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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3·끝)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3·끝) 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13. 안동지역 최초의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 1914 (2) ‘인노절기념성경학교’는 일제 강점기 때는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학교가 폐쇄되었지만, 해방 후에 이원영 목사는 무너진 교회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경안고등성경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교했고, 그후 ‘경안성서신학원’으로 개명되었다가 ‘경안신학원’으로 다시 개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2005년 3월 10일 개교한 경북 북부지역의 유일한 대학원 대학교인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는데, 여자성경학교가 경안대학원대학교의 모체(母體)가 되었다. 비록 경안신학원은 안동이라는 소도시에 위치했지만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진정으로 큰 학교라고 할 수있다. 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공부하고 신학훈련을 받았던 사람들 중 한국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69회에 걸쳐 배출한 경안신학원의 총동문은 무려 1,800여 명이나 된다. 이들은 국내에서, 혹은 세계 열방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동문으로는 배흥직·박승팔·권오현·문은식·김원진(1기), 진정수·이기형·김봉태(2기), 이금석·박명서·김달훈(3기), 임기석·김태환(8기), 조기홍(9기), 김점향·장성덕(10기), 천병선·강태원(11기), 김광식(15기), 김삼환·신종대·장세문(16기), 이광선·조석규(17기), 조준래·이만규(20기) 등이다. 교사로 가르쳤던 사람들 중 이원영, 김광현, 김기수 목사는 교단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신학교에서 수학했던 인물 중 교단 총회장이 된 사람은 이원영, 이광선, 김삼환, 김태영 목사 등이다. 경안신학원은 지금까지 9명의 총회장과 전국적으로 100여명의 노회장을 배출한 명문(名門) 신학원이 되었다. 결론 안동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 땅이다. 베어드 선교사가 탐색을 위한 목적으로 1893년 5월 5일 안동을 방문함으로써 안동 땅에 복음의 씨가 뿌려졌고, 그후에 발생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졌다. 그 후 권서인과 매서인들의 헌신적인 성경판매, 그리고 대구에 주재하던 선교사들의 순회전도는 안동의 복음화를 위한 기경(起耕)과도 같았다. 더욱이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 총회에서 1908년 안동 선교부(Andong Mission Station) 설립이 결정됨으로써 안동지역의 체계적인 복음화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선교를 책임지는 안동선교부의 설립으로 안동지역에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09년 안동선교부 주재 초대 선교사인 소텔의 순교는 안동 땅에서 앞으로 펼쳐질 복음의 개화(開花)를 미리 볼 수 있게 하였다. 더욱이 비교적 다른 지역에 비해 빠른 1911년 11월 16일 한국인 김영옥 목사에게 안동에서 목회 할 기회가 주어진 것과 안동선교부에 속한 선교사들의 헌신 또한 결정적으로 복음전파의 속도를 가속화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안동은 오묘한 섭리 가운데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은혜의 땅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안동 땅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후 얼마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있었던 잊혀지고 잃어버린 거룩한 일들을 최대한 찾아 본 소고(小考)에 기술했다. 특히 본고는 안동 땅에서 처음 발생한 기독교와 관련된 일들을 찾아내려는 작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인 베어드, 비봉·국곡·풍산 등 안동지역의 첫 교회들, 안동지역의 첫 학습자인 홍재삼,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인 소텔, 안동지역의 최초 근대서점인 기독서원, 안동의 첫 근대병원인 성소병원, 안동지역에 건축된 첫 선교사 사택, 안동지역의 첫 한국인 목사인 김영옥(金泳玉), 안동지역에서 최초의 당회인 안동교회 당회, 맥클렁·캐더린·샤록스 선교사 등 안동지역 초기 교회음악 지도자들, 안동지역 최초의 여전도회인 안동교회 여전도회, 그리고 안동지역에 건축된 최초의 신학교인 안동여자성경학교 등으로 그동안 깨어져 단절 상태로 있던 안동지역의 초기 기독교 이해를 위한 작은 작업이라고 사료된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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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천제일교회, 경주시 건천읍에 이웃돕기 성금 200만원 기탁경주 건천제일교회(담임목사 강윤규)는 12일(월) 건천읍행정복지센터에 어려운 이웃을 위한 성금 200만 원을 기탁했다. 1915년 설립된 건천제일교회는 경주시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함께 나누고 있다. 