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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1)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 영 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1893년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안동지역에 복음이 전해진지 124년이 지났다. 오늘의 교회는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안다. 훌륭한 믿음의 선배 중에는 교역자들 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포함된다. 이 분들의 헌신의 결과로 척박한 이곳 안동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 마을마다 교회가 서게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수고임을 알기에 감사할 뿐이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선교 초기 거룩한 발걸음을 통해 거룩한 흔적을 남긴 위대한 선배이다. 필자는 그에 대한 조명이 너무 늦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그리고 경상북도에서 초개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며 교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김영옥 목사를 연구하여 탈고하니 그동안 목사님에게 가졌던 죄송스러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느낌이다. 이제 자애로운 아버지요 할아버지, 지역의 초대교회의 기초를 든든히 세워 중심교회로 서게 한 목사,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애국한 김영옥을 소개한다. 1.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결신한 청년, 김영옥 경상도의 첫 한국인 목사는 김영옥(金泳玉, 1871-1952)이다. 김영옥이 비록 영남지역 최초의 한국인 목사이지만 그의 고향은 북한으로, 그는 1871년 4월 12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했다. 가난했던 그는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갈 꿈을 갖고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18세가 되던 1888년 어느 날, 평산 누님 댁에 갔다가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가 소래(松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국으로 갈 방법을 찾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제시받은 김영옥은 미국 갈 결심을 포기함과 동시에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로부터 세례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전혀 뜻하지 않게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은 김영옥은 세례 까지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부로 복음사역의 적극적인 도우미가 되었다. ▲1909년 9월부터 안동의 북부지역은 사우대 선교사가, 서쪽은 오월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좌측 말에 탄 사람은 사우대 선교사이며 말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시 조사인 김영옥(1911년 안동교회 초대담임목사로 부임)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부, 그리고 오른쪽 말에 탄 사람은 오월번 선교사이다. 2. 목사 임직 이전의 복음전도자, 김영옥 회심 이후 김영옥은 복음사역을 위해 하나하나 착실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복음전파사역에 관한 김영옥의 결심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곁길로 간 적이 없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한 준비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 1년 만에 한문 신·구약 성경 모두를 통독(通讀)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한 선교사들로부터 전도법과 장로교회에 관해 배웠으며 선교사들과 간단히 대화할 수 있는 영어실력도 갖추게 되었다. 모든 과정을 이수한 김영옥은 실력 있는 매서인(賣書人)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사를 도와 공식적인 매서인으로서 사역할 수 있었다. ▲황해도 솔래(松川)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18세 때(1888년) 회심하고 결신한 김영옥은 휴식도 없이 64년(1952년) 동안 서울, 강원도 철원과 원주, 경북 안동, 사월, 포항, 영주, 경주, 풍기, 문경, 그리고 의성 삼분 등 전국에서 교회를 세우고 돌보며 애국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온 김영옥은 1893년 모삼열(Samuel. F. Moore)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순교를 각오하고 서울 종로 5가, 4가 등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몇 명의 성도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1894년 이들이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와 그의 조사(助事)인 서상륜과 함께 연지동 초가(草家)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연동(蓮洞)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또한 김영옥은 조사로서 서울의 승동교회와 동막교회 설립에 관여함으로써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쉬지 않고 감당했다. 이후 김영옥은 서울을 벗어나 더욱 활발하게 전도사역을 감당했다. 그는 경기 동쪽과 황해도 이남(以南)으로 순행하며 전도하여 백천, 평산, 금북, 금성, 양구, 화천, 양주, 포천, 등지에 여러 교회를 설립에 기여했다. 특히 김영옥은 1898년 모삼열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고 개척한 고향인 황해도 백천군 운교(雲橋)교회에서 영수(領袖)와 장로로 섬기기도 했다. 운교(구름다리)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큰 한옥을 사서 새롭게 단장하여 예배처소로 사용한 그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김영옥은 주일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는 새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신자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2주 내지 3주간씩 연속으로 사경회를 열기도 하였다. 