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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작정과 가룟 유다의 배신, 예수님은 왜 가룟 유다의 배신을 방치하셨나?Q 질문 : ‘왜 예수님은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하게 방치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듭니다. 예수님이 그를 불쌍히 여겼다면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게 뭔가 조치를 하셨을 것 같은데 그냥 구원 사역의 제물로 그를 이용하신 것일까요? A 답변 :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우리가 측량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중 한 사람이 배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는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시41:9, 요13:18). 이 일에 사용된 사람이 바로 가룟인 유다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하신 뜻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깊은 뜻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기뻐하지 아니하시지만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사용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악한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는 잘못한 게 없지않느냐?’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각자 행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악을 통해서도 자기 뜻을 이루시고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그러한 깊은 뜻을 피조물인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도 복잡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향해 “그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고 하셨습니다. 선택과 악의 문제는 하나님의 오묘한 일에 속합니다. 따라서 그런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분명히 나타난 일 곧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마지막 날에 밝히 알게 될 것입니다. 답변자 : 변종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크리스천 큐앤에이’(도서출판 등과 빛) 中 요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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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먹는 맛 좋은 재래종 고추 분양합니다!경상북도농업기술원 영양고추연구소는 자체 복원한 재래종 고추 4품종의 종자를 고추 재배 농가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1월 8일부터 12일까지 선착순 공개 분양 신청받는다. 이번에 분양하는 재래종 품종은 매운맛과 단맛이 잘 조화된 ‘수비초(영고4호)’, 순한맛으로 과피가 두껍고 색깔이 좋은 ‘칠성초(영고5호)’, 매운맛이 강하고 수확시기가 빠른 ‘유월초(영고10호)’, ‘토종(영고11호)’ 등 총 4가지 품종이다. 영양고추연구소에서 복원한 재래종 고추는 지역 기후풍토와 품질에 따라 선발돼 토착 유전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높은 품종으로 지역특화 재래종 고추의 우수성을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올해도 무상으로 농가에 분양하게 됐다. 최근 맛이나 색깔 등 품질특성이 우수한 재래종 고추에 대해 소비자 관심도가 증가함에 따라 영양고추연구소는 지난 5년간 재래종 고추 종자를 전국 5천 163농가(총 88.1ha)에 분양했다. 분양 신청은 선착순으로 인터넷(1천 명)과 방문(2백 명)을 통해 진행되며, 판매금지 등 분양계약 준수를 전제로 1인당 총 200립(수비초·칠성초·유월초·토종 각 50립 씩)의 종자를 분양받을 수 있다. 인터넷 접수는 경상북도농업기술원 홈페이지(gba.go.kr) → 왼쪽 상단 열린광장 → 공고/고시에「재래종 고추 종자분양 신청」링크를 통해 하면 된다. ※ 종자 신청방법 : 농업기술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게시 신청 시 ‘네이버 ID’가 필요하고, 1개의 ID 당 1회 신청가능하며 종자는 1월 15일부터 신청한 주소로 등기 우편 발송할 예정이다. 조영숙 경상북도농업기술원장은 “재래종 고추는 시판 품종에 비해 병에 약하고 재배 적지가 한정적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맛과 향, 매운맛이 우수해 소비자 선호도가 높다”라며, “앞으로도 지역특화 재래종 고추 재배 및 병해충 방제기술, 가공품 개발 연구를 통한 재래종 고추 부가가치 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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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성탄절 축하 메시지 - 김승학 목사김 승 학 목사 경북기총 대표회장 안동교회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세상에 처음으로 빛이 생겼습니다. 빛은 어둠의 세계를 환하고 밝은 세계로, 무질서를 질서의 세계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빛으로 오셨다고 기록합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예수님은 어떤 빛으로 오셨을까요? 우선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정말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시인하고 고백하여 영생의 선물을 받기 원하십니다. 성탄의 절기에 교회와 거리를 밝히는 성탄트리의 불빛을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무성하지만 사랑이 식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랑이 실종된 곳은 지옥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뜨거운 사랑을 의미합니다. 성탄 절기의 캄캄한 밤을 밝히는 붉고 흰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뜨거운 사랑이 다시 회복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소망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기술의 발달이 인간을 이롭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에 따른 가뭄과 지진 등 자연재해, 전쟁의 소문과 테러 등은 우리를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리고 있습니다. 오늘이 절망스럽다 하더라도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예수만이 소망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절망을 벗고 소망을 회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023년 성탄의 절기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의 빛, 사랑의 빛, 그리고 소망의 빛으로 가득 찬 가정, 교회, 한반도, 그리고 지구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 2023년 12월 성탄절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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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이 정 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만난 많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38년된 병자, 맹인, 나사로, 마리아 등···. 그중에 요한복음 1장 44절 이하에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만남이 등장합니다. 그 만남을 보면 만남이 왜 축복이고, 예수님과의 만남이 우리에게 어떤 인생을 살게 하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왜 예수님과의 만남이 중요할까요? 