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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11월 말까지 “가을철 농촌일손돕기” 적극 나서예천군은 본격적인 수확기 영농철을 맞아 공무원, 군인, 학생, 기관단체, 민간단체 등 1,000여 명의 인원을 투입해 11월 30일까지 “가을철 농촌일손돕기”에 나선다. 군은 11월 말까지 읍·면 행정복지센터, 지역농협, 농업인상담소에 “일손돕기 지원 창구”를 운영해 재해농가, 고령자와 부녀자 농가 등 일손 부족으로 적기 수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가를 선별 지원할 방침이다. 올해 가을 첫 일손 돕기 지원으로 지난 10월 22일 농협중앙회 대구지역본부 및 대구 고향주부모임 회원 80여 명이 사과수확 돕기를 하였으며, 앞으로도 군은 관내 기관단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사과, 무, 콩 등의 수확에 본격적인 일손을 지원할 계획이다. 특히, 일손돕기 참여자들에게 작업도구와 도시락 등을 자체로 준비하게 하여 농가의 부담을 없애고, 전문기술이 필요한 작업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사전교육으로 농가에 피해가 되지 않는 실질적인 도움을 주게 했다. 예천군 관계자는 “본격적인 수확 철을 맞아 부족한 농촌 일손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도록 기관단체, 민간단체, 군부대, 군 산하기관 등의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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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3)나의 출애굽기(3) 드보라 8. 딸이 대학 가는 것을 반대하신 아버지 그렇지만 아버지의 태도는 모순적인 면이 있었다. 그렇게 여자가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시면서도 언니는 대학을 보내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언니는 공부를 그리 잘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언니에게 경제나 회계 관련 공부를 하면 좋겠다 생각하셨다. 그래서 언니를 경제 관련 대학에 보내기 위해 억지로 학교 교장선생님 등하고 뒷문으로 사업을 해서 뇌물도 건네주었다. 당시 러시아 빵이 귀했는데 그 빵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렇게 겨우 대학 입학권을 하나 따내고 언니는 대학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공부가 부족한 가운데 무리해서 시험을 봤던 언니는 결국 시험을 망치고 말았고 입학도 하지 못했다. 이 일을 겪고 나자 아버지는 분이 나셔서 ‘에잇, 여자는 공부시키는 게 아니야’하고는 나를 공부시키려고 하지 않으셨다. 결국 내가 대학 갈 때가 되자 집에서 논란이 있었다. 부모들은 항상 나를 제외하고 남동생과 언니 위주로 챙긴다는 생각에 나는 더 반항적으로 행동했고, 부모님은 나를 대학 보낼 생각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갈등은 더 깊어졌다. 9. 유치원 교사를 꿈꾸다 … 교원대학에 지원 그래도 대학은 꼭 가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유치원 교사가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대학 지망을 쓸 때도 1-3순위 모두 교원대학을 썼다. 사실 점수를 생각하면 1순위에는 더 좋은 학교를 써야 했다. 보통 평양이나 수도권 대학은 1순위, 지방 주요 도시의 저명한 대학은 2순위였고 내가 가려고 했던 지방 교원 대학은 3순위 정도였다. 그러니 선생님께서도 1-3순위를 왜 다 같은 곳을 썼나며 의아해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이상하게 어린이 교사가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학교를 지원하고 교원 대학 시험을 보았다. 약 1주일 동안 면접을 포함해서 시험을 보았다. 이때 또다시 나는 부모님께 섭섭함을 느꼈다. 언니 때는 아버지께서 손수 여관방을 잡아서 1주일 동안 함께 지내며 언니를 챙겨주시더니 내가 시험 볼 때는 출장 가신다고 그냥 버려두셨기 때문이다. 출장 때문에 못 오신 것이긴 했지만, 그것이 아니어도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 확실했다. 특히 대학 면접에는 부모도 함께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나는 혼자 면접관 앞에 못 오신 부모님 사정을 거짓말로 만들어서 설명하기 급급했다. 화가 났다. 그렇게 시험을 보고 왔더니 아버지는 출장 갔다가 돌아오셔서 교원 대학 시험을 봤다고 나에게 화를 내셨다. 여자 대학생들이 다 그렇지만 그중에 선생이 제일 입이 여물고 고집스럽다고 하시면서 나를 나무라시고는 평소 입버릇처럼 “대학을 졸업해도 팔자 안 풀린다. 시집을 잘 가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버지께서는 출장을 다니시면서 해안지역에 처자들이 염전에서 소금 밀차를 끌면서 고생하시는 것을 보셨는데 그 여자들이 다 대학 졸업한 여자였다고 한다. 그런 광경을 보고 아버지는 ‘여자가 공부보다 결혼을 잘해야 하는데, 괜히 많이 배워서 입이 모질면 좋은 혼사 자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이셨던 것 같다. 10. 가난한 대학생 시절 어쨌든 나는 대학 합격했다. 교원 대학에서도 소학교 교사가 아닌 유치원 교사 공부를 했다. 학업 기간 2년에 훈련 6개월 해서 총 2년 6개월의 대학생활이었다. 북한은 대학 등록금은 없었다. 그대신 학교 기숙사 밥이 형편없어서 늘 배고팠다. 나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같이 지내는 친구들 중 농사짓는 시골이 고향인 친구들은 주말에 집에 갔다 오면 군것질거리로 옥수수나 콩 볶은 것을 한 움큼씩 가져오곤 했다. 그러면 그것을 숙소에서 나눠 먹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무리에 끼지 못했다. 집에서 챙겨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갔다 올 때마다 나는 그 조그마한 간식거리를 가져가지 못해서 그냥 울면서 왔다. 염치가 없어서 애들이 간식 나눠 먹을 때 공부만 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도 많이 못 만들었다. 이렇게 1년을 지내니 나중에는 그래도 자식이라고 어머니께서 조금씩 간식과 용돈을 챙겨주셨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내가 대학 공부 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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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나의 출애굽기(2) 드보라 5. 