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자인교회 126주년,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0호 지정’ 감사예배올해로 설립 126주년을 맞는 경산 자인교회(담임목사:권희찬)가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0호’로 지정돼 4월 20일 감사예배를 드렸다. 이날 행사는 총회역사위원회(위원장:박창식 목사) 주관으로 진행됐으며, 역사위원들뿐 아니라 부총회장 김종혁 목사를 비롯한 총회 임원, 지역의 목사와 장로, 지역 정·관계 인사 등 내빈이 참석해 축하했다. 자인교회는 1898년 4월 15일 첫 예배모임을 가짐으로써 교회가 시작되었다. 대구제일교회(1893.04.22), 사월교회(1898.04.05)에 이어 대구·경북에서 세 번째로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이다. 손원재 장로(역사위원회 부위원장)는 “자인교회는 초기에 복음전파 외에도 덕숭학교를 설립해 지역 인재 육성에 힘썼던 교회”라며 “역사의 굴곡 속에 어려움도 겪었지만, 끝까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며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을 많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교회”라고 소개했다. 자인교회의 신앙 발자취가 담긴 주요 문서로는 <자인교회 약사>, 당회록, 교회원 원부, 교적부, 학습명부, 각종 연보 제록, 여자전도회 회록, 공동의회록, 청년면려회 회록 등이 있다. 이에 예장합동 제108회 총회는 자인교회의 역사적 가치와 신앙의 행적들을 높이 평가해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0호’로 지정한 바 있다. 1부 예배는 역사위원회 총무 정창호 목사 인도로 회계 김기현 장로 기도, 곽현복 목사(연구분과 서기) 성경봉독, 부총회장 김종혁 목사 설교, 총회부서기 임병재 목사 축도 순서로 드렸다. 김종혁 목사는 설교에서 “126년의 역사를 지닌 자인교회가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 유산을 잘 이어받아서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대표적인 교회가 되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2부 지정식은 역사위원회 부위원장 손원재 장로 사회로, 사적지 소개, 지정증서 전달, 당회장 권희찬 목사의 인사, 총회총무 박용규 목사와 경청노회장 김재만 목사, 경청노회 증경부노회장 박정웅 장로가 격려사와 축사를 전했다. 이어 정창호 목사의 사회와 김종운 목사(사료분과장)의 기도로 현판 제막식을 진행했다. 권희찬 목사는 “자인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을 대물림하며, 뿌리 깊은 신앙을 바탕으로 지역 복음화에 힘쓰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가는 거목(巨木) 같은 교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초기 안동교회1909년~1952년 예배에 관한 연구(6)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 목사(6대) 시대의 예배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결론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6대) 시대의 예배: 1925년~1942년 (2) 3) 주일저녁예배 1935년 1월 13일(주일) 오후 7시에 있었던 평양 장대현교회의 주일 저녁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주악→찬송→기도→찬송→성경→광고→찬양→설교→기도→찬송→축복→송영. 저녁 7시에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오후 찬양 예배라고 명명했다. 따라서 저녁 시간과 오후 시간을 구분하지 않고, 주일 저녁 예배 혹은 찬양 예배로 명명한 것 같다. 또한 1938년 4월 3일(주일) 평양 산정현교회는 주일 저녁 예배를 음악 헌신예배로 드렸는데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묵도→찬송→기도→성경랑독→특별찬송→회원점명→찬양→헌금→독창→설교→찬송→축도→송영. 1930년대 평양의 장로교회는 주일 오후 예배가 아니라 저녁 예배를 드렸음을 알 수 있다. 예배를 시작할 때 주악 혹은 묵도와 찬양대의 찬양, 그리고 축도와 송영으로 예배를 마쳤다. 특히 주일 저녁 예배가 헌신예배를 드릴 경우 봉헌순서가 있었다. 안동교회 역시 주일 저녁 예배 시에 특별한 순서가 포함된 적이 있다. 1930년 5월 9일(토)에 있었던 안동교회 당회는 다음날 주일 저녁 예배 시 청년면려회가 금주 강연을 위해 예배당 사용을 청원했을 때 사용을 허락했다. 