강윤규 목사는 “교회 표어가 ‘세상에 소망을 주는 건천제일교회’다”며 “성도들의 사랑으로 모은 성금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의 꿈과 기대를 응원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이원영 건천읍장은 “몸도 마음도 움츠러드는 날씨지만 건천제일교회의 이웃사랑 덕분에 훈훈함을 느낀다”며 “지역사회 나눔 문화 실천에 앞장서는 건천제일교회에 감사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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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6)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6)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 (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1. 김정숙, 출생과 결혼 2.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3. 여성복음전도의 선구자 .............................................. 7. 안동교회 최초의 전도사 8. 경안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리더 9. 일제에 저항한 애국운동가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9. 김정숙, 일제에 저항한 애국운동가 안동 3·1 만세의 1차 시위는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용(李相龍) 선생의 실제(實弟)인 이상동(李相東, 영양 포산교회, 영덕 원전교회) 조사에 의해 발생했는데, 그는 안동 장날인 3월 13일 하오 5시 반경 단독으로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체포 구속되었다. 사실 이상동 조사가 단독시위를 감행하기 전, 안동교회 김영옥 목사, 이중희 장로, 도청 서기인 김원진, 일본 유학생인 강대극 등 4인은 3월 13일 안동 장날에 거사할 것을 모의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3·1 만세운동이 주춤한 상태에 있었다. 이상동 조사가 안동교회 지도자들과 의논하여 결정한 거사 일자는 아니었지만, 안동에서 가장 먼저 만세 시위를 주도한 지도자들이 결정한 바로 그날인 3월 13일 오후 5시 반경에 안동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상동 조사는 ‘대한독립만세’가 쓰여진 태극기 모양의 종이 연을 들고 현재 신한은행 앞에서 동쪽 방향인 삼산우체국 쪽으로 달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그는 체포되어 압송되어 가는 자동차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 대한민국은 10일을 넘기지 않고 독립될 것이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만세를 불렀다. 이상동 조사의 1인 시위는 안동 3·1운동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한편으로는 위기가 되었다. 이유는 만세운동을 감행할 인물들과 안동교회가 일경에 의해 더욱 주시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동 조사의 1인 시위는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안동지역 지도자들의 검거와 조사로 위축되어 있던 모의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기폭제 역할도 하였다. 한편 안동교회 여성 지도자였던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 3인은 1911년 안동교회가 설립한 여성 초등학교인 계명학교 여학생 30여 명을 동원하여 선교사 임시주택이었던 가옥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국기를 제작하여 비밀스럽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준비를 하였다. 3·18일 만세시위가 있던 날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 3명의 여성 지도자들은 옥고(獄苦)를 각오하고 옷고름을 뗀 뒤 단추를 달고 계명학교 여학생 30여 명을 인솔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나 당시 여론을 의식한 일제는 김정숙 등 3명은 물론 학생 1명도 구속하지 못했다. 또한 안동의 3차 만세운동은 3월 23일(주일) 오후 7시 30분 무렵부터 시작됐는데 앞선 2차 시위와는 다르게 안동군의 다른 면민들이 대거 참가하는 대중적인 시위 양상을 보였다. 무려 3,000여 군중이 모여 구금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서와 법원 안동지청으로 밀고 들어갔다. 일본 경찰과 수비대와 충돌로 인해 30여 명이 죽고 50여 명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시위는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김정숙은 1919년 3월 18일의 2차 시위와 23일에 있었던 3차 시위 등 안동의 3·1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행동하는 신앙인인 동시에 애국운동가였다. 