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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김광열 교수 총장직무대행 선임김광열 교수(총신신대원 조직신학)가 총신대 총장(직무대행)의 직무를 감당하게 된다. 총신대학교 법인이사회(이사장 김동욱 교수)는 지난 16일 김광열 교수(조직신학)를 총장직무대행으로 임명했다. 앞서 지난 13일 법인이사회는 임시로 15일까지 심상법 교수를 총장직무대행에 임명했다가 이날 김 교수를 정식 대행으로 다시 임명했다. 이는 심상법 교수가 현재 경력이 가장 오래된 교수이기는 하지만, 총신대 내부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사회를 앞둔 11일과 12일 총신대 학생·교수 등으로 구성된 내부대책위원회와 총동문회는 성명을 발표해 “심상법 교수는 지난 10년간 김영우 총장의 뜻을 받들어 학사 행정 파행에 앞장서 온 당사자”라고 규탄한 바 있다. 당시 13일 이사회에선 대학 부총장에 김광열 교수, 신학대학원 부총장 겸 신학대학원장에 이상원 교수, 목회신학전문대학원 포함 6개 대학원장에 정희영 교수가 각각 임명됐었다. 이들의 임기는 모두 2018년 10월 15일부터 2020년 10월 14일까지 2년이다. 또 이사회는 김영우 전 총장뿐만 아니라 교육부 징계 대상자인 전직 부총장들과 원장 등 관계자들을 직위 해제했다. 이어 이사와 교수 등 8인으로 교직원징계위원회를 구성해서 교육부가 징계대상자로 선정한 27명의 교직원에 대한 징계 수위를 결정하게 했다. 한편, 지난 5일 1심 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김영우 전 총장은 최근 항소장을 법원에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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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피해 영덕 주민, 생계걱정에 다시 무너진다!태풍 콩레이가 지난 5일~6일 영덕을 지나가면서 많은 비를 뿌려 영덕에서는 1명이 사망하고 주택 1300여 채가 침수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특히, 영덕읍과 강구면, 축산면 일대에는 말 그대로 물 폭탄이 쏟아졌고 강구 전통시장과 축산면 두 곳에 피해가 집중됐다. 그로부터 1주일 뒤, 지난 13일 오후 강구시장 일대는 북적여야 할 장날이지만 손님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스산했다. 7,000여 명 자원봉사자들 덕분에 골목 곳곳을 가득 메웠던 버려진 가전제품과 집기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췄지만, 주민들은 당장 연말 생계 걱정으로 우울했다. 의류장사를 하는 김석출 할머니(82세)는 수백만 원의 옷과 이불을 다 잃었다. 보일러 교체에 80만 원이 들었다는 손후규 할머니(69세). 남편과 무너진 담장을 수리하던 할머니는 무료급식 방송을 듣자마자 꿈의교회 급식소로 급히 걸어갔다. 법적으로 피해주민에게 지급 가능한 재난지원금은 가구당 최대 1백만 원. 조만간 영덕군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면 각종 세제를 추가로 감면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다 합쳐도 태풍피해 이전 수준으로, 일상생활로 복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피해주민은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거나 주변에서 빚을 내야 하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이들이 기대고 싶은 곳은 전 국민의 관심과 도움이다. 자연재난으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고통에 대한 공감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리고 의연금(성금)도 삶의 의지를 크게 북돋아 줄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기관과 기업, 개인과 단체가 동참해 성금규모는 11억 원에 이른다. 하지만 점점 여러 가지 사건 사고로 전국적인 관심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군 관계자는 “피해주민 형편이 정말 힘들다. 구걸이라도 하고 싶다. 언론의 관심도 갈수록 줄고 있어 걱정이다. 많은 분들이 저희 피해주민의 아픔을 보듬어 주시기 바란다”고 전했다. ◆성금모금:국민은행054990-72-003752(예금주:재해구호협회)◆ARS기부: 060-701-1004(1통화당 2,000원) ◆문자기부 : #0095(1건당 3,000원) ◆모금주관처 : 전국재해구호협회(☎1544-9595 ◆구호물품접수처 : 영덕군청 주민복지과(☎054-730-6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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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3)나의 출애굽기(3) 드보라 8. 딸이 대학 가는 것을 반대하신 아버지 그렇지만 아버지의 태도는 모순적인 면이 있었다. 그렇게 여자가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시면서도 언니는 대학을 보내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언니는 공부를 그리 잘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언니에게 경제나 회계 관련 공부를 하면 좋겠다 생각하셨다. 그래서 언니를 경제 관련 대학에 보내기 위해 억지로 학교 교장선생님 등하고 뒷문으로 사업을 해서 뇌물도 건네주었다. 당시 러시아 빵이 귀했는데 그 빵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렇게 겨우 대학 입학권을 하나 따내고 언니는 대학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공부가 부족한 가운데 무리해서 시험을 봤던 언니는 결국 시험을 망치고 말았고 입학도 하지 못했다. 이 일을 겪고 나자 아버지는 분이 나셔서 ‘에잇, 여자는 공부시키는 게 아니야’하고는 나를 공부시키려고 하지 않으셨다. 결국 내가 대학 갈 때가 되자 집에서 논란이 있었다. 부모들은 항상 나를 제외하고 남동생과 언니 위주로 챙긴다는 생각에 나는 더 반항적으로 행동했고, 부모님은 나를 대학 보낼 생각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갈등은 더 깊어졌다. 9. 유치원 교사를 꿈꾸다 … 교원대학에 지원 그래도 대학은 꼭 가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유치원 교사가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대학 지망을 쓸 때도 1-3순위 모두 교원대학을 썼다. 사실 점수를 생각하면 1순위에는 더 좋은 학교를 써야 했다. 보통 평양이나 수도권 대학은 1순위, 지방 주요 도시의 저명한 대학은 2순위였고 내가 가려고 했던 지방 교원 대학은 3순위 정도였다. 그러니 선생님께서도 1-3순위를 왜 다 같은 곳을 썼나며 의아해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이상하게 어린이 교사가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학교를 지원하고 교원 대학 시험을 보았다. 약 1주일 동안 면접을 포함해서 시험을 보았다. 이때 또다시 나는 부모님께 섭섭함을 느꼈다. 언니 때는 아버지께서 손수 여관방을 잡아서 1주일 동안 함께 지내며 언니를 챙겨주시더니 내가 시험 볼 때는 출장 가신다고 그냥 버려두셨기 때문이다. 출장 때문에 못 오신 것이긴 했지만, 그것이 아니어도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 확실했다. 특히 대학 면접에는 부모도 함께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나는 혼자 면접관 앞에 못 오신 부모님 사정을 거짓말로 만들어서 설명하기 급급했다. 화가 났다. 그렇게 시험을 보고 왔더니 아버지는 출장 갔다가 돌아오셔서 교원 대학 시험을 봤다고 나에게 화를 내셨다. 여자 대학생들이 다 그렇지만 그중에 선생이 제일 입이 여물고 고집스럽다고 하시면서 나를 나무라시고는 평소 입버릇처럼 “대학을 졸업해도 팔자 안 풀린다. 시집을 잘 가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버지께서는 출장을 다니시면서 해안지역에 처자들이 염전에서 소금 밀차를 끌면서 고생하시는 것을 보셨는데 그 여자들이 다 대학 졸업한 여자였다고 한다. 그런 광경을 보고 아버지는 ‘여자가 공부보다 결혼을 잘해야 하는데, 괜히 많이 배워서 입이 모질면 좋은 혼사 자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이셨던 것 같다. 10. 