이 당회록으로 볼 때 우선 예배시간이 오후에서 저녁으로 변경되었고, 주일 저녁 예배 시 강연 등 특별한 순서가 예배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안동교회의 주일 오후 예배 시간이 저녁으로 언제 변경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당시 대부분의 장로교회들이 저녁 시간에 예배를 드린 것으로 보아 안동교회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오후 예배에서 저녁 예배로 시간을 변경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4) 삼일기도회 1929년 2월 5일 당회록에 따르면 수요예배를 언급하고 있다. 안동교회는 여전히 삼일기도회가 아닌 수요예배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1935년 평양 장대현교회는 삼일기도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1935년 1월 16일(수) 하오 7시에 있었던 평양 장대현교회의 삼일기도회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주악→찬송→기도→성경→광고→기도→설교→기도→찬송→주기도. 삼일기도회도 주악으로 시작했으며, 주님의 기도로 마쳤다. 삼일기도회는 예배라기보다는 기도회로 생각했기 때문에 축도가 아니라 주기도로 마쳤고, 이 전통은 많은 교회에서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사실 1930년대 삼일기도회는 8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수요 저녁 예배나 삼일기도회 순서와 거의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1943년~1952년 (1) 1930년대 말부터 시작한 일제의 신사참배는 예배의 자유를 억압했다. 이러한 억압적인 분위기 가운데 1943년 1월 안동교회 7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광현 목사는 예배당과 예배 순서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김 목사는 1979년까지 시무했지만 이 소고(小考)에서는 안동교회의 공식적인 주보가 나오기 전인 1952년까지 예배를 다룰 것이다. 의성이 고향인 김광현 목사는 미국 북장로교가 세운 교회와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떠난 적이 없다. 그는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폐교되기 직전인 1938년 9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고베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졸업했다. 평양신학교 교장인 라부열(Stacy L. Roberts) 선교사의 추천으로 입학한 고베신학교는 고베 중앙신학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미 북장로교가 설립한 5년제 신학교로 교리, 신학 내용 등에서 평양신학교와 거의 흡사했다. 이것은 김 목사가 귀국하여 무리 없이 장로교회를 섬길 수 있게 했다. 김광현 목사가 처음 안동교회에 부임했을 때 예배실의 강단은 다른 교회와 같이 2단으로 되어 있었다고 기억한다. 설교하는데 편리하고 효과적이게 하기 위하여 강대를 예배실 어디서나 잘 볼 수 있도록 예배석보다 조금 높은 앞자리에 두었던 것이다. 김 목사는 이것을 오랜 이교적 인습 탓으로 생각하고, 예배실로는 어딘지 허전함이 느껴졌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김 목사는 강대 구조를 변경했는데, 설교대와 인도대를 구별하여 강단 좌우로 나누어 배치했다. 설교대와 인도대를 분리하여 말씀을 전하는 곳과 인도자석을 구별하고, 또 강단 뒤편 중앙에 성찬상을 둠으로써 높은 자리에 앉은 예배위원들이 일반 예배자들과 대화하여 앉는 황송함이 많이 상쇄될 수 있었다고 김 목사는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교회에 나온 한 할머니가 강대 앞으로 가더니 강대상을 향하여 합장하고 자꾸 절을 하는 것을 보면서 예배실에 제단을 높인 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현재의 구조인 삼단 구조로 하여, 본래 있던 강단 앞으로 그 높이 절반이 되는 중간 강단을 하나 더 만들었다고 김 목사는 자서전에서 밝혔다. 위 강단은 주로 주일 오전 예배와 특별집회 때 사용하고, 저녁 예배나 예배 이외의 집회는 아래 강단으로 사용했다. 이유는 안동교회가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였기 때문이었다. 