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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롭다’는 뜻을 아십니까?천석길 목사 구미남교회 교회를 칭찬하는 최고의 언어는 ‘은혜로운 교회이다’라는 말이지 싶습니다. 설교를 하는 목사가 듣기에 가장 좋은 말 역시 ‘은혜로운 설교를 한다’라는 말이지 싶습니다. 문제는 은혜롭다는 말의 뜻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목사 초년병이었을 때에는 예배가 끝난 후에 교회 로비에서 교인들과 인사를 하는 시간에 아주 가끔씩은 “목사님 오늘 설교가 참 은혜로웠습니다”라는 칭찬을 들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힘이 나고 어깨가 우쭐해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 교인들이 은혜로웠다라고 좋아하는 설교의 내용은 자신들이 듣기에 큰 부담이 없이 즐거웠거나, 교인들을 칭찬해 주는 설교를 들을 때면 은혜롭다고 말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설교의 목적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좋은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며, 설교의 내용은 죄인들의 마음에 숨겨져 있는 죄를 지적해줌으로써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것과 동시에 여태껏 모르고 죄를 짓던 그 길에서 돌아서서 믿음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내용이 정말 은혜로웠다면 설교를 듣는 입장에서는 감히 은혜로웠다고 말하기 보다는 부끄러운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은혜로운 설교를 들은 후에는 가슴을 치며 통회하는 기도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은혜롭다는 말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기중심적으로 해석을 해서 은혜롭다와 재미있다를 같은 차원으로 받아들이거나, 가끔씩은 내 마음에 맺혀 있는 한을 씻어 내듯이 설교를 듣다가 눈물을 많이 흘리면 은혜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재미는 코메디에도 있고, 영화나 소설을 통하여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대하면 얼마든지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은혜로운 설교는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시간이며, 은혜로운 교회는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위대한 변화를 위해서 헌신할 때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곧 은혜롭다입니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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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4)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2) 안동교회의 사역⑤ 평신도 사역평신도를 양육하는 사역에 박상동 목사는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그것은 ‘제1회 경안노회 주일학교대회’다. 경안노회의 첫 번째 교사대회는 1928년 9월 19일부터 26일까지 8일 동안 안동교회에서 있었다. 여기에는 경안노회 경내 지교회의 아동부, 소년소녀부(오늘날 중고등부), 청년부, 남·여장년부, 여전도회 교사 및 교역자 등 모든 교사가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정회원 1,300명, 방청객 1,000명, 도합 2,300여 명 참석). 주일학교 상황보고서에 따르면, 주일학교대회가 성료된 바로 다음 해인 1929년에는 주일학교 수가 104처, 장년 3,729명, 유년 2,301, 직원 수 808명에 이르게 되었다. 주일학교교사대회가 당시에 얼마나 필요한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상동 목사의 평신도를 위한 배려는 타지에서 오는 교인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담임목사 사택을 제공한 것에서도 발견된다. 또한, 박상동 목사는 평신도도 예배를 인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평신도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섬김과 봉사를 이끌었다. 이것은 당시 목회상황에 비추어 보면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⑥ 다음세대 사역박상동 목사는 주일학교를 통한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박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1927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 주일에 유아세례를 베풀었음을 안동교회 80년사는 언급한다. 또한, 주일학교 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오늘날의 교회학교 조직과 거의 동일한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주일학교 조직을 교장은 담임목사, 부장은 평신도로 개편하고 조직을 새롭게 정비함으로써 주일학교 발전에 새로운 기틀을 놓았다. 하지만 하계아동성경학교(오늘날 여름성경학교)의 교장은 여전히 평신도가 교장을 맡게 함으로 담임목사가 모든 사역을 독점하지 않고 평신도와 함께 동역하는 성숙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주일학교를 거친 청소년의 신앙 교육을 위하여 오늘날의 중·고등부에 해당하는 안동기독소녀회를 창립하여 어린이와 장년 신앙교육 사이에 끼여 방치되었던 청소년의 신앙교육을 교회가 박차를 가할 수 있게 하였다. 