가난한 대학생 시절 어쨌든 나는 대학 합격했다. 교원 대학에서도 소학교 교사가 아닌 유치원 교사 공부를 했다. 학업 기간 2년에 훈련 6개월 해서 총 2년 6개월의 대학생활이었다. 북한은 대학 등록금은 없었다. 그대신 학교 기숙사 밥이 형편없어서 늘 배고팠다. 나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같이 지내는 친구들 중 농사짓는 시골이 고향인 친구들은 주말에 집에 갔다 오면 군것질거리로 옥수수나 콩 볶은 것을 한 움큼씩 가져오곤 했다. 그러면 그것을 숙소에서 나눠 먹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무리에 끼지 못했다. 집에서 챙겨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갔다 올 때마다 나는 그 조그마한 간식거리를 가져가지 못해서 그냥 울면서 왔다. 염치가 없어서 애들이 간식 나눠 먹을 때 공부만 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도 많이 못 만들었다. 이렇게 1년을 지내니 나중에는 그래도 자식이라고 어머니께서 조금씩 간식과 용돈을 챙겨주셨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내가 대학 공부 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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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3)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정재순 목사(鄭在淳, 1878~1948) 8. 안동교회 담임으로 칭빙(請憑) 받은 목사, 정재순 대구 3·8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루고 석방된 후 정재순 목사는 신정교회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미 요시찰 인물이 된 정재순 목사가 일제의 감시 속에서 계속해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것은 신정교회 입장에서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정재순 목사 자신도 교회에 부담을 주기 싫었을 것이다. 따라서 정재순 목사는 새로운 임지로 안동이 결정되어 안동교회로 전임하였다. ▲1913년 11월부터 공사가 착수되어 이듬해인 1914년 2월에 준공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신축 예배당으로 오늘의 100주년 기념관 바로 그 위치에 서 있었다. 예배당은 목조 함석지붕을 가진 건물로 반(半) 2층 구조형식으로 약 50~60평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동교회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정재순 목사를 청빙한 것은 큰 결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안동교회는 안동 3·18만세운동을 모의하고 실행에 옮긴 교회였다. 안동 3·18만세운동은 기독교와 안동교회의 위상을 높여주었지만 일제 탄압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구 3·8만세운동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인 정재순 목사가 안동으로 부임해 오는 것은 안동교회나 정재순 목사 개인적으로도 큰 부담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동교회는 주저하지 않고 정재순 목사를 담임으로 결정했다. 투철한 신앙, 영적 리더십, 다양한 목회 경험과 민족과 함께하는 애국정신을 가진 정재순 목사는 안동교회에 적임자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1922년 6월 14일에 안동교회 3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정재순 목사는 1925년 5월까지 만 3년 동안 사역을 잘 감당하였다. 9. 안동 땅을 갈아엎은 기경자(起耕者), 정재순 정재순 목사가 가지고 있던 최우선의 목회방침은 지역전도였다. 그는 마치 복음전파를 위해 안동에 온 것처럼 안동교회를 전도중심의 교회로 만들어 나갔다. 전도를 통해 복음이 척박한 땅인 안동이 영적으로 기경되기 시작하였다. 정재순 목사가 시무하던 시기는 처음으로 현지 교회인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이 널리 전파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정재순 목사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뿐 아니라 이미 복음이 전해졌지만 구원의 열매가 없는 땅에 전도인을 파송하였다. 그는 분명한 정책과 방법으로 지역전도에 매진했다. 그래서 그가 시작한 전도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또한, 정재순 목사가 추진한 전도는 무계획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전략적이었다. 지금까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는 우선으로 전도단을 보내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대중 집회를 가졌다. 그리고 전문적인 전도인을 파송하여 가가호호 방문하며 복음을 전했다. 뿐만 아니라 헌신적인 전도인들을 파송한 것도 정재순 목사의 전도전략이었다. 당시 안동교회 조사나 장로 중에는 전도에 헌신한 전문가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장로임직도 뒤로 미룬 채 전도하는 일을 가장 우선으로 감당했다. 또한, 당시 여자 성경학교의 학생들도 전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안동교회의 전도활동은 노회적으로도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1924년 5월 노회록에 의하면, “안동교회 부인들이 가사를 중단하고 전도에 힘써 많은 신자를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 결과 척박한 땅이 기경되었고, 구원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도의 결과로 호암교회(현 송현교회)와 수하리교회(현 수상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정재순 목사의 전도활동은 안동지역 복음전파에 변곡점이 된다. 정재순 목사가 안동에 와서 복음을 전파하기 이전은 선교사 중심의 전도였다고 할 수 있다. 안동선교부에 주재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주로 전도를 주도했고, 한국인 조사나 남·녀 전도인들은 소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정재순 목사의 부임은 이러한 전도의 패러다임(Paradigm)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한국인 목사와 성도들에 의해 지역전도가 계획되었고 진행되었다. 이후부터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교회 자체적으로 계획을 세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정재순 목사는 열정적으로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한 전도자였다. 그는 안동교회를 전도에 집중하는 전도중심의 교회로 만들었고, 이것은 안동교회의 부흥뿐 아니라 교회가 없던 안동 읍 외곽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0. 교회분립을 통한 부흥의 촉진자(促進者), 정재순 1914년 1월, 안동교회의 두 번째 목조 함석지붕 2층 예배당(현 100주년 기념관 자리)이 신축됨으로써 교회와 경북북부 지역은 영적 지형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교회 내적(內的)으로 넓은 예배 및 활동 공간의 확보로 인해 예배와 주일학교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부흥하고 있던 안동교회는 발상(發想)의 전환을 하게 된다. 안동교회는 설립된 후 10여 년 동안 계속적인 부흥을 이루었지만, 효과적인 안동 땅의 복음화를 위해 안동 읍을 세 개 지역으로 나누고 분가식(分家式)으로 교회를 분립(分立)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게 된다.