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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기독청년면려회 초대회장 故 권중윤 회장, 총회 순직자 청원안동교회 기독청년면려회 초대회장 故 권중윤 회장이 제106회 총회에 순직자로 청원하기로 결정됐다. 예장통합 교단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총회 순교·순직심사위원회(회장 김지한)는 지난 7월 8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4차 모임을 갖고 총회 순교자 및 순직자 심사를 진행했다. 이날 위원회는 경안노회가 청원한 ‘안동교회 기독청년면려회 초대회장 故 권중윤 회장의 순직자 지정’안에 대해 연구 심의한 소위원회의 보고를 받고 마지막 논의를 했다. 위원회는 “기독청년면려회 권중윤 초대회장의 복음과 교회를 위한 헌신과 노력,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까지 한 애국애족 정신, 대한민국 전국남선교회를 출범시킨 공로 등은 충분히 본받아 기릴 만하므로 총회의 순직자로 추서하는 것이 가하다”고 판단하고, 위원 무기명 비밀투표를 통해 만장일치로 총회 순직자로 제106회 총회에 청원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제106회 총회에는 故 권중윤 회장 외에도 故 이상원 과장(총회 전산홍보팀), 故 이신욱 목사(면목교회)가 순직자로 청원하기로 결의돼 현재 총 3명의 총회 순직자 추서가 상정될 예정으로 알려졌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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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며“감사의 100년, 새 역사의 100년” 임 만 조 장로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창립 100주년 준비위원장, 안동교회 원로장로 2021년은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가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해입니다. 1921년 2월 5일 그 어려웠던 시절에 안동 선교부 주재 안대선 선교사의 지도로 한국 최초로 안동교회 기독청년면려회가 조직되고, 당회에 정식으로 허락을 받아 노회와 총회와 선교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경안지역으로, 전국으로 확산하여 100년이 지나, 여기에 근거한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창립 100주년을 맞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For Christ And The Church)’라는 표어 아래 선배들이 이루어온 역사를 잘 보존하고, 더욱 발전해 가기 위하여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장로교(長老敎) 통합 측 남선교회와 청년회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장로교단의 현존하는 청장년면려회(靑壯年勉勵會)가 경안노회 안동교회에서 시작했다고 연혁에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큰 자부심(自負心)을 품게 되고,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신 에벤에셀 하나님의 크신 은총(恩寵)을 송축(頌祝)합니다. 안동은 한국 기독청년면려회의 발상지입니다. 여기에 부응하는 탁월한 인물로 안대선 선교사와 권중윤 초대 회장이 배출되어 면려회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지사충성(至死忠誠)하여 지금도 그 업적이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배들의 아름다운 업적을 이어나가야 하는 사명을 다 함과 동시에 큰 보람을 가져 왔기에 오늘의 100주년을 뜻깊게 맞이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기독청년면려회를 허락한 안동교회 당회록이 남아있었다는 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은혜가 있었음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안동은 6·25로 시가지가 전소하다시피 한 곳이지만, 당시 김광현 담임목사님이 피난길에 오르시기 전에 당회록과 노회록 등을 땅에 묻으셨기에 역사가 살아남았습니다. 여기를 근거로 해서 금번에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100년사를 발간하게 되고, 100주년 기념교회를 필리핀에 세우고 해외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통일 후 북한선교를 위해 교회건축기금을 적립하고 있습니다. 2003년 시작한 전남노회남선교회 회원들과 매년 교차 방문해 영·호남 친선교류를 하면서 친목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학교장학금·선교비 지원, 미자립교회후원 그리고 사회봉사 기관 지원사업 등도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주요 사역들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한국 교회사적지 제17호(기독청년면려회발생지-안동교회)’를 2014년 5월 20일에 지정했고, 남선교회 전국연합회 창립 90주년 기념식과 표지석 제막을 2014년 12월 2일 안동교회에서 거행했습니다. 금번에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갖고 있습니다. 단순한 한 노회의 일이 아니라 장로교단이면 더욱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독청년면려회는 초창기 교회와 사회봉사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야간학교 개설, 금주운동, 물산장려운동, 문명퇴치, 농촌사업 등 범국민적인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어려운 일제의 강점기 시절과 6·25전쟁으로 폐허와 잿더미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복음 사역과 이웃사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기독청년면려운동은 교회의 담을 넘어 지역사회로 나가 믿음과 헌신을 통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100년 전 이 땅, 한반도를 기경(起耕)한 기독청년면려운동! 믿음의 선배들이 가졌던 믿음, 그 정신으로 돌아가 그들의 열정과 헌신을 계승해야 합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조국의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기독청년면려회를 통해 헌신했던 믿음의 선배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기독청년면려회의 선배들이 가졌던 믿음과 열정, 용기와 헌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때 오늘의 교회가 살아나고, 민족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남선교회는 보배와 같습니다. 보배는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갈고 닦아야 빛을 발합니다.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쏟을 때 우리 남선교회는 발전하고,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지난 100년도 찬란한 빛을 발하였지만 보다 앞으로의 100년은 더욱 귀중하고,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단체로 발돋움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창립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준비위원장 임만조 장로가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 100년 약사’를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경안노회남선교회연합회가 필리핀에 세워질 100주년 기념교회에 동판을 전달하고 있다. ▲100주년 기념대회를 마치고 남선교회 임원들과 내빈들의 기념촬영.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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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4)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 (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 5.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 6. 다음세대 전문사역자 7. 안동교회 최초의 전도사 8. 경안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리더 9. 일제에 저항한 애국운동가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5. 김정숙,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2) 임학수 목사는 전도, 교육과 봉사로 교회를 부흥시켰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2층 석조예배당을 건축하며 헌신했다. 현재 안동교회의 돌집예배당은 임학수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할 때인 병자년 1936년 초여름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정축년 1937년 사월에 준공되었다. 이 예배당의 건축과 준공 현장에 김정숙 전도사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정숙 전도사는 석조예배당 건축 과정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교인들을 돌보고 사역을 감당하면서 교회의 안정에 적지 않은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어느 교회나 교역자의 위치는 중요하다. 특히 교역자가 떠나고 부임하는 사이의 기간은 교회가 불안정할 가능성이 크다. 안동교회 역시 담임목사가 비어있는 기간 당회와 안동선교부의 선교사들은 교회의 안정을 위해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담임목사 부재 시 안동교회는 다른 교회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부교역자를 둔 교회는 거의 없었지만, 안동교회는 담임목사와 여성교역자가 동역하고 있는, 당시로 보면 매우 특별한 교회였다. 