설교대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 때나, 인간의 소원을 아뢰는 기도 시에 함께 사용하는 것이 맞지 않는다고 느껴졌지만 별 대안이 없어 오늘날에도 계속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 강단에 성찬상을 두어 설교용으로도 겸용하였고, 그 앞바닥에 세례대를 두어 설교상과 성찬상과 세례대가 일렬로 배치했다. 또한 어딘지 사제의식에서 발상 같고 만인제사를 표방하는 입장에서 별로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김 목사는 예배시간에 목사가 가운을 입지 않았지만, 옷차림에 빈부의 차가 없고 좀 더 경건해 보이기 때문에 성가대나 헌금위원들은 가운을 입게 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봉화척곡교회 경술년 국치일 상기 제6회 나라사랑 음악회봉화 척곡교회(담임목사 박영순)에서는 10월 12일(목) 오후 3시 ‘제6회 나라사랑 음악회’ 가 운영위원회 주관으로 내빈과 교인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나라사랑 음악회’는 1910년 경술국치일을 되새기고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애국선열의 넋을 기리기 위한 음악회로 매년 8월 29일에 개최해왔다, 올해는 지난 7월 봉화군에서 발생한 수해 피해로 이재민들과 슬픔을 나누기 위해 10월로 일정을 연기했다. 제1부 식전행사는 마당공연으로 사물놀이와 신명풍물단, 카리스관악합주단의 연주가 진행됐다. 제2부 기념식은 이유영(나라사랑음악회) 운영위원장 진행으로 최갑도 성내교회 원로목사가 말씀 및 기도, 국민의례 내빈소개 등의 순서가 있었다. 제3부 음악회는 아가페여성합창단의 합창, 영주장로중창단의 중창, 카리스관악합주단의 독주, 중창, 독창, 합창 등 다양한 순서로 꾸며졌다. 제4부 다짐의 시간은 시낭송 이후 박영순 담임목사의 인사, 다함께 ‘선구자’ 제창으로 모든 행사를 마쳤다.
-
초기 안동교회1909년~1952년 예배에 관한 연구(4)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 목사(6대) 시대의 예배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결론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1921년~1925년 초대 김영옥 목사가 사임한 이후 1921년 2월, 안동교회 2대 담임으로 부임한 이대영 목사는 1년 정도 시무하다가 총회 전도국으로부터 파송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중국 산동성으로 출발했다. 이대영 목사가 시무한 기간은 1년밖에 되지 않아 새로운 예배형식을 기대하기에는 무리라고 할 수 있다. 3대 담임으로 부임한 정재순 목사는 약 3년 동안 시무했는데, 그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사역은 전도 사역이었기 때문에 이전의 예배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큰 변화는 없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참고로 이대영 목사와 정재순 목사는 모두 평양신학교 출신이다. 1) 주일 오전예배 1902년 내한한 곽안련 선교사는 1908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 교수 사역을 시작했다. 특히 1916년에는 실천신학 학과장으로 설교학, 설교실재, 예배모범, 목회학, 목회실천 등의 과목을 개설하여 실천신학의 분야를 넓힌 실천신학자였다. 따라서 그가 한국 장로교 예배의 형식과 내용 등에 준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마포 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집회형식의 예배를 청산하고 예배신학에 근거한 예배를 소원하고 있었다. 특히 1919년에 곽안련 선교사는 그의 저서 『목사지법』에서 예배순서의 집례를 평신도가 아닌 목사가 주도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한국장로교회는 1922년에 『예배규범』(Directory of Worship)을 출판하였는데 곽안련은 세밀한 예배지침 사항도 제시했다. 곽안련은 다음과 같은 예배순서를 제시하고 있다. ① 예배는 무리들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할 때 마땅히 마음을 안돈케 하기” 위하여 예배의 선언이나 예배의 부름 또는 예배의 기원과 같은 짧은 기도로 시작하라. 