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교회를 분립하기로 하고, 안동교회 교인들을 거주지에 따른 분가를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안동교회의 분립은 교회 내 분쟁(分爭)의 결과가 아니라 안동 땅의 복음화를 위한 자발적이고 창조적이며 아름다운 분리였다. 안동교회의 첫 분립 시도는 교회가 설립된 지 10여 년이 지난 후 시작되었다. 그 교회가 바로 안기교회다. 안기교회는 오늘의 안동서부교회다. 사실 안동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안기동 지역에 전도인을 파송하여 집중적으로 전도를 했고, 그 결과 정재순 목사가 시무하고 있던 1924년 1월 초가 6칸을 포함한 160평 대지를 매입할 수 있었다. 이 가옥을 안기지역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예배처소로 사용하고 안동교회 기도실로 명명했던 것이다. 안동교회는 주일 저녁과 수요일 저녁마다 조사, 장로, 집사를 안동교회 기도실에 파송하여 예배를 인도하게 함으로써 공식적인 교회가 속히 설립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 이때 봉사한 사역자들은 옥호열 선교사, 김익현 장로, 권점필·신석준 집사였다. 하지만 안기교회의 분립은 당시 안동교회 담임인 정재순 목사의 결단도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가 시무한 기간의 제직회록에는 안동교회 전도대의 활동보고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전도 결과에 따라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고 세우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이후 안기교회가 안동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분립하여 완전한 독립교회가 된 것은 1932년 8월이었다. 이때 1924년에 구입한 초가 6칸 가옥을 매도한 후 안기동 130번지의 100평의 대지 위해 30평 규모의 예배당을 새롭게 건축하고 안기교회라 칭하고, 그해 12월 초대목사로 이원영 목사가 부임하게 되었다. 이처럼 정재순 목사는 누구보다 안동 땅에 복음의 씨가 굳게 뿌리를 내리도록 헌신한 사람이다. 그는 안동읍의 부흥을 누구보다 소망하면서 안동교회의 분립을 결정하고 인적자원과 재정을 아낌없이 지원했던 인물이었다. 그 결과 안동읍 최초교회인 안동교회의 독점적인 지위는 사라지고 안동의 영적 부흥을 위한 선의의 경쟁시대로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안기교회의 분립을 통해 안동 땅의 부흥이 촉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재순 목사는 분립 개척을 위해 1924년 안기동에 초가 6칸을 매입, 예배처소(안동교회 기도실)를 세운다. 이후 1932년 안기교회(현 안동서부교회)가 독립교회로 세워진다. 사진은 현재 안동서부교회 모습(이정우 목사 시무).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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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2)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 정재순 목사 (鄭在淳, 1878~1948) 4. 선교사의 동역자인 조사(助事), 정재순 부해리 선교사의 전도로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된 정재순은 기독교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다가 교회를 돌보는 조사로 사역하게 된다. 1908년에는 방혜법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상주 속산교회, 사산교회, 금혼교회, 등 상주지역에서 시무했다. 1909년에는 안의와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경산 삼복교회(현 경산교회), 사월교회, 전지교회(현 남산교회), 금곡교회, 복사교회(현 자인교회)를 섬겼으며, 1912년 경산 사월교회, 전지교회, 복사교회, 대구신정교회(현 서문교회)에서 조사로 활동했다. 그 당시 조사(助事, Helper)는 초기 한국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들은 선교사의 가옥,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나 병원에서 일했으며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교사들의 따뜻한 사랑과 헌신을 발견하고 최초의 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적으로 복음전파에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선교사들의 통역자 역할을 했고, 선교사 대신 일정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훗날 많은 조사들이 교회를 전적으로 섬기는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고 목회자가 되었다. 장로교 선교사의 조사요 지역 교회의 장로로 수년 동안 이미 교회사역에 충성을 다하고 있던 정재순도 이 공식에 예외 없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5.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노(老)학생, 정재순 정재순은 1912년 봄, 35세 나이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정재순은 1912년 3월 6일 대구남문교회당에서 모인 제1회 경상노회에 입학을 청원하였고, 허락을 받았다. 이때 경상노회에 신학입학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은 사람은 정덕생, 김기원, 서성오, 김공명, 박영조, 정재순, 김상삼, 박성애, 박덕일, 김응진 제씨였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정재순은 3년간의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1915년 6월 15일 평양신학교 제8회로 졸업하였다. 평양신학교는 ‘신령(神靈)한 목사’라는 교육목표처럼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1901년 평양 대동문 옆 마포삼열 자택에서 개교되었다.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폐교되기까지 34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37년 동안 총 79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제8회 평양신학교 졸업생은 28명이다. 이때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됐는데, 이자익, 방효원, 정재순 제씨가 바로 그들이다. 1915년 제8회 평양신학교 졸업 앨범으로 사진 중앙에 교사로 수고한 선교사들이 있고, 그 주위로 졸업생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정재순 목사는 맨 아래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이다. 6. 대구·경북지역의 복음 전도자(前導者), 정재순 정재순 목사는 조사로 사역할 때도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했다.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칠곡 지역에 설립된 16곳 교회 중 2곳이 정재순 목사가 개척한 교회이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정재순 목사는 1915년부터 1922년까지 대구 신정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면서 대구 침산교회, 남산교회, 대구 범어교회에서도 사역을 감당했다. 1919년 대구 3·1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어 있다가 출옥한 후에는 신정교회를 사임하고 1922년 안동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5월 안동교회를 사임하고 다시 대구로 돌아온 정재순은 1925년부터 1938년까지 대구 동산병원(현 대구 동산의료원) 직원 전도회 담당 목사로 시무했다. 