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내매교회, 강신명 목사 사진전과 강진구홀 기공식 열려영주 내매교회(담임목사 윤재현)는 지난달 27일 ‘제3회 내매사람들 모임’ 및 소죽 강신명 목사 사진전과 강진구홀 기공식을 지역 목회자들과 출향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었다. 예배 설교는 산본교회 강윤구 원로목사, 기도 내매사람들 회장 배재호 장로, 축사 영주노회장 강성효 목사(장수교회)가 맡았다. 강신명 목사 사진전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강 목사의 신앙의 발자취를 재조명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아버지 강병주 목사는 한국교회의 농촌운동을 시작했고 그의 동생 강신정 목사는 기장 측 68대 총회장이었다. 한편, 내매교회는 삼성전자 강진구 장로를 기념하기 위해 봉사관 이름을 강진구홀이라고 지었다. 이 행사를 주관한 윤재현 목사는 “강신명 목사, 강진구 장로 두 분의 이름을 교회 본당과 식당 이름으로 지을 수 있어 영광”이라며,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들이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민족과 함께”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대구·경북장로회 친선교류회’가 지난 3일(토) 오전 11시 장천교회(신성재 목사 시무)와 구미 산동면 에코랜드(생태 숲) 일원에서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대구장로회(회장 최자화 장로)와 경북장로회(회장 김석삼 장로)는 매년 대구와 경북을 오가며 친선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경북장로회 주관으로 열린 이번 행사는 특별히 장천교회(예장통합)에서 흔쾌히 예배당을 행사 장소로 허락해주어 더욱 폭넓은 교류의 시간이 됐다. 행사에 앞서 예배는 손현진 장로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최자화 장로의 기도, 황호용 장로의 성경봉독, 군위중앙교회 김덕수 목사의 “바나바”라는 제목의 말씀 선포, 백성기 장로의 광고 및 친교 진행, 김석삼 장로의 인사 등의 순서가 있었다. 장 회원들은 오후에는 에코랜드 생태 숲으로 장소를 옮겨 아름다운 단풍길을 산책하면서 서로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는 등 친목의 시간을 가졌다.
-
순교지를 찾아서(6)-김제 만경교회▲김제 만경교회 순교기념비 ▷만경교회 순교 이야기 1913년 외서리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만경교회는 한국전쟁 당시 김종한 목사와 강성진 장로를 비롯한 15명의 성도들이 교회를 지키고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반공혁명단’을 만들고 인민군에 저항하다 순교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과 좌익세력들은 김제와 만경 일대를 장악했으며 예배당을 점거하고 예배를 방해했다. 1950년 9월, 이들의 탄압에 맞서기 위해 만경교회 최정렬 성도를 주축으로 기독청년들은 비밀결사대 ‘반공혁명단’을 조직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 단체가 발각됐으며 인민군은 청년들을 잡아갔다. 또한, 반공혁명단의 책임을 물어 김종한 목사, 강성진 장로 등 교인 10명도 체포해갔다. 가혹한 고문 후 9월 27일 0시, 인민군들은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잡혀간 성도 10명은 죽창과 총, 칼에 의해 대학살의 순교를 당했으며 마을 우물과 방공호에 매몰됐다. 전주형무소로 끌려갔던 5명의 청년들도 싸늘한 주검이 되어 그곳에서 발견됐다. 당시 교인들과 끝까지 함께한 김종한 목사는, 위급한 상황에서 잠시 몸을 피할 것을 권하는 교인들에게 “목사가 양들을 버리고 어딜 가겠습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시다”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다. 만경교회 순교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종한 목사 강성진 장로 강춘길 이남근 최남인 최정렬 유상덕 이정순 곽옥정 유금식 송은숙 송창호 고동순 이옥진 곽병일 (이상 15명) ▷순교사적지 지정 만경교회는 예장합동 102회기 총회에서 순교사적지로 지정됐으며, 지난 3월 29일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제2호 지정 감사 예배가 만경교회(담임목사 전철희)당에서 열렸다. ▲예장합동 총회는 지난 3월 29일 만경교회에서 총회역사위원회 주관으로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제2호 지정식을 갖고 현판을 부착했다.
