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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안동교회1909년~1952년 예배에 관한 연구(7·끝)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 목사(6대) 시대의 예배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결론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1943년~1952년 (2) 김광현 목사는 부임한 이후 내실을 기하기 위해 먼저 은혜로운 예배를 구상하면서 예배의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순서도 순서지만, 그 순서가 모두 성령과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하고, 거기 진정이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목사는 예배순서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주악→개회선언→강령기원→찬송→교독→기도나 주기도문, 혹은 사도신경(성가대의 아멘 찬양)→성경→찬양→설교와 기도→찬송→헌금→(광고)→찬송→축도→송영. 특별한 것은 봉헌순서가 설교 후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봉헌을 예배 순서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교 후인 예배가 끝나는 시간에 편의상 배치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 목사는 각 예배 순서가 갖는 의미를 그의 자서전 『이풍랑인연하여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바 있다. ① 처음 주악은 성별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되도록 조용한 기도곡으로 예배 분위기 조성에 역점을 두었다. ② 개회선언은 예배에의 부름이므로 그러한 의미가 있는 성구를 낭독했다. ③ 강령기원은 성령강림을 비는 기도인 만큼 기도로도 하고, 성가대에서 거기 해당하는 찬송을 부르게도 했다. ④ 찬송은 대체로 성호를 찬양하는 찬송을 부르게 했다. ⑤ 교독은 그날의 설교와 관련해서 선정하되 교독문을 이용했다. 그리고 한달에 한 번은 십계명을 교독하되 시간이 많이 소요되니까 주문만을 낭독하고, 일반이 각 계명마다 ‘아멘’으로 응답하도록 했다. 나는 이 방식을 신명기 27장에서 배웠다. ⑥ 그다음 기도는 흔히 목회기도라고 하여 목사가 하는데, 나는 종전대로 장로들에게 순번대로 돌려 가며 하게 했다. 장로에게 할 일을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만인제사 정신이 그 이유였다. 시간이 너무 길지 않게 할 것과, 교회를 대표하여 감사와 회개와 간구를 하게 했다. ⑦ 그리고 그날 설교의 본문이 될 성경을 낭독하고, ⑧ 성가대가 특별히 준비한 찬양이 있은 후에, ⑨ 설교를 했다. 그리고 설교자가 기도를 드리고 나면, ⑩ 다 같이 그날 설교 뜻에 따른 찬송을 부른다. 그때 앞에서 기록한 대로 남녀 집사 두 사람이 보자기에 엎인 헌금서랍을 들고, 찬송에 맞추어서 들어온다. ⑪ 목사가 기도하고, 집사들이 헌금서랍을 성찬상 위에 경건히 바친다. 이때 교회에 알릴 말을 한다. 이것은 예배 순서일 수 없으나, 편의상 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주보에 있으므로 요지만 간단히 했다. ⑫ 송영하는 찬송을 부르고, ⑬ 축도를 했다. 축도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에 준해서 했다. 설교 메시지를 실천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성도들에게 성삼위 은혜가 함께 하기를 빌었다. ⑭ 그리고 송영으로 예배를 모두 마쳤다. 결론 본 소고는 1909년부터 1950년대 초까지 약 50년 동안 1909년 8월 둘째 주일 설립된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 예배의 형식, 내용과 순서를 검토했다. 주일오전예배, 주일오후예배, 외국인영어예배, 또한 새벽기도회의 시간과 장소는 오월번 선교사의 부인 새디 선교사와 안동주재 선교사들의 선교 보고와 편지등을 통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지만 예배 순서와 내용을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김광현 목사가 제7대 담임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을 검토하여 제(諸) 예배 순서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1910년대 안동교회의 주일오전예배 시간을 10시 30분, 그리고 오후예배는 2시 30분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예배 순서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찬송→기도→성서봉독→회중의 기도→찬송→성서 교훈→기도→봉헌→찬송 순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예배시간은 정확하지 않지만 수요예배와 새벽기도회도 존재했다. 1920년대 예배는 곽안련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규범』(1922년)이 예배에 영향을 주었다. 