주일학교의 조직 정비와 중·고등부의 신설은 다음세대를 발달단계에 맞춰 교육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이라고 할 수 있다. ⑦ 주일성수 강조더욱이 박상동 목사는 철저하게 주일을 성수하는 신앙풍토를 조성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당시(1928년) 보통학교에서 주일에 학생들을 등교시키는 것을 분명하게 반대함으로써 장년과 다음세대 모두에게 주일성수를 강조하였다. ⑧ 미래를 준비하는 사역박상동 목사는 미래를 위한 준비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1937년 4월 준공된 이래 지금도 주(主)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는 2층 석조건물인 예배당 신축을 위한 기성회가 조직되어 1926년 9월 19일 첫 번째 회의를 갖기도 하였다. 3) 오사카교회 사역① 교포의 삶에 관심박상동 목사는 1928년 안동교회를 사임하고 일본에 전도목사로 파송 받았다. 박상동 목사가 일본으로 간 이유는 교포들이 일본인들에게 천대를 받고 비참한 생활고를 겪으면서 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상동 목사가 일본에서 공부한 후에 비록 귀국하여 안동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 재일교포 선교를 위해 박상동 목사는 최선의 대안이었고, 일본에서의 목회가 어려움을 알고도 박상동 목사는 순종하며 출발하였다. 오사카에 도착한 박상동 목사는 목회의 장(場)을 넓혀 교포의 삶에 직접 개입하였다. 노동자의 인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간의 존엄성을 역설함으로써 기업가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일부 기업가들이 교포의 인권을 무시하자 경시청과 노동청을 방문하여 교포 노동자의 권익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박상동 목사가 일경의 요시찰 인물이 되게 했다. 박상동 목사는 유학생 시절 개척한 오사카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② 전도 사역박상동 목사는 비록 담임목사는 아니지만 순회목사로서 오사카 교회의 제직회 회장·공동의회 회장으로 오사카 교회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장년들의 성경공부와 주일학교의 변화, 그리고 부인전도대의 활성화를 통해 오사카교회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또한, 박상동 목사는 춘계전도, 하계전도, 하기천막전도대회, 신도배가운동 등 전도를 통해 교회부흥에 힘썼을 뿐 아니라 봄에는 야외예배를 실시하여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교포 성도의 교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사역 등을 통해 오사카 교회는 많은 성장을 가져올 수 있었다. 4) 나고야교회의 사역① 부흥사경회 및 전도 사역1932년 10월 나고야 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박상동 목사는 더욱 전도에 힘썼다. 앞서 언급한 김익두 목사 초청 부흥사경회는 무려 250명이나 되는 사람이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을 뿐 아니라 온 교회로 하여금 전도에 더욱 열심을 내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나고야 교회 70년사에 따르면 1936년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마산문창교회 담임 주기철 목사를 강사로 연합부흥회를 가졌는데 은혜가 충만해 새로 예수 믿게 된 사람이 수십 명에 이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는 안동교회에서 했던 전도 사역과 동일하게 1932년에는 전도대를 조직하고, 1933년에는 노변전도소를 산하전도소로 발전시켜 나고야 지역의 복음화를 한층 앞당기는 전기가 마련되었다. ② 다음세대 사역박상동 목사는 교포들의 다음세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주일학교의 신앙교육에 총력을 기울이게 하였고 큰 성장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박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기간 중에 나고야 교회는 설립된 지 7년 만에 조직교회가 됨으로써 나고야 지방의 중심교회로 발돋움 할 수 있었고 선교활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되었다. 또한, 기존의 기독청년면려회가 지역의 교회와 연합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③ 지방회 및 총회 사역특히 이때부터 박상동 목사는 개 교회를 넘어 지방회와 총회를 위해 헌신하기 시작하였다. 고달픈 교포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박상동 목사는 관서지방 지방목사로 사역하면서 1932년 재일조선야소교관서지방회에서 전도부장으로 피선되어 관서지방 전도에 진력을 다하였다. 또한 재일조선야소교관서지방회 부회장으로 피선되어 관서지방교회의 리더 역할을 했으며, 1938년에는 재일조선기독교회 제3회 정기대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됨으로써 박상동 목사는 전국 교회의 리더로 부상하였다. /논문 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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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2)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3. 