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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7)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7) 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 8. 안동지역의 첫 한국인 목사, 김영옥 9. 안동지역 초기 교회음악 지도자들 ...............................................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8. 안동지역의 첫 한국인 목사, 김영옥(金泳玉) / 1911년 김영옥(1871~1952)은 1871년 4월 12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했다. 18세가 되던 1888년, 그는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이민 갈 계획을 하던 중 평산 누님댁에 갔다가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이때 세례를 받은 김영옥은 수년 동안 선교사의 도움으로 성경을 공부했는데, 1년 만에 한문 신·구약 성경을 모두 읽고전도법과 장로교회, 그리고 간단한 영어공부도 했다. 또한,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라고 할 수 있는 평양신학교 성경훈련반에서 매서인(賣書人) 집중교육을 받았다. 그 결과 김영옥은 공식적인 매서인으로 사역할 수 있었다. 1893년 모삼열 선교사의 조사가 된 김영옥은 서울 종로에서 전도를 통해 회심한 성도들이 연동교회를 설립하도록 도왔으며, 승동교회와 동막교회 설립에 협력하다가 경기 동편과 황해도 이남으로 순행 전도하여 백천, 평산, 금북, 금성, 양구, 화천 등지에 교회들을 설립했다. 그는 1898년에는 모삼열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고 개척한 고향 백천군 운교교회 영수와 장로로 섬겼다. 김영옥은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한국교회 초기 매서인과 조사, 그리고 영수요 장로로 초기 한국교회의 평신도 지도자였던 것이다. 조사 김영옥의 사역은 1903년부터 시작된 웰번 선교사와의 동역으로 빛을 보게 된다. 강원도 철원, 춘천 등지에서 전도하고 철원읍교회를 설립했으며, 1907년 원주읍교회 조사로 교회를 섬겼다. 1909년 11월 웰번 선교사와 함께 안동으로 이사한 김영옥은 안동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을 순방하며 전도했으며,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1909년 8월 둘째 주일 설립)의 예배를 인도했다. 특히 김영옥은 만 30세에 평양신학교(1901년 개교)에 입학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만 40세인 1911년(제4회)에 졸업하고, 1911년 9월 대구제일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영옥은 안동교회의 초대목사인 동시에 경북 북부지방 최초의 한인 목사가 되었다. 김영옥 목사의 뛰어난 영적 지도력은 안동지역의 복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김영옥 목사가 담임으로 안동교회를 섬겼던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안동교회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1911년 오늘의 초등학교인 계명학교를 설립했으며, 1913년에는 김병우를 장로 장립함으로써 안동지역 최초로 당회가 구성되었고, 주일학교와 여름성경학교를 조직하여 어린이들의 신앙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13년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도사경회를 개최함으로써 여성들의 신앙교육에도 집중했으며, 1920년 안동기독청년회를 조직하고, 1921년 전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조직함으로 청년의 신앙교육에 큰 획을 그었다. 안동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에 단 3번 예배당을 준공했는데, 김영옥 목사가 시무하던 기간 동안 두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첫 예배당은 그가 담임조사로 시무할 때인 1910년으로 16칸 ‘ㄱ’자 예배당을 건축했는데, 이때 지방 순회 때 타고 다니던 당나귀를 팔아 건축헌금에 보탰다고 한다.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1914년 초준공되었는데, 이때도 김영옥 목사는 선교사가 사준 가옥을 팔아 헌금했을 정도로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분이다. 아울러 김영옥 목사는 안동지역과 경북 북부의 초대 교회들을 든든히 세운 교회지도자였다. 영주, 지곡, 명동, 풍산, 수동 등 교역자가 없는 미약한 교회들의 순회목사로 사역함으로써 이들 교회가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는 안동교회를 떠난 후에는 경산 사월교회, 포항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 경주제일교회, 풍기 성내교회 등 경북 북부지역의 어머니(母) 교회와 같은 교회들을 담임함으로써 이들 교회가 안정적으로 지역복음화의 중심역할을 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김영옥 목사는 평생을 복음전도와 교회 목회에 전념한 목회자 중의 롤모델(Role Model)과도 같았다. 그는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여러 번 검속과 체포 등으로 고난을 당했지만, 다시 교회로 돌아와 목회에 충실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광복, 건국, 전쟁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기에 교회의 목사로서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김영옥 목사를 통해 한국교회에 명문 신앙가문이 세워졌다. 손자인 김형태 목사에 따르면 1대인 김영옥 목사, 2대인 김영옥 목사의 장남인 김은석 목사, 3대인 김은석 목사의 자녀인 김형칠 목사, 김형일 목사, 김형태 목사, 김형달 목사, 김형숙 목사, 4대 김형규 목사, 김대규 목사 후보생 등 4대에 걸쳐 9명의 교역자가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교회 130년 역사 가운데 다시 배출되기 힘든, 그러나 모두에게 까맣게 잊혀진 최고의 명품 목사라고 할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안동교회가 두번째로 준공한 목조 함석지붕 반(半) 2층 예배당을 배경으로 서 있는 당시 교회 지도자들. 앞줄 왼쪽부터 크로더스 선교사, 인노절 선교사, 김영옥 목사, 웰번 선교사로 추측됨. 