주일오전예배 순서는 1910년대의 예배순서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지만 곽안련 선교사가 제안한 축복기도가 마지막 순서로 포함되었다. 주일오후예배와 수요예배 역시 1910년대와 큰 차이는 없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안동교회 주일 오전예배의 경우 비예전적 형식을 탈피하고 본래 장로교회의 예배형식을 회복했을 것이다. 다음은 1930년대 안동교회 주일오전예배순서는 다음과 같다:주악(성가대)→찬송→기도→성경→찬양(성가대)→설교→찬송→헌금→광고→축복→송영(성가대). 1943년 1월 김광현 목사가 7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안동교회 예배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주악→개회선언→강령기원→찬송→교독→기도나 주기도문, 혹은 사도신경(성가대의 아멘찬양)→성경→찬양→설교와 기도→찬송→헌금→(광고)→찬송→축도→송영. 안동지역 선교 초기 예배의 형식과 내용, 시간 등은 늘 제 머릿속에 맴돌 던 주제였다. 하지만 막상 자료를 찾고 발굴하면서 특히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약 30년 동안의 예배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음에 절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1909년대부터 1950년대 초까지 안동교회의 초기 예배, 주일예배, 주일오후예배, 특별예배, 삼일기도회, 새벽기도회 등의 형식, 시간, 내용 등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작은 부스러기 같은 과거의 흔적들을 찾고, 그것으로 당시의 예배를 재구성하면서 과거 없는 현재는 결코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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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안동교회 1909년~1952년 예배에 관한 연구(5)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 목사(6대) 시대의 예배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결론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6대) 시대의 예배: 1925년~1942년 (1) 4년간의 일본 고베신학교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1925년 7월 안동교회 4대 담임교역자로 부임한 박상동 목사는 평양신학교에서 1년 동안 별신학과정 후 목사안수를 받았다. 고베신학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운영한 신학교로 평양신학교의 교과 과정과 흡사했다. 또한 평양신학교에서 1년 과정은 그에게 한국교회의 이해도를 높일 수 있게 했을 것이다. 192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임학수 목사는 1929년 1월, 안동교회 제5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박상동 목사, 임학수 목사와 김영옥 목사는 모두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장로교 예배 신학을 벗어난 적이 없으며, 장로교회를 꾸준히 섬긴 목회자들이다. 당시 여러 교회의 예배순서를 비교 분석한 1930년대 예배의 주된 특징은 다음과 같다. 1)주악이나 성악으로 시작하던 미국 교회형의 주일 예배 순서로부터 점차 묵도를 첫 순서로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묵도는 한국적 예배의 특징이 되었다. 2)기도순서가 다양해지면서 예배의 앞부분에서 공동기도의 성격을 띠던 기도가 평신도가 담당하는 대표기도로 변하였다. 3)설교중심의 예배가 정착되면서 헌금과 광고가 설교 앞부분에 위치하였다. 1) 주일 오전예배 1922년 예배 모범은 선교 50주년을 기념하는 1934년, 약간의 개정을 거친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에도 거의 동일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1934년에 개정된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의 예배 모범에도 주일 예배의 순서는 소개되지 않는다. 1930년대 주일 예배를 소개하는 자료로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 순서에 기초한 1932년의 새문안교회의 주일 예배 순서와 곽안련 선교사의 예배 순서와 비슷한 예전적인 형식을 가진 1934년 소열도(T. S. Soltau)에 의해 소개된 주일 예배 순서가 있다. 1932년 새문안교회의 주일 오전 예배순서는 다음과 같다: 예배사→찬송→기도(장로 송순명)→시편(1편)→성경봉독(장로 송순명)→찬송(성가대)→설교(목사 차재명)→기도(목사 차재명)→연보와 기도→광고→찬송→축복기도. 