김정숙 전도사는 2대 이대영, 3대 정재순, 4대 박상동, 5대 임학수 목사와 함께 전도사로 교회를 섬겼으며, 초대 담임목사를 역임한 이후 6대 담임목사로 다시 부임한 김영옥 목사, 그리고 7대 김광현 목사와 함께 평신도로 교회를 섬겼다. 그가 전도사로 또는 평신도로 안동교회를 섬긴 기간은 60년에 이른다. 특히 담임목사의 이임과 부임 사이의 공백 기간 동안 여성 교역자인 김정숙은 전도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심방을 통해 교회의 사역을 중단 없이 이어가고 교회의 안정을 지켰을 것이다. 안동교회 당회록은 그가 담임목사 부재(不在) 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맡겨진 역할을 잘 감당함으로써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음을 알려준다. 김정숙의 영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6. 김정숙, 다음세대 전문사역자 1) 청년사역 김정숙은 1922년부터 안동교회의 전도사로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특히 그의 사역 기간은 기독청년면려회의 태동과 성장 기간과 겹친다. 이대영 목사가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시무를 시작한 1921년, 3·1운동의 좌절 이후 의식 있는 청년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독청년면려회는 기독교 청년운동의 첫 출발을 알리는 교회 조직으로 1921년 2월 5일,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로 안동교회가 공식적으로 승인하여 출범할 수 있었다. 청년면려회 운동은 청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일본 식민지하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독립된 국가의 내일을 준비할 수 있게 한 역사적 청년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기독청년면려회는 놀랍게 성장해 나갔다. 안동교회 당회가 조직을 승인한 후 경북 지방으로 신속히 확산되어 4개월이 지난 그해 6월 7일부터 9일까지 기독청년들이 안동교회에 모여 경북지역연합대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무려 26개 지회에 600여 명의 면려회원들이 참여해 교회와 사회를 위한 헌신을 결의했고 실제로 자신들의 삶에서 그 다짐을 실천했다. 다시 그해 9월 10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에서는 청년면려회를 전국 교회에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선교부 내에 면려청년위원회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후 면려운동은 더욱 확산 일로를 달렸고, 마침내 1924년 12월 2일부터 8일까지 서울 피어선성경학원에서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안동지역에서 기독청년면려회의 출범과 활동, 그리고 성장에 있어서 여성 교역자인 김정숙 전도사는 일정한 역할을 감당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청년면려회는 남·여가 함께 모였는데, 모든 목사가 남성이었던 시대에 안동지역의 유일한 여성 교역자였던 김정숙 전도사가 여성 회원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정숙 전도사의 나이는 40대 후반이었다. 때로는 청년들의 어머니로, 때로는 이모로, 때로는 고모 역할을 통해 청년들의 삶을 돌보고 기독청년면려회 중심의 안동지역 청년운동이 신앙과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지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2) 어린이·청소년 사역 안동교회 4대 담임 박상동 목사는 주일학교를 통한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처음으로 어린이 주일에 유아세례를 베풀었음을 안동교회 80년사는 언급한다. 또한 그는 주일학교 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오늘날의 교회학교 조직과 거의 동일한 조직을 갖추게 하였다. 주일학교 교장은 담임목사, 부장은 평신도로 개편하고 조직을 새롭게 정비함으로써 주일학교 발전에 새로운 기틀을 놓았다. 이것은 박상동 목사가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에 깊은 관심과 연구를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여름성경학교와 동일한 하계아동성경학교의 경우, 평신도가 교장을 맡게 함으로써 평신도와 함께 동역하는 성숙한 모습을 안동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유년주일학교를 거친 청소년의 신앙 교육을 위하여 오늘날의 중·고등부에 해당하는 안동기독소녀회를 창립하여 어린이와 장년 신앙교육 사이에 끼여 방치되었던 청소년의 신앙교육에 교회가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김정숙 전도사는 박상동 목사의 중점적인 사역인 어린이·청소년 사역의 지도교역자로 활동했다. 1927년에 김정숙 전도사는 당회의 허락을 받고 소녀회 고문으로 소녀들을 지도하였음을 당회록은 적시한다. 고문은 아마 소녀회 지도교역자의 다른 표현일 것으로 추측된다. 온화하고 차분하며 자상한 성품을 갖고 있던 김정숙 전도사는 주일학교의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지도하는 데 매우 적합한 교역자였을 것이다. 김정숙 전도사는 어린이와 청년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칭찬하며 격려하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다. 따라서 어린이와 청소년에 관한 사랑, 관심과 열정, 그리고 헌신과 전문성을 갖고 있는 김정숙 전도사에게 교회가 소녀회 고문의 직을 맡긴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1954년 4월 23일부터 27일까지 안동교회에서 개최된 제3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시 독립운동가 이원영 목사가 총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기독청년면려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날인 4월 22일에 제5회 전국대회를 개최했다.(사진5)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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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2)- 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887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출생한 이대영 목사는 시대를 앞서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 힘든 유학이 강한 마을과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혹독했다. 그는 더 이상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객지로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일정한 훈련을 거친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향으로 보내셨고, 뛰어난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 후 전도인, 조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기독청년면려회와 주일학교를 통해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갈 뿐 아니라 지역복음화와 교회 부흥을 선도했다. 그가 시무할 때 시작된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은 3·1운동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던 이 땅의 청년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고 미래를 준비하게 만들었다. 총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안동을 떠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 선교사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한 이대영은 그 땅에 머무는 동안 중국인들과 함께 중국인처럼 살았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선교를 포기하고 1955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 까지 이대영 목사는 33년 동안 중국인을 동족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서 산동반도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산동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재중동포들을 잘 돌보았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1954년 4월 산동성에서의 완전 출수 후 오직 하나님 나라, 교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1968년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선배이다. 1. 이대영, 금당실 마을에서 출생하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손인 이대영(李大榮)은 1887년 4월 23일,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李裕成)과 김도혜(金道徯)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대영이 출생한 마을은 금당실로 불러졌는데 선교사가 동네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다. 예천 땅을 처음 밟은 선교사는 부해리(傅海利, Henry Munro Bruen, 1874~1959)로 조사 이희봉과 함께 1907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7년은 평양에서 시작한 대부흥으로 전국에 뜨겁게 부흥의 열기가 확산되고 있던 때이다. 