뒷줄 왼쪽 첫번째는 김병우 장로, 나머지 분들은 당시 시무장로인 이중희·엄응삼 장로가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분들도 평신도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사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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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6)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6) 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 7. 안동의 첫 근대병원, 성소병원 8. 안동지역의 첫 한국인 목사, 김영옥 ...............................................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7. 안동의 첫 근대병원, 성소병원(聖穌病院) / 1909) 원주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플레처 선교사가 임지를 안동으로 옮긴 후 1909년 현 안동교회 부지내의 진료소에서 60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성소병원은 1909년 10월 1일을 개원일로 잡고 있다. 1910년 플레처는 대구로 떠나고 대신 안동으로 온 존슨 선교사는 안동에 석 달 반을 머물면서 1,300명의 환자를 돌봤다. 1911년에 다시 안동으로 온 플레처 선교사는 선교지 부근에 커다란 한옥을 매입, 한 방은 객실로, 두 세개 방은 환자의 병실, 대기실, 욕실, 진료실로 사용했다. 특히 뉴욕의 쇼플러(S.F.Schauffler)가 후원한 1만 달러로 금곡동 177번지에 가로 21.3미터 세로 10.7미터, 3층 병원 건축이 시작되었다. 철재와 철빔으로 건물의 뼈대를 세웠고, 건물의 벽은 2층과 3층은 붉은 조적으로, 1층은 회색 조적으로 마감되었는데, 1층에 위치한 입구는 흰색이 칠해진 나무로 되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914년 11월 14일 준공되었는데, 병원 이름은 쇼플러의 부친을 기념하여 ‘코넬리우스 베이커 기념병원’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안동성소병원은 정식 병원이 되었다. 병원 준공과 함께 시작된 성소병원은 초현대식 시설을 갖추었다. 창문에는 커튼이 쳐지고 방충망이 설치되었다. 환자 대기실, 약국, 실험실도 있었고, 여성병동과 주방, 저장실, 벽장, 기계실도 갖추었다. 하지만 성소병원의 운영은 쉽지 않았다. 1910년부터 진행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1920년부터 시작된 산미증산계획, 1920년대에 계속된 한재와 병충해로 인해 농민들의 생활은 최악이었다. 1920년에서 1930년대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농촌의 경제상황이 몹시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1927년 2월에 성소병원 의성 분원을 설치하여 안동까지 오기 힘들어하는 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병원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을 무상으로 입원시켜 치료했는데, 이것이 병원의 재정 상태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성소병원의 존재 이유를 확실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성소병원은 6․25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병원이 다시 준공되어질 때까지 금곡동 경안성서신학원 입구 애린진료소를 임시로 설치해서 계속해서 환자들을 돌보았다. 1956년 AFAK 자재와 선교회 지원으로 현 병원위치에 2층으로 신축하여 이전하였고, 아직까지 이 건물은 리모델링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후 안동성소병원은 1994년부터 서울명성교회 후원으로 제1, 제2 신관 신축, 최신식 기자재 도입과 의료진의 확충을 통해 복음전파를 통한 종합병원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병원의 이름이 성소(聖穌)로 지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예수교를 옛날에는 야소교(耶蘇敎)라고 불렀는데, 이와 비슷하게 성(聖)과 야소교의 소(蘇)를 조합하면서 소(蘇) 음가와 동일한 소(穌)로 바꿔 성소병원(聖穌病院)이라고 칭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추측은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가설이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추론이다. 하지만 성소(聖穌)라는 이름에 관해 깊이 묵상하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깊은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성소(聖穌)라는 단어는 거룩할 성(聖)과 소(穌)로 구성되어 있다. 소(穌)는 ‘긁어모을 소, 깨어날 소’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성소(聖穌)는 ‘거룩한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다’는 뜻이 된다.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중생(重生), 거듭남(born again)이다.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또 다른 의미의 성소라는 단어가 성소(聖穌)와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됐는데, 첫째는 ‘거룩한 부르심’의 의미를 갖는 성소(聖召)이고, 둘째는 ‘거룩한 장소’를 뜻하는 성소(聖所)이다. 성소(聖召), 성소(聖所), 그리고 성소(聖穌).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인 성소(聖召)에 순종한 플레처 선교사는 한국으로, 원주로, 안동, 그리고 대구로 사역지를 옮기며 의료선교를 감당하였다. 특히 그가 머물러 치료했던 땅들은 질병으로 고통받고 치료에서 소외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위한 거룩한 장소인 성소(聖所)가 되었다. 