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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2)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 (Chase C. Sawtell, 1881-1909) 목차 1. 서론 2.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3.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4. 소텔 선교사의 소명(召命) 5. 소텔 선교사의 성품(性品) 6. 소텔 선교사의 파송(派送) 7. 소텔 선교사의 사역(使役) 8. 소텔 선교사의 순교(殉敎) 9.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10. 캐더린 선교사의 특별한 공헌(貢獻) 11. 결론 4. 소텔 선교사의 소명(召命) 1880년대 말에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구(舊)학파의 신학 경향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프린스턴 신학교와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이었다. 구학파는 원죄를 인정하고 회심이나 중생이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이라고 하는 은혜의 교리를 견고히 지키려 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칭의 교리를 굳게 붙잡고 있었다. 당시 뜨거운 전도 열정을 갖고 미국과 영국을 누비면서 사역하던 복음전도자 무디(D.L. Moody)는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고수하던 미국 장로교회 구학파의 신앙유산을 공유하고 있었고, 당시 미국 청년들에게 선교사의 소명을 불어넣은 주의 종이었다. 따라서 선교 초기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파송된 선교사들, 선교를 위해 동역한 많은 사람들은 무디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9년 9월, 소텔은 네브라스카 주 소재 밸리뷰 대학에 입학했다. 그가 입학한 기독교 대학인 밸리뷰 대학교도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대학이었다. 밸리뷰 대학에서 소텔은 자치활동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로티-퍼스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대학 토론 클럽에서도 활동했다. 또한 1902년에는 운동에 관심을 갖고 미식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이처럼 소텔은 대학 시절 활발하게 친구들을 사귀며 리더십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소텔의 대학 시절 중 가장 중요한 활동은 YMCA에서였다. YMCA는 소텔에게 선교사적 소명과 비전을 심어준 공간이었다. 1890년대 말 미국 YMCA는 해외선교에 큰 관심을 갖고 깊이 동참하고 있었다. 소텔이 직접 작성한 선교사 지원서에 따르면 19세인 1900년부터 선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기록됐다. 여러 문헌을 검토한 결과 소텔은 두 가지 이유로 해외 선교사로 지원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밸리뷰 YMCA에서 받은 소명이다. 또한, 1904년 모친인 제시(Jessi)의 죽음도 소텔에게 선교를 결심하게 한 큰 요인이었음이 지원서에 기록되어 있다. ▲1902년 당시 밸리뷰 대학의 풋볼 팀 사진. 1898년부터 1916년까지 7번이나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강팀이었다. 5. 소텔 선교사의 성품(性品) 소텔은 매사에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기쁜 마음으로 선교사역을 준비했을 것이며, 선교사로 파송 받은 한국에서도 열악한 환경을 인내하면서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사역을 잘 감당했을 것이다. 특히 소텔은 온화하고 친절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 신학교를 다닐 때 학비를 벌기 위해 양로원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노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무엇이든지 도와드려서 칭찬을 들었다. 이와 같은 그의 따뜻한 성품은 선교지에서 동료 선교사들을 대할 때도 잘 드러났다. 그는 대구선교부에 있던 선배 선교사들에게 호감을 주었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소텔의 대학생활 모토는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으로 이 생각은 선교사로 내한할 때도 동일했다. 그는 이 모토를 정할 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했을 것이다. 소텔은 이 모토를 늘 기억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준비하고, 믿음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또한, 신장이 6피트(약 183cm)이며 갈색 눈에 코가 곧게 솟았고, 중간 크기의 입에 턱이 뾰족했던 그는 돋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내적인 품성과 외적인 모습을 가진 소텔 선교사는 늘 기쁘고 즐거운 성격을 가진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특히 1908년 안동선교부의 신설이 결정되었을 때 안의와 선교사는 자원하여 사역할 선교사를 찾았다. 