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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찬양단 창단 30년 만에 첫 한국 방문초교파 기독교 순수 찬양선교단체인 월드밀알선교합창단이 창단 3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 안동과 청송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들을 순회하며 7월 4일~15일까지 한국찬양대행진을 펼치게 된다. 전국의 주요 도시와 그 지역 중심교회에서 펼치게 될 이번 한국찬양대행진의 경북지역으로는 안동의 안동교회(담임목사 김승학)와 청송의 청송교회(담임목사 윤희도)가 선정됐다. 이에 따라 안동교회에서는 10일 저녁 7시 30분, 청송교회에서는 11일 저녁 7시 30분에 월드밀알선교합창단의 공연이 열리게 된다. 월드밀알선교합창단은 지금부터 30년 전 1987년 뉴욕에서 두 명의 음악 전공자로부터 시작 됐다. 뉴욕에 있는 음악학교에서 성악이나 기악을 공부한 학생들과 주님을 사랑하고 찬양으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이기 시작했었던 것이 계기가 됐다. 지금은 그 모임이 뉴욕을 넘어 전 세계로 뻗어나가 각 국에 수많은 지회가 조직되었으며, 수 백 명의 단원들이 기쁨으로 참여하고 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씀처럼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려는 희생과, ‘최고의 하나님께 최고의 찬양을’ 드리려는 헌신 위에 세워진 선교단체이다. 이번 한국찬양대행진에는 세계 150여 개국의 단원들 약 250여 명(합창+오케스트라)이 참여하며, 지구촌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 주안장로교회, 영락교회, 사랑의교회 등 많은 교회를 비롯하여 요양병원, 노인병원, 교도소 등을 방문한다. 경북말알선교합창단(단장 김명섭)은 2012년 창단 예배를 드렸고,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찬양을 통한 밀알선교합창단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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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사랑의 바자회’ 열어예장(합동) 경서노회 여전도회연합회(회장 이명금)가 지난 21일 선산읍교회에서 300여 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월례회 및 바자회를 열었다. 이명금 회장의 인도로 드려진 1부 예배는 양영희 장로(지회지도부차장)의 기도, 허상숙 권사(선산읍교회 수산나회장)의 성경봉독, 경서여전도회 찬양대의 찬양, 김상로 목사(선산읍교회 담임)의 말씀 선포, 김창경 집사(선산읍교회 마르다회장)의 헌금기도, 권영희 총무의 광고에 이어 강성식 목사(평신도지도위원장)의 축도로 마쳤다. 김상로 목사는 ‘현숙한 여인’(잠 31:10~12, 27~31)이란 제목의 말씀 선포에서, “현숙한 여인이 백 명의 스승보다 낫다”고 전제한 뒤, “현숙한 여인이란 남편의 내조자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자녀를 올바로 잘 양육하며,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여인이다”라고 했다. 이어 “얼굴과 몸은 변하지만 내 속의 변치 않는 믿음으로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살리는 사명을 감당하는 여인이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2부 회무처리에 이어, 3부에는 각 회원들이 기부한 생필품, 의류, 잡화들과 공동구매한 식품들이 교회 로비와 마당에 전시되어 있어서 회원들은 필요한 품목들을 싼 가격에 구입했다. 이번 바자회를 통해 얻은 전체 수익금은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서 설립·후원하는 ‘경북 작은자의 집’(청송 소재)을 위해 쓰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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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자유란 무엇인가?”목록 본문 경북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우종휴 목사, 이하 경북기총) 주최 ‘8.15 나라사랑 구국기도회’가 지난달 17일(목) 오전 10시 30분 영천제일교회(담임목사 민광) 본당에서 400여 명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광복 72주년을 맞아 열린 이번 구국기도회는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진솔하게 돌아보고 믿음의 선진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가와 민족의 당면한 문제들을 놓고 충심으로 기도하고자하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우종휴 목사(구미황상)의 사회로 드려진 2부 예배는 윤선률 장로(경북장로총연합회장)의 기도, 김봉환 목사(상임서기, 구미금전)의 성경봉독, 영천제일교회 찬양대의 찬양, 곽선희 원로목사(서울소망)의 ‘참 자유의 복음’(요9:31~36)이란 제목의 메시지 선포가 있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곽선희 목사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 자유는 마땅한 값을 치루어야 얻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내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요, 너의 잘못도 내가 지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이다. 