안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안동성소병원은 지난 107년 동안 뭇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여 육신을 구원할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함으로 영혼도 소생시키는 성소(聖穌)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안동성소병원에 주어진 이 거룩한 사명이 예수님 오실 때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 1914년 11월 14일 쇼플러(S.F.Schauffler)가 후원한 1만 달러로 금곡동 177번지에 준공된 3층 건물의 안동성소병원 모습으로 ‘코넬리우스 베이커 기념병원’으로 불려졌다. 건물의 뼈대는 철재와 철빔으로 세웠고, 당시로는 초현대식 시설을 갖추었다. 경북 북부지역 유일한 종합병원 건물로 선교사명을 감당하다가 6·25 전쟁으로 전파 당했다.(사진 6)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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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 영·호남 보건환경 분야 연구과제 워크숍 개최경상북도는 전북, 전남, 경북, 경남 보건환경연구원 120여명이 함께하는 「영·호남 보건환경 분야 연구과제 공동 워크숍」을 6일부터 7일까지 1박 2일간 경주 더케이호텔에서 개최했다. 이번 공동 워크숍은 주요 연구사업 우수사례 발표를 통해 보건·환경 분야 공동연구과제를 발굴하고 연구기관 상호교류 활성화와 상생 발전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마련됐다. 주요 일정으로는 경북형 커피박 재자원화, 품종별 국내산 헴프씨드의 영양성분 및 기능성 등 8편의 우수 연구논문 등을 발표했다. 또 유행성 감염병, 식·의약품 신종 유해물질, 실·내외 대기환경, 수질감시 등 오염원에 대한 선제적 대응과 보건·환경 분야 발전 방안도 모색했다. 아울러, 경주엑스포대공원 문무홀에서 공연 중인 인피니티 플라잉 공연을 관람하고 화합 및 친교의 시간도 가졌다. 백하주 경북도 보건환경연구원장은“이번 워크숍은 최신 분석기술, 연구정책개발 및 연구기술협력 등의 활성화를 위해 영·호남 보건환경연구원이 소통하고 단합하며, 새로운 힘을 얻어가는 뜻깊은 자리였다”며, “앞으로도 보건·환경분야 공동 대응을 위한 상호협력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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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5)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5)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 6. 안동지역 최초 근대서점, 기독서원 7. 안동의 첫 근대병원, 성소병원 8. 안동지역의 첫 한국인 목사, 김영옥 ...............................................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6. 안동지역의 최초 근대서점, 기독서원(基督書院) / 1909년 100여 년 전 안동에 성경과 기독서적을 판매하는 기독서원이 존재했다. 이 기독서원은 안동 최초의 근대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 80년사는 대구선교부의 아담스 선교사가 서문 밖 초가 5칸을 사들여 기독서원을 개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김병우(金炳宇)가 언제 매서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병우는 당시 매서로 활동했다. 왜냐하면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가 1909년 8월 8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릴 때 예배 인도자가 매서인 김병우였기 때문이다. 안동교회는 거의 1년 동안 이 기독서원에서 예배를 드렸다. 첫 예배 후 1년이 지날 즈음엔 회중의 수가 75명이 되어 공간이 비좁아 더는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기독서원은 안동교회의 첫 예배처일 뿐 아니라, 오늘의 안동교회가 있게 된 안동 선교의 영적 자궁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기독서원은 평일에는 성경과 기독서적을 판매함으로써 문서선교의 사명을 감당했다. 기독서원의 운영에 관해 남아 있는 자료는 별로 없다. 하지만 한국교회 초창기 기독서점은 그 지역의 선교부나 선교사님에 의해 직접 관리되거나 운영되었다. 따라서 안동의 기독서원도 선교사들에 의해 경영되었지만, 어떤 시기부터 현지인인 한국인에게 운영권이 넘겨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약 30여 년 동안 기독서원의 운영과 활동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기독서원 이후 처음으로 나타난 서점 은 삼신사(三神社) 서점이다. 1940년대 후반 당시로는 비교적 큰 규모의 기독서점이었다. 삼신사 기독서점은 초기 안동지역 교회를 위해 조사(助事)로 크게 헌신한 안동교회 김익현 장로의 장남인 김희년 집사가 운영했다. 삼신사는 성경과 기독문서를 판매했고, 이것은 기독교 서점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문서선교를 가능하게 했다. 삼신사 이후 기독교 서점의 계보와 위치는 분명하다. 삼신사가 협신사(協信社) 서점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된 것이다. 협신사라는 이름의 유래는, 기독교 서점의 운영이 몹시 어려워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자, 안동교회의 몇 성도들이 믿음으로 협력했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즈음에 협신사 서점의 운영권자도 최종식 집사로 바뀐다. 이때 우리 총회 기관지인 기독공보도 판매했다고 한다. 또한, 1950년 말에서 1960년 초에 협신사 서점은 안동교회 정문의 바로 서편 가옥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1970년 초 김화진 집사는 최종식 집사로부터 협신사 서점을 인수받았다. 김 집사는 위대한 전도인인 김수만 장로의 차남으로 개곡교회 김영진 장로의 제씨(弟氏)다. 그 후 협신사 서점은 권태복 전도사가 운영했으며, 권 전도사가 목회에 전념하게 되면서 협신사 서점은 동생 권인찬 집사(안동교회)에게 운영이 넘어갔다. 그러다가 1980년 안동교회 선교관이 준공됨으로써 현 위치로 이전된 후 협신사 서점이 협신사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까지 권오탁 장로(안동교회)가 운영하고 있다. 안동교회 맞은편 길 건너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서 시작한 안동 최초의 근대서점인 기독서원. 서점 이름과 위치는 바뀌었지만 110년 넘게 안동지역의 기독교 서점의 역사는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삼신사, 협신사 기독서점, 그리고 협신사를 통해 안동지역의 문서선교는 계속되고 있다. 