-
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1)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들어가면서 안동교회 제4대 담임목사(1925~1928)로 시무한 박상동(朴尙東, 1894~1949) 목사는 아버지가 목사였고, 목사의 아들을 두었으며, 한국교회에서는 단 한 자릿수에 불과한 직계목사 손자를 둔 4대 목사 가문(家門)의 중심이었다. 그의 조부(祖父)·부친(父親)뿐 아니라 그 역시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래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6개월의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극일(克日)하기 위해 박상동 목사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일본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4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며 오사카와 고베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교포를 위해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귀국한 후 안동교회를 섬기면서 전도, 사회봉사, 교회조직의 변화, 다음 세대의 신앙교육 등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의 헌신을 통해 안동교회는 새롭게 리모델링(Remodeling)되어 시대에 맞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상동 목사는 이민자의 삶의 고단함과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안동교회 사역을 중단한 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와 나고야, 그리고 인근 지방의 복음화와 교회개척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당시 한국과 재일교회를 위한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제 말엽 그는 교포들의 인권개선노력과 민족독립운동의 죄목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생사(生死)의 고비에서 해방과 함께 석방되어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끝없는 복음의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상동 목사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초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등에 십자가를 지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성도와 자녀에게는 인자하고 겸손한 목사요 아버지였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자식들에게 사랑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이 글은 박상동 목사의 일생을 기록한 소고(小考)이다. 하지만 이 글에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믿음의 가문, 믿음의 사람의 거룩한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독립운동가요, 복음전도자요, 교육자요, 아버지요, 음악을 좋아한 사람이요, 목사요, 인격자인 인간 박상동을 감사한 마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만나보자. 1. 마태복음 1장의 ‘낳고, 낳고, 낳고’를 재현(再現)한 가정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그 족보는 아담에서 시작하지 않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박상동 목사 집안도 초창기 한국교회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명문가문이다. 1) 1대 박영화 목사박상동은 1894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에서 박영화(朴永和, 1859~1923)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박영화는 1902년경에 김인옥, 이성준의 전도를 받고 전 가족(부친인 박용한과 3남 8녀)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군위군 호암교회에 출석하다가 다음 해인 1903년 쌍계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는 특별히 교육에 관심을 갖고 1910년 농촌지역 복음화와 인재양성을 위해 쌍계교회에 정림학교(1920년 폐교)를 설립하여 운영한 명망 있는 지역의 지도자였다. 이런 박영화는 1914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제11회로 졸업하고 동년 6월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쌍계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그는 1919년 3·1 의성 만세운동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경남 거제시 사능교회 초대담임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박영화 목사는 거제도와 통영 등 경남지역 초기 교회의 존경받는 목회자로 자리매김하였다. 2) 2대 박상동 목사이러한 신앙적 분위기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박상동은 아버지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대구 계성학교 출신으로, 부친과 함께 3·1 만세운동의 옥고를 치른 후 일본 고베에 있는 칼빈계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1925년 귀국하여 안동교회 강도사로 부임하였다. 박상동은 안동교회 강도사로 시무하면서 평양신학교에서 별신학(別神學) 과정 1년간을 수학하였다. 박상동 목사는 1926년 9월 경안노회(제11회)에서 목사안수 후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885년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41년 만에 직계(直系)로 부자(父子)가 목사 임직자가 됨으로써 아버지, 아들 목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3) 3대 박대선 목사경북 의성군 비안면에서 박상동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한 박대선 목사(1916~2010)는 1940년 일본관서학원대학교 영문과와 1942년 동 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미국 보스톤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전공으로는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니시노미야시 한인교회의 담임전도사로 사역했으며, 귀국하여 1942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 창광산교회, 박구리교회, 중앙교회, 서평양교회 등을 섬겼다. 