원망과 불평은 ‘죄’의 노예이며, 그리스도인은 죄와 사망과 율법으로부터 자유인이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율법과 사망으로부터 자유인 또한, 일제 치하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와 같은 분의 희생을 재조명하면서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쓴 편지 중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라는 부분을 소개할 때는 장내가 숙연해졌다. 곽 목사는 “해방을 누릴 수 있는 형편을 허락하신 하나님,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만 자유인이 아니라 억압을 당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자유케 하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자“라고 말했다. 85세의 고령임에도 20대 청년 같은 곽 목사의 힘있는 목소리와 메시지는 영천 땅을 넘어, 경북, 대한민국 전역을 향해 울리는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이어 한상봉 장로(회계, 구미상모)의 헌금기도, 안동서부교회 그루터기중창단의 특송, 증경회장 민광 목사(영천제일)의 축도로 예배를 모두 마치고, 김관용 경북지사와 김영석 영천시장, 남유진 구미시장의 축하 인사말이 있었다. 3부 구국기도회는 이장희 목사(대표부회장, 주사랑)의 인도로 이어졌다. 대표기도 순서를 맡은 임상진 목사(포항시기독교교회연합회 회장), 정신덕 목사(영천기독교연합회 회장), 이진호 목사(구미시기독교연합회 회장), 조근순 목사(청송군기독교연합회 회장), 김상정 목사(경주시기독교연합회 회장), 김화기 장로 (도청신우회 전회장), 박영규 목사(청도군기독교연합회 회장)는 차례대로 강단에 올라가 ‘북한 구원과 북한 지하교회를 위하여’ ‘대통령과 위정자를 위하여’ ‘경북기총과 경북 복음화를 위하여’ 한국교회의 연합과 하나 됨을 위하여‘ ’대한민국 교회의 복음을 방해하고 흔드는 이단 세력이 물러가도록‘ ’전쟁 없는 한반도 통일을 위하여‘ ’차별금지법과 동성애 방지를 위하여‘ 각각 기도했다. 이어 김대원 목사(사무총장, 흥해영광)의 구호제창과 이정우 목사(상임회장, 안동서부)의 폐회기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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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내동교회 찾아 ‘예배당 지붕개량공사’ 실시목록 본문 예장(대신) 경북노회(노회장 김창기 목사) 재능봉사팀은 지난달 26일 우박으로 인해 예배당 지붕에 큰 피해를 입은 봉화군 재산면 소재 내동교회(담임목사 장주덕)를 찾아 ‘예배당 지붕개량공사’를 실시, 칭송을 받았다. 시급한 지붕공사였기에 불볕더위 속 무더위마저도 무릅써야 했던 이날 공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일정이었다. 또한 지붕개량 공사는 전문인도 직접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노회 재능봉사팀 목사들은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함께 통성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다. 무더위 속 일정이었지만 재능봉사팀은 은혜 가운데 무사히 모든 공정을 잘 마무리 했다. 내동교회 장주덕 목사의 말에 따르면 “봉화와 인근 지역인 청송과 영양, 영주지역에까지 지름5~6센티 크기의 우박들이 떨어져 인근 과수원의 농작물과 비닐하우스 등에 큰 피해를 입힌 것은 물론 예배당 지붕마저 큰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이날 재능봉사팀에 참석한 김기현 목사(포항 오천주안)는 “전문인도 쉽지 않은 지붕개량 공사를 안전하게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였다”며 “한마음으로 잘 마무리해 너무나 기쁘다”고 전했다. 경북노회 재능봉사팀은 각 노회 산하 교회 가운데 도움이 필요한 어느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하나님의 예배당을 아름답게 수리해 주고 있다. 이를 위해 재능봉사팀은 봉사단의 안전을 위한 기도와 관심 있는 분들의 재정 후원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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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자천교회(永川 慈川敎會)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2호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773 이 교회는 1903년에 미국인 선교사 어드만(Erdman)이 신자(信者)들과 합심(合心)하여 지은 것으로 전국에서 보기 드문 한옥교회이다. 건물은 동서쪽으로 약간 긴 네모형태의 우진각(모임)지붕이며, 주 출입구는 양 측면에 두었다. 내부는 후면의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중앙부는 칸막이를 설치하여 남·녀석을 구분한 예배공간을 마련하여 구한말의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였다. 