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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9)- 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 김승학(안동교회)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金貞淑, 1880~1969)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성경 말씀 그대로 남녀노소, 빈부, 계층에 관계없이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귀족보다는 평민,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선시대 말기의 여성은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한국 전통사회 안에 뿌리 깊은 성차별의 문화와 여필종부, 삼종지도, 칠거지악, 남녀칠세부동석, 부부유별 등의 가부장적 가치관은 여성의 인권을 철저히 억압했다. 무지와 가난, 고된 노동과 억압된 삶을 살던 여성은 한(恨)을 품은 존재였다. 조선시대 말기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눈에는 누구보다 한국 여성들이 복음의 대상이요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보였다.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 릴리아스 호튼 선교사는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이다. 의료선교사인 그는 언더우드보다 8년 연상이었다. 호튼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여의사였다. 여사는 당시 한국 여성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조선여자들은 대체로 아름답지 않다. 나는 그들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고 내 형제처럼 여기지만 그 생각은 털어놓아야겠다. 슬픔과 절망, 힘든 노동, 질병, 애정의 결핍, 무지 그리고 흔히 수줍음 때문에 그들의 눈빛은 흐릿해졌고 얼굴은 까칠까칠해졌고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래서 스물다섯이 넘은 여자에게서 아름다움 비슷한 걸 찾는 건 헛일이다. 다만 아직 무거운 걱정거리나 힘든 노동에 시달리지 않은 나이어린 소녀들과 젊은 색시 중에는 종종 예쁘고 깜찍한 그리고 가끔 드물기는 하나 아름답기도 한, 활짝 핀 우아한 모습을 한 이를 볼 수가 있다. 이런 환경에 있던 여성들은 한국 땅에 도착한 선교사들에게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선교대상이 되었다. 특히 1885년 4월 5일 인천항에 함께 도착한 미국 장로교와 미국 감리교선교사는 선교대상으로서 여성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893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양 교파 연합모임에서 선언한 10가지 한국선교정책 중에서 두 번째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였다. 하지만 여성선교정책에 관한 장로교와 감리교의 강조점은 차이가 있었다. 사회적인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던 감리교의 경우, 처음부터 의료사업, 교육사업, 자선사업, 여성의 인권회복 등에 치중하셨다. 따라서 감리교는 여성의 계몽과 교육에 있어서 장로교에 비해 앞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복음전파를 강조한 장로교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사회 계층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성들을 선교의 타깃으로 삼았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여성들이 다른 계층에 비해 더 쉽게, 더 빨리 복음에 반응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첫 10년 동안 여성 복음화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 여성들이 소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여성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복음에 응답함으로써 복음전파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회적 활동에 수동적인 여성들이 전도사역과 계몽사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일제의 압제 가운데서 애국 여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1. 김정숙, 출생과 결혼 “임진(臨津) 이북의 땅은 다시 오랑캐의 땅이 될 터이니 몸을 보전하는 것을 논할 수 없다”는 예언으로 불안해하던 이북(以北) 사람들 중에는 이남(以南)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이들이 가장 선호한 지역은 정감록(鄭鑑錄)에서 언급하고 있는 ‘십승지’의 첫 번째 승지(勝地)인 경상북도 풍기(豊基)였다. 당시 난리 중에에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불안해하던 평안북도의 박천, 영변 지역에는 “풍기로 가야 산다”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 있던 북한 사람들이 실제로 이남으로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1890년대 후반부터였고, 이어서 1920년대에는 개성·평양에서 약 100여 가구가 풍기로 집단 이주를 했다. 이어 1945~50년 사이에 이북 전역에서 약 600가구가 이주를 했는데, 1가구에 5명만 따져도 600가구이면 3000명에 해당한다. 