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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안동교회1909년~1952년 예배에 관한 연구(7·끝)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 목사(6대) 시대의 예배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결론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1943년~1952년 (2) 김광현 목사는 부임한 이후 내실을 기하기 위해 먼저 은혜로운 예배를 구상하면서 예배의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순서도 순서지만, 그 순서가 모두 성령과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하고, 거기 진정이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목사는 예배순서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주악→개회선언→강령기원→찬송→교독→기도나 주기도문, 혹은 사도신경(성가대의 아멘 찬양)→성경→찬양→설교와 기도→찬송→헌금→(광고)→찬송→축도→송영. 특별한 것은 봉헌순서가 설교 후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봉헌을 예배 순서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교 후인 예배가 끝나는 시간에 편의상 배치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 목사는 각 예배 순서가 갖는 의미를 그의 자서전 『이풍랑인연하여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바 있다. ① 처음 주악은 성별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되도록 조용한 기도곡으로 예배 분위기 조성에 역점을 두었다. ② 개회선언은 예배에의 부름이므로 그러한 의미가 있는 성구를 낭독했다. ③ 강령기원은 성령강림을 비는 기도인 만큼 기도로도 하고, 성가대에서 거기 해당하는 찬송을 부르게도 했다. ④ 찬송은 대체로 성호를 찬양하는 찬송을 부르게 했다. ⑤ 교독은 그날의 설교와 관련해서 선정하되 교독문을 이용했다. 그리고 한달에 한 번은 십계명을 교독하되 시간이 많이 소요되니까 주문만을 낭독하고, 일반이 각 계명마다 ‘아멘’으로 응답하도록 했다. 나는 이 방식을 신명기 27장에서 배웠다. ⑥ 그다음 기도는 흔히 목회기도라고 하여 목사가 하는데, 나는 종전대로 장로들에게 순번대로 돌려 가며 하게 했다. 장로에게 할 일을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만인제사 정신이 그 이유였다. 시간이 너무 길지 않게 할 것과, 교회를 대표하여 감사와 회개와 간구를 하게 했다. ⑦ 그리고 그날 설교의 본문이 될 성경을 낭독하고, ⑧ 성가대가 특별히 준비한 찬양이 있은 후에, ⑨ 설교를 했다. 그리고 설교자가 기도를 드리고 나면, ⑩ 다 같이 그날 설교 뜻에 따른 찬송을 부른다. 그때 앞에서 기록한 대로 남녀 집사 두 사람이 보자기에 엎인 헌금서랍을 들고, 찬송에 맞추어서 들어온다. ⑪ 목사가 기도하고, 집사들이 헌금서랍을 성찬상 위에 경건히 바친다. 이때 교회에 알릴 말을 한다. 이것은 예배 순서일 수 없으나, 편의상 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주보에 있으므로 요지만 간단히 했다. ⑫ 송영하는 찬송을 부르고, ⑬ 축도를 했다. 축도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에 준해서 했다. 설교 메시지를 실천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성도들에게 성삼위 은혜가 함께 하기를 빌었다. ⑭ 그리고 송영으로 예배를 모두 마쳤다. 결론 본 소고는 1909년부터 1950년대 초까지 약 50년 동안 1909년 8월 둘째 주일 설립된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 예배의 형식, 내용과 순서를 검토했다. 주일오전예배, 주일오후예배, 외국인영어예배, 또한 새벽기도회의 시간과 장소는 오월번 선교사의 부인 새디 선교사와 안동주재 선교사들의 선교 보고와 편지등을 통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지만 예배 순서와 내용을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김광현 목사가 제7대 담임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을 검토하여 제(諸) 예배 순서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1910년대 안동교회의 주일오전예배 시간을 10시 30분, 그리고 오후예배는 2시 30분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예배 순서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찬송→기도→성서봉독→회중의 기도→찬송→성서 교훈→기도→봉헌→찬송 순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예배시간은 정확하지 않지만 수요예배와 새벽기도회도 존재했다. 1920년대 예배는 곽안련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규범』(1922년)이 예배에 영향을 주었다. 주일오전예배 순서는 1910년대의 예배순서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지만 곽안련 선교사가 제안한 축복기도가 마지막 순서로 포함되었다. 