참고로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여성지도자인 김병규는 안동의 기독청년면려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의 아들 권중윤은 대구 계성학교 학생으로 대구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구속되어 6개월 동안 수형 생활 후, 학교를 졸업하고 안동으로 돌아와 계몽운동을 하던 중 1921년 2월 5일 안대선 선교사가 전국에서 최초로 안동교회 청년면려회를 조직할 때 초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그 후 안대선 선교사를 도와 경북지역 각 교회에 다니면서 청년면려회를 조직하여 1921년 6월 7일∼9일까지 26개 지회 600여 명이 모여 경북연합대회를 개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2년 청년면려회를 전국적으로 조직하기 위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안대선 선교사와 권중윤을 서울로 이주케 하여, 이들의 헌신적인 활동을 통해 1923년, 200여 교회에 청년면려회가 조직되었고, 1924년 12월 2일에는 서울 정동 피어선 성경학교에서 기독청년면려회가 조직될 수 있었다. 3·1 만세운동 당시 안동교회 교인이었던 김병규는 공식적으로 1924년 5월 22일, 안동교회에서 서울 안국동교회로 이명했다. 김병규는 이명 후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은 1925년 초 경기부인전도회의 서기를 맡을 정도로 왕성히 활동했다. 또한 김병규는 서울 승동교회에서 회집한 경기지역 12 교회 부인회의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25년 전국 부인전도회가 처음 조직할 때는 선교사 중심으로 조직되었는데, 한국인으로 임원을 구성한 2회 총회부터 김병규는 한국인으로는 제일 먼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27년 9월 9일 원산 광석동교회에서 제16회 장로회 총회 시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발기회에서 김병규는 경기 여전도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8년에 조직된 여전도회전국연합회에 경기지역 대표로 활동했다. 이처럼 김병규는 전국적으로 왕성히 활동한 여성 교역자였다. 김정숙 전도사의 애국 활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일제 말엽에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여성 지도자였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제국주의는 황민화정책과 천황숭배를 강화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굴복하여 1935년에는 천주교회가, 1936년에는 감리교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1938년에는 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일제의 극한 박해와 신사참배 문제 앞에서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신앙을 포기하고 변절과 타협의 길로 갔지만, 김정숙 전도사는 죽음도 불사하면서 마지막까지 일제에 저항했다. 참고로 경안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인물로는 이원영·강병철·박충락 목사와 권수백 장로 등이다. 특히 안동교회의 인물로는 김익현·김성규·김재성·조흥로 장로와 조춘백, 이수원·이수형 성도 등 다수가 있었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여성 교역자로는 김정숙 전도사가 유일하다. 그는 죽음도 불사한 각오로 신앙의 정조(貞操)를 지켰던 용기 있는 믿음의 여성이었다. 김정숙은 일제 압제하에서도 용기 있게 신앙에 기초하여 민족의 편에 선 여성 민족 운동가였던 것이다. ▲안동의 3·1 만세운동은 세 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1차 시위는 3월 13일 이상동의 단독시위였고, 2차 시위는 3월 18일 안동교회 주도와 유림들의 동참으로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3월 23일 3차 시위는 많은 군민들의 격렬한 시위 결과 1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었다. 3·18일 만세시위가 있던 날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 3명의 여성 지도자들은 계명학교 여학생 30여명을 인솔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위 사진은 1925년 삼산동 곡물전(현 신한은행 근처) 안동 장날의 번잡한 모습.(사진7)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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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4)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 (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 5.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 6. 다음세대 전문사역자 7. 안동교회 최초의 전도사 8. 경안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리더 9. 일제에 저항한 애국운동가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5. 김정숙,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2) 임학수 목사는 전도, 교육과 봉사로 교회를 부흥시켰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2층 석조예배당을 건축하며 헌신했다. 