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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식 목사 초청, 포항동부교회 10월 17일부터 3일간 심령대부흥회▲ 김의식 목사(서울 치유하는교회 담임) 포항동부교회(담임목사 김영걸)는 지난 17일 오후 7시 교회 본당에서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를 주제로 심령대부흥회를 열었다. 부흥회는 19일 오후 7시까지 매일 오전 5시, 오후 7시 두 차례씩 모두 5회 이어졌다. 이번 부흥회는 김의식 목사(서울 치유하는교회·사진)가 ‘상한 마음의 치유’, ‘어디서 떨어졌는가’, ‘행복한 가정의 회복’,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란 제목으로 설교를 한다. 김 목사는 한양대 공대와 성서침례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미국 시카고 신학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 목사는 호남신학대 교수, 장로회신학대 겸임교수, 미국 미드웨스트 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영등포노회 노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치유하는교회 담임목사, 세계치유선교회장,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103회 총회 서기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포항동부교회는 지난 9월부터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 전도하자”라는 주제로 ‘제1차 새생명 대행진’을 진행하고 있으며, 10월 28일에는 ‘정재준 장로(안산중앙교회) 초청 전도간증집회’를, 11월 4일에는 ‘조혜련 초청 연예인간증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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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안노회 제184회 정기노회, 신임 노회장에 이위철 목사 취임▲ 신임 노회장 이위철 목사 ▲ 제184회 경안노회 신임 임원진 예장통합 경안노회 제184회 정기노회가 10월 11일(목)~12(금)까지 안동서부교회당에서 열렸다. 목사 회원이 242명 중 출석 210명 결석 32명, 장로 회원이 160명 중 출석 151명 결석 9명, 합계 402명 중 출석 361명 결석 41명으로 노회가 성회 되었다. 개회예배는 권오수 노회장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성찬예식 후 회원점명, 개회선언, 회순채택 순으로 회무처리에 들어갔다. 이어 임원선거 결과 신임 노회장에 이위철 목사(안덕제일)가, 부노회장에 김영윤 목사(현동)와 김성구 장로(소산)가 선출되었다. 회순에 따라 각 부와 위원회의 보고가 있었고, 교회에 관한 건, 목사에 관한 일, 장로에 관한 건, 전도사에 관한 건, 임원 인준 허락 등을 처리했다. 그 외에 경안학원전권위원회 위원 조직을 임원회에 위임, 근대기독교 박물관 건립을 위한 특별위원회 신설 청원건을 임원회에 위임하는 등 중요한 안건들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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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회 경안노회장로회 신임회장에 김도년 장로 추대신임회장 김도년 장로 예장통합 경안노회장로회 제61회기 정기총회가 지난 9월 28일 오전 10시 안동동부교회(담임목사 진영신) 예배당에서 개최됐으며 신임회장으로 김도년 장로(길안교회)를 추대했다. 김도년 장로의 인도로 드려진 1부 예배에서는 김동환 장로(직전회장)의 기도, 최태권 장로(회록서기)의 성경봉독, 최종협 목사(길안)의 ‘자기자리로 돌아가자’(룻1:1~10 )란 제목의 말씀 선포, 박영길 장로(전회장 친목회장)의 추모기도, 장인호 장로(회계)의 헌금기도, 장로회가 제창 후 진영신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축하 시간에는 필그림 소년소녀합창단의 영혼을 울리는 감동음악회가 펼쳐졌다. 3부 회의는 회장 김대현 장로의 개회사, 전국연합회장 안옥섭 장로의 김대현 장로에 대한 공로패 수여, 안옥섭 장로·신용부 장로·권오수 목사의 격려사와 축사가 이어졌다. 이후 각부 보고를 받은 후 임원선거를 통해 김도년 장로(길안)가 신임회장으로 추대되었고, 김성대 장로(안동서부)가 수석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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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노회, 21일(주) '제150회 기념 연합집회' 개최한다▲강사로 나선 이승희 총회장(좌)과 소강석 목사(우) 예장합동 경동노회(노회장 류광하 목사)는 ‘경동노회 제150회 기념사업’으로 오는 21일(주) 저녁 7시 포항 큰숲교회(장성진 목사 시무) 본당에서 연합집회를 개최한다. 이번 집회에서는 예장합동 이승희 총회장(반야월교회)이 개회예배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으라”는 제목으로,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가 연합집회에서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다. 1부 개회예배는 장재덕 목사(영천서문)의 인도, 부노회장 박문균 장로(소동)의 기도, 이호현 목사(대광)의 축사, 류광하 노회장(오천사랑의)의 축도 등의 순서가 있다. 2부 연합집회는 김중석 목사(경주성광)의 인도, 장성진 목사의 기도, 이관영 목사(영천문화)의 축도 등의 순서가 있다. 3부는 김중석 목사의 인도로 모범교회 및 성도에게 표창패를 수여한 후 박성환 목사(동해성남)의 기도로 모든 순서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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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2)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 정재순 목사 (鄭在淳, 1878~1948) 4. 