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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 백석대신 경북노회 제75회 정기노회 열려예장 백석대신 경북노회(노회장 윤상훈 목사) 제75회 정기노회가 지난 15일~16일 영주시 소재 가흥동교회에서 개최됐으며, 주요안건 처리와 함께 목회자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순서를 가졌다. 부노회장 김기현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개회예배는 서기 이선로 목사의 대표기도, 회의록서기 이상춘 목사의 성경봉독에 이어 윤상훈 노회장이 “합당한 삶”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다. 윤 목사는 설교를 통해 “목회자는 내 지식, 내 생각, 내 판단으로 살지 말고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자”고 전했다. 이어 진행된 성찬예식에서 직전노회장 김창기 목사는 “우리가 바라는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권면했고, 증경노회장 최기성 목사의 축도로 모든 예배 순서를 마쳤다. 2부에는 윤상훈 노회장의 사회로 회무처리가 진행됐으며 특히, 총회 주요 의결사항인 “교단명칭을 백석대신으로 사용하며, 공문서 발송에 있어서 문서뿐 아니라 전자메일(이메일, 문자발송)도 백석대신 명칭과 회기를 공식적인 문서로 인정한다”를 결의했다. 한편, 이날 노회 장학사업부에서는 선발된 목회자 자녀 6명에게 총 520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장학금을 받은 최병일 학생(최영식 목사 자녀)은 “학생들을 위해 후원해 주신 노회 목사님들께 감사드리며 더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장학금 받은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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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서라벌교회, 은퇴·추대·임직 감사예배한국기독교장로회 경주서라벌교회(담임목사 홍석하)는 교회창립 63주년을 맞아 지난 7일(주) 오후 4시 본교회당에서 임직 감사예배를 드렸다. 이번 임직식에는 시무권사 은퇴(정순조 장태숙), 안수집사 은퇴(김진원), 명예권사 추대(이순우), 권사 임직(장성순 홍정옥 박기영 송정순 조분제 송문식)을 통해 새롭게 세워진 직분자들이 교회에 충성과 헌신을 다짐했다. 홍석하 목사 인도로 드려진 1부 예배에서는 김종진 장로(경동시찰위원장 포항제이교회)의 기도 후 정언용 목사(흥해제일교회)가 “이런 사람을 알아주라”란 제목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이어진 임직식은 홍석하 목사의 집례로 진행됐으며, 함택진 원로목사의 축사와 권면, 본교회 장로중창단·시무권사회 축가, 교우들의 축하 등의 순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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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 되게 하소서”예장통합 경서노회 제134회 정기노회가 10월 15일(월)~16(화)까지 상주교회당에서 열렸다. 개회예배는 곽희주 부노회장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기도는 부노회장 도영일 장로, 성경봉독은 회록서기 김경환 목사, 설교는 노회장 김영춘 목사가 “영적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 되게 하소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김 목사는 “영적부흥 없이는 민족의 동반자가 될 수 없다”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주님의 희생과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가 거룩해지고 교회가 거룩해지고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성찬예식 후 예배를 마치고 회무처리 시간에는 회원점명과 개회선언, 회순채택 후 임원 선거를 했다. 선거 결과 제134회 노회장에 곽희주 목사(상주교회), 부노회장에 정만익 목사(구미하은교회)와 박상도 장로(대광교회)가 선출돼 노회를 섬기게 됐다. 신임노회장 곽희주 목사는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부족한 저를 노회원들이 도와주신다면 노회를 은혜롭고 평화롭게 이끌어가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신임 임원진 ▲노회장 곽희주 목사(상주교회), ▲부노회장 정만익 목사(구미하은교회), ▲부노회장 박상도 장로(대광교회), ▲서기 윤석호 목사(문경시찰), ▲부서기 장영운 목사(김천동시찰), ▲회록서기 이병철 목사(구미시찰), ▲부회록서기 감기수 목사(구미남시찰), ▲회계 서정호 장로(상주시찰), ▲부회계 백평목 장로(김천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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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노회 제70회 정기노회, 신임 노회장에 강성효 목사 취임예장통합 영주노회 제70회 정기노회가 10월 11일(목)~12(금)까지 예천교회당에서 열렸다. 목사 회원이 186명 중 출석 163명 결석 23명, 장로 회원이 141명 중 출석 134명 결석 7명, 합계 327명 중 출석 297명 결석 30명으로 노회가 성회 되었다. 개회예배는 김기태 노회장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성찬예식 후 회원점명, 개회선언, 회순채택 순으로 회무처리에 들어갔다. 