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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배출한 첫 해외선교사, 이대영 목사(3)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이 대 영 목사 (李大榮, 1887~1968) 9. 이대영, 중국선교를 향한 부르심에 순종하다 이대영 목사는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교회에 충성을 다하던 중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국의 부름을 받고 중국 산동 반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1913년 한국교회 최초로 해외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목사는 중국 산동지방 선교사로 파송된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현지 부적응과 건강문제로 1917년 귀국하였다. 위기에 처한 선교를 위해 총회는 1917년 홍승한과 방효원을 산동에 다시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1918년 박상순, 1922년 이대영, 1931년 김순호, 1937년 방지일을 산동에 파송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초기에 파송된 선교사는 이대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북출신이었다. 따라서 이대영은 영남지역에서 세계에 파송한 첫 선교사인 것이다. 이대영 목사는 우선 가족을 두고 홀로 1922년 6월 13일 중국 래양에 도착하였다. 평북노회 여전도회는 이대영 선교사의 선교비를 후원함으로써 선교에 동참하였다. 그는 래양에 도착한 후 10개월 동안 언어공부와 현지적응에 열중했으며, 이듬해인 1923년 4월 즉묵(卽墨)을 선교지로 정하고 한국을 떠나 중국에 도착한 가족과 함께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중국선교에 헌신하고자 중국 교역자 모임에 참석할 뿐 아니라 경안노회에서 이명하여 중국 산동성 중회기독교회 교동(嵺東)노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현지인과의 이질감을 불식하기 위해 항상 중국인 옷을 입고 중국인들과 더불어 생활했으며, 특히 표준중국어와 산동어를 익혀 중국말로 설교할 수 있을 즈음에는 왕성한 전도와 교회개척에 전력투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회의 심각한 재정압박과 선교지의 어려움으로 선교사의 소환 문제가 총회의 중요한 안건으로 상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시 귀국한 이대영 선교사의 끈질긴 설득으로 1925년 9월 제14회 총회는 이대영 선교사의 연임을 결정했다. 이에 힘을 얻은 이대영 목사는 즉묵으로 돌아가 조선인 교회를 돌보며 1927년 8월 즉묵예배당과 전도기관 건물을 준공할 수 있었다. 이대영 목사는 뜨거운 복음의 열정으로 교회개척과 돌봄 사역, 전도지 배부 및 순행, 매서사역, 강연 및 사경회 인도 등 즉묵, 궁가장, 박자, 오산위, 대인관, 지방, 풍성, 곽리 등 즉묵현 주변 8개의 지방교회들을 돌보았다. 또한 파송 받은 지 6년 동안 열심히 사역을 감당한 결과 1928년 11월 그가 속한 교동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되었고, 한국장로교회가 1923년 외국에 최초로 설립한 성경학교인 내양화동 성경학교 교장으로 사역하였다. 이대영은 선교사역을 총회에 보고하기 위해 가족을 남겨 둔 채 홀로 1948년 7월 일시 귀국했다. 하지만 총회를 마치고 출국을 기다리던 중 10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을 세우게 되어 중국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국내 중국인 교회인 중화기독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기도 했다. 그는 다시 중국에 선교의 문이 열릴 때까지 당분간 선교사 신분을 유지한 채 국내에서 순회사역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54년 4월 중국에 남아있던 가족이 무사히 귀국하였고 영락교회에서 이대영 선교사 선교 33주년 기념 및 가족 환영예배가 성대히 거행되었다. 10. 이대영, 선교지의 동역자와 함께 전력투구하다 이대영은 동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고 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총회에서 파송한 여러 선교사들과 동역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1937년 파송되어 산동에 온 방지일 목사와 무려 10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중국선교에 전력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후에도 이대영 목사는 방지일 목사와 동역을 통해 현지에 거류하고 있던 동포들을 도와 무사히 한국으로 귀환할 수 있게 했다. 이때 이대영 목사는 한국교민회를 조직하여 교류민 단장을, 방지일 목사는 교포중학교 교장을 하였다. 1913년 산동반도 선교가 처음으로 시작된 이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로부터 파송된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1919년의 교세는 예배처소는 6곳, 학교는 3개교, 49명의 세례교인, 학습이 40명, 평균 출석 60여명의 교회로 성장했다. 1922년 6월에는 이대영이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1923년에는 선천에서 일하던 의사인 주현칙 장로가 합류해 래양에 병원을 개설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늘어나고 사업이 확장되면서 산동선교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다. 1920년 래양에 새 교회당 건물을 마련했으며, 1921년부터는 래양에 성경학원을 설립하여 본토인 목회자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이대영 목사는 산동에서 사역할 당시 동역자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많이 줄 정 도로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성경학자로 교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반쉰청 목사, 행정가인 쇼요섭 목사와 동역함으로써 중국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갔다. 