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가 소래(松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국으로 갈 방법을 찾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제시받은 김영옥은 미국 갈 결심을 포기함과 동시에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로부터 세례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전혀 뜻하지 않게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은 김영옥은 세례 까지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부로 복음사역의 적극적인 도우미가 되었다. ▲1909년 9월부터 안동의 북부지역은 사우대 선교사가, 서쪽은 오월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좌측 말에 탄 사람은 사우대 선교사이며 말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시 조사인 김영옥(1911년 안동교회 초대담임목사로 부임)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부, 그리고 오른쪽 말에 탄 사람은 오월번 선교사이다. 2. 목사 임직 이전의 복음전도자, 김영옥 회심 이후 김영옥은 복음사역을 위해 하나하나 착실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복음전파사역에 관한 김영옥의 결심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곁길로 간 적이 없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한 준비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 1년 만에 한문 신·구약 성경 모두를 통독(通讀)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한 선교사들로부터 전도법과 장로교회에 관해 배웠으며 선교사들과 간단히 대화할 수 있는 영어실력도 갖추게 되었다. 모든 과정을 이수한 김영옥은 실력 있는 매서인(賣書人)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사를 도와 공식적인 매서인으로서 사역할 수 있었다. ▲황해도 솔래(松川)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18세 때(1888년) 회심하고 결신한 김영옥은 휴식도 없이 64년(1952년) 동안 서울, 강원도 철원과 원주, 경북 안동, 사월, 포항, 영주, 경주, 풍기, 문경, 그리고 의성 삼분 등 전국에서 교회를 세우고 돌보며 애국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온 김영옥은 1893년 모삼열(Samuel. F. Moore)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순교를 각오하고 서울 종로 5가, 4가 등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몇 명의 성도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1894년 이들이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와 그의 조사(助事)인 서상륜과 함께 연지동 초가(草家)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연동(蓮洞)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또한 김영옥은 조사로서 서울의 승동교회와 동막교회 설립에 관여함으로써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쉬지 않고 감당했다. 이후 김영옥은 서울을 벗어나 더욱 활발하게 전도사역을 감당했다. 그는 경기 동쪽과 황해도 이남(以南)으로 순행하며 전도하여 백천, 평산, 금북, 금성, 양구, 화천, 양주, 포천, 등지에 여러 교회를 설립에 기여했다. 특히 김영옥은 1898년 모삼열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고 개척한 고향인 황해도 백천군 운교(雲橋)교회에서 영수(領袖)와 장로로 섬기기도 했다. 운교(구름다리)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큰 한옥을 사서 새롭게 단장하여 예배처소로 사용한 그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김영옥은 주일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는 새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신자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2주 내지 3주간씩 연속으로 사경회를 열기도 하였다. 김영옥은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한국교회 초기 매서와 조사, 그리고 영수와 장로로 초기 한국교회의 뛰어난 평신도 지도자였던 것이다. 3. 영적 지도력을 갖춘 한국 장로교 평신도 리더, 김영옥 조사(助師)는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그들의 고국과는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이 땅에서 적응해갈 수 있도록 도운 사람들이다. 선교사들은 이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부동산을 구입할 때 도움을 받았으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각 지방으로 순행할 때 큰 도움을 받았다. 