또한 1935년 1월 13일(주일) 정오 12시에 있었던 평양 장대현교회의 주일 오전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주악(박요한)→찬송(149장)→기도(윤칠삼)→성경(마21:28~32)→광고→헌금(주악)→기도(변인화)→찬양(성가대)→설교(두아들, 남궁혁)→기도(남궁혁)→찬송(1장, 일동)→축복(채필근)→송영. 이 시대 예배는 전주로 시작하여 후주로 끝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새문안교회나 장대현교회는 이전과 는 다르게 이 순서를 포함하고 있다. 전주와 후주는 예배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역할을 했다. 전주 후에는 인도자의 예배의 말씀이 따른다. 그리고 예배의 말씀과 축도는 분명한 구두로 예배의 시작과 마지막을 선언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성가대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성경 봉독과 설교 사이에 성가대의 찬양이 들어가고 설교 후에 설교자의 기도가 따르는 것이 장로교 예배의 특징인데,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주일 오전 예배의 경우 비예전적 형식을 탈피하고 본래 장로교회의 예배 형식을 회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곽안련 선교사가 1920년대 초에 제안한 예전적인 예배 형식이 일정 부분 개 교회에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30년대의 주일 오전 예배 순서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간단한 구도자적 예배 순서는 감소하고, 보다 예전적인 예배 형식이 한국 장로교회에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안동교회의 경우 1920년대부터 1952년까지 안동 성소병원의 간호부장으로 봉사한 사은라(E. J. Sharrocks) 선교사에 의해 1928년 1월, 최초로 성가대를 조직했다. 예배가 성가대의 주악으로 시작하고 마칠 뿐 아니라 성가대의 찬양 순서를 포함한 1930년대 주일 오전 예배의 조건을 안동교회가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의 집회 형식의 예배에서 예전 요소를 갖춘 평양 장대현교회의 예배형식으로의 전환이 보다 용이했을 것이다. 즉 1930년대 안동교회의 주일 오전예배는 앞서 언급한 평양 장대현교회 예배 순서와 비슷한 형식으로 예배드렸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 특별예배 1943년 12월 17일(월) 오후 7시 선교 50주년을 맞이하며 안동교회에서 회집하여 희년 기념 예식을 가졌는데, 순서는 다음과 같다: 찬송→기도→(임학수 목사)→성경(이사야 6:13, 장사성 목사)→주악과 찬양(안동교회 찬양대)→설교(권찬영 선교사)→표창→교회 약사(서화선 목사)→기념사(김영옥 목사)→축사(내빈 주기철 목사, 목사대표 김인옥, 장로 대표 김익현, 전도사 대표 황영규)→찬송(1장)→축도(강성직 목사). 1934년 10월 21일(주일) 선교 50주년을 맞이하여 대구에서는 희년 감사 예배를 드렸는데, 주일에 가진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찬송(137장)→기도→성경(최재화 목사)→찬양(배성야 학생)→연보→광고→찬양(희도 학생)→강도(길선주 목사)→찬송(1장)→축도.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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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안동교회1909년~1952년 예배에 관한 연구(4)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 목사(6대) 시대의 예배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결론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1921년~1925년 초대 김영옥 목사가 사임한 이후 1921년 2월, 안동교회 2대 담임으로 부임한 이대영 목사는 1년 정도 시무하다가 총회 전도국으로부터 파송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중국 산동성으로 출발했다. 이대영 목사가 시무한 기간은 1년밖에 되지 않아 새로운 예배형식을 기대하기에는 무리라고 할 수 있다. 3대 담임으로 부임한 정재순 목사는 약 3년 동안 시무했는데, 그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사역은 전도 사역이었기 때문에 이전의 예배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큰 변화는 없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참고로 이대영 목사와 정재순 목사는 모두 평양신학교 출신이다. 1) 주일 오전예배 1902년 내한한 곽안련 선교사는 1908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 교수 사역을 시작했다. 특히 1916년에는 실천신학 학과장으로 설교학, 설교실재, 예배모범, 목회학, 목회실천 등의 과목을 개설하여 실천신학의 분야를 넓힌 실천신학자였다. 