외할아버지에 대한 회개 기도 나는 한국에 왔을 때 ‘가족 중에서 내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남한에 와서 사는구나, 집에서 따돌림 왕따 차별받았는데 내가 드리어 쓰임 받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성경을 읽으면서 나는 특히 요셉 이야기에 감정이입을 많이 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지만 결국에는 크게 되고 쓰임 받았던 요셉과 같이 하나님께서 가족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나를 요셉과 같이 이끄신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모임에서 목사님이 보여주신 책 사진을 볼 때 하나님은 나를 깨우쳐 주셨다. 바로 외할아버지의 기도와 헌신이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했고, 이 땅에 오게 했고, 통일의 비전을 꿈꾸게 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자는 중에 꿈인지 환상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중에 생생한 장면 하나를 보았다. 김일성 초상화를 바닥에 엎어놓고 무릎 꿇고 엎드려 예배하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여 나는 벌떡 잠에서 깨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나는 내가 사랑받지 못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형제들에게 버림받았던 요셉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나중에 가족을 구원할 믿음의 첫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 핍박 속에서도 기도하셨던 할아버지의 기도가 나를 살게 했다. 나야말로 외할아버지의 눈물의 기도 열매였고, 정말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사실 전혀 사랑받을 자격 없었던 내가, 어릴 적부터 질투와 욕심, 짜증만 부리던 자였던 내가 그 사랑을 받았다는 감동에 나는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고난 중에 가족에게도 나누지 못한 채로 그렇지만 믿음을 지키신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로 고향을 위해 기도했다. 내 안에 남아있던 쓴 뿌리들이 그 눈물 속에 씻겨져 나갔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에는 그러한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6. 북한에서의 학창시절 그 당시 북한은 그래도 경제 사정이 괜찮았다. 어릴 적만 해도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김일성 수령을 신으로 받드는 북한의 교육과 사상통제 안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아니 하나님을 모욕하며 살았다. 나도 역시 김일성 수령을 민족의 어버이요 신과 같은 존재로 믿고 그렇게 살아왔다. 외할아버지의 눈물 어린 기도가 있었는지 전혀 모른 채, 사람이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나는 여전히 가족들은 날 미워한다 생각하며 심술을 부리면서 그렇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갔다. 집과 학교의 이중생활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항상 집에서는 말썽꾸러기, 천덕꾸러기였지만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상당히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외국어로 2개 반을 운영했다. 러시아어 반과 영어 반이었는데 나는 영어 반을 선택했었다. 그 당시에는 영어가 우리가 그토록 증오하는 미제가 사용하는 언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영국에서 쓰는 언어라고만 알고 있었다. 배웠던 영어 발음도 영국식이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6학년 졸업이 2년 남은 4학년 때부터 시험을 보고 경연을 해서 뛰어난 학생들을 추렸다. 그리고는 그 학생들을 따로 모아서 공부를 시켰다. 북한의 학교가 여기서 말하는 비평준화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학교 체면이 중요하다 보니 좋은 대학을 많이 보내려고 했다. 내가 있던 학교는 한 학년에 약 200~300명 정도 됐는데 그중에 1반 정도를 수재반으로 따로 구분을 시켰다. 7. 딸의 교육을 반대하신 아버지 나는 평소 좋은 학업 성적 덕분에 그 반에 들어가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집에서는 내가 공부하고 또 대학 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머릿속에 여자 대학생들은 ‘집안 살림은 안 하고 입만 여물어서 남자를 깔보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러시아에서 돌아오신 뒤에 배치받은 직장은 외부 출장이 잦았는데, 출장 다니시면서 여자 대학생들을 이리저리 지나칠 기회들이 많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요즘도 그렇지만 그 당시 아버지 세대에는 남존여비사상이 심했다. 아버지는 그래서 공부에 대해 부정적이셨고 집에서 생활 살림이나 잘하라고 하셨다. 집에서 공부를 못하게 해서 나는 숙제도 학교에서 다 해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 (오픈도어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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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etter Country(본향)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을 찾아갑니다.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추석을 맞이하여 고향을 찾아 대이동을 하였습니다. 고향 가는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하고 많은 시간이 걸려도 고향을 찾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든 인간이 잃어버린 낙원 즉 에덴동산을 그리워하듯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1. 사람에게는 고향이 있습니다. 고향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태어나 자라난 곳”입니다. 고향을 다른 말로는 본향(本鄕)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영어로 Native place 또는 Home town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네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 때 “Where do you come from?”이라고 말합니다. 즉 “당신은 어디서 온 사람입니까?”라는 뜻입니다. 즉 사람은 어디서 태어나서 온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고향과 영혼의 고향이 있음을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육신은 흙으로 만드셨고 영혼은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인간은 아담입니다. 