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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의 섭리장 재 효 목사 서울성은장로교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3~26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39절~40절)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1~42절) 본문의 내용은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은 것을 살리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올해 부활절을 맞아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계획을 통해 부활의 섭리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병든 나사로가 죽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으며 오늘 본문 부활의 주인공인 나사로와 두 여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 세 식구가 사는 동네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제자들과 동행하실 때 가끔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 머무시곤 했습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병이 들어 예수님께 두 자매가 사람을 보내며 소식을 전하게 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었나이다”(3절)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속히 오실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지체하시며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6절) 그 후 예수님께서 도착해 보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상태였습니다.(17절)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며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기 전에 병을 고쳐 주실 것으로 여겼지만 이미 죽은 지가 나흘이나 지났으니 예수님이시라도 어찌하지 못하실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수심에 가득 찬 마르다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하고 위로해 주셨지만 마르다는 믿지를 않았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이심을 미처 알지 못한 것입니다. 2.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예수님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은 예수님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절)고 하셨음을 그 근거로 들 수 있습니다. 이는 나사로의 죽음이 아주 죽는 죽음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하시어 그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입체적으로 확실히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의 권세로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아나게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41절)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질병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망 즉 복음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병든 나사로를 죽을 때까지 기다리시고 죽은 후에 가셔서 그를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나사로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부활에 대해 실제로 눈앞에서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고 기별을 받았음에도 이틀을 더 머무신 것입니다. 그 이틀 동안 죽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3. 다시 살아난 나사로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보고 “잠들었다”(1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잠들었다고 표현하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 쓰임 받다가 육신이 죽을 때 그것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생명부활에 참여할 소망이 있음을 믿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사로가 그때 죽었지만 다시 살아날 것을 미리 아신 까닭에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면 병이 나을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야 예수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가 믿지 않자 예수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고 명하자 그제야 사람들을 시켜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향하여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43절) 하고 부르시니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사로가 나오며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4. 나사로의 부활이 주는 의미 나사로가 부활한 일로 인하여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내세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병든 자가 고침 받는 일도 기적이지만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은 더 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데 쓰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이 택하신 그 시간부터 남은 평생을 예수님께서 쓰실 계획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앞으로 어떻게 쓰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이 기대되지 않습니까? 부활은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고 또 일시적 부활이 있습니다. 