구조는 나지막한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세워 절충식 지붕틀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양식의 건물은 선교 초기에 구미인(毆美人) 선교사들이 지은 한·양 절충식(韓·洋 折衷式)으로, 개신교사(改新敎史)와 건축사(建築史) 연구의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안이와 선교사와 권헌중 장로의 노고재에서 만남 자천교회 설립 이야기 자천교회 이야기는 1898년 안의와 선교사의 경북 동부와 동북 지방의 2개월 전도여행에서 시작한다. 그는 대구에서 출발하여 영천을 거쳐 청송으로 전도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 권헌중은 안의와 선교사와 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었다. 원래 자천교회 설립자 권헌중 장로는 경주의 작은 마을의 선비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 훈장이었다. 그가 서당 훈장으로 살아가고 있던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지배를 당하고 있는 시절이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 헌병들이 각 군 소재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며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지사들은 일본 헌병들과 맞서 싸웠다. 이러한 탓에 낮에는 일본 헌병의 천국이요. 밤은 의병 천지였다. 일제로부터 당하는 고통은 면소재지에 있는 양반과 천민들이나 할 것 없이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때문에 견디기 힘든 일제의 고통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자신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권헌중에게 있어서도 고통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경주에 있는 한적한 곳의 선비로서 서당 훈장의 생활을 접고 청송군 현서면 수락이라는 곳에 이주하여 살게 된다. 하지만 수락에서의 생활도 길지 않았다. 그곳의 생활도 접고 또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 현서면 수락에서 대구를 향하고 있었다. 안의와 선교사는 영천을 거처 청송으로 선교 여행을, 권헌중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서 대구로 각자의 목적을 향하여 길을 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던 이들의 만남은 영천시와 청송군의 경계를 잇는 ‘노고재’라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권헌중은 노고재에서 휴식을 하던 중 안의와 선교사를 만나게 된다. 권헌중은 당시 처음 만나는 외국 사람이었고, 모양새도 우리나라 사람과 달리 키와 눈과 코가 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말을 서툴게 한 탓에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또 권헌중과 함께 동행하던 가족들과 노비, 머슴들은 자신들의 모습과 많이 다른 안의와 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괴물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한바탕 웃는 일도 벌어졌다는 우스운 일화도 있다. 권헌중은 노고재에서 안의와 선교사와 첫 만남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에 관해서 듣게 되었다. 안의와 선교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관하여 들은 권헌중은 대구로 이주 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보현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신촌면 자천리에 작은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그곳에 머물며 안의와 선교사와 왕래하면서 성경 말씀을 배웠다. 한국 초기 교회들의 역사가 대부분 그러하듯 자천교회 역시 작은 초가집의 사랑방에서 시작이 되었다. 권헌중은 자기가 살고 있는 초가집을 예배당 겸 서당으로 사용했다. 낮에는 서당으로 사용하며 한문을 가르쳤다. 저녁에는 함께 성경을 공부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된 자천 교회의 당시 교인은 서당에 다니는 문동과 권헌중을 따라온 노비와 머슴들이 전부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권헌중은 당시 나라에서 처음으로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자신이 먼저 상투를 자르므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개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데리고 있던 노비들의 문서를 태워버리고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계급과 신분을 타파하고, 그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었다. 복음에 대한 권헌중의 열심에 안의와 선교사도 덩달아 신이 나서 대구에서 자천까지 열악한 도로 상황을 뒷전으로 하고 자주 방문하여 성경에 관하여 토론하며 확실한 교인들로 만들어 나갔다. 초가집 사랑방의 자천교회의 모임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신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공간이 협소하였다. 