특히, 그는 현지인을 목회자로 영성하고 세우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 결과, 1929년에는 산동선교의 결실로 얻은 중국인 류수파(劉書法)가 목사로 장립되기까지 했다. 류수파는 방효원 선교사가 제로(濟魯)대학에 보내 공부시키고 목사로 키워 중국교회를 위해 동역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이대영 목사는 범순청 목사와 서로의 선교담당지역을 같이 돌보며 협렸했다. 이대영 목사는 현지인 리더와 동역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피선교지에서 주종의식을 가지고는 결코 복음의 확장성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현지인들을 교육하고 양육하여 현지인 리더십을 세우는 일에 누구보다 우선했고, 그 결과 산동지역의 교회들은 선교사들과 현지인 지도자들이 대등한 관계에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앞줄 왼쪽부터 반쉰청 목사, 쇼요섭 목사, 류수파 목사 뒷줄 왼쪽부터 이대영 선교사, 방효원 선교사, 박상순 선교사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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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2)김 승 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영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4. 안동지역에 복음의 씨를 뿌린 교회개척자, 김영옥 안동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부산을 거점으로 선교하던 배위량(W.M.Baird) 선교사에 의해서다. 그는 1893년 4월 17일 부산 동래를 출발하여 밀양, 청도, 대구, 낙동, 안동. 의성, 영천, 경주, 울산을 거처 5월 20일 부산으로 돌아가는 무려 1,240 리(里)나 되는 전도여행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 5월 5일, 그의 역사적인 안동 방문이 있었고, 이 날은 안동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날이다. ▲1909년 9월부터 안동의 북부지역은 사우대 선교사가, 서쪽은 오월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좌측 말에 탄 사람은 사우대 선교사이며 말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시 조사인 김영옥(1911년 안동교회 초대담임목사로 부임)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부, 그리고 오른쪽 말에 탄 사람은 오월번 선교사이다. 이후 미국 북장로교는 1897년 대구선교부를 설립했고, 1902년부터 경북 지방을 세 구역으로 나눠 동부 지역은 안의와(J.E.Adams) 선교사, 안동을 포함한 북부는 방위렴(W.M.Berret) 선교사, 그리고 서부는 부해리(H.M.Bruen) 선교사가 각각 담당해 전도사역을 감당함으로써 경북북부지역의 복음화가 본격화되었다. 특히 안의와 선교사는 1902년 3월, 김기원과 함께 안동을 순행하였는데 이때 이들은 시장에서 전도를 하면서 복음서를 판매했다. 이 해에 안동 국곡과 풍산, 그리고 의성 비봉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8년 장로교 선교사 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설립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후 안동 최초 주재 선교사로 사우대(C.C.Sawtell) 선교사가 안동에 도착했으며, 1909년 8월 8일 안동교회가 설립됨으로써 안동지역의 복음화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원주에서 선교하던 미국 북장로교 소속 오월번(A.G.Welbon) 선교사와 조사 김영옥도 1909년 선교지를 안동으로 임지를 옮김으로써 안동 땅에 복음의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안동에 도착한 김영옥은 선교사들을 돕는 조사로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는 이미 세워진 교회들을 돌보았으며, 특히 8월 둘째 주일 설립된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5. 영남지역 독노회에서 최초로 안수 받은 한국인 목사, 김영옥 언더우드 선교사의 전도로 세례를 받은 김영옥은 여러 해 동안 선교사의 도움으로 성경을 공부했다. 당시 언더우드가 운영하고 있던 성경훈련반은 1년에 한 달씩으로 그 과목은 성경주해, 제목별 성경공부, 성경입문, 교회사, 성경지리, 교회정치, 찬송, 설교 등을 포함했다.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은 김영옥은 매서와 조사가 되었다. 조사로 활발하게 사역하던 김영옥은 1901년 개교한 장로교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 만 30세에 입학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조사와 영수, 장로 등 여러 사역으로 인해 학교 공부에만 전력투구할 수 없었던 김영옥은 졸업하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만 40세인 1911년(제4회)에 마침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9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개회된 제4회 독노회에서 홍승한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따라서 1891년 영남지역(부산·경남·대구·경북 등)에 복음이 전해진 이후 대구에서 열린 첫 노회에서 김영옥, 홍승한은 목사로 임직을 받은 것이다. 한편, 영남지역에 있던 교회에서 목사 직분을 가지고 처음으로 시무한 한국인으로 경북교회사나 대구제일교회는 김천일 목사를 기록한다. 그러나 김천일 목사의 안수 일자는 자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혼선을 준다(경북교회사는 191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하편은 1912년으로 기록). 따라서 존재하는 자료를 종합할 때 영남지역 교회에서 최초로 목사로 시무한 한국인은 김천일이나 혹은 김영옥, 홍승한이라고 할 수 있다. 6. 