이어 임원선거 결과 신임 노회장에 강성효 목사(장수)가, 부노회장에 조영광 목사(동촌)와 송인화 장로(성내)가 선출되었다. 회순에 따라 각 부와 위원회의 보고가 있었고, 교회에 관한 건, 목사에 관한 건, 전도사에 관한 건, 장로에 관한 건 등을 처리했다. 또한, 중요 결의사항으로 노회회관 개선위원회 폐지의 건, 정기노회 날짜 개정, 한국목회자선교협의회에 대한 총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의 ‘예의 주시 및 참여 자제’ 등의 내용을 알렸다. 공로목사 최창동 목사(봉산)와 최갑도 목사(성내) 영주노회 신임 노회장 취임사 영주노회 강성효 목사(장수교회)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 그리고 부족한 종에게 노회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맡겨주신 총대 목사, 장로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영주노회는 경북 최북단에 있어 지리적으로는 산지가 많아 낙후되어 있으며 문화적으로는 유교의 영향으로 보수적인 지방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인간관계가 끈끈하고 인심이 후덕하여 살기 좋은 고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아래 영주노회 산하 162개 교회가 부흥 발전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살아보면 갈렙이 산지를 달라고 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빛나는 노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더욱 부흥하고 발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노회가 되도록 모든 임원들과 하나가 되어 최선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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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교회 건축선교회’ 선교현장 보고-이해견 장로지난 10년 우리 선교회에서 C국 M족들에게 13개의 예배당을 지어주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갈수록 출입의 위험을 느껴 촛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나만 어떻게 되고 마는 것이 아니고, 1번부터 13번까지 내가 관계된 곳도 온전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2017년도 11월에 V국으로 옮겨서 선교 사역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손자하고 둘이 들어가 14, 15, 16호를 착공하고 돌아왔고, 이후 방송출연, 간증집회, 광고, 지인들의 후원 등으로 올해에는 5개 교회의 착공 준비를 하게 되었다. 다음은 3개 교회 헌당예배와 5개 교회 착공예배를 위해 최근 V국을 다녀온 선교현장 보고이다. 9월 17일, 목사님 두 분, 장로님 세 분, 권사님 집사님 등 모두 13명으로 이루어진 선교팀은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해마다 이쯤이면 연례행사처럼 선교지를 방문하기에 이제는 망설임, 두려움 없이 집을 나서게 된다. 그동안 혼자 가서 헌당하고 착공하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13명을 인솔하게 되서 오히려 부담되었다. 지병이 있으신 분, 노약하신 분, 해외에 처음 나가는 분 등 기도해야 할 분이 여럿 계셨다. 그러나 우리는 관광하러 가는 것도, 해외 사업을 위해 가는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선한 목적으로 가는 것이기에 크게 염려는 되지 않았다. 첫날 4시간 반 정도 걸려 하노이 공항에 도착하고, 현지 파송된 선교사님의 안내로 호텔에서 1박을 했다. 그리고 둘째 날 아침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체험했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정면으로 통과할 것으로 예보되었던 태풍 라이온의 예상 경로가 어긋난 것이다. 태풍이 북상하면서 대만과 중국 남부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날씨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태풍의 진로를 바꾸시면서까지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이 느껴졌다. 또한, 이 사역을 위해 수많은 한국의 성도들과 현지 교인들이 합심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다. 날씨가 딱 좋았다. 열대의 후덥지근한 날씨는 바람이 날려버렸고, 하늘에는 구름기둥이 덮여있었다. 7~8시간을 버스로 달려 현지 호텔 근처까지 왔을 때, 어둑어둑해지더니 금방 고산지대의 어둠이 내려 깜깜해질 무렵, 타고 간 버스가 고장이 나고 말았다. 고장 난 버스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아 현지 호텔 차를 불러놓고 바깥 깜깜한 어둠 속 길가에서 기다릴 때는 걱정 때문에 마음이 매우 힘들었다. 교회 건축은 영적 전쟁임을 실감했다. 현지 차로 응급 대치하여 겨우 호텔에 도착했다. 사역지의 첫날 밤, 힘든 여정 가운데에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며 나는 몸살약을 한 봉지 먹고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호텔에서 쌀국수 등 현지 음식으로 든든히 아침 식사를 하고 일정을 시작했다. 오전에 4개 교회, 오후에 4개 교회가 예정되었다.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는 14호 ‘넘제교회’ 헌당예배이다. 