따라서 초가집 사랑방이 아니라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대구 지방의 기독교 사립학교인 희도학교가 안의와 선교사에 의해서 대구제일교회 구내 초가집에서 1900년 11월 11일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1907년 10월 23일에는 신명학교가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서 개교하게 된다. 대구를 중심으로 학교를 개교한 후 안의와 선교사는 1902-1910년 사이에 경북 각처 교회들에게 400원씩 보조하여 학교를 설립하게 하였고, 각 교회는 학부대신(현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얻어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당시 영천지방에 있는 교회도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름이 밝혀진 학교는 평천교회의 기독양덕학교, 신령교회의 흥화학교, 우천교회의 기독진도학교와 더불어 권헌중은 운영하던 서당을 폐하고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2년제 학교인 신성소학교의 설립을 하였다. 하지만 자천교회가 설립한 신성소학교의 설립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권에서 ‘1913년 남학교를 설립하여 생도(生徒) 50명을 교육하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 ‘경북교회사’에서는 ‘1914년 자천교회는 학교를 설립하여 생도 50여 명을 교육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연대를 학교의 설립 연대로 볼 수 없다. 이는 학교가 설립한 후에 노회나 총회에 보고된 연대이기 때문이다. 노회 보고 연대를 기준과 2년 재 학교라는 것을 고려하고, 초가집 교회에서 목조건물 교회 건립을 고려해 볼 때 신성소학교 설립 연대는 대략 자천교회 목조 건물을 헌당 하던 때와 비슷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권헌중 장로가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세운 신성소학교는 처음 남자 반을 모집했다. 그러던 중 안의와 선교사가 여자반도 모집할 것을 권헌중에게 권유했다. 그는 권유를 받아들여 여학생을 모집했지만 지원자가 없었다. 아무리 설득해도 지원자가 없어서 자신의 딸인 권수기씨를 입학시켜 여학생 1호가되었다. 후에 권수기씨는 신명여교에 입학하여 제2회 졸업생이 되었으며, 그 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권헌중은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신성소학교를 설립하므로 복음의 요람으로 자천교회뿐만 아니라 교육의 요람으로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용한 시골에서 글을 가르치던 선비 권헌중은 안의와로부터 받은 복음에서 출발하여 자천이라는 시골 동네에 초가집 예배당과 서당, 그리고 목조 기와의 ‘一子’형 예배당을 건립하여 복음 전도와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어 왔다. 권헌중은 새롭게 건립된 예배당에서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영수의 직분을 가지고 교회를 섬겼다. 1915년 당시 권헌중과 더불어 서석희와 정해민이 자천교회 영수로 섬기고 있었다. 세 명의 영수를 중심으로 교회가 든든히 서가던 중 첫 번째 장로를 장립 할 수 있는 시기가 자천 교회에 찾아왔다. 교회는 권헌중을 장로로 세워줄 것을 결정하고 1920년 6월 11일 제8회 경북 노회에 청원을 하여 허락을 받은 후 공부하였다. 노회의 절차를 밟아 권헌중은 장로 청원이 있은 후 1년 반이 조금 넘은 1922년 2월 26일 오전 11시 새롭게 건립된 본교회 목조 예배당에서 위철지 목사의 주례로 장로 장립을 가지게 됨으로 교회 설립이후 첫 장로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자천교회는 처음으로 당회가 조직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권헌중이 장로로 임직하던 해인 1922년 5월 13~18일까지 자천교회는 새롭게 건립된 목조 예배당에서 김성로 목사를 초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부흥회에 참석한 사람은 본 교회 성도들 50여 명과 각처 교회에서 온 신자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중에 풍성한 은혜를 받았다. 또 저녁에는 200명이 넘는 신자들이 말씀을 청강하는 동시에 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60여 명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가 40여 명이 되었다. 부흥회를 통하여 교회를 보수하기 위해서 헌금 5백10여 원이 드려지므로 더 풍성한 은혜와 결실이 있었다. 권헌중은 장로 장립을 기점으로 하여 교회의 활동도 왕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경북노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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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황금사과 한국시리즈 진출청송군(군수 윤경희)은 오는 11월 5일(월) 청송군의회, 청송사과 생산자단체와 농협 등 사과유통 관계자들과 함께 한국시리즈 2차전이 열리는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청송 황금 사과 한국시리즈 나들이’라는 주제로 대대적인 청송사과 홍보행사를 펼친다. 군은 청송사과의 대표 품종인 ‘부사(후지)’와 황금 사과로 불리는 ‘시나노 골드’를 프로야구팬들 앞에 선보일 계획으로, 윤경희 청송군수를 비롯한 청송사과 홍보요원 150여 명이 “청송사과 맛보세요~”를 외치며 잠실야구장 입장객 수 만큼인 청송사과 26,000여 개를 현장에서 무료로 나누어 준다. 