주일오후예배와 수요예배 역시 1910년대와 큰 차이는 없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안동교회 주일 오전예배의 경우 비예전적 형식을 탈피하고 본래 장로교회의 예배형식을 회복했을 것이다. 다음은 1930년대 안동교회 주일오전예배순서는 다음과 같다:주악(성가대)→찬송→기도→성경→찬양(성가대)→설교→찬송→헌금→광고→축복→송영(성가대). 1943년 1월 김광현 목사가 7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안동교회 예배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주악→개회선언→강령기원→찬송→교독→기도나 주기도문, 혹은 사도신경(성가대의 아멘찬양)→성경→찬양→설교와 기도→찬송→헌금→(광고)→찬송→축도→송영. 안동지역 선교 초기 예배의 형식과 내용, 시간 등은 늘 제 머릿속에 맴돌 던 주제였다. 하지만 막상 자료를 찾고 발굴하면서 특히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약 30년 동안의 예배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음에 절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1909년대부터 1950년대 초까지 안동교회의 초기 예배, 주일예배, 주일오후예배, 특별예배, 삼일기도회, 새벽기도회 등의 형식, 시간, 내용 등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작은 부스러기 같은 과거의 흔적들을 찾고, 그것으로 당시의 예배를 재구성하면서 과거 없는 현재는 결코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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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안동교회1909년~1952년 예배에 관한 연구(3)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 목사(6대) 시대의 예배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결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 1909년~1920년 말(3) 3) 수요예배 수요예배에 관해 처음으로 기록된 1917년 2월 22일 당회록에는 수요저녁예배라는 명칭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수요저녁예배에는 설교만 할 것이 아니고 모든 교인이 신구약성경 좋은 구절을 택하여 암송도 하고 통독도 하기로 결정하다.” 안동교회의 수요저녁예배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1917년에 안동교회는 수요저녁예배를 가졌는데, 수요저녁예배는 주일오전예배에 비해 보다 간단했다. 따라서 1910년대 안동교회의 수요예배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순서, 즉 찬송→기도→찬송→성경→강도→찬송의 틀을 그대로 유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4) 새벽기도회 길선주 목사의 특별집회 기간 중에 새벽기도회가 실시되었다. 평양 대부흥운동의 결과 한국교회의 전통으로 길선주 목사에 의해 확산된 새벽기도운동이다. 이후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 공예배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사실 평양 대부흥 이전에도 새벽기도회로 모이는 교회가 있었다. 한국 새벽기도에 관한 기록 중에서 1903년에 로스 선교사의 글에서 “왕 목사(현지인 목사)는 새벽에 일어나 손자들과 함께 새벽기도를 드렸다”라는 기록과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백홍준이 새문안교회에 출석하고 있을 때 매일 새벽기도를 가졌다. 하지만 새벽기도회는 대부흥 이후 전국 교회로 확산되었다. 기독교에 입문하기 전 도교와 선불교에서 새벽기도를 경험한 적이 있던 길선주 목사는 한국교회에 새벽기도회를 도입하였다. 길선주 목사의 집회가 시작된 다음 날 11월 14일(월) 오월번 선교사가 새벽 6시 새벽기도회(Sunrise prayer meeting)에 참석했음을 새디(Sadie)의 다이어리는 기록한다. 부흥사경회 이전까지 안동교회가 새벽기도회로 모였다는 기록은 새디의 다이어리에서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집회가 끝난 후 새벽기도회가 지속되었다는 기록 역시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길선주 목사를 통해 안동교회에 새벽기도회가 소개되어 길 목사 집회 기간 중에 한시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5) 외국인예배 외국인예배는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드린 예배였다. 새디 선교사가 안동에 도착해서 함께 동역하던 권찬영 선교사와 별리추 선교사는 모두 독신이었다. 오월번, 새디 선교사 부부만 자녀를 둔 가정이었다. 