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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선교를 통한 안동지역의 복음화(3)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1. 한국에 세워진 초기 선교병원 2. 안동성소병원의 9개 변곡점 3. 안동성소병원의 시작 4. 안동성소병원의 이름 5. 초기 안동성소병원의 위치 6. 코넬리우스 베이커 기념병원 ............................................. 13. 안동성소병원의 재건축 14. 1960년대~1980년대 안동성소병원 3. 안동성소병원의 시작(2) 3) 안동성소병원의 출범 시기 별리추 선교사가 첫 진료를 시작한 1909년 10월 1일에 안동성소병원이 시작했음은 지금까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별리추 선교사의 아들인 플레처(D. R. Fletcher)의 저서 『십자가와 수술칼』에 따르면 별리추 선교사가 안동에 처음으로 도착한 해(年)는 1910년 2월로 이 연구에 따르면 성소병원의 개원일이 1909년 10월 1일이 될 수 없다. 원래 한국에 도착한 별리추 선교사는 원주선교부로 발령이 났지만, 원주에서 사역할 수 없었던 별리추 선교사는 당시 원주선교부를 책임지고 있던 미북장로교 오월번 선교사가 1908년 설립된 안동선교부로 파송을 받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별리추 선교사도 안동으로 이동함으로써 성소병원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09년 10월에 별리추 선교사는 대구에 있었다는 자료도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안동성소병원의 설립일인 1909년 10월 1일에 별리추 선교사가 안동에 거처하고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에 관한 연구는 보다 정확한 선교보고나 편지 등에 의해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4. 안동성소병원의 이름 성소병원의 이름이 어떻게 성소(聖蘇)로 정해졌을까? 우선 성소(聖蘇)라는 단어는 거룩할 성(聖)과 되살아날 소(蘇)로 구성되어 있다. 즉 성소(聖蘇)는‘거룩한 소생(蘇生)’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성소(聖蘇)’는 병원을 찾은 사람들이 육신적 구원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이루기를 소망하는 선교사가 성소병원(聖蘇病院)이라고 지었을지 모른다. 사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별리추 박사는 처음부터 안동을 선교지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 원주로 파송을 받았지만, 선교지 분할정책으로 원주를 떠나 안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안동에서 성소병원을 시작했다. 2년이 지난 후 별리추 선교사는 안동을 떠나 대구·경북 지역 최초의 서구식 진료소였던 제중원(濟衆院)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제중원은 제2대 원장 별리추 박사에 의해 동산의료원으로 개명하게 되었다. 별리추 선교사는 동산의료원에서 1911년부터 1941년까지 무려 31년 동안 병원장으로 사역을 감당했다. 따라서 뛰어난 실력을 갖춘 별리추 선교사가 안동에 체류했던 2년의 기간은 안동에 있어서는 은혜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섭리 속에 탄생한 안동성소병원의 지나온 모든 세월은 하나님의 은혜였기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성소(聖召), 성소(聖所), 그리고 성소(聖蘇).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인 성소(聖召)에 순종한 별리추 선교사는 한국으로, 원주로, 안동, 그리고 대구로 사역지를 옮기며 의료선교를 감당하였다. 특히 그가 머물러 치료했던 땅들은 질병으로 고통받고 치료에서 소외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위한 거룩한 장소인 성소(聖所)가 되었다. 안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교사들의 임시사택이었던 화성동 151번지, 그리고 현재 성소병원 주소인 금곡동 177번지는 안동뿐 아니라 경북 북부지역의 거룩한 땅, 성소(聖所)가 되었다. 또한, 안동성소병원은 지난 114년 동안 뭇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여 육신을 구원할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함으로 영혼도 소생(蘇生)시키는 성소(聖蘇)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5. 초기 안동성소병원의 위치(1) 안동성소병원이 1914년 병원건물을 준공하여 영구히 자리를 잡기 전까지 안동선교부 초기 선교사 주택은 성소병원의 위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박희곤은 그의 저서에서 “초기 안동성소병원은 한곳에 머물러 진료하지 않고 선교사의 이동에 맞춰 옮겨 다녔을 것으로 짐작된다.”라고 밝혔다. 1) 안동성소병원 최초의 진료 장소:선교사 임시주택과의 관계는 별리추 선교사가 현 안동교회 구내에 있던 화성동 선교사 임시주택에서 진료를 시작함으로 안동성소병원이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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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선교를 통한 안동지역의 복음화(2)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1. 한국에 세워진 초기 선교병원 2. 안동성소병원의 9개 변곡점 3. 안동성소병원의 시작 4. 안동성소병원의 이름 5. 초기 안동성소병원의 위치 ............................................. 12. 애린진료원 13. 안동성소병원의 재건축 14. 1960년대~1980년대 안동성소병원 3. 안동성소병원의 시작(1) 1) 별리추 선교사 안동성소병원이 세워지기 16년 전인 1893년, 안동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다. 