물론 100여 년 전 기독서원이 감당한 역할과 오늘 협신사의 그것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기독서원은 초기 안동지역 복음화의 산실이었다. 여기서 팔려나간 성경과 기독교 문서들을 읽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왔고, 골짜기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 결과 곳곳마다 교회가 세워졌다. 이처럼 기독서원과 삼신사, 협신사의 합력으로 미신과 불교와 유교의 땅인 안동에 세워진 교회들이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무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기독교 서점이 안동에 존재한다는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기독서원으로 추정되는 5칸 초가집의 모습. 사진에 남성들이 주를 이룬 것을 보아 남성성경공부반 참석자 중심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앞 첫줄에 아이를 안고 있는 분이 안동교회 초대 목사요 경북북부지역 최초의 한국목사인 김영옥이다. 안동읍 최초 교회인 안동교회는 이곳 기독서원에서 1909년 8월 둘째 주일(8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렸다.(사진 5)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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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21세기 인문가치 포럼 안동컨벤션센터에서 개막▲제9회 21세기 인문가치포럼 포스터.(사진=안동시 제공)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찾아온 팬데믹 시대,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와 갈등을 우리는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대전환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고민을 함께 공유하는 21세기 인문가치포럼이 ‘대전환, 그 너머의 세상 : 인류를 위한 질문’이라는 주제로 9월 21일 개막한다. 올해로 9회째를 맞는 21세기 인문가치포럼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대전환의 시대와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분석함과 동시에,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인문가치를 함께 고민하고 공유한다. 안동은 민족의 집단 기록이자 인류 사상의 발견 및 성과의 진화 기록을 의미하는 세계기록유산 ‘한국의 유교책판’을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오래전부터 인문을 기본으로 한 인간 가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이어 온 곳이다. 이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과 같은 유학자를 배출하고, 도산서원, 하회마을, 봉정사 등 인문적 가치 위에 지어진 건축물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라가 어려울 때 온몸을 바친 독립운동가를 전국에서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이러한 역사성을 기반으로 시작된 21세기 인문가치포럼은 매년 다양한 형태의 발전으로, 대중들의 참여 확대를 위해 공유, 모색, 구현세션을 마련해 학제 간 융합과 소통, 참가자들 간 대화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21세기 인문가치포럼은 다양한 연령층의 참가자들이 인문가치에 대해 고민을 할 수 있는 ‘공유세션’을 다채롭게 기획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동화작가의 작품을 테마로 한 새싹콘서트 ‘랑랑별 여행’과 춤으로 삶을 표현하는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 의 효진초이와 ‘청춘의 대명사’ 노홍철,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권해봄 PD 등이 참여하는 청춘콘서트 #갓생살기, 영화 ‘니얼굴’로 유명한 작가이자 배우 정은혜 씨와 서동일 감독이 출연하는 영화 콘서트 ‘당신은 충분히 예뻐요’ 등 서툴지만 열정적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모두를 위해 인간다운 삶을 인문가치 속에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 외에도 안동, 더 나아가 경북의 미래 문화가치 발굴을 위해 ‘훈민정음, 온 누리에 펼치다’라는 모색세션을 구성해 경북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우리 한글의 인문적 가치와 훈민정음의 창제 정신, 그리고 훈민정음 세계화에 대한 고민을 이어 간다. 이뿐만 아니라 ‘양극화, 문화다양성, 기후위기’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인문가치 논문공모와 ‘인문으로 함께 만들어 가는 내일’이라는 주제로 영상 공모를 실시해 오늘날의 인문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모색하게 된다.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통찰의 질문을 던지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게 될 ‘제9회 21세기 인문가치포럼’이 대전환 시대, 그 너머의 세상을 풍요롭게 할 사흘의 여행을 이제 시작한다. 제9회 21세기 인문가치포럼은 현장에서도 등록 및 참석 신청이 가능하고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공식 누리집(www.adf.kr)에서 확인하면 된다. 문의처: (재)한국정신문화재단 인문정책팀(054-840-3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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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4)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3. 안동지역 최초의 학습자, 홍재삼 4.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 소텔 5. 안동지역 첫 선교사 사택, 휴게가옥 ...............................................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5. 안동지역의 첫 선교사 사택, 휴게가옥(Rest House) / 1909년 1908년 9월 장로교 선교사 정기총회는 안동선교부 설립을 결정하고 안동에 선교사 휴게가옥(Rest House)을 구입하기로 결정한다. 