따라서 안동에서의 외국인 예배는 자연스럽게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안동에 도착한 지 1달 후인 7월 3일, 공식적으로 감격적인 첫 외국인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새디의 다이어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4시 30분을 외국인 영어 예배시간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후 예배를 마치고 선교사들이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식사한 기록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6) 주일학교 성경공부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주일학교는 1914년 2월에 준공된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에서 아침 9시 예배를 시작하여 1시간 동안 예배를 드린 후 계속해서 분반(分班)하여 지정된 교사에 의해 성경공부를 계속했다. 남장년부에는 청·장·노년의 광범위한 연령층이 함께 모여 성경공부를 했으며, 공부시간은 주일 아침 유년부(오늘의 초등학생부)의 예배와 성경공부가 끝난 뒤 곧바로 10~11시부터 예배당을 사용하였다. 성경공부교재는 아동부와 마찬가지로 선교본부로부터 가져온 교재 원본을 등사하여 담임목사와 선교사들이 교사들에게 가르친 후에 학생들과 분반공부를 하게 하였다. 여장년부는 세 부서 중에서 가장 활성화된 부서였으며, 유년부 예배가 끝난 후 남장년부와 동일한 시간에 휘장으로 분리된 예배당에서 운영되었다. 7) 예배당의 구조와 예배모습 오월번 선교사의 부인인 새디 선교사의 1910년 9월 23일 일기에는 ‘ㄱ’자 예배당 부지를 구입하여 대지를 고르게 했음을 기록한다. 당시 안동교회 성도들은 예배당 건축을 위한 헌금을 했다. 에비여사에 따르면 1910년 10월 9일 주일 오후 예배 시 16칸 ‘ㄱ’ 예배당 건축을 위해 특별헌금을 했다고 기록한다. 16칸 예배당은 30평 가까운 공간으로 결코 작지 않은 규모였다. 남녀유별의 유교적 풍습에 따라 남자와 여자의 출입 동선을 분리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ㄱ’자 예배당으로 건축되었다. 또한, 50평 규모의 안동교회 두 번째 신축예배당은 1913년 11월에 공사를 착수하여 1914년 2월에 준공되었다.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가운데 남녀 분리를 위한 휘장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예배는 의자 없이 마루로 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기도할 때는 모두 꿇어앉아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는 형식을 취했다. 당시 풍속에 따라 휘장(Curtain)으로 남녀를 분리했다. 일반적으로 강대상을 바라보며 오른쪽은 여성이, 남성은 왼쪽을 사용하였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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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기에서 힘이 나옵니다.천 석 길 목사 구미남교회 프로 선수들은 비시즌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그의 수명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야구 선수들은 봄에서 가을까지 팬들의 환호 속에서 시즌을 보내다가 추운 겨울이 되면 개인적인 휴가와 함께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자유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때에 탁월한 선수들은 의외로 처음 운동을 배웠을 때의 기본기를 다시 점검하고 기본에 충실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팬들의 인기를 조금 맛본 선수들은 자신의 기교를 뽐내기 위해서 이런저런 자기 방식의 훈련을 하지만, 선수의 수명이 오래가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최고의 선수들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무는 비결은 한결같이 늘 기본기를 점검하는 훈련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 생활과 개인의 경건 훈련도 이와 같은 원리입니다. 몇몇 분이 강력하게 요구하기를 새벽 기도회보다는 저녁 기도회를 인도해 주시면 더 많이 나올 수 있다고 해서 저녁기도회를 만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결과는 꽝이었습니다. 또 다른 분들은 토요 새벽기도회를 한 시간만 늦추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지만, 결과는 더 못합니다. 어떤 분은 목장을 격주로 모이면 더 열정적으로 모일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어떤 분은 무더운 여름철에는 집에서 모이기보다는 카페에서 모임을 하면 더 좋겠다고 떼를 쓰기도 하고, 어떤 분은 한겨울, 한여름에는 두어 달씩 방학을 했으면 좋겠다는 주장을 합니다. 분명한 것은 기본에서 벗어나는 꼼수를 주장하는 사람은 결코 더 잘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본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매주일, 가정에서,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영적인 가족을 회복할 때에 신앙의 힘을 누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단히 기본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같은 것을 반복하고, 같은 자리를 지키는 것이 당장에는 효과가 없을지라도 기본기에 충실하면 하나님의 때를 경험할 것이고, 그때부터는 놀라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원칙에서 벗어나려는 꼼수는 유혹입니다. 