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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노회장로회 2022년(제39회기) 수련회 열어영주노회장로회(회장 김시용 장로)는 지난 6월 21일(화)~23일(목) 2박 3일 일정으로 80여 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하기수련회를 개최했다. 특별히 이번 수련회는 담양, 보성, 여수, 순천지역을 방문해 자연경관 관람과 함께 기독역사순교지 탐방을 겸하여 진행해 더욱 알차고 귀한 시간이었다. 먼저, 첫째날은 담양에서 죽녹원, 한국대나무박물관을 관람하고, 보성에서 대한다원 방문한 후, 율포해수욕장 관람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둘째날에는 여수 오동도를 관람한 후, 여수 애양원교회(임용한 목사 시무)를 찾아 수요예배를 드렸다. 이후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 애양원병원 등을 방문했다. 셋째날에는 순천지역에서 순천만 국가정원을 돌아보고, 순천 드라마 촬영장 관람, 순천기독교역사박물관 관람 등의 일정이 진행됐다. 이번 수련회에 처음으로 참석한 법전교회 신임 박경옥 장로는 “순교자들의 발자취까지 돌아보는 알찬 일정 속에서 제 믿음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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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땅 의성! “영남의 순교성지”로 떠올라경동노회 여전도회, 주기철 목사·권중하 전도사·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밟다! ▲경동노회 여전도회는 주기철 목사 수난지인 ‘옛 의성경찰서’를 탐방하는 등 의성군 일대 순교유적지를 둘러보는 성지순례행사를 가졌다. 예장(합동) 총회에 의해 ‘옛 의성경찰서 건물’과 ‘중리교회 제1예배당’이 각각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호’, ‘제5호’로 지정된 이후 의성이 ‘영남의 순교성지’로 새롭게 떠오르며 국내성지순례단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6일 예장(합동) 경동노회(경주, 포항, 영천지역) 여전도회(회장 허영숙 권사) 실행위원 80여 명은 의성군 일대 순교유적지를 둘러보는 성지순례행사를 가졌다. ▲권중하 전도사 순교비 참가자들은 추성환 목사(철파교회, 주기철의성수난기념관추진위 사무국장)의 안내를 받으며 먼저 주기철 목사 수난지인 ‘옛 의성경찰서’를 방문했다. 이어 권중하 전도사 순교비와 중리교회 제1예배당,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통합총회 한국기독교사적 제10호)를 차례로 밟았다. ▲엄주선 강도사 순교지 허영숙 회장은 순교지를 돌아본 뒤 “예수님 때문에 모든 고난을 견디고 순교하신 믿음의 선진들 앞에 숙연해졌다”며 아울러 “자신의 믿음을 되돌아보고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주수 의성군수와 신시호 의성문화원장, 김병준 의성군기독교연합회 회장 등이 찾아와 여전도회 회원들의 방문을 환영했다. 이 자리에서 김주수 의성군수는 “주기철 목사 관련 항일운동 수난기념관 사업에 힘쓰겠다”고 했다. 추성환 목사는 “의성 지역에는 100년 역사가 넘는 교회가 30여 개 있고, 3.1운동 발상지 공원, 베어드 선교사 발자취 등 여러 기독교 사적지가 있다”며 “앞으로 ‘주기철 목사 수난기념관’이 설립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독교계의 관심과 기도를 부탁한다”고 했다. 한편, ‘의성 마늘 소녀’로 유명한 국가대표 컬링팀 김영미 김경애 자매는 의성 철파교회에 주일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출석하는 교인이라고 한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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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지를 찾아서(12) - 소록도 성자 김정복 목사소록도 성자 김정복 목사와 소록도 5교회 ▲김정복 목사 순교기념비 김정복 목사(1882~1950) ▷김정복 목사 순교 이야기 소록도의 김정복 목사는 애양원 손양원 목사와 쌍벽을 이루는 한국교회 대표적 순교자이다. 1882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한 김정복 목사는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제주중앙교회, 고흥읍교회, 길두교회 등에서 시무하다 1946년 소록도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다 1940년 5월부터 3년 넘게 광주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으며, 해방 후에는 손양원 목사 등과 더불어 한국교회 재건을 위해 힘썼다. 소록도교회가 은혜가 충만하여 부흥하던 가운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여 인민군들이 소록도까지 침입했다. 인민군의 교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교인들은 김정복 목사에게 잠시 피신할 것을 청원했다. 그러나 김 목사는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4,000여 양떼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며 박해를 각오하고 교회를 지키다 8월 28일 인민군에 체포됐다. 끌려가면서도 “사랑하는 소록도 성도들아 신앙절개 굳게 지켜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하나님이 위로해주실 것이니 안심하라”면서 남은 성도들을 위로했다. 결국 인천상륙작전 후 퇴각하던 인민군에 의해, 1950년 9월 30일 고흥경찰서 뒷산에서 69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소록도 5교회 ‘순교사적지’ 지정 김정복 목사는 예장(합동) 제86회 총회에서 순교자로 등재되었다. 