선교사의 동역자인 조사(助事), 정재순 부해리 선교사의 전도로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된 정재순은 기독교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다가 교회를 돌보는 조사로 사역하게 된다. 1908년에는 방혜법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상주 속산교회, 사산교회, 금혼교회, 등 상주지역에서 시무했다. 1909년에는 안의와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경산 삼복교회(현 경산교회), 사월교회, 전지교회(현 남산교회), 금곡교회, 복사교회(현 자인교회)를 섬겼으며, 1912년 경산 사월교회, 전지교회, 복사교회, 대구신정교회(현 서문교회)에서 조사로 활동했다. 그 당시 조사(助事, Helper)는 초기 한국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들은 선교사의 가옥,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나 병원에서 일했으며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교사들의 따뜻한 사랑과 헌신을 발견하고 최초의 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적으로 복음전파에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선교사들의 통역자 역할을 했고, 선교사 대신 일정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훗날 많은 조사들이 교회를 전적으로 섬기는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고 목회자가 되었다. 장로교 선교사의 조사요 지역 교회의 장로로 수년 동안 이미 교회사역에 충성을 다하고 있던 정재순도 이 공식에 예외 없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5.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노(老)학생, 정재순 정재순은 1912년 봄, 35세 나이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정재순은 1912년 3월 6일 대구남문교회당에서 모인 제1회 경상노회에 입학을 청원하였고, 허락을 받았다. 이때 경상노회에 신학입학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은 사람은 정덕생, 김기원, 서성오, 김공명, 박영조, 정재순, 김상삼, 박성애, 박덕일, 김응진 제씨였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정재순은 3년간의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1915년 6월 15일 평양신학교 제8회로 졸업하였다. 평양신학교는 ‘신령(神靈)한 목사’라는 교육목표처럼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1901년 평양 대동문 옆 마포삼열 자택에서 개교되었다.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폐교되기까지 34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37년 동안 총 79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제8회 평양신학교 졸업생은 28명이다. 이때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됐는데, 이자익, 방효원, 정재순 제씨가 바로 그들이다. 1915년 제8회 평양신학교 졸업 앨범으로 사진 중앙에 교사로 수고한 선교사들이 있고, 그 주위로 졸업생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정재순 목사는 맨 아래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이다. 6. 대구·경북지역의 복음 전도자(前導者), 정재순 정재순 목사는 조사로 사역할 때도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했다.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칠곡 지역에 설립된 16곳 교회 중 2곳이 정재순 목사가 개척한 교회이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정재순 목사는 1915년부터 1922년까지 대구 신정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면서 대구 침산교회, 남산교회, 대구 범어교회에서도 사역을 감당했다. 1919년 대구 3·1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어 있다가 출옥한 후에는 신정교회를 사임하고 1922년 안동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5월 안동교회를 사임하고 다시 대구로 돌아온 정재순은 1925년부터 1938년까지 대구 동산병원(현 대구 동산의료원) 직원 전도회 담당 목사로 시무했다. 비교적 주일에 자유로웠던 정재순 목사는 한 교회에 매여 있지 않고 약한 교회들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가 섬긴 교회는 경산 고모교회(폐지), 영천 사창교회(폐지), 영일 기계교회, 달성 덕지교회, 금릉 봉곡교회, 성주 구릉교회, 영천 삼귀교회(폐지), 청도 예리교회, 칠곡 금암교회(현 동명교회), 달성 조암교회(폐지), 달성 방촌교회, 청도 구촌교회(폐지), 청도 대천교회, 영천 대제교회(폐지), 칠곡 기성교회, 월성 입실교회, 상주 양촌교회, 경주 유담교회, 경산 경동교회, 고령 유동교회(현 운수제일교회), 외동교회(폐지), 군위 삼산교회(폐지), 고령 평지교회(폐지), 선산 석우교회, 청도 음지교회(폐지), 상주 화령교회, 의성서제교회, 오로교회 등이다. 이후 정재순 목사는 1938년부터 1946년까지 신정교회에서 두 번째 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한편 정재순 목사는 기존의 경상노회에서 분리된 경북노회에서 1919년, 1939년, 1945년 세 번에 걸쳐 노회장을 역임하며 대구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로 영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7. 대구 3·8만세운동의 주역(主役), 정재순 대구지역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 3월 10일, 3월 30일에 걸쳐 총 세 차례 있었다. 당시 기독교 지도자인 남성정교회의 이만집 목사와 신정교회의 담임목사이며 당시 경북노회장인 정재순 목사, 남산교회의 김태련 조사, 백남채 장로, 계성학교 교감선생인 김영서 등이 시위를 주도했다. 이 만세운동으로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는데, 당시 동원 담당이었던 정재순 목사도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정재순의 아들인 정원조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정원조는 당시 계성학교 학생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6개월 동안의 징역으로 오래 살지 못하였다. 