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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선교를 통한 안동지역의 복음화(3)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1. 한국에 세워진 초기 선교병원 2. 안동성소병원의 9개 변곡점 3. 안동성소병원의 시작 4. 안동성소병원의 이름 5. 초기 안동성소병원의 위치 6. 코넬리우스 베이커 기념병원 ............................................. 13. 안동성소병원의 재건축 14. 1960년대~1980년대 안동성소병원 3. 안동성소병원의 시작(2) 3) 안동성소병원의 출범 시기 별리추 선교사가 첫 진료를 시작한 1909년 10월 1일에 안동성소병원이 시작했음은 지금까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별리추 선교사의 아들인 플레처(D. R. Fletcher)의 저서 『십자가와 수술칼』에 따르면 별리추 선교사가 안동에 처음으로 도착한 해(年)는 1910년 2월로 이 연구에 따르면 성소병원의 개원일이 1909년 10월 1일이 될 수 없다. 원래 한국에 도착한 별리추 선교사는 원주선교부로 발령이 났지만, 원주에서 사역할 수 없었던 별리추 선교사는 당시 원주선교부를 책임지고 있던 미북장로교 오월번 선교사가 1908년 설립된 안동선교부로 파송을 받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별리추 선교사도 안동으로 이동함으로써 성소병원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09년 10월에 별리추 선교사는 대구에 있었다는 자료도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안동성소병원의 설립일인 1909년 10월 1일에 별리추 선교사가 안동에 거처하고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에 관한 연구는 보다 정확한 선교보고나 편지 등에 의해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4. 안동성소병원의 이름 성소병원의 이름이 어떻게 성소(聖蘇)로 정해졌을까? 우선 성소(聖蘇)라는 단어는 거룩할 성(聖)과 되살아날 소(蘇)로 구성되어 있다. 즉 성소(聖蘇)는‘거룩한 소생(蘇生)’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성소(聖蘇)’는 병원을 찾은 사람들이 육신적 구원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이루기를 소망하는 선교사가 성소병원(聖蘇病院)이라고 지었을지 모른다. 사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별리추 박사는 처음부터 안동을 선교지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 원주로 파송을 받았지만, 선교지 분할정책으로 원주를 떠나 안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안동에서 성소병원을 시작했다. 2년이 지난 후 별리추 선교사는 안동을 떠나 대구·경북 지역 최초의 서구식 진료소였던 제중원(濟衆院)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제중원은 제2대 원장 별리추 박사에 의해 동산의료원으로 개명하게 되었다. 별리추 선교사는 동산의료원에서 1911년부터 1941년까지 무려 31년 동안 병원장으로 사역을 감당했다. 따라서 뛰어난 실력을 갖춘 별리추 선교사가 안동에 체류했던 2년의 기간은 안동에 있어서는 은혜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섭리 속에 탄생한 안동성소병원의 지나온 모든 세월은 하나님의 은혜였기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성소(聖召), 성소(聖所), 그리고 성소(聖蘇).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인 성소(聖召)에 순종한 별리추 선교사는 한국으로, 원주로, 안동, 그리고 대구로 사역지를 옮기며 의료선교를 감당하였다. 특히 그가 머물러 치료했던 땅들은 질병으로 고통받고 치료에서 소외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위한 거룩한 장소인 성소(聖所)가 되었다. 안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교사들의 임시사택이었던 화성동 151번지, 그리고 현재 성소병원 주소인 금곡동 177번지는 안동뿐 아니라 경북 북부지역의 거룩한 땅, 성소(聖所)가 되었다. 또한, 안동성소병원은 지난 114년 동안 뭇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여 육신을 구원할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함으로 영혼도 소생(蘇生)시키는 성소(聖蘇)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5. 초기 안동성소병원의 위치(1) 안동성소병원이 1914년 병원건물을 준공하여 영구히 자리를 잡기 전까지 안동선교부 초기 선교사 주택은 성소병원의 위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박희곤은 그의 저서에서 “초기 안동성소병원은 한곳에 머물러 진료하지 않고 선교사의 이동에 맞춰 옮겨 다녔을 것으로 짐작된다.”라고 밝혔다. 1) 안동성소병원 최초의 진료 장소:선교사 임시주택과의 관계는 별리추 선교사가 현 안동교회 구내에 있던 화성동 선교사 임시주택에서 진료를 시작함으로 안동성소병원이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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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욱 목사 은퇴감사 및 ‘미션제대로’ 창립예배박성욱 목사의 은퇴감사 및 선교사역 ‘미션제대로’ 창립예배가 4월 13일 풍양제일교회에서 드려졌다. 