박대선 목사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성화신학교 교장대리 역임,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역임, 1959년부터 1962년까지는 서울 광화문감리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했다. 특히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연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다가 3선 임기 중 저항 운동에 나선 교수의 복직을 반대하던 당시 정부와 심한 불화를 겪다가 사임하였다. 4) 4대 박태기 목사박대선 목사의 차남인 박태기 목사는 공학박사로서 KIST의 책임연구원으로 있다가 소명을 받고 감신대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었다. 중진 과학자로서 인정받고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일생의 여름과 같은 때에 성직의 길에 들어섬으로써 대(代)를 이어 직계 4대 목사 가문(家門)을 이어가고 있다. 2. 애국자 박상동 의성에서 3·1 독립만세가 크게 울려 퍼진 날은 1919년 3월 12일이다. 11일에 의성군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 150여 명이 학교 뒷산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쌍계리에서 쌍계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의 중심인물은 김원휘 조사, 김충한, 쌍계교회 박영달 장로, 박영화 목사, 그리고 대구 독립만세 시위운동(3월 8일)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박상동(당시 대구 계성학교 2학년생) 등이다. 이들은 3월 12일 정오, 박영신의 집 앞에 모인 2백여 명의 시위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이렇게 촉발된 의성지역의 만세시위는 4월 3일 가음면 구천시장의 ‘1인 만세시위’까지 23일간 계속되었다. 이후 박상동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부친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박상동은 함께 의성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정이었다.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박상동은 일본을 올바로 알아야 일본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일본 고배중앙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생활은 고베, 오사카, 교토 등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동포를 위해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는 기간이었다. 졸업 후 1925년 귀국하여 3년여 동안에는 안동교회를 섬겼다. 특히 이 기간에 박상동 목사의 민족의식이 나타난 것은 1928년 3월 경안노회 여전도회 도사경회와 5월 23일부터 1주일 동안 계속된 성경사경회였다. 당시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었던 길선주 목사가 안동을 방문했다. 약 200명이 참석한 성경사경회의 주제는 ‘애굽의 금자탑’으로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는 많은 백성에게 희망을 주었다. 한편, 사경회 기간 중 길선주 목사는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구류 20일 후 출소한 길선주 목사는 예정대로 사경회를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갔는데 이 사건은 사경회에 참석한 교인에게뿐 아니라 주위 교회 성도들에게도 깊은 도전을 주었다. 이후 박상동 목사는 1928년 파송 받아 다시 오사카로 돌아가 순회목사로 교회를 섬기는 일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일제 말엽 박상동 목사는 또다시 투옥되었다. 박상동 목사는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일본 각지를 순회하며 민족의식의 고취,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통치 비판, 기독교도의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반대 등의 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1941년 나고야 동부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박상동 목사는 당시 지역 교회지도자들 10명과 함께 예비 검속되어 체포되었다. 이때 박상동, 추인봉, 김은석 목사도 포함되었다. 투옥된 박상동 목사는 밤마다 구타 등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당했다. 석방과 투옥을 반복하다가 그는 옥중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정부에서는 박상동 목사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의성군 비안면 ‘3.1운동 경상북도시발지 기념공원’에 세위진 기념탑 /논문 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4)- 목사 · 애국자 · 인간 박상동 목사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들어가면서 안동교회 제4대 담임목사(1925~1927)로 시무한 박상동(朴尙東, 1894~1949) 목사는 아버지가 목사였고, 목사의 아들을 두었으며, 한국교회에서는 단 한자리 수에 불과한 직계목사 손자를 둔 4대 목사가문(家門)의 중심이었다. 그의 조부(祖父)·부친(父親) 뿐 아니라 그 역시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래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6개월의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극일(克日)하기 위해 박상동 목사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일본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4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며 오사카(大版)와 고베(神戶)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교포를 위해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귀국한 후 안동교회를 섬기면서 전도, 사회봉사, 교회조직의 변화, 다음세대의 신앙교육 등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의 헌신을 통해 안동교회는 새롭게 리모델링(Remodeling)되어 시대에 맞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박상동 목사는 누구보다 재일교포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민자의 삶의 고단함과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안동교회 사역을 중단한 채 일본으로 건너간 예민한 영성의 사람이었다. 