부산선교부의 배위량 선교사는 1893년 4월 17일 부산을 출발하여 밀양, 청도, 대구, 구미, 상주, 예천, 안동, 의성, 영천, 경주, 울산을 거쳐 5월 20일 부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복음의 미답지(未踏地)로 남아있던 대구와 경상북도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졌다. 5월 4일 저녁 안동에 도착한 배위량 선교사는 다음날 5일에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의성으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위량 선교사의 발걸음은 안동의 근대화를 위한 첫 발걸음이 되었다. 그가 복음을 전한 이후 안동을 포함한 경북북부 지역에 의료선교, 교육선교, 그리고 사회복지 등이 시작되었다. 1900년대와 1910년대 이 지역의 여러 교회들은 교회 내에서 오늘날 초등학교 수준의 사립학교를 시작했다. 안동교회의 경우, 1911년 여학생을 위한 계명학교(啓明學校)가 출범하여 1935년 초까지 계속 운영되다가 폐교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의 가치관에 기초한 교육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1890년대 말 대구선교부가 세워지고, 1908년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중심인 안동에 안동선교부가 세워졌다. 안동선교부의 설립은 안동에 의료선교사가 올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안동선교부의 첫 의료선교사는 별리추 선교사이다. 그는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으로 독실한 그리스도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부모는 장로교의 본산(本山)인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캐나다에 이주한 농부였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것을 강조했다. 별리추 선교사는 어머니의 말씀과 신앙의 영향에 따라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의료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1906년 25세 때 시카고에 소재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07년 6월, 별리추 선교사는 간단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여 뉴욕에 있는 장로교 선교본부에 짧은 편지를 보냈는데, 선교부가 보내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있음을 밝혔다. 27세의 별리추 선교사를 한국으로 오게 한 것은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롬5:14)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사랑으로 선교사로 지망했고, 가장 좋은 것,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국에까지 오게 되었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2) 한국으로 파송된 별리추 선교사 1908년 3월 2일 미국장로교 해외선교회는 별리추를 선교사 후보자로 지명했고, 1908년 12월 29일 공식적으로 그를 의료선교사로 임명했다. 마침내 그는 1909년 선교지인 한국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1909년 8월 28일 부산에 도착한 그는 곧 바로 선교사들의 모임인 연례선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 연례선교대회에서 별리추 선교사는 원주로 발령을 받았지만 곧바로 황해도 재령의 병원으로 가라는 선교회의 지시에 따라 잠시 재령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 별리추 선교사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여 가정을 꾸렸다. 1912년 내한하여 대구로 파송받은 제시 로저스(Jessi Rogers Fletcher)와 1912년 6월 19일 원두우 선교사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제시 선교사는 아동복지 클리닉과 한센환자를 돌보는 사역에 집중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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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선교를 통한 안동지역의 복음화(1)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1. 한국에 세워진 초기 선교병원 2. 안동성소병원의 9개 변곡점 3. 안동성소병원의 시작 4. 안동성소병원의 이름 5. 초기 안동성소병원의 위치 ............................................. 12. 애린진료원 13. 안동성소병원의 재건축 14. 1960년대~1980년대 안동성소병원 들어가면서 안동시에는 1909년도에 설립된 세 개의 중요한 기관이 있다. 세 개 기관 모두 문을 닫지 않고 오늘에도 존재한다. 우선 안동초등학교는 1909년 5월 9일 사립영가학교와 동명학교를 병합하여 사립안동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현재 시청자리에서 개교했다. 1911년 3월 31일, 공립보통학교가 된 후 1928년 12월 20일, 현재 위치인 남문동 189번지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 번째는 1909년 8월 8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설립된 안동교회이다. 세 차례 교회 위치를 변경한 끝에 1914년 초 오늘의 위치, 화성동 151번지로 이전한 후 109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지막 세 번째 기관은 안동성소병원이다. 안동성소병원은 1909년 10월 1일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료선교사 별리추(鱉離湫, 플레처)가 안동선교부에 부임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그는 성소병원의 초대원장이다. 당시 선교사 임시사택이었던 현재 안동교회 경내에서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하다가 1914년 현재 지번인 금곡동 177번지로 이전하여 109년 동안 한 자리에서 영육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병원으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성소병원의 구관 1층 응급실로 들어가는 출입문 위에는 “하나님은 치료하시고 우리는 봉사한다(God cures, We care.)”라는 문구가 있다. 