나사로처럼 죽었다가 살아나더라도 육체의 생명이 다하면 다시 죽는 것을 일시적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확실히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절)고 말씀하신 것처럼 일시적 부활보다 더 중요한 생명의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도 부활합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의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부활한 몸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으니까 생명의 부활은 천국 가서 예수님과 영원히 사는 것이지만 심판의 부활은 예수님 앞에 그들의 행위록에 의한 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20:13~15절)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반드시 믿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불못에서 영원한 고통 속에 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하고 예수님이 물으실 때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라고 말한 마르다의 고백처럼 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마지막 날 주님이 오실 때 생명의 부활로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권면의 말씀)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예수님만이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실 분이심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망을 영생으로 바꾸어 주신 유일한 분으로 부활의 소망을 품게 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절)고 말씀하신 부활의 소망을 만천하에 선포하고, 예수님이 가라 하면 가고, 예수님이 하라 하시면 하고, 예수님 뜻대로 쓰임 받기를 힘써 보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주권자이신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며 순종함으로 쓰임 받아서 생명의 부활에 성도 여러분도 빠짐없이 다 참여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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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농산물 수출 날개를 달다!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 속 적극행정으로 성과 이뤄 예천군은 24일 오전 10시 30분 제2농공단지 소재 해트리푸드(대표 은상진)에서 김학동 군수를 비롯한 신동은 군의장, 송문흠 농협지부장, 우일음료 강평모 사장 등 관계자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쌀과 단무지 수출 선적식을 가졌다. 이날 선적되는 예천 농산물은 쌀 36톤과 단무지 76.8톤으로 출향인이 운영하는 부산의 희창물산(대표 권중천)을 통해 미국 뉴욕 시애틀 등 H-마트(회장 권일연)에서 판매될 계획이다. 이번 수출은 코로나19로 세계 경기가 둔화된 가운데 이뤄낸 성과로 그동안 예천군이 민선 7기를 맞아 군정 추진 방향으로 유통활성화를 통한 농가 소득증대를 위해 적극 행정으로 접근해 노력한 결과다. 해외수출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희창물산 권중천 회장과 그의 두 동생인 권중갑 미국 뉴욕 호텔스탠포드 회장, 권일연 미국 H마트 회장의 고향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학동 군수는 “코로나19로 농산물 판매가 어려운 가운데도 고향 농산물 수출에 힘써주신 희창물산 권중천 회장님께 감사드리고 쌀과 단무지 수출로 농산물 판매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가에 판로 안정은 물론 농가 소득에 도움이 될 수 있어 그 의미가 매우 크다”며 관계자들에게 예천농산물의 수출을 대폭 확대해 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예천군은 희창물산 및 경북통상 등과 긴밀한 협조로 수출 품목과 물량을 늘려 나아가는 한편 수출업체에 포장재, 수출물류비 등을 지원해 수출 확대를 지원할 계획이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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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코로나19 관련 3월 11일 브리핑 … 누적 1,072명전일 대비 17명 증가 … 경산 509명, 청도 140명, 봉화 56명, 구미 53명 경상북도는 3월 11일(수) 오전 11시 30분 정례브리핑을 열고 코로나19 확산과 관련한 대응 현황 등을 발표했다. 도내 확진환자는 11일 오전 0시 기준, 전일 대비 17명이 증가되어, 누적 1,072명으로 집계됐다. 오전 11시 기준으로는 1,077명이다. 확진환자가 늘어난 지역은 경산 11명, 봉화 2명, 청도·구미·안동·영주 각 1명이다. 아래는 브리핑 내용 전문이다. 코로나19 대응 경상북도 정례브리핑 □ 3월 11일(수) 코로나19 대응 관련 정례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ㅇ 서울 콜센터에 90명의 감염자가 발생해서 매우 안타깝습니다. 집단감염 방지가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ㅇ 경상북도가 긴급하고 과감하게 「사회복지시설 예방적 코호트 격리」를 실시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ㅇ 오늘 경상북도는 일제방역의 날을 맞아 민·관·군 합동 방역을 실시해 코로나19 바이러스 퇴치에 나설 예정입니다. 특히, 콜센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방역하도록 하겠습니다. ㅇ 한편 도내에는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민간까지 착한임대료 열풍이 확산되고 있고, 경주에서는 마스크 여유가 있는 시민들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마스크를 기부하는 「사랑의 마스크 나눔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ㅇ 이처럼 경상북도는 어려운 가운데도 도민 전체가 단합해서 바이러스와 맞서고 있습니다. ㅇ 우리는 반드시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민생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 확진환자 및 완치자 현황입니다. ㅇ 3월11일(수) 오전 0시 기준, 경상북도 코로나19 확진환자는 전일 대비 17명이 증가되어, 누적 1,072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증가) 122 → 63 → 31 → 22 → 12 → 17 ※ 질본발표(0시 기준) : 경북 1,135명 대구 5,794명 (+131명) ㅇ 오전 11시 기준으로는1,077명입니다. ㅇ 경산에서 11명, 봉화에서 2명, 청도‧구미‧안동‧영주에서 각 1명씩 발생했고 다른 시․군에는 확진환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 경산 11명중 6명은 서린요양원 (3.10 旣 브리핑) ※ 봉화 2명은 푸른요양원 (브리핑 현재 또 2명 추가 발생) ㅇ (완치) 어제 4명이 완치되어 현재까지 완치자는 총 60명입니다. ➀ 1955년생 남성, 청도대남병원 정신병동 정신환자 2월26일 충북대병원/ 3월10일 국립부곡병원 이송(13일소요) ② 1995년생, 남성, 3월1일 안동의료원/3월10일 퇴원(10일소요) ③ 1960년생, 여성, 2월26일 김천의료원/3월10일 퇴원(13일소요) ④ 1967년생, 여성, 2월26일 김천의료원/3월10일 퇴원(13일소요) □ 병원 및 생활치료센터 ㅇ 어제 3개 의료원에 19명을 입원시켰고, 생활치료센터에 79명을 입소시켰습니다. 격리 상태로 대기중인 39명도 신속하게 중증도를 분류해 의료원 혹은 생활치료센터로 이송하도록 하겠습니다. ㅇ 그리고, 정부에서 군의관 후보생 6명을 군사훈련기간까지 단축하고 보내주셨습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감사드리고, 험지인 경상북도에 와 주신 군의관 후보생 여러분께도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이 분들은 도내 의료원에 5명, 청송 소노벨 생활치료센터에 1명을 배치토록 하겠습니다. □ 콜센터 ㅇ 콜센터 감염 사례 조사 결과, 현재까지 경북의확진자 중에서 콜센터 근무자가 3명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ㅇ 이분들의 근무지인3곳의 콜센터가 모두 대구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구시에 이러한 사실을 통보했습니다. ㅇ 도내 공공 콜센터는 道 행복콜센터를 비롯해 포항, 경주, 영주, 의성, 영양의 민원콜센터가 있으며 각각 1~12명의 인원이 근무중입니다. ㅇ 민간 콜센터는 ‘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와 시·군을 통해 조사중이며, 결과가 정리되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ㅇ 콜센터는 오늘 일제방역의 날을 맞아 대대적인 소독을 실시하고,상담인력은 재택근무를 추진하겠습니다. □ 신천지 ㅇ 어제 정부가 요양시설 종사자·간병인 중 신천지 신도가 파악됐다고 발표한 것과 관련해 경상북도가 중대본으로부터 통보받은 명단은 11명입니다. ㅇ그러나道가 조사한 결과, 11명 중 현재 요양시설에 종사하고 있거나 간병중인 사람은 1명입니다. 