이때 소텔 선교사는 스스로 안동선교부로 갈 것을 결심했다. 소텔 선교사는 대구선교부에 도착하여 어느 정도 환경에 익숙해질 즈음인 1년 후, 정말 떠나기 힘든 시간에 스스로 안동으로 떠날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당시 대구 선교부에는 여러 명의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었지만, 대구보다 열악하고 불확실한 땅인 안동에서 사역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소텔 선교사는 하나님의 일이라면 환경과 조건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는 결단의 사람이었다. 6. 소텔 선교사의 파송(派送) 1904년 5월, 밸리뷰 대학을 졸업한 소텔은 동년 9월 오마하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에 졸업하였다. 신학교 재학 시절 소텔은 3개 교회를 섬김으로써 목회자로서 필요한 자격을 갖추는 데 열심을 다했다. 목회 현장인 지역교회에서 목사로 임직을 받기 위한 과정을 잘 소화하고 훈련받은 소텔은 오마하 신학교를 졸업한 1907년, 네브라스카 대회 소속 베네치아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대학교 1학년 때인 1900년 이미 선교사 소명을 받은 소텔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던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이 유일한 그리스도가 되심을 전하고 싶어 했다. 처음에 소텔은 남아메리카의 푸에르토리코에서 사역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자신의 뜻과는 전혀 다른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텔은 기쁜 마음으로 한국으로의 파송을 받아들였다. 오마하 신학교 친구인 레이놀즈에 따르면 1907년 6월 어느 날 오후, 레이놀즈가 소텔을 만났을 때 “어떻게 조선인을 전도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소텔은 주저하지 않고 웃으면서 “나는 조선인을 사랑하겠노라(I am going to love them)”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1907년 5월 29일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뉴욕 본부 사무실에서 열린 제10차 연례 신임 선교사 대회에서 소텔은 한국으로 파송 받은 신임 선교사 6가정(8명) 중의 한 선교사였다. 이후 소텔 선교사 부부는 내한하기 위해 오마하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여권을 발급받은 지 일주일이 지난 9월 24일, 소텔 선교사 부부는 다른 세 선교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출발하여 임지인 한국을 향했다. 약 22일간의 항해 끝에 10월 16일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소텔 선교사는 한국에 도착 이후 얼마 동안은 임지를 배정받지 못하고 있다가 미국 북장로교 대구선교부에 배속되어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07년 9월 소텔이 한국에 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작성한 여권신청서.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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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기총, 광복 74주년 ‘8·15 나라사랑 구국기도회’ 성료김승학 목사 · 김운성 목사 초청 강사로 “신앙의 순수성과 거룩성 회복하자” 강조 ▲말씀을 전하고 있는 김운성 목사 경북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정우 목사)가 주최하고 경북 23개 시·군연합회가 후원한 ‘8·15 나라사랑 구국기도회’가 8월 12일 안동교회(김승학 목사 시무)당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이번 행사는 찬양과 특강, 예배, 구국기도회 등 4부로 나눠 진행됐으며, 현재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상황들을 기도 제목으로 놓고 600여 명의 참석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기도했다. 1부 찬양에 이어 2부 특강은 안동교회 김승학 목사가 ‘안동지역 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제로 강연했다. 김승학 목사는 ‘신사참배와 장로교회, 신사참배 거부운동, 경안노회의 신사참배 회개와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취소’ 등에 대해 설명하고, “일제 치하에서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하신 분들을 존경한다”며 “한국교회가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하고 신앙의 순수함을 회복해 새롭게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3부 예배는 대표회장 이정우 목사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서울 영락교회 김운성 목사가 ‘선지자가 먼저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다. 