지천교회의 지원으로 건축한 교회다. 도착할 때 가슴이 뛰었다. 지난해 손자하고 와서 풀밭에서 현수막을 들고 사진 찍고 기도하던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아름답게 지어져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고 희열과 감격이 솟구쳤다.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누가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속으로 기도했다. 몰려든 현지 아이들에게 가방과 주머니에 있던 과자나 간식거리들을 나누어 주었다. 드디어 새 성전 앞에 도착했다. 출입문 기둥을 부여안고, 흐느끼며 감사의 눈물을 쏟았다. 헌당 감사예배가 시작되었다. 우리 13명은 힘차게 찬송을 불렀고, 감격해서 오열하는 권사님도 계셨다. 현지인 통역을 세워 현지 성도들과 우리 모두 은혜로운 예배가 진행되었다. 모든 진행을 맡은 나는 “N교회 성도 여러분! 교회 건축하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헌금도 많이 하셨지요? 일도 많이 하셨지요? 이렇게 아름답게 잘 지은 예배당을 볼 때마다 행복하시지요? 이곳에 와서 기도하십시오. 예배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소원에 다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나라 백성들이 다 예수 믿게 기도하십시오.”라고 당부했다. 두 번째 ‘은푹교회’로 출발했다. 이 교회는 경산계당교회 홍갑연 권사님이 12호에 이어 15호 교회를 지원하여 지으신 교회다. 내가 계당교회에 간증 갔을 때, 간증에 은혜 받았다고 하시면서 교회 헌당에 참여하신 것이다. 자동차가 현지까지 못 가서 성도들이 제공한 오토바이로 우리 13명은 ‘앵앵앵...’하며 새 성전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지원한 교회 중에 가장 넓게 잘 지은 예배당이다. 눈짐작으로 60평은 족히 될 듯하다. 권사님이 헌당 감사로 플라스틱 의자를 지원하였고, 교인도 많이 모였는데 재적 교인이 3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계당교회 이종덕 목사님은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곳에 나타나게 됨을 감사하다”며,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축복하셨다. 현지 성도들은 권사님 이름으로 감사패를 마련해 주었다. 준비한 헌당기념 타올을 나누어 주고 모든 행사를 끝낸 뒤 착공할 20호 ‘라오짜이교회’로 이동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1개, 2개, 또는 3개의 교회를 착공하게 해주셨다. 올해 초에도 처음에는 걱정했지만, 곧 상림교회 신일균 장로님이 은퇴기념으로 17호 ‘시온교회’를, 본회 회장 차순규 장로님도 장로은퇴기념으로 18호 ‘신짜이교회’를 지원해 주셨다. 상림교회 이종수 집사님은 100교회 건축 선교회의 광고문을 읽고 감동하여 19호 ‘쭈케오교회’를 부인 김지은 집사님 이름으로, 20호 ‘라이짜이교회’를 본인 이름으로 지원을 작정하고 건축비 전액을 입금해 주셨다. 그리고 지천교회 김귀화 권사님이 21호 ‘바오까오교회’를 결정해주셨다. 1년에 3교회 헌당에 5교회 착공이라니…. 라오짜이교회로 이동하면서 나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해외 선교는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어떤 분들은 ‘100교회 건축선교회’의 사역을 이해 못하고 조롱하는 분도 있다. 예배당 지어주는 일은 헛된 일이라고 말하는 현지 선교사도 있다. 그러나 본선교회는 지원해주신 건축비를 직접 현장에서 그 나라 돈으로 지불하고 영수증까지 받는 등 선교비 전액을 100% 선교 명목으로 지출한다. 또한, 착공하는 교회에 가서 ‘100교회 건축선교회’의 취지를 설명한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예배당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예배당을 지어가려고 합니다. 이곳에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는 여러분도 열심히 헌금 하고 땀 흘려 일도 해야 합니다. 예배당 지을 땅은 마을에서 가장 좋은 곳을 선택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성도가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원금을 한 번에 다 드리지 않습니다. 착공할 수 있게 지원 금액의 절반을 오늘 드리고, 골조 공사가 완공되면 남은 금액의 절반을 선교사님을 통해 전해드립니다. 나머지 금액은 내년 헌당 때 드립니다. 이 모든 공정을 죄송하지만 확인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똑같은 메시지를 이번에도 5개 교회에 전달했다. 본회가 지원해 헌당한 세 번째 ‘후깜교회’에서는 한 성도의 간증을 듣게 되었다. 비가 많이 오는 주일날 8시부터 예배인데 온 식구가(7~8명) 같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니까 살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산사태로 집채만 한 바위와 흙이 집을 덮쳐 버린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 가족의 생명은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다. 만약 그 집안 식구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비 오는 날 귀찮다고 식구들 중 한 명이라도 예배드리러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날 사건은 그 가족들이 큰 믿음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믿음은 곧 생명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이었다. 