박 목사는 목회사역 44년(근속 22년)을 마치고 은퇴했다. 1부 예배는 영주노회장 류조희 목사 집례로 부노회장 김윤기 목사 기도, 영주노회장로합창단 찬양 후 전 노회장 김창진 목사가 ‘생동하는 교회의 일꾼’ 제목으로 설교했다. 2부 축하 순서는 윤상익 장로 사회로 회고사, 박성욱 목사에게 감사패 전달, 곽희주 목사(전 경서노회장)와 황강섭 장로(영주노회 부노회장)의 축사 등의 순서로 진행했다. 3부 ‘미션제대로’ 창립 행사는 김태훈 목사(풍양제일교회 담임)의 사회로 진행했으며, 문병조 목사(전 영주노회장) 축도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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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오교회 ‘설립 120주년 기념’ 감사예배 드려칠곡 숭오교회(담임목사:서성수)가 설립 120주년을 맞아 지난 4월 27일(토) 감사예배를 드렸다. 숭오교회의 태동은 정운찬이 1901년 선산군 구미면 상모교회 정인명 전도인의 복음증거로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같은 해 십여 명의 주민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어 상모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다가, 1904년 4월 27일 50여 명의 신도가 태평교회(현 숭오교회)를 설립하게 됐다. 이후 숭오교회는 교세가 부흥했으며 기독보흥소학교를 세워 인재양성에 힘썼다. 3.1만세운동에 관여해 옥고를 치른 교인도 있었고, 신사참배를 거절하면서 많은 교인이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6.25전쟁 때는 온 동네가 소실된 가운데도 교회 예배당이 온전히 보존되는 은혜를 입었다. 이날 설립 120주년 감사예배는 지난 120년 동안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복음의 꽃을 피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자리였다. 예배에는 경북노회 한유도 노회장을 비롯한 노회 임원, 이웃교회 목사와 장로 등 다수의 내빈이 참석했으며, 특별히 김재욱 칠곡군수가 참석해 축하 인사를 했다. 1부 예배는 서성수 목사의 인도로 드렸으며, 칠곡시찰장 배철욱 목사와 회계 김길웅 장로가 기도와 성경봉독 순서를 맡았다. 이어 서성수 목사가 ‘진리의 기둥과 터 위에 세운 교회’(딤 3:14~16)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서 목사는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 집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곳”이라면서 “역동성을 갖고 최선의 경주를 다하며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란다”고 권면했다. 2부에는 숭오교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영상으로 시청했으며, 서성수 목사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3부 감사와 축하 시간에는 칠곡시찰 서기 정옥현 목사, 김재욱 칠곡군수, 숭오교회 출신 김정재 장로가 축사와 격려사를 했다. 뒤이어 김성렬 선교사(캄보디아)의 선교 보고, 축하케이크 커팅 등의 순서가 이어졌고, 경북노회장 한유도 목사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서성수 목사는 “숭오교회는 복음에 빚진 교회로 해외 4개국에 교회를 건축, 헌당하는 등 전도와 선교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서 “120년의 뿌리 깊은 영성과 복음 진리로 무장하여 다음 1세기를 향해 복음의 역사를 이어가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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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 경안노회·영주노회 분립 40주년 기념예배 드려경안노회와 영주노회가 분립 40주년 기념예배를 4월 9일 안동서부교회(이정우 목사 시무)에서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경북 북부지역에 복음이 처음 전해진 것은 1893년 4월 17일~5월 20일 부산선교부의 배위량 선교사가 경북 북부지역을 처음 방문한 때부터이다. 그 뒤로 복음을 받아들인 신도들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역에도 교회가 세워졌고, 1922년 1월 18일에 제1회 경안노회가 안동교회에서 개회했다. 당시 경안노회에는 예천, 점촌, 영주, 봉화, 의성, 안동, 청송, 영양, 영덕, 영해지역 교회들이 속해 있었다. 이후 경북 북부지역에 기독교가 부흥되어서 1984년 3월 6일에 영주노회가 분립되었다. 현재 경안노회(노회장손영남 목사)에는 199처 교회, 영주노회(노회장 류조희 목사)에는 167처 교회가 소속돼 있다. 이날 분립 40주년 감사예배는 영주노회장 류조희 목사의 인도로, 경안노회 부노회장 김영찬 장로의 기도, 안동장로합창단과 CTS안동권사합창단 찬양, 노회분립위원장 김충효 목사의 ‘에벤에셀’ 제하 설교, 경안노회 공로목사 박종석 목사의 축도로 드렸다. 2부 축하시간에는 지난 발자취의 회고를 안동교회 김승학 목사가 했으며, 전 총회장 김태영 목사가 축사를 전했고, 경안노회와 영주노회 임원들이 감사 인사를 했다. 