김운성 목사는 “적이 누구인지 알아야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며 “시대를 하나님의 눈으로 해석해 주는 일이 교회의 사명이다”고 말했다. 또 “거룩함이 남아있는 한 그 사회는 희망이 있다”며 “어려운 결말이 온다 하더라도 한국교회가 시대를 향한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자”고 권면했다. 4부 구국기도회는 ‘북한구원과 탈북자와 지하교회를 위해’, ‘대통령과 위정자를 위해’,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등의 기도제목으로 기도했으며, 참석자 전원은 ‘동성애 반대’,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헌법개정 반대‘ 등의 구호를 함께 제창했다. ▲경북기독교총연합회 주최 ‘8·15 나라사랑 구국기도회’가 8월 12일 안동교회당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사진=이예진 기자)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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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2019 열방의 빛 선교대회’ 개최▲‘2019 열방의 빛 선교대회’를 인도하고 있는 안동교회 김승학 목사.(사진=임만조 장로) 안동교회(담임목사 김승학)는 지역의 복음화와 세계선교의 비전을 공유하고자 지난 8월 5일~7일까지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를 주제로 ‘2019 열방의 빛 선교대회’를 개최했다. 올해로 5회째를 맞는 이번 선교대회는 3일 동안 다섯 번에 걸친 선교 특강과 저녁집회로 진행됐으며, 특별히 5개 국가의 선교사들이 강사로 초청돼 선교 사역의 비전을 함께 나누며 뜨겁게 기도했다. 특강과 집회에서 이극범 선교사(프랑스), 안승오 교수(필리핀), 조정희 선교사(동북아), 하필수 선교사(우간다), 정용구 선교사(인도)는 강연을 통해 ‘복음에 빚진 자’, ‘네 장막터를 넓히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아프리카 선교의 실제’, ‘위기의 인도, 기회의 인도’ 등을 제목으로 선교의 중요성과 한국교회의 책임감을 강조했다. 김승학 목사는 “이번 대회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지역을 넘어서 세계 열방으로 확산되기를 바라며 다음 세대가 세계 열방을 구원하는 빛이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편, 올해로 교회 창립 110주년을 맞는 안동교회는 교회가 창립된 8월 둘째주간을 기념해 2년에 한번 씩 선교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안동교회는 지난 8월 5일~7일까지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를 주제로 ‘2019 열방의 빛 선교대회’를 개최했다.(사진=임만조 장로) 한상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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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성지 경북도,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식 가져▲경상북도는 15일 오전 10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식을 열어 광복의 의미를 되새겼다.(사진=경상북도 제공) 애국지사, 독립유공자 유가족 등 1,000여 명 모여 광복의 의미 되새겨 경상북도는 15일 오전 10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식을 열어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순국선열들의 거룩한 뜻을 기렸다고 밝혔다. 경축식은 도지사를 비롯해 도의회 의장, 도교육감, 육군제50보병사단장 등 도내 기관‧단체장과 배선두 애국지사(96세, 의성군, 애족장), 독립유공자 유가족, 보훈단체, 지역주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경축식은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동영상 상영, ▲이동일 광복회 도지부장의 기념사 대독, ▲독립유공자 정부포상 전수, ▲국가상징 선양 유공자 표창 친수, ▲이철우 도지사의 경축사, ▲광복절 노래 제창, ▲장경식 도의회 의장의 만세삼창, ▲한 예술단의 경축공연 순으로 진행됐다. 이철우 도지사는 “최근 일본이 우리나라를 수출 절차 간소화 대상국에서 제외함에 따라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로서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위기의 대한민국이 더 큰 도약을 할 수 있도록 경상북도가 앞장서서 주저하지 않고 소신껏 박차고 나가겠다”고 밝혔다. 경축식 행사에 앞서 이 도지사는 행사 참석을 위해 자리한 독립유공자 유가족들과 기관·단체장들과 함께 ‘경상북도 독립운동가 추모비’에 헌화‧묵념한 뒤, 자리를 옮겨 ‘염원의 발자취’ 조형물에 대한 제막식에도 참석했다. 