그는 오사카와 나고야, 그리고 인근 지방의 복음화와 교회개척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겼다. 박상동 목사는 현해탄을 넘나들며 한국과 일본에 복음을 전한 위대한 전도자였던 것이다. 그는 당시 한국과 재일교회를 위한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제 말엽 그는 교포들의 인권개선노력과 민족독립운동의 죄목으로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생사(生死)의 고비에서 해방과 함께 석방되어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끝없는 복음의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상동 목사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초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등에 십자가를 지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성도와 자녀에게는 인자하고 겸손한 목사요 아버지였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자식들에게 사랑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이 글은 박상동 목사의 일생을 기록한 소고(小考)이다. 하지만 이 글에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할 믿음의 가문, 믿음의 사람의 거룩한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독립운동가요, 복음전도자요, 교육자요, 아버지요, 음악을 좋아한 사람이요, 목사요, 인격자인 인간 박상동을 감사한 마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만나보자. 1. 마태복음 1장의 ‘낳고, 낳고, 낳고’를 재현(再現)한 가정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그 족보는 아담에서 시작하지 않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비록 아담이 인류 최초의 사람이긴 하지만 범죄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믿음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육신의 족보라기보다는 믿음의 족보요 하늘나라 백성의 계보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 4대 담임목사로 사역한 박상동(朴尙東, 1894~1948) 목사 집안도 초창기 한국교회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명문가문이다. 오늘도 박상동 목사의 가문은 한국교회의 살아있는 믿음의 역사를 중단 없이 써가고 있다. 130년의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현재까지 4대 직계목사 가문을 이어가고 있고, 곧 5대 목사가 배출될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 목사의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목사 아버지는 자신이 겪은 험난한 목회의 길을 자녀들이 겪기를 원치 않을 뿐 아니라 목사 자녀들도 목사 아버지의 좁은 목회의 길을 보며 쉽게 그 길을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상동 목사는 아버지가 걸어간 목회의 길을 걸었을 뿐 아니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목사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1) 1대 박영화 목사 박상동은 1894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比安面) 쌍계리(雙溪洞)에서 박영화(朴永和, 1859~1923)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박영화는 1902년경에 김인옥, 이성준의 전도를 받고 전 가족(부친인 박용한과 3남 8녀)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군위군 호암교회에 출석하다가 그 다음 해인 1903년, 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쌍계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박영화는 1908년 세례를 받았다. 그는 특별히 교육에 관심을 갖고 1910년 농촌지역 복음화와 인재양성을 위해 쌍계교회에 정림학교(1920년 폐교)를 설립하여 운영한 명망 있는 지역의 지도자였다. 더욱이 박영화는 당시 선교사의 조사(助事, Helper)로 활발히 사역한 인물이었다. 경안노회 70년사는 그가 의성 지역의 유력한 조사였음을 밝히고 있다. 더욱이 경상노회록에 의하면 박영화는 쌍계교회 장로로 임직 받고 노회 총대로 참석할 정도로 당시 의성 지역의 교회지도자였다. 1914년 12월 30일 부산진 여학교에서 회집된 제9회 경상노회 회의록에는 그의 이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서기가 회원을 조명하니 참석원은 목사의 방혜법, 권임함, 김기원, 홍승한, 심취명, 김영옥, 왕대선, 매견시, 맹호은, 예알배, 라대벽, 권일두, 권찬영, 인로절, 제씨요. 장로의 허 일, 황재은, 정재순, 박영화, 박상순, 최경호, 리준섭, 권덕생, 김덕경, 김응진, 김복명 제씨라. 이런 박영화는 1914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제 11회로 졸업하고 동년 6월 19일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쌍계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그는 1919년 3·1 의성만세운동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룬 후 경남 거제시 사능면에 위치한 사능교회 초대담임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박영화 목사는 거제도와 통영 등 경남지역 초기 교회의 존경받는 목회자로 자리매김하였다. 2) 2대 박상동 목사 이러한 신앙적 분위기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박상동은 아버지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학교인 대구의 계성학교 출신으로, 부친과 함께 3·1 만세운동의 옥고를 치룬 후 일본 고베에 있는 칼빈계 고베중앙신학교(神戶中央神學校)를 졸업하였다. 