복음전도자 박상동 박상동은 의성 비안에서 대구 계성학교까지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소달구지를 끌어주면서 통학했다고 한다. 겨울철에는 주막에서 꽁꽁 언 도시락을 먹기도 하면서 계성학교를 졸업하였다. 박상동의 뜨거운 학구열을 볼 수 있다. 박상동은 계성고보를 졸업하고 1921년 일본 고베로 건너가 고베신학교에서 유학할 때부터 오사카 지역에 있는 교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오사카 지역에 16개의 지 교회를 개척하였다. 1920년대 초는 이 지역에 동포사회가 형성되기 전이었다. 하지만 고베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박상동, 김우현 유학생이 교포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 결과 박상동, 김우현을 통해 일본 관서지방의 대표적인 교회인 오사카(大阪)교회가 1921년 5월 창립되었다. 이후 박상동은 사경회 인도, 감사절·성탄절에 성례전 담당 등을 통해 오사카 교회를 섬겼으며, 1925년 귀국하여 안동교회를 섬기게 된다. 하지만 일본 장감연합회의 요청에 의해 1928년 8월 전도목사로 일본에 파송된다. 순회목사인 박상동 목사는 특히 전도에 열심을 내었는데, 가정방문, 방문전도, 친목회 전도, 하기 전도, 노방전도 등을 통해 1929년 오사카 교회의 평균출석은 4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1930년 박상동 목사와 영(L.L. Young) 선교사, 그리고 신학 유학생들의 수고로 오사카 교회에 처음으로 청년회가 조직되었고, 1931년에는 기독청년면려회가 창립되었다. 1932년 나고야 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박상동 목사는 전도대를 조직하여 영혼구원에 총력을 기울인다. 특히 1932년 10월 17일부터 25일까지 김익두 목사를 초청한 부흥사경회에서는 연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이고 김익두 목사의 설교에 감동되어 믿기로 결심한 자가 250명이나 나왔다. 1933년에는 예배출석교인이 무려 200명을 넘어서게 되었으며, 예배당도 건축해 헌당한다. 1935년부터는 나고야 교회를 중심으로 연합부흥사경회를 개최하고, 전도소를 설립하고, 기독청년면려연합회를 개최하는 등 다방면에서 박상동 목사의 전도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특히 나고야 교회가 전도한 전도소가 1937년 동부교회로 독립했고, 1938년에는 서부전도소가 독립해 서부교회로 개칭하였다. 박상동 목사는 또한 주일학교 교육에도 더욱 힘을 썼다. 9명의 교사가 봉사하여 200여 명 이상의 아동이 출석하였고, 나고야 교회뿐 아니라 산하 전도소에서 6일~10일 동안의 주일학교 하기학교를 실시할 정도로 아동전도에 열정을 갖고 있었다. 해방 후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대구 남산교회에 부임했으며, 전도목사제도를 도입하여 지역사회를 복음화하는 일에 집중했다. ▲대구 계성학교. 1906년 미국 북장로회의 제임스 아담스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영남지방 최초로 설립된 중등교육기관. 박상동 목사는 계성학교 2학년 재학시절 대구 3.1운동에 참가해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4. 교육자 박상동 또한 박상동 목사는 안동교회가 1911년 설립한 계명학원을 위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계명학원은 설립 초기부터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자 1926년 4월 안동교회 제직회는 계명학원 후원회원 1인당 20전씩 걷기로 결의했고, 1927년 3월에는 신학기 개학을 앞두고 학제를 5년제로 개편함으로써 계명학원의 발전을 꾀하였다. 박상동 목사의 자구 노력으로 계명학교의 재정은 넉넉하게 되어 학사운영이 공립학교를 능가할 정도였으며, 특별히 1926년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수 있었다. 안동교회를 사임하고 일본에 전도목사로 파송된 박상동 목사가 오사카 교회를 순회목사로 섬길 때 유치원이 설립되었다. 당시 교포들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에 유아 교육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민자에게 있어서 자녀 교육은 모든 것이었고 미래의 소망이었다. 오사카 교회의 유치원은 안동교회 유치원(1948년 3월 개원)에 비해 무려 23년이나 일찍 설립된 것으로 박상동 목사의 목양적 비전과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군정시대에 통역사로 활동하다가 당시 신후식 목사가 교장으로 있던 대구중학교에서 교사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특히 박상동 목사는 남산교회를 담임할 때인 1948년 9월 25일 경제적으로 힘든 청소년들을 위해 복음고등공민학교(야학)를 운영하기고 결정하고 당회의 허락을 받아 동년 10월 15일 개교함으로써 학원 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5. 음악을 좋아했던 박상동 안동교회는 교회설립 초창기부터 교회음악이 뛰어난 교회였다. 사은라 선교사가 조직한 성소병원 찬양대가 안동교회 주일예배 시에 특별찬양을 한 것은 안동교회 찬양대의 효시가 되었다. 특히 권찬영 선교사의 부인 권애라 선교사는 1928년부터 시작된 안동교회 찬양대의 오랜 반주자요 지휘자였으며 어린이들의 노래지도도 도맡아 했다. 또한, ‘봄나들이’ ‘꽃 피는 삼천리’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초생달’ ‘봄 오는 소리’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겨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권태호는 안동교회에 다니면서 8세 때부터 인노절 선교사의 부인 캐더린에게 풍금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이후 음악적 천재성을 지닌 권태호는 1918년(당시 16세)부터 안동교회의 반주자요 독창자로 활동했다. 