따라서 인근지역인 안동, 영주, 문경, 상주, 의성에 선교사들과 조사들의 활동으로 이미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있었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에 따라 예천 최초의 신자인 나만기(羅萬基)에 의해 당교회가 시작되었다. 특히 금곡(금당실)교회의 시작은 이러하다. 1893년 낙향해 금당실에 머물 던 이유직(李裕稙)은 양주 목사를 한 형 이유인(李裕寅)을 추모하며 99칸의 한옥 저택을 지어 생활했다. 하지만 동학혁명에 가담해 도망하던 이유직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고, 그 때 복음을 전해 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교전통이 유독 강하고 불교 중심의 마을이었던 금당실은 복음이 전파되기 대단히 어려웠다. 따라서 이유직은 때를 기다리며 1899년 전후, 자신의 집에서 은밀하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금곡교회의 첫 출발로 알려져 있다. 금곡교회는 선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상곡교회라는 공식 교회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금곡교회는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선교사가 직접 복음을 전하기 전에 쪽 복음과 전도지를 읽고 복음을 접한 평신도에 의해 세워진 자생적 교회인 것이다. 그 후 점차 예배드리는 수가 늘어가 교회는 계속 부흥하게 되었다. 예천지역 초기 3대 교회는 상곡교회, 괴당교회, 그리고 상락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대영은 괴당교회가 설립될 당시인 1907년 경, 복음을 소개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와 금당실의 영적 분위기에 의해 자신이 예수 믿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이대영 목사는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자신의 고집 때문임을 배태준 장로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내가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우리 집안에서 ‘양반 가정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하고 못 믿게 하는 것을 참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기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고 죽기로 하고 고집을 피워서 된 것이고, 일제 말엽 신사참배 문제로 그렇고 극성을 피울 때에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것도 내 고집 때문이었고.” 한번은 아버지가 이대영에게 소의 여물인 짚을 자르는 작두에 목을 대라고 해서 그대로 대었더니 아버지는 결국 자식을 포기하는 길을 선택했다고도 한다. 이대영은 부모의 반대로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과 함께 1910년 연일군 흥해면으로 이사하였다. 흥해에 도착한 이대영은 가족과 함께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선교사로부터 신앙훈련과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후예인 이대영은 비록 가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복음사역을 위해 철저히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비록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버림을 받아 객지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품으셨고, 훗날 당신의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 가셨고, 결국 하나님의 때에 한국 땅에서 중국 땅에서 복음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2. 이대영,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다 안동을 포한한 경북북부지역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93년으로 당시 부산선교부에 있던 배위량(William M. Baird) 선교사가 부산을 출발하여 밀양, 청도, 대구, 상주, 안동, 영천, 울산을 순회하며 전도하고 부산으로 귀환한 것이다. 이후 1902년 3월에 대구선교부에 있던 안의와(James E. Adams) 선교사가 안동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 “두 차례의 봄철 선교여행을 다녀온 후 곧 3차 여행을 시작했다. 1차는 3월과 4월에 경상도 북부지방을 다녔다. 이들 지방은 선교사들이 전혀 방문한 적이 없는 곳이었다. 이들 9명의 관리들을 만나고 많은 전도 서적을 팔았으며 장터에서 전도를 했다. 1개월 이상 장터를 돌며 전도하고, 약 1천 권 이상의 책을 팔았다.” 안의와 선교사의 안동 방문의 결과 안동지역을 포함한 경북북부 지방은 선교사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안의와 선교사 안동 방문 후 1903년 봄 대구선교부의 방위렴(William M. Barrett)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가 안동을 직접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부해리 선교사는 1892년 미국 장로교 기숙학교인 블레어 홀 아카데미(Blair Hall Academy)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22세 때인 1896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부친과 조부가 졸업한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마친 후 1899년 졸업하고 그해 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미국 북장로교로 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99년 10월 26일 대구에 도착하여 초창기 대구·경북 지역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추방되기 까지 40여 년 한국선교에 평생을 바친 부해리 선교사는 경북 북부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부해리 선교사를 포함한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의 결과,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연회보고에 의하면 경북·대구 지역 7개 고을에서 12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1904년 보고에는 12개 고을에서 6개 교회에 7명의 학습교인, 33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으며, 1905년 보고에는 20개 고을에 8개 교회에 2명의 세례교인, 19명의 학습교인, 79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다. 복음의 불모지와 다름없던 경북북부 지방에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짐으로써 복음화의 불씨가 발아(發芽)할 날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이대영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로 나뉘어진다. 우선 박용규는 1907년 경, 이대영은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소개받고 예수를 믿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미 예천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그가 복음을 전달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박용규의 추측처럼 1900년대 초 예천의 3대 교회 중의 하나인 괴당교회(槐堂敎會)를 설립한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이대영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당시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있던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대영 목사가 1956년 9월 41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할 당시 회계로 수고한 배태준 장로도 이대영이 20세 때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밝힌 적이 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기록한다. “이대영 목사는 부해리 선교사에게서 복음을 들었으며 신앙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고집을 가지고 추진하였기에 중국 산동성에서도 중국인 목사나 외국인 선교사들에 비해 큰 부흥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를 통해 전도를 받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부해리 선교사와의 역사적 만남으로 이대영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했으며, 이후 전도인, 조사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한 이후 한국교회와 중국선교의 거룩하고 위대한 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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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3)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3)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2. 예수 믿기로 결단하다 3. 고향 매정에 교회를 설립하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5. 목사로 임직(任職)하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임학수 목사가 시무할 때 안동교회는 공식적으로 신학교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써 신학생을 키우는 일에 협력하는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이 장학금은 안동교회가 지출한 최초의 장학금이다. 