나머지는 무직이거나 과거에 근무했다가 사직한 분들입니다. ㅇ11명중 8명은 신천지 신도이며, 道가 관리중인 6,549명 신도 명단에 포함되어 있어 이미 검사 및 조치가 완료된 분들입니다. △ 3명(+) : 2월 21, 22, 24일에 각각 양성판정을 받아 치료중 ➀ 요양보호사, 경산사랑지기 어르신마을 19.12월 사직 2.21 양성판정. 현재 생활치료센터 입소 ➁ 요양보호사, 다람노인요양공동생활가정 근무. 2.24 양성 판정 후 2.25 김천의료원 입원 ➂ 사회복지사, 대구 서구 경대요양병원 3월9일 사직 2.22 양성 판정 후 2.23 대구동산병원 입원 △ 5명(-) : 음성 : 4명 무직, 1명 파악중 ㅇ 나머지3명은 교육생인데 우리 명단에 없는 분들이라 급히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 그 중1명이 경주 소재 요양시설 종사자로 확인됐습니다. 해당 요양시설은 현재 예방적 코호트 격리중이며, 道는 오늘 오전 당사자를 퇴소시켜 검체를 실시해 긴급으로 검사를 의뢰했습니다. 당사자는 신천지 관련성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시설에서는 오늘 아침 발열체크를 했는데 종사자 및 입소자 전원이 양호한 것으로 보고됐습니다. △ 또 다른 1명은 대구 소재 교육센터 소속입니다. 3년전 요양보호사 자격증학원 등록 후 1개월만에 그만두었고, 두 달 전까지 다른 일용직에 근무했으며 근무지는 대구입니다. 오늘 오전 경산보건소에서 검체를 실시했고 자가격리 상태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1명은 본인과 연락이 닿았는데, 전라남도에 거주하며 주민등록번호도 다르고 본인은 신천지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중수본에 재확인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ㅇ 신천지 신도 전수 검체조사는 현재까지 6,426명을 완료했고 확진자는 498명으로 확진률은 7.7%입니다. ※일반도민 확진률 3.4% (574/17,019) □ 마스크 ㅇ 경상북도는 재난안전기금 및 기부금품을 활용해 마스크를 확보했고, 내일부터 2~6세 어린이와 코호트 격리중인 사회복지시설에 마스크를 지급할 예정입니다. ㅇ 먼저 도내 만2~6세 아동 100,310명에게는 내일부터 297,500매의 마스크를 지급합니다. 1인 당 3매씩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만2세는 2매 ) ㅇ 코호트 격리중인 사회복지 시설에는 마스크 21만5천개를 지급합니다. 1인 당 5매씩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중 6만5천개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15만개는 알리바바 마윈 회장이 기증한 것입니다. □ 특이 동향 ➀ 봉화 푸른요양원에서 추가 확진자 4명(입소자 3, 종사자 1)이 발생했습니다. ㅇ 3월8일까지 52명이 확진된 데 이어, 2차 검사결과 어제와 오늘 오전까지 4명이 추가 확진되어 총 56명으로 늘었습니다. ※ 총인원 117명(입소자 56, 종사자 61) / 양성 56명(입소자 43, 종사자 13) ㅇ 이번에 확진된 분들은 지난 1차 검사 시 음성판정을 받고 요양원 내 격리 중이었는데, 최근 발열증상이 있어 2차 검사를 실시한 결과 양성으로 확진됐습니다. □ 사회복지시설 코호트 격리 ㅇ 사회복지시설 예방적 코호트 격리 3일째입니다. ㅇ 현재 565개 시설에 종사자 9,539명(88.1%), 입소자 17,122명이 코호트 격리중입니다. ㅇ 어제 개인 사정으로 2주간의 격리 생활이 어려운 176명이 외부 근무로 전환해서 외부 근무 종사자는 총 1,220명(11.9%)입니다. ㅇ 많은 종사자께서 어르신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불편을 감수하며 코호트 격리에 임하고 계시고, 불가피한 개인 사정으로 외부에 근무하시는 분들도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ㅇ 사회복지시설 코호트 격리와 관련해서 어려움이 있으신 분들은 각 시·군의 종합상황반이나 긴급대응팀으로 연락주시면 애로사항을 해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ㅇ 코호트 근무 종사자의 잠자리가 불편한 문제에 대해 민원이 있어서 영주시는 매트 380매를 구입해 배부했고, 포항시는 매트 500매를 구입해 오늘 배부할 예정입니다. □ 道는 오늘 민·관·군 합동으로 일제 방역에 나섭니다. ㅇ 오늘은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을 방지하고 조기에 종식하기 위해 민‧관‧군 합동으로 운영하는 경상북도 일제 방역의 날입니다. ㅇ 이번에는 ❶PC방‧노래방‧게임방 등 다중이용시설❷코호트 격리시설 ❸시군 대로변 등을 중점 방역하겠습니다. ㅇ 23개 시‧군 새마을회원 3,045명은 버스승강장 등 읍면동 다중이용시설을 집중 방역하고, 경상북도종합자원봉사센터 재난지킴이 봉사단 235명은 PC방‧노래방‧게임방 등 250개소에 대해 방역을 실시합니다. ㅇ 시군 동물방역부서 및 축협공동방재단 90개단은 소독차량 171대를 투입하여 코호트 격리된 565개 시설 및 인근 주변을 집중 소독합니다. ㅇ 軍에서는 제독차 14대와 군인 266명이 투입되어 큰 도로변, 다중집합시설 외곽,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 등을 집중 방역할 계획입니다. ㅇ 앞으로도 민간과 軍, 道‧시군이 보유한 방역 장비를 총동원하여 일시에 방역을 실시해 방역 효과를 더 높이도록 하겠습니다. □ 道는 ‘힘내자 대구경북 행복도시락’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ㅇ 코로나19 감염확산으로 식당에 손님이 줄어 매우 어렵습니다. 도민들께서도 집에서 끼니때마다 식사 걱정을 합니다. ㅇ 경상북도는 식당 매출도 높이고 도민 건강과 편의도 챙기기 위해서 ‘힘내자 대구경북 행복도시락’을 만들었습니다. ㅇ 대한적십자사 경북지사와 함께 성금 3억5천만원을 활용해 배달 도시락 용기 40만개를 제작해서 다음주까지 도내 575개 외식 업체에 배부하고, SNS를 통한 도시락 메뉴 홍보를 진행합니다. ㅇ 사전 위생점검을 실시해서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할테니 도민 여러분께서 많이 이용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어제도 많은 분들께서 기부금품을 보내 주셨습니다. ㅇ 어제 8건이 접수됐으며 기부금 1억원과 마스크, 손 소독제, 도시락 등 다양한 기부품이 들어왔습니다. ㅇ 경상북도의사회에서 방호복, 방호세트, 위생장갑, 의료용 비닐가운, 고글, 살균소독제 등을 보내주셨습니다. ㅇ 한국벤처캐피탈에서 5천만원, ㈜한양컨트리클럽에서 3천만원, 영남에너지서비스에서 2천만원을 보내주셨습니다. ㅇ 네이처 리퍼블릭, 삼성그룹, 경주시 토마토연합회 작목반, 전남도청 등에서 마스크, 손 소독제. 도시락 등을 보내주셨습니다. ㅇ 꼭 필요한 의료현장과 취약계층 등에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이상으로 3월11일 코로나19 대응 경북도 정례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 통계 참고자료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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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 코로나19 26일 브리핑… 추가 확진자 49명 발생 총 249명경북도, 2월 26일 오전 8시 현재, 코로나19 확진자 283명, 사망자 8명 경상북도에서는 2월 26일 오전 8시 현재, 전일(2.25) 오전 8시 기준 249명 대비 34명이 증가하여, 총 283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추가 확진자는 신천지 대구교회 관련 16명, 성지순례자 1명, 대남병원 1명, 기타 16명이다. 사망자는 청도 대남병원 환자(남‧59세) 1명이 추가돼 총 8명의 사망자가 확인됐다. 총 확진자를 발생 원인별로 정리하면 현재까지 확진자 283명 중 청도 대남병원 112명, 신천지교회 관련 68명, 이스라엘 성지 순례자 29명, 칠곡 밀알사랑의 집 22명, 기타 52명이다. 신천지교회 관련, 도는 어제 오후, 중앙방역대책본부로부터 총 4,036명의 신천지교회 신도 명단을 입수했다. 