또는 입례송과 같은 찬송으로 시작하는 것도 가하다. ② 칼빈이나 루터가 사용했던 순서처럼 죄 고백의 순서를 가져라. ③ 성경봉독을 하라. ④ 사도신경으로 공동체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기본이나 그 교회가 만든 신앙고백서를 함께 읽을 수 있다. ⑤ 공기도를 하라. ⑥ 찬송이 기도와 강도에 합하도록 택하라. ⑦ 봉헌순서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자세와 준비를 강조하면서 여기서 십일조도 언급되고 있다. ⑧ 봉헌 전후에 봉헌기도를 하라. ⑨ 광고는 예배순서는 아니며, 가급적 간결하게 하고 구두로 할수 있으나 광고판이나 인쇄물로 할 것을 권하고 있다. ⑩ 강도(講道), 즉 설교로 30분 내에 간결하게 끝내라. ⑪ 안수 축복(축도)으로 예배를 마쳐라. 곽안련이 제시한 예배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총설(성경요절이나 기도나 찬송)→자복(시51;32;60;38;102;130;143)→찬송(합창)→예정된 성경랑독→신경(사도신경이나 본교회 신경, 십계명)→찬송(합창이나 별찬송)→강도에 관한 성경랑독→공기도→찬송(합창이나 별찬송)→연보와 연보에 관한 기도→광고→찬송(합창이나 별찬송)→강도→강도 후 기도→찬송(제 1, 2, 3장 중에서)→안수축복→묵상기도(앉은 채로). 그는 서양악기들을 소개하면서 거문고와 같은 한국악기도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한국 전통 리듬 찬송들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금지한 악기는 징과 드럼같이 불협화음을 일으킨다고 생각한 타악기였다. 그러나 곽안련이 소개한 예배 순서가 실제적으로 지역교회들의 주일예배에 널리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특히 1920년대 예배형식과 순서는 192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1회 총회에서 결의된 헌법의 예배모범에 적지않는 영향을 받았다. 이 예배모범은 미남장로교회의 예배모범을 번역한 것으로 비예전적 성격이 강했다. 많은 교회들은 마포삼열 선교사의 집회형식의 예배순서에 따라 주일 예배를 드렸고, 비교적 복잡한 예배형식을 갖고 있던 곽안련의 예배갱신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예배학자들은 평한다. 안동교회 2대 담임인 이대영 목사와 3대 담임인 정재순 목사는 평양신학교에서 곽안련 선교사에게 예배신학을 배웠지만, 당시 장로교 예배를 주도하고 있던 마포 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형식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즉 이대영 목사와 정재순 목사가 시무한 1920년대 초와 중엽까지는 이들이 시무하기 이전의 예배형식과 내용도 거의 동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주일오후예배 안동교회가 창립된 후 10시 30분, 주일오전예배를 마친 후 점심식사 시간을 갖고 곧 이어 오후예배를 드렸을 가능성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즉 1920년대 안동교회는 주일 저녁예배가 아니라 주일오후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전국의 모든 교회가 주일 오후예배를 드린 것은 아닌 것 같다. 곽안련은 주일 오후예배가 아니라 주일 저녁예배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곽안련은 주일 저녁예배를 ‘주일저녁 예배회(禮拜會)’라고 불렀다. 곽안련은 신선한 도전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목사들이 과감하게 주일저녁예배 순서를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30분 정도의 찬양을 강조함으로써 주일 오후 혹은 저녁에 드리는 예배를 찬양예배로 명명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1921년 2월 5일 전국 최초로 안동교회가 공인한 기독청년면려회는 주일오후예배 시간에 시대에 맞는 주제에 관한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처럼 안동교회의 주일오후예배는 곽안련 선교사의 제안대로 다양한 순서를 포함했다. 곽안련은 주일저녁예배를 제안했지만 안동교회는 1920년대 초와 중엽에 여전히 오후시간에 예배를 드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3) 수요예배 곽안련 선교사는 주일 오전과 저녁예배는 강도회(講道會), 즉 설교가 필요한 예배이지만 그 외의 모임은 공부회나 기도회로 정의했다. 그는 이러한 기도회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유익한 기도를 할 수 있는 14가지의 지침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공기도자는 3분을 넘기지 말고, 전체 기도회 시간은 1시간으로 하며, 기도회의 인도는 목사가 단독으로 하지 말고, 장로와 집사들이 인도하는 방안도 검토할 것을 권면했다. 