임학수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하던 기간에 교회에서 중심 역할을 하던 권중한·박두영 두 장로와 권중한 장로의 아들 권태희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게 되어 권중한 장로는 1934년에, 박두영과 권태희는 1936년에 각각 목사로 임직받았다. 그리하여 1936년 2월 안동교회가 박두영과 권태희에게 장학금으로 후원했던 것이다. 임학수 목사는 당시 정규 신학교를 졸업한 교역자가 부족한 시절에 안동교회 출신 3명을 후원하여 목사를 양성하여 배출시켰다. 더욱이 안동교회 80년사는 권찬영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미국 후원자의 도움으로 권태희를 목사로 육성하고, 그의 형인 권태호를 일본에 유학시켜 성악가로 키웠음을 기록하고 있다. 신학생을 후원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임학수 목사와 권찬영 선교사가 뜻을 모아 함께 힘썼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38년 제33회 경안노회에서 권중한 목사는 노회장으로 피선되었고, 박두영 목사는 후에 경동노회로 이명했으며, 권태희 목사는 임직과 동시에 동부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다가 대구로 가서 이후의 사역을 감당했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유능한 한학자에서 예수쟁이로 변한 임학수의 사고는 자유로웠다. 사실 한학을 공부한 사람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기독청년면려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는데, 예배 이외의 행사도 예배당에서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1921년 청년면려회가 시작된 이후 안동교회는 적극적으로 청년들의 사역을 도왔다. 1925년 2월 17일 예배시간에 청년면려회가 주최한 “현세에 유행하는 이혼의 폐습이 남자에게 있느냐 여자에게 있느냐”는 주제의 토론회를 허락했다. 특히 임학수 목사가 시무할 때인 1929년 청년면려회가 금주·금연 강연을 위해 안동교회 예배당을 사용하게 허락해 달라는 장소청원을 허락했다. 본 예배당을 순수 예배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90여 년 전, 안동교회는 예배만을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토론회나 세미나, 행사라면 언제든지 예배당의 문을 열 정도로 열린 교회요, 당시 담임인 임학수 목사도 열린 목회자였다. ▲1938년 결혼식 주례 후 안동교회 예배당 앞에서 기념 촬영.(뒷줄 중앙 임학수 목사) 또한, 안동교회는 교회예식을 준수하며 결혼예식을 한다면 언제든지 예배당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오늘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주(主) 예배실이 교회의 특정한 기관이나 행사를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만 지금부터 90~100년 전의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성경과 교회 규칙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합당하게 적용하여 처리한 목회자가 바로 임학수 목사이다. 임학수 목사는 성경과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유연하게 사역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목회자였던 것이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임학수 목사의 부임은 온 교회가 합력하여 환경에 맞는 새로운 전도를 시도하게 했다. 안동교회 제225회 당회록은 “오늘 저녁부터 6일 저녁까지 예배당에서 환등사진 전도를 하기로 가결하다”고 기록한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은 환등사진을 통한 전도는 당시로 보면 혁신적인 전도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환등사진 전도는 불신자들을 교회로 초청하여 예배당에서 환등사진을 보여주며 전도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영화, 사진 등 영상을 통해 전도하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는 문명의 이기에 배타적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효율적인 도구로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목회자였다. 또한, 임학수 목사는 체계적으로 전도대를 조직하여 노방전도에 최선을 다했다. 1929년 3월 4일 제직회의록에 따르면 부활주일을 전후에 마을마다 가가호호 방문하여 전도지를 배부하기로 결의했다. 이것은 임학수 목사가 이전과는 다른 보다 과학적이고 치밀한 전도계획을 세워 지역의 복음화를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31년 7월 6일 제직회는 안동을 방문하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의 전도활동을 돕기로 하고 이들을 맞이할 위원까지 구성했다. 당시 숭실전문대학교 학생들로 조직된 전도대는 안동교회가 매진하고 있던 전도에 큰 힘을 보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1935년 4월 8일의 제직회의록은 계명학교에 나오는 학생 중에 예수를 믿지 않는 학생의 가정을 방문해 복음을 전하도록 의논했다. 이 전도방법 역시 오늘의 맞춤 전도와 흡사한 방식으로 타겟(Target)을 정해 집중적으로 전도하여 높은 결신율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임학수 목사는 수하리 교회에 신실한 믿음을 가진 서무선 집사를 권찰로 임명하고, 주일학교의 헌신자로 권돌석을 파송해서 수하 지역이 부흥되어 기도처에서 벗어나 비로소 교회가 되게 했다. 그 교회가 수하교회(오늘날의 수상교회)이다. 또한, 안동교회가 세운 삼마골 기도실(오늘의 이하교회)에 김성진, 전계원을 집사로 임명해 보내기도 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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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4)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2) 안동교회의 사역⑤ 평신도 사역평신도를 양육하는 사역에 박상동 목사는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그것은 ‘제1회 경안노회 주일학교대회’다. 경안노회의 첫 번째 교사대회는 1928년 9월 19일부터 26일까지 8일 동안 안동교회에서 있었다. 여기에는 경안노회 경내 지교회의 아동부, 소년소녀부(오늘날 중고등부), 청년부, 남·여장년부, 여전도회 교사 및 교역자 등 모든 교사가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정회원 1,300명, 방청객 1,000명, 도합 2,300여 명 참석). 주일학교 상황보고서에 따르면, 주일학교대회가 성료된 바로 다음 해인 1929년에는 주일학교 수가 104처, 장년 3,729명, 유년 2,301, 직원 수 808명에 이르게 되었다. 주일학교교사대회가 당시에 얼마나 필요한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상동 목사의 평신도를 위한 배려는 타지에서 오는 교인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담임목사 사택을 제공한 것에서도 발견된다. 또한, 박상동 목사는 평신도도 예배를 인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평신도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섬김과 봉사를 이끌었다. 이것은 당시 목회상황에 비추어 보면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⑥ 다음세대 사역박상동 목사는 주일학교를 통한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박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1927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 주일에 유아세례를 베풀었음을 안동교회 80년사는 언급한다. 또한, 주일학교 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오늘날의 교회학교 조직과 거의 동일한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주일학교 조직을 교장은 담임목사, 부장은 평신도로 개편하고 조직을 새롭게 정비함으로써 주일학교 발전에 새로운 기틀을 놓았다. 하지만 하계아동성경학교(오늘날 여름성경학교)의 교장은 여전히 평신도가 교장을 맡게 함으로 담임목사가 모든 사역을 독점하지 않고 평신도와 함께 동역하는 성숙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주일학교를 거친 청소년의 신앙 교육을 위하여 오늘날의 중·고등부에 해당하는 안동기독소녀회를 창립하여 어린이와 장년 신앙교육 사이에 끼여 방치되었던 청소년의 신앙교육을 교회가 박차를 가할 수 있게 하였다. 주일학교의 조직 정비와 중·고등부의 신설은 다음세대를 발달단계에 맞춰 교육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이라고 할 수 있다. ⑦ 주일성수 강조더욱이 박상동 목사는 철저하게 주일을 성수하는 신앙풍토를 조성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당시(1928년) 보통학교에서 주일에 학생들을 등교시키는 것을 분명하게 반대함으로써 장년과 다음세대 모두에게 주일성수를 강조하였다. ⑧ 미래를 준비하는 사역박상동 목사는 미래를 위한 준비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1937년 4월 준공된 이래 지금도 주(主)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는 2층 석조건물인 예배당 신축을 위한 기성회가 조직되어 1926년 9월 19일 첫 번째 회의를 갖기도 하였다. 3) 오사카교회 사역① 교포의 삶에 관심박상동 목사는 1928년 안동교회를 사임하고 일본에 전도목사로 파송 받았다. 박상동 목사가 일본으로 간 이유는 교포들이 일본인들에게 천대를 받고 비참한 생활고를 겪으면서 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상동 목사가 일본에서 공부한 후에 비록 귀국하여 안동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 재일교포 선교를 위해 박상동 목사는 최선의 대안이었고, 일본에서의 목회가 어려움을 알고도 박상동 목사는 순종하며 출발하였다. 