지역별로는 구미 1,547명, 포항 1,389명, 경주 436명, 안동 247명, 김천 121명, 칠곡 121명 등 20개 시군이다. 이에 따라 도에서는 해당 시군별로 금일중 전수조사를 완료해서, 금일 도지사가 직접 호소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또한, 전수조사 결과, 유증상자 및 의심 증상자에 대해서는 진단 검사 및 자가 격리 조치를 한다. 특히, 최근 확진자가 발생한 3개 사회복지시설* 모두 신천지교회 관련자가 연관된 만큼, 시설 종사자의 자발적인 신고를 유도하고, 관리를 한층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 3개 복지시설 확진자 현황 : 25명 - 칠곡 밀알사랑의 집(68명 중 22명) - 예천 극락마을(88명 중 2명) - 청도 다람 노인요양 공동생활가정(11명 중 1명) 경북도는 특히, 최근 칠곡, 예천에 이어 청도의 사회복지시설에서 확진자가 발생한 상황의 심각성을 을 감안하여, 어제 오후, 도지사 주재 시군 사회복지과장 영상회의를 개최해, 시설 및 종사자 관리를 철저히 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 도내 사회복지 시설 : 총 9,122개, 종사자 13,576명, 이용 인원 596,548명 * 생활시설 : 546개, 26,185명(입소자 16,449, 종사자 9,936) 시설 종사자의 경우 출퇴근 근무를 통해 외부와 접촉이 잦아 위험요소가 큰 만큼, 종사자 관리가 중요하다고 보고 ① 신천지교회 관련자 ② 성지순례자 ③ 오염지역 방문자의 경우, 즉시 업무에서 배제토록 했다. 또 1일 2회 발열 체크를 의무화하고, 외부인의 방문 제한, 입소자의 외출·외박·면회금지 등의 출입 통제를 한층 더 강화해 줄 것을 전달했다. 병상 확보와 관련해서는, 현재 도내 3개 의료원에 대한 소개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며, 금일 오전 8시 기준, 확보된 가용 병상*은 총 244병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현재 대기 중인 59명은 금일중 입원 완료 조치할 예정이다. * 가용병상 244개 : 포항의료 30, 김천의료 10, 안동의료 203, 동국대경주 1 도는 특별히 “경상북도 의사회(회장 장유석)가 이번 코로나19의 조기발견, 조기격리, 조기치료를 위해 현재,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지정 운영되고 있는 포항, 김천, 안동의료원에 매일 내과 전문의 6명을 투입하여 확진자에 대한 조기 치료를 실시하고 있다”고 밝히고, “도내 47개 선별진료소도 시군 의사회와 함께, 내과의사 250명이 하루 10명씩 당번제를 지정해 진료지원에 나선 준 것에 대해 고맙다”고 감사의 표시를 전했다. 금일 브리핑에는 장유석 경상북도의사회장(경산 장유석외과의원장), 김재왕 내과의원장(안동, 前 경상북도의사회장), 최영환 내과의원장(안동시 의사회장) 등이 참석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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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 마을회관 돌며 통합건강교실 운영농한기 통합건강교실 운영으로 건강한 마을 만들어요! 영양군보건소는 겨울철 농한기 주민의 공동생활 중심인 읍·면 마을회관 및 경로당 40개소를 대상으로 만성질환 예방과 자가 건강관리능력 향상을 위해 1월 20일부터 마을회관 통합건강교실 운영을 시작하였다. 올해로 6년째 실시하고 있는 마을회관 통합건강교실은 영양군 내 위치한 모든 마을회관 및 경로당 구석구석을 직접 찾아가 모든 주민에게 건강교육의 균등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건강불평등을 해소하고, 자체 개발한 교육 자료를 활용한 체계적인 프로그램 운영으로 건강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여 자가 건강관리 역량을 향상시켜 주민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 영양군은 65세 이상의 노인인구가 36%인 초고령 지역으로 노인의 대다수가 겨울철 농한기 주간에는 마을회관 및 경로당에서 생활하고 있는바, 보건소는 어르신들의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업담당자 및 서비스 전문 인력 30명을 투입, 마을담당 책임제로 통합건강교실을 운영한다. 특히, 올해는 주민들의 요구와 보건소 사업 모니터링 결과를 반영해 매년 마을회관별 4주 운영하던 건강교실을 6주로 확대 운영하며, 구성 내용은 ▲기초건강검진(혈압, 혈당, 콜레스테롤 등) 및 일대일상담, ▲만성질환 유소견자 발견(방문보건 등록 및 병원 연계), ▲건강교육(심뇌혈관질환예방관리, 치매예방관리, 정신건강, 감염병관리, 건강생활 실천 등), ▲홍보(자살예방, 암 조기검진) 등이다. 장여진 보건소장은 “마을회관 통합건강교실 운영으로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겨울철 농한기 주민 건강관리를 보건소가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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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입니까? 손님입니까?천석길 목사 구미남교회 사람과 사람이 친밀해지려면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천 목사가 만나는 목사님 중에는 단순히 선배님과 후배로만 만나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조심하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예의를 갖추어 상대합니다. 그런가 하면 아주 소수의 목사님들은 존경하는 형님으로, 혹은 사랑하는 동생으로 대하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는 만나자마자 커피 사주세요! 라고 스스럼없이 조르기도 하고, 밥 사줄게 가자! 라고 억지로 끌어당기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을 우리는 그렇게 지내다 보니 이제는 만나는 순간부터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토해내는 가족 이상의 좋은 관계가 되었습니다. 목장은 이래야 합니다. 목장에서 만나는 분들을 손님처럼 대하면 서로가 조심스럽거나 불편할 수 있습니다. 목원으로 한 식구가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적인 한 가족이라는 마음을 서로가 주고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목장을 할 때는 아예 문을 살짝 열어 놓음으로써 벨을 누르지 말고 편하게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그렇잖아요? 가족은 벨을 누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 왔어! 라는 소리를 지르면서 집으로 들어옵니다. 우리 집에 들어올 때에 아직도 벨을 누르면서 들어오면 그 사람은 가족이 아닌 손님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식사를 할 때도 식사하기 전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마음을 서로가 갖게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목장을 여는 집에서 식탁에 음식을 다 차려 놓고 목원을 기다리는 것은 가족에 대한 배려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은 먹기 전부터 편해야 합니다. 가족이 식사할 때는 모두가 함께 거들어서 식탁을 준비하도록 연습시켜야 합니다. 가족 중에 어린아이는 하다 못해서 수저를 챙기고, 어른들은 한 사람이 밥을 담으면 한 사람은 국을 푸고 또 한 사람은 과일을 준비한다든지 모두가 함께하면서 음식을 먹기 전부터 웃고 떠들 수 있는 한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밥만 먹겠다는 심보(?)는 가족이 아닌 손님으로 남아 있겠다는 아직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이겠지요?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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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4‧끝)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4‧끝)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Chase C. Sawtell, 1881-1909) 목차 1. 