아담이라는 뜻은 ‘사람’ 또는 ‘흙’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육신은 본래의 고향인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영어로 “Return to his old home” 또는 “Return to his native home” 즉 “옛날 집 또는 본래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는 것은 영원한 고향을 찾는 연습과 같고 고향을 찾아가면서 인생의 근본적인 교훈을 깨닫도록 한 것입니다. 2. 사람은 나그네 인생으로 삽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죽었을 때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갔다고 했습니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다”고 하였습니다.(히11:13) 그러므로 우리는 한평생 나그네로 내 인생을 살다 가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영어로는 “stranger” 또는 “exile”이라고 합니다. ‘exile’이라는 단어의 뜻은 ‘타향살이’, ‘유배생활’, ‘유랑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용어로는 ‘순례자’라는 뜻을 가진 ‘Pilgrim’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본향인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외국인으로 나그네 인생을 살다가 본향인 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 세상이 영원한 본국인 줄 알고 세상에만 연연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류민이요 나그네인 길손일 뿐입니다. 3. 사람은 본향을 사모하며 삽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했습니다.(히11:16) 마치 자동차나 비행기가 가는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길도 마지막 종착지인 본향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본향은 ‘더 나은 본향’입니다. 그래서 ‘더 나은 본향’을 영어성경에는 ‘Better country’ 라고 하였습니다. 즉 ‘더 나은 나라’라는 뜻입니다. 나그네 삶을 사는 이 세상과 비교가 안 되는 더 나은 본향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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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지를 찾아서(2)-엄주선 강도사경북 유일 6.25전쟁 순교자 ▷ 엄주선 강도사 순교 이야기 엄주선 강도사는 1919년 5월 23일 경북 의성군 다인면 봉정동에서 출생했으며, 1935년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부친과 함께 고향 다인면 봉정동에서 예천 상락교회까지 걸어서 믿음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일제의 수탈로 부친과 함께 만주 봉천(현, 심양)으로 건너가 봉천에 있는 서탑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를 섬기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엄 강도사는 대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을 위한 소명감에 불타 1949년 12월 장로회신학교(현,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제43회), 1950년 5월 목사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1950년 12월 청송 화목교회를 시무하다가 1951년 2월 17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홀로 기도하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공산군 패잔병들에 의해 납치를 당했다. 엄 강도사는 함께 납치돼 끌려가던 내복 차림의 신중건 씨에게 대한(大寒)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입혀주는 사랑을 베풀었다. 또한, 엄 강도사는 인민군 10사단장 김두봉에게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했으며, “예수를 안 믿겠다고 약속하면 죽이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회유를 거절했다. 결국, 엄 강도사는 춘산면 옥정동(바랑골)에서 죽창으로 19군데를 찔린 채 순교를 당했다. 이후 공산군이 퇴각하자 화목교회 박치환 장로, 양재관 장로, 엄규영 영수(부친)가 사체를 찾아냈으며 박도선, 양원석, 김상정 집사 등이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 청송군 화목교회로 운구하여 경북노회 순교자장(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 엄주선 강도사 순교사적지 지정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는 지난 2012년 5월, 엄주선 강도사의 숭고한 사랑과 순교 정신을 기리고자 의성군 춘산면 순교지와 청송군 현서면 순교테마공원을 한국기독교사적지 10호, 10-1호로 각각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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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4‧끝)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대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1. 이대영, 사역을 통해 일본에 저항하다 3·1운동 이후 민족혼을 배우기 원했던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나라 기독교 청년운동의 출발이자 상징이 된 기독청년면려회는 1921년 2월 5일 이대영 목사가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교회를 섬길 때 안동교회에서 최초로 조직되었다. 면려회에 가입한 청년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봉사했으며, 복음을 들고 전도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고, 헌신을 다짐하는 예배 순서를 가졌다. 또한, 야간학교를 개설했으며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 농촌사업 등 범국민운동을 다각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대영 목사가 1921년 안동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이런 성격을 갖고 있는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은 비록 그가 목회자였지만 어떤 정신을 갖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927년에 준공된 선도당. 