결국 약 4000~5000명의 사람들이 논과 밭, 가옥을 처분하여 풍기에 정착했는데, 현재 이들 후손들이 1000가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특히 풍기로 이주해 온 사람들 가운데서 다수가 서도지역인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이었다. 1907년 창립된 풍기성내교회는 지역 토착 주민들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으로 성내교회 100년사는 기록한다. 정감록을 믿고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도 성내교회에 출석하였다. 황해도 중에서 특히 해주와 개성출신의 이주자들은 풍기지역에서 인삼재배를 주도하였고, 평안도 출신 이주자들은 1920년에 시작된 과수재배와 직조업을 주도하였다. 이들이 풍기지역의 경제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전쟁 전후로 다시 북한에서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왔는데, 이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전쟁으로 파괴된 직조공장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이하 논문 내용은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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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애굽기(27)나의 출애굽기(27) 드보라 65. 북송 당했던 집사님의 소식을 듣게 됨 다시 그 집사님에 대해서 듣게 된 것은 남한에 와서였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날은 특별히 탈북자 강연이 있었다. 같은 탈북자로서 이야기가 쏙쏙 귀에 들어와 집중해서 듣고 있는데 그 탈북자가 감옥에서 만난 어떤 집사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감옥에서 집사님을 만났는데 원래 어디 살던 사람이고 중국의 어느 동네에 있었다가 북송 당해서 자기와 같은 감옥에 갇혔다고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는 바로 그 집사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강연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그 강연하신 탈북자를 만나서 인사를 하고 혹시 그 집사님 성함이 ○○○ 아니냐고 물었다. 그분은 그 이름을 듣더니 눈이 똥그래져서 나를 보며 어떻게 그분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분께 집사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계속 여쭈었더니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그 집사님은 감옥 안에서도 복음을 열심히 전하다가 기독교 간첩으로 소문이 나서 결국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셨다고 했다. 너무나 안타까운 소식에 나는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강연하신 분과 나는 한동안 눈물지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집사님을 함께 추억했다. 비록 이 글에서도 공개적으로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봉사와 수고를 베푼 집사님이시지만 주님께서는 기억하시고 큰 상급으로 보답하시리라···. 지금도 그분의 사랑을 생각하며 혹시나 살아계실지 모르는 집사님의 안위를 위해 기도한다. 66. 중국 땅에서 백인 선교사님을 만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나를 영적으로 인도해주셨던 집사님의 북송 소식을 듣고서 나의 마음은 크게 낙심되었다. 그렇게 별 기력 없이 해야 할 일만 하면서 지내고 있는데, 같이 성경공부 하던 한 탈북자 동생이 나에게 북한 출신 엄마를 잃어버린 고아들과 아이들을 돕는 좋은 분이 계신다면서 만나보면 격려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초청을 했는데 오시기로 했던 조선족 선생님뿐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이 함께 오셨다. 머리가 노랗고 피부는 하얀데 털이 복슬복슬하고 콧대가 높은 서양 사람이었다. 전에 이런 외국인을 본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북에서부터 서양 사람, 특히 미국 사람은 악한 사람, 승냥이로 배웠던 것이 생각이 나서 너무 무서웠다. 그런데 그 무서운 사람이 나를 보고는 “안녕하십니까?”라고 했다. ‘조선말을 할 줄 알다니···’ 너무 깜짝 놀란 나에게 그분은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라고 하며 웃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조선말을 잘하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분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내 깜짝 놀란 모습이 아니라 식탁 위에 놓여 있었던 성경책이었다고 한다. 그분들은 그 책을 보고 내가 신앙 안에서 더 성장하도록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그분들과 교제하게 되면서 나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분들은 나에게 신앙 교육도 해 주셨을 뿐 아니라 어려운 우리 살림에 보태라고 딸 아이 생활비도 지원해주시고 쌀도 가져다주셨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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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나의 어머니, 김해선 권사님!나의 어머니, 김해선 권사님! 