서론 2.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3.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4. 소텔 선교사의 소명(召命) 5. 소텔 선교사의 성품(性品) 6. 소텔 선교사의 파송(派送) 7. 소텔 선교사의 사역(使役) 8. 소텔 선교사의 순교(殉敎) 9.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10. 캐더린 선교사의 특별한 공헌(貢獻) 11. 결론 9.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소텔 선교사는 1907년 8월 27일 캐더린 맥크롱과 결혼했다. 1884년 8월 2일 네브라스카 주 크레트에서 출생한 캐더린은 그곳에서 1년 동안 살다가 1885년 실버 크릭으로 이사하여 10년 동안 거주했다. 따라서 어린 시절 소텔과 캐더린은 한 교회를 다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3년이고, 실버 크릭 교회가 시골의 작은 교회였기 때문에 매 주일마다 주일학교에서 서로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캐더린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1905년 네브라스카 주 크리트에 소재한 돈(Donne)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기독교 병원인 오마하 제너럴 병원 간호학교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았다. 소텔과 결혼한 후 한국으로 파송 받던 해인 1907년, 23세의 꽃다운 나이인 캐더린은 5피트 10인치(약 178cm)로 당시에도 여성으로는 꽤 큰 키였다. 소텔 선교사 부부는 내한한 지 약 10개월 만에 딸을 출산하였는데, 이름은 메리이다. 선교지인 한국에서 딸을 얻은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1909년 남편 소텔 선교사가 별세했으며, 이후 캐더린은 선교 사역을 계속하다가 1910년 딸 메리와 함께 미국으로 귀국했다. 캐더린은 1918년 경 밴더립 목사와 재혼했고, 1930년 전후하여 오마하 소재 크리프톤 힐 장로교회를 섬기면서 사회복지와 관련된 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한 기록이 남아있다. 10. 캐더린 선교사의 특별한 공헌(貢獻) 안동의 교회음악에 처음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권애라 선교사다. 권애라 선교사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1909년 11월 소텔 선교사가 장티푸스로 순교한 후 그 후임으로 1910년 1월 안동에 파송된 권찬영 선교사의 부인인 동시에 소텔 선교사 부인 캐더린의 동생이다. 권애라 선교사는 초창기 안동에서 교회음악 외에 여러 선교사역의 중심역할을 감당했다. 남편 소텔 선교사가 순교한 후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는 대구에서 계속 사역을 감당했다. 이때 캐더린 선교사는 미국에서 만든 풍금을 안동교회에 기증했는데, 이 풍금으로 안동 땅에 교회음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캐더린이 안동교회에 기증한 풍금은 안동지역 최초의 풍금이었으며, 훗날 이 풍금은 안동교회의 교회음악과 영남지역의 음악역사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봄나들이’ ‘꽃 피는 삼천리’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음악가 권태호 선생이 어렸을 때부터 안동교회에 출석했고, 안동교회에서 권애라 선교사로부터 풍금을 배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동의 초기 기독교 음악은 캐더린 선교사가 기증한 풍금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 풍금이 훗날 안동교회 찬양대의 탄생을 도왔으며, 더 나아가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 중의 한 명인 권태호 선생을 낳게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풍금 기증자인 캐더린 선교사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11. 결론 1907년 9월 24일,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젊은 부부가 한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남편의 이름은 소텔(C.C. Sawtell)로 나이는 만으로 26세였다. 아내의 이름은 캐더린으로 만 23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한 지 22일 만인 1907년 10월 16일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소텔 선교사는 배속된 대구선교부에서 1년여 동안 맡겨진 사역에 최선을 다한 신실한 주의 종이었다. 그러나 1년 뒤인 1908년 안동선교부의 신설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미지의 땅인 안동으로 왔다. 그는 안동선교부의 첫 번째 주재선교사였던 것이다. 안동선교부를 위해 그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임무는 선교사들이 머물 수 있는 임시사택을 구입하는 일이었다. 그는 현재 안동교회 부지 안에 있는 한 채의 사택을 구입함으로써 선교사들이 안동에 머물면서 사역할 수 있는 기반시설 조성을 완료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소텔 선교사는 이후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고, 자생적인 교회들이 세워질 토양을 만드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안동에서 사역한 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가 남겨놓은 거룩한 흔적은 크고 무겁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텔 선교사는 1909년 11월 16일,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다음은 그의 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겠노라(I am going to love them).” 그는 조선을 사랑했기 때문에 내한했고,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로 갔다. 소텔 선교사는 안동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린 최초의 순교자였다. 안동 선교는 이처럼 거룩한 피를 흘림으로써 시작되어 안동 땅 곳곳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는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무려 109년 동안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선교사였던 소텔 선교사의 거룩한 삶은 교회가 침체되고 선교의 열정이 식어가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복음의 능력과 전도의 열정을 새롭게 한다. 소텔 선교사의 심장을 날마다 뜨겁게 했던 이 말이 식어 차게 변해버린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의 심장을 다시 뜨겁게 만들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겠노라(I am going to love them). ▲ 좌측 사진은 소텔 선교사가 별세한 후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가 안동교회에 기증한 바로 그 풍금 앞에 양복을 입고 연주하고 있는 권태호의 모습이다. 