부자가 함께 3·1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는 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남을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정재순 목사는 일제 말엽, 친일(親日)에 가담하게 된다. 1938년 6월 중순경, 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자발적인 총후봉사활동을 내세우며 조직한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간섭과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던 1939년을 지나면서 노회장이란 직함으로 인해 이 단체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활동은 정재순 목사의 분명한 과오이지만 그는 회심한 이후 40여 년 동안 신앙, 사역과 헌신을 통해 교회와 민족과 역사에 긍정적인 기여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초창기 대구에 소재한 교회의 지도들로 좌측으로부터 박영조, 이만집, 김기원, 정재순 목사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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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지방협력포럼, 성공 개최를 위한 첫발 내딛다포항시는 오는 11월 7일부터 9일까지 2박3일간 포항시 일원에서 열릴 예정인 ‘제1차 한-러 지방협력포럼’의 성공개최를 위한 추진상황 보고회 및 추진위원회 출범식이 갖고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10일 포스코 국제관에서 열린 이날 행사는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이강덕 포항시장, 장경식 경북도의회 의장, 서재원 포항시의회 의장, 김재동 포항상공회의소 회장을 비롯하여 외교부와 북방경제협력위원회 등 유관기관·단체 등이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러 지방협력포럼’의 준비상황을 소개하고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를 당부했다. 포럼 성공개최를 위한 구호 제창을 시작으로 경북도지사와 포항시장을 공동위원장으로 각 기관·단체 관계자, 전문가, 시민 등 33명으로 구성된 추진위원회를 출범하는 한편 분야별 세부추진계획을 설명하는 추진상황 보고회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한-러 지방협력포럼은 두 나라간 상생의 미래를 여는 첫걸음이자 경북도가 북방경제의 중심으로 도약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강덕 시장은 “포럼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하여 포항이 글로벌도시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무엇보다 지진과 철강경기 침체로 위축된 지역에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러 지방협력포럼’은 지난해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렸던 한-러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하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수락하는 형식으로 포럼 출범을 합의하고 공동 성명서를 채택했다. 오는 11월 포항에서 열리는 첫 포럼에는 서울특별시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17개 광역자치단체가, 러시아 측은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연방관구 소속의 9개 주 단위 지자체가 참가하는 대규모 국제행사로 치러질 예정이다. 이번 포럼은 두 나라 지방간의 경제·통상, 교육·과학, 문화·관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확대를 위한 방안들을 논의하는 상호교류의 장이 될 전망이다. 지난 2014년 첫 시장 취임부터 북방교류협력에 관심을 갖고 러시아와 중국 동북3성 등과의 발 빠른 교류를 펼쳐왔던 이강덕 시장은 약 한달 앞으로 다가온 이번 ‘한-러 지방협력포럼’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하여 포항시가 ‘환동해중심도시’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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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지역자율방재단, 태풍 피해복구에 구슬땀경상북도지역자율방재단(회장 이중규)은 10일(수) 제25호 태풍 ‘콩레이’로 피해를 입은 영덕지역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피해복구 활동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영덕군은 지난 10월 5~6일 발생한 태풍으로 309mm의 폭우와 강풍으로 사망 1명의 인명피해와 1,113동의 주택침수, 328세대 551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경북도 지역자율방재단원 300여명은 태풍으로 침수된 영덕군 강구면․축산면에서 배수작업, 집안가재도구 정리와 도로변 쓰레기를 정리하는 등 하루라도 빨리 영덕 주민들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피해복구에 힘을 보탰다. 지역자율방재단은 지난 1967년 제정된 풍수해대책법에 따라 지역의 지리와 실정에 밝은 이․통장, 민방위대원을 주축으로 구성된 수방단이 2013년 자연재해대책법 개정에 따라 전국 시도에서 지역자율방재단을 구성하였으며, 경북도는 23개 시군 278개단 5천191여명의 단원들이 도내 거주지에서 재난예방활동과 복구지원을 하고 있다. 