현재 안동교회의 돌집예배당은 임학수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할 때인 병자년 1936년 초여름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정축년 1937년 사월에 준공되었다. 이 예배당의 건축과 준공 현장에 김정숙 전도사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정숙 전도사는 석조예배당 건축 과정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교인들을 돌보고 사역을 감당하면서 교회의 안정에 적지 않은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어느 교회나 교역자의 위치는 중요하다. 특히 교역자가 떠나고 부임하는 사이의 기간은 교회가 불안정할 가능성이 크다. 안동교회 역시 담임목사가 비어있는 기간 당회와 안동선교부의 선교사들은 교회의 안정을 위해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담임목사 부재 시 안동교회는 다른 교회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부교역자를 둔 교회는 거의 없었지만, 안동교회는 담임목사와 여성교역자가 동역하고 있는, 당시로 보면 매우 특별한 교회였다. 김정숙 전도사는 2대 이대영, 3대 정재순, 4대 박상동, 5대 임학수 목사와 함께 전도사로 교회를 섬겼으며, 초대 담임목사를 역임한 이후 6대 담임목사로 다시 부임한 김영옥 목사, 그리고 7대 김광현 목사와 함께 평신도로 교회를 섬겼다. 그가 전도사로 또는 평신도로 안동교회를 섬긴 기간은 60년에 이른다. 특히 담임목사의 이임과 부임 사이의 공백 기간 동안 여성 교역자인 김정숙은 전도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심방을 통해 교회의 사역을 중단 없이 이어가고 교회의 안정을 지켰을 것이다. 안동교회 당회록은 그가 담임목사 부재(不在) 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맡겨진 역할을 잘 감당함으로써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음을 알려준다. 김정숙의 영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6. 김정숙, 다음세대 전문사역자 1) 청년사역 김정숙은 1922년부터 안동교회의 전도사로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특히 그의 사역 기간은 기독청년면려회의 태동과 성장 기간과 겹친다. 이대영 목사가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시무를 시작한 1921년, 3·1운동의 좌절 이후 의식 있는 청년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독청년면려회는 기독교 청년운동의 첫 출발을 알리는 교회 조직으로 1921년 2월 5일,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로 안동교회가 공식적으로 승인하여 출범할 수 있었다. 청년면려회 운동은 청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일본 식민지하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독립된 국가의 내일을 준비할 수 있게 한 역사적 청년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기독청년면려회는 놀랍게 성장해 나갔다. 안동교회 당회가 조직을 승인한 후 경북 지방으로 신속히 확산되어 4개월이 지난 그해 6월 7일부터 9일까지 기독청년들이 안동교회에 모여 경북지역연합대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무려 26개 지회에 600여 명의 면려회원들이 참여해 교회와 사회를 위한 헌신을 결의했고 실제로 자신들의 삶에서 그 다짐을 실천했다. 다시 그해 9월 10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에서는 청년면려회를 전국 교회에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선교부 내에 면려청년위원회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후 면려운동은 더욱 확산 일로를 달렸고, 마침내 1924년 12월 2일부터 8일까지 서울 피어선성경학원에서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안동지역에서 기독청년면려회의 출범과 활동, 그리고 성장에 있어서 여성 교역자인 김정숙 전도사는 일정한 역할을 감당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청년면려회는 남·여가 함께 모였는데, 모든 목사가 남성이었던 시대에 안동지역의 유일한 여성 교역자였던 김정숙 전도사가 여성 회원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정숙 전도사의 나이는 40대 후반이었다. 때로는 청년들의 어머니로, 때로는 이모로, 때로는 고모 역할을 통해 청년들의 삶을 돌보고 기독청년면려회 중심의 안동지역 청년운동이 신앙과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지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2) 어린이·청소년 사역 안동교회 4대 담임 박상동 목사는 주일학교를 통한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처음으로 어린이 주일에 유아세례를 베풀었음을 안동교회 80년사는 언급한다. 또한 그는 주일학교 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오늘날의 교회학교 조직과 거의 동일한 조직을 갖추게 하였다. 주일학교 교장은 담임목사, 부장은 평신도로 개편하고 조직을 새롭게 정비함으로써 주일학교 발전에 새로운 기틀을 놓았다. 