최 점 식 목사 길부교회 나의 어머니의 일생(1933년 9월 9일~) 어머니는 경북 군위군 의흥면에서 무남독녀로 어렵게 살아온 전형적인 가난한 농민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계시는 아버지 밑에서 살아오셨다. 그러면서도 바느질을 배워, 동네 어르신들의 옷과 버선도 만들어 드리며 살아오셨다. 손재주가 남달라 동네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많이 받으셨고, 아버지를 정성으로 섬기며 집안일도 어머니를 대신하여 잘 해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군위 우보 5일장에 다녀오신 외할아버지께서 당시 15세인 어머니에게 시집이라도 가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자신보다 아홉 살이 많은 내 아버지를 만나 16세의 어린 나이에 5남매 중 장남과 결혼하여 시부모님과 함께 경북 군위군 우보면 이화동 1189번지에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행복한 신혼의 꿈을 뒤로한 채 아버지는 군 입대를 하셨다. 남편도 없는 시집살이는 쉽지 않았고, 가정 형편 또한 넉넉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조금의 불평도 하지 않으셨고, 부모님께는 효도하고 형제들과는 우애를 다지며 힘든 환경 속에서 살아오셨다. 그러던 중에 농촌에서의 삶이 어려워지자 대구 산격동으로 이사를 하셨다. 생각해보니, 도시로 이사를 나온 것은 어머니의 커다란 용기였다. 지금도 종종 이러한 결단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도시의 생활이 시작됐으나, 별 직업이 없었던 아버지께서는 시장에서 리어카로 채소장사를 하면서 가정의 생계를 꾸려나가셨다. 동시에 어머니께서는 우리 4형제를 공부시키시기 위해 40대 초반의 나이에 식당에서 일을 하셨다. 그리고 어릴 때 배워둔 삯바느질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셨다. 어린 내가 봐도 두 분은 참으로 열심히 사셨고,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두 분의 모습이 지금 우리 형제들의 성실과 부지런함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믿음의 가문을 일구어내신 어머니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세 들어 살던 곳의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교회를 다니면서 나 혼자만 예수님 믿지 말고 어머니도 함께 믿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설득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어머니도 40대에 처음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다. 어머니는 평소 몸이 좋지 않으셨는데, 교회를 다니신 후로 건강을 회복하며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하셨다. 하지만 제사 문제 등을 이유로 주위 친척들의 심한 반대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믿음이 성장하면서 제사를 없애고 추도 예배를 드릴 것을 제안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들이 예수를 믿게 해야 했다. 어머니는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 가족들을 전도하셨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 4형제도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그 후 우리는 형편이 나아지면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도 하게 되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 형제들은 모두 중·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나, 시장에서 채소를 운반하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셨다. 하루아침에 우리 집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나 아파 목이 메어 온다. 아버지 없이 우리끼리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식당 일 등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셨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우리 형제들은 굶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었다. 온 가족이 힘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장남인 나는 집안을 위해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체를 운영하게 됐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업의 길이 아닌 목회자의 길로 인도하셨고, 신학의 길을 걸어가고자 마음먹었을 때도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우리 4형제 중 2명이 목사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지난날 불신자의 가정에서 목회자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비록 농촌목회와 자비량 선교사의 길을 걷고 있으나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머니의 희생으로 무사히 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된 것이다. 입학 당시, 입학등록금이 없어 어머니는 끼고 계시던 금반지 세 돈을 팔아 입학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또 2012년 어머니의 팔순 때, 어머니께서는 동생들은 모두 좋은 차가 있는데 장남인 내가 목사이면서도 소형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며, 그랜저 3.0을 구입해 주셨다. 