졸업한 박상동은 1925년 귀국하여 안동교회 강도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6월 17일 안동교회에서 소집된 제8회 경안노회록은 “신학졸업생 박상동씨를 노회장이 임시노회를 소집하는 대로 강도사로 세워주기로 가결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박상동은 안동교회 강도사로 시무하면서 평양신학교에서 별신학(別神學) 과정 1년간을 수학하였다. 그 당시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장로교 목사가 되려면 평양신학교에 가서 1년 동안 공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1926년 6월 16일 안동교회에서 회집된 제10회 경안노회에서 안동교회는 박상동 강도사를 동사목사로 청원하였고, 노회는 임사부에 맡겨 처리하도록 결의하였다. “안동교회에서 박상동 강도사를 동사목사로 청원하노니 허락 주시되 헌법대로 오는 9월에 장립허락까지 달라는 청원은 임사부로, 박상동에 목사장립을 위하여 별노회 소집은 회장에게 위임하기로 가결하다.” 결국 1926년 9월 1일 영주읍 교회에서 개회된 경안노회(제11회) 임시노회에서 안수 후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885년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41년 만에 직계(直系)로 부자(父子)가 목사 임직자가 됨으로써 아버지, 아들 목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3) 3대 박대선 목사 박영화 목사 가문의 직계 3대 목사인 박대선 목사는 1916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에서 박상동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1928년 파송 받아 오사카에서 순회목사로 일본에 파송된 부친 박상동 목사와 함께 일본에 체류하면서 1940년 일본관서학원대학교 영문과와 1942년 동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미국 보스톤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전공으로는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에 체류할 당시인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니시노미야시 한인교회의 담임전도사로 사역했으며, 귀국하여 1942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 창광산교회, 박구리교회, 중앙교회, 서평양교회 등을 섬겼다. 박대선이 어렸을 때 사람들이 “넌 이담에 커서 무엇이 될래?”라고 물으면 서슴없이 “난 목사가 될 겁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한 이 대답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을 정도로 박대선은 소명의식이 투철했다. 특히 1945년부터 1950년 까지 평양성화신학교 교장대리로 학교를 책임지고 경영하였다. 박대선 목사는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1959년부터 1962년까지는 서울 광화문감리교회 담임으로 목회를 이어갔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하소서~!기독교대한감리회 삼남연회(감독 권영화) 남선교회연합회(회장 안승준)가 주최한 ‘제 33회 평신도수련회’가 지난달 25일 오후 3시부터 26일까지 1박 2일의 일정으로 부곡로얄관광호텔에서 연회 소속 목회자와 성도 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평신도’(롬8:28)라는 주제로 모인 이번 수련회에는 삼남연회 15개 지방의 성도들이 연일 무더운 폭염 속에서도 은혜를 사모하며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성회를 찾았다. 특히, 개회예배를 시작으로 시간 시간마다 이어진 주제 강연과 특강 시간에는 강단에서 선포된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성령으로 하나 되어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결단의 시간이 됐다. 첫날 개회예배는 심기동 장로(준비위원장)의 사회로 드려졌으며 임경엽 장로(남선교회연합회 기획부회장)의 기도와 김학수 장로(부산서지방연합회장)의 성경봉독, 권영화 감독의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하소서’(행 4:23~37)란 제목의 말씀 선포가 있었다. 권 감독은 “복음의 능력은 먼저 들음에서 난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모인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영광을 돌렸다”(행4:24)고 했다. 또한, “기도하면 성령이 충만해지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증거자의 삶을 살게 된다(행4:31). 따라서 성령 충만하여 이웃에 선을 베풀고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가는 성도들이 되자”고 강조했다. 이어 봉헌 찬양(남선교회 지방연합회 회장 일동) 후 부산서지방 낮은자리교회를 위한 특별헌금 시간을 가졌다. 축하와 격려의 시간에는 김재성 장로(사회평신도국 총무)와 김철중 장로(남선교회 전국연합회장)의 격려사, 이풍구 장로(장로회 전국연합회장)의 축사, 안승준 장로(남선교회연합회장)의 대회사가 있었다. 이승호 장로(남선교회연합회 총무)의 광고 후 권영화 감독의 축도로 예배 순서를 모두 마쳤다. 대회장 안승준 장로는 대회사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그동안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했고 그 분이 원하시는대로 살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그 해답을 찾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재성 장로는 격려사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주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뜻을 앞세워 갈등과 반목으로 분열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화합과 선을 이루는데 앞장서자”고 말했다 한편,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된 이번 수련회에는 임제택 목사(열방)의 ‘부르심의 목적’(마 28:19~20), 하근수 목사(동탄시온)의 ‘0점의 가치’(고전 1:26~29), ‘인사만 잘해도 먹고는 산다’(행 9:26~31), 황일구 목사(새대구침례)의 ‘복음의 통로! 축복의 통로!’(롬 1:16), 이성호 목사(대전제일)의 ‘신앙으로 본이 되는 지도자’(딤전 4:6~16)란 제목의 메시지가 특강 시간에 선포됐다.