비교적 주일에 자유로웠던 정재순 목사는 한 교회에 매여 있지 않고 약한 교회들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가 섬긴 교회는 경산 고모교회(폐지), 영천 사창교회(폐지), 영일 기계교회, 달성 덕지교회, 금릉 봉곡교회, 성주 구릉교회, 영천 삼귀교회(폐지), 청도 예리교회, 칠곡 금암교회(현 동명교회), 달성 조암교회(폐지), 달성 방촌교회, 청도 구촌교회(폐지), 청도 대천교회, 영천 대제교회(폐지), 칠곡 기성교회, 월성 입실교회, 상주 양촌교회, 경주 유담교회, 경산 경동교회, 고령 유동교회(현 운수제일교회), 외동교회(폐지), 군위 삼산교회(폐지), 고령 평지교회(폐지), 선산 석우교회, 청도 음지교회(폐지), 상주 화령교회, 의성서제교회, 오로교회 등이다. 이후 정재순 목사는 1938년부터 1946년까지 신정교회에서 두 번째 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한편 정재순 목사는 기존의 경상노회에서 분리된 경북노회에서 1919년, 1939년, 1945년 세 번에 걸쳐 노회장을 역임하며 대구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로 영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7. 대구 3·8만세운동의 주역(主役), 정재순 대구지역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 3월 10일, 3월 30일에 걸쳐 총 세 차례 있었다. 당시 기독교 지도자인 남성정교회의 이만집 목사와 신정교회의 담임목사이며 당시 경북노회장인 정재순 목사, 남산교회의 김태련 조사, 백남채 장로, 계성학교 교감선생인 김영서 등이 시위를 주도했다. 이 만세운동으로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는데, 당시 동원 담당이었던 정재순 목사도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정재순의 아들인 정원조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정원조는 당시 계성학교 학생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6개월 동안의 징역으로 오래 살지 못하였다. 부자가 함께 3·1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는 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남을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정재순 목사는 일제 말엽, 친일(親日)에 가담하게 된다. 1938년 6월 중순경, 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자발적인 총후봉사활동을 내세우며 조직한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간섭과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던 1939년을 지나면서 노회장이란 직함으로 인해 이 단체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활동은 정재순 목사의 분명한 과오이지만 그는 회심한 이후 40여 년 동안 신앙, 사역과 헌신을 통해 교회와 민족과 역사에 긍정적인 기여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초창기 대구에 소재한 교회의 지도들로 좌측으로부터 박영조, 이만집, 김기원, 정재순 목사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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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거짓말?신훈식 교장 상주동부초등학교 얼마 전의 일이다. 한 선생님께서 수업을 마치고 1층의 교무실로 가기 위해서 계단을 내려가던 중, 아이들 역시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가서 조금이라도 더 놀기 위하여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선생님은 “얘들아~! 넘어지면 다친다. 천천히 내려와!”를 연신 반복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채 만 채하고는 계속 뛰어 내려왔다. 그중 한 학생은 친구들의 몸통을 손으로 다다다 치면서 내려오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1층 가까이 내려와서 넘어졌기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고 멍이 들 정도의 타박상만 입었다. 문제는 이튿날 발생하였다. 아이의 멍든 모습을 본 부모가 학교에 찾아와서 강력하게 항의를 하며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어떻게 선생님이 아이의 발을 그것도 계단에서 걸 수 있냐?”고 하면서…. 집에서 아이의 멍든 모습을 본 부모님이 아이에게 다그치자 그만 조심성 없이 다녔다고 혼날까 봐서 선생님이 계단에서 발을 걸어 넘어졌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물론 증인인 다른 아이들과의 삼자대면으로 거짓말이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들리는 말로는 학교가 아이들과 짜고서는 자기 아이에게 덮어씌웠다는 것이다. 사과하는 것도 부족할 판인데 뻔뻔한 정도가 도를 넘는다. 더더욱 슬픈 사실은 학부모에게 멱살 안 잡히고 머리채 안 잡힌 것만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자조(自嘲)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학부모교육을 할 때면 강조하는 내용이 있다. 자녀의 이야기를 100%로는 믿지 말라는 것이다. 100% 믿게 되면 큰 실수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녀의 거짓말하는 습관을 바로 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위의 부모 역시 자기 자녀의 말만 믿고서 여러 사람을 힘들게 했음은 물론이고 이 사실을 아는 모든 이에게 일방적인 것이겠지만 부끄러움을 당했을 것이다. 집에 가서 학교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고 이야기를 하면 부모님에게 다시 혼났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 밖에는 없다. 이 아이가 자라서 얼마나 무서운 인물로 성장할지가 걱정되고 두려울 뿐이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크든 작든 한 번쯤은 거짓말을 해보았을 것이다. 거짓말을 할 때는 나 이외는 절대 진실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이는 나만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당사자인 상대방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거짓을 말하므로 죽었으나 다윗은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悔改)를 하였기에 비록 벌은 받았지만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다방과 카페의 차이를 아시나요?”라고 물으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답을 하는 이는 거의 없다. 다방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서로를 볼 수 없게끔 차단되어 있음에 반하여 카페는 서로를 볼 수 있다. 내 안의 내면도 타인이 볼 수 있게끔 개방한다면 거짓이 없는 나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숨기면 숨길수록 거짓을 만들게 될 것이며 이는 죄이다. 익명으로 말을 할 때 많은 사람은 무례하게 얘기를 한다. 하지만 실명으로 말을 하게 하면 점잖아진다. 나 이외에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한다고 확신할 때에 숨기고 거짓을 말하게 된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고 언제든지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죄를 짓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거짓말의 대가로 받는 징계가 너무 가볍기 때문이다. 학교는 물론이고 가정에서부터 교육이 무너진 것도 현실이다. 아이들을 금쪽같게만 생각하지 초달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가벼운 징계만으로도 반듯하게 키울 수 있는 자녀와 학생을 그냥 내버려 둠으로써 구불구불하게 자라도록 둔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아니 포크레인으로도 못 막는다. 그 결과는 우리 사회가 막대한 비용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는 다시 안아야 할 재앙이다. 