원훈(院訓)과도 같은 것이다. 이 문장은 직원들이 아무리 수고해도 하나님이 치료하지 않으시면 환자는 회복될 수 없다는 의미로 하나님이 치료자(여호와 라파)되심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1. 한국에 세워진 초기 선교병원 우리나라 근대 병원 설립의 촉매제가 된 것은 1885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개신교 선교사의 인천항 입국으로 시작된 한국선교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복음전파를 목적으로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일명 선교병원들은 일정 지역을 대상으로 선교부(Station)로 지정한 후 주민들에게 진료사업을 시행하다가 점차적으로 병원으로 발전했다. 성소병원 역시 동일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동성소병원의 정관의 제1장 총칙 제1조(목적)는 “본 법인은 의료법에 입각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토대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며 육신의 고통을 제거하며 국민보건을 향상하는 의료사업으로써 복음을 전파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안동성소병원은 처음부터 영혼과 육신을 구원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복음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병원들은 처음에는 행정과 정치의 중심지역에 가옥을 구입하여 진료소로 개조하여 시작했다. 안동성소병원도 이 원칙을 그대로 따라 선교사 임시사택과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 가까이에 있는 가옥을 구입하여 진료소로 바꿔 환자들을 치료하거나 교회 마당에 큰 텐트를 치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하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1909년 경북 안동에 선교병원이 시작하여, 1914년 코넬리우스 기념병원이 세워졌고, 후에 안동성소병원으로 개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진료의사로는 별리추 선교사, 심의도(沈義道, 스미스) 선교사와 백두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백두성은 백태성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백태성은 비록 안동성소병원의 부원장이었지만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성소병원 원장의 직무를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만행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일제는 1943년 선교사들을 강제로 추방시키고 전국에 있는 기독교 학교와 병원을 폐쇄시키기 시작했다. 이 방침에 따라 안동성소병원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안동교회 담임인 김광현 목사가 백태성에게 안동교회 안에 있는 건물을 병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안을 했고, 백태성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백병원 간판으로 안동 최초의 외과병원을 개업하게 되었다. 백태성이 개업한 백병원은 성황을 이루다가 현재 광석동 농협에서 신시장 쪽 인접한 곳으로 이전했다. 2. 안동성소병원의 9개 변곡점 선교병원인 안동성소병원은 한국유교, 불교, 무교의 심장과도 같은 땅인 안동에서 114년 전에 출범했다. 지난 114년의 역사를 통해 안동성소병원은 크게 9개의 변곡점을 통해 부침(浮沈)을 경험했다. 첫째, 1909년 10월 1일은 앞서 언급한 대로 안동성소병원이 시작한 날이다. 둘째, 1914년 첫 병원건물의 신축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에서 최초로 3층 붉은 벽돌의 병원건물이 준공되었다. 셋째, 1927년 의성에 분원(分院)을 설립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다. 넷째, 1950년에 발발(勃發)한 한국동란으로 성소병원 건물이 전파됨으로써 지역 주민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다섯째, 1953년 금곡동에 위치한 경안신학원 입구에 애린진료원이란 이름으로 성소병원이 재탄생한 것이다. 여섯째, 현 병원 위치에 2층으로 병원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함으로써 다시 병원의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일곱째, 1968년 경안노회가 미국선교회로부터 성소병원의 재산권과 경영권을 인수하여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여덟째, 1981년 6월 25일 성소병원은 새롭게 건물을 증축하고 정부로부터 종합병원 인가를 받고 발전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아홉째, 1994년 서울명성교회가 성소병원의 재산과 경영권을 인수하여 건물을 신축하고 의료기자재를 도입하는 등 새롭게 발돋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 소고(小考)에서는 안동성소병원의 시작부터 1980년대 말까지의 역사를 다룰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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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 선교 130주년 기념, 제12회 안동지역 역사포럼경안노회 유지재단과 안동교회(김승학 목사 시무)는 6월 22일 안동교회 100주년기념관 영곡아트홀에서 ‘130년 전(前) 배위량 선교사의 첫 걸음 - 안동지역 근대화의 시작’을 주제로 기독교 역사포럼을 개최했다. 안동교회는 지난 2012년부터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을 통해 그동안 잊혀진 믿음의 선배들과 거룩한 사건들을 발굴하고 조명해 왔다. 이번 포럼은 그 일환으로 배위량 선교사 안동선교 130주년을 기념하고자 마련됐다. 경안노회장 임보순 목사의 기도를 시작으로 황석웅 박사(애명복지교회), 이교남 목사(한국기독교 교회역사 주영연구소), 김승학 목사가 △안동지역 복지 근대화 △안동지역 학원 근대화 △안동지역 의료 근대화를 주제로 발제했다. 첫 발제자 황석웅 박사는 안동지역 복지선교사역을 소개했다. 