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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논리적이지만 더(the) 사랑하는 교회!천 석 길 목사 구미남교회 오래전, 전도사로 교회사역을 시작할 때의 일입니다. 초등학교 4~6학년의 적지 않은 150여 명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처음이기에 나름대로 잘하고 싶어서 이런 저런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중에 공과공부를 할 때 일반적으로는 4학년 1반, 4학년 2반으로 이어지는 획일적인 반 이름을 창의적으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에게 최대한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여덟 글자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이름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필요하다면 그 이름에 대한 설명도 하고, 서로 토론도 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반에 대한 애착이 생기겠다 싶었습니다. 한 달간 시간을 주었는데 꽤 독창적이고 재미있는 이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 반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남녀의 비율이 비슷한 반에서 남자 애들은 다윗반, 여자애들은 장미반이라는 이름으로 하겠다는 주장이 팽팽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지으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상대를 설득시켜 보라고 했습니다.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한 후에 재미있게 이름을 지어올 줄 알았는데, 정작 그 반의 선생님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사소한 이 일로 인해서 남학생과 여학생으로 편이 나뉘었고 끝내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면서 만날 때마다 싸움으로 번지면서 마침내는 인신공격까지 하는 사태가 되어서 감당하기 힘이 든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자신들의 논리는 나름대로 있겠지만 그 일로 인해서 싸울 정도는 아니다 싶어서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제안을 했습니다. “너희들의 주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반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하나가 되어야 전도가 가능하니까 장미와 다윗을 합치는 것은 어떻겠어?”라고 물었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라고 하길래, “얼마든지 가능하단다. <장미꽃을 든 다윗반> 그러면 딱 여덟 자로 맞아 떨어지고 서로의 마음을 담은 최고의 이름이잖아!”라고 했더니 모두가 좋다고 박수를 쳤습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주장과 논리는 편을 가르게 하지만, 더(the)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나가 됩니다. 논리보다는 더(the) 사랑, 즉 ‘주님의 그(the) 사랑’이 필요합니다. 특별한 그(the) 사랑이 우리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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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기독교총연합회 제29회 정기총회김천시기독교총연합회(회장:황광욱 목사, 이하 김기총)는 12월 7일 평화동교회(김명섭 목사 시무) 예배당에서 제29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지난 1년간의 사역을 되돌아보며 김천시의 복음화를 위해 더 정진할 것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총회에서는 신임회장에 김명섭 목사(평화동교회), 수석부회장에 이동기 목사(김천북부교회)가 선출돼 새로운 회기를 이끌게 됐다. 개회예배는 수석부회장 김명섭 목사의 인도로, 서정식 장로(장로연합회 직전회장)의 기도, 한국기독교장로회 김천시찰목회자들의 특송, 김기총 회장 황광욱 목사의 ‘교회가 소망입니다’ 제목의 설교, 직전회장 최인선 목사의 축도로 드렸다. 황광욱 목사는 설교에서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원수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처럼, 김천시의 교회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며 세상의 소망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2부 회의는 회순에 따라 개회선언, 지난 회기 사업보고, 산하기관 보고, 회칙심의, 임원선거, 신·구임원 교체, (전 회장에게) 감사패 증정, 신안건토의 등의 순서로 진행했다. 신임회장에 취임한 김명섭 목사는 “전임 회장님들의 열정과 헌신을 본받아서 최선을 다해 연합회를 섬기겠다”며 “서로 소통하고 화합함으로써 김천시 기독교의 부흥을 위해 함께 나아가자. 회원들의 기도와 협력을 부탁드린다”고 인사했다. 한편, 김기총은 매년 신년조찬기도회, 부활절연합예배, 8·15기념광복절연합예배, 성탄트리점등예배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기총에는 교역자연합회, 장로연합회, 김천시복음화운동본부, 아가페포럼, 여성연합회, 시청기독신우회가 속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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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과 사주를 봐도 되는가요?Q 질문 : 관상이나 사주는 통계에 근거한 학문이므로 크리스천이 봐도 된다는데, 성경적으로 맞는지 궁금합니다. A 답변 : 오늘날에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가거나 사주, 관상을 보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은 ‘성삼위 하나님만이 자신의 삶에 살든지 죽든지 유일한 위로자가 되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하게 보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지닌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크리스천은 자신의 미래를 비록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고 기도드리며 삽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앞날을 모르고 불안이 찾아올 때(예: 다니엘, 에스더, 다윗 등), 사람을 뽑거나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예: 행1장),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등등 개인과 단체의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이뤄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만나거나 사업을 하거나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삶에 간섭하셔서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켜가면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할 것입니다. 