선교사들의 음악에 관한 관심과 권태호의 활동은 당연히 안동교회 교회음악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박상동 목사가 부임하기 전 부터 활발한 교회음악의 분위기가 안동교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안동교회 성도들은 뛰어난 반주자의 오르간 반주에 맞춰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좋은 지휘자의 지도하에 잘 훈련되고 연습된 찬양대의 찬양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안동교회의 음악적 분위기는 안동교회에 시무하게 된 박상동 목사와 그의 자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박상동 목사의 3녀인 박은수 사모에 의하면 박상동 목사는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비록 안동교회의 찬양대는 박상동 목사가 1927년 일본으로 떠난 후 1928년 1월 20일 최초로 조직되었지만 찬양대 조직을 위한 분위기 조성과 구체적인 준비는 박상동 목사가 시무했던 시기에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 관서지방 순회목사로 부임한 박상동 선교사의 음악적 관심은 오사카 교회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박상동 목사는 1932년 1월 오사카 교회 제5회 공동의회에서 성가대 조직을 결정한다. 또한 박상동 목사가 사역한 나고야 교회에서는 박상동 목사의 자녀들이 찬양대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그리고 1949년 12월 19일 평양 남산현예배당에서 평양성화신학교 신학생 성가대에 의해 한국 최초로 ‘헨델의 메시야’ 전곡이 연주됐는데, 그 반주자는 박상동 목사의 장남 박대선 목사의 부인이었다. 박상동 목사의 자녀들은 아버지처럼 음악을 좋아했고, 이것은 아버지와 그들이 출석했던 교회의 음악적 분위기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소천 권태호 음악가(1903~1972). 안동에서 출생. 어린시절 선교사 부인에게 풍금을 배웠으며, 청년기에는 안동교회에서 찬송가집 172장 전곡을 암보로 연주했다. 일본에서 성악을 배웠지만 고국으로 돌아와 민족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곡들을 작곡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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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자천교회(永川 慈川敎會)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2호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773 이 교회는 1903년에 미국인 선교사 어드만(Erdman)이 신자(信者)들과 합심(合心)하여 지은 것으로 전국에서 보기 드문 한옥교회이다. 건물은 동서쪽으로 약간 긴 네모형태의 우진각(모임)지붕이며, 주 출입구는 양 측면에 두었다. 내부는 후면의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중앙부는 칸막이를 설치하여 남·녀석을 구분한 예배공간을 마련하여 구한말의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였다. 구조는 나지막한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세워 절충식 지붕틀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양식의 건물은 선교 초기에 구미인(毆美人) 선교사들이 지은 한·양 절충식(韓·洋 折衷式)으로, 개신교사(改新敎史)와 건축사(建築史) 연구의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안이와 선교사와 권헌중 장로의 노고재에서 만남 자천교회 설립 이야기 자천교회 이야기는 1898년 안의와 선교사의 경북 동부와 동북 지방의 2개월 전도여행에서 시작한다. 그는 대구에서 출발하여 영천을 거쳐 청송으로 전도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 권헌중은 안의와 선교사와 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었다. 원래 자천교회 설립자 권헌중 장로는 경주의 작은 마을의 선비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 훈장이었다. 그가 서당 훈장으로 살아가고 있던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지배를 당하고 있는 시절이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 헌병들이 각 군 소재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며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지사들은 일본 헌병들과 맞서 싸웠다. 이러한 탓에 낮에는 일본 헌병의 천국이요. 밤은 의병 천지였다. 일제로부터 당하는 고통은 면소재지에 있는 양반과 천민들이나 할 것 없이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때문에 견디기 힘든 일제의 고통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자신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권헌중에게 있어서도 고통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경주에 있는 한적한 곳의 선비로서 서당 훈장의 생활을 접고 청송군 현서면 수락이라는 곳에 이주하여 살게 된다. 하지만 수락에서의 생활도 길지 않았다. 