선교센타로 이대영 선교사가 예배 인도와 성경 교육을 했다. 이와 같은 이대영 목사의 대일관(對日觀)은 산동반도에서 선교하던 시절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약 10여 년 동안 이대영 목사와 동역했던 방지일 목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당시 일본교회는 일제치하에 있던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선교에 힘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인 목사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면서 함께 선교하자고 했고, 이대영 목사는 ‘우리가 너희 마루는 닦아 줄 수는 있지만 목사로서는 함께 못 한다’고 거절했다. 이후 일본 목사에 의해 고발되어 일본경찰에게 밤새도록 조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 억울해서 이대영 목사와 손을 잡고 통곡하며 운 적이 있다.” 이대영 목사는 일제의 압제 하에 있는 조국을 위해 무력 투쟁은 할 수 없었지만 조선의 국민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목사로서 최소한의 저항정신을 갖고 드러내었던 것이다. 12. 이대영, 일평생 기도의 사람으로 살다 이대영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의 은사가 있었고, 한 번 무릎을 꿇으면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던 기도의 종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5시부터 9시나 10시 까지 계속해 기도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이 목사와 아침 식사를 할 수 없었으며, 점심이나 저녁식사만 함께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사역을 시작할 때 반드시 기도로 시작할 정도로 기도의 사람이었다. 특히 ‘성령을 충만히 받자’는 설교에서 이대영 목사는 중국 화북신학교 교장 가옥명 박사의 말을 인용하여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성령의 능력이 많고, 기도를 적게 하면 성령의 능력이 적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성령의 능력이 없다.” 누구보다 기도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영 목사는 쉬지 않고 기도했으며, 그의 사역 역시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는 기도의 사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13. 이대영,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인 김영옥을 만나다 이대영 목사는 1921년 1월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고시위원 중에는 안동교회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대영의 목사 임직에 김영옥 목사가 깊이 관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목사 임직 후 1달도 경과하지 않은 1921년 2월, 이대영 목사는 김영옥 목사 뒤를 이어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칭따오 신의로에 있는 이대영 선교사 사역 병원과 학교. 그러나 이대영 목사는 이때 김영옥 목사를 처음으로 만난 것이 아니다. 훗날 김영옥 목사의 손자인 김형태 목사가 결혼식 장소를 부탁하기 위해 승동교회 이대영 목사를 찾았을 때 그는 자신이 김영옥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음을 김형태 목사에게 밝혔다고 한다. 이처럼 김영옥 목사는 이대영 목사의 세례와 목사 임직에 관계가 있었으며, 후에 1957년 9월 그의 손자 결혼식 주례를 이대영 목사가 승동교회에서 함으로 그 긴밀한 관계가 이어졌던 것이다. 14. 이대영, 중국을 떠나 한국교회를 섬기다 이대영 목사는 첫 번째 담임사역지인 안동교회에서의 14개월, 1948년 가족을 남겨둔 채 상해를 거쳐 귀국함으로써 두 번째 사역지인 중국 산동에서의 33년을 마치고 마지막 사역지인 서울 승동교회에 67세인 1952년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3년 후인 1955년 위임목사가 되었다. 1955년 4월 7년 동안 중국에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귀국하였고, 총회는 선교사역 30주년 기념예배 및 환영회를 개최하여 주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1956년 9월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4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신앙의 대선배로서, 인격자로서, 또한 총회장으로서 이대영 목사는 은혜롭게 회의를 진행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1959년 장로교단 분열 시에 이대영 목사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승동교회에서 개최된 제59회 총회에서 교단분열의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교단 분열의 여파는 승동교회의 분열로 이어졌고, 이후 4년 동안 계속된 분쟁으로 70세가 넘은 이대영 목사는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분쟁이라는 난제를 잘 마무리 하고 안정을 찾은 이후 1968년 11월 2일 만 81세로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였다. ▲본국에서 개회된 장로교 총회에서 선교보고를 하기 위해 선교지인 산동성을 떠나기 전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결론 이대영 목사는 2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61년 동안 묵묵히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감당한 신실한 종이었다. 그의 신앙여정은 핍박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집안의 핍박을 피해 흥해에서 목회자로서 훈련을 받은 그는 결국 고향인 예천 금곡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이 되었고, 여러 교회의 전도인과 조사로 사역하다가 평양신학교를 마친 후 목사안수를 받고 안동지역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의 제2대 담임목사로 사역하였다. 비록 14개월이라는 짧은 시무 기간에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나나낸 뛰어난 목회자였다. 특히 그는 거룩한 비전을 쫓는 순종의 종이었다. 1922년 총회의 부름을 받고 중국 산동반도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한인들을 돌보았던 탁월한 리더였다. 중국이 공산화된 후 선교사역을 중단하고 철수한 후 서울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41회 총회장으로 교회와 총회를 섬긴 영적 거인이었다. 