원칙을 붙잡는 노력과 흔들리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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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안동교회(1909년~1952년) 예배에 관한 연구(2)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 목사(6대) 시대의 예배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결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 1909년~1920년 말(2) 1) 예배형식과 순서(2) 선교 초기 전국 곳곳에 설립된 교회의 예배를 선교사들이 직접 인도할 여유가 없었고, 한국어가 서투른 선교사들이 예배 전체를 인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함께 동역하는 조사들을 교육시켜 예배를 인도하게 했다. 당시 한국인 평신도가 인도한 예배는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예배 순서를 가급적 단순하게 구성하고 진행함으로써 예전적 요소가 충분히 포함되지 않았다. 둘째, 주제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설교가 선교사들에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공부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셋째, 지역에 산재한 교회들이 연합하여 예배를 드렸다. 1887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의 1890~1900년 초 주일 오전예배는 10:30에 시작해 11:30에 마쳤다. 예배 순서는 찬송→기도→성경봉독→전도설교→기도→봉헌→찬송 등의 순서로 매우 간단했다. 이 순서는 마포 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순서와도 흡사한데, 마포 삼열 선교사의 제안은 찬송→기도→성서봉독→회중의 기도→찬송→성서교훈→기도→봉헌→찬송의 순서로, 찬송으로 시작하여 찬송으로 끝났다.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8일(주일) 첫 예배를 드렸는데 매서 김병우를 포함하여 8명이 첫 예배에 참석했다. 첫 예배를 인도한 사람은 안동의 기독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던 매서인 김병우였다. 안동교회의 주일 오전예배, 주일 오후예배, 외국인영어예배, 또한 새벽기도회의 시간과 장소는 오월번 선교사의 부인 새디(Sadie Welbon) 선교사와 안동주재 선교사들의 선교보고와 편지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지만, 예배 순서와 내용을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1900년대처럼 거의 전무하다. 다만 당시 장로교 선교사가 활동했던 지역의 예배 형식과 내용은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마포 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 순서가 초기 안동교회의 예배 순서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 이 시기에는 1911년 가을, 안동교회 초대 담임으로 부임한 김영옥 목사가 안동교회 예배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김영옥은 평양신학교 교수로 사역한 곽안련 선교사에게 사사 받았기 때문에 예배 신학 및 예배내용과 순서 등에 있어서 곽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2) 주일 오전예배 및 오후예배 안동교회의 첫 예배의 형태와 시간에 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새디 선교사의 다이어리와 다른 선교사의 선교편지, 선교보고에 따르면 주일 오전예배, 오후예배, 외국인예배가 존재했다. 특히 주일 오전예배는 10시 30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사료된다. 또 주일 외국인예배, 즉 선교사와 가족들을 위한 영어예배 시작 시간이 오후 4시 혹은 4시 30분으로 추론되는 바, 주일 오후예배는 오전예배를 마치고 점심 식사 후인 1시부터 4시 30분 사이일 것으로 추측된다. 주일 오전예배의 정확한 순서도 찾을수는 없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른 예배원칙과 미국 북장로교 출신 선교사가 인도한 예배순서에 따랐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주일 오전예배 시간은 안동교회가 창립된 지 1년이 지나 ‘ㄱ’자 예배당을 신축하고, 1910년 11월 13일(주일)부터 20일(주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를 초청하여 가진 특별부흥집회 시간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평일 집회는 오전 10시에 속개되었고, 집회 마지막 날인 20일은 주일로 오전 10시 30분에 시작됐으며 만원을 이루어 예배당이 꽉 찼다”는 기록이 있다. 