기도회가 잘 운영될 때 교회는 살아움직이는 공동체로서 활성화될 것이며, 교우들이 서로 화목하고 긍정적인 공동체로 변할 것을 강조했다. 삼일기도회는 1시간 내에서 마포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형식과 순서, 즉 찬송→기도→찬송→성경→강도→찬송의 틀을 그대로 유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20년대 중반까지 안동교회는 곽안련 선교사가 삼일기도회 혹은 수요기도회로 부르지 않고 여전히 수요예배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봉화척곡교회 창립 116주년, ‘교회 사료 전시회’ 열어봉화척곡교회(박영순 목사 시무)가 교회 창립 116주년을 맞아 지난 5월 28일(주일) ‘감사예배 및 교회사료 전시회’를 개최했다.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교회인 봉화척곡교회는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257호,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제590호, 총회사적 제3호, 영주노회사적 제1호로 지정된 교회이기도 하다. 감사예배는 박영순 담임목사의 인도로 춘양시찰장 노태진 목사의 기도, 김병호 장로(경북항공고등학교 이사장)의 특송,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임희국 목사의 ‘하나님의 약속이 깊은 낙향’ 제하의 설교, 최갑도 목사(성내교회 원로)의 축도 순서로 드렸다. 이어 2부 교회 사료 전시회(개관식)에서는 서원석 장로(새문안교회 원로)가 축사를 하고, 테이프 커팅과 축하 순서를 가졌다. 교회 측은 이날 예배당 옆에 있는 ‘명동서숙’에 교회 자료 전시관을 개관했다. 당일에 전시된 자료들은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제590호로 등록된 봉화척곡교회 학습 세례교인 명부, 척곡장로교회 면려회 회의록, 봉화척곡 면려회 출석부, 척곡교회 기본금 기성회의록, 당회록 2호 등의 원본 전적 자료들이었다. 아울러 교회 창립자이신 故 김종숙 목사의 소장 도서인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1930년 개정판), 예수교장로회 예식서(1925), 신학지남(1919년), 요한복음공과(1925), 조선예수교장로회 종교교육부 교사양성과(1927), 주일학교교습법(1927) 등 14점, 그 외에 1920년~30년대의 신앙도서들이 전시됐다. 특별히 전시관 한쪽 벽에는 교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돌아보고’(과거 사진과 간단한 교회 소개)와 ‘내다보고’(현재 성도들과 교회학교 학생들 사진)라는 타이틀 아래 사진들이 꾸며져 있었다. 박영순 담임목사는 “이 첩첩산중에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된 지 23년여 만에 교회가 세워지고 학교가 세워진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선조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세워지고 지켜져 우리에게 맡겨진 이 교회를 흥왕하게 하기 위해 다음 세대 양육에 더 힘쓰고 있습니다.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
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7)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7) 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 8. 안동지역의 첫 한국인 목사, 김영옥 9. 안동지역 초기 교회음악 지도자들 ...............................................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8. 안동지역의 첫 한국인 목사, 김영옥(金泳玉) / 1911년 김영옥(1871~1952)은 1871년 4월 12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했다. 18세가 되던 1888년, 그는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이민 갈 계획을 하던 중 평산 누님댁에 갔다가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이때 세례를 받은 김영옥은 수년 동안 선교사의 도움으로 성경을 공부했는데, 1년 만에 한문 신·구약 성경을 모두 읽고전도법과 장로교회, 그리고 간단한 영어공부도 했다. 또한,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라고 할 수 있는 평양신학교 성경훈련반에서 매서인(賣書人) 집중교육을 받았다. 