세계에서 사기범죄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고 지금도 뉴스를 틀면 거짓말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 거짓말의 근원은 욕심이고 거짓말을 가볍게 생각하는 이 나라는 결국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가 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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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3)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9. 이대영, 중국선교를 향한 부르심에 순종하다 이대영 목사는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교회에 충성을 다하던 중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국의 부름을 받고 중국 산동 반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1913년 한국교회 최초로 해외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목사는 중국 산동지방 선교사로 파송된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현지 부적응과 건강문제로 1917년 귀국하였다. 위기에 처한 선교를 위해 총회는 1917년 홍승한과 방효원을 산동에 다시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1918년 박상순, 1922년 이대영, 1931년 김순호, 1937년 방지일을 산동에 파송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초기에 파송된 선교사는 이대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북출신이었다. 따라서 이대영은 영남지역에서 세계에 파송한 첫 선교사인 것이다. 이대영 목사는 우선 가족을 두고 홀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하였다. 평북노회 여전도회는 이대영 선교사의 선교비를 후원함으로써 선교에 동참하였다. 그는 래양에 도착한 후 10개월 동안 언어공부와 현지적응에 열중했으며, 이듬해인 1923년 4월 즉묵(卽墨)을 선교지로 정하고 한국을 떠나 중국에 도착한 가족과 함께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중국선교에 헌신하고자 중국 교역자 모임에 참석할 뿐 아니라 경안노회에서 이명하여 중국 산동성 중회기독교회 교동(嵺東)노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현지인과의 이질감을 불식하기 위해 항상 중국인 옷을 입고 중국인들과 더불어 생활했으며, 특히 표준중국어와 산동어를 익혀 중국말로 설교할 수 있을 즈음에는 왕성한 전도와 교회개척에 전력투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회의 심각한 재정압박과 선교지의 어려움으로 선교사의 소환 문제가 총회의 중요한 안건으로 상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시 귀국한 이대영 선교사의 끈질긴 설득으로 1925년 9월 제14회 총회는 이대영 선교사의 연임을 결정했다. 이에 힘을 얻은 이대영 목사는 즉묵으로 돌아가 조선인 교회를 돌보며 1927년 8월 즉묵예배당과 전도기관 건물을 준공할 수 있었다. 이대영 목사는 뜨거운 복음의 열정으로 교회개척과 돌봄 사역, 전도지 배부 및 순행, 매서사역, 강연 및 사경회 인도 등 즉묵, 궁가장, 박자, 오산위, 대인관, 지방, 풍성, 곽리 등 즉묵현 주변 8개의 지방교회들을 돌보았다. 또한 파송 받은 지 6년 동안 열심히 사역을 감당한 결과 1928년 11월 그가 속한 교동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되었고, 한국장로교회가 1923년 외국에 최초로 설립한 성경학교인 내양화동 성경학교 교장으로 사역하였다. 이대영은 선교사역을 총회에 보고하기 위해 가족을 남겨 둔 채 홀로 1948년 7월 일시 귀국했다. 하지만 총회를 마치고 출국을 기다리던 중 10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을 세우게 되어 중국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국내 중국인 교회인 중화기독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기도 했다. 그는 다시 중국에 선교의 문이 열릴 때까지 당분간 선교사 신분을 유지한 채 국내에서 순회사역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54년 4월 중국에 남아있던 가족이 무사히 귀국하였고 영락교회에서 이대영 선교사 선교 33주년 기념 및 가족 환영예배가 성대히 거행되었다. 10. 이대영, 선교지의 동역자와 함께 전력투구하다 이대영은 동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고 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총회에서 파송한 여러 선교사들과 동역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1937년 파송되어 산동에 온 방지일 목사와 무려 10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중국선교에 전력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후에도 이대영 목사는 방지일 목사와 동역을 통해 현지에 거류하고 있던 동포들을 도와 무사히 한국으로 귀환할 수 있게 했다. 이때 이대영 목사는 한국교민회를 조직하여 교류민 단장을, 방지일 목사는 교포중학교 교장을 하였다. 1913년 산동반도 선교가 처음으로 시작된 이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로부터 파송된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1919년의 교세는 예배처소는 6곳, 학교는 3개교, 49명의 세례교인, 학습이 40명, 평균 출석 60여명의 교회로 성장했다. 1922년 6월에는 이대영이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1923년에는 선천에서 일하던 의사인 주현칙 장로가 합류해 래양에 병원을 개설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늘어나고 사업이 확장되면서 산동선교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다. 1920년 래양에 새 교회당 건물을 마련했으며, 1921년부터는 래양에 성경학원을 설립하여 본토인 목회자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이대영 목사는 산동에서 사역할 당시 동역자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많이 줄 정 도로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성경학자로 교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반쉰청 목사, 행정가인 쇼요섭 목사와 동역함으로써 중국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갔다. 특히, 그는 현지인을 목회자로 영성하고 세우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 결과, 1929년에는 산동선교의 결실로 얻은 중국인 류수파(劉書法)가 목사로 장립되기까지 했다. 류수파는 방효원 선교사가 제로(濟魯)대학에 보내 공부시키고 목사로 키워 중국교회를 위해 동역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이대영 목사는 범순청 목사와 서로의 선교담당지역을 같이 돌보며 협렸했다. 이대영 목사는 현지인 리더와 동역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피선교지에서 주종의식을 가지고는 결코 복음의 확장성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현지인들을 교육하고 양육하여 현지인 리더십을 세우는 일에 누구보다 우선했고, 그 결과 산동지역의 교회들은 선교사들과 현지인 지도자들이 대등한 관계에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앞줄 왼쪽부터 반쉰청 목사, 쇼요섭 목사, 류수파 목사 뒷줄 왼쪽부터 이대영 선교사, 방효원 선교사, 박상순 선교사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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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제일교회, 추석맞이 환경미화원 위로행사경주제일교회(정영택 담임목사)에서는 지난 9월 20일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을 앞두고 아름다운 경주의 도시 미관 정비에 애쓰는 환경미화원들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하며 위로행사를 열었다. 