휴게가옥은 안동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머물면서 선교전략을 세우고 휴식을 취하며 성경공부 등을 통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교육을 위해 꼭 필요한 거처였다. 그 결과 그해 12월 브루엔 선교사와 소텔 선교사는 안동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이 머물 휴게가옥을 구입했다. 웰번 선교사의 선교 보고를 토대로 쓰여진 에비 여사(웰번 선교사의 손녀)의 책은 1908년 12월 선교사를 위한 한 채의 가옥을 이미 구입했음을 분명히 밝힌다. 휴게가옥의 구입이 속전속결로 진행된 이유는 안동선교부의 구성과 활동을 위해 그만큼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1909년 8월 8일 주일 기독서원에서 첫 예배를 드린 안동교회는 1년이 지난 후 무려 75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5칸의 작은 기독서원은 예배드리기에는 너무도 공간이 협소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 신축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마땅한 예배처소가 없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거주하고 있던 임시주택으로 예배처소를 옮기게 된다. 안동교회 80년사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오늘날 안동교회 부지 안에 선교사 임시주택(구 교육관 건물 자리)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안동교회 80년사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진술한다. “안동교회는 처음에 매서 김병우의 인도로 서원(기독서원)에서 모이다가 그해 11월 원주 주재 선교사 오월번 목사와 조사 김영옥 씨가 내안(來安)하여 정착케됨으로 교회를 인도하기에 이르렀다. 선교사들의 임시주택(1910년)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니 장소는 현 교육관 자리에 있었던 한옥집이었다.” 김광현 목사는 그의 저서인 ‘이 풍랑 인연하여서’에서 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 해에 안동에 새로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선교부는 선교사 임시주택으로 쓰기 위하여 바로 그 서점 북쪽에 있던 큰 기와집 두 채를 사들여 수리를 하고 한 집(옛 교육관)은 독신 선교사였던 별리추 의사(플레처 의료선교사)와 권찬영 목사(크로더스 선교사)가, 다른 한 집(지금의 예배당 자리)은 오월번 목사(웰번 선교사) 가족이 살게 했다. 그래서 서점에서 모이던 교회는 선교사들의 임시주택인 별·권 양씨가 사는 집에서 모이게 되었다.” 1910년 2월부터 3명의 선교사들이 모두 안동에 체류함으로써 안동선교부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자 몇 채의 선교사 사택이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두 채의 가옥을 구입했다는 김광현 목사의 진술과 달리 에비여사는 세 채의 가옥을 구입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안동선교부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압도하는 섭리에 의해 선교사들이 거주하기에 가장 편안한 가옥을 구입했다. 18칸짜리 기와지붕의 한옥을 구입해 선교사 가정이 거주할 수 있도록 수리를 하고, 다른 두 채의 한옥도 구입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수리하였다.” 1908년 1911년 3·4월 선교캘린더에 수록된 <사진 4>는 플레처 선교사와 크로더스 선교사가 사용한 임시 선교가옥이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사진 4>에는 당시 의료선교사인 플레처 선교사와 크로더스 선교사가 머물렀던 임시 선교기지 내 가옥 앞에서, 플레처 선교사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손을 뒤로 한 채 서 있는 장면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가옥이 안동선교부 설립이 결정된 후 최초로 구입한 휴게가옥, 첫 선교사 사택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독신인 안동성소병원의 초대 원장 플레처 선교사와 크로더스 선교사의 임시 선교기지로 사용된 가옥의 일부로 여겨진다. 웰번 선교사의 편지는 이 가옥에는 200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는 대저택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 주택이 안동에서 최초로 구입한 휴게가옥인 것으로 추정된다.(사진 4)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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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3)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3) 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3. 안동지역 최초의 학습자, 홍재삼 4.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 소텔 5. 안동지역 첫 선교사 사택, 휴게가옥 ...............................................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4.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 소텔 / 1908년 대구에서 안동까지의 거리는 무려 120Km나 되는 원거리이기 때문에 대구선교부는 1908년 안동에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안동선교부는 미국 북장로교가 평양, 부산, 대구, 청주, 선천에 이어 조선 선교부 산하의 6번째 개설된 지역선교부였다. 당시 대구선교부에 주재하던 소텔 선교사는 안동주재 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1908년 12월 1일 대구를 출발하여 안동에 도착했다. 180Cm의 장신인 소텔 선교사는 대구선교부에서 만물박사로 통할 정도로 다재다능하여 사택이나 건물에 기계적 문제가 있으면 거뜬히 해결했고, 동산병원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작은 풍차를 만들기도 했다. 거룩한 꿈을 갖고 안동에 도착한 소텔 선교사는 선교기지가 될 임시주택 한 채를 구입했는데, 그 위치는 지난 2009년 7월 철거된 안동교회 교육관 자리로 추정된다. 