이대영 목사는 넓은 포용력이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뿐아니라 중국에서도 많은 이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었다. 또한 재중동포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애국자였다. 그는 때때로 오늘 해야 할 것과 하지 못할 것을 용기 있게 일본인 앞에서 증언했다. 그 결과 일본 경찰에 여러 날 동안 취조를 받아야 했다. 또한 그가 말씀을 전한 마을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겼던 안동에서 어린이, 청년, 그리고 장년의 부흥이 일어났다. 중국 땅에서도 그가 섬겼던 중국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성장하고, 교회는 든든히 서 갈 수 있었다. 이대영, 그는 쉬지 않고 믿음으로 간구하는 기도의 종이었기 때문이다. 이대영 목사는 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예수님을 위해 헌신했던 하나님의 종이었다. 믿음의 선배인 그가 우리 마을, 안동지방에서 출생하고, 안동에서 교회를 섬겼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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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1)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887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출생한 이대영 목사는 시대를 앞서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믿기 힘든 유학이 강한 마을과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혹독했다. 그는 더 이상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객지로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일정한 훈련을 거친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향으로 보내셨고, 뛰어난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 후 전도인, 조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기독청년면려회와 주일학교를 통해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갈 뿐 아니라 지역복음화와 교회 부흥을 선도했다. 이후 총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안동을 떠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 선교사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한 이대영은 그 땅에 머무는 동안 중국인들과 함께 중국인처럼 살았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선교를 포기하고 1955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이대영 목사는 33년 동안 중국인을 동족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서 산동반도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게 하였다. 그후 그는 오직 하나님 나라, 교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1968년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선배이다. 1. 이대영, 금당실 마을에서 출생하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손인 이대영은 1887년 4월 23일,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李裕成)과 김도혜(金道徯)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대영이 출생한 마을은 금당실로 불러졌는데 선교사가 동네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다. 이대영은 괴당교회가 설립될 당시인 1907년 경, 복음을 소개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과 함께 1910년 영일군 흥해면으로 이사했다. 그는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선교사로부터 신앙훈련과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후예로서 비록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품으셨고, 훗날 중국 땅에서 복음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이대영 목사의 가족사진 2. 이대영,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다 안동을 포한한 경북북부지역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93년 배위량 선교사에 의해서이다. 이후 1902년 3월에 안의와 선교사가, 1903년 봄에 방위렴 선교사와 부해리 선교사가 안동을 직접 방문해 복음을 전했다. 특히, 부해리 선교사는 1899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미국 북장로교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99년 10월 26일 대구에 도착, 초창기 대구·경북 지역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추방되기 까지 40여 년 동안 한국선교에 평생을 바쳤다. 부해리 선교사를 포함한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의 결과,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연회보고에 의하면 경북·대구 지역 7개 고을에서 12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1905년에는 20개 고을에 8개 교회, 2명의 세례교인, 19명의 학습교인, 79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다. 이러한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이대영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로 나뉘어진다. 우선 박용규는, 1907년 경 이대영이 나만기에 의해 복음을 소개받고 예수를 믿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미 예천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인 나만기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복음을 들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은 이대영이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이대영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당시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있던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부해리 선교사와의 역사적 만남으로 이대영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됐으며, 이후 전도인, 조사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한 이후 한국교회와 중국선교의 거룩하고 위대한 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3. 