사주나 관상을 봐주는 이들이 그들을 찾는 사람들에게 통계에 기초하여 예견(?)해 주었다면 과연 그것이 현실로 다 실현되었을까요? 그들 자신에게 타인의 사주나 관상을 봐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잘 조절하여 행복하기만 할까요? 아마도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창조해 주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대하며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점쟁이나 사주, 관상을 보는 사람들에게 찾아가기 시작하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 살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는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필요와 만남과 미래의 진로 등을 위하여 진정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이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 안에 모든 복이 있습니다. 답변자 : 최병규 박사(크리스천 Q&A 대표, 신학박사) <‘크리스천 큐앤에이’(도서출판 등과 빛) 中 요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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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틀을 바꾸라이 정 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심리학은 우리 마음이 얼마나 많은 착각과 오류, 오만과 편견, 실수와 오해로 가득차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이런 허점들이 ‘프레임’이라는 마음의 창에 의해 생겨남을 증명해 줍니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건물 어느 곳에 창을 내도 그 창만큼의 세상을 보게 되듯이, 우리도 프레임이라는 마음의 창을 통해서 보게 되는 세상만을 볼 뿐이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프레임을 통해서 채색되고 왜곡된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뜻입니다. 프레임은 하나의 틀로서, 한마디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모든 사건들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 나의 생각인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고정관념, 가치관, 인생관, 신앙관 등 모두가 나의 프레임 속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과 말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프레임을 통해 그 사람의 내면의 정보들을 드러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신앙의 색깔을 갖고 있는가는 믿음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신앙의 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보는 관점도, 선택되는 단어도, 접근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인간의 프레임은 그 동기와 목적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의 편견과 야욕에서 비롯된 이기주의적 발상이며, 현실 도피적이며, 심지어 샤머니즘의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이렇듯 자기중심의 프레임이 깨어져야 더 크고 더 넓은 믿음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출애굽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프레임을 갖고 당당하게 가나안 땅으로 전진했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육지처럼 건너간 백성들입니다. 이런 크고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프레임을 갖도록 전무후무한 기적을 체험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프레임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져야 할 때, 세상의 눈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과거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했던 종의 프레임을 갖고 미래의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항상 부정적이었으며, 희망과 미래를 잊고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했습니다. 잘못되고 왜곡된 프레임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프레임을 바꾸면 인생이 바뀌어집니다. 신앙의 프레임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면 모든 것이 감사요,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붙잡혀 관리들에게 끌려가 성을 요란케 하며 로마인이 받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은 풍속을 전한다고 고발되어 옷이 벗겨지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두운 감옥에서 아픔 가운데 찬송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신앙의 프레임이 우리의 틀과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마 우리였다면 “하나님, 전도했는데 이게 무슨 대접입니까?”라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생각과 언어와 행동이 달랐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많은 인물들은 우리가 닮을 수 없는 프레임을 갖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야 등이 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끝으로, 최 박사가 상위개념의 프레임을 갖기 위해 제안한 것 중에 5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①의미중심의 프레임을 가져라. ②비교 프레임을 버려라. ③긍정의 언어를 사용하라. ④닮고 싶은 사람을 찾아라. ⑤장소가 아닌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한가를 알라. 