이처럼 안동교회가 현재 서 있는 터는 안동선교부가 시작한 곳이며, 동시에 안동선교의 시발점, 자궁과 같은 근원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09년 9월 강원도 원주가 감리교 구역으로 확정이 되자 원주에서 사역하던 미국 장로교의 웰번 선교사, 김영옥 조사, 그리고 플레처(A.G. Fletcher) 의료선교사도 안동으로 이주함으로써 소텔 선교사는 힘을 얻게 된다. 그 결과 안동선교부는 3명의 선교사를 갖춘 공식적인 선교부로 출범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안동에 그리스도인 스스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좀처럼 세워지지 않자 선교부의 활동이 주춤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09년 8월 두 번째 주일에 8명이 모여 감격스러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안동교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안동교회의 첫 예배는 선교부에도 힘을 실어주었다. 더욱이 원주에서 이주한 웰번 선교사와 조사인 김영옥은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안동교회의 설립은 선교사들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선교부가 침체를 벗어나 전도에 활기를 띠게 했다. 그 결과 소텔 선교사와 웰번 선교사는 전도구역을 분할하여 1909년 9월부터 북쪽은 소텔 선교사가, 서쪽은 웰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길을 떠난 지 10일 만에 소텔 선교사는 장티푸스에 걸려 돌아왔고, 약 1달 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1909년 11월 16일 27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아내인 맥클렁(K.M.McClung) 선교사는 남편 묘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그들을(조선인을) 사랑하겠노라(I am going to love them)” 안동 선교부의 초대 선교사로 부임한 소텔 선교사가 1909년 11월 16일 장티푸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 안동 선교부의 정상적인 선교활동은 다소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순교의 피가 뿌려진 지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10년 1월 크로더스(권찬영, J.Y. Crothers) 선교사가 안동에 부임함으로써 안동선교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소텔 선교사와 크로더스 선교사는 동서 사이로 크로더스 선교사는 소텔 선교사 부인의 언니인 엘렌 맥클렁의 남편이다. 그 결과 안동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어떠한 단절도 없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크로더스 선교사는 1952년 은퇴하기 전까지 40여 년 동안 안동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해 Mr. 안동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안동을 사랑했고, 지역사회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가 안동에 부임한 후 1년도 넘기지 못해 중단할 위험에 빠져있던 복음사역을 이어받은 크로더스 선교사는 무려 40년 이상 사역을 잘 감당함으로써 두 선교사는 합력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어가는 거룩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 1909년 9월부터 안동의 북부지역은 소텔 선교사가, 서쪽은 웰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왼쪽 말에 탄 사람은 소텔 선교사이며 말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시 조사인 김영옥(1911년 안동교회 초대담임목사가 됨)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부, 그리고 오른쪽 말에 탄 사람은 웰번 선교사이다.(사진 3)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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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2)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2)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3. 안동지역 최초의 학습자, 홍재삼 4.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 소텔 ...............................................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2. 안동지역의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 1902년 1) 비봉교회(飛鳳敎會) 의성의 첫 교회인 비봉교회는 김수영에 의해 설립되었다. 김수영은 1900년 3월 초 청도지방에 갔다가 때마침 장날 베어드 선교사의 노방전도에서 복음을 듣고 회심하게 된다. 귀가한 김수영은 열심히 전도하여 마을 사람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 증가하게 되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비봉교회는 1902년 봄에 4칸 초가 예배당을 처음으로 건축했고, 1915년 김충한이 장로로 장립함으로써 첫 당회가 조직되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특히 김충한은 비봉교회가 낳은 걸출한 장로요 목회자다. 대구 계성학교 출신인 김충한은 1909년 비봉교회에 계신학교를 설립하여 비봉지역에 교육과 복음전파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김충한은 192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1924년 제15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1930년 제27회 경북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33년 고향인 비봉교회를 담임했으며, 1946년에는 대구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기도 했다. 