한편,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전국 15,511명 중에서 14.4%에 해당하는 2,232명이 경북지역 출신인데, 17개 시도 중에서 가장 많아 경상북도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성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상북도 내에서는 안동지역 출신이 16.1%에 해당하는 359명으로 제일 많고, 그다음이 영덕(219명), 의성(172명), 청송(114명) 순으로 독립유공자가 많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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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해외 단기선교 대비 … 선교단체 안전간담회 개최여행금지국가 방문 엄금, 현지 관습 및 문화 존중 당부 선교사와 해외 단기선교팀의 안전을 위한 ‘선교단체 안전간담회’가 열렸다. 외교부는 7월 2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2019년도 하계 선교활동 대비 선교단체 안전간담회’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외교부 이상진 재외 동포 영사실장이 주재한 간담회에는 문화체육관광부 등 관계부처와 한국위기관리재단, 한국세계선교협의회 등 7개 선교단체 대표자가 참석해 우리 선교사 및 해외 단기선교팀의 해외 선교활동 시 안전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이상진 실장은 간담회에서 “해외에서 사건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 스스로가 안전 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며 “정부는 재외국민보호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상진 실장은 “해외에서 활동 중인 선교사, 특히 하계 단기선교팀의 안전 강화를 위해 정부와 선교단체 간의 긴밀한 협력과 소통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해외에서 선교 활동을 할 때 현지법을 준수하고 현지관습과 문화를 존중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실장은 특히 ▲여행금지국가 방문 엄금(여권법상 여행금지국가를 외교부장관의 허가 없이 방문할 경우, 1년 이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 대상(여권법 제26조)) ▲선교활동 시, 현지법 준수 및 현지 관습·문화 존중 필요 ▲위험 국가 및 지역 내에서 대규모 선교행사, 거리공연 등 현지 주민이나 폭력적 극단주의 세력을 자극할 수 있는 무리한 선교활동 자제 등을 당부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는 2018년 12월 기준, 국내에서 해외로 파송한 선교사 수를 약 28,0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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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기쁨의교회, “팡팡 프레이즈 페스타” & “헤세드 아시아 for 재팬” 개최▲일본 피아니스트 히데오 코보리 간증&연주회 포스터(포항 기쁨의교회 제공) 포항 기쁨의교회(담임목사 박진석)가 기독교 문화 보급과 한·일 협력 선교를 위해 대규모 축제 및 포럼을 계획하고 있다. 교회는 ‘제2회 팡팡 프레이즈 페스타’를 오는 8월 16일~17일 포항 칠포해수욕장에서, ‘제1회 헤세드 아시아 for 재팬’ 행사를 8월 13일~16일 기쁨의교회 하영인관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팡팡 프레이즈 페스타’는 국내 CCM 가수와 뮤지션들이 출연해 공연을 펼치며 전시회, 강연, 물놀이, 먹거리 부스 등이 준비된 문화축제다. 출연진은 자두, 조성모, Dream Life Classic, 비와이(랩퍼), 샤우트 어게인 등이다, 특히 일본 피아니스트 히데오 고보리의 간증과 연주도 계획돼 있다. ‘헤세드 아시아 for 재팬’은 아시아와 일본 선교를 위한 국제 선교 포럼이다. 메인 강연(박영기 선교사, 오야마 레이지 목사), 특강(탁지일 교수, 길원평 교수, 김승호 선교사 등), 포럼(김산덕, 조남수)이 진행되며, 일본인 배우 미사와 신고의 모노드라마 등이 준비돼 있다. 행사 준비위원회는 두 행사가 “기독교인의 축제를 넘어 시민이 함께 즐기는 명품 문화축제가 될 것”이라며, 아울러 “한·일 간의 깊은 골과 상처를 치유하는 희망의 자리가 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2019 팡팡프레이즈 페스타 인 칠포 포스터(포항 기쁨의교회 제공)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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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최초의 순교자, 소텔 선교사(1)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6)김승학 목사 논문 연재(6)- 소텔 선교사(1)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소텔 선교사 Chase C. Sawtell, 1881-1909) 목차 1. 서론 2.