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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부활절 메시지 - 김철한 목사김 철 민 목사 한국성시화운동협의회 대표회장 대전제일교회 담임 할렐루야! 한국성시화운동협의회 온 교회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그리고 교우들과 더불어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찬양하며 경배를 드립니다. 아울러 경북하나신문 독자 여러분들께도 부활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부활은 단지 암울한 상황을 이기는 약간의 희망적인 메시지나 혹은 마술적 신비를 강조하는 위력과시용 이벤트가 아닙니다. 또한, 부활은 어떤 특정 종교의 교주가 죽었음에도 살아난 것처럼 각본을 만들고, 미화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최면을 걸어 그렇게 믿도록 강요하는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부활은 도무지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이란 무엇이며, 그 생의 의미가 무엇이고, 부활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탐구하며 실제화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인 동시에 나의 부활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15:31)라고 죽음을 공언하고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부활의 희망과 능력을 확신하고 그것을 체험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부활, 나의 부활!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처럼, 나도 죽음으로 다시 사는 삶이 되시길, 매일 매일이 부활의 아침이 되는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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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권 목사의 시 - 영광의 자유(롬 8:21)진 상 권 목사 라마나욧 영성원 묵은해를 접고 새해를 맞이하는 날 ······ 주님이 은혜로 주시는 2024! 하루하루를 두 손으로 받아 누리리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롬 8:1)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주시는 선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대는 해방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소신이 아닌 해방을, 더 이상 눈치보지 않는 이제 더 미련도 없는 영광의 자유를.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그 영광의 자유를 아는가? 그 자유 안에서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요 8:32) 아들이 주시는 자유(요 8:36) 참으로 자유로우신 자유를 누리라! 주님, 이제 주님 안에서 이 자유를 누리리이다! 그 자유 안에서 주의 영이 계신 곳의 자유(고후 3:17) 내가 이제 먹고 마시리라! 앞서간 믿음의 선배 바울처럼, 말씀에 붙잡힌 자유를 성령에 매여사는 자유를. 독수리가 그 날개를 저으며 올라감이여! 갈급한 마음에 봇물터지는 생수여! 자유! 자유함, 자유로움이여!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된 자유(롬 8:21)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의 자유여! 주님 앞에서 주님 안에서 주님을 따르는 걸음. 주님, 동행하기 원합니다. 주님, 거룩하게 하옵소서! 더 순종하게 하옵소서! 아멘, 아멘. (주후 2024.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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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생각에서이 정 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12월! 달력의 마지막 장을 바라보면서 지난 열 한 달을 생각해 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기쁨과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어려움과 아픔을 주셔서 교만함이 아닌 겸손함을 얻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때문에 화가 나고 힘들었는데, 알고 보니 더 큰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고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감사는 생각에서 나온다는 단순한 진리를 알게 됩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깊은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Thank)란 단어는 생각(Think)에서 나온 말입니다. 감사가 있기 전에 깊은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깊게 생각하는 데 그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감사가 귀한 것은 우리가 감사하는 순간 우리의 초점이 나에게서 하나님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고,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얻지 못한 것 보다 얻은 것에 감사하고, 잃은 것보다 아직도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때 닫혀 있던 생각이 열려 더 큰 감사를 낳게 합니다. 마음이 열리고, 영안이 열립니다. 작은 것까지도, 아픔까지도 감사할 때 우리 마음에는 진정한 감동이 일어나 삶의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12월 25일은 온 세상이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오늘 세계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99%는 해결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친히 인간의 몸으로 이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은 친히 인간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죄를 도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오신 성탄절은 온 백성들이 기뻐해야 할 날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의 길을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인류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아닌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스스로 인간의 욕심과 욕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모두가 어려워지는 대립과 갈등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모두가 감사이기에 주님처럼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주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의 생각도 단순해집니다. 하나님이 없기에 모두가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영성의 최고봉은 감사입니다. 감사는 은혜 충만, 성령 충만의 표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합니다. 다가오는 성탄절을 뜻깊게 맞이할 수 있는 길은 감사입니다. 깊은 감사로 서로에게 축복하는 성탄의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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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축복입니다.이 정 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동산의 모든 실과는 먹되 그 중 선악과를 먹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결코 어려운 요구가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거역하였고 그 결과 인류에게 죽음이 왔습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명령과 규례가 있습니다. 이 규례의 핵심은 3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라. 둘째, 하나님을 섬기라.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요구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명령과 규례를 주신 것입니다. 그 명령과 규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 또한 성도의 행복을 위해서 3가지를 권면했습니다. “첫째, 항상 기뻐하라. 둘째, 쉬지 말고 기도하라. 셋째,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 권면은 기뻐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신앙의 시금석입니다. 감사는 축복의 씨앗이며, 행복의 열매입니다. 