주일 오후예배 시간의 경우, 당회록은 보다 구체적인 예배시간을 추측하게 한다. 1916년 11월 8일 당회록에 따르면 주일 오후 2시 30분에 세례 7인, 학습 5인에 대한 성례식이 있었다. 그 이후의 당회록에도 성례식은 계속해서 주일 오후 2시 30분에 있었다. 세례식과 성찬식만 별도로 가졌기 보다는 오후예배 시 함께 가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1910년대 주일 오후예배시간은 2시 30분으로 적시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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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안동교회(1909년~1952년) 예배에 관한 연구(1)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 목사(6대) 시대의 예배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결론 서론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예배공동체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最高)의 행위이며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행위이다. 사실 예배 없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토저(Aiden W. Tozer)는 인간과 교회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임을 강조한 바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 모여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며 전심(全心)을 바치는 것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예배공동체인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인격적으로 교제한다. 또한 예배 없이는 어떤 믿음도 기대할 수 없으며, 예배가 흔들리면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標識)와 같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귀히 여기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예배드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어떤 경우에도 주일에예배당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해야 했다. 한국교회 성도에게 성수주일은 지고지선(至高至善)의 덕목이었다. 교인이 특별한 이유 없이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치리(治理)를 받을 정도였다. 주일오전예배 뿐 아니라 주일저녁 혹은 오후예배, 삼일기도회, 새벽기도회, 철야 혹은 심야기도회 등 모든 것은 예배로 시작했다. 예배가 교회 모든 사역의 출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 원고는 지난 190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 약 50년 동안 1909년 8월 둘째 주일 설립된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 예배의 형식, 내용과 순서를 증언한다. 예배형식과 순서는 담임목사의 예배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때문에 담임목사의 시무 기간을 기준으로 구성했다. 1) 안동교회가 창립예배를 드린 1909년 8월 8일부터 초대 담임목사가 사임한 1920년 말까지, 2) 2대 이대영 목사와 3대 정재순 목사가 시무한 1921년부터 1925년 5월까지, 3) 4대 박상동 목사와 5대 임학수 목사와 6대 김영옥 목사가 시무한 1925년 7월부터 1942년 12월까지, 4) 7대 김광현 목사가 시무한 1943년 1월부터 주보가 보관되지 않은 1952년까지의 예배를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 안동교회 예배에 관한 기록이나 자료의 부족으로 선교사의 선교편지와 보고서, 예배학자들의 논문과 다른 교회의 예배에 관한 자료들을 분석하여 안동교회 예배를 재구성했다.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 1909년~1920년 말(1) 1908년 장로교선교사 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신설이 결정됨으로써 오월번(吳越璠, Arthur G. Welbon) 선교사는 동역하던 김영옥 조사(助事)와 함께 안동으로 이사했다. 그 후 김영옥은 조사로서 안동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을 다했으며, 안동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김영옥은 1911년 9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赴任)했다. 김영옥 목사와 안동선교부의 선교사들은 안동교회 예배를 포함한 여러 사역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제 안동교회가 창립된 이후 김영옥 목사가 사임한 1920년 말까지 주일예배, 오후예배에 관해 살펴보자. 1) 예배형식과 순서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예배 형태는 구도자(求道者)를 위한 예배였다. 