한편, 청송사과는 농식품 파워브랜드 대상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으며, 2013년부터 6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에 선정되어 이미 국내 소비자들에게 명품사과로 인정받고 있지만, 매년 국내산 과일의 소비량이 감소하고 있는 등 과일 산업이 위기를 맞고 있는 현시점에서 무료 나눔과 시식행사를 통해 청송사과 브랜드 가치가 더욱 상승하고, 다양한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윤경희 청송군수는 “청송사과 브랜드 가치와 명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군은 이에 만족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각종 메이저 스포츠를 활용한 다양한 이벤트와 지속적인 홍보 판촉으로 청송사과 명성을 더욱 공고히 유지해 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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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동부교회, ‘진영신 목사 위임 및 임직·취임’ 감사예배예장통합 안동동부교회는 지난 7일(주) 오후 2시 30분 본교회당에서 ‘담임목사 위임 및 장로·집사·권사 임직, 권사 취임예식’을 가졌다. 안동동부교회 담임목사로 위임받은 진영신 목사는 영남신학대 기독교교육학과와 영남신학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한남대 기독교윤리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대구 내당교회 부목사를 역임했다. 이번 임직에서는 장로임직 4명(안형우 김성곤 이승선 박무학), 집사임직 14명(황성호 오상일 김정년 정윤철 윤명섭 정면호 강상조 배영대 유 륜 박종은 고종현 김재국 권기원 임명수), 권사임직 20명(윤여인 강선실 박은주 홍경자 최명현 안춘자 이화숙C 김영엽 최애숙 우영지 임정자 박진숙 정소영 신정애B 황성아 백은경 권영희B 민미식 유승자 이경희), 권사취임 1명(조순자)이 새롭게 임직자로 세워져 교회에 충성과 헌신을 다짐했다. 1부 예배는 경안노회 위임국장 권오수 목사(송현)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이상철 목사(직전시찰장)의 기도, 석한진 목사(시찰장, 모산)의 성경봉독, 할렐루야 찬양대의 찬양에 이어 조석원 원로목사(내당)가 “직분자를 세우는 목적”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다. 2부 목사위임식은 권오수 위임국장의 집례로 진행됐으며 증경노회장 김승학 목사(안동)가 권면의 말씀을 전했다. 3부 임직식은 진영신 당회장의 집례로 진행됐으며 증경노회장 이상훈 목사(의성제일)와 이찬욱 목사(청송제일)가 권면의 말씀을 전했다. 모든 축하 순서를 마친 후 김광식 원로목사(안동명성)의 축도로 예식을 은혜롭게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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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지를 찾아서(2)-엄주선 강도사경북 유일 6.25전쟁 순교자 ▷ 엄주선 강도사 순교 이야기 엄주선 강도사는 1919년 5월 23일 경북 의성군 다인면 봉정동에서 출생했으며, 1935년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부친과 함께 고향 다인면 봉정동에서 예천 상락교회까지 걸어서 믿음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일제의 수탈로 부친과 함께 만주 봉천(현, 심양)으로 건너가 봉천에 있는 서탑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를 섬기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엄 강도사는 대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을 위한 소명감에 불타 1949년 12월 장로회신학교(현,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제43회), 1950년 5월 목사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1950년 12월 청송 화목교회를 시무하다가 1951년 2월 17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홀로 기도하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공산군 패잔병들에 의해 납치를 당했다. 엄 강도사는 함께 납치돼 끌려가던 내복 차림의 신중건 씨에게 대한(大寒)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입혀주는 사랑을 베풀었다. 또한, 엄 강도사는 인민군 10사단장 김두봉에게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했으며, “예수를 안 믿겠다고 약속하면 죽이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회유를 거절했다. 결국, 엄 강도사는 춘산면 옥정동(바랑골)에서 죽창으로 19군데를 찔린 채 순교를 당했다. 