그 결과 김영옥은 공식적인 매서인으로 사역할 수 있었다. 1893년 모삼열 선교사의 조사가 된 김영옥은 서울 종로에서 전도를 통해 회심한 성도들이 연동교회를 설립하도록 도왔으며, 승동교회와 동막교회 설립에 협력하다가 경기 동편과 황해도 이남으로 순행 전도하여 백천, 평산, 금북, 금성, 양구, 화천 등지에 교회들을 설립했다. 그는 1898년에는 모삼열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고 개척한 고향 백천군 운교교회 영수와 장로로 섬겼다. 김영옥은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한국교회 초기 매서인과 조사, 그리고 영수요 장로로 초기 한국교회의 평신도 지도자였던 것이다. 조사 김영옥의 사역은 1903년부터 시작된 웰번 선교사와의 동역으로 빛을 보게 된다. 강원도 철원, 춘천 등지에서 전도하고 철원읍교회를 설립했으며, 1907년 원주읍교회 조사로 교회를 섬겼다. 1909년 11월 웰번 선교사와 함께 안동으로 이사한 김영옥은 안동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을 순방하며 전도했으며,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1909년 8월 둘째 주일 설립)의 예배를 인도했다. 특히 김영옥은 만 30세에 평양신학교(1901년 개교)에 입학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만 40세인 1911년(제4회)에 졸업하고, 1911년 9월 대구제일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영옥은 안동교회의 초대목사인 동시에 경북 북부지방 최초의 한인 목사가 되었다. 김영옥 목사의 뛰어난 영적 지도력은 안동지역의 복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김영옥 목사가 담임으로 안동교회를 섬겼던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안동교회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1911년 오늘의 초등학교인 계명학교를 설립했으며, 1913년에는 김병우를 장로 장립함으로써 안동지역 최초로 당회가 구성되었고, 주일학교와 여름성경학교를 조직하여 어린이들의 신앙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13년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도사경회를 개최함으로써 여성들의 신앙교육에도 집중했으며, 1920년 안동기독청년회를 조직하고, 1921년 전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조직함으로 청년의 신앙교육에 큰 획을 그었다. 안동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에 단 3번 예배당을 준공했는데, 김영옥 목사가 시무하던 기간 동안 두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첫 예배당은 그가 담임조사로 시무할 때인 1910년으로 16칸 ‘ㄱ’자 예배당을 건축했는데, 이때 지방 순회 때 타고 다니던 당나귀를 팔아 건축헌금에 보탰다고 한다.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1914년 초준공되었는데, 이때도 김영옥 목사는 선교사가 사준 가옥을 팔아 헌금했을 정도로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분이다. 아울러 김영옥 목사는 안동지역과 경북 북부의 초대 교회들을 든든히 세운 교회지도자였다. 영주, 지곡, 명동, 풍산, 수동 등 교역자가 없는 미약한 교회들의 순회목사로 사역함으로써 이들 교회가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는 안동교회를 떠난 후에는 경산 사월교회, 포항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 경주제일교회, 풍기 성내교회 등 경북 북부지역의 어머니(母) 교회와 같은 교회들을 담임함으로써 이들 교회가 안정적으로 지역복음화의 중심역할을 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김영옥 목사는 평생을 복음전도와 교회 목회에 전념한 목회자 중의 롤모델(Role Model)과도 같았다. 그는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여러 번 검속과 체포 등으로 고난을 당했지만, 다시 교회로 돌아와 목회에 충실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광복, 건국, 전쟁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기에 교회의 목사로서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김영옥 목사를 통해 한국교회에 명문 신앙가문이 세워졌다. 