특히 한국인의 첫 예배공동체는 만주에서 시작되었는데,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충실히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 맥킨타이어(John McIntye)와 로스(John Ross) 선교사는 중국과 한국 국경을 넘나들며 문물교류를 하던 청년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만주에서 한국인 첫 예배가 시작되었다. 소위 만주 예배공동체의 예배는 평일 오후에 전도 설교, 저녁에 성경교육, 주일에는 찬송과 기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낮 시간에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복음 전도로 회심자를 얻고, 회심자들을 사경회 형식의 저녁 예배를 통해 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들었고, 마지막으로 등록자들을 부흥회 형식(찬송과 기도 중심)의 주일예배를 통해서 확실한 영적 구원을 체험하도록 도왔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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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자신의 밭을 탓하지 않습니다.천 석 길 목사 구미남교회 우리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한평생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6남매를 키우면서도 제대로 물려받은 유산이 없으셨기에 매우 성실하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성실해도 농사를 짓는 농부가 자기 땅이 부족했기에 늘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힘겹다고 농사짓지 않는 땅이나 때로는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짓는 소위 소작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에 집에서 좀 멀리 떨어진 논, 다섯 마지기를 샀습니다. 다섯 마지기를 평수로 계산하면 1,000평이지만 등기부보다는 훨씬 더 넓은 땅이었고, 실제로 자투리 땅이 무려 38개나 되어서 골짜기 전체가 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봄이면 그 많은 논둑을 만드는 일과 거름을 넣는 일과 여름이면 풀을 베내는 일이 정말 많았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우리 아버지는 매일 새벽기도회 후에 그 논으로 가서 일을 하셨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그 논에서 수확되는 벼는 다른 집의 10마지기보다 더 많은 양이 수확되는 것을 보면서 이웃 사람들이 부러워하곤 했습니다. 남들이 농사짓기 싫어서 싼값에 팔았고, 실제로 소출이 크게 없었던 땅이었지만, 땅의 주인이 누구이냐에 따라서 완전히 바뀌었다고 이웃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주인이 누구이냐에 따라서 땅의 가치는 얼마든지 바뀌었습니다. 어찌 농사뿐이겠습니까? 학교, 직장, 사업 등등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라는 것은 누가 그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내 몫에 태인 책임을 따라서 최선을 다할 때 모든 일은 얼마든지 달라집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새학기를 시작하면서 우리 교회는 신앙의 필수 요소인 ‘삶공부’를 합니다. 혼자 공부할 수 없어서 쭈뼛거리는 연약한 분의 손을 잡고 들어 오시는 귀한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공부하라는 말만 하고 늘 제자리에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랑하고 헌신한 만큼의 열매가 있지만, 가만히 있으면 늘 그대로 이거나 오히려 뒷걸음치는 것이 신앙입니다. 수많은 핑곗거리를 탓할 것이 아니라 열심으로 한마음이 되어 보십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장은 영적 추수를 하는 밭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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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전의 시대조병우 목사 김천제일교회 현대 사회를 살면서 과거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일상화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충전’하는 것입니다. 충전한다는 것은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신경을 쓰게 되는 일이 되었습니다. 아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충전에 매달리는 모습은 가장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현대인의 필수품이 된 휴대폰을 사용하자니 항상 충전하는 일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또, 사용하는 노트북이 있다면 그것도 충전을 해야 하고, 손목에 차는 시계도 충전을 해야 합니다. 