그후 경북 각지에 교회를 개척하고 동산병원의 전도목사로, 김천 송천교회와 황금동교회 목사로 선교와 후배 양성에 전력했고, 1960년에는 의성성광교회와 경중노회를 섬기다가 1965년 12월 14일 83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2) 국곡교회(菊谷敎會) 국곡교회의 설립자는 권수백으로 일직의 돌고개에서 대구선교부 아담스 선교사가 전해준 쪽 복음을 읽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2년 권수백은 김병석, 김병일 등과 함께 2칸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국곡교회가 시작되었다. 국곡교회의 설립은 다른 마을에게도 영향을 미쳐 풍산교회(1902), 괴산교회(1904), 창길교회(1904), 동산교회(1905), 장사리교회(1907), 아곡교회(1911), 중률교회(1931) 등 안동지역 초기 교회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권수백은 한 교회만 머물러 있지 않고 여러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복음서를 파는 권서인으로 활동했다. 그 결과 그를 통해 여러 교회가 개척되었다. 1900년대 여러 교회가 세워지자 그의 주된 사역은 권서를 넘어 교회를 돌보는 조사로 전환되게 되었다. 1904년 안평의 괴산교회를 시작으로 경안노회 경내에서 35년 동안 50여 예배처를 섬겼다. 권수백은 1924년 장로로 임직했고, 1927년 교회 내에 민족학교인 일국서당을 개설하여 교육 사업에 힘을 썼으며,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해 일본순사들의 감시를 받았으며,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만주로 피신하는 등 평생 복음전파와 항일운동에 매진한 믿음의 선배인 동시에 국곡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할 수 있다. 3) 풍산교회(豊山敎會) 1902년 권수백의 전도로 정봉모, 김인수, 강덕수 등이 예수를 믿게 되어 풍산 하리동 강변 마을 김인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함으로 풍산교회가 시작되었다. 1903년 4월에 작은 초가집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했는데, 초가집 예배당은 지붕을 삼대로 덮고 진흙으로 깐 바닥 한가운데 휘장을 쳐서 남·여석을 구분했다. 1923년 12칸 기와집 예배당을 처음으로 건축했다. 풍산교회는 1920년 정봉모가 장로로 최초로 장립 받아 당회가 조직되었다. 특히 풍산교회는 1903년 4월 영수(Leader) 배선모를 교사로 고창서숙을 시작하여 20~30명의 학생들이 수학하였고, 1920년 배선모가 영수직을 사면 청원하기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교육정신은 후대에도 이어져 1964년부터 1979년까지 재건중학교를 운영하여 15년간 7백2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했다. 풍산교회는 인근 지역 복음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어 수동교회(1905년), 소산교회(1911년), 명동교회(1911년?), 하회교회(1921년), 풍북교회(1937년) 등을 분립했다. 3. 안동지역 최초의 학습자, 홍재삼(洪在參) / 1903년 대구주재 아담스 선교사가 1901~1902년 사이 안동지방을 방문한 보고에 따르면, 그는 경북 북부지방을 방문하여 9명의 관리를 만나고 많은 서적을 팔았으며, 1개월 이상 장터를 돌며 전도하면서 약 1천권 이상의 책을 팔았다고 한다. 특히 1902년 3월 조사 김기원과 함께 안동을 순행하여 구미시장 5일장 전도를 하면서 쪽 복음서를 팔았는데, 이때 와룡면에 사는 홍재삼은 아담스 선교사로부터 구입한 쪽 복음을 읽고 대구까지 가서 아담스 선교사에게 진리를 배우고 성경을 구입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홍재삼은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홍재삼은 아담스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었지만, 1903년에 당시 홍재삼 집에 머물고 있던 베렛 선교사로부터 어느 주일에 학습을 받아 경북 최초의 학습교인이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됐다. 아담스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홍재삼은 대 양반 가문 중의 한 사람으로 비록 그가 살고 있던 마을사람 대부분이 보수적이었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안동지역의 공인된 최초의 학습자가 되었다. 선교사들을 만났을 때 홍재삼의 질문은 그가 얼마나 성경을 정독했는지를 알 수 있게 했으며, 그는 헤어질 때 노잣돈도 필요 없다고 하면서 가지고 있던 모든 돈으로 몽땅 성경책을 구입했다고 한다. ▲1903년 베렛 선교사에 의해 학습을 받음으로써 경북 북부지방 최초의 학습자가 된 홍재삼으로 추정되는 인물. 에비 여사는 안동선교구역 최초의 학습자로 이 사진 속 인물이 홍재삼임을 확언하고 있다. 위 사진의 글(This gentleman was the first Christian convert in Andong's district.)은 에비 여사의 친필이다.(사진 2)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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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3. 안동지역 최초의 학습자, 홍재삼 4.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 소텔 ...............................................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서문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와 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항을 통해 입국함으로써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부산·경남 지방의 선교는 1890년부터 호주 장로교 선교부와 미국 북장로교의 공동선교로 시작되었다. 호주 장로교는 1890년에 데이비스 선교사를, 1891년에는 맥케이 선교사를 보내 부산에 선교거점을 세웠다. 미국 북장로교는 1891년 베어드(배위량) 선교사를 부산에 파송해 호주 선교부와 동역하였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3년 4월 17일 그 누구도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미답지인 경북지방을 향해 출발했다. 경북지방으로 향한 베어드 선교사의 발걸음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구원의 발걸음이 되었고, 후에 대구선교부와 안동선교부가 세워지는 계기가 된다. 비록 그는 방문한 땅에서 하루 혹은 이틀, 잠시 잠깐 체류했지만 그것은 그 땅에서 펼쳐질 거룩한 하나님 역사, 즉 구원의 역사의 시작이었다. 