섬유공장에 다니시면서 모아두신 돈으로 새 차를 사주신 것이다.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는 사실을 70대를 바라보며 다시금 느끼고 있다. 현재 어머니는 경산에 거주하시는데 지금도 아들이 오면 커피를 손수 끓여주시며, “부모는 한 번 죽으면 다시 볼 수 없는데, 내가 살아있으니 커피라도 끓여준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들로서 어머니에게 해드린 것이 한 가지 있다면 6년 전에 아내와 함께 의논해서 지금의 아파트로 모신 것이다. 다만, 더 해드리지 못해 항상 죄송한 마음이다.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자녀들에게 모범이 되신 어머니 어머니는 지난 1988년 88세로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를 수십 년간 모신 결과로, 1997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대구광역시장으로부터 ‘장한 어버이상’을 수상하셨다. 이는 우리 가문의 영광이었다. 또 2020년 9월에는 아버님이 6·25 참전 국가유공자란 사실을 인정받게 되어 너무나 감격해하시기도 하셨다. 어머니는 지금은 89세로 연로하시지만, 40여 년간 출석하신 교회의 권사로서 주일예배, 삼일기도회, 금요구역예배 등 경산에서 대구까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다니시는 모습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언젠가 교회 화장실을 청소하시다가 락스가 눈에 들어가서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 관리집사님도 있었지만 더러운 화장실을 그냥 볼 수 없어서 청소하셨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시다. 어머니는 지금도 교회 어르신들에게 옷을 만들어 드리고, 봉사하시며, 길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신다. 국가에서 받는 노령연금과 자녀가 드리는 용돈으로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을 내시며 교회 권사로 그 의무를 다하시니 아들로서 부끄러운 것밖에 없다. 아무쪼록 남은 삶 건강한 몸으로 계시다가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조용히 천국 가실 수 있도록 기도한다. 60대 중반에 있는 큰아들을 마치 어린아이로 생각하시는 것을 보면 부모의 마음이 어떠한지 가히 짐작해 본다. 나의 어머니 살아계실 동안에 건강하세요. 존경합니다. ▲2021년 2월 설날에 어머니(뒷줄 왼쪽 세 번째)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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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취재> 성은교회 장재효 목사, ‘호소문’ 통해 사임 의사 밝혀장재효 목사, “이제는 노종(老從)을 놓아주시고, 진리정통(眞理正統)하고 성령충만한 후임 목회자 구해주세요.” 51년 동안 장재효 목사를 중심으로 선교사명을 힘있게 감당해왔던 서울 성은교회(서울시 송파구 소재)에서 후임 목회자를 맞을 채비를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 5월경 장재효 목사는 “이제는 건강이 미약하여 더는 책임목회를 감당할 수 없으니 노종(老從)을 놓아달라”는 취지의 호소문을 교회 앞에 발표했으며, 이에 따라 성도들은 장 목사의 간곡한 뜻을 존중하여 후임목사 청빙의 단계를 밟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서 지난 8월 23일(월) 장재효 목사와 서윤석 장로를 비롯한 세 분의 장로가 본 신문사 사옥을 방문해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면서 후임목사를 구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장재효 목사의 호소문 △성은교회 성도들이 장재효 목사에게 보낸 편지 △장재효 목사의 ‘목회자의 사명’에 대한 생각 등을 게시함으로써, ‘이 시대에 참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서울 성은교회 장재효 목사와 서윤석 장로를 비롯한 세 분의 장로가 지난 8월 23일(월) 본 신문사 사옥을 방문했다. 사진은 장재효 목사가 본지 임직원들과의 면담 자리에서 장 목사의 호소문 등을 낭독하고 있는 장면. 장재효 목사의 호소문(呼訴文) 사랑하는 성은교회 신도(信徒) 여러분 지난 세월 한결같은 사랑으로 모든 것이 부족한 종(從)을 주님의 사자(使者)라고 주님 대하듯 선대(善待)해 주셨고, 기도(祈禱)와 헌신봉사(獻身奉仕)와 어려운 형편에서도 적극적으로 협력(協力)해 주셔서 지금의 성은교회 성은동산을 세우게 하셨고 많은 나라에 선교(宣敎)하게 해주신 것을 뜨거운 중심(中心)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그 모든 정성(精誠)은 주님께 향기로운 제물(祭物)이 된 줄 믿습니다. 오늘은 부득이 죄송(罪悚)하고 죄송(罪悚)한 호소를 드릴 수밖에 없어 불초(不肖) 종(從)의 마음은 더욱 슬프고 괴롭답니다. 지나온 세월이 어언 반세기(半世紀)가 넘었지만, 늘 변함없으신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恩惠)로 우리는 주(主) 안에서 목양지간(牧羊之間) 성령(聖靈)으로 하나 되어 가(可)히 교회천국(敎會天國)으로 지내 온 것을 주님과 성도 여러분께 무한감사(無限感謝)를 드립니다. 부디 앞으로도 믿어지는 믿음으로 영적신앙(靈的信仰)을 끝까지 고수(固守) 하셔서 우리 모두 천국(天國)에서 다시 만나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永生福樂)을 누립시다. 불초(不肖) 종(從)이 노쇠(老衰)하고 기력마저 허약(虛弱)해져 책임목회(責任牧會) 사역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오로지 사명감(使命感) 하나로 지금까지 각고의 노력을 해봤으나, 성과(成果) 부실(不實)하여 주님께 송구스럽기 한이 없고 교회에도 죄송스러워, 심적(心的) 고통이 막심(莫甚)하여 주야(晝夜)로 번민(煩悶)하며 주님께 기도와 간구로 호소해 왔습니다. 