그는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의 복지선교는 지난 100여 년 동안 경안기독자매원, 신행원, 경안신육원, 경안성로원, 안동복지원, 노인대학과 지역아동센터, 돌보미 사업 등으로 확대했고,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공감하며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국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섬김과 나눔으로 교회가 복지선교의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기독교 사회복지 측면에서 지역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전했다. 두 번째 발제자 이교남 목사는 경안신학원을 통한 학원선교 사명을 조명하며 “경안신학원은 1912년 지역교회를 지도해 갈 여성 지도자를 양육할 목적으로 세워진 여자성경학원에서 시작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폐원되었다가 ‘경안고등성경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교했고, 그 후 ‘경안성서신학원’과 ‘경안신학원’으로 개명되었다”면서 “경안신학원은 지난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을 양육하여 대한민국과 지구촌 곳곳에 파송해온 작지만 강한 선지학교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김승학 목사는 안동의 의료 사역을 소개했다. 김 목사는 “의료선교는 1909년 10월 1일 의료선교사 별리추가 안동선교부에 부임함으로써 문을 연 안동성소병원으로부터 시작됐다”며 “당시 성소병원은 현재 안동교회 내 선교사 임시사택에서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하다가 1914년 금곡동 177번지로 이전하여 109년 동안 한 자리에서 영육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병원으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김승학 목사는 이번 포럼과 관련해 “130년 전 배위량 선교사의 첫 발걸음이 단순히 교회 역사가 아니라 안동의 근대화를 이루는 첫 발걸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면서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이 코로나로 인한 침체를 극복하고 복음의 열정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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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안동교회(1909년~1952년) 예배에 관한 연구(1)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 목사(6대) 시대의 예배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결론 서론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예배공동체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最高)의 행위이며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행위이다. 사실 예배 없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토저(Aiden W. Tozer)는 인간과 교회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임을 강조한 바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 모여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며 전심(全心)을 바치는 것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예배공동체인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인격적으로 교제한다. 또한 예배 없이는 어떤 믿음도 기대할 수 없으며, 예배가 흔들리면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標識)와 같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귀히 여기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예배드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어떤 경우에도 주일에예배당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해야 했다. 한국교회 성도에게 성수주일은 지고지선(至高至善)의 덕목이었다. 교인이 특별한 이유 없이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치리(治理)를 받을 정도였다. 주일오전예배 뿐 아니라 주일저녁 혹은 오후예배, 삼일기도회, 새벽기도회, 철야 혹은 심야기도회 등 모든 것은 예배로 시작했다. 예배가 교회 모든 사역의 출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 원고는 지난 190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 약 50년 동안 1909년 8월 둘째 주일 설립된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 예배의 형식, 내용과 순서를 증언한다. 예배형식과 순서는 담임목사의 예배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때문에 담임목사의 시무 기간을 기준으로 구성했다. 1) 안동교회가 창립예배를 드린 1909년 8월 8일부터 초대 담임목사가 사임한 1920년 말까지, 2) 2대 이대영 목사와 3대 정재순 목사가 시무한 1921년부터 1925년 5월까지, 3) 4대 박상동 목사와 5대 임학수 목사와 6대 김영옥 목사가 시무한 1925년 7월부터 1942년 12월까지, 4) 7대 김광현 목사가 시무한 1943년 1월부터 주보가 보관되지 않은 1952년까지의 예배를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 안동교회 예배에 관한 기록이나 자료의 부족으로 선교사의 선교편지와 보고서, 예배학자들의 논문과 다른 교회의 예배에 관한 자료들을 분석하여 안동교회 예배를 재구성했다.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 1909년~1920년 말(1) 1908년 장로교선교사 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신설이 결정됨으로써 오월번(吳越璠, Arthur G. Welbon) 선교사는 동역하던 김영옥 조사(助事)와 함께 안동으로 이사했다. 