또한, 소록도 5교회(중앙, 신성, 동성, 남성, 북성교회)는 97년 동안 한센병 환우들의 고통과 애환을 함께한 역사를 지닌 곳으로, ‘한국기독교 순교(김정복 목사)사적지(제3호)’,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제12호)’로 지정되었다. ▲소록도 중앙교회예배당 전경.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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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지를 찾아서(11) - 아펜젤러 순직기념관“감리교 최초 선교사 아펜젤러” 아펜젤러(H.G.Appenzeller, 1858~1902) ▷아펜젤러 선교사 소개 아펜젤러 선교사는 미국감리교 선교회에서 한국에 공식적으로 파견한 최초의 선교사이다. 그가 미지의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딘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이었다. 그날 제물포에 들어온 외국인은 아펜젤러 부부를 비롯해 미국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였다.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17년 동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우리나라 신교육의 효시가 된 배재학당을 세워 교육에 힘썼으며 정동제일교회 설립, 독립협회 지원, 신약성경 한글 번역, 지방 순회 전도활동, 종교신문 <죠션 크리스토인회> 창간 등 근대한국사와 기독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그가 1902년 6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향하던 중 어청도 부근에서 선박 충돌 사고가 발생했다. 그는 동행한 조선인 통역사 조한규와 정신여학교 학생을 구출하려고 탈출을 미루고 침몰하는 배에 다시 들어갔다가 결국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순직하였다. ▷아펜젤러 순직기념관 마량은 아펜젤러가 순직한 어청도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로, 선박사고로 생을 마감한 아펜젤러의 숭고한 삶을 기리고자 지난 2012년 순직기념관을 건립했다. 또한, 아펜젤러 선교사를 한국으로 파견한 존 가우처 박사를 기리는 부속관이 있으며 감리교 초기 유물들이 특별 전시관에 전시 중이다. ▲아펜젤러 순직기념관(충남 서천 마량리 소재)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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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지를 찾아서(10) -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전경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소개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한국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던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이다. 기념관이 추진된 것은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맞았던 1984년이다. 당시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영락교회 정이숙 권사가 기증한 경기도 용인시 추계리의 대지 36만㎡를 바탕으로 건립 사업을 추진해 1989년 기념관의 문을 열었다. 3층 건물인 기념관 1층 입구에는 한국의 초기 교회 역사를 알 수 있는 그림 40여 점이 전시돼 있다. 2층 예배실에는 1930년대 이전 개화기의 한국교회와 사회의 모습을 담은 사진 120여 점이 보관돼 있다. 3층 순교자 기념실에는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등 순교자들의 초상화와 약력을 담은 글이 보관돼 있다. 또 1866년 대동강에서 참수된 토마스 선교사 등 해외 선교사에 관한 기록도 볼 수 있다. 1884년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진 이래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숨진 순교자는 주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2,66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이 중 600여 명의 순교자 명단이 순교자기념관에 헌정되어 있다. 기념관 건물 밖에는 여러 교회에서 기증한 성경 돌비와 순교자를 기념하는 시비(詩碑) 및 개인 기도 장소가 있다. (이용 문의: 031-366-2825) ▲ 253명의 순교자 존영이 걸린 전시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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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지를 찾아서(9) - ‘7인의 순교자를 낸’ 법성교회▲법성교회 앞 순교기념비 ▲현 법성교회 전경 ▷법성교회 순교 이야기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은 122,799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서 전라남도 지역의 피해(4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되었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피해가 가장 컸는데, 그들은 기독교를 부정하고 공산주의를 선택할 것을 강요당했으며, 인민군들에 의해 일가친척이 모두 학살되는 경우도 많았다. 영광군 법성포에는 1950년 9월 중순 인민군이 마을에 총을 쏘며 들어왔다. 