출국수속 후 탑승게이트에 대기하고 있을 때 권사님 한 분의 팔이 부어올랐다. 차에서 내릴 때 어딘가에 부딪혔다고 했다. 상비약을 드시게 하고 탑승구 직원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그러자 공항 의사, 담당기장, 항공사 지점장, 승무원 등이 떼로 모여들었다. 혈압측정을 하니 권사님은 당황해서 혈압이 점점 상승했다. 공항 의사는 체류하여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모두가 무사히 귀국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여러 가지 염려 속에 우리는 합심해서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채 “우리가 책임진다”는 각서를 쓰고 탑승할 수 있었다. 다행히 권사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잠이 드셨고, 우리는 4박 5일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무탈하게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100교회 건축선교회는 수많은 개미군단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이제 21개 교회가 건축돼 간다. 하나님 나라 확장에 협력하신 교회와 모든 성도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올려 드린다. 할렐루야! 100교회 건축선교회 이해견 장로 010-3531-7354 (주일오후 간증예배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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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어린이 - 박 이자벨라(5세)박 이자벨라(5세) 구미겨자씨교회 박재묵 집사·최현숙 권사의 친손녀이다. 현재 아빠·엄마(박준성·안토니나 부부), 언니와 함께 러시아 사라토브시에 거주하고 있다. “이자벨라야, 무슨 기도했어?”라고 할아버지가 물어보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는 이자벨라. 어린아이의 순수한 기도를 통해 어른들이 배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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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나의 출애굽기(2) 드보라 5. 외할아버지에 대한 회개 기도 나는 한국에 왔을 때 ‘가족 중에서 내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남한에 와서 사는구나, 집에서 따돌림 왕따 차별받았는데 내가 드리어 쓰임 받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성경을 읽으면서 나는 특히 요셉 이야기에 감정이입을 많이 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지만 결국에는 크게 되고 쓰임 받았던 요셉과 같이 하나님께서 가족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나를 요셉과 같이 이끄신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모임에서 목사님이 보여주신 책 사진을 볼 때 하나님은 나를 깨우쳐 주셨다. 바로 외할아버지의 기도와 헌신이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했고, 이 땅에 오게 했고, 통일의 비전을 꿈꾸게 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자는 중에 꿈인지 환상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중에 생생한 장면 하나를 보았다. 김일성 초상화를 바닥에 엎어놓고 무릎 꿇고 엎드려 예배하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여 나는 벌떡 잠에서 깨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나는 내가 사랑받지 못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형제들에게 버림받았던 요셉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나중에 가족을 구원할 믿음의 첫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 핍박 속에서도 기도하셨던 할아버지의 기도가 나를 살게 했다. 나야말로 외할아버지의 눈물의 기도 열매였고, 정말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사실 전혀 사랑받을 자격 없었던 내가, 어릴 적부터 질투와 욕심, 짜증만 부리던 자였던 내가 그 사랑을 받았다는 감동에 나는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고난 중에 가족에게도 나누지 못한 채로 그렇지만 믿음을 지키신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로 고향을 위해 기도했다. 내 안에 남아있던 쓴 뿌리들이 그 눈물 속에 씻겨져 나갔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에는 그러한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6. 북한에서의 학창시절 그 당시 북한은 그래도 경제 사정이 괜찮았다. 어릴 적만 해도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김일성 수령을 신으로 받드는 북한의 교육과 사상통제 안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아니 하나님을 모욕하며 살았다. 