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김천 율곡동 새마을 부녀회, 미혼모협회에 생필품 전달이웃사랑 나눔 실천 이어가는 아름다운 사람들! ▲모집된 생필품을 대구시 소재 미혼모협회에 전달하기 위해 차에 싣고 있다.(사진=김천시 제공) 김천시 율곡동 주민센터(동장 이우문)에서는 3월 15일 새마을 부녀회(회장 이서현)주관으로 대구시 소재 미혼모협회에 생필품을 전달했다. 율곡동 부녀회는 2019년 4월부터 아이엠맘(I’m MOM) 미혼모 협회와 인연을 이어오고 있으며, 2019년 가을 첫 번째 물품 기증을 시작으로 3년째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 율곡동 주민센터에 마련된 생필품 수집함에는 해마다 율곡동 맘카페 회원들과 새마을 부녀회 회원들이 다양한 물품을 기증하고 있으며, 회원들의 봉사로 선별작업을 거친 옷, 신발, 책, 장난감 등 영·유아용품들과 김천혁신농협에서 후원한 여성위생용품이 올해도 1톤 차량을 가득히 채웠다. 이서현 율곡동 새마을부녀회장은 “힘들게 생활하고 있는 미혼모 가족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을 줄 수 있어 기쁘다”며, “생활용품을 후원해주신 김천혁신농협과 물품 기증에 동참해 준 율곡동 맘카페 회원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 이우문 율곡동장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작은 도움이지만 큰 희망과 용기를 주고 따뜻한 정을 나누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하다”고 전했다. 한편, 율곡동 새마을부녀회에서 후원하는 미혼모협회는 정부지원 없이 후원금만으로 운영되고 있어 후원금 및 생필품이 더욱 필요한 시설로서 또 다른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
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8)- 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 김승학(안동교회)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선교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1908년 안동에 선교부가 세워질 당시 안동의 인구는 약 15,000명 정도였다. 안동에 체류하고 있던 장인차(張仁車, Woodbridge O. Johnson) 의료선교사가 오월번(吳越璠, Arthur G. Welbon) 선교사에게 1910년 11월 26일 쓴 편지에 의하면 안동은 소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본 도시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쾌적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고 기록할 만큼 안동은 선교사들에게 매력적인 도시였다. 안동에 도착한 최초의 선교사는 부산에 주재하고 있던 배위량(裵偉良, William M. Baird)으로 그는 1893년 4월 17일부터 5월 20일 까지 경상북도 지방을 순행하며 전도했다. 이후 1899년 대구선교부가 설치되자 안동은 대구선교부의 관할 지역이 되었고, 안동을 포함하는 경북북부지역은 대구선교부의 주된 선교 타게트(Target) 지역이 되었다. 대구선교부 주재 부해리(傅海利, Henry Munro Bruen) 선교사에 따르면 함께 안동을 순회한 방위렴(邦緯廉, William M. Barrett) 선교사는 1903년 안동의 첫 학습자이자 안동의 첫 열매를 얻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특히 미국북장로회 선교회가 1908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를 설립하기 위한 예비 작업을 결정하고 1909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설립을 최종 결정한 후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진 1. 1910년대 안동시의 모습과 생활상으로 위 왼쪽은 낙동강으로 사진 아래의 대동강은 오기로 보인다. 마을과 낙동강 사이에 논이나 밭이 보이고 도로는 동에서 서로 향하는 안동-예천 도로이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린 후 몇 차례 예배처소의 변경이 있었다.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는 안동교회가 임시 처소 까지 포함해 여섯 곳에서 예배를 드렸음을 기록한다. 특히 이 기록은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의 기억을 토대로 한 것으로 김광현 목사는 안동선교부 최초의 선교사인 사우대(史佑大, Chase C. Sawtell)이 세상을 떠난 후 1910년 1월 안동선교부 선교사로 파송되어 1952년 한국을 떠난 권찬영(權燦永, John Y. Crothers) 선교사와 그 동안 안동지역에서 사역한 선교사들과 함께 오랜 세월 동역한 안동지역 교회의 리더였다. 김광현 목사는 일본 고베중앙신학교에서 유학 후 부산 초량교회를 섬기다가 1943년 1월 안동교회 7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후 당시 안동 주재(駐在) 선교사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통해 누구보다 안동 초기 선교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는 분이었다. 김목사는 9년 전인 2006년 12월 14일, 93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는데, 안동교회 80년사는 그의 기억이 생생할 때 쓰여진 책이다. 특히 안동교회 80년사에 기록된 안동선교와 안동교회의 초기 역사는 안동교회의 당회록, 제직회의록, 세례·학습명부, 경북노회록, 그리고 경안노회록을 기초로 김광현 목사가 안동선교 시작부터 함께 했던 여러 선교사들로부터 전해들은 내용과 자료들을 첨가한 공식적인 문서로써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안동교회의 예배장소는 임시 예배소까지 쳐서 여섯 번에 걸쳐 옮겨졌다. 