카메라도, 청소기도 충전을 해야 하고, 심지어 자동차도 충전해야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많습니다. 때문에 가정의 전기 코드는 어느 가정이나 충전을 위한 코드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지는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충전을 확인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는 다른 것을 잊어도 충전하는 것을 확인해야 잠이 드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를 가든지 충전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이 되었습니다. 기차를 타도 충전하는 시스템이 준비되어 있고,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도 어김없이 충전을 위한 장소를 확인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도 충전시설이 있고, 한 나라의 관문이라는 공항도 충전시설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앉아 있으며, 심지어 하늘을 나는 비행기 안에도 충전을 위한 시설이 준비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충전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구도 속에서 살고 있는 듯 합니다. 충전이 되지 않고 방전이 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사실 현대 사회는 매일 충전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들이 사라진 세대가 되었습니다. 충전하지 않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전화를 하다가도 밧데리가 다 방전되면 대화가 끊어지고 모든 것이 스톱이 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충전해야 하는 것은 ‘영적 밧데리’입니다. 방전을 막아야 합니다. 영적 방전이 되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영적 충전은 두 가지입니다. 말씀과 기도입니다. 영적인 충전 없이는 아무리 귀한 직분과 조건을 가져도 방전된 기계와 같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특별새벽기도 등 형편에 맞는 다양한 방법으로 ‘급속충전’을 하여, 주어진 사명을 지치지 않고 멋지게 감당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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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장로총연합 엘더아가페봉사회, 제26회 수련회 개최경북장로총연합 엘더아가페봉사회(운영위원장 임은하 장로, 회장 이동철 장로)가 주최한 ‘제26회 수련회’ 및 ‘제3회 한국근대문화와 기독교 워크숍’, ‘전광훈 목사 초청 복음통일을 위한 기도회’가 12월 12일부터 2박 3일 일정으로 더케이호텔경주에서 열렸다. 수련회에 참석한 대구·경북지역의 장로 부부 2,000여명은 국가와 경북지역 발전, 대통령과 위정자, 복음통일 등을 위해 한목소리로 기도했다. 또한, ‘경북 100만 성도 운동’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번 수련회는 개회예배, 특강, 건강강좌, 오후 집회, 저녁집회, 새벽기도회, 복음통일을 위한 특강 및 기도회 등으로 꾸며졌다. 수련회 강사로는 전광훈 목사(전 한기총 대표회장), 전태식 목사(순복음서울진주초대교회), 장학일 목사(예수마을교회), 서대천목사(홀리씨즈교회), 이경은 목사(진주초대교회), 이용봉 목사(손길문화원장), 최상택 목사(대구세계문화엑스포 사무총장), 전재규 장로(대신대 명예총장), 이춘근 박사(이화여대 겸임교수), 김학성 교수(전 한국헌법학회장), 이희천 교수(전 국가정보대학원 교수), 김국성 대좌(북한정찰총국 대좌출신) 등이 초청됐다. 임은하 운영위원장은 “이번 수련회를 계기로 대구·경북 지역 장로들이 영적 재무장되어 교회와 국가를 바로 세우는 일에 선구적 역할을 감당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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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 ‘힌남노’ 직격탄 맞은 경주 보문암곡교회▲‘힌남노’로 인해 보문암곡교회 사택은 전파되었다. 사진은 홍수가 난지 10여일 후에 교회 사택(조립식 건물)이 철거되고 있는 모습. 지난 9월 태풍 ‘힌남노’로 인해 경주지역에서는 암곡마을 피해가 컸다. 다음은 직접 홍수 피해를 겪은 보문암곡교회 이태호 목사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Q. 홍수가 난 당시 상황은 어땠는지요? “9월 6일 새벽 4시경에 저희 부부는 일어나서 각자 새벽기도를 하고 거실에 있었다. 그런데 6시쯤 창문을 보니까 창문에 시퍼런 황토 강물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강물이 넘쳐 우리 집을 덮친 것이었다. 그 당시는 강둑이 무너진 걸 몰랐었다. 어쨌든 홍수가 난 것을 알고서 피난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큰방 쪽에서 ‘쿵’ 소리가 나더니 큰방벽을 무너뜨리고 물줄기가 거실로 넘쳐 들어와 저와 집사람의 가슴팍까지 금새 물이 차올랐다. 그때는 ‘이렇게 천국 가는가!’