우리는 어떠한 상황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건강한 신앙의 프레임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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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점검하라이 정 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상황이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 감사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은 요셉이 13년 동안 참고 인내했기 때문이 아니라 13년 동안 한결같이 주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욥 또한 갑절의 축복을 받은 것은 수많은 고난을 당한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성숙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돌아본다면,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우리가 참았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많은 고난을 견뎠다면, 그것도 역시 그분의 은혜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은혜의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래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이 정도로 기도했으면 하나님도 이 정도 복은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이 정도로 참았으면 이제는 도와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이 정도로 헌금(헌신)했으면 축복의 징조라도 보여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복음적인 관점에서 보면 믿음이 아니라 흥정이며, 기도가 아니라 거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급함을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절박함, 우리의 애절함, 우리의 필요함도 다 아십니다. 더구나 우리의 기도 소리와 신음소리, 믿음의 수고도 아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혹독하게 훈련시키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은 응답이나 해결, 형통이 아니라, 나의 내적 변화와 거룩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함으로써 사회 속에 영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살아날 때 믿음을 갖는 것, 희망이 보일 때 참고 인내하는 것, 기분이 좋을 때 찬송하며 감사하는 것,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꿈쩍도 안 하실 때, 상황이 더 안 좋아질 때, 기도하는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감정이 상했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영적인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할 때,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고난의 풀무불 앞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신앙에는 거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내게 손해가 되고, 오히려 십자가가 되고, 고통이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헤세드(Hesed, 사랑과 은혜)를 가슴에 품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힘들 때 믿음이 거래의 대상이 될까 염려가 됩니다. 나의 기도 시간이 주님과 사귀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의 공로와 응답을 흥정하는 시간이 될까 걱정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욥을 묵상하며 요셉과 다윗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그런 믿음의 거목이 되기를 소원하며 갈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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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조율(調律)이 정 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악기는 정기적으로 조율을 해주어야 제소리를 냅니다. 우리에게도 각자 내야할 소리가 분명 있습니다. 각기 자기의 향기가 있고, 각자 자기의 색깔이 있습니다. 영혼의 조율이 이루어져야 자기의 소리와 향기와 색깔을 잘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조율이 안 된 소리들이 너무 크게 나기 때문에 언어의 공해 속에서 모두가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도 악기와 마찬가지로 조율의 시기를 놓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생각은 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급한 일을 먼저 하다 보면 늘 일에 쫓기는 삶을 살게 되어 조율해야 하는 시기를 놓쳐 버리게 됩니다. 새는 물을 퍼내는 것도 급하지만, 새지 않게 막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먼저 새는 곳을 막아놓으면 새는 물을 퍼내는 일도 사라질 것입니다. 중요한 일을 미리 하면 급한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조율은 다시 말하면 자기관리입니다. 자기관리가 안된 사람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코드로 조율되지 않은 자를 쓰신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이 가더라도 조율하여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고통과 아픔 속에서 부르짖고 어린 신생아들은 나일강에 버려져 죽어가고 있었음에도 모세를 바로 사용하지 아니했습니다. 모세는 세상적으로 보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입니다. 세상 악기로는 최고였습니다. 바로 공주의 아들이었으며,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에 능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행7:22) 그러나 하나님의 악기로 쓰기에는 아직 조율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 40년 동안 조율한 다음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셨습니다. 야곱도, 요셉도, 다윗도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 위해서는 조율하는 시간이 필수였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왕은 조율 없이 급조되어 백성들의 강압적인 요구 앞에 세워진 왕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너무나 비참하게 스스로 칼에 엎드려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의 생각, 나의 언어, 나의 행동, 나의 의도까지 조율 받아야 합니다. 조율 받은 후 쓰임 받을 때, 본인에게도 영광이며 주위 사람들에게 유익과 기쁨을 선물할 수가 있습니다. 