첫 번째 예배처소는 1909년 8월 둘째 주일, 최초의 교인 8명이 창립예배를 드린 곳인 대석동 129번지로 옛 대석상회가 위치한 기독서원이었고, 두 번째 예배 장소는 1910년 선교사들의 거처했던 임시주택으로 안동교회 교육관 자리의 골기와 한옥(韓屋)이었으며, 세 번째의 임시 예배장소는 선교사들이 사택 건축을 위해 선교사들이 매입하여 잠시 거쳐하였던 구(舊) 교도소 자리에 있던 기와지붕 건물이었다. 네 번째 예배장소는 1910년에 건축된 안동시 광석동 214번지에 소재한 ‘ㄱ’자형의 16칸 크기 예배당이었다. 다섯 번째 예배 장소는 현재 100주년 기념관에 위치했던 2층 목조 함석지붕의 건물로 1914년 2월 준공되었다. 여섯 번째 예배처소는 현재도 주(主)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는 석조 예배당으로 1936년 초여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37년 4월 6일에 준공되었다. 본 소고는 1909년 8월 8일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된 안동교회의 예배처소 위치와 예배당의 변동을 연구함으로써 안동교회의 내·외적 변화와 부흥, 선교부의 정착과 선교사의 역할 및 생활상, 그리고 초기 안동지역의 복음화 진행과정을 살펴보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1. 첫 번째 예배처소 : 기독서원(基督書院) 100여 년 전 안동에는 성경과 기독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 존재했다. 서점의 이름은 기독서원으로 이 서점은 안동 최초의 근대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 80년사는 대구선교부의 안의와(安義窩, James E. Adams) 선교사가 서문 밖 초가 5칸을 사들여 기독서원을 개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독서원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교회 앞 도로 건너편 버스 정류장이 있는 대석동 129번지다. 당시 김병우(金炳宇)가 언제 안동지역의 매서(賣暑)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의와 선교사는 김병우를 기독서원의 매서로 활용했다. 하지만 기독서원의 정확한 개원(開院) 일자는 알 수는 없다. 다만 안동교회의 첫 예배가 기독서원에서 있었기 때문에 기독서원이 첫 예배일자인 1909년 8월 8일 이전에 개원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이 사실을 근거로 기독서원의 개원(開院)에 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1908년 9월 미국북장로회 선교회 정기 총회 이후 부산에서 열린 한국 선교 집행 위원회는 오월번과 그의 부인인 새디, 그리고 별리추 박사에게 안동의 새 지부 개설을 요청했고, 이들이 동의함으로써 안동선교부가 개설되게 되었다. 안동 주재(駐在) 최초의 선교사인 사우대(Chase C. Sawtell)은 1908년 12월 1일 대구를 출발해 안동에 도착했지만 1909년 11월 16일 장티프스로 별세하였다. 이어 1910년 상반기에 오월번과 별리추 선교사, 권찬영 선교사가 안동으로 내려옴으로써 안동에는 3명의 선교사가 주재하게 되어 완전한 선교부의 조직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안동의 기독서원을 위한 가옥구입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대구 주재 안의와 선교사에 의해 행해졌거나 안동선교부 주재 사우대, 오월번, 사우대 선교사 등에 의해 기독서원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모두 있을 것이다. 즉 안동에 선교부가 세워진 1908년 12월 이전이라면 안동이 대구선교부 관할이었기 때문에 안의와 선교사가 기독서원에 사용될 가옥을 구입했을 가능성이 크며, 1909년에 접어들어 기독서원이 개원되었다면 안동선교부에 의해 시작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에 의하면 안동에 교인이 증가하게 되자 대구선교부에서는 풍산교회 교인인 김병우를 매서인으로 하여 1909년 8월에 종교 서적을 파는 서점을 열게 했다고 증언한다. 사진 2는 안동교회의 첫 예배처소로 추정되는 기독서원 앞에서 성도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모임의 수나 모임 사람 대다수가 남성인 것으로 볼 때 남자성경공부반으로 추정되며, 첫 예배를 드린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때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초기 한국교회가 곳곳에 세워진 것은 각 지역에 세워진 기독서원에 속한 매서와 권서의 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 교회가 없는 산간지방이나 외딴 지역에 매서를 통해 전해진 성경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매서들은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장소를 마련하고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이것이 훗날 교회로 발전했음을 여러 초기 자료들은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1909년 8월 8일 안동교회의 첫 예배가 당시 매서인 김병우에 의해 인도되었다는 것은 당시로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안동교회는 거의 1년 동안 이 기독서원에서 예배를 드렸다. 첫 예배 후 1년이 지날 즈음 교인의 수가 70명을 초과하여 예배공간이 비좁아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어 기독서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음을 권찬영 선교사는 증언하고 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