먼저,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나다나엘과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인식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이미 나다나엘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장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는 그 모습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의 장점을 먼저 보시고,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도 알고, 우리가 부족한 것도 알고, 우리가 간사한 것도 아십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께 우리의 일생을 맡기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우리 인생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예수님 안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교제가 이루어질 때, 그 인생이 정답을 찾게 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과의 만남이 중요한 이유는 완전한 사랑이 그 안에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변할 수 있는 사랑이고, 변질될 수 있는 사랑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사랑, 완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을 만나면서 “더 큰 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더 큰 일을 보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알면 예수님을 이해하게 되고,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전에는 아픔이었지만, 이제는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1878년에 살았던 윌리엄 커싱(W.O. Cushing 1823~1902) 목사는 말씀에 은사를 가진 성직자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를 듣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서 커싱 목사에게는 설교 일정을 정리하는 일이 늘 힘든 일과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설교 중 목소리에 이상이 생겨 병원을 찾게 되었고, 점점 증세는 악화되어 1년 후에는 완전히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커싱 목사는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이 또한 하나님의 큰 계획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은 커싱 목사에게 글을 쓰게 하셨고, 그 글이 찬송가가 되어 많은 사람의 입에서 불리게 되었습니다. 커싱 목사는 설교가로서의 인생보다 찬송가를 전파하고, 보급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가 지은 찬송가 중에 오늘날에도 많은 성도에게 불리는 찬송이 찬송가 419장입니다. “주 날개 밑 내가 평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켜주시니 거기서 평안히 쉬리로다 주 날개 밑 평안하다 그 사랑 끊을 자 뉘요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 주님을 만난 인생은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면 인생의 눈이 바뀌고, 완전한 사랑 안에서 상황을 이기는 놀라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만남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우리 인생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을 만나시고, 완전한 사랑 안에서 인생을 새롭게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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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 목사】 -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3·끝)이 현 세 목사 예장통합 경서노회 직전노회장 황금동교회 기울어가는 우리 한국교회가 다시금 일어나서 균형 성장, 동반 성장, 지속성장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들이 ‘종교인’이 아니라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됩니다. 자아에 대해, 죄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내 신념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에게는 여덟 가지의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팔복의 핵심은 ‘천국’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오직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신 복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세가지 삶의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적인 존재 차원으로,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애통해야 하고, 온유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삶의 자세의 차원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세, 긍휼히 여기는 자세, 마음이 청결한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셋째는, 공동체를 위한 삶의 차원이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함께’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첫째, ‘평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갈등과 싸움이 난무합니다. 사람이든 국가든 화합해야지 갈등하게 되면 피차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과 테러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갈등의 역사입니다. 여러분의 가정, 교회, 이웃, 직장, 학교에서는 갈등이 없습니까?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란 평화를 만들기위해 애쓰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화평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어느 공동체에 속해 있든지 그곳을 평화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가정을 불화케 하고, 직장을 불화케하고, 사회의 갈등을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케’가 되면 안됩니다. 평화를 만드는 ‘피스 메이커’ 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네 가지 권세(특권)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권세(접근권), 둘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세(호칭권), 셋째는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권세(청구권), 넷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권세(상속권)가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를 위해서는 ‘의’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많은 기독교인이 박해를 당하고 순교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많은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불타고 기독교인들이 살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1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롬3:21)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삶을 말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기에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땅에 실현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역 복음화와 세계선교가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일을 힘쓰다가 박해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복이 있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다”(12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으로 살고, 복음을 위해 살면서 천국을 누리시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 땅에 실현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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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선교 현장 】-기독교 박해지수 1위 ‘북한’은···2023년 월드와치리스트에 올라온 모든 국가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으며, 그중 높은 순위에 위치한 국가에서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매일 도전입니다. 