이대영, 경북 북부지역 전도인·조사가 되다 복음을 접한 뒤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흥해로 이사한 이대영은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인 전도인 훈련을 받게 되었다. 특히 대구선교부의 중심교회인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의 전신)에서 열렸던 겨울남자성경반에서 수 년 동안 수학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목회자로서의 전문적인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선교사의 지도와 신학훈련을 받은 이대영은 전도인으로 본격적인 전도사역을 하게 되었다.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훈련받은 6년 여 동안 이대영은 이미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고, 경북노회는 그를 유급 전도인으로 인정하고 복음전도사역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고향인 금당실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예천 신전교회를 왕래하며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오게 됨으로써 신전교회가 부흥했다. 신학 기초과정을 거친 이대영은 목사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는 당시 규정에 따라 목회자 수업을 위한 문답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경북노회에서 목사후보생고시를 치러야 했으며, 1916년 6월 대구남성정교회에서 개회된 제1회 경북노회에서 평양신학교 입학을 허락받았다. 신학 입학을 허락받은 후 처음으로 이대영이 섬긴 교회는 경주군 외동면 말방리의 장산(長山)교회다. 이 때 이대영은 전도인에서 조사신분으로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4. 이대영,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직하다 이대영은 1917년 5년 과정의 평양신학교에 30세에 입학하여 목사를 위한 수학을 시작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 10살 난 아들 이 있었는데, 평양에서 공부하는 기간 동안 가족들은 섬기는 교회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대영은 혼자 기숙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생활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후 이대영은 신학공부의 적응을 위해 섬기던 장산교회를 1917년 사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18년 다시 부임하여 장산교회를 섬겼다. 평양신학교 졸업반인 1920년 이대영은 이만집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대구 남성정교회 조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이만집 목사는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된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조사로 청빙을 받은 이대영은 실질적으로 대구제일교회 전신(前身)인 남성정교회를 담임하게 된 것이다. 남성정교회는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교회로 이미 이 지역의 중심교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동년 12월 2일, 17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평양신학교 제14회로 졸업하고, 이듬해인 1921년 1월 12일 대구동산성경학원에서 개회된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 임직예식을 마친 이대영 목사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청빙허락을 받아 부임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1921년 6월 15일 개회된 제10회 경북노회에 정식 노회원으로 참석하여 본격적인 노회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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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1)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 영 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1893년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안동지역에 복음이 전해진지 124년이 지났다. 오늘의 교회는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안다. 훌륭한 믿음의 선배 중에는 교역자들 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포함된다. 이 분들의 헌신의 결과로 척박한 이곳 안동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 마을마다 교회가 서게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수고임을 알기에 감사할 뿐이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선교 초기 거룩한 발걸음을 통해 거룩한 흔적을 남긴 위대한 선배이다. 필자는 그에 대한 조명이 너무 늦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그리고 경상북도에서 초개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며 교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김영옥 목사를 연구하여 탈고하니 그동안 목사님에게 가졌던 죄송스러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느낌이다. 이제 자애로운 아버지요 할아버지, 지역의 초대교회의 기초를 든든히 세워 중심교회로 서게 한 목사,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애국한 김영옥을 소개한다. 1.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결신한 청년, 김영옥 경상도의 첫 한국인 목사는 김영옥(金泳玉, 1871-1952)이다. 김영옥이 비록 영남지역 최초의 한국인 목사이지만 그의 고향은 북한으로, 그는 1871년 4월 12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했다. 