이것은 박상동 목사가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에 깊은 관심과 연구를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여름성경학교와 동일한 하계아동성경학교의 경우, 평신도가 교장을 맡게 함으로써 평신도와 함께 동역하는 성숙한 모습을 안동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유년주일학교를 거친 청소년의 신앙 교육을 위하여 오늘날의 중·고등부에 해당하는 안동기독소녀회를 창립하여 어린이와 장년 신앙교육 사이에 끼여 방치되었던 청소년의 신앙교육에 교회가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김정숙 전도사는 박상동 목사의 중점적인 사역인 어린이·청소년 사역의 지도교역자로 활동했다. 1927년에 김정숙 전도사는 당회의 허락을 받고 소녀회 고문으로 소녀들을 지도하였음을 당회록은 적시한다. 고문은 아마 소녀회 지도교역자의 다른 표현일 것으로 추측된다. 온화하고 차분하며 자상한 성품을 갖고 있던 김정숙 전도사는 주일학교의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지도하는 데 매우 적합한 교역자였을 것이다. 김정숙 전도사는 어린이와 청년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칭찬하며 격려하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다. 따라서 어린이와 청소년에 관한 사랑, 관심과 열정, 그리고 헌신과 전문성을 갖고 있는 김정숙 전도사에게 교회가 소녀회 고문의 직을 맡긴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1954년 4월 23일부터 27일까지 안동교회에서 개최된 제3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시 독립운동가 이원영 목사가 총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기독청년면려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날인 4월 22일에 제5회 전국대회를 개최했다.(사진5)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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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8)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8)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 16. 지역의 중심(中心) 교회를 섬기다 17.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다 18. 최고의 한학자(漢學者)가 되다 19. 은퇴 후에도 목회를 계속하다 20. 후학을 위해 매진하다 결론 20. 후학(後學)을 위해 매진하다 예천교회를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은퇴한 임학수 목사는 안동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섬기고 돌보았을 뿐 아니라 후학을 양성하는 사역에도 매진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수년간 경안신학원 전신인 경안고등성경학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쳤다. 임학수 목사로부터 여호수아서를 배웠던 경안노회 은퇴목사 권영택 목사는 많은 연구에 기초한 임 목사의 강의는 역사학자처럼 전후 맥락을 잘 연결시켜 여호수아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더욱이 임학수 목사가 언제나 제자들에게 존댓말을 썼으며, 제자들을 나무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았을 정도로 고매한 인격을 갖춘 선비로 권영택 목사는 임 목사를 기억한다. 역시 제자인 장세문 목사는 임 목사가 말년에 한문을 가르쳤는데,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정갈한 모습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77세 할아버지 목사님이 칠판에 반듯반듯 정자체로 한자를 한 자 한 자 쓰실 때엔 양복저고리 왼쪽 어깨가 밑으로 축 처져 있어서 쓰시기를 마친 목사님은 학생들 쪽으로 돌아서시면서 저고리를 바로 입으시곤 하셨다.” 임 목사가 사랑하고 가르친 경안신학원은 1912년 여자성경학원으로부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앞으로 지역교회를 지도해 갈 여성 지도자를 양육할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그러다가 1914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한 인노절 선교사는 보다 체계적이고 확대된 성경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여자성경학교는 1920년 4월 10일 남녀성경학교로 확대개편 되었다. 인노절 선교사가 1922년 별세한 뒤에는 그의 부인 캐더린 선교사의 노력으로 ‘성경학교(Bible Institute)’란 이름으로 새로 건축됐으며, 1925년 새로운 교사와 생활관 건물이 준공된 후에 ‘인노절기념성경학교’로 개명되었다. ▲1922년 인노절 선교사가 하늘나라에 간 후 부인 캐더린 선교사의 모금과 경안노히 교회들이 힘을 합해 1925년 준공한 인노절기념성경학교로 반지하 1층, 지상 1층 건물로 건축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강제로 학교가 폐쇄되었지만, 해방 후에 교장인 이원영 목사는 무너진 교회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1946년 9월, ‘경안고등성경학교’란 이름으로 다시 개교했고, 1962년 3월 ‘경안성서학원’으로 개명되었다가 ‘경안신학원’으로 다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05년 3월 10일 개교한 경북 북부지역 유일한 대학원 대학교인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는데, 여자성경학교가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던 것이다. 