그 후 김영옥은 조사로서 안동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을 다했으며, 안동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김영옥은 1911년 9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赴任)했다. 김영옥 목사와 안동선교부의 선교사들은 안동교회 예배를 포함한 여러 사역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제 안동교회가 창립된 이후 김영옥 목사가 사임한 1920년 말까지 주일예배, 오후예배에 관해 살펴보자. 1) 예배형식과 순서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예배 형태는 구도자(求道者)를 위한 예배였다. 특히 한국인의 첫 예배공동체는 만주에서 시작되었는데,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충실히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 맥킨타이어(John McIntye)와 로스(John Ross) 선교사는 중국과 한국 국경을 넘나들며 문물교류를 하던 청년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만주에서 한국인 첫 예배가 시작되었다. 소위 만주 예배공동체의 예배는 평일 오후에 전도 설교, 저녁에 성경교육, 주일에는 찬송과 기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낮 시간에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복음 전도로 회심자를 얻고, 회심자들을 사경회 형식의 저녁 예배를 통해 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들었고, 마지막으로 등록자들을 부흥회 형식(찬송과 기도 중심)의 주일예배를 통해서 확실한 영적 구원을 체험하도록 도왔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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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3·끝)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3·끝) 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13. 안동지역 최초의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 1914 (2) ‘인노절기념성경학교’는 일제 강점기 때는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학교가 폐쇄되었지만, 해방 후에 이원영 목사는 무너진 교회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경안고등성경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교했고, 그후 ‘경안성서신학원’으로 개명되었다가 ‘경안신학원’으로 다시 개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2005년 3월 10일 개교한 경북 북부지역의 유일한 대학원 대학교인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는데, 여자성경학교가 경안대학원대학교의 모체(母體)가 되었다. 비록 경안신학원은 안동이라는 소도시에 위치했지만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진정으로 큰 학교라고 할 수있다. 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공부하고 신학훈련을 받았던 사람들 중 한국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69회에 걸쳐 배출한 경안신학원의 총동문은 무려 1,800여 명이나 된다. 이들은 국내에서, 혹은 세계 열방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동문으로는 배흥직·박승팔·권오현·문은식·김원진(1기), 진정수·이기형·김봉태(2기), 이금석·박명서·김달훈(3기), 임기석·김태환(8기), 조기홍(9기), 김점향·장성덕(10기), 천병선·강태원(11기), 김광식(15기), 김삼환·신종대·장세문(16기), 이광선·조석규(17기), 조준래·이만규(20기) 등이다. 교사로 가르쳤던 사람들 중 이원영, 김광현, 김기수 목사는 교단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신학교에서 수학했던 인물 중 교단 총회장이 된 사람은 이원영, 이광선, 김삼환, 김태영 목사 등이다. 경안신학원은 지금까지 9명의 총회장과 전국적으로 100여명의 노회장을 배출한 명문(名門) 신학원이 되었다. 결론 안동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 땅이다. 베어드 선교사가 탐색을 위한 목적으로 1893년 5월 5일 안동을 방문함으로써 안동 땅에 복음의 씨가 뿌려졌고, 그후에 발생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졌다. 그 후 권서인과 매서인들의 헌신적인 성경판매, 그리고 대구에 주재하던 선교사들의 순회전도는 안동의 복음화를 위한 기경(起耕)과도 같았다. 더욱이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 총회에서 1908년 안동 선교부(Andong Mission Station) 설립이 결정됨으로써 안동지역의 체계적인 복음화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선교를 책임지는 안동선교부의 설립으로 안동지역에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09년 안동선교부 주재 초대 선교사인 소텔의 순교는 안동 땅에서 앞으로 펼쳐질 복음의 개화(開花)를 미리 볼 수 있게 하였다. 더욱이 비교적 다른 지역에 비해 빠른 1911년 11월 16일 한국인 김영옥 목사에게 안동에서 목회 할 기회가 주어진 것과 안동선교부에 속한 선교사들의 헌신 또한 결정적으로 복음전파의 속도를 가속화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안동은 오묘한 섭리 가운데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은혜의 땅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안동 땅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후 얼마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있었던 잊혀지고 잃어버린 거룩한 일들을 최대한 찾아 본 소고(小考)에 기술했다. 