만일 어느 누구도 선교사들의 복음사역과 현지 적응을 돕지 않았다면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이 땅에서 복음의 씨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영옥은 조사로서 초기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 한국선교 초기 많은 조사들이 있었지만 조선장로교사기에 따르면 김영옥은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도 영향력 있는 발언권을 가진 조사였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공식적인 회의석상에서 중요한 발언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영옥은 1903년 9월, 1904년 9월, 1906년 9월 세 차례에 걸쳐 선교사들과 함께 모인 장로교공의회 경성소회 총대 장로로 참석하여 발언하기도 했다. 1906년 9월 회의에서는 “교인으로는 교회를 순종하고 국민으로는 국가에 순종할 방침이란 문제”에 대하여 발언했는데, 이것은 분명한 기독교적 국가관을 가진 김영옥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명의 한국인 목사가 처음으로 배출되기 전 까지 김영옥은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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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모방하여 지속가능한 사회로…경산시(시장 최영조)는 환경부(장관 김은경), 경상북도(지사 이철우), 전라남도(지사 김영록)와 공동으로 10월 2일 세종시 다솜3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2018 국제 청색경제포럼’을 개최하였다. 이번‘2018 국제 청색경제포럼’에는 박천규 환경부 차관, 윤종진 경상북도 행정부지사, 윤병태 전라남도 정무부지사, 최영조 경산시장을 비롯해 미국의 자연모방기업인 팍스(PAX)사 제이 하먼(Jay Harman) 대표 등 국내외 전문가를 포함하여 500여 명이 참석하며 청색기술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이번 포럼은 청색경제의 기반이 되는 청색기술과 관련된 각계 전문가를 초청하여 청색기술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고 관심을 이끌기 위해 마련됐다. ‘청색경제’란 생태계의 시스템을 모방하고 에너지와 자원을 끊임없이 순환하여 지속가능한 발전을 달성하는 경제를 의미한다. 1955년 스위스에서 식물 도꼬마리의 가시를 모방하여 작은 돌기를 가진 잠금 장치 ‘벨크로(일명 찍찍이)’가 발명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리고, 이날 생태모방기술 개발촉진을 위한 정부-지자체-연구기관 간 업무협약 체결과 국내외 청색기술 전문가의 기조연설, 초청강연 등이 진행되었다. 업무협약은 환경부, 경상북도, 전라남도, 경산시와 연구기관인 국립생태원, 한국기계연구원이 참여했다. 이들 기관은 청색기술 개발에 필요한 자연원리 분석과 기술적 응용 연구를 협력할 예정이다. 또한 중국, 폴란드 등 해외 청색기술 전문가들이 청색기술의 미래 발전가능성과 현재 기술 수준에 대해 강연을 했다. 첫 번째 기조연설자로 나선 미국 자연모방기업 PAX기업 설립자인 제이 하먼(Jay Harman) 박사는‘생체모방기술: 미래의 큰 도약’이라는 주제로 어떻게 자연이 급진적 혁신을 고취시키는지에 대해 강연하고, 중국 길림대 교수이자 국제바이오닉공학회(ISBE) 사무총장인 지안키아오 리(Jianqiao Li) 교수와 폴란드 피오트르 야브윈스키 서울대 교수는‘청색경제, 35억년 자연생존기술에서 배우다’란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또한, 국내 초청강연자로 지식융합연구소 이인식 소장이‘청색기술혁명과 일자리 창출’을, 조황희 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이‘청색기술과 함께하는 미래사회’에 대해 강연하고,‘청색경제로 열어가는 지속가능발전사회’란 주제로 패널토론이 진행되었다. 한편, 부대행사로 청색경제 영상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전시, 청색기술체험전이 함께 열리며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청색경제 영상콘텐츠 공모전 수상작은 올해 7월부터 2개월간 열린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들로 환경부 장관상 1명을 포함해 총 5개 작품이다. 이들 작품들은 청색경제의 의미와 발전방향에 관해 제작된 공익광고, 애니메이션 등이다. 이날 환경부는 생태모방지식 DB구축과 플랫폼 개발, 실용․실증 환경기술개발계획, 기술 확산을 위한 장기 로드맵을 제시하는 내용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생태모방기술 개발 계획을 발표해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다. 그동안 경산시에서는 지역 주력산업인 자동차․건설기계 부품산업과 청색기술을 접목시켜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청색기술 기반 선도과제 국비사업화 추진과 원천기술 확보 및 연구자 중심 R&D 연계 협력체계 구축, 기업 기술이전 등 청색기술산업 저변확대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청색기술산업 육성 정책의 방향을 선도해 왔다. 최영조 경산시장은 “청색기술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혁신성장 동력”이라며, “이번 포럼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청색기술에 관심을 갖고, 청색기술산업을 지역산업발전을 선도할 신성장 산업으로 육성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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