비록 경안신학원은 안동이라는 소도시에 위치했지만 한국교회에 끼친 거룩한 영향을 생각한다면 진정으로 큰 학교라고 할 수 있다. 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공부하고 신학훈련을 받았던 사람 중에 한국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70회를 넘도록 배출한 경안신학원의 총 동문은 무려 2,000명 가까이 된다. 이들은 국내에서, 혹은 세계 열방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바로 이 역사적인 경안고등성경학교에서 임학수 목사는 당시 소명과 사명에 불타는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신학생들에게 임학수 목사는 사랑과 정성과 고매한 인격으로 제자들에게 본이 된 스승이었다. 신학생들은 임학수 목사의 강의를 통해 성경과 한문을 배웠을 뿐 아니라 인격과 목회를 배웠다. 그가 목회 실습과 같은 과목을 가르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강의에는 50여 년 넘는 동안 섬긴 열정과 사랑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임학수 목사의 제자들은 선지동산인 신학교에서 육신적으로는 노쇠했지만 영적으로 충만한 믿음의 선배요 스승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제자들은 임학수 목사를 여전히 위대한 스승으로 흠모하고 있었다. 임학수 목사는 날마다 새벽에 가정예배를 드림으로 자녀·손들에게 신앙을 훈련시키고 전수(傳授)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손녀인 임순오 권사에 의하면 예배 시에는 항상 찬송가 58장인 ‘지난밤에 보호하사’를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오래 참고 항상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을 다해 주님을 섬기라는 조부의 말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신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칠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믿음의 후배를 양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임학수 목사는 가족에게 인격과 신앙의 롤 모델과 같았다. 또한, 안동교회 후임자인 김광현 목사에게도 직·간접적으로 목회를 전수했을 가능성이 있다. 임학수 목사는 불편한 몸으로 노년을 보냈다. 그때 김광현 목사는 거의 매일 임학수 목사의 집을 방문해 문안하면서 임 목사가 좋아했던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두 분은 마치 부자관계처럼 사이좋게 지내면서 전임자와 후임자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동교회의 전임 담임목사와 후임자의 아름다운 관계는 이미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두 목사님은 만나 바둑도 두었겠지만 자연스럽게 교회와 성도들, 노회와 목회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이때 안동교회 전임 담임자요 목회 선배, 그리고 인생 선배인 임학수 목사는 여러 면에서 직·간접적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김광현 목사가 경안노회와 총회, 그리고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게 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1969년 1월 7일, 임학수 목사는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경안노회는 임 목사의 공적을 인정하여 경안노회장(葬)으로 결정하였고, 그가 11년 동안 헌신한 안동교회에서 장례예식을 치르고 운구하여 안동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1969년 1월 안동교회 예배당 앞에서 진행된 임학수 목사의 장례식.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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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화해를 강조한 ‘산 순교자’ 이원영 목사봉경(鳳卿) 이원영 목사 61주기 추모예배 및 제4차 정신문화 포럼 안동서부교회(담임목사 이정우)는 봉경(鳳卿) 이원영 목사 61주기를 맞이하여 추모 예배와 봉경 정신문화 포럼을 개최했다. 이원영 목사(1886~1958)는 안동서부교회 초대 목사로 예안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몸소 거부했으며, 용서와 화해를 강조한 안동이 낳은 ‘산 순교자’이다. 이번 추모예배는 김두진 장로의 인도, 최병영 집사의 기도, 이주희 집사가 성경봉독을 맡았다. 