올해로 16회째를 맞은 이날 위로행사에는 주낙영 경주시장을 비롯해 경주시 환경미화원과 제일교회 성도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어린이 재롱잔치, 위로의 노래 등의 공연이 이어졌고, 경주제일교회의 마음을 담은 소정의 기념품 전달과 식사 나눔 시간을 가지며 서로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경주제일교회는 평소에도 지역의 어려운 이웃과 소외계층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특히 2천년 고도 경주의 경관 조성을 위해 애쓰는 환경미화원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매년 위로행사를 갖고 있다. 주낙영 시장은 “어려운 근무여건 속에서도 아름답고 살기 좋은 경주를 만드는데 노력해 온 환경미화원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며, “가장 일찍 새벽을 여는 미화원의 노력이 역사문화관광도시 경주를 다시 찾고 싶은 도시로 각인시키는 데 큰 요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경주제일교회의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과 배려에도 깊이 감사드리며, 더불어 함께하는 행복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다 함께 노력해 주길 부탁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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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1)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887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출생한 이대영 목사는 시대를 앞서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 힘든 유학이 강한 마을과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혹독했다. 그는 더 이상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객지로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일정한 훈련을 거친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향으로 보내셨고, 뛰어난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 후 전도인, 조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기독청년면려회와 주일학교를 통해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갈 뿐 아니라 지역복음화와 교회 부흥을 선도했다. 이후 총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안동을 떠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 선교사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한 이대영은 그 땅에 머무는 동안 중국인들과 함께 중국인처럼 살았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선교를 포기하고 1955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이대영 목사는 33년 동안 중국인을 동족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서 산동반도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게 하였다. 그후 그는 오직 하나님 나라, 교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1968년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선배이다. 1. 이대영, 금당실 마을에서 출생하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손인 이대영은 1887년 4월 23일,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李裕成)과 김도혜(金道徯)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대영이 출생한 마을은 금당실로 불러졌는데 선교사가 동네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다. 이대영은 괴당교회가 설립될 당시인 1907년 경, 복음을 소개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과 함께 1910년 영일군 흥해면으로 이사했다. 그는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선교사로부터 신앙훈련과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후예로서 비록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품으셨고, 훗날 중국 땅에서 복음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이대영 목사의 가족사진 2. 이대영,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다 안동을 포한한 경북북부지역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93년 배위량 선교사에 의해서이다. 이후 1902년 3월에 안의와 선교사가, 1903년 봄에 방위렴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가 안동을 직접 방문해 복음을 전했다. 특히, 부해리 선교사는 1899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미국 북장로교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99년 10월 26일 대구에 도착, 초창기 대구·경북 지역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추방되기 까지 40여 년 동안 한국선교에 평생을 바쳤다. 부해리 선교사를 포함한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의 결과,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연회보고에 의하면 경북·대구 지역 7개 고을에서 12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1905년에는 20개 고을에 8개 교회, 2명의 세례교인, 19명의 학습교인, 79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이대영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로 나뉘어진다. 우선 박용규는, 1907년 경 이대영이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소개받고 예수를 믿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미 예천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인 나만기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복음을 들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이대영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당시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있던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부해리 선교사와의 역사적 만남으로 이대영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됐으며, 이후 전도인, 조사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한 이후 한국교회와 중국선교의 거룩하고 위대한 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3. 