오사카에 도착한 박상동 목사는 목회의 장(場)을 넓혀 교포의 삶에 직접 개입하였다. 노동자의 인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간의 존엄성을 역설함으로써 기업가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일부 기업가들이 교포의 인권을 무시하자 경시청과 노동청을 방문하여 교포 노동자의 권익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박상동 목사가 일경의 요시찰 인물이 되게 했다. 박상동 목사는 유학생 시절 개척한 오사카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② 전도 사역박상동 목사는 비록 담임목사는 아니지만 순회목사로서 오사카 교회의 제직회 회장·공동의회 회장으로 오사카 교회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장년들의 성경공부와 주일학교의 변화, 그리고 부인전도대의 활성화를 통해 오사카교회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또한, 박상동 목사는 춘계전도, 하계전도, 하기천막전도대회, 신도배가운동 등 전도를 통해 교회부흥에 힘썼을 뿐 아니라 봄에는 야외예배를 실시하여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교포 성도의 교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사역 등을 통해 오사카 교회는 많은 성장을 가져올 수 있었다. 4) 나고야교회의 사역① 부흥사경회 및 전도 사역1932년 10월 나고야 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박상동 목사는 더욱 전도에 힘썼다. 앞서 언급한 김익두 목사 초청 부흥사경회는 무려 250명이나 되는 사람이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을 뿐 아니라 온 교회로 하여금 전도에 더욱 열심을 내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나고야 교회 70년사에 따르면 1936년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마산문창교회 담임 주기철 목사를 강사로 연합부흥회를 가졌는데 은혜가 충만해 새로 예수 믿게 된 사람이 수십 명에 이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는 안동교회에서 했던 전도 사역과 동일하게 1932년에는 전도대를 조직하고, 1933년에는 노변전도소를 산하전도소로 발전시켜 나고야 지역의 복음화를 한층 앞당기는 전기가 마련되었다. ② 다음세대 사역박상동 목사는 교포들의 다음세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주일학교의 신앙교육에 총력을 기울이게 하였고 큰 성장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박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기간 중에 나고야 교회는 설립된 지 7년 만에 조직교회가 됨으로써 나고야 지방의 중심교회로 발돋움 할 수 있었고 선교활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되었다. 또한, 기존의 기독청년면려회가 지역의 교회와 연합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③ 지방회 및 총회 사역특히 이때부터 박상동 목사는 개 교회를 넘어 지방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기 시작하였다. 고달픈 교포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박상동 목사는 관서지방 지방목사로 사역하면서 1932년 재일조선야소교관서지방회에서 전도부장으로 피선되어 관서지방 전도에 진력을 다하였다. 또한 재일조선야소교관서지방회 부회장으로 피선되어 관서지방교회의 리더 역할을 했으며, 1938년에는 재일조선기독교회 제3회 정기대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됨으로써 박상동 목사는 전국 교회의 리더로 부상하였다. /논문 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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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2)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3. 복음전도자 박상동 박상동은 의성 비안에서 대구 계성학교까지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소달구지를 끌어주면서 통학했다고 한다. 겨울철에는 주막에서 꽁꽁 언 도시락을 먹기도 하면서 계성학교를 졸업하였다. 박상동의 뜨거운 학구열을 볼 수 있다. 박상동은 계성고보를 졸업하고 1921년 일본 고베로 건너가 고베신학교에서 유학할 때부터 오사카 지역에 있는 교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오사카 지역에 16개의 지 교회를 개척하였다. 1920년대 초는 이 지역에 동포사회가 형성되기 전이었다. 하지만 고베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박상동, 김우현 유학생이 교포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 결과 박상동, 김우현을 통해 일본 관서지방의 대표적인 교회인 오사카(大阪)교회가 1921년 5월 창립되었다. 이후 박상동은 사경회 인도, 감사절·성탄절에 성례전 담당 등을 통해 오사카 교회를 섬겼으며, 1925년 귀국하여 안동교회를 섬기게 된다. 하지만 일본 장감연합회의 요청에 의해 1928년 8월 전도목사로 일본에 파송된다. 순회목사인 박상동 목사는 특히 전도에 열심을 내었는데, 가정방문, 방문전도, 친목회 전도, 하기 전도, 노방전도 등을 통해 1929년 오사카 교회의 평균출석은 4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1930년 박상동 목사와 영(L.L. Young) 선교사, 그리고 신학 유학생들의 수고로 오사카 교회에 처음으로 청년회가 조직되었고, 1931년에는 기독청년면려회가 창립되었다. 1932년 나고야 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박상동 목사는 전도대를 조직하여 영혼구원에 총력을 기울인다. 특히 1932년 10월 17일부터 25일까지 김익두 목사를 초청한 부흥사경회에서는 연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이고 김익두 목사의 설교에 감동되어 믿기로 결심한 자가 250명이나 나왔다. 1933년에는 예배출석교인이 무려 200명을 넘어서게 되었으며, 예배당도 건축해 헌당한다. 1935년부터는 나고야 교회를 중심으로 연합부흥사경회를 개최하고, 전도소를 설립하고, 기독청년면려연합회를 개최하는 등 다방면에서 박상동 목사의 전도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특히 나고야 교회가 전도한 전도소가 1937년 동부교회로 독립했고, 1938년에는 서부전도소가 독립해 서부교회로 개칭하였다. 박상동 목사는 또한 주일학교 교육에도 더욱 힘을 썼다. 9명의 교사가 봉사하여 200여 명 이상의 아동이 출석하였고, 나고야 교회뿐 아니라 산하 전도소에서 6일~10일 동안의 주일학교 하기학교를 실시할 정도로 아동전도에 열정을 갖고 있었다. 해방 후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대구 남산교회에 부임했으며, 전도목사제도를 도입하여 지역사회를 복음화하는 일에 집중했다. ▲대구 계성학교. 1906년 미국 북장로회의 제임스 아담스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영남지방 최초로 설립된 중등교육기관. 박상동 목사는 계성학교 2학년 재학시절 대구 3.1운동에 참가해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4. 교육자 박상동 또한 박상동 목사는 안동교회가 1911년 설립한 계명학원을 위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계명학원은 설립 초기부터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자 1926년 4월 안동교회 제직회는 계명학원 후원회원 1인당 20전씩 걷기로 결의했고, 1927년 3월에는 신학기 개학을 앞두고 학제를 5년제로 개편함으로써 계명학원의 발전을 꾀하였다. 박상동 목사의 자구 노력으로 계명학교의 재정은 넉넉하게 되어 학사운영이 공립학교를 능가할 정도였으며, 특별히 1926년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수 있었다. 안동교회를 사임하고 일본에 전도목사로 파송된 박상동 목사가 오사카 교회를 순회목사로 섬길 때 유치원이 설립되었다. 당시 교포들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에 유아 교육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민자에게 있어서 자녀 교육은 모든 것이었고 미래의 소망이었다. 오사카 교회의 유치원은 안동교회 유치원(1948년 3월 개원)에 비해 무려 23년이나 일찍 설립된 것으로 박상동 목사의 목양적 비전과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군정시대에 통역사로 활동하다가 당시 신후식 목사가 교장으로 있던 대구중학교에서 교사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특히 박상동 목사는 남산교회를 담임할 때인 1948년 9월 25일 경제적으로 힘든 청소년들을 위해 복음고등공민학교(야학)를 운영하기고 결정하고 당회의 허락을 받아 동년 10월 15일 개교함으로써 학원 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5. 음악을 좋아했던 박상동 안동교회는 교회설립 초창기부터 교회음악이 뛰어난 교회였다. 사은라 선교사가 조직한 성소병원 찬양대가 안동교회 주일예배 시에 특별찬양을 한 것은 안동교회 찬양대의 효시가 되었다. 특히 권찬영 선교사의 부인 권애라 선교사는 1928년부터 시작된 안동교회 찬양대의 오랜 반주자요 지휘자였으며 어린이들의 노래지도도 도맡아 했다. 또한, ‘봄나들이’ ‘꽃 피는 삼천리’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초생달’ ‘봄 오는 소리’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겨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권태호는 안동교회에 다니면서 8세 때부터 인노절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에게 풍금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이후 음악적 천재성을 지닌 권태호는 1918년(당시 16세)부터 안동교회의 반주자요 독창자로 활동했다. 