설교는 대구 대봉교회 박희종 목사가 ‘각각 자기가 일한대로’(고전3:8~15)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어진 포럼에서는 계명대학교 황재범 교수의 진행으로 장신대 금주섭 교수가 “언더우드의 봉화선교와 대화의 기독교”, 한국국학진흥원 박경환 박사가 “전통학문과의 변화와 근대교육의 등장”, 내매교회 윤재현 목사가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근대보통학교 연구”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이날 행사에는 권영세 안동시장과 정훈선 안동시의회 의장 등 여러 내빈들이 함께 자리를 빛내어 이 지역의 교육기관의 흐름과 기독교의 정체성이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자료 제공=안동서부교회) 한상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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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경(鳳卿) 이원영 목사 생가, 제36호 한국기독교사적으로▲ 지난 4월 4일 이원영 목사 생가에서 한국기독교사적 지정예식이 열렸다. 예장(통합) 총회 역사위원회및삼일운동백주년기념사업위원회(위원장:서원수)는 지난 4일 이원영 목사 생가(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서 제36호 한국기독교사적 지정예식을 가졌다. 이 생가는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손인 봉경 이원영 목사(1886~1958)가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이원영 목사는 일제의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요구 거부로 1938년 목사직 시무 사면을 당했으며, 4차례나 구금되었다. 광복 후에는 교육자요, 목회자요, 제3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한국교회를 섬겼다. 이날 1부 감사예배는 경안노회 역사위원회 주관으로 드려졌으며 경안노회장 이위철 목사가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리라’ 제목으로 설교했다. 2부 지정식은 정 우 목사(역사위원회 사적지분과장)의 사회로, 임한섭 목사의 경과보고, 임희국 교수의 사적소개, 서원수 목사(총회 역사위원장)의 지정 공포 및 증서전달 순으로 진행됐다. ▲총회 역사위원장 서원수 목사가 안동서부교회 이정우 목사(오른쪽)에게 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3부 축하와 인사는 이정우 목사(안동서부교회)의 사회로 김승학 목사(안동교회)와 권영세 안동시장의 축사, 김재봉 장로의 인사, 강정구 목사의 이원영정신문화계승사업회 경과보고, 유족대표 이정순 권사의 인사 순으로 진행됐다. ▲유족대표로 이정순 권사(대구 대봉교회)가 감사의 인사말을 하고 있다. ▲예식에 참가한 내외빈 대표들과 유족들이 기념비 제막식에 참여했다. ▲봉경 이원영 목사 생가 앞마당에 세워져있는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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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 총회 지정 한국기독교사적 제36호 봉경(鳳卿) 이원영 목사 생가▲봉경 이원영 목사의 생가가 예장통합 103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사적 제36호로 지정되었다.(자료제공=안동서부교회) 한국기독교사적지 제36호 지정예식이 오는 4월 4일 오전 11시 생가(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706번지)에서 총회역사위원회와 경안노회, 안동서부교회 주관으로 열린다. 1부 감사예배에서는 경안노회장 이위철 목사가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며, 2부 지정식에서는 임희국 교수가 사적소개를, 총회역사위원장 서원수 목사가 지정공포와 함께 증서를 전달한다. 3부 축하식과 4부 제막식은 이정우 목사(안동서부교회 담임) 사회로 진행된다. 이 생가는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손인 봉경 이원영 목사(1886~1958)가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예안 3‧1운동을 주도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옥중에서 이상동 장로의 전도로 기독교 신앙에 입신하였다. 출옥 후, 안동 성경학교와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영주 중앙교회, 이산 용상교회, 신세교회(현, 동부교회), 안기교회(현, 안동서부교회) 등에서 목회를 사역하였다. 이원영 목사는 일제의 황민화 정책(창씨개명, 신사참배) 거부로 목사직 시무 사면을 당했으며, 이후 해방이 되기까지 4차례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과 함께 출옥한 그는 1946년 경안고등학교(현, 경안신학원)를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에 힘썼으며, 1954년에는 제3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추대되어 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발표했다. 정부에서는 예안 3‧1운동의 공로로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으며, 1999년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에 이장되었다. 안동서부교회는 지난해 1월 이원영 목사 생가를 경안노회를 경유하여 총회 사적지 지정을 신청했으며, 지난 103회 총회에서 인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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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화해를 강조한 ‘산 순교자’ 이원영 목사봉경 이원영 목사 후손들과 임원들이 포럼 참석 후 기념촬영을 했다. 