이대영, 경북 북부지역 전도인·조사가 되다 복음을 접한 뒤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흥해로 이사한 이대영은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인 전도인 훈련을 받게 되었다. 특히 대구선교부의 중심교회인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의 전신)에서 열렸던 겨울남자성경반에서 수 년 동안 수학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목회자로서의 전문적인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선교사의 지도와 신학훈련을 받은 이대영은 전도인으로 본격적인 전도사역을 하게 되었다.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훈련받은 6년 여 동안 이대영은 이미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고, 경북노회는 그를 유급 전도인으로 인정하고 복음전도사역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고향인 금당실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예천 신전교회를 왕래하며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오게 됨으로써 신전교회가 부흥했다. 신학 기초과정을 거친 이대영은 목사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는 당시 규정에 따라 목회자 수업을 위한 문답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경북노회에서 목사후보생고시를 치러야 했으며, 1916년 6월 대구남성정교회에서 개회된 제1회 경북노회에서 평양신학교 입학을 허락받았다. 신학 입학을 허락받은 후 처음으로 이대영이 섬긴 교회는 경주군 외동면 말방리의 장산(長山)교회다. 이 때 이대영은 전도인에서 조사신분으로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4. 이대영,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하다 이대영은 1917년 5년 과정의 평양신학교에 30세에 입학하여 목사를 위한 수학을 시작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 10살 난 아들 이 있었는데, 평양에서 공부하는 기간 동안 가족들은 섬기는 교회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대영은 혼자 기숙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생활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후 이대영은 신학공부의 적응을 위해 섬기던 장산교회를 1917년 사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18년 다시 부임하여 장산교회를 섬겼다. 평양신학교 졸업반인 1920년 이대영은 이만집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대구 남성정교회 조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이만집 목사는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된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조사로 청빙을 받은 이대영은 실질적으로 대구제일교회 전신(前身)인 남성정교회를 담임하게 된 것이다. 남성정교회는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교회로 이미 이 지역의 중심교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동년 12월 2일, 17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평양신학교 제14회로 졸업하고, 이듬해인 1921년 1월 12일 대구동산성경학원에서 개회된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 임직예식을 마친 이대영 목사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청빙허락을 받아 부임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1921년 6월 15일 개회된 제10회 경북노회에 정식 노회원으로 참석하여 본격적인 노회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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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4·끝)김 승 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영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9. 한국교회의 목사 대가족 · 명문가문을 이룬 사람, 김영옥 김영옥 목사의 아들 故 김은석 목사 김영옥 목사의 손자 故 김형태 목사 김영옥 목사 가문은 목사 대가족과 명문가문을 이루었다. 1대 김영옥 목사로부터 4대에 걸쳐 무려 9명의 목사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1대 김영옥 목사, 2대 김영옥 목사의 장남 김은석 목사, 3대 김은석 목사의 자녀인 김형칠 목사, 김형일 목사, 김형태 목사, 김형달 목사, 김형숙 목사, 4대 김형규 목사, 김대규 목사 후보생 등 4대에 걸쳐 9명의 교역자가 배출되었다. 김영옥 목사의 장남인 김은석 목사는 193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풍기성내교회(1909년 설립)를 담임으로 섬겼다. 김영옥 목사도 풍기성내교회 3대 담임목사로 섬긴 적이 있었는데, 부친의 뒤를 이어 그는 4대 담임목사로 5년 동안 풍기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성내교회를 사임한 후 일본 나고야 한인교회에 부임하여 나고야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목양했다. 하지만 1941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던 날 새벽, 나고야 민족주의 및 종교그룹 사건인 조선독립단사건에 연류 되어 일본 경찰에 검거당해 1년 넘게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1944년 8월에는 여운형이 중심이 된 건국동맹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르면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해방과 함께 출옥한 김은석 목사는 경북 문경으로 내려가 정치일선에 나섰다가 낙선한 후 다시 목회현장으로 돌아왔다. 그 후 김은석 목사는 자신이 여러 차례 감옥생활을 경험한 탓으로 수감자를 전도하는 사역에 헌신했다. 1956년 김천의 소년원 교화사로 시작하여 1966년 정년으로 퇴임하기 까지 10년을 수형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사명을 감당했다. 정년퇴임 후에 인천에 거주한 김은석 목사는 계속해서 인천 소년원생들의 선도에 힘쓰면서 별세하기 전 까지 25년 동안 교도소 전도에 온 힘을 다 쏟았다. 2대 김은석 목사 자녀들은 대부분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김은석 목사의 자녀는 모두 6남 1녀로 이중 5형제가 목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더욱이 외동딸의 남편인 사위까지도 목사였다. 장남인 김형칠 목사는 서울 신학대학교를 나와 부산노회장을 역임했으며, 2남인 김형일 목사는 고려신학교 출신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교를 거쳐 롱비치대학교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현지 한인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3남인 김형태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교, 피츠버그 대학교를 거쳐 연동교회를 섬겼다. 4남인 김형달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과 미국 풀러신학대학교를 거쳐 미국에서 외항선원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5남인 김형숙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를 졸업하고 미국 볼티모어 한인교회를 섬겼으며, 6째인 외동딸 김순자의 남편인 이성식 목사도 흑석동 교회에서 목회했다. 막내인 김형준은 연세대학교 신학과 출신으로 목사지망이었으나 전공을 경영학으로 바꿔 미국으로 건너가 장로로 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풍성한 3대와는 달리 4대에 와서는 1명이 목회자로 살고 있다. 