2023년 월드와치리스트에서 1위를 기록한 북한은 여전히 기독교인들이 살아가기에 무참히 적대적인 곳입니다. 성도들은 정부당국에 발각되면 정치범들과 같이 끔찍한 환경의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가족들 또한 운명을 같이하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자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이거나 예배드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박해의 주된 이유는? 새롭게 시행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거나 성경을 소지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이며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은 극심한 박해를 받는 이유는 기독교가 야만적인 정권의 독재적인 이데올로기와 통치에 대한 분명한 위협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지도자들과 사회의 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기독교인을 위해 기도를! 북한 사역의 오픈도어 코디네이터인 시몬 형제는 기도로 북한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지하교회 성도들이 이 어려운 시기를 견뎌낼 수 있도록 많은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부디 이들과 저희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시몬 형제가 또 전합니다 “북한의 성도들이 그들의 이웃들을 돕고 있다는 감격적인 이야기들이 저희에게 들려지고 있어요. 그들은 자신을 위한 것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가지고 있는 식량, 약품, 그 외 다른 자원들을 나눠주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은밀히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으며 기도해주심에 대해 저희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이 굶주림과 가난의 시기 가운데서 그분의 자녀들을 먹이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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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레이첨단소재(주) 경북 구미에 탄소섬유 3호기 증설도레이첨단소재(주)가 10월 23일 경북 구미국가산업4단지에 위치한 구미4공장에서 탄소섬유 3호기 기공식을 열었다. 이날 기공식에는 이철우 경북도지사를 비롯해 도레이 닛카쿠 아키히로 회장, 오오야 미츠오 사장, 양병내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차관보, 국회의원, 김장호 구미시장, 도의원 및 도레이첨단소재 임직원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도레이첨단소재(주)는 구미4공장에 2025년 하반기 가동을 목표로 고압수소 압력용기, 도심항공 모빌리티 등 첨단산업 분야에 적용되는 초고성능 탄소섬유를 생산하는 공장을 증설할 계획이다. 이번 3호기는 기존 1, 2호기보다 업그레이드된 라인으로 금번 증설로 구미공장에서 총 8천 톤의 생산규모를 확보하게 됐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우리 지역을 믿고 오랫동안 상생해온 도레이첨단소재 탄소섬유 3호기 증설 기공식을 축하하며, 미래 먹거리 산업인 첨단 탄소섬유사업이 국내 및 글로벌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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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틀을 바꾸라이 정 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심리학은 우리 마음이 얼마나 많은 착각과 오류, 오만과 편견, 실수와 오해로 가득차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이런 허점들이 ‘프레임’이라는 마음의 창에 의해 생겨남을 증명해 줍니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건물 어느 곳에 창을 내도 그 창만큼의 세상을 보게 되듯이, 우리도 프레임이라는 마음의 창을 통해서 보게 되는 세상만을 볼 뿐이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프레임을 통해서 채색되고 왜곡된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뜻입니다. 프레임은 하나의 틀로서, 한마디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모든 사건들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 나의 생각인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고정관념, 가치관, 인생관, 신앙관 등 모두가 나의 프레임 속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과 말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프레임을 통해 그 사람의 내면의 정보들을 드러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신앙의 색깔을 갖고 있는가는 믿음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신앙의 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보는 관점도, 선택되는 단어도, 접근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인간의 프레임은 그 동기와 목적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의 편견과 야욕에서 비롯된 이기주의적 발상이며, 현실 도피적이며, 심지어 샤머니즘의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이렇듯 자기중심의 프레임이 깨어져야 더 크고 더 넓은 믿음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출애굽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프레임을 갖고 당당하게 가나안 땅으로 전진했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육지처럼 건너간 백성들입니다. 이런 크고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프레임을 갖도록 전무후무한 기적을 체험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프레임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져야 할 때, 세상의 눈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과거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했던 종의 프레임을 갖고 미래의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항상 부정적이었으며, 희망과 미래를 잊고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했습니다. 잘못되고 왜곡된 프레임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프레임을 바꾸면 인생이 바뀌어집니다. 신앙의 프레임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면 모든 것이 감사요,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붙잡혀 관리들에게 끌려가 성을 요란케 하며 로마인이 받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은 풍속을 전한다고 고발되어 옷이 벗겨지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두운 감옥에서 아픔 가운데 찬송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신앙의 프레임이 우리의 틀과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마 우리였다면 “하나님, 전도했는데 이게 무슨 대접입니까?”라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생각과 언어와 행동이 달랐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많은 인물들은 우리가 닮을 수 없는 프레임을 갖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야 등이 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끝으로, 최 박사가 상위개념의 프레임을 갖기 위해 제안한 것 중에 5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①의미중심의 프레임을 가져라. ②비교 프레임을 버려라. ③긍정의 언어를 사용하라. ④닮고 싶은 사람을 찾아라. ⑤장소가 아닌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한가를 알라. 