-
“경북을 새롭게 하소서!”예장(합동) 소속 경북지역 10개 노회들로 구성된 경북교직자협의회(회장 설정수 목사, 이하 경북교협)가 주최한 제6회 하기 수련회가 ‘경북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지난달 29일 오후 2시 팔공산 맥섬석 유스호스텔에서 목회자 부부와 장로 부부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 지난 4월 경산옥산교회에서 총회를 열고 신임 회장에 설정수 목사(경청노회, 경산옥산)를 선출하는 등 임원진을 개선한 경북교협은 하기수련회(8월)와 친선체육대회(9월)를 비롯해서 신년교례회(1월), 임역원 단합대회 등 전국의 여타 지역협의회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대회장 설정수 목사의 사회로 드려진 1부 개회예배는 이순우 장로(부회장)의 기도, 이재호 목사(증경회장)의 성경봉독, 김문기 장로(새에덴)의 특송에 이어 소강석 목사(새에덴)의 ‘미래시대 목회특강’(눅 14: 28~33)이란 제목의 메시지 선포가 있었다. “주영, 고영, 천영 신앙을 갖는 목회자가 되라!” “배고픈 목회자가 되라!” 소강석 목사는 “첫째는 주영 신앙, 즉 주의 영광을 위해 사는 목회자가 되라. 둘째는 고영 신앙, 즉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목회자가 되라. 셋째는 천영 신앙, 즉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이 보상해주신다는 확신을 갖는 목회자가 되라”고 강조했다. “나의 가장 좋은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는 과감하게 받자” “끊임없이 창조의 세계를 갈망하는 배고픈 목회자가 되라”고 강조하는 소 목사의 강변을 통해 참석한 모든 교직자 부부들이 함께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이어서 이원호 목사(회의록서기)의 주제제창, 김재석 장로(경청노회 부회장)의 환영사, 이상직 목사(총무)의 광고, 서귀석 목사(명예회장)의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이기택 목사(증경회장)의 내빈 소개가 있었다. 뒤이어 홍성헌 목사(상임회장), 안재호 목사(증경회장)의 사회로 드려진 두 번에 걸친 특강 시간에는 김성태 장로(대구한샘)의 중국선교 현장에 대한 보고, 강진상 목사(평산)의 ‘주님께 합당한 제자’(마10:37~39)라는 제목의 강의가 있었다. 이종형 목사(증경회장, 준비위원장)의 사회로 드려진 폐회예배 때는 김형국 목사(하양)의 ‘이 복음을 위하여’(옙3:7)란 제목의 메시지 선포가 있었고, 이득수 목사(증경회장)의 축도로 모든 대회 순서를 은혜롭게 마쳤다.
-
용문산에 울린 ‘회복’의 기도기독교대한감리회 삼남연회(감독 권영화) 주최 ‘2017 영적각성연합대성회’가 ‘성령의 역사로 날마다 부흥하는 삼남연회’라는 주제로 지난달 31일 오후 4시부터 지난 2일까지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김천 용문산기도원(원장 나서영 목사)에서 연회 소속 목회자와 성도 등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잘못된 신앙관으로 인한 영적 혼란과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 속에 바른 영성과 바른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용문산기도원에서 열린 이번 집회에는 150만 감리교도들의 수장인 전명구 감독회장을 강사로 초청, 큰 은혜 받고 믿음으로 살기를 결단하는 시간이 됐다. 첫날 개회 예배는 경북서지방 김동규 감리사의 인도와 창원서지방 김기범 감리사의 대표기도로 시작됐다. 김기범 감리사는 기도를 통해 “우리민족이 위기에 처하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기도하던 자리인 용문산기도원에, 첫사랑은 물론 기도와 열정마저 잃어버린 이들이 위기를 맞아 갈 길을 잃어버린 나라를 위해 다시금 기도하러 나왔다”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나라를 살려달라”고 간구했다. 김생녀 장로(여선교연합회장)의 성경봉독과 대구지방 교역자의 특별찬양 후 전명구 감독회장의 ‘회복’(겔36:25~31)이란 제목의 설교가 이어졌다. 전 감독회장은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는 예수의 보혈로 씻김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이며 “그러한 이들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자녀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시고, 자녀 또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고 전했다. 따라서 하나님께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가 ‘승리자’이며, 기도하여 응답받는 이가 ‘성공자’, 말씀에 순종하여 성령님의 통치를 받는 이가 ‘행복자’(축복자)라고 강조했다. 이어 현지은 학생의 봉헌 찬양 후 삼남연회 권영화 감독의 축도로 예배 순서를 모두 마쳤다. 한편,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된 2017 영적각성연합대성회는 새벽 5시와 오전 10시 30분, 저녁 7시에 걸쳐 진행됐으며, 회복, 아침에 돋는 해 같은 삶, 열리는 복, 저절로 열린 문, 그곳으로 가라, 멋지게 살자, 여기가 좋사오니 등의 제목으로 메시지가 선포됐다. ※ 2017 영적 각성 연합 대성회 조직표 ▲자문위원: 정양희 감독(전), 석준복 감독(전), 김진흥 감독(전) ▲대회장: 권영화 감독(현) ▲부대회장: 이영기 목사, 황병원 목사, 박준선 목사, 이성우 목사, 양진수 목사 ▲상임회장(준비위원장): 장성만 목사(부흥단장) ▲사무총장: 장석재 목사(연회 총무) ▲상임총무: 김종복 목사(부흥단 총무) ▲서기: 현철승 목사(부흥단 서기), 강태봉 목사(부흥단 부서기) ▲회계: 박두식 목사(부흥단 회계), 유길호 목사(부흥단 부회계)