울릉군, 저동마을권역단위 종합정비사업 운영위원회 구성건강과 휴양, 공동체가 함께 하는 감성마을 저동 ▲마을을 대표하는 공동 거점공간으로 사용될 다목적센터.(사진=울릉도 제공) 울릉군 도동3리와 저동1, 2리가 함께 머리를 맞대어 지역을 대표하는 공동 거점공간 만들고, 여가·휴양공간을 새롭게 조성하고자 2014년부터 시작한 저동마을권역단위 종합정비사업이 2020년 준공되어 새해 본격적인 운영관리에 들어간다. 저동마을권역단위 종합정비사업은 해양수산부 소관 일반농산어촌개발사업으로 이번 사업을 통하여 도동3리와 저동1·2리 등 3개 마을회관의 노후시설을 보수 보강하고, 마을을 대표하는 공동 거점공간으로 다목적센터를 건축, 도동 임대주택 뒤편 옛길 산책로에 데크로드 조성 및 마을 안내판을 설치했다. 본 사업의 주요 시설물의 운영관리에 효율성을 높이는 현실성 있는 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주민 교육과 주민참여형 홍보·마케팅 사업을 시행하는 지역역량강화사업으로 총 42억5천만 원의 사업비가 투자되었다. 특히, 이번 사업으로 건축된 다목적센터는 사무용 정보기기를 갖춘 사무실, 업소용 장비를 갖춘 주방 등으로 구성되어 지역 주민들에게 각종 민원 편의 제공은 물론이고 휴식과 함께 지역 활성화 체험 프로그램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울릉군은 2. 23(화)에 회의를 개최하여 시설물의 효율적인 운영관리를 위한 운영위원회를 구성할 계획이며, 운영위원회는 마을주민과 담당 공무원, 시공회사가 참여한다고 밝혔다. 김병수 울릉군수는 “본 사업으로 조성된 시설을 기반으로 하여 1960년대부터 어업전진기지로 발전을 거듭해온 저동마을이 주민들의 성숙한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주민과 관광객이 다시 오고 싶은 동해의 찬란한 섬 울릉도의 미래형 자립거점 마을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밝혔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
경주 화랑마을, 생생한 화랑 체험 위해 3월부터 ‘국궁체험’ 운영3월~11월 매주 토요일 4회 ‘국궁체험’ 운영, 7세 이상부터 체험 가능 ▲화랑마을에서 이용객들이 국궁체험을 하는 모습.(사진=경주시 제공) 경주시 청소년 수련시설인 화랑마을(촌장 최영미)에서 다음 달부터 오는 11월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신라 화랑들의 호연지기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국궁체험’을 운영한다고 17일 밝혔다. 체험은 매주 토요일마다 하루 4회에 걸쳐 실시(1회 10:30~11:20, 2회 11:30~12:20, 3회 14:30~15:20, 4회 15:30~16:20)하며 각 회당 정원은 20명이다. 체험 가능 나이는 7세 이상으로 7~11세까지는 안전체험부로 보호자와 동행해야만 체험이 가능하며, 12세 이상은 일반체험부로 국궁예법과 국궁의 유래, 장비의 이해, 활쏘기 체험 등을 내용으로 하는 교육과 체험활동이 진행된다. 체험신청은 회차별 교육이 진행되기 1시간 전부터 화랑마을 내 육부촌 관리동에서 현장 접수하면 되며, 체험 비용은 청소년 5,000원, 성인 10,000원으로 카드결제만 가능하다. 체험과 관련한 문의사항은 화랑마을 활동운영팀(☎054-760-2412~8)으로 문의하면 된다. 화랑마을 최영미 촌장은 “옛 화랑의 기상을 체험할 수 있는 국궁체험을 통해, 힘든 시기를 겪는 있는 모두가 새로운 도전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가꿀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화랑마을은 지난해 10월 23일부터 11월 15일까지 국궁체험을 시범 운영한 바 있다. 당시 참가자 16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프로그램 전체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9.9점 △타 시설 프로그램과의 차별성 부문은 9.3점 △활동시설의 기자재 부문은 9.8점 △체험시간의 적절성 부문은 9.4점 △재방문의사 부문은 10점으로 집계돼 높은 호응도를 나타냈다. 경주 김치현 기자 www.gbhana.com
-
김천시평생교육원, 「2021 두레교실」 참여마을 모집마을이 교실로, 주민이 강사로! ‘우리 동네 학습관’ 만들기 김천시민 5명 이상으로 구성된 참여마을 신청 가능 ▲2020년 '할머니가 화가라' 수업 모습.(사진=김천시) 김천시평생교육원에서는 2월 22일(월)부터 2월 26일(금)까지 우리 동네 학습관 사업으로 추진하는 『2021 두레교실』 참여마을을 모집한다. 두레교실 사업은 주민이 주체가 되어 마을별 특성에 맞는 학습프로그램을 선정·운영하게 되며, 배움을 통한 지역공동체 활성화 및 주민자치와 평생학습 협업을 실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사업대상은 두레교실 운영을 희망하는 통·리 또는 아파트 단위 주민이며, 8개 내외 마을을 선정, 마을별 최대 2개 프로그램의 강사료를 지원하고, 시에서 주최하는 다양한 평생학습 관련 행사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 신청을 원하는 마을은 주민강사 발굴, 학습장소와 프로그램을 선정하고 5명 이상의 참여자를 모집한 후, 마을 대표가 신청하면 된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김천시청, 평생교육원 홈페이지를 참조하거나 평생교육원(☏421-2631)으로 문의하면 된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