예배 후에는 영주노회는 안동서부교회에서 정기노회를 진행했고, 경안노회는 도원교회로 장소를 옮겨서 정기노회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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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지역장로회연합회, 제16회기 영성수련회 및 선교대회 개최예장합동 경북지역장로회연합회(회장:고정식 장로) 제16회기 영성수련회 및 선교대회가 3월 26일 진량제일교회(김종언 목사 시무)에서 개최됐다. ‘하나님과 동행하자’는 주제로 열린 대회에는 경북지역 10개 노회에서 100여 명의 장로회원들이 참석해, 말씀을 통해 은혜받고 선교의 사명과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안동지역에 세워질 개척교회를 위해 헌금하기도 했다. 1부 개회예배는 대회장 고정식 장로의 인도, 명예회장 오종대 장로 기도, 유기연 자매(경주서부교회) 특송 후 증경총회장 이승희 목사의 ‘다시 요단강 저편으로’(요10:40-42) 제하의 설교로 진행됐다. 이승희 목사는 설교에서 “사역의 정점에서 예수님이 다시 찾으셨던 ‘요단강 저편’은 처음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장소”라며 “우리도 다시 요단강 저편으로 가야 한다. 처음 임직받았던 초심을 확인하고, 참 장로로, 열매 맺는 장로의 모습으로 살아야 교회가 살아나고 경북지역 교회가 변화될 것이다”라고 말씀을 전했다. 이어서 증경부총회장 윤선율 장로, 대구교직자협의회장 박기준 목사, 총회 부회계 이민호 장로, 대구·경북장로회연합회 명예회장 이순우 장로, 대구지역장로회장 김동권 장로가 격려사와 축사를 전했고, 경청장로회장 황해봉 장로가 환영 인사를 했다. 봉헌 시간 후에는 준비위원장 정의동 장로의 내빈소개 및 인사, 총무 한상봉 장로의 광고에 이어 경주서부교회 박영만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무리했다. 2부와 3부 은혜의 시간에는 박기준 목사(대구교직자협의회장)와 한혜성 목사(산격교회, Global DMC 대표)가 특강을 진행했다. 박기준 목사는 “목회자와 중직자들이 하나 되어 기도와 전도에 힘쓸 때 교회는 부흥한다”고 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한혜성 목사는 “한국교회가 선교에 더 관심을 갖고 기획하고 전략을 짜서 사도행전과 같이 뜨겁게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폐회예배는 회장 고정식 장로 사회와 새빛교회 이철우 목사의 ‘내 눈을 밝히소서’ 제하 설교, 진량제일교회 김종언 목사 축도로 드렸다. 대회장 고정식 장로는 “이번 영성수련회와 선교대회가 큰 은혜 가운데 마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면서 “앞으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혼 구원 사역을 최선을 다해 감당해가는 본 연합회가 되길 소망한다”라고 밝혔다. /박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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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부활절 메시지 - 김영달 목사김 영 달 목사 경북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화양읍교회 담임 할렐루야!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절을 맞아 경북 산하 22개 시군 연합회와 2,300여 지 교회와 함께 축하를 드립니다.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세 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롬 3:23)과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롬 6:23), 모든 사람에게는 심판이 있다는 것(계 20:12)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 세 가지 절대적 사실을 해결해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어 주셨으며,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 주셨습니다(고전 15:20). 기독교만이 부활의 종교요 생명과 영생을 주는 종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민족은 과거 5,000여 년 동안 온갖 우상숭배와 무속신앙으로 흑암의 그늘 아래서 소망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1884년 4월 부활절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여 부활의 주 예수를 우리 민족에게 전해 주었고,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워 민족정신을 깨워 민족 복음화로 근대화의 초일류 국가를 만들어 왔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부활의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다시 부흥을 위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갑시다. 그리고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를 대적해오는 반기독교 세력들과 차별금지법이라는 명분으로 비성경적인 악법들, 동성애와 동성혼을 합법화하려는 세력들과 싸워나갑시다. 죄악에 빠져 멸망으로 가는 우리 이웃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합시다.