특히 본고는 안동 땅에서 처음 발생한 기독교와 관련된 일들을 찾아내려는 작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인 베어드, 비봉·국곡·풍산 등 안동지역의 첫 교회들, 안동지역의 첫 학습자인 홍재삼,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인 소텔, 안동지역의 최초 근대서점인 기독서원, 안동의 첫 근대병원인 성소병원, 안동지역에 건축된 첫 선교사 사택, 안동지역의 첫 한국인 목사인 김영옥(金泳玉), 안동지역에서 최초의 당회인 안동교회 당회, 맥클렁·캐더린·샤록스 선교사 등 안동지역 초기 교회음악 지도자들, 안동지역 최초의 여전도회인 안동교회 여전도회, 그리고 안동지역에 건축된 최초의 신학교인 안동여자성경학교 등으로 그동안 깨어져 단절 상태로 있던 안동지역의 초기 기독교 이해를 위한 작은 작업이라고 사료된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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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2)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2) 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3. 안동지역 최초의 학습자, 홍재삼 4.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 소텔 ............................................... 11. 안동지역 교회의 첫 당회 12. 안동지역 최초의 여전도회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13. 안동지역 최초의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 1914 (1) 1908년 안동선교부가 세워진 후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성경공부 열풍이 불게 되었다. 안동선교 초기인 1910년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영주 내매에서 개설되었던 6일간의 성경공부 모임에 무려 270여명의 남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듬해인 1911년에는 더욱 빈번한 성경공부 모임이 있어, 8차례에 걸쳐 1,340명이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했다. 안동지역의 성경공부는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것을 본 선교사들은 앞으로 지역 교회를 지도해 갈 지도자를 양육할 목적으로 1912년 여자성경학원을 세웠다. 여자성경학원이 먼저 세워진 이유는 당시 교회에서 예배조차 중간에 휘장을 치고 드리고, 정서상 작은 공간에서 남성과 여성이 함께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여성이 여성을 가르칠 수 있는 여자성경학원이 먼저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여자성경학원은 별도로 신축된 건물이 아니라 선교사 사택을 이용하였는데 로드는 마룻바닥에 150명이 앉을 수 있는 규모였음을 밝히고 있다. 웰번 선교사의 부인인 새디(Sadie) 선교사가 1910년 6월 미국에 있는 친구들과 후원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구(舊) 안동교도소에 위치했던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여성을 위해 매주 목요일마다 부인성경공부반이 열렸는데 첫 번째 모임에 무려 75명이 모였지만 진심으로 성경공부를 원하는 사람을 추려낸 결과 25명으로 한 반을 구성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여성성경공부반은 일주일에 두 번씩 웰번 선교사 사택에서 모여 새디 선교사가 월요일에는 젊은 여성반, 목요일에는 중년 여성반을 인도하였다. 특히 1914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한 윈(Winn) 선교사는 보다 체계적이고 확대된 성경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여자성경학교는 1920년 4월 10일 남녀 성경학교로 확대개편 되었다. 이때 윈 선교사는 성경학교의 교장이었고, 당시 안동선교부에서 동역하던 크로더스 선교사와 앤더슨(W. J.Anderson) 선교사는 교사였다. 개교 첫해인 1920년 가을, 비록 독립된 학교 건물은 없었지만 무려 130명이 등록했으며 성소병원 진료실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위생, 산수, 한문, 음악, 개인전도법도 가르쳤다. 안동의 기독교를 흔히 학자들이 ‘성경 기독교’라고 하는데 이것은 1912년부터 시작된 성경학교의 공(功)이 큰것 같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경전(經典)인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대로 살 것을 가르쳤고, 이미 유교의 경전을 배우고 경전대로 살던 안동의 사람들은 이것을 비교적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이런 안동인의 정서와 초기 선교사들이 지향한 성경공부가 절묘하게 일치해 안동에 복음이 순조롭게 정착하는 데 일조하게 된 것이다. 1920년 성경학교가 개원된 후에도 윈 선교사는 교장으로서 학교에 필요한 교사와 생활관 건립을 위해서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1922년 이질로 별세한 후 이 노력은 중단되는 듯했다. 더욱이 윈 선교사의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도 평양신학교 강사로 안동을 떠났다. 이즈음 안동의 교회들은 윈 선교사를 기억하며 성경학교 건물을 건축할 계획을 세우고 모금운동을 하고 있었고, 미국으로 간 윈 선교사의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 역시 이 사실을 알고 미국 교회와 친지들로부터 모금을 해 안동으로 돌아와 성경학교를 건축하게 된 것이다. 학교 이름은 처음에 단순히 ‘성경학교(Bible Institute)’였지만, 새로운 교사와 생활관 건물이 준공된 1925년부터 ‘인노절기념성경학교(Roger E.Winn Memorial Bible Institute)’로 개명되게 되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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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1)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1) 김 승 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3. 안동지역 최초의 학습자, 홍재삼 4.