감사 또한 성도의 행복을 위한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차이는 신앙의 핵심인 감사에 달려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성공보다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돈, 명예, 권력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이 말씀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아픔, 고통, 상처, 배신까지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상황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열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관점과 해석입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긍정의 결과물인 감사가 되기도 하고, 부정적 결과물인 불평이 되기도 합니다. 요셉은 자기를 판 형들 때문에 13년의 시간을 애굽에서 아픔과 고통 가운데 보낸 후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됨으로 애굽에서 총리가 됩니다. 그러던 중 흉년과 기근으로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왔습니다. 이 때 형들은 총리가 된 동생으로 말미암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요셉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요셉은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창 45:5)라고 고백합니다. 요셉은 과거의 아픈 사건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새롭게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둘째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와 첫째 아들의 태도는 정반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똑같은 상황인데 보는 관점과 해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가 감사와 불평을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감사를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수록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까지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사는 인생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진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이미 축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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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질그릇 속에 담긴 은혜(저자-이희준)다섯 번 죽음의 고비를 넘긴 이희준 목사, 그 믿음의 간증록 책소개 ❙ 사도 바울에게는 자신을 괴롭히는 질병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했다. 이희준 목사에게도 가시가 있었다. 간경화, 그는 살면서 다섯 번 피를 토했다. 그는 이런 시련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했었다. 하지만 다섯번 죽음의 고비 끝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 그의 가시는 고난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되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 도서출판 닻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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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틀을 바꾸라이 정 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심리학은 우리 마음이 얼마나 많은 착각과 오류, 오만과 편견, 실수와 오해로 가득차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이런 허점들이 ‘프레임’이라는 마음의 창에 의해 생겨남을 증명해 줍니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건물 어느 곳에 창을 내도 그 창만큼의 세상을 보게 되듯이, 우리도 프레임이라는 마음의 창을 통해서 보게 되는 세상만을 볼 뿐이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프레임을 통해서 채색되고 왜곡된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뜻입니다. 프레임은 하나의 틀로서, 한마디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모든 사건들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 나의 생각인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고정관념, 가치관, 인생관, 신앙관 등 모두가 나의 프레임 속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과 말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프레임을 통해 그 사람의 내면의 정보들을 드러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신앙의 색깔을 갖고 있는가는 믿음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신앙의 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보는 관점도, 선택되는 단어도, 접근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인간의 프레임은 그 동기와 목적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의 편견과 야욕에서 비롯된 이기주의적 발상이며, 현실 도피적이며, 심지어 샤머니즘의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이렇듯 자기중심의 프레임이 깨어져야 더 크고 더 넓은 믿음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출애굽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프레임을 갖고 당당하게 가나안 땅으로 전진했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육지처럼 건너간 백성들입니다. 이런 크고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프레임을 갖도록 전무후무한 기적을 체험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프레임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져야 할 때, 세상의 눈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과거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했던 종의 프레임을 갖고 미래의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항상 부정적이었으며, 희망과 미래를 잊고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했습니다. 잘못되고 왜곡된 프레임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프레임을 바꾸면 인생이 바뀌어집니다. 신앙의 프레임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면 모든 것이 감사요,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붙잡혀 관리들에게 끌려가 성을 요란케 하며 로마인이 받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은 풍속을 전한다고 고발되어 옷이 벗겨지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두운 감옥에서 아픔 가운데 찬송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신앙의 프레임이 우리의 틀과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마 우리였다면 “하나님, 전도했는데 이게 무슨 대접입니까?”라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생각과 언어와 행동이 달랐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많은 인물들은 우리가 닮을 수 없는 프레임을 갖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야 등이 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끝으로, 최 박사가 상위개념의 프레임을 갖기 위해 제안한 것 중에 5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①의미중심의 프레임을 가져라. ②비교 프레임을 버려라. ③긍정의 언어를 사용하라. ④닮고 싶은 사람을 찾아라. ⑤장소가 아닌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한가를 알라. 