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3.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4. 소텔 선교사의 소명(召命) 5. 소텔 선교사의 성품(性品) 6. 소텔 선교사의 파송(派送) 7. 소텔 선교사의 사역(使役) 8. 소텔 선교사의 순교(殉敎) 9. 소텔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 10. 캐더린 선교사의 특별한 공헌(貢獻) 11. 결론 1. 서론 남북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은 분열된 상태였다. 1865년부터 1918년까지의 미국의 역사는 남북 전쟁 후에 미국 재건이 시작되어, 산업화가 진전된 시대였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많은 노동조합이 탄생했고 파업이 이어졌다. 특히 약 50여 년 동안(1865년~1918년) 유럽을 중심으로 다른 대륙에서 2,750만 명이나 되는 이민자가 미국으로 몰려들어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했고, 캘리포니아주와 같이 개발되지 않은 지역에 다양한 지역사회가 형성됐다.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은 작은 거류지로 이주당했고, 백인 농장주와 목장주의 소유가 되었다. 공장 노동자는 학대와 폭력에 시달렸고, 그것에 수반하여 노동 운동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소텔(史佑大, Chase C. Sawtell) 선교사는 1881년 1월 9일, 네브라스카주 소재 티케이마에서 출생했다. 그는 환경이 좋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의 종으로 불러 선교사로 보내시려고 했을 때 소텔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무조건 순종했다. 네브라스카 주의 밸리뷰 대학을 졸업한 소텔은 오마하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했다. 그해 목사 안수를 받고 파송 받아 1907년 10월 16일 한국에 도착했다. 소텔 선교사 부부는 처음에 대구선교부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여러 면에서 뛰어난 재목이었던 그는 대구선교부에 있던 선교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08년 안동선교부가 신설되었을 때 소텔 선교사는 자원하여 대구보다 열악한 환경인 안동 땅으로 이사했다. 안동선교부의 초대 주재 선교사가 된 그는 헌신했다. 특히 1909년 11월 16일 순교하기 전까지 1년 동안 그를 통해 안동 땅에 의미 있는 전도와 새신자 양육이 이루어졌다. 복음전도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인 양육, 파송, 전도를 통해 안동지역 부흥의 기초를 마련했다. 하지만 소텔 선교사는 풍토병인 장티푸스에 걸려 28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텔 선교사는 무려 109년 동안 한국교회 속에서 잃어버린 선교사였다. 이 글을 통해 우리의 뇌리 속에서 잊혀진 소텔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소텔 선교사의 가정(家庭) 소텔 선교사는 1881년 미국 네브라스카주 티케이마에서 출생했다. 소텔의 아버지 해리 소텔은 두 번째로 결혼한 제시 소텔과의 사이에서 소텔 선교사와 리트를 낳았다. 소텔 선교사의 동생인 리트는 몬타나주 아나콘다 시에서 척추 전문의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텔 선교사의 부친은 1885년, 티케이마 북쪽 실버 크릭으로 이사해서 농사를 지었으며, 이후 오하이오주의 댄빌로 이사해 살았다. 소텔 선교사 부친의 직업은 여전히 농부였는데, 상대적으로 다른 농부에 비해 가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텔 가정은 다시 네브라스카주의 오마하로 이주했고, 그 이후에는 오마하 인근에서 계속 거주했다. 소텔 선교사는 웨스트버지니아, 몬타나, 오하이오, 아이오와주를 전전하다가 오마하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소텔 가정은 믿음의 가정이었다. 비교적 자주 이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착한 지역에 있는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했기 때문이다. ▲위 사진은 소텔 선교사가 어린 시절 출석하고 1907년 9월 한국으로 파송한 것으로 알려진 오마하 제2장로교회의 전경과 예배당 내부 모습이다. 3. 소텔 가정의 신앙(信仰)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한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추적하여 연구하고 있는 손상웅 목사에 의하면 소텔이 최초로 섬긴 교회는 네브라스카주의 티케이마 교회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어렸을 때 소텔은 여러 주(州)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4살 때인 1885년, 소텔의 가정은 실버 크릭으로 이주했다. 소텔은 시골의 작은 교회인 실버 크릭 감리교회에서 1897년 11월, 낙스 본디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당시 실버 크릭에는 장로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가정은 감리교회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소텔은 오마하로 이사한 후에 오마하 제2장로교회를 다녔다. 