그곳의 생활도 접고 또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 현서면 수락에서 대구를 향하고 있었다. 안의와 선교사는 영천을 거처 청송으로 선교 여행을, 권헌중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서 대구로 각자의 목적을 향하여 길을 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던 이들의 만남은 영천시와 청송군의 경계를 잇는 ‘노고재’라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권헌중은 노고재에서 휴식을 하던 중 안의와 선교사를 만나게 된다. 권헌중은 당시 처음 만나는 외국 사람이었고, 모양새도 우리나라 사람과 달리 키와 눈과 코가 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말을 서툴게 한 탓에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또 권헌중과 함께 동행하던 가족들과 노비, 머슴들은 자신들의 모습과 많이 다른 안의와 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괴물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한바탕 웃는 일도 벌어졌다는 우스운 일화도 있다. 권헌중은 노고재에서 안의와 선교사와 첫 만남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에 관해서 듣게 되었다. 안의와 선교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관하여 들은 권헌중은 대구로 이주 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보현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신촌면 자천리에 작은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그곳에 머물며 안의와 선교사와 왕래하면서 성경 말씀을 배웠다. 한국 초기 교회들의 역사가 대부분 그러하듯 자천교회 역시 작은 초가집의 사랑방에서 시작이 되었다. 권헌중은 자기가 살고 있는 초가집을 예배당 겸 서당으로 사용했다. 낮에는 서당으로 사용하며 한문을 가르쳤다. 저녁에는 함께 성경을 공부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된 자천 교회의 당시 교인은 서당에 다니는 문동과 권헌중을 따라온 노비와 머슴들이 전부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권헌중은 당시 나라에서 처음으로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자신이 먼저 상투를 자르므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개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데리고 있던 노비들의 문서를 태워버리고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계급과 신분을 타파하고, 그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었다. 복음에 대한 권헌중의 열심에 안의와 선교사도 덩달아 신이 나서 대구에서 자천까지 열악한 도로 상황을 뒷전으로 하고 자주 방문하여 성경에 관하여 토론하며 확실한 교인들로 만들어 나갔다. 초가집 사랑방의 자천교회의 모임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신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공간이 협소하였다. 따라서 초가집 사랑방이 아니라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대구 지방의 기독교 사립학교인 희도학교가 안의와 선교사에 의해서 대구제일교회 구내 초가집에서 1900년 11월 11일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1907년 10월 23일에는 신명학교가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서 개교하게 된다. 대구를 중심으로 학교를 개교한 후 안의와 선교사는 1902-1910년 사이에 경북 각처 교회들에게 400원씩 보조하여 학교를 설립하게 하였고, 각 교회는 학부대신(현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얻어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당시 영천지방에 있는 교회도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름이 밝혀진 학교는 평천교회의 기독양덕학교, 신령교회의 흥화학교, 우천교회의 기독진도학교와 더불어 권헌중은 운영하던 서당을 폐하고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2년제 학교인 신성소학교의 설립을 하였다. 하지만 자천교회가 설립한 신성소학교의 설립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권에서 ‘1913년 남학교를 설립하여 생도(生徒) 50명을 교육하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 ‘경북교회사’에서는 ‘1914년 자천교회는 학교를 설립하여 생도 50여 명을 교육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연대를 학교의 설립 연대로 볼 수 없다. 이는 학교가 설립한 후에 노회나 총회에 보고된 연대이기 때문이다. 노회 보고 연대를 기준과 2년 재 학교라는 것을 고려하고, 초가집 교회에서 목조건물 교회 건립을 고려해 볼 때 신성소학교 설립 연대는 대략 자천교회 목조 건물을 헌당 하던 때와 비슷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권헌중 장로가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세운 신성소학교는 처음 남자 반을 모집했다. 그러던 중 안의와 선교사가 여자반도 모집할 것을 권헌중에게 권유했다. 그는 권유를 받아들여 여학생을 모집했지만 지원자가 없었다. 