조급하고 떠밀려 살아가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먼저 조율의 시간을 가짐으로 주어진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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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채움 이야기조병우 목사 김천제일교회 세상을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자기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비우는 것은 채운다는 것과 반대 개념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본능은 채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본능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모든 삶의 구조가 채우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채우는 과정의 반복이 바로 삶의 투쟁이기도 하다. 결국, 누가 더 많이 채우고, 누가 더 많이 쌓아올리는가가 삶의 성과로 해석되는 구조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는 자기 욕심과 치열하게 싸워야 하고 자기 자신을 대적하여 싸울 줄 알아야 한다. 상대와 싸우기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는데 익숙한 우리가 자신과 싸운다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라는 구조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언제부턴가 자신과 싸우고 있는 나를 만날 때가 많다. 내가 자신을 향해 책망할 때가 많아지고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실제의 나 자신을 볼 수 있을 때에 느낄 수 있는 정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과 싸우기 위해서는 철저히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누구라도 내 삶 속에 끌어들이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 사람과 싸움을 시작하기 쉬운 까닭이다. 다른 사람과 싸운다는 느낌이 주는 패배감에 서서히 빠져 들어가게 될 것이다. 다윗이 사울의 미움을 받아서 피난의 세월을 보냈다. 다윗이 진정으로 힘들었던 것은 사울과의 싸움이 아니라 사울을 대하는 자기 미움과 싸우는 것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 승리한 것은 사울을 이긴 것이 아니라 사울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긴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남을 이기는 기술을 가진 사람은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자신을 이기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신을 이긴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매우 선명하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진정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만이 자신을 이겨내고 자기 마음을 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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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통치 곽재억 목사 성은장로교회 사무엘하 24장에 다윗의 인구 조사로 인하여 7만명이 전염병에 죽은 사건이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1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다윗의 인구 조사는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다. 진노하신 하나님이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켜 인구 조사를 하게 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구 조사를 한 잘못을 다윗에게 묻는 것이 옳은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은 “여호와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과, 좋은 왕이라고 여겼던 다윗의 실수와 실패를 보여준다. 그리고 희망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제단과 하나님의 통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핵소고지’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에서 있었던 실화를 담은 영화다. 주인공은 의무병으로 자원입대했으나 행정적 착오로 소총수로 배치받았다. 모든 훈련을 열심히 받지만, 자신의 의학적 신념 때문에 집총을 거부한다. 이로 인해 상급자와 동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누구도 적대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의학적 신념을 지켜간다. 결국, 오키나와 전투에 총기 없이 참전한 주인공은 총탄이 튀는 전투 중에도 부상당한 전우들을 구하러 뛰어다닌다. 그가 전쟁 중에 구한 생명은 75명에 달한다. 전쟁 후 그는 최고 훈장을 받는다. 최근 코로나19 사태와 새롭게 등장한 원숭이두창과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며 이 영화 스토리가 생각났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으로서의 신념을 지키고자 한다면, 지키는 태도 또한 그리스도인다워야 한다. 이웃에 피해를 주고, 사회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배에 대한 신념을 지키고 인정받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인다운 사랑의 실천을 보여야 하고 이웃에 대한 의무도 함께 행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지, 혹여 오명을 씌우는 일이 되지는 않을지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코로나19로 혼란한 시기에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구현하는 교회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실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매우 간단하다.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병으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기도할 때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하셨다. 교회도 인간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본받아 실천해야 한다. 즉 각자 여건과 재능 안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의 감격이 없어지고 어느 순간에 말씀에서 떠나 우상을 섬기며 목이 뻣뻣한 교만으로 변질되었을 때, 그들을 멸절시키고 다시 모세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진노의 하나님 앞에 모세가 무릎을 꿇고 부르짖는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기억해서라도 화를 내리지 말라’고(출32:7-13)···. 그때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화를 내리지 않으셨다. 