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며, 부활의 축복과 회복의 축복이 경북 산하 모든 교회와 도민들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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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도서: 마르투스 : 증인(저자-김태훈)“깨어진 그릇을 신실한 증인으로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 책소개 ❙ 이 책은 <깨어진 그릇> 이후 김태훈 선교사의 가정이 걸어간 순종의 여정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내전이 터지고, 역병이 돌아도, 오직 주님께 다음 행선지를 묻고 대륙을 횡단하며 복음을 전하러 간 김태훈 선교사와 아내 김희연 선교사. 그들의 거침없는 행보가 초대교회 사도들의 성령 행전과 교차되며 흥미진진하게 담겨 있다. 탁월한 외과의사 김태훈 선교사의 전부를 드린 ‘떠남’과 ‘순종’의 여정! - 도서출판 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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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선교를 통한 안동지역의 복음화(2)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1. 한국에 세워진 초기 선교병원 2. 안동성소병원의 9개 변곡점 3. 안동성소병원의 시작 4. 안동성소병원의 이름 5. 초기 안동성소병원의 위치 ............................................. 12. 애린진료원 13. 안동성소병원의 재건축 14. 1960년대~1980년대 안동성소병원 3. 안동성소병원의 시작(1) 1) 별리추 선교사 안동성소병원이 세워지기 16년 전인 1893년, 안동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다. 부산선교부의 배위량 선교사는 1893년 4월 17일 부산을 출발하여 밀양, 청도, 대구, 구미, 상주, 예천, 안동, 의성, 영천, 경주, 울산을 거쳐 5월 20일 부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복음의 미답지(未踏地)로 남아있던 대구와 경상북도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졌다. 5월 4일 저녁 안동에 도착한 배위량 선교사는 다음날 5일에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의성으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위량 선교사의 발걸음은 안동의 근대화를 위한 첫 발걸음이 되었다. 그가 복음을 전한 이후 안동을 포함한 경북북부 지역에 의료선교, 교육선교, 그리고 사회복지 등이 시작되었다. 1900년대와 1910년대 이 지역의 여러 교회들은 교회 내에서 오늘날 초등학교 수준의 사립학교를 시작했다. 안동교회의 경우, 1911년 여학생을 위한 계명학교(啓明學校)가 출범하여 1935년 초까지 계속 운영되다가 폐교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의 가치관에 기초한 교육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1890년대 말 대구선교부가 세워지고, 1908년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중심인 안동에 안동선교부가 세워졌다. 안동선교부의 설립은 안동에 의료선교사가 올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안동선교부의 첫 의료선교사는 별리추 선교사이다. 그는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으로 독실한 그리스도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부모는 장로교의 본산(本山)인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캐나다에 이주한 농부였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것을 강조했다. 별리추 선교사는 어머니의 말씀과 신앙의 영향에 따라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의료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1906년 25세 때 시카고에 소재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07년 6월, 별리추 선교사는 간단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여 뉴욕에 있는 장로교 선교본부에 짧은 편지를 보냈는데, 선교부가 보내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있음을 밝혔다. 27세의 별리추 선교사를 한국으로 오게 한 것은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롬5:14)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사랑으로 선교사로 지망했고, 가장 좋은 것,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국에까지 오게 되었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2) 한국으로 파송된 별리추 선교사 1908년 3월 2일 미국장로교 해외선교회는 별리추를 선교사 후보자로 지명했고, 1908년 12월 29일 공식적으로 그를 의료선교사로 임명했다. 