안동지역의 복음화에 주춧돌을 놓은 사람, 김영옥 김영옥 목사의 부임(赴任)으로 안동교회는 경상도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가 되었고, 그의 뛰어난 영적 지도력은 안동을 포함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복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동교회는 놀랍게 부흥하여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무려 75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발돋움했다. 안동교회의 첫 학습자는 강복영 외 14명(1910년 8월 18일), 첫 세례교인은 권중한 외 8인(1911년 3월 2일)이었다. 또한, 김영옥 목사가 담임으로 섬겼던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안동교회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1911년에는 오늘의 초등학교 수준인 계명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교회가 섬김과 봉사로 지역사회와 소통할 수 있게 했다. 특히 1913년에는 김병우를 장로 장립함으로써 안동지역에서 최초로 당회가 구성되었다. 주일학교와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어린이들의 신앙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1913년 경북북부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도사경회를 개최함으로써 여성들의 신앙교육에도 집중했다. 1920년 안동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했으며, 1921년 전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조직함으로 청년의 신앙교육과 계몽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안동에 주재하고 있던 안동선교부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에게 집중되었던 리더십을 김영옥 목사에게 조금씩 이양(移讓)해 한국인 목사의 지도력을 배양했다. 1913년 8월 9일에 있었던 안동교회의 역사적인 첫 번째 당회록은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8일 첫 예배를 드림으로 설립된 지 4년이 지나지 않은 1913년 7월 20일에 김병우를 장립함으로써 안동지역에서 첫 당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장로장립 20일 후인 1913년 8월 9일 안동교회 제1회 당회가 오월번 목사 댁에 모여 문답건과 예배당 건축 등 안건을 처리하였다. 위 사진 중 왼쪽은 제1회 당회록을 포함한 안동교회 당회록 제1권이며, 우측은 김병우의 장로장립을 확인할 수 있는 당회기록이다. 1913년 8월 14일에 있었던 제2회 당회록에는 8월 17일 있을 첫 세례와 성찬의 집례자로 초대 김영옥 목사를 기록한다. 교회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선교사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회가 조직되자 첫 세례식과 성찬식 집례를 한국인 담임 목사에게 양보한 것이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크나큰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과 5일 전에 있었던 안동교회 첫 당회의 회장은 오월번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비록 자신들의 조사였지만 목사 임직을 받고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영옥 목사를 존중하며 현지인 목사를 세워줌으로써 점차 자국민 중심의 리더십을 키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안동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에서 부속건물이 아닌 본당을 단 3번 건축했는데, 첫 예배당은 그가 조사로 섬길 때인 1910년 10월 30일 준공한 16칸 ‘ㄱ’자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 교인들은 10월 9일 주일 오후예배 시 특별헌금을 했으며, 당시 조사인 김영옥도 선교사들이 준 지방 순회 때 타고 다니던 노새를 팔아 건축헌금에 보탰다. 더욱이 예배당을 신축한 이후 특별부흥집회가 열렸는데 당시 최고의 부흥강사인 길선주 목사도 강사 중의 한 분이었다. 또한 여성과 소녀들을 위해 활발한 성경공부도 이루어졌다. ▲1913년 11월부터 공사가 착수되어 이듬해인 1914년 2월에 준공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신축 예배당으로 오늘의 100주년 기념관 바로 그 위치에 서 있었다. 예배당은 목조 함석지붕을 가진 건물로 반(半) 2층 구조형식으로 약 50~60평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건축기법 상 2층은 작은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첫 번째 예배당이 준공된 후 급속한 교인의 증가로 인해 1914년 초 준공되었다. 이때도 김영옥 목사는 선교사가 사준 가옥을 팔아 헌금했을 정도로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두 번째 예배당의 준공으로 주일학교의 활성화가 이루어져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 7월, 안동지역에서 최초로 여름성경학교가 열렸으며, 이듬해에는 주일학교가 조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인근 지역 교회들이 연합하여 모일 수 있는 부인도사경회 등 대형집회가 가능하게 되었다. 김영옥 목사의 부임으로 안동교회는 사역의 내용, 교회의 건물과 조직 등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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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신앙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한 시대를 평가하고 진단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집단 행태를 알아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삶의 방향성이 그 시대의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사기는 BC.1390년~BC.1055년까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대적 상황과 신앙적 행태를 알 수 있는 주요한 단서가 되는 성경입니다. 