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3)- 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정재순 목사(鄭在淳, 1878~1948) 1900년 초 어느 날 정재순 목사는 부해리(傳海利, Henry M. Bruen) 선교사와 만났다.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정재순이 20을 갓 넘은 나이에, 경산 어느 마을에서 부해리 선교사를 만났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훗날 정재순의 행보를 보았을 때 이 만남은 우연적인 만남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묘하신 섭리 가운데서 정재순이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게 하셨다. 만남 후 정재순의 삶은 하나님께로 향한 삶이 되었다. 정재순은 이후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 따라서 언제 누구를 어디에서 만나느냐는 정말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삶의 방향과 내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이후 정재순은 단 한 번도 교회를 떠난 적이 없이 초창기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교회 안에 세워진 기독교학교의 교사생활을 시작으로 교회에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함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를 전문적인 사역자로서 훈련시키셨다. 조사로 여러 교회를 섬기던 정재순은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하여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쌓게 된다. 그러던 1914년, 그가 섬기고 있던 대구 신정교회(현 대구 서문교회)에서 장로로 임직하는데, 신정교회 초대 장로의 영예를 안게 된다. 1915년 평양신학교 제8회로 졸업한 후 목사임직을 받고 신정교회 첫 한국인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초임지인 대구 신정교회에서 정재순 목사의 사역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역이었다. 여자 청소년을 위한 야간 학교를 개설했고, 대구 3·1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1922년 6월 안동으로 사역지를 옮긴 이후, 그는 전도중심의 사역을 통해 안동 땅을 기경하기 시작했다. 계속적인 그의 관심사인 학원선교를 위해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교회분립을 통해 안동 땅의 부흥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안동을 떠난 이후 대구를 근거지로 둔 정재순 목사는 본격적인 복음전파자의 길을 걸었다. 청도, 영천, 경산, 달성, 고령, 월성, 경주, 영일, 칠곡, 상주, 군위, 선산, 의성군 등에 28개 예배처소를 개척했다. 이 때 그의 부인인 손주안 사모는 함께 교회를 개척하고, 함께 성도를 섬기고 돌봄으로써 정재순 목사의 소중한 동역자가 되었다.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서 산란하고 죽듯이 정재순 목사는 60세에 그의 첫 담임 목회지인 대구 신정교회로 돌아가 사역을 마무리했다.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정재순은 목회 전반전과 후반전을 똑같은 열정과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불꽃을 불사르며 살았을 뿐 아니라 성도들의 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믿음의 사람이었다. 이제부터 정재순에 관해 살려보자. 1. 목사 임직 이전의 인간(人間), 정재순 정재순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며 극히 단편적인 것만 알려져 있다. 그의 집안이나 근무한 기관, 그리고 섬긴 교회도 그에 관한 것과 사역한 내용 등에 관해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지금까지 그의 성장배경이나 가족 관계 등 역시 제한적인 정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결과 정재순 목사의 가정에 관한 연구는 전무하다 시피 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 교회역사 주영연구소장 이교남 목사에 의해 정재순의 가족 관계가 새롭게 밝혀졌다. 이교남 목사는 정재순 목사의 후손을 만나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정 목사에 관한 이야기나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귀한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이교남 목사는 2013년 7월 제2회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에서 발표한 ‘정재순 목사의 목회사역과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라는 소논문에서 정재순 목사의 후손을 만나 확인한 새로운 사실을 공개한 적이 있다. 새롭게 밝혀진 정재순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정재순(鄭在淳)은 1878년 5월 24일, 경상북도 경산(慶山)군 남천면 신기동에서 출생(出生)했다. 부친은 정진호(金鎭鎬), 모친은 김소사(金召史)의 2남 4녀 중 장남이며, 부인은 손주안(孫主安)이다. 훗날 부인 손주안은 남편 정재순 목사의 동역자로 전도와 교회개척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정재순은 외동아들을 두었는데 아들은 정원조(鄭元祚), 자부는 손기순(孫琪順)이며, 그의 후손은 현재 대구에서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정재순 가문은 당시 여느 가문처럼 유학의 집안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우고 한학을 수학하며 유학을 따르는 집 안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묘는 칠곡에 있었는데, 1982년에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재순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할 때 교인으로 생존한 성도들이 기억하고 있는 정재순 목사는 천성이 어질고 중후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로부터 호감을 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 있는 정재순 목사의 사진에서 보여 지는 그의 인상(印象)은 성도들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사진으로 보여 지는 그의 인상은 후덕하고 인정이 많은 교육자요 목회자,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안동교회를 섬기는 3년 동안 성도들은 그의 신앙과 인격을 존경하며 영적 리더십에 순종했을 것이다.