우측 사진은 연로한 음악가 권태호가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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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원문(6) - 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 Chase C. Sawtell, 1881-1909) 남북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은 분열된 상태였다. 1865년부터 1918년까지의 미국의 역사는 남북 전쟁 후에 미국 재건이 시작되어, 산업화가 진전된 시대였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많은 노동조합이 탄생했고 파업이 이어졌다. 특히 약 50여 년 동안(1865년~1918년) 유럽을 중심으로 다른 대륙에서 2,750만 명이나 되는 이민자가 미국으로 몰려들어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했고, 캘리포니아 주(州)와 같이 개발되지 않은 지역에 다양한 지역사회가 형성됐다.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은 작은 거류지로 이주 당했고, 백인 농장주와 목장주의 소유가 되었다. 공장 노동자는 학대와 폭력에 시달렸고, 그것에 수반하여 노동 운동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소텔(史佑大, Chase Cranford Sawtell) 선교사는 1881년 1월 9일, 네브라스카(Nebraska) 주(州) 소재 티케이마(Tekamah)에서 출생했다. 그는 환경이 좋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從)으로 불러 선교사로 보내시려고 했을 때 소텔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무조건 순종했다. 네브라스카 주의 밸리뷰(Bellevue) 대학을 졸업한 소텔은 오마하(Omaha)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했다. 그 해 목사 안수(按手)를 받고 파송 받아 1907년 10월 16일 한국에 도착했다. 소텔 선교사 부부는 처음에 대구선교부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여러 면에서 뛰어난 재목이었던 그는 대구선교부에 있던 선교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08년 안동선교부가 신설되었을 때 소텔 선교사는 자원(自願)하여 대구보다 열악한 환경인 안동 땅으로 이사했다. 안동선교부의 초대 주재 선교사가 된 그는 헌신했다. 특히 1909년 11월 16일 순교하기 전 까지 1년 동안 그를 통해 안동 땅에 의미 있는 전도와 새신자 양육이 이루어졌다. 복음전도의 전형적인 패러다임(paradigm)인 양육, 파송, 전도를 통해 안동지역 부흥의 기초를 마련했다. 하지만 소텔 선교사는 풍토병인 장티푸스에 걸려 28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는 무려 109년 동안 한국교회 속에서 잃어버린 선교사였다. 이 글을 통해 우리의 뇌리 속에서 잊혀진 소텔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소텔 선교사는 1881년 1월 9일, 미국 네브라스카(Nebraska) 주(州) 소재 티케이마(Tekamah)에서 출생했다. 소텔의 아버지는 웨스트 버지니아(West Virginia) 주에서 출생한 해리 소텔(Harry C. Sawtell)로 그는 세 번 결혼했는데, 소텔 선교사는 두 번째로 결혼한 제시 소텔(Jessie D. Sawtell)에 의해 출생했다. 제시 소텔은 소텔 선교사와 리트를 낳았다. 소텔 선교사의 동생인 리트는 몬타나(Montana) 주 아나콘다 시에서 척추 전문의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텔 선교사의 부친은 1885년, 티케이마 북쪽으로 약 13Km 떨어진 실버 크릭(Silver Creek)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소텔의 부친은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하이오(Ohio) 주의 댄빌(Danville)로 이사해 살기도 했다. 9세인 1900년, 소텔의 가정은 1870년에 거주한 적이 있던 아이오와(Iowa) 주 드모아 카운티 덴빌에서 살았다. 이 때 소텔 선교사 부친의 직업은 여전히 농부였는데, 상대적으로 다른 농부에 비해 가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미국의 농업은 현저한 발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의 피폐, 자연 재해, 자급자족 비율 감소와 연방 정부의 적절한 법적 보호와 지원의 부족 등으로 농부들의 삶은 지처 있었다. 일반적으로 19세기 미국 소작농의 대다수는 빚에 쪼들렸고, 유일한 탈출구는 수확량을 높이 과잉 생산이었으나 과잉 생산은 판매 가격 하락과 소득 감소로 이어졌고, 그 결과 토지는 피폐하고 토지 소유자나 소작농 모두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따라서 다른 농부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빈곤했던 소텔의 가정은 가난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소텔 가정은 다시 네브라스카 주의 오마하(Omaha)로 이주했고, 그 이후에는 오마하 인근에서 계속 거주했다. 소텔 선교사가 한국으로 오기 전인 1907년 3월 5일에 작성한 미국 장로교 해외 선교부에 제출한 선교사 지원서에 따르면 그의 주소는 오마하 노스(North) 21가 3303번지였다. 따라서 성장한 이후 소텔 생활의 중심 무대는 네브라스카 주의 오마하라고 할 수 있다. 네브라스카 주 티케이마에서 출생한 소텔 선교사는 웨스트 버지니아, 몬타나, 오하이오, 아이오와 주를 전전하다가 오마하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소텔 가정은 믿음의 가정이었다. 비교적 자주 이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착한 지역에 있는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했기 때문이다. 2.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한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추적하여 연구하고 있는 손상웅 목사에 의하면 소텔이 최초로 섬긴 교회는 네브라스카 주의 티케이마 교회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것이다. 여렸을 때 소텔은 여러 주(州)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4살 때인 1885년, 소텔의 가정은 티케이마에서 실버 크릭(Silver Creek)으로 이주했다. 소텔은 시골의 작은 교회인 실버 크릭(Silver Creek) 감리 교회에서 1897년 11월, 낙스 본디(Knox Bonde)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당시 실버 크릭에는 장로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가정은 감리교회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소텔의 누나도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아 소텔 가정이 실버 크릭으로 이사 온 이후 온 가족이 모두 실버 크릭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1861년 1월 11일, 공식적으로 오마하 제2장로교회(The Second Presbyterian Church of Omaha City)로 명명되었다가 1888년 4월, 오마하 제1장로교회(The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Omaha)로 변경되었다. 따라서 소텔이 오마하로 이사해 교회를 정하고 등록할 당시는 교회 이름을 변경하기 이전(以前)이었기 때문에 오마하 제2장로교회가 옳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오마하에는 1867년에 설립된 또 다른 교회가 있었다. 이름은 오마하 중앙장로교회(Central Presbyterian Church)로 당시 해외선교를 특별히 강조하는 교회였다. 제1장로교회와 중앙장로교회는 오마하의 대표적인 교회로 교회가 설립된 이래 오마하 지역 교회들의 중심교회였다. 그러나 두 교회는 1950년대 최고로 성장했다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1917년 3월 11일에 준공된 오마하 제1 장로교회의 모습으로 1959년엔 교회 역사상 최고로 2188명이 등록하고 있었다. 