아무리 설득해도 지원자가 없어서 자신의 딸인 권수기씨를 입학시켜 여학생 1호가되었다. 후에 권수기씨는 신명여교에 입학하여 제2회 졸업생이 되었으며, 그 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권헌중은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신성소학교를 설립하므로 복음의 요람으로 자천교회뿐만 아니라 교육의 요람으로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용한 시골에서 글을 가르치던 선비 권헌중은 안의와로부터 받은 복음에서 출발하여 자천이라는 시골 동네에 초가집 예배당과 서당, 그리고 목조 기와의 ‘一子’형 예배당을 건립하여 복음 전도와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어 왔다. 권헌중은 새롭게 건립된 예배당에서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영수의 직분을 가지고 교회를 섬겼다. 1915년 당시 권헌중과 더불어 서석희와 정해민이 자천교회 영수로 섬기고 있었다. 세 명의 영수를 중심으로 교회가 든든히 서가던 중 첫 번째 장로를 장립 할 수 있는 시기가 자천 교회에 찾아왔다. 교회는 권헌중을 장로로 세워줄 것을 결정하고 1920년 6월 11일 제8회 경북 노회에 청원을 하여 허락을 받은 후 공부하였다. 노회의 절차를 밟아 권헌중은 장로 청원이 있은 후 1년 반이 조금 넘은 1922년 2월 26일 오전 11시 새롭게 건립된 본교회 목조 예배당에서 위철지 목사의 주례로 장로 장립을 가지게 됨으로 교회 설립이후 첫 장로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자천교회는 처음으로 당회가 조직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권헌중이 장로로 임직하던 해인 1922년 5월 13~18일까지 자천교회는 새롭게 건립된 목조 예배당에서 김성로 목사를 초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부흥회에 참석한 사람은 본 교회 성도들 50여 명과 각처 교회에서 온 신자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중에 풍성한 은혜를 받았다. 또 저녁에는 200명이 넘는 신자들이 말씀을 청강하는 동시에 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60여 명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가 40여 명이 되었다. 부흥회를 통하여 교회를 보수하기 위해서 헌금 5백10여 원이 드려지므로 더 풍성한 은혜와 결실이 있었다. 권헌중은 장로 장립을 기점으로 하여 교회의 활동도 왕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경북노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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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1)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정재순 목사 鄭在淳, 1878~1948) 1900년 초 어느 날 정재순 목사는 부해리(傳海利, H.M. Bruen) 선교사와 만났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났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정재순이 20을 갓 넘은 나이에, 경산 어느 마을에서 부해리 선교사를 만났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이후 정재순은 단 한 번도 교회를 떠난 적이 없이 초창기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교회 안에 세워진 기독교학교의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며,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함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는 일을 했다. 조사로 여러 교회를 섬기던 정재순은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던 1914년, 그가 섬기고 있던 대구 신정교회(현 대구 서문교회)에서 신정교회 초대장로로 임직하게 된다. 이후 1915년 평양신학교 제8회로 졸업한 후 목사임직을 받고 신정교회 첫 한국인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초임지인 대구 신정교회에서 정재순 목사의 사역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역이었다. 여자 청소년을 위한 야간 학교를 개설했고, 대구 3·1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1922년 6월 안동으로 사역지를 옮긴 후, 그는 전도중심의 사역을 통해 안동 땅을 기경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계속적인 그의 관심사인 학원선교를 위해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학교를 설립했으며, 교회분립을 통해 안동 땅의 부흥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안동을 떠난 이후 대구를 근거지로 둔 정재순 목사는 본격적인 복음전파자의 길을 걸었다. 청도, 영천, 경산, 달성, 고령, 월성, 경주, 영일, 칠곡, 상주, 군위, 선산, 의성군 등에 28개 예배처소를 개척했다. 이때 그의 부인인 손주안 사모는 함께 교회를 개척하고 함께 성도를 섬기고 돌봄으로써 그의 소중한 동역자가 되었다. 정재순 목사는 60세에 그의 첫 담임 목회지인 대구 신정교회로 돌아가 사역을 마무리했다. 정재순 목사는 목회 전반전과 후반전을 똑같은 열정과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불꽃을 불사르며 살았을 뿐 아니라 성도들의 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믿음의 사람이었다. 