-
참회록을 써야 합니다.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성 어거스틴이 참회록을 쓰게 된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그가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천국 문 앞에 도착한 그를 천사가 가로막으며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저는 그리스도인 어거스틴입니다.” 그러자 천사는 그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너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이 아니라 철학자 키케로의 사상으로 가득 찼구나.” 그렇게 그는 천국 문 앞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지나온 삶의 여정들을 돌아보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 또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고 어떻게 돌이켰는지를 아주 소상하고 솔직하게 글로 남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입니다. 성자는 참회록을 쓰고, 악인은 자서전을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서전 즉 회고록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거짓과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당하는 전직 대통령 사건의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대통령의 회고록을 접한 대변인은 자화자찬의 회고록이 아니라 참회록을 썼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선교 2세기를 달려가고 있는 젊은 한국 기독교는 참회록을 써야 할 모습들이 돌출되어 사회 속에 어두운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불거지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교회들의 불행한 모습으로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에 큰 부담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미지코칭 전문가 정연아 씨는 그의 저서 ‘행복한 크리스천에겐 표정이 있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한 크리스천의 이미지는 선한 얼굴에서 나온다. 한 사람의 얼굴이 그 사람의 상징이듯 크리스천의 얼굴은 곧 ‘믿음의 깊이’를 대변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얼굴이 한국교회의 믿음의 깊이를 대변한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픕니다. 하나님의 미소로 가득한 얼굴이 바로 우리 교회의 참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깊이가 성도의 얼굴과 교회의 얼굴로 나타납니다. 그 얼굴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얼굴은 강력한 전도지였습니다. 주후 110년쯤 핍박과 박해를 넘어 로마제국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세계가 로마제국으로 통일돼 여행이 편리했습니다. 둘째, 도로가 좋았습니다. 그 길을 따라 복음이 전하여졌습니다. 셋째, 언어가 통일돼 복음전파에 도움이 됐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네 번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삶의 모범을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노예와 여성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평등을 실천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자비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런 삶의 방식이 생명력을 부여했고, 복음을 세계로 확장시키는 원천이 됐습니다. 로마사회에서 노예 인구의 비율은 20∼30%였습니다. 그러나 성도 중 노예의 비율은 50%였습니다. 왜 이렇게 교회 안에 노예가 많았을까요? 크리스천 주인들이 노예를 인격적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노예들은 크리스천 주인의 사랑과 배려에 감동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중 오네시모 같은 사람은 훗날 에베소의 감독이 될 만큼 교회는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110년 만에 로마제국 전 지역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난해 보냈습니다. 