목자(牧者)의 사명(使命)을 제대로 감당치 못하면서 당회장(堂會長) 자리만 보존(保存)한다는 것이 이 종(從)의 무딘 양심(良心)에도 너무나 괴롭고 두려웠습니다. 누구나 감당(堪當)치 못할 형편(形便)이면 자진(自進)해서 사직(辭職)하는 것이 모두를 위하여 현명(賢明)한 지혜(知慧)라 사료(思料)됩니다. 성은교회의 중흥(中興)을 위하여 심사숙고(深思熟考) 후 물러나기로 결심(決心) 했습니다. 이제 쓸모없는 노종(老從)은 놓아주시고, 진리정통(眞理正統)하시고 성령님의 다양한 은사(恩賜)와 능력(能力)으로 성은교회를 주님께로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주님께 진실(眞實)되고 충성(忠誠)스러운 목자(牧者)를 모두가 합심해서 간절히 기도하시면 주님께서 필연적으로 응답(應答)해 주실 것입니다. 불초노종(不肖老從)의 서러운 고충(苦衷), 사명(使命)을 감당치 못해 애간장 태우며 통곡(痛哭)해야 하는 몸부림을 중단할 수 있도록, 너무나 죄(罪)스럽고 부끄럽지만 그토록 그립던 주님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성은교회와 여러분의 가정에 임마누엘(IMMANUEL)로 새로운 은혜(恩惠)와 평강(平康)이 넘치시길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祝願)드립니다. 2021년 5월 성은교회 당회장(堂會長) 불초노종(不肖老從) 피눈물로 드리는 호소문(呼訴文) 성은교회 당회장 목사님 전(前) 상서(上書) 반백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참 목자, 선한 목자로 책임 목회를 감당하시며 양떼들로 하여금 천국 들어갈 믿음을 알차게 가꾸어 주시고 영광스런 결실을 이루도록 불철주야 노심초사 하시는 당회장 목사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성은교회는 하나님의 목적 있는 섭리가운데 세우시고 붙들어 쓰시는 당회장 목사님을 통해 진리 정통하고 성령 충만한 교회로 계속 부흥 성장하며, 지역 복음화와 농어촌교회 지원과 세계 선교에 힘써 왔습니다. 또한 성은동산 봉헌으로 한국교회의 영적 부흥과 선교 확장에 쓰임 받는 보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일 ‘당회장 목사님의 피눈물로 드리는 호소문’을 접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고 연약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지 못하고 있음을, 영적 가치와 성과를 위한 일보다 세상일에 더 열심을 내고 있음을, 초대교회와 같았던 옥수동 성은교회에서의 처음 사랑과 열정이 식어있음을, 당회장 목사님의 아픔과 괴로움을 외면하고 그 심정을 헤아려 드리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 통회자복 합니다. 당회장 목사님께 송구하고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간곡히 요청 드립니다. 우리들은 부족하고 무지몽매하나 당회장 목사님께서는 우리들의 목자이시니 어떠한 경우라도 살리는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들을 계속해서 양육하여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서서 말씀을 전하기 힘드시면 앉으셔서 하시고 앉으셔서도 힘드시면 누워서라도 전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머리되신 성은교회에서 당회장 목사님은 우리의 심장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며 성은교회 신도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천국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는데 일평생을 헌신해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목자 당회장 목사님! 우리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버리고 떠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참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눈먼 양들을 끝까지 인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회장 목사님처럼 하나님 말씀에 정통하며 성령님의 다양한 은사와 능력이 충만하여 당회장 목사님께 선한 목회를 잘 배울 수 있는 진실 되고 충성스러운 목회자를 구해 주십시오. 그래서 때가 되어 후임목사로 세워지면, 선대에 이어 다음세대도 성은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잘 받들어 하나님 나라 확장에 맘껏 쓰임 받는 교회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를 위해 성은교회 신도 모두가 합심해서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뜻하신다면 공고, 추천, 지명 등 다양한 방법으로 후임목사 청빙위원회도 본격적 역할을 할 것입니다. 성은교회가 하나님 뜻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후임목자 문제로 분란과 혼란을 겪지 않고 질서 있게 진행되어 세습이 판치고 금전이 오고가는 부덕의 세태에 아름다운 모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후임목사님이 세워진다고 해서 당회장 목사님을 다시는 못 보게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원로 목사님으로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계속 듣게 되는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세계 선교와 참된 목회자 양성에도 달려갈 길 마치는 그 날까지 맘껏 감당할 수 있도록 교회적 지원도 계속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목자 장재효 목사님! 