오마하 제2장로교회는 1888년 오마하 제1장로교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텔 선교사의 부친은 세 차례 결혼한 사람이었다. 소텔 선교사의 모친 제시 소텔은 두 번째 부인으로 좋은 신앙을 갖고 있었다. 소텔 선교사는 좋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 안에서 잘 성장하여 한국으로 파송 받은 선교사로 살다가 안동지역 선교사 중에서 최초로 순교(殉敎)를 당했던 것이다. ▲1917년 3월 11일에 준공된 오마하 제1장로교회의 모습으로 1959년엔 교회 역사상 최고 2,188명이 등록하고 있을 정도로 오마하에서는 최고의 부흥한 교회였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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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말리지역에 ‘모기장’을 후원해요~!▲기아대책 구미후원이사회 주최 ‘기대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는 기아대책 홍보대사 유은성 전도사. 기아대책 구미후원이사회, 유은성 전도사 초청 ‘기대콘서트’ 아프리카 말리지역에서는 전체인구의 70%가 매년 말라리아로 고통받고 있는데, 모기장 보급과 교육을 통하여 발병률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기아대책 구미후원이사회(회장 한상일 목사)는 유은성 전도사를 초청, 지난 6월 30일(주) 금오교회(담임목사 김성호)에서 고통받는 이웃들을 돕기 위한 ‘기대콘서트’를 열었다. 유은성 전도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등의 곡으로 유명한 CCM 가수로, 2011년부터 기아대책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이번 콘서트에서는 말리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대봉사단 정인권 선교사를 통해 현지 사역에 대해 설명 들을 수 있었다. 정 선교사의 보고에 따르면, 말라리아는 쉽게 예방할 수 있는 질병이지만 가난한 나라에서는 예방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아서, 2015년에만 2억 건이 넘는 발병률과 43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바 있다고 했다. ▲모기장을 받고 좋아하는 아이.(사진=기아대책) 이에 기아대책은 국제구호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2012년부터 말리지역에서 말라리아 예방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정 선교사는 “그동안 실시한 방역 및 모기장 설치, 말라리아 의약품 배분 등은 질병 예방에 큰 효과를 보았다”며 “주민들의 신뢰는 곧 복음 전파하기 좋은 관계로 이어지기에 후원자들의 더 많은 관심과 기도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기아대책은 국내 최초의 국제구호 NGO 단체로, 1989년 설립되어 전 세계 54여 개 나라에 500여 명의 기대봉사단을 파견하고 있으며, 국내외 굶주리고 소외된 이웃들의 영적, 육체적 자립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 말리의 아동들과 행복하게 걷고 있는 정인권 선교사.(사진=기아대책)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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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지를 찾아서(11) - 아펜젤러 순직기념관“감리교 최초 선교사 아펜젤러” 아펜젤러(H.G.Appenzeller, 1858~1902) ▷아펜젤러 선교사 소개 아펜젤러 선교사는 미국감리교 선교회에서 한국에 공식적으로 파견한 최초의 선교사이다. 그가 미지의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딘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이었다. 그날 제물포에 들어온 외국인은 아펜젤러 부부를 비롯해 미국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였다.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17년 동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우리나라 신교육의 효시가 된 배재학당을 세워 교육에 힘썼으며 정동제일교회 설립, 독립협회 지원, 신약성경 한글 번역, 지방 순회 전도활동, 종교신문 <죠션 크리스토인회> 창간 등 근대한국사와 기독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그가 1902년 6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향하던 중 어청도 부근에서 선박 충돌 사고가 발생했다. 그는 동행한 조선인 통역사 조한규와 정신여학교 학생을 구출하려고 탈출을 미루고 침몰하는 배에 다시 들어갔다가 결국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순직하였다. ▷아펜젤러 순직기념관 마량은 아펜젤러가 순직한 어청도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로, 선박사고로 생을 마감한 아펜젤러의 숭고한 삶을 기리고자 지난 2012년 순직기념관을 건립했다. 