김남일 경북도 재난안전실장은 “재난 예방과 복구에는 행정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이번 태풍과 같은 재난에는 지역자율방재단 등과 같은 단체들의 봉사활동이 실질적인 큰 도움이 된다”며 많은 도민들의 동참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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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방농악보존회, 전국 농악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중방농악보존회(회장 이승호)는 지난 6일 올해 처음으로 대통령배로 승격된 제20회 김제 지평선 전국농악 경연대회에서 전국 10개 팀이 참가한 가운데 경연을 펼쳐 대회 첫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중방농악보존회(회장 이승호)는 2004년 설립되어 꾸준히 활동하고 있으며, 각종 대회에서 국무총리상 3회, 장관상 15회, 도지사상 13회 등의 수상을 하여 경산의 문화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승호 중방농악회장은 “단원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열심히 해준 결과”라며 단원들에게 공을 모두 돌렸으며, “앞으로도 증진하여 중방농악의 맥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도록 하겠다.“ 며 수상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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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사 봉사회 경산지구협의회, ‘사랑의 무료급식’ 행사 실시대한적십자사 봉사회 경산지구협의회(회장 이상임)는 5일 서부1동 소재 성암생활체육관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사랑의 무료급식’ 행사를 개최했다. 태풍 콩레이의 영향으로 많은 비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적십자봉사회 경산지구협의회 읍면동지역 봉사회원 등 50여 명이 참여해 어르신 300여 명에게 현장에서 정성껏 준비한 소고기국과 반찬을 배식하고, 후식으로 다양한 떡과 과일을 제공했으며, 아울러 「일곱 빛깔 색소폰 동호회」의 신명나는 색소폰 공연으로 모두가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이상임 회장은 “부족하지만 회원들이 정성껏 준비한 행사에서 서부1동 어르신들이 오늘 하루 따뜻한 점심 한 그릇과 작은 공연을 통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특히 급식 행사 준비를 위해 고생하신 서부1동 봉사회 윤분선 회장님을 비롯한 회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행사장을 찾은 최영조 경산시장은 “투철한 봉사 정신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대한적십자사 봉사회원들에게 감사한다”며, “앞으로도 소외된 이웃과 어르신들에게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통해 훈훈한 인정이 넘치는 지역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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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4‧끝)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대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11. 이대영, 사역을 통해 일본에 저항하다 3·1운동 이후 민족혼을 배우기 원했던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나라 기독교 청년운동의 출발이자 상징이 된 기독청년면려회는 1921년 2월 5일 이대영 목사가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교회를 섬길 때 안동교회에서 최초로 조직되었다. 면려회에 가입한 청년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봉사했으며, 복음을 들고 전도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고, 헌신을 다짐하는 예배 순서를 가졌다. 또한, 야간학교를 개설했으며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 농촌사업 등 범국민운동을 다각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대영 목사가 1921년 안동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이런 성격을 갖고 있는 기독청년면려회 운동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은 비록 그가 목회자였지만 어떤 정신을 갖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927년에 준공된 선도당. 선교센타로 이대영 선교사가 예배 인도와 성경 교육을 했다. 이와 같은 이대영 목사의 대일관(對日觀)은 산동반도에서 선교하던 시절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약 10여 년 동안 이대영 목사와 동역했던 방지일 목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당시 일본교회는 일제치하에 있던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선교에 힘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인 목사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면서 함께 선교하자고 했고, 이대영 목사는 ‘우리가 너희 마루는 닦아 줄 수는 있지만 목사로서는 함께 못 한다’고 거절했다. 이후 일본 목사에 의해 고발되어 일본경찰에게 밤새도록 조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 억울해서 이대영 목사와 손을 잡고 통곡하며 운 적이 있다.” 이대영 목사는 일제의 압제 하에 있는 조국을 위해 무력 투쟁은 할 수 없었지만 조선의 국민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목사로서 최소한의 저항정신을 갖고 드러내었던 것이다. 12. 이대영, 일평생 기도의 사람으로 살다 이대영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의 은사가 있었고, 한 번 무릎을 꿇으면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던 기도의 종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5시부터 9시나 10시 까지 계속해 기도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이 목사와 아침 식사를 할 수 없었으며, 점심이나 저녁식사만 함께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사역을 시작할 때 반드시 기도로 시작할 정도로 기도의 사람이었다. 