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고 대구제일교회 원로목사인 이상근 목사는 정재순 목사의 훈훈함을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들이 약혼한 때는 1942년 여름, 음력으로 7월 7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견우직녀라면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약혼식은 정재순 목사님의 주례로 처가 대청에서 올렸습니다.” 정재순 목사는 교인들을 포함한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주는 주의 종이었다. 2. 선교사를 만나 회심(回心)한 사람, 정재순 유교가 뿌리 깊은 가정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정재순은 처음에 기독교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증손자에 따르면 정재순이 선교사를 구타하고 쫒아내려고 선교사를 찾아갔다가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전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대구 경북 조사인물편람에 따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부해리 선교사가 ‘나의 설교 중 어느 말씀에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라고 정재순 조사에게 물었더니 정재순 조사는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부해리의 설교가 아니고 당신이 키우고 있는 사냥개 마이크가 식사 기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정재순 조사는 사냥개가 빵을 다리 위에 놓고 주인이 먹으라는 명령을 기다리는 순간을 식사 기도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미천한 개도 음식을 놓고 기도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어찌 기도하지 않겠는가? 하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개도 기도하고 난 후에 밥을 먹는데, 사람인 나는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정재순의 고백은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만이 아니라 선교사의 행동 등을 통해서도 전해질 수 있음을 알게 한다. 그렇다면 정재순은 언제 회심했을까? 정재순의 회심은 경산에서 복음이 전해진 선교사와 기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부해리 선교사는 1896년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1899년에는 뉴욕 유니언 신학교(Union Th 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한 후 그해 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해 10월 26 일 대구에 도착하였다. 결혼을 위해 대구를 떠났던 그는 1902년 5월 다시 대구 선교부에 귀환하여 경북 서부지방, 즉 김천, 선산, 군위, 고 령, 성주, 상주, 칠곡 등지에서 복음을 전해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3년 부해리 목사는 안의와(安義窩, James E. Adams)의 후임으로 대구제일교회를 담임하였고, 1904년에는 대구 성경학원의 남자 조사반을 맡았다. 또한 1916년까지 나환자 선교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2년 1월 경상노회의 조직에도 크게 기여하여 1913~14년에는 경상노회 7, 8회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5년에 대구 남산교회를 세워 1920년까지 당회장으로 시무하였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
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2)- 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887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출생한 이대영 목사는 시대를 앞서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 힘든 유학이 강한 마을과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혹독했다. 그는 더 이상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객지로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일정한 훈련을 거친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향으로 보내셨고, 뛰어난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 후 전도인, 조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기독청년면려회와 주일학교를 통해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갈 뿐 아니라 지역복음화와 교회 부흥을 선도했다. 그가 시무할 때 시작된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은 3·1운동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던 이 땅의 청년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고 미래를 준비하게 만들었다. 