본고는 안동 땅에 복음이 처음 전해지던 때부터 안동 땅에 불기 시작한 복음의 미풍이 어떤 시점부터 어떤 모습으로 광풍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연구한 소논문이다. 특히 유교, 불교와 샤머니즘의 도시인 안동 땅에 들어온 기독교의 처음 모습들을 발굴하고 연구한 글이다.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인 배위량, 안동지역의 첫 교회들, 안동의 첫 학습자,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인 소텔, 안동지역의 최초 근대서점인 기독서원, 안동의 첫 근대병원인 성소병원, 안동에 건축된 첫 선교사 사택 등을 다룸으로써 안동 땅에 처음으로 있었던 기독교의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 1893년 1862년 6월 16일 미국 인디아나 주에서 출생한 베어드 선교사는 원래 중국으로 파송될 예정이었지만,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는 부산지방 선교사로 일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이 제안을 받고 1890년 12월 아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1891년 1월 29일 부산에 도착했다. 베어드 선교사는 부산을 거점으로 그 주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연중 7개월 정도 집을 떠나 순회 전도를 실시했다. 베어드 선교사는 김해, 동래, 울산, 밀양, 진주, 대구, 상주, 안동, 경주 등 경상도 지방과 전주, 목포 등 전라도 지역과 충청도 공주 지역까지 순회 전도를 실시해 이들 지역에 선교부가 설치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베어드 선교사는 1893년 4월 17일 부산을 출발하여 5월 20일 부산으로 돌아가는 무려 1,240리(里)나 되는 전도여행을 통해 경상북도 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이 기간 동안 베어드 선교사는 조사인 서경조와 소년 박재용, 그리고 마부 두 사람을 대동하여 말을 타고 육로로 부산 동래를 출발, 범어사 계곡, 양산, 물금, 밀양 유천을 거쳐 경북 청도에 4월 21일 도착했다. 4월 23일에는 대구 남문에 도착했고, 다시 4월 25일 동명을 거쳐 상주, 안동 지방으로 여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선교사가 안동 땅에 첫발을 디딘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가 안동에 도착한 일자는 1893년 5월 5일이다. 선교보고에 의하면 베어드 선교사는 다음 날 아침 낙동강을 건너 경주로 향할 것임을 밝힘으로써 안동에 베어드 선교사가 머문 시간은 만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전도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안동 방문이었다 하더라도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이때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성장해 결국 안동 땅에 여러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베어드 선교사는 한국에 도착한 1891년부터 1931년까지 40여년을 한국에서 활동했던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교회에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다. 특히 부산 지역 최초의 북장로교 선교사로서 부산 지부와 대구 지부를 개척하는 등 초기 부산 경남 지방의 선교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1895년에는 대구로 옮겨 제일교회와 계성학당을 설립하고, 1896년 서울로 옮겨 경신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1897년 10월 평양에서 숭실학당을 창설하고 교장에 취임한 후 1906년 9월 감리교와 연합하여 숭실대학으로 발전시켰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3년 4월 17일 부산을 출발해 5월 20일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는 무려 1,240 리(里)나 되는 전도여행을 통해 경상북도 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다.(사진1)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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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 올해도 한국 해양발전 프로그램 국비 확보경상북도는 올해도 해양수산부의 지역기반 해양수산 과학기술개발 프로그램 (한국 씨그랜트 프로그램*) 신규과제 선정 공모에 선정되면서 도비를 지원해 사업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는 2025년도까지 연간 5억원 수준의 국비를 확보한 성과이다. *씨그랜트(Sea Grant) : 해양 전문가들이 지역 현안을 발굴하고 연구·교육 등을 통해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프로그램으로, 우리나라에서는 2005년에 도입됐다. 지난달 해양수산부는 제4단계 씨그랜트 센터 선정에서 경북센터로 포스텍을 재지정하고, 포스텍에서 제안한 해양기후변화에 따른 패류 양식지 경고시스템 개발 과제를 전국 단위 현안해결 연구과제로 선정했다. 이로써 경북도는 14년 연속으로 이 사업에 참여하게 됐다. 이 프로그램은 해양과학기술육성법에 따라 지역대학의 연구역량 등을 활용하여 지역 해양수산 현안문제를 해결하고 지역해양수산 연구 인력을 양성하는 사업으로 25년도까지 130억원의 국비가 지원되는 사업이다. 포항공대 경북씨그랜트 센터는 지난 2009년부터 이 사업에 참여해 국비 66억원을 지원받아 90건의 연구과제를 수행했다. 104편의 과학기술분야 논문을 발간하고 85건 이상의 특허 출원 및 등록 진행했으며, 66건의 지역 해양수산 현안을 해결해 1단계(2009~2013), 2단계(2014~2016)의 단계평가에서 모두 전국 1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경북도는 올해도 연구개발과제 공모에 참여해 도비(7천만원)를 추가로 지원을 약속하며 포스텍의 센터 지정을 도왔다. 연구과제는 5월부터 진행되며 연구 성과는 현장에 보급되어 대민지원에 활용된다. 이경곤 경북도 동해안전략산업국장은 “경북은 입지여건상 심해과학 등 해양수산 분야에 나름대로 독자적 경쟁력이 있어 해양수산과학 기술을 개발하는데 우월성이 있다”며 “이번 과제를 통해 지역 해양수산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청년어업인의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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