마침내 그는 1909년 선교지인 한국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1909년 8월 28일 부산에 도착한 그는 곧 바로 선교사들의 모임인 연례선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 연례선교대회에서 별리추 선교사는 원주로 발령을 받았지만 곧바로 황해도 재령의 병원으로 가라는 선교회의 지시에 따라 잠시 재령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 별리추 선교사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여 가정을 꾸렸다. 1912년 내한하여 대구로 파송받은 제시 로저스(Jessi Rogers Fletcher)와 1912년 6월 19일 원두우 선교사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제시 선교사는 아동복지 클리닉과 한센환자를 돌보는 사역에 집중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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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교회 120주년,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식’ 개최교회 설립 120주년을 맞이한 칠곡 왜관교회(담임목사:정옥현)가 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돼 3월 9일 감사예배를 드렸다. 아울러 왜관교회는 이날 태국으로 단독 파송하는 손요섭·김선화 선교사의 파송식도 거행했다. 왜관교회는 1904년 4월 1일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는 동안 성도들이 투옥되고 예배당이 소실되는 등 박해를 겪기도 했지만,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다음세대사역과 해외선교사역, 섬김사역 등에 힘쓰며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교회로 성장했다. 이에 예장합동 제108회 총회는 왜관교회의 역사적 가치와 신앙의 절개를 높이 평가해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2호’로 지정한 바 있다. 감사예배는 정옥현 담임목사의 인도로 총회 부회계 이민호 장로(왜관교회)의 기도, 총회장 오정호 목사의 “아버지의 책무”라는 제목의 설교, 경북노회장 서성수 목사의 축도 순서로 드렸다. 오정호 목사는 설교에서 “역사를 망각하는 나라는 망하는 민족이다”라며 “120년의 역사를 가진 왜관교회가 믿음의 역사를 잘 이어가며 후손들에게 좋은 신앙을 전수하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선교사 파송식은 GMS 행정사무총장 강인중 선교사의 인도로, 파송선교사 서약, 안수기도, 공포, 파송패 및 이사위촉장 증정, 정옥현 목사의 파송사, 안해선 목사의 축사 순으로 진행했다. 사적지 지정식은 총회역사위원회(위원장 박창식 목사) 주관으로 이뤄졌다. 손원재 장로의 기도, 사적지 소개와 역사물 상영, 총회장 오정호 목사의 지정증서 증정 후 김정훈 목사(자문위원)와 장영학 목사(전문위원)가 축사를 전했다. 이어서 현판 제막식 및 역사관 개원식이 진행됐다. 이날 새롭게 선보인 역사관에는 120년 교회 역사를 보여주는 역대 당회록과 중요문서, 한국전쟁 당시 통행증, 교회 종탑 등 120년 동안 함께한 교회 유물과 선교자료 등이 전시되었다. 정옥현 목사는 “왜관교회는 그동안 간직해온 뿌리 깊은 신앙과 복음을 지키며 지역사회에서도 좋은 교회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앞으로 130년, 140년 계속해서 감사의 역사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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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선교를 통한 안동지역의 복음화(1)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1. 한국에 세워진 초기 선교병원 2. 안동성소병원의 9개 변곡점 3. 안동성소병원의 시작 4. 안동성소병원의 이름 5. 초기 안동성소병원의 위치 ............................................. 12. 애린진료원 13. 안동성소병원의 재건축 14. 1960년대~1980년대 안동성소병원 들어가면서 안동시에는 1909년도에 설립된 세 개의 중요한 기관이 있다. 세 개 기관 모두 문을 닫지 않고 오늘에도 존재한다. 우선 안동초등학교는 1909년 5월 9일 사립영가학교와 동명학교를 병합하여 사립안동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현재 시청자리에서 개교했다. 1911년 3월 31일, 공립보통학교가 된 후 1928년 12월 20일, 현재 위치인 남문동 189번지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 번째는 1909년 8월 8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설립된 안동교회이다. 세 차례 교회 위치를 변경한 끝에 1914년 초 오늘의 위치, 화성동 151번지로 이전한 후 109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지막 세 번째 기관은 안동성소병원이다. 안동성소병원은 1909년 10월 1일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료선교사 별리추(鱉離湫, 플레처)가 안동선교부에 부임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그는 성소병원의 초대원장이다. 당시 선교사 임시사택이었던 현재 안동교회 경내에서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하다가 1914년 현재 지번인 금곡동 177번지로 이전하여 109년 동안 한 자리에서 영육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병원으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성소병원의 구관 1층 응급실로 들어가는 출입문 위에는 “하나님은 치료하시고 우리는 봉사한다(God cures, We care.)”