또한, 아펜젤러 선교사를 한국으로 파견한 존 가우처 박사를 기리는 부속관이 있으며 감리교 초기 유물들이 특별 전시관에 전시 중이다. ▲아펜젤러 순직기념관(충남 서천 마량리 소재)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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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4‧끝)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5) 김승학 목사 논문 연재(5)-김점향 권사(4‧끝)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 (1907~1998) 목차 1. 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아기 2. 믿음의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결혼한 여성 3. 안동 3·1 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든 어린이 4. 여자성경학교에서 공부한 교회의 재원(才媛) 5. 성전건축을 위해 쌀 한가마를 헌금한 가정 6. 안동교회 첫 권사 3인 중 한 명 7.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산 증인(證人) 8. 개척교회를 적극적으로 도운 여성 9. 여교역자 복지의 효시인 경안성로원 첫 원장 10. 90년 동안 안동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9. 여교역자 복지의 효시인 경안성로원(慶安聖老院) 첫 원장 경안노회는 복지에 관한 한 국가나 다른 노회보다 앞서간 노회다. 복지에 관한 지대한 관심은 은퇴 여성교역자를 위해 1953년 경안성로원을 설립하게 했다. 경안성로원은 은퇴 여교역자의 생계와 여생을 돌보아줌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성로원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으로는 경안노회와 영주노회에 소속된 은퇴 여교역자로서 경안노회 또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에서 추천을 받아 성로원 이사회의 입원 승낙을 받아야 했다. 현재 운영은 경안노회 보조, 이사의 후원회비, 여교역자회의 후원, 여전도회 연합회와 지 교회에서 보내온 성탄헌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현재 경안성로원에는 5명의 은퇴한 여교역자가 생활하고 있다. ▲경안성로원은 반피득 선교사가 기증한 금곡동 183-1번지 소재 52평의 한옥에서 시작되었다. 이 가옥에는 처음으로 여교역자 4명이 거주했으며, 현재 안동성소병원 신관 입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진의 우측 초가집이 경안성로원 첫 가옥으로 알려져 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경안노회에서는 노쇠하고 병약하며 무의무탁한 은퇴 여교역자들의 노후를 배려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당시 은퇴한 김순애 전도사가 당장 거처할 처소가 없게 되자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경안성로원 설립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53년 제24회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총회는 은퇴 여교역자를 위한 생활관을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1953년 8월 금곡동 183-1번지 가옥에서 경안성로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당시 반피득 선교사가 기증한 52평의 한옥에는 처음으로 여교역자 4명이 거주했으며, 현재 안동성소병원 신관 입구에 위치했다. 1954년에는 2명이 거주했고, 이후 입주자는 김순애, 김정숙, 양정애, 안주봉 등이 있었다. 후에 김구암, 권성찬, 김병규, 윤손흥, 권귀출, 김순교, 문초야 등도 입주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의 기존 가옥으로 인해 성로원 신축건물의 요청은 계속되었고, 1956년 금곡동 138번지에 경안성로원이 준공될 수 있었다. 당시 조운선·설의돈 선교사가 건축비와 운영비를 담당하였고, 안동 선교부, 미국 인디아나교회,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안동교회, 안동동부교회 등이 건축을 위해 후원했다. 1956년 제27회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조운선 선교사를 경안성로원 원장으로 선출했다. 그 후 1978년, 금곡동 180-3번지에 소재한 경안신학원 여기숙사를 매입하여 이전하였다. ▲경안성로원은 성소병원 옆 금곡동 2차선 도로 건너편 주차장인 금곡동 180-3번지에 소재한 경안신학원 여기숙사를 매입하여 이전하였다. 현재 서후면 저전리에 위치한 경안성로원을 신축하여 이전하기 전까지 22년 동안 사용하였다. 김점향은 여기숙사를 구입하기 위해 예전의 성로원과 성로원 소유의 밭을 팔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현재 임만조 장로가 사는 주택은 예전에 성로원 소유의 밭이었는데 임 장로가 구입하게 되었다. 결국 처음의 성로원 가옥과 성로원 소유의 밭을 판 것으로 여기숙사를 살 수 있었다. 이곳은 20여 년 동안 은퇴한 여교역자의 휴식처로 사용되었다. 