따라서 그가 한국 장로교 예배의 형식과 내용 등에 준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마포 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집회형식의 예배를 청산하고 예배신학에 근거한 예배를 소원하고 있었다. 특히 1919년에 곽안련 선교사는 그의 저서 『목사지법』에서 예배순서의 집례를 평신도가 아닌 목사가 주도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한국장로교회는 1922년에 『예배규범』(Directory of Worship)을 출판하였는데 곽안련은 세밀한 예배지침 사항도 제시했다. 곽안련은 다음과 같은 예배순서를 제시하고 있다. ① 예배는 무리들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할 때 마땅히 마음을 안돈케 하기” 위하여 예배의 선언이나 예배의 부름 또는 예배의 기원과 같은 짧은 기도로 시작하라. 또는 입례송과 같은 찬송으로 시작하는 것도 가하다. ② 칼빈이나 루터가 사용했던 순서처럼 죄 고백의 순서를 가져라. ③ 성경봉독을 하라. ④ 사도신경으로 공동체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기본이나 그 교회가 만든 신앙고백서를 함께 읽을 수 있다. ⑤ 공기도를 하라. ⑥ 찬송이 기도와 강도에 합하도록 택하라. ⑦ 봉헌순서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자세와 준비를 강조하면서 여기서 십일조도 언급되고 있다. ⑧ 봉헌 전후에 봉헌기도를 하라. ⑨ 광고는 예배순서는 아니며, 가급적 간결하게 하고 구두로 할수 있으나 광고판이나 인쇄물로 할 것을 권하고 있다. ⑩ 강도(講道), 즉 설교로 30분 내에 간결하게 끝내라. ⑪ 안수 축복(축도)으로 예배를 마쳐라. 곽안련이 제시한 예배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총설(성경요절이나 기도나 찬송)→자복(시51;32;60;38;102;130;143)→찬송(합창)→예정된 성경랑독→신경(사도신경이나 본교회 신경, 십계명)→찬송(합창이나 별찬송)→강도에 관한 성경랑독→공기도→찬송(합창이나 별찬송)→연보와 연보에 관한 기도→광고→찬송(합창이나 별찬송)→강도→강도 후 기도→찬송(제 1, 2, 3장 중에서)→안수축복→묵상기도(앉은 채로). 그는 서양악기들을 소개하면서 거문고와 같은 한국악기도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한국 전통 리듬 찬송들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금지한 악기는 징과 드럼같이 불협화음을 일으킨다고 생각한 타악기였다. 그러나 곽안련이 소개한 예배 순서가 실제적으로 지역교회들의 주일예배에 널리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특히 1920년대 예배형식과 순서는 192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1회 총회에서 결의된 헌법의 예배모범에 적지않는 영향을 받았다. 이 예배모범은 미남장로교회의 예배모범을 번역한 것으로 비예전적 성격이 강했다. 많은 교회들은 마포삼열 선교사의 집회형식의 예배순서에 따라 주일 예배를 드렸고, 비교적 복잡한 예배형식을 갖고 있던 곽안련의 예배갱신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예배학자들은 평한다. 안동교회 2대 담임인 이대영 목사와 3대 담임인 정재순 목사는 평양신학교에서 곽안련 선교사에게 예배신학을 배웠지만, 당시 장로교 예배를 주도하고 있던 마포 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형식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즉 이대영 목사와 정재순 목사가 시무한 1920년대 초와 중엽까지는 이들이 시무하기 이전의 예배형식과 내용도 거의 동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주일오후예배 안동교회가 창립된 후 10시 30분, 주일오전예배를 마친 후 점심식사 시간을 갖고 곧 이어 오후예배를 드렸을 가능성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즉 1920년대 안동교회는 주일 저녁예배가 아니라 주일오후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전국의 모든 교회가 주일 오후예배를 드린 것은 아닌 것 같다. 곽안련은 주일 오후예배가 아니라 주일 저녁예배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곽안련은 주일 저녁예배를 ‘주일저녁 예배회(禮拜會)’라고 불렀다. 곽안련은 신선한 도전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목사들이 과감하게 주일저녁예배 순서를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30분 정도의 찬양을 강조함으로써 주일 오후 혹은 저녁에 드리는 예배를 찬양예배로 명명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1921년 2월 5일 전국 최초로 안동교회가 공인한 기독청년면려회는 주일오후예배 시간에 시대에 맞는 주제에 관한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처럼 안동교회의 주일오후예배는 곽안련 선교사의 제안대로 다양한 순서를 포함했다. 