선교사들의 음악에 관한 관심과 권태호의 활동은 당연히 안동교회 교회음악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박상동 목사가 부임하기 전 부터 활발한 교회음악의 분위기가 안동교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안동교회 성도들은 뛰어난 반주자의 오르간 반주에 맞춰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좋은 지휘자의 지도하에 잘 훈련되고 연습된 찬양대의 찬양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안동교회의 음악적 분위기는 안동교회에 시무하게 된 박상동 목사와 그의 자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박상동 목사의 3녀인 박은수 사모에 의하면 박상동 목사는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비록 안동교회의 찬양대는 박상동 목사가 1927년 일본으로 떠난 후 1928년 1월 20일 최초로 조직되었지만 찬양대 조직을 위한 분위기 조성과 구체적인 준비는 박상동 목사가 시무했던 시기에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 관서지방 순회목사로 부임한 박상동 선교사의 음악적 관심은 오사카 교회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박상동 목사는 1932년 1월 오사카 교회 제5회 공동의회에서 성가대 조직을 결정한다. 또한 박상동 목사가 사역한 나고야 교회에서는 박상동 목사의 자녀들이 찬양대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그리고 1949년 12월 19일 평양 남산현예배당에서 평양성화신학교 신학생 성가대에 의해 한국 최초로 ‘헨델의 메시야’ 전곡이 연주됐는데, 그 반주자는 박상동 목사의 장남 박대선 목사의 부인이었다. 박상동 목사의 자녀들은 아버지처럼 음악을 좋아했고, 이것은 아버지와 그들이 출석했던 교회의 음악적 분위기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소천 권태호 음악가(1903~1972). 안동에서 출생. 어린시절 선교사 부인에게 풍금을 배웠으며, 청년기에는 안동교회에서 찬송가집 172장 전곡을 암보로 연주했다. 일본에서 성악을 배웠지만 고국으로 돌아와 민족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곡들을 작곡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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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4‧끝)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대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1. 이대영, 사역을 통해 일본에 저항하다 3·1운동 이후 민족혼을 배우기 원했던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나라 기독교 청년운동의 출발이자 상징이 된 기독청년면려회는 1921년 2월 5일 이대영 목사가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교회를 섬길 때 안동교회에서 최초로 조직되었다. 면려회에 가입한 청년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봉사했으며, 복음을 들고 전도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고, 헌신을 다짐하는 예배 순서를 가졌다. 또한, 야간학교를 개설했으며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 농촌사업 등 범국민운동을 다각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대영 목사가 1921년 안동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이런 성격을 갖고 있는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은 비록 그가 목회자였지만 어떤 정신을 갖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927년에 준공된 선도당. 선교센타로 이대영 선교사가 예배 인도와 성경 교육을 했다. 이와 같은 이대영 목사의 대일관(對日觀)은 산동반도에서 선교하던 시절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약 10여 년 동안 이대영 목사와 동역했던 방지일 목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당시 일본교회는 일제치하에 있던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선교에 힘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인 목사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면서 함께 선교하자고 했고, 이대영 목사는 ‘우리가 너희 마루는 닦아 줄 수는 있지만 목사로서는 함께 못 한다’고 거절했다. 이후 일본 목사에 의해 고발되어 일본경찰에게 밤새도록 조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 억울해서 이대영 목사와 손을 잡고 통곡하며 운 적이 있다.” 이대영 목사는 일제의 압제 하에 있는 조국을 위해 무력 투쟁은 할 수 없었지만 조선의 국민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목사로서 최소한의 저항정신을 갖고 드러내었던 것이다. 12. 이대영, 일평생 기도의 사람으로 살다 이대영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의 은사가 있었고, 한 번 무릎을 꿇으면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던 기도의 종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5시부터 9시나 10시 까지 계속해 기도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이 목사와 아침 식사를 할 수 없었으며, 점심이나 저녁식사만 함께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사역을 시작할 때 반드시 기도로 시작할 정도로 기도의 사람이었다. 특히 ‘성령을 충만히 받자’는 설교에서 이대영 목사는 중국 화북신학교 교장 가옥명 박사의 말을 인용하여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성령의 능력이 많고, 기도를 적게 하면 성령의 능력이 적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성령의 능력이 없다.” 누구보다 기도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영 목사는 쉬지 않고 기도했으며, 그의 사역 역시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는 기도의 사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13. 이대영,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인 김영옥을 만나다 이대영 목사는 1921년 1월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고시위원 중에는 안동교회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대영의 목사 임직에 김영옥 목사가 깊이 관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목사 임직 후 1달도 경과하지 않은 1921년 2월, 이대영 목사는 김영옥 목사 뒤를 이어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칭따오 신의로에 있는 이대영 선교사 사역 병원과 학교. 그러나 이대영 목사는 이때 김영옥 목사를 처음으로 만난 것이 아니다. 훗날 김영옥 목사의 손자인 김형태 목사가 결혼식 장소를 부탁하기 위해 승동교회 이대영 목사를 찾았을 때 그는 자신이 김영옥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음을 김형태 목사에게 밝혔다고 한다. 이처럼 김영옥 목사는 이대영 목사의 세례와 목사 임직에 관계가 있었으며, 후에 1957년 9월 그의 손자 결혼식 주례를 이대영 목사가 승동교회에서 함으로 그 긴밀한 관계가 이어졌던 것이다. 14. 이대영, 중국을 떠나 한국교회를 섬기다 이대영 목사는 첫 번째 담임사역지인 안동교회에서의 14개월, 1948년 가족을 남겨둔 채 상해를 거쳐 귀국함으로써 두 번째 사역지인 중국 산동에서의 33년을 마치고 마지막 사역지인 서울 승동교회에 67세인 1952년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3년 후인 1955년 위임목사가 되었다. 1955년 4월 7년 동안 중국에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귀국하였고, 총회는 선교사역 30주년 기념예배 및 환영회를 개최하여 주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1956년 9월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4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신앙의 대선배로서, 인격자로서, 또한 총회장으로서 이대영 목사는 은혜롭게 회의를 진행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1959년 장로교단 분열 시에 이대영 목사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승동교회에서 개최된 제59회 총회에서 교단분열의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교단 분열의 여파는 승동교회의 분열로 이어졌고, 이후 4년 동안 계속된 분쟁으로 70세가 넘은 이대영 목사는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분쟁이라는 난제를 잘 마무리 하고 안정을 찾은 이후 1968년 11월 2일 만 81세로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였다. ▲본국에서 개회된 장로교 총회에서 선교보고를 하기 위해 선교지인 산동성을 떠나기 전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결론 이대영 목사는 2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61년 동안 묵묵히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감당한 신실한 종이었다. 그의 신앙여정은 핍박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집안의 핍박을 피해 흥해에서 목회자로서 훈련을 받은 그는 결국 고향인 예천 금곡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이 되었고, 여러 교회의 전도인과 조사로 사역하다가 평양신학교를 마친 후 목사안수를 받고 안동지역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의 제2대 담임목사로 사역하였다. 