이후 공산군이 퇴각하자 화목교회 박치환 장로, 양재관 장로, 엄규영 영수(부친)가 사체를 찾아냈으며 박도선, 양원석, 김상정 집사 등이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 청송군 화목교회로 운구하여 경북노회 순교자장(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 엄주선 강도사 순교사적지 지정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는 지난 2012년 5월, 엄주선 강도사의 숭고한 사랑과 순교 정신을 기리고자 의성군 춘산면 순교지와 청송군 현서면 순교테마공원을 한국기독교사적지 10호, 10-1호로 각각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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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에 전국 첫 ‘군단위 LPG배관망’구축경상북도는 11일(목) 청송읍 LPG공급관리소에서 전우헌 경북도 경제부지사, 윤경희 청송군수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군단위 LPG배관망 구축사업 준공식’을 갖는다. ‘군단위 LPG배관망 구축사업’은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천연가스 수급 제외지역인 전국 13개 군을 대상으로 LP가스를 중단없이 저렴하게 취사․난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LPG공급시설을 설치하는 사업으로 경북 도내는 청송군, 영양군, 울릉군이 해당된다. 청송군은 2016년 1차사업 대상지역으로 선정돼 사업비 140억원을 투입해 2017년 6월 공사를 착공하여 LPG저장탱크(50톤, 2기)와 배관망(15km)을 매설하고, LPG공급관리소와 1,215세대에 사용시설(내관, 보일러, 안전장치 등)을 설치했다. 이번 준공으로 주민들은 LPG배관망을 통해 편리하고 안전하게 LP가스를 공급받을 수 있으며, LPG를 난방으로 사용함으로써 동절기 난방비가 크게 절감될 것으로 기대된다. 경북도는 영양군과 울릉군에도 군단위 LPG배관망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영양군은 2019년, 울릉군은 2020년까지 사업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또한, 도시가스가 공급되지 않는 농어촌마을 주민들의 에너지복지 향상과 정주여건 개선을 위해 ‘LPG소형저장탱크 보급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전우헌 경북도 경제부지사는 “청송읍이 도시수준의 가스사용 기반시설을 갖춘 만큼 앞으로 지역발전이 기대된다”며 “LPG배관망 구축사업을 확대 추진해 농어촌지역 주민들의 에너지 복지를 향상시키는 한편 청년들이 돌아오는 농어촌 정주여건 개선에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청송 군단위LPG배관망 사업현황 ▪ 사업기간 : 2016. 5월 ~ 2018. 9월 ▪ 사업장소 : 청송읍 월막1․2리, 금곡1리 일원 ▪ 사 업 비 : 140억원(국비 70, 도비 16.8, 군비 39.2, 자부담 14) ▪ 사업내용 : LPG저장탱크․배관망 및 개별세대 내관․보일러․안전설비 설치 ▪ 시설현황 : 저장탱크 30톤 2기, 배관망 15km (수혜세대) 읍지역 1,215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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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2)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5. 이대영, 낙심하고 있던 청년들의 부흥을 꿈꾸다 1919년 3·1만세운동의 실패로 많은 청년들이 낙심하며 실의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안동의 3·18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주도했던 안동교회는 주민들에게 새로운 대안으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경공부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우고, 절망에 빠진 청년들에게 소망을 주는 종교로 기독교가 인식되면서 의식 있는 청년들이 당시 안동읍 유일한 교회인 안동교회로 모여들게 되었다. 그 결과 1919년 9월 안동교회에서 안동기독교청년회 창립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다수 회원들이 비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신앙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인해 신앙에 기초한 청년회 조직을 새롭게 구상하게 되었고, 기독청년면려회(C.E.)가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안동선교부 주재 안대선 선교사는 기독청년면려회가 이에 가장 부합하는 청년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라는 목표를 가진 기독청년면려회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관한 책자를 홍콩으로부터 입수해서 번역하고, 그 지침에 따라 안동교회 청년회에서 도입하게 되었다. 이후 1921년 2월 당회의 허락을 얻어 한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당회장은 안동교회 동사목사인 권찬영 선교사였으며, 이대영 목사는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막 부임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대영 목사는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의 출범에 가장 앞장서서 중요한 결정을 이끌었던 것이다. 기독청년면려회는 태동 이후 빠른 속도로 전국에 확산되어 1921년 6월 안동교회에서 경북연합대회가 개최되었다. 1921년 제10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안동의 청년면려회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전국교회에 면려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함으로써 1923년에는 전국에 약 200여 교회에 기독청년면려회가 조직되게 되었다. 