김영옥은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한국교회 초기 매서와 조사, 그리고 영수와 장로로 초기 한국교회의 뛰어난 평신도 지도자였던 것이다. 3. 영적 지도력을 갖춘 한국 장로교 평신도 리더, 김영옥 조사(助師)는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그들의 고국과는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이 땅에서 적응해갈 수 있도록 도운 사람들이다. 선교사들은 이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부동산을 구입할 때 도움을 받았으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각 지방으로 순행할 때 큰 도움을 받았다. 만일 어느 누구도 선교사들의 복음사역과 현지 적응을 돕지 않았다면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이 땅에서 복음의 씨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영옥은 조사로서 초기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 한국선교 초기 많은 조사들이 있었지만 조선장로교사기에 따르면 김영옥은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도 영향력 있는 발언권을 가진 조사였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공식적인 회의석상에서 중요한 발언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영옥은 1903년 9월, 1904년 9월, 1906년 9월 세 차례에 걸쳐 선교사들과 함께 모인 장로교공의회 경성소회 총대 장로로 참석하여 발언하기도 했다. 1906년 9월 회의에서는 “교인으로는 교회를 순종하고 국민으로는 국가에 순종할 방침이란 문제”에 대하여 발언했는데, 이것은 분명한 기독교적 국가관을 가진 김영옥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명의 한국인 목사가 처음으로 배출되기 전 까지 김영옥은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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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신갑주(6. 끝) - 성령의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윤 형 구 장로 본지 발행인 사도바울은 마귀를 대적하는 영적 싸움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와 공격용으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육신으로 세상에 오셨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구와 욕망,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기를 바라는 열망, 하나님의 길 보다 자신의 길을 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의 욕망에 지배 당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결정하신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신후에 마귀로부터 시험을 당하신다. 첫째,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햐였느니라” 둘째,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지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셌째, 마귀가 또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며 이르되‘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시니 마구;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드니라. 육체적이요 세상적인 욕심들로 유혹하고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은 마귀의 짓이다. 상황에 따라서 사람의 눈치나 보고 사람들의 생각들을 적용하면 마귀의 올무에 걸리기 쉽다. 성경을 많이 읽고 암기하고 생활 속에서 적용하는 삶이 영적승리의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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巳! 魚! … 효(孝)?신훈식 교장 상주동부초등학교 어린 시절 나는 소 꼴을 뜯기러 가거나 들일을 가서 뱀을 만나면 반드시 산 채로 잡아 오는 아이였다. 또 여름철이면 학교에 가는 시간 외에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족대와 낚싯대로 항상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께서 뱀술과 매운탕을 즐겨 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던 6학년 어느 날 날벼락이 떨어졌다. 6km나 떨어진 낙동강까지 걸어가서 낚시하던 나를 아버지께서는 형님을 시켜서 찾아오게 하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께서는 불호령으로 “이놈의 자식! 공부는 하지 않고 온종일 물고기만 잡으러 다닐래!” 하시면서 내 손에 들려 있던 낚싯대를 뺏어 두 손으로 쥐시고는 무릎으로 단번에 부러뜨리는 것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잘못했습니다.’라는 말보다는 ‘저건 친구에게 빌린 낚싯대라서 물어주려면 큰일인데….’ 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뒤돌아보니 허구한 날 물고기만 잡으러 다녔으니 아무리 매운탕을 좋아하시는 당신이셨지만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니 그러실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추억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낚시와는 담을 쌓고 살고 있다. ‘낚시하면 너무 재미있는데…’ 하면서도. 그런 나는 교사가 되었고 첫 월급을 타서는 하나님이 아닌 아버지께 전부 드렸더니 당신께서는 당신이 묻히실 산소에다가 석축을 하셨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한학자이자 장자로서 평생 제사를 지냈던 분이었지만 돌아가시기 전에는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임종조차도 지켜보지 못한 나는 당신께서 좀 더 일찍 예수님을 믿도록 전할 수 없었음에 지금까지도 불효했다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어려서부터 큰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다니던 나는 고1 때 신앙적 방학과 외도를 했고 10년이 지나서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년 후,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났다. 이때부터는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유별나게 추위를 많이 타시는 어머니께서는 구들이 놓인 방을 좋아하셨는데, 하루는 구들이 막혀서 불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며 구들을 새로 놓아달라고 하셨다. 