타개책을 모색하던 두 교회는 2014년 합병(合倂)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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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1) - 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영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1893년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안동지역에 복음이 전해진지 124년이 지났다. 오늘의 교회는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안다. 훌륭한 믿음의 선배 중에는 교역자들 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포함된다. 이 분들의 헌신의 결과로 척박한 이곳 안동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 마을마다 교회가 서게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수고임을 알기에 감사할 뿐이다. 우리 모두는 지역 복음화를 위해 희생하신 믿음의 선배들이 언제나 우리 옆에 계실 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분들은 예외 없이 복음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또한 이분들의 헌신을 직접 눈으로 보고 선배들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분들 역시 차례차례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런데 이분들이 행한 믿음의 수고와 헌신은 문자로 기록되지 못하고 대부분 구전(口傳)으로 전수되었다. 당시는 이분들의 선한 행적(行蹟)을 기록으로 남길 만한 여유도, 역사의식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믿음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유품(遺品)들을 보존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120년이 넘는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는 이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할 안동지역의 복음화 과정과 하나님의 역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믿음의 미담(美談)도 우리의 뇌리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있다. 안동지역의 초기 기독교를 위해 헌신하고 이들의 수고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잊혀져가는 기억을 되살리고, 총회와 노회, 각 교회에 남아있는 기록물과 그들의 유품, 그리고 후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흔적과 발자취들을 발굴하고 재조명(再照明)함으로써 안동지역의 기독교 역사를 재구성해야할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특히 우리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있고, 이미 사라져버린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의 거룩한 흔적을 찾는 것은 교회의 시대적 사명과도 같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선교 초기 거룩한 발걸음을 통해 거룩한 흔적을 남긴 위대한 선배이다. 필자는 그에 대한 조명이 너무 늦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그리고 경상북도에서 초개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며 교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김영옥 목사를 연구하여 탈고하니 그동안 목사님에게 가졌던 죄송스러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느낌이다. 이제 자애로운 아버지요 할아버지, 지역의 초대교회의 기초를 든든히 세워 중심교회로 서게 한 목사,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애국한 김영옥을 소개한다. 1.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결신한 청년, 김영옥 경상도의 첫 한국인 목사는 김영옥(金泳玉, 1871-1952)이다. 김영옥이 비록 영남지역 최초의 한국인 목사이지만 그의 고향은 북한으로, 그는 1871년 4월 12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했다. 가난했던 그는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갈 꿈을 갖고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18세가 되던 1888년 어느 날, 평산 누님 댁에 갔다가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가 소래(松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국으로 갈 방법을 찾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로 부터 복음을 제시받은 김영옥은 미국 갈 결심을 포기함과 동시에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로부터 세례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김영옥 목사의 손자인 김형태 목사(서울 연동교회 원로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증경총회장)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1888년 너무나 빈한하고 힘든 생활에서 벗어나 보고자 할아버님은 평산 누님 댁에 갔다가 리승만(할아버님 보다 2세 연하) 씨를 만나 사의하고 마침 황해도 장연 소래(松川) 교회에 미국 선교사가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는데, 이것이 그의 일생을 변화시킨 전환기가 되었다. 미국 북장로교 초대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는 1885년 내한하여 육척 키에 얼굴이 준수하고 말하는 것이 분명하여 총명하게 보이는 할아버님을 보고 예수 믿기를 권유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인재를 알아보고 키울 줄을 아는 안목이 있었다. 성령의 감화를 받은 할아버님은 그 때 결신하여 그에게서 세례를 받고 하와이 이민 대신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부가 될 것을 결정했다. 전혀 뜻하지 않게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은 김영옥은 세례 까지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부로 복음사역의 적극적인 도우미가 되었다. 참고로 소래교회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松川里)에 1883년 5월 16일에 세워진 교회다. 소래교회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항에 입국하기 2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소래교회는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서상륜·서경조 형제에 의해 자생적으로 세워진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自生敎會)라고 할 수 있다. 서상륜은 로스(John Ross) 선교사를 도와 최초의 우리말 성경인 '예수셩교누가복음전셔'를 출간한 후 한국교회 최초의 권서인이 되어 고향 의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발각되자 동생 서경조와 함께 외가인 황해도 소래로 내려와 복음을 전했다. 그 후 신자들이 생기자 1883년 5월 작은 초가집을 예배당으로 삼아 예배를 드림으로써 한국 최초의 자생적인 소래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2. 