특히 ‘성령을 충만히 받자’는 설교에서 이대영 목사는 중국 화북신학교 교장 가옥명 박사의 말을 인용하여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성령의 능력이 많고, 기도를 적게 하면 성령의 능력이 적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성령의 능력이 없다.” 누구보다 기도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영 목사는 쉬지 않고 기도했으며, 그의 사역 역시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는 기도의 사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13. 이대영,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인 김영옥을 만나다 이대영 목사는 1921년 1월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고시위원 중에는 안동교회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대영의 목사 임직에 김영옥 목사가 깊이 관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목사 임직 후 1달도 경과하지 않은 1921년 2월, 이대영 목사는 김영옥 목사 뒤를 이어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칭따오 신의로에 있는 이대영 선교사 사역 병원과 학교. 그러나 이대영 목사는 이때 김영옥 목사를 처음으로 만난 것이 아니다. 훗날 김영옥 목사의 손자인 김형태 목사가 결혼식 장소를 부탁하기 위해 승동교회 이대영 목사를 찾았을 때 그는 자신이 김영옥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음을 김형태 목사에게 밝혔다고 한다. 이처럼 김영옥 목사는 이대영 목사의 세례와 목사 임직에 관계가 있었으며, 후에 1957년 9월 그의 손자 결혼식 주례를 이대영 목사가 승동교회에서 함으로 그 긴밀한 관계가 이어졌던 것이다. 14. 이대영, 중국을 떠나 한국교회를 섬기다 이대영 목사는 첫 번째 담임사역지인 안동교회에서의 14개월, 1948년 가족을 남겨둔 채 상해를 거쳐 귀국함으로써 두 번째 사역지인 중국 산동에서의 33년을 마치고 마지막 사역지인 서울 승동교회에 67세인 1952년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3년 후인 1955년 위임목사가 되었다. 1955년 4월 7년 동안 중국에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귀국하였고, 총회는 선교사역 30주년 기념예배 및 환영회를 개최하여 주었다. 이후 이대영 목사는 1956년 9월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4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신앙의 대선배로서, 인격자로서, 또한 총회장으로서 이대영 목사는 은혜롭게 회의를 진행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1959년 장로교단 분열 시에 이대영 목사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승동교회에서 개최된 제59회 총회에서 교단분열의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교단 분열의 여파는 승동교회의 분열로 이어졌고, 이후 4년 동안 계속된 분쟁으로 70세가 넘은 이대영 목사는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분쟁이라는 난제를 잘 마무리 하고 안정을 찾은 이후 1968년 11월 2일 만 81세로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였다. ▲본국에서 개회된 장로교 총회에서 선교보고를 하기 위해 선교지인 산동성을 떠나기 전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결론 이대영 목사는 2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61년 동안 묵묵히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감당한 신실한 종이었다. 그의 신앙여정은 핍박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집안의 핍박을 피해 흥해에서 목회자로서 훈련을 받은 그는 결국 고향인 예천 금곡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이 되었고, 여러 교회의 전도인과 조사로 사역하다가 평양신학교를 마친 후 목사안수를 받고 안동지역의 중심교회인 안동교회의 제2대 담임목사로 사역하였다. 비록 14개월이라는 짧은 시무 기간에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나나낸 뛰어난 목회자였다. 특히 그는 거룩한 비전을 쫓는 순종의 종이었다. 1922년 총회의 부름을 받고 중국 산동반도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한인들을 돌보았던 탁월한 리더였다. 중국이 공산화된 후 선교사역을 중단하고 철수한 후 서울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41회 총회장으로 교회와 총회를 섬긴 영적 거인이었다. 이대영 목사는 넓은 포용력이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뿐아니라 중국에서도 많은 이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었다. 또한 재중동포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애국자였다. 그는 때때로 오늘 해야 할 것과 하지 못할 것을 용기 있게 일본인 앞에서 증언했다. 그 결과 일본 경찰에 여러 날 동안 취조를 받아야 했다. 또한 그가 말씀을 전한 마을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겼던 안동에서 어린이, 청년, 그리고 장년의 부흥이 일어났다. 중국 땅에서도 그가 섬겼던 중국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성장하고, 교회는 든든히 서 갈 수 있었다. 이대영, 그는 쉬지 않고 믿음으로 간구하는 기도의 종이었기 때문이다. 이대영 목사는 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예수님을 위해 헌신했던 하나님의 종이었다. 믿음의 선배인 그가 우리 마을, 안동지방에서 출생하고, 안동에서 교회를 섬겼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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