당시는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아브라함부터 모세를 거쳐 여호수아까지 단일 지도자를 중심으로 신정 체제를 유지했던 이스라엘에 신앙의 혼란이 불어 닥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몰아내라고 하신 가나안 족속들을 다 몰아내지 못하고 그들의 사상과 신앙과 삶의 패턴에 젖어 살거나 오히려 가나안 문화에 압도되어 점점 신앙의 가치를 상실해 갔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악순환이라는 불리는 범죄-징계-회개-구원-재타락 이라는 악순환의 구조에 빠지게 됩니다. 사사시대의 잘못된 신앙을 한 마디로 진단한다면,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라고 사사기 마지막 구절은 기록합니다. 그 특징적인 삶을 사사기 17장에서 ‘미가’ 라는 사람의 가정을 통해 고발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아들이 물질을 범함으로 신앙적인 행위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책망보다 오히려 복을 선포합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는 미가를 위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같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물을 서슴없이 만들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돈으로 매수해 레위인을 자신의 집에 고용하여 제사장으로 삼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절도요, 사기행각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미가가 자칭 제사장을 세우고 한다는 말이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라고 스스로 안위했습니다. 이는 사사시대의 잘못된 신앙의 한 일면입니다.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용어 가운데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무신론자들은 교회도 나오고 하나님이 계심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신앙을 가졌지만, 내가 믿는 방식이 정답인 줄 알고 사는 삶입니다. 이론적 무신론자들보다 더 해악을 끼치는 자들이 바로 실천적 무신론자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힘 있는 교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힘센 사람의 말이 정도(正道)가 되고, 사람들의 생각이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신앙 모습은 세상과 친숙해 지고 세상과 가까워진 편리주의 신앙으로 흘러 기복주의 신앙이 되었습니다. 내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이 곧 법이 되어 편법과 반칙이 난무함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없고, 십자가 없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오늘날 미가의 신앙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유일신 신앙이 아닌 짬뽕신앙입니다.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편리주의 신앙입니다. 의를 위한 고난의 신앙이 아닌 기복주의 신앙입니다. 잘못된 신앙에서 바른 신앙으로 말씀의 원칙과 신앙의 절대가치를 지킴으로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하나님의 종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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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 되게 하소서”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제103회 총회가 지난 10일부터 이리신광교회(장덕순 목사 시무)에서 개회했다. ‘영적 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가 되게 하소서’를 주제로 개회된 총회는 서울동남노회를 제외한 전국 66개 노회 1,500여 명의 총대들이 참석해 시대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총회의 방향을 확인했다. 총회 개회예배에서 림형석 총회장(평촌교회, 사진)은“한국교회에 소망이 있다면 영적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라며 “이 시대의 사명을 위해 낮은 자세로 섬기고 민족에게 다가가는 교회가 되자”고 강조했다. 이번 제103회기 총회는 명성교회 관련한 헌법 적용 여부를 두고 총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교계 안팎으로 최대의 관심이 집중됐었다. 그런데 총회는 헌법 해석과 개정 여부, 규칙부 해석, 재판국 조직 등의 안건들에 대해 대다수의 총대들이 일관된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림형석 총회장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무리없는 총회가 되도록 최선의 회의 진행을 이어갔다. 한편, 림형석 총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한국 교회가 풀어야 할 과제로 작은 교회를 살리는 일, 민족의 동반자가 되는 일, 연합운동의 활성화 등을 제시했다. 그리고 “진정한 영적부흥은 기도와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제103회기 총회 부총회장으로는 김태영 목사와 차주욱 장로가 각각 선출됐으며, 서기 김의식 목사, 부서기 조의환 목사, 회록서기 윤미태 목사, 부회록서기 최상민 목사, 회계 조중현 장로, 부회계 김미순 장로는 총회장 추천에 따라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인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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