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 소텔 ............................................... 11. 안동지역 교회의 첫 당회 12. 안동지역 최초의 여전도회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12. 안동지역 최초의 여전도회, 안동교회 여전도회 / 1913년 일찍이 부인전도회가 조직되어 있던 안동교회에 1913년 2월 7일 여전도회가 조직되어 1년이 지난 1914년에 다비다회란 이름으로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다가 수개월 후 당회의 허락을 받아 정식 여전도회로 발족했다. 당시 여전도회는 매월 첫 번째 주일 화요일 저녁에 월례회로 모였고, 보통 약 30명 정도가 모였다. 월례회로 모여서는 예배를 드리고 헌금 순서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여전도회 회원들은 주로 개인적으로 전도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특히 1928년 2월 19일 안동교회에서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가 창립되기 전(前) 안동선교부는 이미 경안노회 경내의 여전도회 회원들을 위한 사경회를 1917년부터 매년 개최했다. 1917년 1월 21일 열린 첫 도사경회의 강사는 이희봉 목사와 맥파랜드(E. F. McFarland) 선교사였으며, 회집 인원은 남녀 합하여 230명 정도 되었다. 1년에 한 차례씩 개최된 여도사경회는 보통 1주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안동군부 지역에서는 물론 영주, 의성, 상주, 문경, 예천, 봉화, 영덕, 영양, 청송 등지에서 온 회원들이 성경사경회 기간 동안 먹을 양식을 가지고 와서 숙식을 해결하는 열심이 있었다. 사경회의 강사 중에는 당시 가장 영성이 뛰어난 길선주 목사, 김익두 목사 등이 포함되었다. 도사경회에 참석한 여전도회 회원들은 전해질 말씀의 은혜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기다렸다. 더욱이 도사경회 기간 중 반별로 나뉘어 성경공부한 것과 요절을 암송한 것은 잊을 수 없다고 수차례 경안여전도회 회장을 역임한 고(故) 김점향 권사는 전언한 바 있다. 또한, 사경회 기간 중 안동교회의 여전도회 회원들은 많은 봉사를 통해 경안노회 여러 교회의 본(本)이 되었다. 고(故) 김점향 권사는 1925년경 안동교회 여전도회 회원수가 약 30~40명 정도가 된 것으로 생전에 기억했다. 당시 여전도회 회원 자격은 세례를 받은 여성에 제한했다. 경안노회 여전도회는 창립총회 하루 전인 1928년 2월 18일에 열린 도사경회 때 대구주재 버그만(G. O. Bergman) 선교사가 내안하여 발기회를 가진 것이 여전도회 경안연합회의 시작이 되었다. 당시 발기인으로는 안동주재 크로더스 선교사의 부인인 엘라 맥클렁 선교사, 안동교회를 시무하고 있던 김정숙 전도사, 김향란, 김정희, 안주봉, 김순애 제(諸)씨, 그리고 권신희 집사와 김화석 은퇴 장로의 조모인 권순옥 집사가 포함되었다. 경안연합회의 초대 회장에는 안동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던 김정숙 전도사가 피선되었고, 김향란 부회장, 김정희 회계 등 안동교회 여전도회원이 경안연합회가 창립될 때 산파역을 했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경안연합회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새로 조직된 경안연합회는 교통수단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1930년에 열린 3회 총회에 이미 39지회로 확장될 정도로 성령의 역사와 회원의 열심이 있었다. 오늘날도 2년에 한번씩 1박2일로 열리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총회의 제목은 전통적으로 ‘제OO회 총회 및 도사경회’로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고 있다.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창립 80주년이 되기까지 일제 탄압과 6·25 전쟁으로 총회가 개최되지 못한 두 차례를 제외하고는 78차례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안동교회에서 64회, 영주제일교회에서 6회, 안동동부교회에서 5회, 안동서부교회에서 3회의 총회가 개최됨으로써 안동교회는 여전도회 활동의 산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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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0)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0) 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3. 안동지역 최초의 학습자, 홍재삼 4.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 소텔 ............................................... 11. 안동지역 교회의 첫 당회 12. 안동지역 최초의 여전도회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11. 안동지역 교회의 첫 당회, 안동교회 당회 / 1913년 안동지역에는 안동교회보다 앞서 설립된 교회들이 있었지만, 안동지역 교회 중에서 첫 번째로 당회가 조직된 교회는 안동교회였다. 해방과 6·25 전쟁의 혼란 가운데서도 보존된 안동교회 당회록 제1권의 표지에는 ‘안동읍예수교장로회당회록’라고 쓰여 있다. 다음은 1913년 7월 20일에 있었던 조직당회의 기록이다. 이때 김병우가 장로로 장립함으로써 안동교회 최초로 장로가 탄생하였는데, 그 결과 당회가 조직되었던 것이다. “1913년 7월 20일 주일에 안동읍 예배당에서 남녀 교우들이 모여 예배할 때에 김영옥 목사가 디모데전서 3장 1절-7절과 베드로전서 5장 1절-6절 말씀을 봉독하고 설교를 하고 기도한 후 오월번 목사가 노회의 허락을 의지하여 김병우씨를 장로 장립함을 공포하고 김영옥 목사가 장로와 교우에게 문답한 후 오월번 김영옥 권찬영 목사들이 안수하고 권찬영 목사의 기도로 장로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찬송가 3장을 부른 후 오월번 목사의 축복기도로 폐회하다.” 다음은 안동교회의 역사적인 첫 번째 당회록의 내용이다. “1913년 8월 9일에 안동읍교회 제1회 당회가 오월번 목사 댁에 모여서 김영옥 목사가 오월번 목사를 회장으로 공천하매 회장이 회장석에 앉아 시편 15편을 낭독하고 김병우 장로로 기도케한 후 개회하다. 참석회원은 목사 오월번 김영옥 장로 김병우 제씨더라. 8월 14일에 문답하기로 회중이 가결하고 예배당 건축하기 위하여 수금위원을 남자 12인 여자 12인을 택하기로 가결하다. 