돈을 준다고 해도 아무도 고쳐줄 사람이 없다면서…. 평일에 시간을 낼 수 없었던 나는 주일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가지 않고 온종일 구들장을 고쳐 드렸다. 눈앞에 살아계신 어머니의 작은 소원 하나마저도 해결해드리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한다며 예배당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내가 아는 하나님은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열기 어려웠던 어머님도 드디어 예수님을 영접하셨다. 그 후 20여 년의 믿음 생활을 하시다가 임종하실 때에 중보 기도를 해드리는 중 “어머니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나 뵈어요.”라고 했더니 의식이 없는 가운데서도 당신의 눈에는 눈물을 비취셨다. 임종하신 후의 얼굴 모습이 그렇게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巳가 魚가 孝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의 진정한 孝는 예수님을 부모님께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 즉, 주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선조들은 우상숭배를 하고 살아왔다. 생각해보면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을 알고서도 믿지 않는 이가 너무나 많다. 하여 내 꿈은 이 나라 이 민족이 예수님 잘 믿는 나라와 민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마19:14)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교육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이 부모님에게 다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땅의 모든 어린이가 참 효(孝)인 복음을 깨닫기를 바라며 나는 날마다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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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브라더 앤드류 오픈도어 설립자 몇 년 전 한 여성 기자가 나에게 익숙하고도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을 했다. “당신이 24시간 후에 죽는다면, 이 세상 마지막 날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그 질문을 받고 나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매일 산다면, 언젠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라고 말한 친구 생각이 나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중요하고도 좋은 질문이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질문을 자신에게 정기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겨우 하루라는 시간 속에 모든 중요한 일을 압착시켜 넣어야 한다면,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또 어떻게 재조정할 것인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어디를 갈 것이며, 귀한 마지막 시간을 누구와 함께 보낼 것인가? 더구나,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우리를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 없이 살아갈 사랑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해 달라고 할 것인가? 하나님께 어떤 일에 대한 뜻을 돌이켜 달라고 구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운 이 마지막 때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순간을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비전과 기도가 제한을 받을 것이다.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우리없이 살아갈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구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은 지금이다”라는 격언에는 상당한 진리가 들어 있다. 성경이 말하듯이 “지금은 구원의 날”(고후6:2)이다. 그러나 기도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기도할지라도, 그 파문은 계속 퍼져나갈 수 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는 영원히 남아서 무덤을 넘어 미래의 삶과 사건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기도의 덕을 본 사람들이다. 신실하게 중보기도를 했으나 응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그 기도의 직접적인 결과로 역사는 이 세상 전역에서 날마다 변화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히브리서에 기록된 믿음의 영웅들처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히 11:39)이다. 불가지론을 믿는 가정에서 자라난 한 친구가 자신의 그리스도인 할머니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할머니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할머니는 그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복음도 듣지 못했고 그리스도인을 한 사람도 알지 못했는데, 학창시절 학교에 있는 성경을 읽다가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나 그가 사역에 참여한 후 한 여성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할머니가 죽기 전 수년 동안 할머니와 친분을 갖고 지내면서 함께 기도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네가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을 알게 된 네 할머니는 너의 구원을 위해 함께 기도로 도와 달라고 하셨단다”라고 썼다. 할머니가 죽은 지 거의 15년 후 그 기도는 응답된 것이다. 그 이후로 그 기도의 파문은 계속되어 그 친구의 다른 가족들도 모두 주님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기도의 파문은 계속 퍼져나갈 수 있다. 우리의 기도는 영원히 남아서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다. (오픈도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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