곽안련은 주일저녁예배를 제안했지만 안동교회는 1920년대 초와 중엽에 여전히 오후시간에 예배를 드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3) 수요예배 곽안련 선교사는 주일 오전과 저녁예배는 강도회(講道會), 즉 설교가 필요한 예배이지만 그 외의 모임은 공부회나 기도회로 정의했다. 그는 이러한 기도회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유익한 기도를 할 수 있는 14가지의 지침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공기도자는 3분을 넘기지 말고, 전체 기도회 시간은 1시간으로 하며, 기도회의 인도는 목사가 단독으로 하지 말고, 장로와 집사들이 인도하는 방안도 검토할 것을 권면했다. 기도회가 잘 운영될 때 교회는 살아움직이는 공동체로서 활성화될 것이며, 교우들이 서로 화목하고 긍정적인 공동체로 변할 것을 강조했다. 삼일기도회는 1시간 내에서 마포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형식과 순서, 즉 찬송→기도→찬송→성경→강도→찬송의 틀을 그대로 유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20년대 중반까지 안동교회는 곽안련 선교사가 삼일기도회 혹은 수요기도회로 부르지 않고 여전히 수요예배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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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안동교회(1909년~1952년) 예배에 관한 연구(2)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 목사(6대) 시대의 예배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결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 1909년~1920년 말(2) 1) 예배형식과 순서(2) 선교 초기 전국 곳곳에 설립된 교회의 예배를 선교사들이 직접 인도할 여유가 없었고, 한국어가 서투른 선교사들이 예배 전체를 인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함께 동역하는 조사들을 교육시켜 예배를 인도하게 했다. 당시 한국인 평신도가 인도한 예배는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예배 순서를 가급적 단순하게 구성하고 진행함으로써 예전적 요소가 충분히 포함되지 않았다. 둘째, 주제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설교가 선교사들에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공부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셋째, 지역에 산재한 교회들이 연합하여 예배를 드렸다. 1887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의 1890~1900년 초 주일 오전예배는 10:30에 시작해 11:30에 마쳤다. 예배 순서는 찬송→기도→성경봉독→전도설교→기도→봉헌→찬송 등의 순서로 매우 간단했다. 이 순서는 마포 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순서와도 흡사한데, 마포 삼열 선교사의 제안은 찬송→기도→성서봉독→회중의 기도→찬송→성서교훈→기도→봉헌→찬송의 순서로, 찬송으로 시작하여 찬송으로 끝났다.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8일(주일) 첫 예배를 드렸는데 매서 김병우를 포함하여 8명이 첫 예배에 참석했다. 첫 예배를 인도한 사람은 안동의 기독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던 매서인 김병우였다. 안동교회의 주일 오전예배, 주일 오후예배, 외국인영어예배, 또한 새벽기도회의 시간과 장소는 오월번 선교사의 부인 새디(Sadie Welbon) 선교사와 안동주재 선교사들의 선교보고와 편지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지만, 예배 순서와 내용을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1900년대처럼 거의 전무하다. 다만 당시 장로교 선교사가 활동했던 지역의 예배 형식과 내용은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마포 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 순서가 초기 안동교회의 예배 순서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 이 시기에는 1911년 가을, 안동교회 초대 담임으로 부임한 김영옥 목사가 안동교회 예배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김영옥은 평양신학교 교수로 사역한 곽안련 선교사에게 사사 받았기 때문에 예배 신학 및 예배내용과 순서 등에 있어서 곽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2) 주일 오전예배 및 오후예배 안동교회의 첫 예배의 형태와 시간에 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새디 선교사의 다이어리와 다른 선교사의 선교편지, 선교보고에 따르면 주일 오전예배, 오후예배, 외국인예배가 존재했다. 