손자인 김형태 목사에 따르면 1대인 김영옥 목사, 2대인 김영옥 목사의 장남인 김은석 목사, 3대인 김은석 목사의 자녀인 김형칠 목사, 김형일 목사, 김형태 목사, 김형달 목사, 김형숙 목사, 4대 김형규 목사, 김대규 목사 후보생 등 4대에 걸쳐 9명의 교역자가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교회 130년 역사 가운데 다시 배출되기 힘든, 그러나 모두에게 까맣게 잊혀진 최고의 명품 목사라고 할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안동교회가 두번째로 준공한 목조 함석지붕 반(半) 2층 예배당을 배경으로 서 있는 당시 교회 지도자들. 앞줄 왼쪽부터 크로더스 선교사, 인노절 선교사, 김영옥 목사, 웰번 선교사로 추측됨. 뒷줄 왼쪽 첫번째는 김병우 장로, 나머지 분들은 당시 시무장로인 이중희·엄응삼 장로가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분들도 평신도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사진7)
-
봉화척곡교회, 경술년 국치일 상기 ‘제5회 나라사랑 음악회’ 열어봉화척곡교회(담임목사 박영순)는 10월 21일(금) 오후 3시에 ‘경술년 국치일 상기 제5회 나라사랑 음악회’를 개최했다. 봉화척곡교회의 ‘나라사랑 음악회’는 1910년 일제에 통치권을 빼앗기고 강제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한 경술국치일(8월 29일)을 되새겨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다짐하자는 취지의 음악회이다. 코로나19로 인해 3년 만에 다시 개최된 이번 음악회는 아가페 여성합창단, 바리톤 박정환, 바리톤 박찬일, 소프라노 배혜리, 카리스관악합주단, 영주아코디언합주단, 명호풍물단 등이 출연했다. 또 애국지사 이육사의 장녀인 이옥비 여사를 비롯해 애국지사의 후손들을 초청, 꿏다발을 증정하는 특별한 시간도 가졌으며, 모든 순서의 마지막에는 매년 그랬듯이 김영성 원로장로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선구자’를 제창했다. 봉화척곡교회는 구한말 1907년에 김종숙 선생이 창립한 교회이며, 1909년에 예배당과 명동서숙을 건축하는 등 1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교회이다. 박영순 담임목사는 “나라사랑 음악회를 통해 애국선열들의 뜻을 돌아보며, 신앙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책임감도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
<지역교회 특별 취재> 115년 역사의 봉화척곡교회, ‘여름성경학교’ 감격의 현장!봉화읍에서 36번 국도를 따라 춘양방면으로 법전면 소재지에서 20분 정도 산골길을 달리면, 한국기독교 역사적으로 유명한 민족교회, 봉화척곡교회(박영순목사 시무, 김영성 원로장로)가 있다. 필자가 척곡교회를 방문한 지난 7월 29일은 주일도 아닌 금요일이었는데 교회가 떠들썩하고 분주했다. 바로 교회학교 아동부 ‘여름성경학교’가 열리는 날이었다. 여러 번의 차량운행으로 학생들이 교회에 모이기 시작했고, 교회 종소리가 울리며 기도와 찬송으로 여름성경학교가 시작되었다. 조용한 마을이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축제 현장으로 바뀌고 있었다. 코로나19로 마음껏 모든 프로그램을 할 수는 없었지만, 기쁨으로 참여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감동이 밀려들었고, 지난 수년간 박영순 담임목사의 열정이 결실을 맺는 것처럼 느껴졌다. 교회 근처에는 마을도 없고 모든 학생들이 불신 가정에서 나오고 있는데, 이제는 초등학생이 중·고등학생이 되었다. 지난해 9월에는 35년 만에 5명의 중·고등 학생에게 세례를 베푼 뜻깊은 일도 있었다. 온교회가 최선을 다해 학생들에게 힘을 쏟고 있는 가운데, 반주자 김영성 장로님(98세)은 “이렇게 많이 와주어서 고맙데이···” 하시면서 학생들을 바라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다. 이번 여름성경학교는 한국성서유니온 대구지부(총무 김동휘 목사)에서 오신 전문강사 두 분과 함께 모든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참석한 15명의 학생들에게는 좋은 신앙훈련의 시간이 되었다. 다음 세대 학생들이 없는 교회가 많은 요즘의 현실을 생각할 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다음 세대 양육을 위해 애쓰고 있는 봉화척곡교회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모두가 척곡교회의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와 격려를 보내줄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