나도 역시 김일성 수령을 민족의 어버이요 신과 같은 존재로 믿고 그렇게 살아왔다. 외할아버지의 눈물 어린 기도가 있었는지 전혀 모른 채, 사람이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나는 여전히 가족들은 날 미워한다 생각하며 심술을 부리면서 그렇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갔다. 집과 학교의 이중생활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항상 집에서는 말썽꾸러기, 천덕꾸러기였지만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상당히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외국어로 2개 반을 운영했다. 러시아어 반과 영어 반이었는데 나는 영어 반을 선택했었다. 그 당시에는 영어가 우리가 그토록 증오하는 미제가 사용하는 언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영국에서 쓰는 언어라고만 알고 있었다. 배웠던 영어 발음도 영국식이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6학년 졸업이 2년 남은 4학년 때부터 시험을 보고 경연을 해서 뛰어난 학생들을 추렸다. 그리고는 그 학생들을 따로 모아서 공부를 시켰다. 북한의 학교가 여기서 말하는 비평준화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학교 체면이 중요하다 보니 좋은 대학을 많이 보내려고 했다. 내가 있던 학교는 한 학년에 약 200~300명 정도 됐는데 그중에 1반 정도를 수재반으로 따로 구분을 시켰다. 7. 딸의 교육을 반대하신 아버지 나는 평소 좋은 학업 성적 덕분에 그 반에 들어가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집에서는 내가 공부하고 또 대학 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머릿속에 여자 대학생들은 ‘집안 살림은 안 하고 입만 여물어서 남자를 깔보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러시아에서 돌아오신 뒤에 배치받은 직장은 외부 출장이 잦았는데, 출장 다니시면서 여자 대학생들을 이리저리 지나칠 기회들이 많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요즘도 그렇지만 그 당시 아버지 세대에는 남존여비사상이 심했다. 아버지는 그래서 공부에 대해 부정적이셨고 집에서 생활 살림이나 잘하라고 하셨다. 집에서 공부를 못하게 해서 나는 숙제도 학교에서 다 해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 (오픈도어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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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재 의원, “무기명 현금영수증 5년간 137조원, 발급건수 64%가 소득공제 못 받아”▲박명재 자유한국당 의원(포항남·울릉) <박명재 의원실 제공> 현금영수증을 발급받지 않아 소득공제 혜택을 받지 못한 금액이 최근 5년간 137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드러났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박명재 의원(포항남·울릉)이 국세청에서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5년간 무기명으로 발급된 현금영수증 건수는 전체의 63.7%에 달하고 그 금액을 합산하면 137조원이 넘는다. <최근 5년간 현금영수증 발급 현황> (단위: 백만건, 억원, %) 연도 계 실명발급 무기명발급 건수 금액 건수 비율 금액 비율 건수 비율 금액 비율 13년 5,227 855,152 1,873 35.8 621,263 72.6 3,354 64.2 233,889 27.4 14년 5,193 919,465 1,867 36.0 666,537 72.5 3,326 64.1 252,928 27.5 15년 5,046 965,562 1,831 36.3 687,082 71.2 3,215 63.7 278,480 28.8 16년 5,024 1,010,595 1,826 36.3 714,435 70.7 3,198 63.7 296,160 29.3 17년 4,793 1,086,553 1,757 36.7 772,904 71.1 3,036 63.3 313,649 28.9 ▲출처: 박명재의원실/ 국세청 현금영수증을 의무적으로 발급해야 하는 업체들은 소비자가 현금영수증을 요청하면 실명 영수증을, 요청하지 않으면 무기명 영수증을 발행한다. 무기명으로 발급된 영수증은 업체의 소득원으로는 잡히지만 소비자가 특정되지 않아 소득공제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매년 27조원이 넘는 금액이 소득공제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소액일수록 소비자들이 현금영수증 발급을 미룬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수치를 기준으로 실명 영수증의 1건당 평균 금액이 4만3,989원인 반면 무기명 영수증의 1건당 평균 금액은 1만330원으로 4분의1 수준에 불과하다. 