총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안동을 떠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 선교사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한 이대영은 그 땅에 머무는 동안 중국인들과 함께 중국인처럼 살았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선교를 포기하고 1955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 까지 이대영 목사는 33년 동안 중국인을 동족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서 산동반도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산동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재중동포들을 잘 돌보았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1954년 4월 산동성에서의 완전 출수 후 오직 하나님 나라, 교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1968년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선배이다. 1. 이대영, 금당실 마을에서 출생하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손인 이대영(李大榮)은 1887년 4월 23일,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李裕成)과 김도혜(金道徯)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대영이 출생한 마을은 금당실로 불러졌는데 선교사가 동네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다. 예천 땅을 처음 밟은 선교사는 부해리(傅海利, Henry Munro Bruen, 1874~1959)로 조사 이희봉과 함께 1907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7년은 평양에서 시작한 대부흥으로 전국에 뜨겁게 부흥의 열기가 확산되고 있던 때이다. 따라서 인근지역인 안동, 영주, 문경, 상주, 의성에 선교사들과 조사들의 활동으로 이미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있었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에 따라 예천 최초의 신자인 나만기(羅萬基)에 의해 당교회가 시작되었다. 특히 금곡(금당실)교회의 시작은 이러하다. 1893년 낙향해 금당실에 머물 던 이유직(李裕稙)은 양주 목사를 한 형 이유인(李裕寅)을 추모하며 99칸의 한옥 저택을 지어 생활했다. 하지만 동학혁명에 가담해 도망하던 이유직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고, 그 때 복음을 전해 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교전통이 유독 강하고 불교 중심의 마을이었던 금당실은 복음이 전파되기 대단히 어려웠다. 따라서 이유직은 때를 기다리며 1899년 전후, 자신의 집에서 은밀하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금곡교회의 첫 출발로 알려져 있다. 금곡교회는 선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상곡교회라는 공식 교회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금곡교회는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선교사가 직접 복음을 전하기 전에 쪽 복음과 전도지를 읽고 복음을 접한 평신도에 의해 세워진 자생적 교회인 것이다. 그 후 점차 예배드리는 수가 늘어가 교회는 계속 부흥하게 되었다. 예천지역 초기 3대 교회는 상곡교회, 괴당교회, 그리고 상락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대영은 괴당교회가 설립될 당시인 1907년 경, 복음을 소개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와 금당실의 영적 분위기에 의해 자신이 예수 믿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이대영 목사는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자신의 고집 때문임을 배태준 장로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내가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우리 집안에서 ‘양반 가정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하고 못 믿게 하는 것을 참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기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고 죽기로 하고 고집을 피워서 된 것이고, 일제 말엽 신사참배 문제로 그렇고 극성을 피울 때에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것도 내 고집 때문이었고.” 한번은 아버지가 이대영에게 소의 여물인 짚을 자르는 작두에 목을 대라고 해서 그대로 대었더니 아버지는 결국 자식을 포기하는 길을 선택했다고도 한다. 이대영은 부모의 반대로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과 함께 1910년 연일군 흥해면으로 이사하였다. 