그 후 2000년 2월 서후면 저전리 292-1번지에 건평 148평 규모의 경안성로원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로원의 원장은 누리는 높은 자리가 아니다. 인내하며 겸손히 섬겨야 하는 가장 낮은 자리이다. 노쇠하고 병에 걸린 여성 교역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점향의 자부인 박춘희 권사(안동교회)의 증언에 따르면 초기 성로원의 재정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기관 등을 방문하여 후원을 받아 성로원을 어렵게 운영하다가 시(市)에서 배급하는 식량을 받게 되어 어느 정도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로원이 설립된 1953년부터 1978년까지는 조운선 선교사가 원장으로 근무했지만 김점향은 실질적인 원장의 자리에 있었다. 김점향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참고 인내하면서 무려 25년 동안 원장으로 은퇴 여교역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김점향과 가까이 살고 있던 임만조 장로는 김점향이 성로원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헌신했음을 기억하고 있다. 임 장로가 1972년 경안여자중학교의 교감이 되었을 때, 성로원 일로 김점향에게 밤낮없이 전화가 왔고 그때마다 옆에 사는 김점향에게 연결해주었다고 한다. 숨기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던 김점향의 통화를 듣게 된 임 장로는 자연스럽게 성로원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1970년대 중‧후반 임 장로는 성로원의 이사로, 또한 이사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힘이 남아있을 때까지 김점향이 붙들고 헌신한 것은 성로원에서 은퇴한 여교역자를 돌보는 일이었다고 임 장로는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께 은혜를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이웃에게 갚는 것이 바로 섬김이라는 사실은, 김점향으로 하여금 무려 4반세기 동안 경안성로원장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했다. 10. 90년 동안 안동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김점향은 교회의 모든 일에 앞장서서 헌신한 분이었다. 그는 맡겨진 일에 적극적으로 임한 인물이다. 일평생 안동교회 여전도회의 중심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주일학교 교사, 부장으로 수고했다. 그는 안동교회의 여러 분야에서 여성 평신도의 리더였다. 또한 그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존경받는 여성지도자였다. “비록 나보다 연배가 20세 정도는 어렸지만 김 권사님을 존경할 만한, 본 받아야 할 만한 영적 어른으로 삼았다.” 한 집사님의 이와 같은 증언은 김점향의 영적 권위와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김점향은 여전도회 회원들에게 있어서 선배나 후배들의 롤 모델이었다. 김점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를 여걸로 기억하고 있다.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기골이 장대했으며, 음성도 우렁차 여장부로서 손색이 없었다는 것이다. 전경상 장로는 김점향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탁월한 여성지도자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청년연합회 활동으로 당시 경안신학원 원장이었던 김기수 목사님께 인사하기 위해 사택에 갔을 때 김점향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인사했을 때 김점향은 “잘하라”라고 격려했는데, 그 말이 어떤 사람의 말보다 존경할 만한 권위와 강한 힘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이유는 김점향에게 지도자로서의 덕망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점향은 교회 안과 밖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남성과 여성에 관계없이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는 잊을 수 없는 여성지도자였다. 아니 그를 굳이 여성지도자라고 국한할 필요가 없다. 그는 안동교회가 낳은 지도자였다. 외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에 처음으로 출석한 1909년 8월 8일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1998년 10월 19일까지 90년 동안 안동교회를 떠나지 않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김점향은 교회에 출석한 이후 90년 중 오랜 세월 동안 안동교회와 경안노회를 위해 헌신한 믿음의 사람으로 남녀 성도 모두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래서 이런 지도자를 안동교회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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