가난했던 그는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갈 꿈을 갖고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18세가 되던 1888년 어느 날, 평산 누님 댁에 갔다가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가 소래(松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국으로 갈 방법을 찾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제시받은 김영옥은 미국 갈 결심을 포기함과 동시에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로부터 세례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전혀 뜻하지 않게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은 김영옥은 세례 까지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부로 복음사역의 적극적인 도우미가 되었다. ▲1909년 9월부터 안동의 북부지역은 사우대 선교사가, 서쪽은 오월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좌측 말에 탄 사람은 사우대 선교사이며 말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시 조사인 김영옥(1911년 안동교회 초대담임목사로 부임)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부, 그리고 오른쪽 말에 탄 사람은 오월번 선교사이다. 2. 목사 임직 이전의 복음전도자, 김영옥 회심 이후 김영옥은 복음사역을 위해 하나하나 착실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복음전파사역에 관한 김영옥의 결심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곁길로 간 적이 없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한 준비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 1년 만에 한문 신·구약 성경 모두를 통독(通讀)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한 선교사들로부터 전도법과 장로교회에 관해 배웠으며 선교사들과 간단히 대화할 수 있는 영어실력도 갖추게 되었다. 모든 과정을 이수한 김영옥은 실력 있는 매서인(賣書人)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사를 도와 공식적인 매서인으로서 사역할 수 있었다. ▲황해도 솔래(松川)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18세 때(1888년) 회심하고 결신한 김영옥은 휴식도 없이 64년(1952년) 동안 서울, 강원도 철원과 원주, 경북 안동, 사월, 포항, 영주, 경주, 풍기, 문경, 그리고 의성 삼분 등 전국에서 교회를 세우고 돌보며 애국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온 김영옥은 1893년 모삼열(Samuel. F. Moore)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순교를 각오하고 서울 종로 5가, 4가 등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몇 명의 성도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1894년 이들이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와 그의 조사(助事)인 서상륜과 함께 연지동 초가(草家)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연동(蓮洞)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또한 김영옥은 조사로서 서울의 승동교회와 동막교회 설립에 관여함으로써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쉬지 않고 감당했다. 이후 김영옥은 서울을 벗어나 더욱 활발하게 전도사역을 감당했다. 그는 경기 동쪽과 황해도 이남(以南)으로 순행하며 전도하여 백천, 평산, 금북, 금성, 양구, 화천, 양주, 포천, 등지에 여러 교회를 설립에 기여했다. 특히 김영옥은 1898년 모삼열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고 개척한 고향인 황해도 백천군 운교(雲橋)교회에서 영수(領袖)와 장로로 섬기기도 했다. 운교(구름다리)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큰 한옥을 사서 새롭게 단장하여 예배처소로 사용한 그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김영옥은 주일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는 새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신자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2주 내지 3주간씩 연속으로 사경회를 열기도 하였다. 김영옥은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한국교회 초기 매서와 조사, 그리고 영수와 장로로 초기 한국교회의 뛰어난 평신도 지도자였던 것이다. 3. 영적 지도력을 갖춘 한국 장로교 평신도 리더, 김영옥 조사(助師)는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그들의 고국과는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이 땅에서 적응해갈 수 있도록 도운 사람들이다. 선교사들은 이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부동산을 구입할 때 도움을 받았으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각 지방으로 순행할 때 큰 도움을 받았다. 만일 어느 누구도 선교사들의 복음사역과 현지 적응을 돕지 않았다면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이 땅에서 복음의 씨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영옥은 조사로서 초기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 한국선교 초기 많은 조사들이 있었지만 조선장로교사기에 따르면 김영옥은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도 영향력 있는 발언권을 가진 조사였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공식적인 회의석상에서 중요한 발언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영옥은 1903년 9월, 1904년 9월, 1906년 9월 세 차례에 걸쳐 선교사들과 함께 모인 장로교공의회 경성소회 총대 장로로 참석하여 발언하기도 했다. 1906년 9월 회의에서는 “교인으로는 교회를 순종하고 국민으로는 국가에 순종할 방침이란 문제”에 대하여 발언했는데, 이것은 분명한 기독교적 국가관을 가진 김영옥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명의 한국인 목사가 처음으로 배출되기 전 까지 김영옥은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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