안동교회, 총회지정 유물 및 순직자 지정예식 열어▲총회 유물 제1-1호로 지정된 안동교회 당회록(왼쪽)과 총회 순직자 제11호로 지정된 故 권중윤 씨의 모습.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지정 유물 제1호로 ‘안동교회 학습·세례인명부 3권’, 제1-1호로 ‘안동교회 당회록 3권’, 제1-2호로 ‘안동교회 제직회록 4권’이 지정됐다. 아울러 안동교회 기독청년면려회 창립 초대 회장이었던 故 권중윤 씨가 총회 순직자 제11호로 지정됐다. 이에 5월 26일(목) 오전 11시 안동교회(김승학 목사) 영곡아트홀에서는 유물 및 순직자 지정예식이 거행됐다. 경안노회 주관으로 열린 1부 예배는 김승학 목사의 인도로 드렸고, 전 총회역사위원장 우영수 목사가 “역사 의식과 기록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예배에서 전 총회역사위원장 우영수 목사가 말씀을 전하고 있다. 총회 주관으로 열린 2부 지정예식은 총회역사위원회 사적지분과장 서원수 목사의 사회로 순서를 진행했다. 유물 지정식은 정경호 목사(총회역사위원회 서기)의 경과보고, 손산문 목사(총회역사위원회 전문위원)의 유물 소개, 총회역사위원장 임한섭 목사의 지정공포, 증서·기념패 전달, 김일재 목사(총회역사위원회 역사연구분과장)의 권면이 있었다. ▲총회역사위원장 임한섭 목사(오른쪽)가 안동교회 김승학 목사에게 유물지정 증서와 기념패를 전달하고 있다. 순직자 지정식은 남관우 목사(총회순교·순직자심사위원회 서기)의 경과보고에 이어 총회순교·순직자심사위원장 정영태 목사가 증서·동판을 전달했다. ▲총회순교·순직자심사위원장 정영태 목사(오른쪽)가 안동교회 김승학 목사에게 순직 증서와 기념동판을 전달하고 있다. 3부 축하와 인사 시간에는 전 총회역사위원장 황기식 목사가 축하 메시지를, 전 총회헌법위원장 임만조 장로가 격려 메시지를 전했으며, 안동교회 황혜원 장로의 인사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축하 시간에 격려사를 전하고 있는 전 총회헌법위원장 임만조 장로(안동교회 원로). 한편, 이번에 유물로 지정된 안동교회 당회록은 1913년부터 기록된 경안노회 산하 교회 중 최초의 당회록으로, 경안노회와 경북 북부 지역 교회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1차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1924년부터 기록된 제직회록은 당시 교회의 회의 모습이나 활동 사항을 알 수 있게 한다. 1909년 안동교회 설립 때부터 기록된 학습·세례인명부도 과거 한국교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순직자 故 권중윤 씨는 1921년 전국 최초로 조직된 안동교회 기독청년면려회의 초대 회장으로 활약했다. 안대선 선교사를 도와 기독청년면려회의 전국 확산에 총력을 기울이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1927년 향년 28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봉화척곡교회, 창립 115주년 감사 및 임직식 개최봉화척곡교회(담임목사 박영순)에서는 5월 15일(주일) 오후 2시 본 교회 예배당에서 교회 창립 115주년 감사 및 임직식과 ‘봉화척곡교회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봉화군 발행 감사예배를 드렸다. 이날 행사에는 영주노회 김영수 노회장을 비롯한 임원, 남선교회 임원, 여전도회 임원, 영북시찰, 춘양시찰의 목회자와 장로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1부 예배는 박영순 목사의 인도로 진행했으며, 춘양시찰장 이철희 목사의 기도 후 최갑도 목사(성내교회 원로)가 “교회의 본질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2부 임직식에서는 서정하 안수집사의 취임식과 오영란 권사의 임직식이 진행됐다. 예식에서는 김윤기 목사가 권면을, 임희국 목사가 축하 메시지를 전했으며, 영주노회장 김영수 목사가 축도했다. 3부 ‘봉화척곡교회 기록화보고서 발행기념식’에서는 김영성 은퇴장로의 회고사, 집필자 신광호 교수(건축문화재연구소 집현재 대표)의 축사 및 기념사 순서가 있었다. 이어 김영성 장로(98세)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선구자’ 제창으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봉화척곡교회는 ‘한국교회 대부흥회 100주년 기념교회(3.1운동 참여교회)’, ‘총회 사적 제3호’, ‘영주노회 사적 제1호’,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57호’ 등으로 지정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교회이다. ▲ 새로 임직받은 오영란 권사와 서정하 안수집사(사진 앞줄 왼쪽부터)의 모습. ▲ 봉화척곡교회의 예배당 전경.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