국세청은 현금영수증 발급을 독려하기 위해 카드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등을 활용하고 있지만 이용률이 저조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카드와 모바일 앱을 이용한 발급은 전체 건수의 1.9%에 불과할 뿐 아니라 이마저도 매년 감소하는 추세다. <최근 5년간 현금영수증 전용카드 및 앱 영수증 발급 현황> (단위: 백만건, 억원) 구 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건 수 167 154 138 115 89 금 액 46,047 43,430 39,672 33,146 25,874 박명재 의원은 “무기명발급이 매년 줄어들지 않고 있어 납세자들이 현금영수증 공제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소액결제라도 납세자들이 공제혜택을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현금영수증 어플 등의 활용도를 높이고, 사용자 편의성을 높이는 방안을 마련해 납세자 권익 보호를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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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4·끝)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정재순 목사(鄭在淳, 1878~1948) 11. 청소년 기독교학교의 설립자(設立者), 정재순 안동으로 이임하기 전 경산과 대구에서 기독교 초등학교의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던 정재순 목사는 누구보다 교육에 관한 많은 관심이 있었다. 당시 안동교회는 이미 1911년 안동 최초의 여자 학생을 위한 초등학교인 계명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명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신앙과 무관한 공립학교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중등학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부임한 지 2년이 경과한 1924년 4월, 정재순 목사가 의욕적으로 추진하여 경안중학원이 설립되었다. 경안중학원은 오늘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포함한 중등교육기관으로 경안노회 산하기관으로 편성하여 경안노회가 운영토록 했다. 이때 노회가 결의한 내용은 경안중학원의 발기인은 경안노회 경내의 교역자로 하고, 운영자금은 10세 이상 교인마다 의무금은 50전(1100환)으로 하고, 그 외 생일연보와 특별연보도 학교운영을 위한 예산으로 편성했다. 특히 학생들이 납입해야 하는 입학금과 월사금은 2300환으로 정했다. 초대교장에는 당시 안동교회 담임인 정재순 목사, 교사는 4명, 학생 수는 무려 1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경안중학원은 오래 지속할 수 없는 한계가 내재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학교운영에 필요한 재원의 부족이었다. 당시 각 교회는 부족한 재정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더욱이 안동선교부의 외부지원 없이 중등교육기관을 운영한다는 것은 당시 교회 형편으로 볼 때 힘겨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이에 1926년 제10회 경안노회에서는 안타깝게도 경안중학원의 폐교를 보고하게 된다. 하지만 경안중학원이 설립된 지 30년 만인 1954년 경안노회 설립인가를 받고 경안고등학교가 개교하였으며, 1961년에는 경안중학교가, 1966년에는 경안여자중학교와 경안여자상업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따라서 정재순 목사가 30년 전에 시작한 경북북부지역의 중등학교의 꿈이 비로소 이루어져 수많은 기독교 인재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12. 교회의 질서(秩序)를 세운 사람, 정재순 초기 한국교회는 철저한 권징과 치리를 통해 교회의 질서를 잡아갔다. 초기 한국교회 권징의 특징은 올바로, 공평하고, 바르게 행해진 권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재순 목사 역시 성도들이 성경이 제시하는 길을 가지 않으면 책벌을 통해 방향을 수정할 수 있게 했다. 당시 안동교회의 당회록에 따르면 교회에서 행한 책벌의 이유는 다양했다. 예를 들면, 부부 사이에 불화가 있으면 교회는 그들을 당회로 불러 화해를 권면하거나 책벌하여 화평한 가정을 이루어 가도록 개입했다. 또한, 주일성수를 못하는 교인들을 책벌하거나 권징함으로써 성도의 의무를 다하게 했다. 그 외에도 교회법을 따르지 않고 세상적으로 결혼예식을 한 경우, 중직자의 자녀가 방탕한 생활에 빠져 죄를 범한 경우, 교인 사이에 불화가 생긴 경우, 일상생활 속에서 교인의 생활에 어긋난 행위들도 예외 없이 책벌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법에서 권징의 목적은 잘못을 한 형제를 교정하고 다른 형제들이 잘못하지 않게 하는 데 있다. 권징은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안동교회는 당회가 조직된 이후 권징을 통해 교회의 질서를 잡아갔다. 정재순 목사는 안동교회에서 시무한 3년 동안 죄를 범한 교인들을 차별 없이 공평하게 치리함으로써 안동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1913년 7월 20일 김병우 장로가 장립함으로써 안동교회는 안동지역 최초의 당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안동교회의 역사적인 첫번째 당회는 초대장로인 김병우 장로가 기도함으로8월 9일에 개회되었다. 13. 부인이 전도의 동역자(同役者)인 사람, 정재순 정재순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도 바울처럼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복음전파자였다. 마찬가지로 그의 부인인 손주안(孫主安) 사모도 생명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순종했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정재순 목사의 부인인 손주안은 사모보다 전도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사모로서 단순히 남편을 돕는 역할을 넘어 보다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의 사명을 누구보다 잘 감당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안동교회를 사임하고 대구 동산병원 직원전도회 담당목사로 사역한 1925년 6월부터 1937년 3월까지 정재순 목사는 28개 교회를 개척했다. 