비록 14개월이라는 짧은 시무 기간에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나나낸 뛰어난 목회자였다. 특히 그는 거룩한 비전을 쫓는 순종의 종이었다. 1922년 총회의 부름을 받고 중국 산동반도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한인들을 돌보았던 탁월한 리더였다. 중국이 공산화된 후 선교사역을 중단하고 철수한 후 서울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41회 총회장으로 교회와 총회를 섬긴 영적 거인이었다. 이대영 목사는 넓은 포용력이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뿐아니라 중국에서도 많은 이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었다. 또한 재중동포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애국자였다. 그는 때때로 오늘 해야 할 것과 하지 못할 것을 용기 있게 일본인 앞에서 증언했다. 그 결과 일본 경찰에 여러 날 동안 취조를 받아야 했다. 또한 그가 말씀을 전한 마을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겼던 안동에서 어린이, 청년, 그리고 장년의 부흥이 일어났다. 중국 땅에서도 그가 섬겼던 중국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성장하고, 교회는 든든히 서 갈 수 있었다. 이대영, 그는 쉬지 않고 믿음으로 간구하는 기도의 종이었기 때문이다. 이대영 목사는 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예수님을 위해 헌신했던 하나님의 종이었다. 믿음의 선배인 그가 우리 마을, 안동지방에서 출생하고, 안동에서 교회를 섬겼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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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2)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5. 이대영, 낙심하고 있던 청년들의 부흥을 꿈꾸다 1919년 3·1만세운동의 실패로 많은 청년들이 낙심하며 실의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안동의 3·18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주도했던 안동교회는 주민들에게 새로운 대안으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경공부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우고, 절망에 빠진 청년들에게 소망을 주는 종교로 기독교가 인식되면서 의식 있는 청년들이 당시 안동읍 유일한 교회인 안동교회로 모여들게 되었다. 그 결과 1919년 9월 안동교회에서 안동기독교청년회 창립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다수 회원들이 비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신앙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인해 신앙에 기초한 청년회 조직을 새롭게 구상하게 되었고, 기독청년면려회(C.E.)가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안동선교부 주재 안대선 선교사는 기독청년면려회가 이에 가장 부합하는 청년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라는 목표를 가진 기독청년면려회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관한 책자를 홍콩으로부터 입수해서 번역하고, 그 지침에 따라 안동교회 청년회에서 도입하게 되었다. 이후 1921년 2월 당회의 허락을 얻어 한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당회장은 안동교회 동사목사인 권찬영 선교사였으며, 이대영 목사는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막 부임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대영 목사는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의 출범에 가장 앞장서서 중요한 결정을 이끌었던 것이다. 기독청년면려회는 태동 이후 빠른 속도로 전국에 확산되어 1921년 6월 안동교회에서 경북연합대회가 개최되었다. 1921년 제10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안동의 청년면려회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전국교회에 면려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함으로써 1923년에는 전국에 약 200여 교회에 기독청년면려회가 조직되게 되었다. 급기야 1923년 8월에는 조선연합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기독청년면려회는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기독청년면려회는 오늘의 청년회전국연합회, 남선교회전국연합회로 이어져오고 있으며, 해방 후 고등CE, 청년CE, 장년CE로 분할되었으며 오늘의 고등부, 청년회, 남선교회 전국연합회로 발전했다. ▲1954.4.22안동교회에서 제 5차 기독청년 면려연합회 전국대회 6. 이대영, 다음세대의 주역인 주일학교를 활성화하다 이대영 목사는 1921년 1월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21년 2월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22년 5월 중까지 교회를 섬기다가 사임하였다. 비록 1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대영 목사는 수려한 외모와 인격적 호감, 각별한 사역의 헌신으로 초기 안동교회가 든든히 서 갈 수 있는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그가 추구한 사역은 비단 개(個) 교회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성장에 롤 모델(Role Model)이 될 수 있었다. 이대영 목사가 각별히 관심을 가진 분야는 주일학교였다. 안동교회는 1921년에 접어들면서 주일학교 조직을 체계적으로 갖추기 시작했다. 안동교회의 주일학교 조직을 갖추고 교사들을 임명한 것은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였다. 그러나 이대영 목사는 주일학교 조직을 보안하기 위해 1921년 5월 제67회 당회에서 교사를 새롭게 임명하였다. 또한, 1922년 1월 30일에는 어린이들이 모이는 소아회가 운영되는 안기, 동부, 성내교회 등 3개 처소에 칠판과 분필을 보내기 위해 헌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대영 목사는 자신이 담임으로 있는 안동교회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안기, 풍기의 동부교회와 성내교회 등을 후원함으로써 안동지역의 전체에 걸쳐 어린이 부흥에 힘썼던 것을 알 수 있다. ▲제 1회 주일 학교대회(1928년) 7. 이대영, 전국적인 부흥사경회 강사로 사역하다 안동교회 당회록에 따르면 이대영 목사가 안동교회에서 시무하는 14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전국 각지를 방문하며 부흥사경회를 인도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의 여러 교회는 이대영 목사를 부흥회, 사경회, 훈련 등 강사로 줄이어 초청하였다. 당회록에 기록된 첫 번째 초빙은 1921년 3월 29일부터 4월 6일까지 대구에서 갖게 되는 여 도사경회(都査經會)에 강사로 초빙 받았다. 그러나 3월 20일부터 이미 안동교회에서 부흥회를 결정했기 때문에 초빙에 응할 수가 없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중평교회, 웅천교회, 천촌교회(경주군 서면), 경남 함안읍교회, 상주읍교회 등의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이끌었다. 또한, 전주군교회, 동산신명학교, 양림교회(전라도 광주), 남문외교회, 만촌교회, 하회교회, 대구지역 도사경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등 그는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부흥강사였다. 이대영 목사는 평균적으로 한 달에 한번 꼴로 일주일 정도의 부흥집회 강사로 출타하였다. 그는 안동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강사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8. 이대영, 경안노회 창립회원이 되다 1907년 조직된 독(獨)노회는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세워지기까지 사실상 총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독노회가 조직된 이후 한국교회의 교세는 날로 부흥되어 독노회 산하에 경기, 충청(경충), 평북, 평남, 황해, 전라, 경상, 함경 등 7대리회(代理會)를 조직하여 각 지방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후 1911년 독노회에서 1912년에는 7대리회를 노회로 승격시켜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1911년 12월 부산진 예배당에서 경상노회가 조직되었다. 또한, 1916년 제5회 총회에서는 경상노회가 헌의한 노회분립안이 가결되어 경상노회를 경북노회와 경남노회로 분리하기로 결의하였다. 1921년 제10회 총회는 경북노회와 경안노회의 분립을 결의했다. 총회에서 정한 노회 경계선은 안동군, 영주군, 봉화군, 청송군, 의성군, 영양군, 예천군, 상주군, 영덕군 및 문경군 일부지역이 포함되었다. 경안노회는 조직회장인 권찬영 선교사의 소집으로 1921년 12월 경안성서학원 전신인 안동 여성경학교에서 개회되었다. 당시 경안노회의 한국인 목사회원은 김영옥, 이대영, 강석진 목사였고, 선교사 회원은 권찬영, 인노절, 안대선이었다. 그리고 장로회원은 신택희 외 22명이었다. 개회 후 임원이 조직되었는데 투표결과 회장 김영옥 목사, 부회장 권찬영 선교사, 서기 강석진 목사, 부서기 이대영 목사, 회계 조학규 장로, 부회계 인노절 선교사가 피선되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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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1)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887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출생한 이대영 목사는 시대를 앞서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 힘든 유학이 강한 마을과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혹독했다. 