회장이 김영옥 목사로 기도하게 한 후 폐회하다. 회장 오월번, 서기 김병우” 그리고 1913년 8월 14일에 있었던 제2회 당회록에는 6인 세례와 3인의 학습을 결의하고 8월 17일 주일 오후 2시에 세례와 함께 성찬을 베풀었는데 성찬에 참예한 수는 66명이었음을 기록하는 바, 이때 당회 조직 후 첫 성찬의 집례자는 초대 김영옥 목사였다. 안동교회가 설립된 후 교회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선교사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회가 조직되자 조직을 위한 당회를 마치고 한인인 담임목사에게 첫 세례식과 성찬식 집례를 양보한 것이다. 이것은 안동에 주재하고 있던 선교사들의 크나큰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과 5일 전에 있었던 안동교회 첫 당회의 회장은 웰번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1902년에 설립된 세 교회 중 비봉교회는 1915년 김충한이 장로로 장립함으로써, 풍산교회는 1920년 정봉모가 장로로 장립받음으로써, 마지막으로 국곡교회는 1923년 김병일이 장로임직을 받음으로써 첫 당회가 조직되었다. 비록 안동교회는 이 세 교회보다 7년 늦게 설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년 혹은 10년 앞서 당회가 조직됨으로써 안동지역의 중심교회로 발돋움하게 되었으며, 지난 100여 년 동안 안동의 중심교회, 그리고 모범적인 당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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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9)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9) 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 10. 안동지역 최초 선교사 사택 11. 안동지역 교회의 첫 당회 12. 안동지역 최초의 여전도회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10. 안동지역 최초 선교사 사택 / 1912년 안동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우선적으로 구입했던 임시주택에서 생활하기에 불편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선교사를 위한 영구주택 건축이 제기되었다. 선교사들은 영구 사택을 건축하기 전까지 임시주택에서 거주했다.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당시 주임선교사였던 웰번 선교사가 선교사 주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작업에 착수했음을 기록한다. 실제로 안동선교부 부지로 금곡동 북쪽 동산이 확정되어 그곳에 선교사 영구사택을 건축하기 시작된 것은 1910년 즈음이다. 안동에 체류하고 있던 존슨(張仁車, Johnson) 의료선교사가 웰번 선교사에게 1910년 11월 26일 쓴 편지에 의하면, 낙동강이 보이는 동산 기슭 앞에 100야드 정도의 새로운 선교센터 부지는 잘 부서진 화강암 토질이고 배수도 매우 좋았다고 한다. 선교부지 동산은 화강암과 모래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지 작업에 공사비가 많이 들지는 않았고, 작업이 마쳐졌을 때 안동의 서쪽 끝에 좋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1910년 10월 24일 재령에 있던 파이팅(黃浩里, Whiting) 의료선교사가 쓴 편지도 안동 선교부 부지가 비록 3개의 가파른 언덕 때문에 처음 봤을 때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지만, 땅을 고르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기 때문에, 또 서울과 청주로 가는 길목이 있는 도시인 안동의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아주 좋은 위치가 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초기 안동선교 보고에 따르면 금곡동 선교사 영구사택은 1910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에비여사의 글에 따르면 1910년 10월 24일 지부를 세울 대지를 구획, 땅을 고르기(grading) 시작했음을 밝힌다. 선교사 사택 건축을 위해서 프로덕트 앤 갬블 회사의 갬블(Gamble)이 선교부지 비용과 사택 한 채의 비용을 후원했고, 밀턴 씨도 사택 한 채의 비용을 후원했다. 이런 후원으로 1911년 여름에 두 채의 집 공사가 들어갔고, 한 채는 그해 12월 27일 웰번 선교사 가족이 입주했다. 다른 한 채는 1912년 5월에 완공됐다. 1913년에 주택 두 동을 더 지어서 완공했고 이 주택에는 크로더스 선교사와 스미스 선교사가 입주했다. 1913년까지 네 채의 선교사 사택이 지어졌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졌고, 6·25 전쟁 후에 건축된 존슨(趙雲仙, Johnson) 선교사의 사택이 보존되어 경안고등학교 역사자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동에 체류하고 있는 웰번 선교사의 부인인 새디(Sadie) 선교사가 1910년 10월 25일 쓴 편지에 따르면, 웰번 선교사는 선교사 영구주택에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 위해 낙동강 상류로 80리 길을 3일 동안 집을 떠나야 했고, 선교사 주택건축을 위해 25명의 일꾼이 함께 일했지만 작업이 너무 더디게 진행돼 갬블(Gamble) 선교사가 염려하기도 했다. 또한, 안동교회 80년사는 4차례에 걸쳐 건축된 5채의 선교사 사택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들 선교사 사택은 한옥이 아니라 철저히 그들의 생활에 맞춘 서양식 건물이었다. 화장실도 재래식 화장실이 아니라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그 당시에는 상수도 시설이 없어서 선교사들은 마당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서 빗물을 받아 그 물을 화장실과 정원에 사용했다. 건물의 난방은 방안 화덕을 사용했고, 건물의 벽이 두껍기 때문에 튼튼하고 방풍과 방음도 우수했다. 이렇게 하여 4채의 선교사 사택, 성소병원과 안동교회가 500미터도 되지 않는 공간에 함께 위치함으로 안동의 한쪽에서 근대의 바람이 서서히 불고 있었고, 이들 근대식 건축물들은 안동지역의 건축과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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