우리는 어떠한 상황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건강한 신앙의 프레임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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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눈물천 석 길 목사 구미남교회 최근에 인도네시아의 응아위교회 헌당예배를 혼자 다녀왔습니다. 길이 너무 멀었습니다. 구미에서 오전 8시 30분 리무진 버스로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12시 40분이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오후 3시 5분 비행기로 자카르타에 도착하니 밤 11시 40분. 공항 근처 호텔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오후 1시 30분 비행기로 솔로시에 도착, 마중나온 현지인 목사님의 승용차로 2시간 30분을 달려서 드디어 응아위교회에 도착했습니다. 식당이 맛집이라고 소개하지만 음식 맛이 좀 그러했고, 호텔은 바닥에 개미가 기어 다니고 샤워실의 물은 수압이 너무 약했습니다. 응아위교회는 20년 전 교회가 없는 면 소재지에 개척을 했답니다. 당연히 건물 외부에 십자가는 없이 허름하고 비좁은 가정집에서 몇 사람이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그들은 오병이어를 믿고 꾸준히 건축헌금을 모아 왔는데 350만원이 전부였습니다. 무슬렘 지역에서 20년째 교회가 존재하는 모습을 본 다른 교회들이 오십만원, 백만원의 헌금을 보내주어서 마침내 2400만원까지 모았지만 그래도 3600만원이 부족하다는 이 야기를 지난해에 듣고, 우리교회에서 헌금을 보내었고 드디어 감격적인 헌당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건축보고를 하는 목사님은 울먹이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건축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구미남교회에서 우리 교회에 의자와 음향시설과 악기, 동네 이웃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과 헌당예배에 참석한 분들에게 출장뷔페까지 섬겨 주신 이 사랑을 우리는 갚을 길이 없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구미남교회에 갚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고, 그 교인들은 크게 “아멘!” 했습니다. 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영광스러운 헌당예배에 함께 하고 싶다고 자동차로 다섯 시간 혹은 열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에서 오신 목사님, 선교사님들을 대접했습니다. 20여 명이 함께 음식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대하면서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에 꼭 한 번 더 와서 설교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설교 후에 받은 박수로 며칠 간의 피곤함이 사라지면서 은혜로운 눈물이 찌릿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은혜의 현장. 이 감격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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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과 바르게 믿는 것은 다릅니다.이 정 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목사님, 그렇게 열심히 믿었는데, 왜? 여전히 나는 이 모양인가요? 내 속에는 해갈되지 않는 갈증들과 천근만근 되는 답답함이 짓누르고 있나요? 신앙생활이 본래 이렇게 맥 빠지고 답답한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절 좀, 도와주세요.” 한 성도가 절박한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품었던 신앙의 딜레마일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면 결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답답하지도, 맥 빠지지도 않습니다. 열심히 믿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름’입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 공식을 모르면 절대로 문제를 풀 수 없고, 더구나 공식을 틀리게 알면 문제는 더 풀리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공식을 몰라도 안 풀리지만, 하나님의 공식을 잘못 알고 있어도 큰 위기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식이란 열심이 아니라 바른 신앙, 즉 은혜입니다. 물론 신앙생활 안에 열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 그 자체가 신앙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서(육) 나온 열심인지, 하나님의 은혜(영)에서 나온 열심인지가 중요합니다. 은혜가 없으면 열심히 믿는 데는 성공할 수 있으나, 바르게 믿는 데는 실패합니다. 은혜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신앙은 더 이상 노동이 아니라 거룩한 삶이 되어 우리를 유익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은혜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우리는 자꾸 무엇인가 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과 부담을 갖게 되고 행위로 의(義)에 이르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내가 누구냐”에 관심이 더 많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내가 은혜 안에 있는가?, 은혜 밖에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은혜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신앙의 삶이 어렵지않지만, 은혜 밖에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거의 불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지식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이처럼 은혜 없이 열심만 있다면, 노력하면 할수록 헌신하면 할수록 무기력과 갈증만 더할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과 은혜를 받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킬 뿐 아니라 우리 삶의 질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칭 ‘신앙의 모범생’과 ‘열심의 우등생’을 많이 만납니다. 참으로 그분들은 ‘열심’만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엉겅퀴와 씀바귀들이 뒤엉켜 있고, 자기모순 속에 살고 있음을 봅니다. 많은 세월 예수를 믿었다 자랑하면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자아, 못된 행실, 답답함, 열등감, 무기력, 염려, 모난 성품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깎아도 깎아도 자라나는 잔디처럼 무섭게 끓어 타오르고 솟아오르는 세속적인 욕망들(증오심, 복수심, 원망, 혈기, 탐욕, 공격적인 언어, 부정적인 언어, 냉소적인 언어, 허망한 생각)을 여과 없이 뿜어내고 있습니다. “저런 것은 아닌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저런 모습은 아닌데···.” 잘못된 열심이 바른 신앙을 삼켜버릴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열심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열심이 아니라 바르게 믿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르게 믿을 때 삶이 변하고, 왜곡된 자아가 바로 서고, 인생의 목적이 바뀝니다. 잠시 열심(자아)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음성 앞에 내 마음의 문을 열어봅시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바른 가르침 앞에 순종해 봅시다.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는 폭포수같이 우리 위에 쏟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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