그는 더 이상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객지로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일정한 훈련을 거친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향으로 보내셨고, 뛰어난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 후 전도인, 조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기독청년면려회와 주일학교를 통해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갈 뿐 아니라 지역복음화와 교회 부흥을 선도했다. 이후 총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안동을 떠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 선교사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한 이대영은 그 땅에 머무는 동안 중국인들과 함께 중국인처럼 살았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선교를 포기하고 1955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이대영 목사는 33년 동안 중국인을 동족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서 산동반도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게 하였다. 그후 그는 오직 하나님 나라, 교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1968년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선배이다. 1. 이대영, 금당실 마을에서 출생하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손인 이대영은 1887년 4월 23일,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李裕成)과 김도혜(金道徯)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대영이 출생한 마을은 금당실로 불러졌는데 선교사가 동네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다. 이대영은 괴당교회가 설립될 당시인 1907년 경, 복음을 소개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과 함께 1910년 영일군 흥해면으로 이사했다. 그는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선교사로부터 신앙훈련과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후예로서 비록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품으셨고, 훗날 중국 땅에서 복음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이대영 목사의 가족사진 2. 이대영,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다 안동을 포한한 경북북부지역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93년 배위량 선교사에 의해서이다. 이후 1902년 3월에 안의와 선교사가, 1903년 봄에 방위렴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가 안동을 직접 방문해 복음을 전했다. 특히, 부해리 선교사는 1899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미국 북장로교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99년 10월 26일 대구에 도착, 초창기 대구·경북 지역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추방되기 까지 40여 년 동안 한국선교에 평생을 바쳤다. 부해리 선교사를 포함한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의 결과,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연회보고에 의하면 경북·대구 지역 7개 고을에서 12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1905년에는 20개 고을에 8개 교회, 2명의 세례교인, 19명의 학습교인, 79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이대영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로 나뉘어진다. 우선 박용규는, 1907년 경 이대영이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소개받고 예수를 믿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미 예천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인 나만기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복음을 들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이대영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당시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있던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부해리 선교사와의 역사적 만남으로 이대영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됐으며, 이후 전도인, 조사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한 이후 한국교회와 중국선교의 거룩하고 위대한 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3. 이대영, 경북 북부지역 전도인·조사가 되다 복음을 접한 뒤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흥해로 이사한 이대영은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인 전도인 훈련을 받게 되었다. 특히 대구선교부의 중심교회인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의 전신)에서 열렸던 겨울남자성경반에서 수 년 동안 수학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목회자로서의 전문적인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선교사의 지도와 신학훈련을 받은 이대영은 전도인으로 본격적인 전도사역을 하게 되었다.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훈련받은 6년 여 동안 이대영은 이미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고, 경북노회는 그를 유급 전도인으로 인정하고 복음전도사역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고향인 금당실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예천 신전교회를 왕래하며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오게 됨으로써 신전교회가 부흥했다. 신학 기초과정을 거친 이대영은 목사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는 당시 규정에 따라 목회자 수업을 위한 문답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경북노회에서 목사후보생고시를 치러야 했으며, 1916년 6월 대구남성정교회에서 개회된 제1회 경북노회에서 평양신학교 입학을 허락받았다. 신학 입학을 허락받은 후 처음으로 이대영이 섬긴 교회는 경주군 외동면 말방리의 장산(長山)교회다. 이 때 이대영은 전도인에서 조사신분으로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4. 이대영,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하다 이대영은 1917년 5년 과정의 평양신학교에 30세에 입학하여 목사를 위한 수학을 시작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 10살 난 아들 이 있었는데, 평양에서 공부하는 기간 동안 가족들은 섬기는 교회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대영은 혼자 기숙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생활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후 이대영은 신학공부의 적응을 위해 섬기던 장산교회를 1917년 사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18년 다시 부임하여 장산교회를 섬겼다. 평양신학교 졸업반인 1920년 이대영은 이만집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대구 남성정교회 조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이만집 목사는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된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조사로 청빙을 받은 이대영은 실질적으로 대구제일교회 전신(前身)인 남성정교회를 담임하게 된 것이다. 남성정교회는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교회로 이미 이 지역의 중심교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동년 12월 2일, 17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평양신학교 제14회로 졸업하고, 이듬해인 1921년 1월 12일 대구동산성경학원에서 개회된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 임직예식을 마친 이대영 목사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청빙허락을 받아 부임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1921년 6월 15일 개회된 제10회 경북노회에 정식 노회원으로 참석하여 본격적인 노회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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