목사님의 외롭고 서러운 고충, 사명의 무게로 애간장 태우시며 때로 통곡하시고 주야로 번민하며 몸부림치시는 그 심정을 우리는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은 다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합심으로 기도하며 당회장 목사님께 배운 대로 ‘믿어지는 믿음’ 가운데 영적 신앙 고수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으로 교회적 사명 완수에 최선을 다해나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쓰시는 당회장 목사님께서 오대양 육대주를 맘껏 누비시며 많은 구령성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눈동자같이 지켜주시길 바라며 저희는 항상 기도하겠습니다. 2021년 5월 8일 성은교회 교인대표 총무장로 서윤석 이하 성령님의 하나되게 하심따라 교회 제직원 일동 일심 동의함 ‘목회자의 사명’에 대한 단상(斷想)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불러내사 책임 지워 맡기신 양떼를 위해 세움 받은 직분입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는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책임목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의 궁극적 목적은 양들로 내세 소망의 확신과 신령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인정받고 쓰임 받음으로 은총의 대상이 되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 방침도 하나님 절대주의 신앙에 입각하여 말씀에 붙잡히고 성령에 이끌리는 영적 체질 신앙으로 바르게 가꾸어, 목자 자신에게보다 주님께 더욱 요긴한 존재들로 길러 드려야 할 것입니다. 목자는 양떼를 위하여 세움 받은 자입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에게까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세 번씩이나 확인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양떼를 맡기셨던 주님의 심정을 헤아려야 합니다. 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심정을 가진 목자라야 양떼를 소중히 여기며 책임 목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51년 전에 성은교회를 개척, 오늘에 이르도록 이상과 같은 사명 의지적 일념으로 애써온 것은 사실이나 교회 부흥과 선교 확장은 순전히 우리 주님의 경륜하시고 섭리하심을 따라 성령님의 불같은 역사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또한, 가장 부족한 종을 예수님처럼, 또는 사도 바울같이 생각하며 기대하고 순종함은 물론, 재산과 생명을 바쳐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온 성은 양떼의 충정 어린 공덕으로 알고 눈물겹도록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참으로 성은교회야말로 목양지간에 하나로 결속, 혼연일체가 되어 오로지 우리 주님 더 잘 섬기는 기쁨을 위하여 이해하고 협력하며 순교적 사명 의지로 교세 확장과 인류 복음화를 위한 선교에 합심 전력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성은교회를 ‘진리정통하고 성령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심장이 불타는 사명감’으로 오로지 구령성과를 위해 다양한 은사와 영역으로 교회부흥과 선교확장을 힘써 전심전력할 수 있는 후임목회자를 온 교회가 기도로 간구하고 있습니다. 2021년 9월 성은교회 당회장 장 재 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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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7‧끝)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7‧끝)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1. 김정숙, 출생과 결혼 2.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3. 여성복음전도의 선구자 .............................................. 7. 안동교회 최초의 전도사 8. 경안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리더 9. 일제에 저항한 애국운동가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10. 김정숙, 평신도 사역자 1934년 12월 17일 오후 4시 경안노회 주관으로 한국선교 50주년 희년기념식 및 기념축하예배가 안동교회에서 거행되었다. 크고 작은 축하기를 들은 안동교회, 안기교회, 신세교회 교인과 주일학교 학생들 약 1,000여 명은 찬송을 부르며 시가지를 행진하며 전도지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4시 30분 다시 안동교회로 모여 경안노회 만세를 삼창하고 기념식을 마쳤다. 이날 오후 7시에 시작된 희년 축하예배 시 안동교회 악대의 주악과 찬양이 있었고, 권찬영 선교사의 설교 후 표창식이 있었다. 이날 20년 이상 경안노회 경내의 교회에서 시무한 교역자 12인 중 여성으로서는 김정숙 전도사가 유일했다. 참고로 12인으로는 김영옥, 권찬영, 김인옥, 강석진, 장사성, 김우일, 권수백, 김종수, 강우근, 권중한, 김익현, 김정숙 등이었다. 김정숙 전도사는 1934년에 이미 20년 이상 교역자로 봉사한 것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1914년 이전부터 노회가 인정하는 여성 교역자였음에 틀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김정숙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세례받은 후 1년이 지난 1912년부터 생활의 근거지를 풍기에서 안동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의 복음 사역을 도왔다고 증언한다. 