그리고 기독교인 명단을 찾아낸 그들은 면사무소 창고에 법성교회 당회장 김종인 목사를 가두었다가 대사고개라는 곳으로 끌고 가 양잿물을 삼키도록 했다. 김 목사가 양잿물을 삼키지 않고 입에 머금고 있자 칼로 목을 쳐 사망케 했다. 이 소식에 큰딸 김순화는 ‘공산당 물러가라’고 외치며 다녔다. 그는 인근 신덕동 저수지로 끌려가 발가벗겨진 채 대창에 온몸이 찔려 죽었다. 이어 법성교회 교인인 송옥수 집사, 박옥남 집사, 김진복 청년 등이 전깃줄에 손이 묶여 끌려갔으며 대창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 ▷순교사적지 지정 예장합동 총회는 제99회 총회에서 한국전쟁 당시 신앙을 지키다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학살당한 ‘7인의 순교자’를 순교자로 등재하고, 지난해 3월 ‘법성교회 7인의 순교자’ 등재 감사예배를 드렸다. 또한, 제103회 총회는 법성교회를 ‘한국기독교 순교사적지 제5호’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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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지를 찾아서(8) -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손양원 목사의 생애 손양원 목사는 1902년 경남 함안군에서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손 목사는 아버지의 독실한 신앙의 영향을 받아 진주에 있는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하면서 복음전도자가 되었다. 이후 1935년에 평양신학교 입학, 1938년에 졸업했으며, 여수 나병원 애양교회에 부임하여 나병환자를 돌보았다. 일제 치하에서 손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체포되어 여수 경찰서에서 10개월간 구금, 광주 구치소와 광주 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43년 5월 17일 출옥 후에도 그는 계속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다가 종신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해방을 맞아 1945년 8월 17일 석방된다. 해방 후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때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반란군에게 총살당해 순교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는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 안재선을 용서하고, 그의 구명 운동을 벌여 그를 살려내고 자신의 아들 ‘손재선’으로 입적해 양아들로 삼았다. 그 후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서 나환자들을 돌보며 목회 하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났고, 피난을 가지 않고 교회와 성도들을 지키다가 공산군에게 체포당했다.(1950년 9월 13일) 이후 15일 간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총살당함으로써 장렬히 순교 하였다.(1950년 9월 28일, 향년 49세)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보다 욥의 고난과 인내를 더 고귀하게’ 여겼던 손양원 목사의 깊은 신앙심과 ‘끝없는 사랑’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순교기념관이다. 주변에는 손양원목사 기념비 및 3부자 묘지, 성산교회가 있으며 매년 기독교 신자들의 순례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기념관 운영 문제로 잠시 폐쇄되었으나, 최근 들어 다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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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지를 찾아서(7)-광주양림교회▲광주에 최초로 건축된 북문안교회와 교인들(1910년)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앞장선 교회 1904년 12월 25일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의 임시 사택에서 드렸던 크리스마스 예배는 광주에서 드린 최초의 공식적인 개신교 예배였으며 동시에 양림리교회(현, 양림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첫 예배였다. 이때 참석하였던 사람은 김윤수 집사 가정, 변창연 조사 가정을 포함한 40명이었으며, 구경하러 몰려든 시민이 200여 명이었다. 양림리교회는 이후 북문안교회, 남문밖교회, 금정교회로 불리다가 1924년 금정교회(현 광주제일교회)와 양림교회가 분립하였다. 배유지 선교사는 1908년부터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을 모집해 성경을 가르쳤으며 그것이 오늘의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1916년 3월에 남궁혁(한국인 최초 평양신학교 교수), 이득주 양인을 장로로 장립했고, 이기풍 목사가 양림교회 제2대 당회장에 부임해 사역했다. 또한, 광주지역의 3.1 만세 운동은 양림교회를 중심으로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학생들,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직원들의 주도로 이루어져 많은 이들이 투옥됐으며 교회가 폐쇄되기도 했다. 1937년에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일제에 맞서던 김현승, 백영흠 등 교회 청년들이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6·25 동란 중에는 양림교회 제8대 당회장으로 시무하던 박석현 목사가 가족과 함께 순교의 피를 흘렸다.