봉경 이원영 목사 故 이원영 목사 60주기 추모예배 및 제3회 정신문화 학술포럼이 지난 24일(주) 오후 4시 안동서부교회당(이정우 목사 시무)에서 열렸다. 이원영정신문화계승사업회 주최로 열린 이번 포럼은 권영배 교수(前 계명대학교)가 진행했으며 임희국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가 ‘구한말 근대화의 추진과 근대교육, 경북 안동의 신식 사립학교 설립, 이원영의 수학(受學)’에 대해, 신준영 연구원(이육사문학관)이 ‘안동 보문의숙(寶文義塾) 연구’에 대해, 김순석 박사(한국국학진흥원)가 ‘이원영 목사 도서자료를 통해 본 근대교육의 성격’에 대해 각각 발표했다. 포럼에 앞서 드린 추모예배는 이성덕 장로(안동서부교회 역사편찬위원)의 인도, 박효일 장로(이원영정신문화계승사업회 부위원장, 화목교회)의 기도에 이어 이정우 목사가 “아름다운 신앙”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원영(1886-1958) 목사는 퇴계 이황 선생의 14세 손으로 태어났으며, 1919년 3월 17일 예안의 독립만세 운동에 유림 지도자로 깊숙이 참여함으로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유림에서 기독교로 전향한 후 목회자로, 교육자로, 또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온몸으로 저항한 애국지사로 일평생을 살아간 ‘산 순교자’였다. 1945년 해방 직후 그는 무너진 교회를 복구하는 데 앞장섰고, 제39회 총회(1954년)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교단이 ‘신사참배취소성명’ 발표하는데 주관했으며, ‘죄 용서’와 ‘화해’를 통해 분열된 교계를 하나로 모으는 일에 힘썼다. 이정우 목사는 “권위와 존경을 잃어버린 오늘의 시대에 한 줄기 옳음과 진실된 삶을 살다 가신 이원영 목사의 정신은 큰 귀감이 된다”며 “이원영 목사 기념관이 세워져 믿음의 후손들에게 삶과 신앙의 절개를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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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봉경 이원영 목사 生家 총회 사적지로 지정안동서부교회(예장통합, 이정우 목사 시무)는 당회 결의(2018.1.28)로 봉경 이원영 목사 생가를 경안노회(2018.2.9.)를 경유하여 총회 사적지 지정을 신청했었다. 이에 지난 3월 27일 총회역사위원회 위원장(정우 목사)과 실무자들이 사적지 지정 타당성 확인차 생가를 현장 방문하였다. 그 후 총회역사위원회에서 지정 여부를 검토한 결과 사적지 지정 요건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평가되어 사적지로 지정하기로 하였다고 통보하였다. (2018.8.7) 제103회 총회(2018.9.10.~13) 본회에서 인준(총회장 공포)을 받아 총회 역사위원회와 협의하여 지정식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원영 목사 생가 사적지 신청이유 및 근거로 신청한 내용> 이 집은 퇴계 이황의 14대손인 이원영 목사(1886 –1958)가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아버지 이관호와 어머니 김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혁신 유림으로 5세부터 한문을 사숙하였으며, 1919년 3월 18일 예안면 3.1운동을 주도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복역 중 이상동 장로의 전도로 기독교 신앙에 입신하였다. 출옥 후 안동 성경학교(1925)와 평양 장로회신학교(1930) 제25회를 졸업한 후 영주, 이산, 안기, 신세, 안동서부교회 등 안동지역 교회를 담임하였다.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대해 이원영은 1938년부터 해방이 되기까지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4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출옥한 그는 1946년 ‘경안고등성경학교(현 경안신학원)’를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54년에는 제39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으로 추대되어 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발표하였다. 정부에서는 예안면 3.1운동의 공로로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으며, 1999년 11월 2일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에 이장되었다. 이원영 목사의 생애는 애국지사요, 참된 교육자요, 사랑의 목회자요, 산 순교자로서 고난을 영광으로 승화시켜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셨다. 이러한 업적을 남기신 이원영 목사의 생가를 총회 한국기독교사적지로 지정하여 안동 지역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근대 문화유산으로서의 역사적, 교육적, 문화적, 종교적 가치와 의의를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며, 특히 지역교육청과 연계하여 자라나는 미래 세대들에게 나라사랑 교육의 장으로서의 기회를 제공하여 애국심 고취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글=안동서부교회 역사편찬위원장 김두진 장로〉 〈사진=안동서부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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