마지막으로 의성의 두 교회를 개척한 것은 그의 나이 60세가 되던 해이다. 정재순 목사는 경상북도 거의 전 지역인 청도, 영천, 경산, 달성, 고령, 월성, 경주, 영일, 칠곡, 상주, 군위, 선산, 의성군 등에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사역을 감당했다. 교통환경이 열악한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정재순 목사가 감당한 사역범위는 매우 넓어 마치 해외선교사의 사역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정재순 목사가 설립한 교회는 고모교회, 삼창교회, 기계교회, 덕지교회, 봉곡교회, 구릉교회, 삼귀교회, 예리교회, 금암교회, 조암교회, 방촌교회, 구촌교회, 대천교회, 대제교회, 기성교회, 입실교회, 양촌교회, 유금교회, 경동교회, 유동교회, 와동교회, 삼산교회, 평지교회, 석우교회, 음지교회, 화령교회, 서제교회, 오로교회이다. 그런데 손주안 사모는 정재순 목사가 개척한 28개 교회 중에서 무려 10개 교회를 함께 개척하고 돌보았다. 손주안 사모는 정재순 목사와 동산병원을 섬겼을 뿐 아니라 대구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한 도시에 교회들을 개척하고 돌보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 부부가 개척한 교회가 든든한 교회로 세워지기를 소원하며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식처럼 사랑하며 헌신적으로 섬긴 참된 복음전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결론 정재순 목사는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사역자였다. 복음을 위해 생명을 건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가 행한 거룩한 사역은 참으로 많다. 그는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수용하고 예수를 영접한 이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았다. 그는 단 한 순간도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는 교회를 위한, 교회의 사람이었다. 정재순 목사는 교회가 지역사회 속에 있음을 인식하며 주민을 위한 사역을 숙고했던 인물이다. 그 결과 청소년을 위한 경안중학원을 설립했다. 그가 다니는 곳에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또한, 그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안동 땅을 복음화시킨 전도전략가였다. 안동에서 사역을 마친 정재순 목사는 부인 손주안 사모와 함께 거의 경상북도 전 지역인 청도, 영천, 경산, 달성, 고령, 월성, 경주, 영일, 칠곡, 상주, 군위, 선산, 의성군 등에 교회를 개척하는 복음전도자로 살았다. 또한, 그는 첫 담임목회지인 신정교회에서 거룩한 사역을 마감했다. 그는 목회 전반전과 동일하게 목회 후반전에도 복음을 위해 불꽃을 불사르며 살았던 열정의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신실한 주의 종, 정재순 목사가 걸어온 길은 참으로 고단한 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그의 삶은 때로 감옥에서 생활하게 했으며, 복음에 대한 열정은 60이 넘어서까지 먼 길에 찾아가 교회를 개척하고 성도들을 돌보게 하였다. 그는 일평생 변방에서 예수의 참 제자로 살았다. 1878년 출생한 정재순 목사는 부르심에 감사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다가 1948년 71세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에 입성하였다. ▲정재순 목사와 손주안 사모. 전도부인처럼 손주안 사모는 남편 정 목사를 도와 경산, 영천, 성주, 달성, 월성, 청도, 상주, 칠곡 등에 있는 힘들고 어러운 형편에 있는 작은 교회들을 돌보았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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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금호교회 침수, 목회자들이 피해복구에 발벗고 나서지난 8일 태풍 ‘콩레이’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한 가운데 영덕지역에도 309.5m의 많은 비가 내려 영덕과 강구지역에 피해가 컸다. 그중 영덕군에 있는 금호교회(예장백석대신, 최기성 목사 시무)는 뒤편에 산과 산 사이에 배수로가 잘되지 않아 농경지가 침수되면서 지대가 낮은 사택과 창고가 흙탕물에 잠기는 등 피해가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듣고 예장백석대신 경북노회 소속 목회자 여러 명이 찾아와 신속하게 수습복구를 위하여 땀을 흘렸다. 복구현장에 찾아와 직접 봉사에 참여한 소백교회 이윤식 목사(70세)는 “정말 비가 소중하긴 하지만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잃게 해서 안타깝다. 마음이 아프지만, 천만다행으로 인명 피해 없이 비가 비켜나간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고 위로했다. 최 목사는 이날 복구에 참여한 분들에게 “이렇게 멀리서 찾아와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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