라는 문구가 있다. 원훈(院訓)과도 같은 것이다. 이 문장은 직원들이 아무리 수고해도 하나님이 치료하지 않으시면 환자는 회복될 수 없다는 의미로 하나님이 치료자(여호와 라파)되심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1. 한국에 세워진 초기 선교병원 우리나라 근대 병원 설립의 촉매제가 된 것은 1885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개신교 선교사의 인천항 입국으로 시작된 한국선교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복음전파를 목적으로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일명 선교병원들은 일정 지역을 대상으로 선교부(Station)로 지정한 후 주민들에게 진료사업을 시행하다가 점차적으로 병원으로 발전했다. 성소병원 역시 동일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동성소병원의 정관의 제1장 총칙 제1조(목적)는 “본 법인은 의료법에 입각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토대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며 육신의 고통을 제거하며 국민보건을 향상하는 의료사업으로써 복음을 전파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안동성소병원은 처음부터 영혼과 육신을 구원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복음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병원들은 처음에는 행정과 정치의 중심지역에 가옥을 구입하여 진료소로 개조하여 시작했다. 안동성소병원도 이 원칙을 그대로 따라 선교사 임시사택과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 가까이에 있는 가옥을 구입하여 진료소로 바꿔 환자들을 치료하거나 교회 마당에 큰 텐트를 치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하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1909년 경북 안동에 선교병원이 시작하여, 1914년 코넬리우스 기념병원이 세워졌고, 후에 안동성소병원으로 개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진료의사로는 별리추 선교사, 심의도(沈義道, 스미스) 선교사와 백두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백두성은 백태성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백태성은 비록 안동성소병원의 부원장이었지만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성소병원 원장의 직무를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만행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일제는 1943년 선교사들을 강제로 추방시키고 전국에 있는 기독교 학교와 병원을 폐쇄시키기 시작했다. 이 방침에 따라 안동성소병원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안동교회 담임인 김광현 목사가 백태성에게 안동교회 안에 있는 건물을 병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안을 했고, 백태성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백병원 간판으로 안동 최초의 외과병원을 개업하게 되었다. 백태성이 개업한 백병원은 성황을 이루다가 현재 광석동 농협에서 신시장 쪽 인접한 곳으로 이전했다. 2. 안동성소병원의 9개 변곡점 선교병원인 안동성소병원은 한국유교, 불교, 무교의 심장과도 같은 땅인 안동에서 114년 전에 출범했다. 지난 114년의 역사를 통해 안동성소병원은 크게 9개의 변곡점을 통해 부침(浮沈)을 경험했다. 첫째, 1909년 10월 1일은 앞서 언급한 대로 안동성소병원이 시작한 날이다. 둘째, 1914년 첫 병원건물의 신축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에서 최초로 3층 붉은 벽돌의 병원건물이 준공되었다. 셋째, 1927년 의성에 분원(分院)을 설립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다. 넷째, 1950년에 발발(勃發)한 한국동란으로 성소병원 건물이 전파됨으로써 지역 주민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다섯째, 1953년 금곡동에 위치한 경안신학원 입구에 애린진료원이란 이름으로 성소병원이 재탄생한 것이다. 여섯째, 현 병원 위치에 2층으로 병원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함으로써 다시 병원의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일곱째, 1968년 경안노회가 미국선교회로부터 성소병원의 재산권과 경영권을 인수하여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여덟째, 1981년 6월 25일 성소병원은 새롭게 건물을 증축하고 정부로부터 종합병원 인가를 받고 발전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아홉째, 1994년 서울명성교회가 성소병원의 재산과 경영권을 인수하여 건물을 신축하고 의료기자재를 도입하는 등 새롭게 발돋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 소고(小考)에서는 안동성소병원의 시작부터 1980년대 말까지의 역사를 다룰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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