급기야 1923년 8월에는 조선연합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기독청년면려회는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기독청년면려회는 오늘의 청년회전국연합회, 남선교회전국연합회로 이어져오고 있으며, 해방 후 고등CE, 청년CE, 장년CE로 분할되었으며 오늘의 고등부, 청년회, 남선교회 전국연합회로 발전했다. ▲1954.4.22안동교회에서 제 5차 기독청년 면려연합회 전국대회 6. 이대영, 다음세대의 주역인 주일학교를 활성화하다 이대영 목사는 1921년 1월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21년 2월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22년 5월 중까지 교회를 섬기다가 사임하였다. 비록 1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대영 목사는 수려한 외모와 인격적 호감, 각별한 사역의 헌신으로 초기 안동교회가 든든히 서 갈 수 있는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그가 추구한 사역은 비단 개(個) 교회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성장에 롤 모델(Role Model)이 될 수 있었다. 이대영 목사가 각별히 관심을 가진 분야는 주일학교였다. 안동교회는 1921년에 접어들면서 주일학교 조직을 체계적으로 갖추기 시작했다. 안동교회의 주일학교 조직을 갖추고 교사들을 임명한 것은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였다. 그러나 이대영 목사는 주일학교 조직을 보안하기 위해 1921년 5월 제67회 당회에서 교사를 새롭게 임명하였다. 또한, 1922년 1월 30일에는 어린이들이 모이는 소아회가 운영되는 안기, 동부, 성내교회 등 3개 처소에 칠판과 분필을 보내기 위해 헌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대영 목사는 자신이 담임으로 있는 안동교회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안기, 풍기의 동부교회와 성내교회 등을 후원함으로써 안동지역의 전체에 걸쳐 어린이 부흥에 힘썼던 것을 알 수 있다. ▲제 1회 주일 학교대회(1928년) 7. 이대영, 전국적인 부흥사경회 강사로 사역하다 안동교회 당회록에 따르면 이대영 목사가 안동교회에서 시무하는 14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전국 각지를 방문하며 부흥사경회를 인도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의 여러 교회는 이대영 목사를 부흥회, 사경회, 훈련 등 강사로 줄이어 초청하였다. 당회록에 기록된 첫 번째 초빙은 1921년 3월 29일부터 4월 6일까지 대구에서 갖게 되는 여 도사경회(都査經會)에 강사로 초빙 받았다. 그러나 3월 20일부터 이미 안동교회에서 부흥회를 결정했기 때문에 초빙에 응할 수가 없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중평교회, 웅천교회, 천촌교회(경주군 서면), 경남 함안읍교회, 상주읍교회 등의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이끌었다. 또한, 전주군교회, 동산신명학교, 양림교회(전라도 광주), 남문외교회, 만촌교회, 하회교회, 대구지역 도사경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등 그는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부흥강사였다. 이대영 목사는 평균적으로 한 달에 한번 꼴로 일주일 정도의 부흥집회 강사로 출타하였다. 그는 안동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강사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8. 이대영, 경안노회 창립회원이 되다 1907년 조직된 독(獨)노회는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세워지기까지 사실상 총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독노회가 조직된 이후 한국교회의 교세는 날로 부흥되어 독노회 산하에 경기, 충청(경충), 평북, 평남, 황해, 전라, 경상, 함경 등 7대리회(代理會)를 조직하여 각 지방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후 1911년 독노회에서 1912년에는 7대리회를 노회로 승격시켜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1911년 12월 부산진 예배당에서 경상노회가 조직되었다. 또한, 1916년 제5회 총회에서는 경상노회가 헌의한 노회분립안이 가결되어 경상노회를 경북노회와 경남노회로 분리하기로 결의하였다. 1921년 제10회 총회는 경북노회와 경안노회의 분립을 결의했다. 총회에서 정한 노회 경계선은 안동군, 영주군, 봉화군, 청송군, 의성군, 영양군, 예천군, 상주군, 영덕군 및 문경군 일부지역이 포함되었다. 경안노회는 조직회장인 권찬영 선교사의 소집으로 1921년 12월 경안성서학원 전신인 안동 여성경학교에서 개회되었다. 당시 경안노회의 한국인 목사회원은 김영옥, 이대영, 강석진 목사였고, 선교사 회원은 권찬영, 인노절, 안대선이었다. 그리고 장로회원은 신택희 외 22명이었다. 개회 후 임원이 조직되었는데 투표결과 회장 김영옥 목사, 부회장 권찬영 선교사, 서기 강석진 목사, 부서기 이대영 목사, 회계 조학규 장로, 부회계 인노절 선교사가 피선되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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