특히 주일 오전예배는 10시 30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사료된다. 또 주일 외국인예배, 즉 선교사와 가족들을 위한 영어예배 시작 시간이 오후 4시 혹은 4시 30분으로 추론되는 바, 주일 오후예배는 오전예배를 마치고 점심 식사 후인 1시부터 4시 30분 사이일 것으로 추측된다. 주일 오전예배의 정확한 순서도 찾을수는 없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른 예배원칙과 미국 북장로교 출신 선교사가 인도한 예배순서에 따랐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주일 오전예배 시간은 안동교회가 창립된 지 1년이 지나 ‘ㄱ’자 예배당을 신축하고, 1910년 11월 13일(주일)부터 20일(주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를 초청하여 가진 특별부흥집회 시간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평일 집회는 오전 10시에 속개되었고, 집회 마지막 날인 20일은 주일로 오전 10시 30분에 시작됐으며 만원을 이루어 예배당이 꽉 찼다”는 기록이 있다. 주일 오후예배 시간의 경우, 당회록은 보다 구체적인 예배시간을 추측하게 한다. 1916년 11월 8일 당회록에 따르면 주일 오후 2시 30분에 세례 7인, 학습 5인에 대한 성례식이 있었다. 그 이후의 당회록에도 성례식은 계속해서 주일 오후 2시 30분에 있었다. 세례식과 성찬식만 별도로 가졌기 보다는 오후예배 시 함께 가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1910년대 주일 오후예배시간은 2시 30분으로 적시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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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안동교회(1909년~1952년) 예배에 관한 연구(1)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 목사(6대) 시대의 예배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결론 서론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예배공동체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最高)의 행위이며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행위이다. 사실 예배 없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토저(Aiden W. Tozer)는 인간과 교회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임을 강조한 바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 모여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며 전심(全心)을 바치는 것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예배공동체인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인격적으로 교제한다. 또한 예배 없이는 어떤 믿음도 기대할 수 없으며, 예배가 흔들리면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標識)와 같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귀히 여기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예배드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어떤 경우에도 주일에예배당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해야 했다. 한국교회 성도에게 성수주일은 지고지선(至高至善)의 덕목이었다. 교인이 특별한 이유 없이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치리(治理)를 받을 정도였다. 주일오전예배 뿐 아니라 주일저녁 혹은 오후예배, 삼일기도회, 새벽기도회, 철야 혹은 심야기도회 등 모든 것은 예배로 시작했다. 예배가 교회 모든 사역의 출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 원고는 지난 190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 약 50년 동안 1909년 8월 둘째 주일 설립된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 예배의 형식, 내용과 순서를 증언한다. 예배형식과 순서는 담임목사의 예배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때문에 담임목사의 시무 기간을 기준으로 구성했다. 1) 안동교회가 창립예배를 드린 1909년 8월 8일부터 초대 담임목사가 사임한 1920년 말까지, 2) 2대 이대영 목사와 3대 정재순 목사가 시무한 1921년부터 1925년 5월까지, 3) 4대 박상동 목사와 5대 임학수 목사와 6대 김영옥 목사가 시무한 1925년 7월부터 1942년 12월까지, 4) 7대 김광현 목사가 시무한 1943년 1월부터 주보가 보관되지 않은 1952년까지의 예배를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 안동교회 예배에 관한 기록이나 자료의 부족으로 선교사의 선교편지와 보고서, 예배학자들의 논문과 다른 교회의 예배에 관한 자료들을 분석하여 안동교회 예배를 재구성했다.