흥해에 도착한 이대영은 가족과 함께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선교사로부터 신앙훈련과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후예인 이대영은 비록 가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복음사역을 위해 철저히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비록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버림을 받아 객지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품으셨고, 훗날 당신의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 가셨고, 결국 하나님의 때에 한국 땅에서 중국 땅에서 복음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2. 이대영,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다 안동을 포한한 경북북부지역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93년으로 당시 부산선교부에 있던 배위량(William M. Baird) 선교사가 부산을 출발하여 밀양, 청도, 대구, 상주, 안동, 영천, 울산을 순회하며 전도하고 부산으로 귀환한 것이다. 이후 1902년 3월에 대구선교부에 있던 안의와(James E. Adams) 선교사가 안동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 “두 차례의 봄철 선교여행을 다녀온 후 곧 3차 여행을 시작했다. 1차는 3월과 4월에 경상도 북부지방을 다녔다. 이들 지방은 선교사들이 전혀 방문한 적이 없는 곳이었다. 이들 9명의 관리들을 만나고 많은 전도 서적을 팔았으며 장터에서 전도를 했다. 1개월 이상 장터를 돌며 전도하고, 약 1천 권 이상의 책을 팔았다.” 안의와 선교사의 안동 방문의 결과 안동지역을 포함한 경북북부 지방은 선교사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안의와 선교사 안동 방문 후 1903년 봄 대구선교부의 방위렴(William M. Barrett)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가 안동을 직접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부해리 선교사는 1892년 미국 장로교 기숙학교인 블레어 홀 아카데미(Blair Hall Academy)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22세 때인 1896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부친과 조부가 졸업한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마친 후 1899년 졸업하고 그해 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미국 북장로교로 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99년 10월 26일 대구에 도착하여 초창기 대구·경북 지역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추방되기 까지 40여 년 한국선교에 평생을 바친 부해리 선교사는 경북 북부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부해리 선교사를 포함한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의 결과,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연회보고에 의하면 경북·대구 지역 7개 고을에서 12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1904년 보고에는 12개 고을에서 6개 교회에 7명의 학습교인, 33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으며, 1905년 보고에는 20개 고을에 8개 교회에 2명의 세례교인, 19명의 학습교인, 79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다. 복음의 불모지와 다름없던 경북북부 지방에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짐으로써 복음화의 불씨가 발아(發芽)할 날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이대영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로 나뉘어진다. 우선 박용규는 1907년 경, 이대영은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소개받고 예수를 믿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미 예천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그가 복음을 전달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박용규의 추측처럼 1900년대 초 예천의 3대 교회 중의 하나인 괴당교회(槐堂敎會)를 설립한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이대영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당시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있던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대영 목사가 1956년 9월 41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할 당시 회계로 수고한 배태준 장로도 이대영이 20세 때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밝힌 적이 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기록한다. “이대영 목사는 부해리 선교사에게서 복음을 들었으며 신앙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고집을 가지고 추진하였기에 중국 산동성에서도 중국인 목사나 외국인 선교사들에 비해 큰 부흥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를 통해 전도를 받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부해리 선교사와의 역사적 만남으로 이대영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했으며, 이후 전도인, 조사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한 이후 한국교회와 중국선교의 거룩하고 위대한 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