우리는 어떠한 상황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건강한 신앙의 프레임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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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경의 유래, 종류, 내용과 외경을 사용하는 종파는?Q 질문 : 성경 외의 경전을 ‘외경’이라고 하고, 실존한다고 들었는데, ‘외경’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사용하는 종파나 종교는요? A 답변 : ‘외경’은 기독교회가 받아들이는 성경(이것을 ‘정경’이라 함) 외에 한 때 교회 안에서 읽히고 일정한 권위를 누렸으나 정경이 아닌 것으로 배척된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외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말 번역의 문제이며 원래는 ‘아포크리파’(Apocrypha)라 부르는데, 그 뜻은 ‘감춰진 것들’이란 의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회 초기에 이단들이 비밀리에 사용하던 경전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 복음, 나사렛 복음, 에비온 복음, 도마 복음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바울 행전, 베드로 행전, 베드로 묵시록 등 많이 있습니다. 이런 신약외경들은 처음에 영지주의 이단들이 많이 사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신약외경들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카톨릭교회도 배척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구약외경’입니다. 카톨릭교회에서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 구약외경을 더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이것을 ‘둘째 정경’이라고 부르면서 ‘첫째 정경’과 똑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구약외경에는 유딧, 토빗, 마카비서, 솔로몬의 지혜, 시락의 지혜, 수잔나, 벨과 용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원래 유대의 문학 작품이었는데, 유대인들의 히브리어 성경에는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전 2~3세기경에 이 히브리어 성경(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번역자들이 구약과 함께 이런 유대 문학 작품들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칠십인역 성경(헬라어 구약)에 이 ‘외경’들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주후 4세기에 제롬이 라틴어로 번역할 때 이 외경들도 함께 번역했습니다. 카톨릭교회는 이 구약외경도 정경과 마찬가지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외경을 배척하고 히브리어 구약성경만을 구약정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신약정경에 대해서는 개신교나 카톨릭교회나 동일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답변자 :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크리스천 큐앤에이’(도서출판 등과 빛) 中 요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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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구약 시대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Q 질문 : 구약 시대의 율법 중 할례, 여러 제사, 율법들, 먹으면 안 되는 음식들의 구분 등 여러 가지 금기들과 법 등을 우리가 이제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요? A 답변 : 구약의 율법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의식법과 시민법과 도덕법입니다. 이 중 의식법은 제사와 절기, 음식법 등과 같은 것인데 이런 것은 몸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더는 지키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다 이루셨습니다. 시민법은 이스라엘의 국가와 관련된 법인데, 살인자를 처형하는 형법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주후 70년에 이스라엘 국가가 멸망함으로 자연히 소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교회를 세우셨으며, 교회는 정치적 권력이나 외적 강제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다스립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최고의 법은 출교이며, 그 이상의 벌에 대해서는 국가의 기능에 또는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그러나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정죄하는 기능으로서의 율법의 기능이 폐하여졌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도덕법을 오히려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 중 “살인하지 말라”는 단지 외적 살인만이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는 것으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의 도덕법을 지킬 때에도 그냥 구약의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13:10). 답변자 :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크리스천 큐앤에이’(도서출판 등과 빛) 中 요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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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부활절 축하 메시지 - 이정우 목사이 정 우 목사 경북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 안동서부교회 긴 겨울을 동토의 땅으로 있다가 새봄이 찾아오면 들판은 생명으로 가득찬 푸른 초원으로 바뀝니다. 모든 것이 다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생명을 간직한 동·식물들은 다시 살아나 꽃을 피우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생명이 있는 씨앗은 두툼하게 굳어있는 땅 껍질을 뚫고 나옵니다. 이처럼 생명은 무서운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그의 아들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예수의 생명을 간직한 사람들은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이 주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졌다”(골3:3)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할렐루야!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부활절 아침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자는 주님이 첫 열매가 되어 무덤에서 일어나셨듯이 우리 또한 부활의 영광의 몸으로 주 안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최고의 영광은 부활입니다. 기독교만이 부활절 축제가 있습니다. 이 부활의 능력이 코로나로 인해 침체된 한국교회의 예배를 다시 살아나게 할 것입니다. 인류를 억누르는 무서운 질병이 있다면, 그것은 절망과 죽음입니다. 한국교회와 사회는 절망과 죽음의 질병에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절망과 죽음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부활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이 바로 부활입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우리 선포합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부활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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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천제일교회, 임직식 및 은퇴식 개최올해 창립 108주년을 맞은 건천제일교회(담임목사 강윤규)가 3월 19일 오후 2시 30분 교회 본당에서 임직식과 은퇴식을 개최했다. 강윤규 담임목사의 인도로 드려진 1부 예배는 경주시찰장 최춘혁 목사(유림교회)의 기도와, 노회장 이동국 목사가 ‘어떤 일꾼이 되겠습니까?’(딤후4:9~16)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동국 목사는 설교에서 “바울의 동역자 누가, 두기고, 디모데와 같이 복음의 일꾼”으로 헌신할 것을 권면했다. 2부 은퇴식에서는 천성규 장로, 김신숙 김귀옥 권사가 은퇴했으며, 3부 임직식에서는 김명덕 장로, 조세호 구명회 안수집사, 최윤정 이보라 김옥자 권사가 임직을 받았다. 이어진 취임식에서는 이종철 안수집사가 취임했다. 강윤규 담임목사는 새롭게 임직하는 일꾼들에게 "교회의 부흥과 경주의 복음화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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