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Q .어떻게 위기 순간에서 탈출했는지요? “순간 거실 유리창이 눈에 띄었고, 손에 잡히는 나무 서랍으로 유리창을 깼다. 그러자 큰방을 통해 거실로 들어오던 물이 유리창으로 빠져나가면서 물이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물속에서 한참을 기다리니까 물이 조금씩 빠지면서 거실에 넘어져 있던 안마기와 에어컨이 드러났고, 저와 집사람은 그 위에 올라가 젖은 몸을 떨면서 한참을 더 기다린 뒤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온 마을은 이미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그때야 강둑이 터져서 이런 사태가 난 것을 알게 됐다.” Q. 암곡마을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요? “마을 사람들에게 상황을 물어보니 다행히 우리 마을에는 인명 피해는 없었다. 강물이 집에 들이닥치자 어떤 이는 창문으로 빠져나오고, 어떤 이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대피했다고 했다. 다만 제 집사람을 비롯해 몇 분은 병원 치료를 받았다. 우리 마을에는 7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이번 홍수로 42가정이 침수로 재산 피해를 입었다. 그중에 8가정은 저희 교인 가정이다.” Q. 교회가 침수되고 사택이 전파됐다고 들었다. 현재 복구 상황은 어떤지요.? “사실 마을에서 저희 교회와 사택의 피해가 가장 심각한 편에 속한다. 교회 예배당과 교육관이 침수되어 바닥에 뻘이 가득 찼었다. 현재 뻘은 대략 걷어낸 상태이지만 그 외에 다른 것(도배, 리모델링, 보수 등)은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다. 리모델링 비용이 2억이 넘는다고 하니 농촌교회 현실로는 감당이 안되어 기도만 하고 있다. 사택은 완전히 파손되어서 현재 철거한 상태이다. 그래서 저희 부부는 요즘 교육관에서 임시로 지내고 있다.” Q .힘든 일을 겪으셨음에 위로를 보낸다. 현재 심정은 어떠신지요? “이번 홍수를 겪으면서 마을 모든 사람들의 충격이 컸다. 강둑이 무너지리라고는 상상을 못했기 때문이다. 저는 교인들에게 “믿음 잃지 말고 시련을 견디자, 생명을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다독인다. 감사하게도 홍수 피해 소식을 듣고 제가 속한 교단(예장고신)에서 특별위로금을 보내주셨고, 그 외에도 몇 군데에서 성금을 보내주셔서 큰 위로가 되고 있다. 보내주신 물질은 교회와 사택 복구뿐 아니라 교인들 가정, 또 마을을 위해서도 사용할 계획이다.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린다.“ ※후원문의 : 보문암곡교회(054-748-5979) ※후원계좌 : 대구은행 204-10-004765(보문암곡교회) ▲사택 거실 유리창이 파손된 모습. 이태호 목사 부부는 물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거실 유리창을 깨고 뻐져 나올 수 있었다. ▲홍수로 인해 교회 예배당과 교육관이 침수 피해를 입었다. 물이 빠져나간 뒤 교회 예배당 바닥에 뻘이 남아있는 모습. ▲복구지원을 나온 군인들이 교육관 바닥의 뻘을 걷어내고 있는 장면. /인터뷰 진행·정리 = 박은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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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총회 임원들, 포항 태풍피해 교회 방문 ··· “사랑의 손길과 기도 절실”▲ 총회 임원들이 도구제일교회를 둘러보고 있다. 지난 태풍 ‘힌남노’로 경북 포항지역 일대가 큰 피해를 입은 가운데, 포항지역 교회들의 피해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예장 통합총회 임원들은 12일 포항을 방문, 태풍으로 피해 입은 지역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당시 포항 방문에는 제106회기 총회 임원진(부총회장 이순창 목사, 사무총장 김보현 목사, 사회봉사부장 도영수 목사 등)이 함께 했다. 임원들은 11일 저녁 포항대송교회(담임목사 김대훈)에 도착해 피해 상황을 들었으며, 이튿날 12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뒤 오전부터 포항 남구지역 피해교회 현장을 둘러봤다. 이날 현장 방문에는 총회 임원과 함께 포항남노회장 박성근 목사(포항오천교회)와 부노회장 장의환 목사(늘푸른교회), 서기 김성칠 목사(포항전원교회) 등 포항남노회 임원들도 동행했다. 이들은 12일 송동교회(담임목사 박희영)를 비롯해 포항엘림교회(담임목사 유원식), 금광교회(담임목사 김관호), 도구제일교회(담임목사 이종선)와 오천읍 행정복지센터(읍장 한보근)를 방문했다. 피해를 입은 교회들은 당시 갑작스런 폭우로 인해 예배당과 교육관, 지하 등이 침수됐으며, 건물 누수와 정전 등으로 인해 복구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날 통합총회는 포항남노회에 태풍피해 구호금 1천만 원을 전달했으며, 지역노회와 함께 추가적인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복구지원을 위해 신속한 대책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 금광교회의 피해 현장을 방문한 총회 임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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