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 1909년~1920년 말(1) 1908년 장로교선교사 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신설이 결정됨으로써 오월번(吳越璠, Arthur G. Welbon) 선교사는 동역하던 김영옥 조사(助事)와 함께 안동으로 이사했다. 그 후 김영옥은 조사로서 안동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을 다했으며, 안동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김영옥은 1911년 9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赴任)했다. 김영옥 목사와 안동선교부의 선교사들은 안동교회 예배를 포함한 여러 사역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제 안동교회가 창립된 이후 김영옥 목사가 사임한 1920년 말까지 주일예배, 오후예배에 관해 살펴보자. 1) 예배형식과 순서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예배 형태는 구도자(求道者)를 위한 예배였다. 특히 한국인의 첫 예배공동체는 만주에서 시작되었는데,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충실히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 맥킨타이어(John McIntye)와 로스(John Ross) 선교사는 중국과 한국 국경을 넘나들며 문물교류를 하던 청년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만주에서 한국인 첫 예배가 시작되었다. 소위 만주 예배공동체의 예배는 평일 오후에 전도 설교, 저녁에 성경교육, 주일에는 찬송과 기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낮 시간에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복음 전도로 회심자를 얻고, 회심자들을 사경회 형식의 저녁 예배를 통해 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들었고, 마지막으로 등록자들을 부흥회 형식(찬송과 기도 중심)의 주일예배를 통해서 확실한 영적 구원을 체험하도록 도왔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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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행정지도 불공정” … 한교총, 총리 사과 요구“교회가 감염 온상인 것처럼 기독교인 명예 훼손” “강요와 처벌 앞세운 독재적 방식” 우려 ▲한국교회총연합이 지난달 25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코로나19 사태 속에 취해진 정부의 예배 중단 관련 조치를 강하게 비판하며 정세균 국무총리의 사과를 요구했다.(사진=인터넷 캡처) 개신교의 대표 연합기관인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김태영 류정호 문수석 목사, 한교총)이 최근 예배 중단과 관련한 정부의 대응에 크게 반발하며 정세균 총리의 사과와 행정지도 취소를 요구하고 나섰다. 한교총은 지난 25일 성명서를 내고, “지난 22일 몇몇 지역에서 정부가 공무원과 경찰까지 동원해 예고 없이 교회를 방문하고 예배자들을 감시·방해했다”며 “이는 역사상 유래 없는 교회에 대한 불신과 폭력행위”라고 비판했다. 한교총은 “대부분의 교회가 주중 행사와 집회를 중단하고, 주일 예배를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특히, “교회의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 헌혈 캠페인, 예배형식 변경, 자체 방역, 취약계층 지원, 마스크 제작 지원과 대구 경북지역 지원, 작은 교회 후원 등의 자발적 협조를 정부는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더구나 “전국 6만여 개 교회 가운데 집단 감염을 통한 확진자가 나온 곳은 10여 곳 이하에 불과한데 정부는 교회가 감염의 온상인 것처럼 지목해 선한 기독교인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부는 실제 감염 위험이 있는 여타 다른 시설에 대해 관리 감독을 강화하지 않으면서 교회에만 행정지도를 내린 것은 불공정한 공권력 행사”라며 총리의 사과와 취소를 요구했다. 한교총은 “정부가 코로나19 대응에 있어 봉쇄 없이 ‘자발적 참여’와 ‘불편 감내’라는 민주적 방식에서 벗어나 강요와 처벌을 앞세운 독재적 방식으로 회귀하고 있음을 극히 우려한다”고 지적하고, “총리는 교회에 대한 공권력 행사와 불공정한 행정지도를 사과하고,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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