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 지정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는 제103회기 총회에서 광주양림교회의 역사적·신앙적 가치를 존중하여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 제9호로 지정했다. ▲광주양림교회 제8대 당회장 박석현 목사는 1950. 9. 27. 영암군 상월리에서 가족과 함께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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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지를 찾아서(6)-김제 만경교회▲김제 만경교회 순교기념비 ▷만경교회 순교 이야기 1913년 외서리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만경교회는 한국전쟁 당시 김종한 목사와 강성진 장로를 비롯한 15명의 성도들이 교회를 지키고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반공혁명단’을 만들고 인민군에 저항하다 순교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과 좌익세력들은 김제와 만경 일대를 장악했으며 예배당을 점거하고 예배를 방해했다. 1950년 9월, 이들의 탄압에 맞서기 위해 만경교회 최정렬 성도를 주축으로 기독청년들은 비밀결사대 ‘반공혁명단’을 조직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 단체가 발각됐으며 인민군은 청년들을 잡아갔다. 또한, 반공혁명단의 책임을 물어 김종한 목사, 강성진 장로 등 교인 10명도 체포해갔다. 가혹한 고문 후 9월 27일 0시, 인민군들은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잡혀간 성도 10명은 죽창과 총, 칼에 의해 대학살의 순교를 당했으며 마을 우물과 방공호에 매몰됐다. 전주형무소로 끌려갔던 5명의 청년들도 싸늘한 주검이 되어 그곳에서 발견됐다. 당시 교인들과 끝까지 함께한 김종한 목사는, 위급한 상황에서 잠시 몸을 피할 것을 권하는 교인들에게 “목사가 양들을 버리고 어딜 가겠습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시다”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다. 만경교회 순교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종한 목사 강성진 장로 강춘길 이남근 최남인 최정렬 유상덕 이정순 곽옥정 유금식 송은숙 송창호 고동순 이옥진 곽병일 (이상 15명) ▷순교사적지 지정 만경교회는 예장합동 102회기 총회에서 순교사적지로 지정됐으며, 지난 3월 29일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제2호 지정 감사 예배가 만경교회(담임목사 전철희)당에서 열렸다. ▲예장합동 총회는 지난 3월 29일 만경교회에서 총회역사위원회 주관으로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제2호 지정식을 갖고 현판을 부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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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지를 찾아서(5)-문준경 전도사▲문준경 전도사(1891~1950)는 생전에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다가 공산군들의 총칼에 순교당했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문준경 전도사 순교 이야기 문준경 전도사는 1891년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결혼했지만 남편이 제대로 돌보지 않아 20여 년을 시부모와 함께 살았다. 이후 목포에서 어렵게 살다가 전도를 받아 북교동성결교회에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성봉 목사의 영향으로 열성적인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된다. 문 전도사는 나이 40세에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해 공부했으며, 학생 시절부터 신안군 섬 전 지역을 순회하며 중동리교회를 중심으로 진리교회와 대초리교회 등 여러 교회를 설립했다. 그녀는 지역을 순회하는 도중 주민들의 부탁으로 우체부의 역할도 했고, 여러 섬을 왕래하느라 1년에 아홉 켤레나 고무신을 바꾸어 신었다고 한다. 1943년 일본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모진 옥고를 겪었다. 그리고 1950년 10월 4일, 당시 신안군을 장악하고 있던 좌익 세력들은 국군이 증도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교인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10월 5일 새벽, 문 전도사를 비롯한 많은 주민들도 중동리교회 앞바다에서 총살당했다. 공산당원들은 문 전도사를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라며 몽둥이로 내리쳤고, 문 전도사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총탄에 쓰러졌다. 문 전도사는 생전에 증도에 11개의 교회를 세웠고, 그녀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신안군에는 100개가 넘는 교회들이 세워졌다. 현재 증도는 복음화율 90%가 넘는 천사의 섬으로 변화되었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2013년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기념관이 신안군 증도면에서 개관하였고, 중동리교회에는 문준경 전도사의 추모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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