올해는 501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구호만 외치지 말고 성도 각자의 삶과 교회의 얼굴만 바꾸어도 교회는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렇다면,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해 우리의 참회록을 써내려 가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자기 자신을 내려놓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설립 113년을 맞은 ‘칠곡 숭오교회’(1904)경북 칠곡군 지역교회 가운데 1904년 4월 27일 설립됨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경복노회 숭오교회 113년 약사 1962년 1월 12일 칠곡군 시찰 사경회 기념사진 1950년대의 숭오교회 정경 2017년 현재의 교회정경- 우측에 증축된 모습(엘리베이터 4층 운행 및 화장실 2개 층)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진 1906년도 당시 사진(숭오동 715번지) 건평 18평 토관 예배당 여성도 두 사람이 찬송 부르는 모습과 둘러앉은 당시 성도들 정경 ‘행복과 미래가 있는 공동체’ 서성수 목사 숭오교회 숭오교회는 칠곡군 북삼읍 태평1길 21-8번지에 위치한 교회로 1904년 4월 27일 설립되어 올해로 113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 서성수 목사가 담임하고 시무장로 김태영 장로, 조영복 장로, 이상근 장로, 한광현 장로, 김경식 장로, 이재학 장로로 당회가 구성되어 있고 원로장로에 김장우 장로, 이상인 장로, 이시역 장로 은퇴 장로로 한재학 장로가 현재 출석하며 장립 집사 9명, 은퇴 권사 11명, 시무권사 10명과 서리집사 남녀 40명과 성도들이 섬기고 있다. 2017년 현재 세례교인 약 160명, 주일학교(유치부, 유초등부, 중고등부, 청년부)포함 약 220여 명이 금오산 뒷자락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다. 교회 장기 표어는 ‘행복과 미래가 있는 공동체’이며 2017년 표어는 ‘복음 진리로 삶의 우선 가치를 바로 세우자’(마6:33) 실천사항으로 ①진리의 말씀에 길들임 받는 성도. ②축복의 통로 되어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성도. ③열방과 이웃을 품고 선교에 주력하는 성도. 숭오교회의 설립 유래는 1901년 선산군 구미면의 상모교회 정인명 전도인의 전도로 당시 창립교인이 된 장운환 씨가 최초 신자가 되어 동년에 이해기, 조수근, 안명석, 박원실, 김성환, 한복동, 홍년표 등 제씨의 남신도와 이달선, 김분이, 이달년, 박두리 등 제씨의 여신도들이 매주일 30여 리의 먼 거리를 걸어서 선산 상모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03년 정재봉, 오제세, 오인종, 장교린, 배암이, 한경빈 등 제씨와 다수의 여신도를 더 얻었으며, 동년 가을부터 많은 인원이 주일마다 상모교회로 가는 것이 불편하고 거리가 먼 관계로 김천의 월명교회로 출석하기로 의논하고 출석하게 된다. 그러던 중 성도들이 뜻을 정하고 기도하면서 이 지역에 교회설립을 작정하여 본격적인 기도와 함께 구체적인 추진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1904년 4월 27일에 교회가 세워지는데 교인은 약 50여 명이었다. 당시는 아직 예배당이 마련되지 못했기에 성명 미상이지만 성도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것이 오늘날 숭오교회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후 교인의 수는 나날이 늘어 가고 개인 집에서 예배드리기에 비좁고 불편하여 교회건축을 위해 온 성도들이 정성 들여 헌금하고 힘을 모아 1906년 숭오동 715번지에 건평 18평의 토관으로 예배당 건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숭오교회 설립 연월일 구체적인 자료는 소실되었지만 연로하신 분들의 구전을 통해서, 1904년 4월 27일이라고 전해지게 된다. 설립연도는 1904년이 확실하고 4월 27일 역시 오랜 역사 가운데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연로하신 교우들의 증언을 취합하여 4월 27일로 확정하게 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교회사’에 보면 총회에 보고한 것이 1905년도에 숭오교회가 창립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우리 교회가 설립 될 그 당시 1903년도에 선산의 상모동 교회와 금릉의 월명교회가 설립되었고, 1904년도엔 칠곡의 왜관교회, 1905년도에는 칠곡의 숭오교회 외 20여 개 교회가 개척되었으며, 1906년도엔 칠곡의 복성교회가 설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숭오교회가 왜관교회보다 1년 늦게 기록된 것은 필자의 견해로 볼 때, 왜관교회는 당시 군청과 읍사무소와 인접한 관계로 행정적인 보고와 함께 설립연도의 기록이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상대적으로 숭오교회는 당시 칠곡군과 금릉군과 경계선에 있는 관계로 행정적인 보고와 기록 등이 늦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보면 북삼면에 숭오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1905년 선교사 부혜리(傅惠利)의 전도로 신자를 얻어 설립자로 정재봉에게 성수로 인도자가 되면서 교회가 시작되었는데, 오제세를 집사로 하고 조사에는 정윤삼이 시무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계속되는 특기할만한 숭오교회의 역사는 차기 호에 연재하기로 한다. 주소: 경북 칠곡군 북삼읍 태평1길 21-7번지 전화:054-973-1071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