목사 임직 이전의 복음전도자, 김영옥 회심 이후 김영옥은 복음사역을 위해 하나하나 착실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복음전파사역에 관한 김영옥의 결심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곁길로 간 적이 없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한 준비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회심한 김영옥은 복음사역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 수년 동안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복음전도자가 갖추어야 할 것들을 성실하게 배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 1년 만에 한문 신·구약 성경 모두를 통독(通讀)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한 선교사들로부터 전도법과 장로교회에 관해 배웠으며 선교사들과 간단히 대화할 수 있는 영어실력도 갖추게 되었다. 모든 과정을 이수한 김영옥은 실력 있는 매서인(賣書人)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사를 도와 공식적인 매서인으로서 사역할 수 있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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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1)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6)김승학 목사 논문 연재(6)- 소텔 선교사(1)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 Chase C. Sawtell, 1881-1909) 목차 1. 서론 2.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3.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4. 소텔 선교사의 소명(召命) 5. 소텔 선교사의 성품(性品) 6. 소텔 선교사의 파송(派送) 7. 소텔 선교사의 사역(使役) 8. 소텔 선교사의 순교(殉敎) 9.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10. 캐더린 선교사의 특별한 공헌(貢獻) 11. 결론 1. 서론 남북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은 분열된 상태였다. 1865년부터 1918년까지의 미국의 역사는 남북 전쟁 후에 미국 재건이 시작되어, 산업화가 진전된 시대였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많은 노동조합이 탄생했고 파업이 이어졌다. 특히 약 50여 년 동안(1865년~1918년) 유럽을 중심으로 다른 대륙에서 2,750만 명이나 되는 이민자가 미국으로 몰려들어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했고, 캘리포니아주와 같이 개발되지 않은 지역에 다양한 지역사회가 형성됐다.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은 작은 거류지로 이주당했고, 백인 농장주와 목장주의 소유가 되었다. 공장 노동자는 학대와 폭력에 시달렸고, 그것에 수반하여 노동 운동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소텔(史佑大, Chase C. Sawtell) 선교사는 1881년 1월 9일, 네브라스카주 소재 티케이마에서 출생했다. 그는 환경이 좋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의 종으로 불러 선교사로 보내시려고 했을 때 소텔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무조건 순종했다. 네브라스카 주의 밸리뷰 대학을 졸업한 소텔은 오마하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했다. 그해 목사 안수를 받고 파송 받아 1907년 10월 16일 한국에 도착했다. 소텔 선교사 부부는 처음에 대구선교부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여러 면에서 뛰어난 재목이었던 그는 대구선교부에 있던 선교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08년 안동선교부가 신설되었을 때 소텔 선교사는 자원하여 대구보다 열악한 환경인 안동 땅으로 이사했다. 안동선교부의 초대 주재 선교사가 된 그는 헌신했다. 특히 1909년 11월 16일 순교하기 전까지 1년 동안 그를 통해 안동 땅에 의미 있는 전도와 새신자 양육이 이루어졌다. 복음전도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인 양육, 파송, 전도를 통해 안동지역 부흥의 기초를 마련했다. 하지만 소텔 선교사는 풍토병인 장티푸스에 걸려 28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는 무려 109년 동안 한국교회 속에서 잃어버린 선교사였다. 이 글을 통해 우리의 뇌리 속에서 잊혀진 소텔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소텔 선교사는 1881년 미국 네브라스카주 티케이마에서 출생했다. 소텔의 아버지 해리 소텔은 두 번째로 결혼한 제시 소텔과의 사이에서 소텔 선교사와 리트를 낳았다. 소텔 선교사의 동생인 리트는 몬타나주 아나콘다 시에서 척추 전문의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텔 선교사의 부친은 1885년, 티케이마 북쪽 실버 크릭으로 이사해서 농사를 지었으며, 이후 오하이오주의 댄빌로 이사해 살았다. 소텔 선교사 부친의 직업은 여전히 농부였는데, 상대적으로 다른 농부에 비해 가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텔 가정은 다시 네브라스카주의 오마하로 이주했고, 그 이후에는 오마하 인근에서 계속 거주했다. 소텔 선교사는 웨스트버지니아, 몬타나, 오하이오, 아이오와주를 전전하다가 오마하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소텔 가정은 믿음의 가정이었다. 비교적 자주 이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착한 지역에 있는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했기 때문이다. ▲위 사진은 소텔 선교사가 어린 시절 출석하고 1907년 9월 한국으로 파송한 것으로 알려진 오마하 제2장로교회의 전경과 예배당 내부 모습이다. 3.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한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추적하여 연구하고 있는 손상웅 목사에 의하면 소텔이 최초로 섬긴 교회는 네브라스카주의 티케이마 교회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어렸을 때 소텔은 여러 주(州)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4살 때인 1885년, 소텔의 가정은 실버 크릭으로 이주했다. 소텔은 시골의 작은 교회인 실버 크릭 감리교회에서 1897년 11월, 낙스 본디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당시 실버 크릭에는 장로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가정은 감리교회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소텔은 오마하로 이사한 후에 오마하 제2장로교회를 다녔다. 오마하 제2장로교회는 1888년 오마하 제1장로교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텔 선교사의 부친은 세 차례 결혼한 사람이었다. 소텔 선교사의 모친 제시 소텔은 두 번째 부인으로 좋은 신앙을 갖고 있었다. 소텔 선교사는 좋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 안에서 잘 성장하여 한국으로 파송 받은 선교사로 살다가 안동지역 선교사 중에서 최초로 순교(殉敎)를 당했던 것이다. ▲1917년 3월 11일에 준공된 오마하 제1장로교회의 모습으로 1959년엔 교회 역사상 최고 2,188명이 등록하고 있을 정도로 오마하에서는 최고의 부흥한 교회였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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