포항시, 양질의 물 공급 위해 전력 다한다시설 구축부터 수돗물 관리 서비스 제공까지 ▲이강덕 포항시장이 양덕정수장의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사진=포항시) 포항시는 올해도 시민에게 더욱 깨끗하고 믿을 수 있는 양질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15일 밝혔다. 시는 우선 2017년 11월 15일 포항지진 발생으로 건물 외벽 등 시설 전반에 심각한 피해를 당하였던 양덕정수장에 총 224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지난해 12월 원상복구를 완료했다. 이번 피해복구 작업을 통해 정수장은 피해시설의 완전한 기능회복은 물론 정수설비의 성능 향상 및 현대화 시설 구축으로 더욱 안전한 물 공급 체계를 갖추게 됐다. 아울러, 포항시는 제2수원지 등 정수장 노후시설 개선을 위해 스테인리스 패널·친환경소독시설 설치, 응집제 주입시설 현대화, 배수지 관로 보수공사 등에 총 36억2천만 원 예산을 들여 수돗물 생산·공급 시설 최적화를 추진해 더 나은 설비로 지속가능한 수돗물 생산시설을 만든다는 방침이다. 또한, 수돗물에 이상이 있을 시 직접 방문하여 수돗물 무료 검사·진단·케어부터 현장에서 수질측정검사 및 결과확인까지 바로 해주는 찾아가는 수돗물 워터코디를 시행한다. 올해는 우선 유치원·경로당·마을회관 등 환경 취약계층 이용시설, 환경적으로 열악한 공단인근지역 거주 주민, 타지역 전입자를 대상으로 실시할 계획이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이 커지는 가운데 물 사용 여건이 악화할 것으로 예견되나, 안심할 수 있는 물관리 시스템 구축으로 시민 여러분께 24시간 맑고 건강한 물을 공급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
영덕 강구블루센터 어린이 작은도서관 개관생이별 전집, 영어 그림책 등 구비 ▲강구블루센터 어린이 작은도서관 내부 모습.(사진=영덕군) 영덕군 생활친화 소규모 문화공간 ‘강구블루센터 어린이 작은도서관’이 2월 1일 개관한다. 강구블루센터 안에 있는 도서관은 어린이 전용 한글 도서와 그동안 지역 내 도서관에서 볼 수 없었던 영어그림책을 보유해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 향상에 도움을 주고, 자연스럽게 영어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게 만들어졌다. 처음 책을 접할 때 길잡이가 되어줄 유아~초등 생애별 전집을 비롯한 한글책 2천453권, 학부모 선호도가 높은 영어 그림책 1천525권 및 CD 651장이 구비됐다. 운영시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이다. 단, 운영일정 및 시간은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 강구블루센터는 기존 운영 중인 ‘강구마을돌봄터’와 이번에 개관하는 ‘어린이 작은도서관’을 통해 주민 중심의 지역 문화 거점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앞으로 마을 돌봄터와 도서관 연계 문화프로그램을 비롯한 주민 대상 문화공간으로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장성용 강구블루센터협동조합 이사장은 “강구블루센터가 지역민의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공간이 되어 매우 뜻깊고 보람차다”면서 “앞으로 지역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지역상생을 위해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희진 영덕군수는 “지역의 미래 꿈나무 어린이들이 함께 어울려 책을 읽고 성장하며 지혜롭고 가슴 따뜻한 인재로 키워내는 첫걸음이 되는 공간이 도서관이다. 현재 영덕군은 일상 속의 책 읽는 문화를 위해 영덕통합도서관을 비롯한 생활SOC복합화 도서관 2개소, 작은도서관 2개소를 건립 중으로 지역민의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하고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
영주시, 에너지 복지실현을 위한 발 빠른 움직임‘농촌마을 LPG 소형저장탱크 보급사업’ 설명회 개최 ▲‘농촌마을 LPG 소형저장탱크 보급사업’ 설명회 모습.(사진=영주시) 영주시(시장 장욱현)는 지난 27일 단산면 단곡1리와 안정면 용산1리에서 ‘LPG ‘농촌마을 LPG 소형저장탱크 보급사업’ 설명회’의 현장확인 및 사업설명회를 개최했다. ‘LPG 소형저장탱크 보급사업’은 도시가스가 공급되지 않은 소규모 마을을 대상으로 소형저장탱크 및 배관망 등을 설치해 기존 LPG 가격보다 저렴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영주시는 올해 산업통상자원부 공모사업에 단산면 단곡1리, 경북도 공모사업에 안정면 용산1리가 선정돼 사업비 11억 3,500만원(국비 1억5000만원, 도비 1억9500만원, 시비 6억7700만원, 자부담 1억1,300만원)을 투입해 2개 마을 109세대가 난방과 취사용 LPG공급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면서 실시한 이 날 현장확인 및 설명회에는 신속한 사업을 추진을 통해 주민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LPG공급의 혜택을 주기 위해 실시했다. 이날 설명회에는 시 관계자를 비롯해 LPG배관망사업단이 참석해 사업추진 계획과 경제적 효과에 대한 사업설명 후 설계를 위한 현장확인을 했으며, 이른 시일 내 마을별 설계와 행정절차를 이행해 사업이 조기에 완료될 수 있도록 협조를 당부했다. 김한득 일자리경제과장은 “이번 ‘LPG 소형저장탱크 보급사업’이 완료되면 도시가스 미공급 지역의 에너지 사용 환경을 개선해 더욱 저렴하게 난방과 취사용 LPG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며, “사업시행 시 주민들의 불편이 없이 조기에 사업을 완료하겠다”고 말했다. 영주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