한국교회는 이스라엘을 보고 불쌍히 여기사 죽음의 사자의 손을 거두게 한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진정으로 회개하면서 엎드려 간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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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점검하라신앙을 점검하라 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부유한 포도원 주인이 자기 일꾼 중 한 사람이 값비싼 포도주 통을 엎질러서 포도주를 다 쏟은 것을 알고 그를 법정에 고발했습니다. 법정에서 재판관은 주인에게 “분명히 법은 당신 편에 있소. 당신의 일꾼은 마땅히 당신에게 손해 배상을 해야 하오. 그러나 당신은 부자이고 일꾼은 가난하지 않소. 그래서 법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지만, 당신이 헤세드(Hesed 사랑과 은혜)에 따라 행동하기를 판결하는 바이오. 헤세드의 원리에 따라 고소를 취하하고 일꾼에게 임금을 지불하여 주면 좋겠소. 당신은 경제적으로는 조금 손해를 보지만 영적으로는 더 부요해 질 것이오. 당신의 헤세드로 인해 세상이 더욱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해주면 좋겠소”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그는 재판관의 권고를 따랐다고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상황이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 감사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은 요셉이 13년 동안 참고 인내했기 때문이 아니라 13년 동안 한결같이 주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욥 또한 갑절의 축복을 받은 것은 수많은 고난을 당한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성숙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우리가 참았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많은 고난을 견뎠다면, 그것도 역시 그분의 은혜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은혜의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래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이 정도로 기도했으면 하나님도 이 정도 복은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이 정도로 참았으면 이제는 도와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이 정도로 헌금(헌신)했으면 축복의 징조라도 보여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복음적인 관점에서 보면 믿음이 아니라 흥정이며 기도가 아니라 거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급함을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절박함도, 우리의 애절함도, 우리의 필요함도 다 아십니다. 우리의 기도 소리도, 신음소리도, 믿음의 수고도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혹독하게 훈련시키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은 응답이나 해결이 아니라 나의 내적 변화와 거룩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함으로 사회 속에 영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살아날 때 믿음을 갖는 것, 희망이 보일 때 참고 인내하는 것, 기분이 좋을 때 찬송하며 감사하는 것,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꿈쩍도 안 하실 때, 상황이 더 안 좋아질 때, 감정이 상했을 때,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질 때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영적인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할 때,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고난의 풀무불 앞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세우신 신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겠나이다”란 고백처럼 신앙에는 거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내게 손해가 되고 오히려 십자가가 되고 고통이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헤세드를 가슴에 품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힘들 때 믿음이 거래의 대상이 될까 염려됩니다. 우리의 기도시간이 주님과 사귐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응답을 흥정하는 시간이 될까 걱정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욥을 묵상하며 요셉과 다윗을 묵상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모든 믿음의 형제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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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평교회, 교회설립 121주년 기념예배 드려괴평교회(담임목사 노형욱, 예장합동 구미노회)는 3월 27일(주일) 교회설립 121주년 기념주일을 맞아, 역대 담임 목회자 중 26대 목사였던 이영근 목사를 초청해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렸다. ▲교회설립 121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는 괴평교회 성도들의 모습. 이영근 목사는 ‘라마나욧의 위대한 기적’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다윗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했던 라마나욧처럼, 121년의 괴평교회가 앞으로 100년을 바라보며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고 영향력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한다”라고 전했다. 예배 후에는 양광조 장로(원로대표), 양순갑 장로(당회대표), 김경민 학생(다음세대)이 함께 축하 케익을 절단하면서 모든 성도가 기쁨을 나누었다. ▲예배 후에 축하케익 커팅식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양순갑 장로(당회대표), 양광조 장로(원로대표), 이영근 목사(26대 담임), 김경민 학생(다음세대 대표). 사진 뒷편은 노형욱 담임목사. 노형욱 목사는 “달려온 121년의 은혜의 역사가 달려갈 100년의 역사에 추진력을 더해 괴평교회가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방주가 되길 소망한다”며, “온 성도가 예수 제자의 삶을 살아냄으로 복음의 통로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괴평교회 성도들이 교회설립 121주년 감사예배를 드리고 나서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다. ▲괴평교회 예배당 전경(2015년 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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