1. 목사 임직 이전의 인간(人間), 정재순 정재순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며 극히 단편적인 것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 교회역사 주영연구소장 이교남 목사의 연구에 의해 2013년 새롭게 밝혀진 정재순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부해리(傅海利, H.M. Bruen) 선교사 정재순은 1878년 5월 24일, 경북 경산군 남천면 신기동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정진호, 모친은 김소사의 2남 4녀 중 장남이며, 부인은 손주안이다. 정재순은 외동아들을 두었는데 아들은 정원조, 자부는 손기순이며, 그의 후손은 현재 대구에서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정재순 가문은 당시 여느 가문처럼 유학의 집안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우고 한학을 수학하며 유학을 따르는 집안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묘는 칠곡에 있었는데, 1982년에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재순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할 때 교인으로 생존한 성도들이 기억하고 있는 정재순 목사는 천성이 어질고 중후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성도들은 후덕하고 인정이 많은 교육자요 목회자인 그를 신앙과 인격 모든 면에서 존경하며 영적 리더십에 순종했을 것이다. 정재순 목사는 교인들을 포함한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주는 주의 종이었다. 2. 선교사를 만나 회심(回心)한 사람, 정재순 유교가 뿌리 깊은 가정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정재순은 처음에 기독교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증손자에 따르면 정재순이 선교사를 구타하고 쫒아내려고 선교사를 찾아갔다가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전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정재순 목사는 부해리 선교사를 찾아갔을 때 선교사의 사냥개가 빵을 다리 위에 놓고 주인이 먹으라는 명령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개도 기도하고 난 후에 밥을 먹는데, 사람인 나는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지 않겠는가?”하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1900년 초 대구·경북 지방은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이 지역을 정해 선교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 부해리 선교사, 안의와 선교사, 방위렴 선교사는 각각 경북 서부지방, 동부지방, 북부지방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선교사들은 다른 지역의 선교와 교회에 어느 정도는 관여하고 있었다. 정재순의 거주지인 경산 사월교회는 1898년 4월 안의와 선교사가 설립했으며, 부해리 선교사와 맹의와 선교사가 뒤이어 2대, 3대 담임 목사를 맡았다. 부해리 선교사는 1905년 사월교회에 부임했지만, 이미 1903년 이전에 경산을 방문해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따라서 정재순은 1903년 이전에 부해리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회심했다고 보여진다. 3. 어린이 기독교학교의 교사(敎師), 정재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정재순은 당시 어린이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교사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정재순의 증손자의 증언에 따르면 1905년 그는 경산 사월교회가 문을 연 계동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계동학교의 초대교사는 정재순, 전기식, 문사인 제씨였다. 계동학교는 오늘날 초등학교 수준의 학교로 신교육에 힘쓰며 인재양성에 앞장섰다. 이후 1910년경 경산에서 대구로 온 정재순은 대구 남성정교회가 운영하는 기독교 초등학교인 희도보통학교 전신(前身) 대남소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당시 교회 중심으로 세워진 기독교 학교들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백성들에게 복음 뿐 아니라, 근대교육의 통로로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정재순은 경산에 이어 대구에서도 기독교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다음세대의 기독교 교육에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인 다음세대 신앙교육에 관한 애정은 안동교회에 부임한 이후 곧이어 기독교 학교를 설립한 것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1911년 개교한 계동학교를 포함한 사월교회의 예배당과 종탑, 교회 정문과 화장실을 기억을 되살려 추정하여 그린 사진이다. 종탑을 사이에 두고 예배당과 계동학교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아마 계동학교를 통한 다음세대의 교육을 그만큼 중시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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