장남인 김형칠 목사의 아들인 김형규 목사는 미국 퀸즈연합장로교회를 섬기며 목사의 길을 걸었다. 김형태 목사는 4대에 걸친 목사 집안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 대해 “목사는 다른 직업과는 달리 무언가 남다른 ‘어떤 소명의식’이 없어서는 안 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 고귀한 소명이 형제 모두에게 고루 나눠진 것을 우리 가문에 대한 하늘의 축복으로 믿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김형태 목사는 연동교회가 세워진 지 73년 후인 1967년, 연동교회 제5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볼 수 있다. 연동교회 출발에 큰 공(功)을 세운 조부 김영옥 목사(당시 조사의 신분)의 뒤를 이어 손자인 김형태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이다. 그는 1989년 조기 은퇴하기 까지 22년 동안 연동교회와 총회, 그리고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할아버지가 전도한 사람들에 의해 개척된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을 때 손자의 심정이 어땠을까? 아마 감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교회 130년 역사 가운데 다시 배출되기 힘든, 그러나 한국교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고 까맣게 잊혀진 최고의 명품 목사 중의 한 분인 동시에 그의 후손들은 신앙의 명문가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10. 아들과 손자를 돌보고 그의 사역을 도운 할아버지, 김영옥 김형태 목사에 따르면 조부인 김영옥 목사는 매우 가정적인 분으로 8명의 손자를 친히 키우셨다고 기억한다. 부친인 김은석 목사는 교회 일이나 정치에는 열심이었지만 가정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에 조부인 김영옥 목사가 거의 모든 일을 맡아 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실제로 광복 후 김은석 목사가 건국운동을 위해 서울로 상경한 다음 김영옥 목사는 김은석 목사 가정을 인솔해서 문경으로 이사할 정도로 책임감이 강했다. 한편, 김은석 목사는 풍기성내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을 때 전임자였던 부친 김영옥 목사와 함께 6개월 여 동안 동역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김영옥 목사는 아들의 목회를 염려하면서 그의 목회사역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 결과 풍기성내교회는 안정적으로 리더십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었다. 또한, 김영옥 목사는 마지막 목회지인 의성 삼분교회에서도 장손인 김형칠이 경성신학교를 졸업하고 삼분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시작할 때 장손의 목회를 도왔다. 이듬해에 발발한 6 25 한국전쟁으로 피난 갔다가 1951년 삼분으로 돌아온 후 동년 5월 10일 김형칠이 목사 장립을 받았다. 장손이 목사로 임직했을 때 조부인 김영옥 목사는 얼마나 기뻤을까? ▲1941년 안동교회 본당인 석조예배당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김영옥 목사는 당시 안동교회 6대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다. 중앙에 김 목사 부부와 장남 김은석 목사 부부, 그리고 장손 김형칠 목사 및 8남매를 볼 수 있다. 한국 땅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84년 4월 5일이다. 복음의 씨가 뿌려진 지 67년이 경과한 1951년 5월 10일, 직계로 3대 목사 가정이 탄생한 것이다. 장손이 목사가 된 후 김영옥 목사는 1952년 3월 27일 81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당시 삼분교회 당회장 직분으로 세상을 떠나시는 날 아침 교회 장로들을 사택으로 불러 “간밤에 하늘에서 불자동차(?)가 내려왔는데 빈자리가 하나 있어 아마도 내가 탈 자리인 것 같더라. 내 어린 손자 형칠 전도사의 목회를 잘 도와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장로들이 나간 후 자리에 누우셔서 조용히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셨다. 마지막 하늘나라에 가는 순간까지 김영옥 목사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책임을 감당한 자애로운 분이었다. 김영옥은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교회에서는 선배목사요 전임교역자로 후배목사와 후임교역자에게 교회를 잘 섬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믿음의 선배였던 것이다. 결론: 거룩한 흔적을 남긴 위대한 사역자, 김영옥 목사 김영옥 목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일평생 동안 복음전도와 교회 목회에 전념한 목회자들의 롤 모델(Role Model)과도 같은 분이었다. 따라서 경상북도 북부지역과 그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초대담임인 김영옥 목사는 당연히 존경받아야 하고 기억되어야 할 믿음의 선배인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단 한 번도 예수님을 실망시키지 않았 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았다. 교회에서는 매서인으로, 조사로, 영수로, 장로로, 그리고 목사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또 헌신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또한 하나님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 결과 일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품에 안겼다. 김영옥 목사는 일제 강점기, 광복, 건국, 6·25 전쟁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의 전 생애는 믿음 없이는 결코 설명될 수 없다. 김영옥 목사는 교회에서는 사랑의 목자였고, 지역 사회와 국가를 사랑한 공의의 지도자였다. 날마다 경건한 신앙생활을 통해 얻은 영적 통찰력과 지도력은 교회나 사회적으로나 지도자가 되게 했다. 더욱이 그는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모 교회와 같은 교회들을 든든히 세움으로써 교회가 지역사회의 중심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했다. 그가 섬긴 안동교회, 사월교회, 포항제일교회, 경주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 풍기성내교회 등은 설립된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역교회의 중심교회로서 영적인 리더십을 갖고 있는 동시에 지역사회를 잘 섬기는 교회로 소문나있다. 김영옥 목사에게는 교회를 섬기는 일이나 국가를 위한 일이 모두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긴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요 위험을 무릎 쓰고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사회 지도자요, 독립운동가요 애국자였다. 그 결과 그의 자리는 늘 고난의 자리였지만, 동시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자리였던 것이다. 우리는 충성스럽게 거룩한 사역을 감당한 김영옥 목사와 같은 믿음의 선배가 그리운 혼란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 누구보다 교회를 사랑하고 민족과 국가를 사랑했던 김영옥 목사와 그의 거룩한 사역이 그리운 시간이다. 한국교회가 김영옥 목사의 믿음과 혜안(慧眼), 그리고 용기와 끈기를 기초로 한 거룩한 삶을 믿음의 표상으로 삼을 때 거룩한 교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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