그는 회심 이후 전도부인으로 투신하여 헌신한 여성 사역자였다. 또한 평양여자성경학원을 졸업한 이후에는 교회와 노회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이처럼 그는 경안노회 여성 지도자 중에서도 가장 앞선 선각자(先覺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교역자로 봉사하던 김정숙 전도사는 1937년, 15년 동안 섬겼던 안동교회에서 사임함으로써 전도사직에서 은퇴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58세로 아직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사직에서 은퇴한 것이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등을 강요한 일제는 황국 신민서사의 암송도 강요했다. 특히 1937년 10월, 총독부 학무국에서 교학쇄신(敎學刷新)·국민정신 함양을 목적으로 보급했다. 학교·관공서·은행·회사·공장·상점 등 모든 직장의 조회와 각종 집회 의식에서 황국 신민서사는 낭송이 강요되었다. 다시 말해 이때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치가 극성기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를 섬기는 교역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김정숙 전도사는 안동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민족 운동자였다. 이러한 김정숙 전도사의 이력은 일제의 눈에 가시와 같았을 것이며, 일제는 총력을 다해 황국신민화 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교화와 애국자들을 탄압하고 제거했을 것이다. 임학수 목사도 일제 말엽의 기독교 박해(迫害)로 사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는 교회에 김정숙 전도사의 거취에 무언 혹은 유언의 압박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 김정숙 전도사는 자신이 교회에 부담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따라서 김정숙 전도사는 스스로 사임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숙은 은퇴 후 교역자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평신도로 안동교회를 섬겼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앞서 언급한 김정숙의 사임 이유를 지지하게 한다. 더 이상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는 평신도 신분으로 김정숙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거룩한 일이라면 하나님과 교회의 부름 앞에 철저히 순종하며 마음과 정성을 다해 동참했던 것이다. 김정숙은 안동교회의 집사와 권찰로 봉사하다가 69세인 1948년에는 권사로 피선되었고, 1949년부터 1955년까지 여장년부 부장으로 충성을 다했다. 그는 안동교회 전도사직을 내려놓고도 평신도로 돌아가 교회를 섬기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정숙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은 어떤 직책이든지 최선을 다해 감당한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그래서 1963년 1월 20일에 열린 당회는 20년 이상 안동교회를 위해 봉직한 것을 기념하는 예식을 갖기로 결의했는데, 대상자는 김광현 담임목사, 김재성·조흥노·이홍구 장로, 그리고 김정숙 전도사 등이다. 안동교회는 김정숙의 전도사 사역과 평신도 사역을 남녀 차별 없이 존중했던 것이다. 11. 결론 김정숙은 보신(保身)의 길을 갈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평생 험지(險地)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믿음의 선배다. 32세가 되던 1911년, 그는 안동선교부 선임 오월번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안동지역의 노회와 교회를 섬기다가 1969년 90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안동지역 여성 사역의 개척자였다. 또한 그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가 설립될 때 산파(産婆)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초기 경북 북부지역의 여성 복음화에 초석을 놓은 여성 지도자였다. 특히 김정숙은 1919년 3월 18일에 거행된 안동의 3·1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행동하는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일제 말엽에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신사 참배를 거절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애국자였다. 그의 강직한 성품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 그리고 성령 충만한 전도사역은 교회와 노회의 후배들에게 사표(師表)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김정숙은 그의 후손이 6대 신앙을 지켜 올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신앙의 지주(支柱)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사와 전도사, 전도사직을 은퇴한 후에도 평신도로서 무려 15년 동안 안동교회의 권찰로, 서리집사로, 여장년부 부장교사로, 또한 주일학교에서 어린이 사역에도 헌신함으로써 자신에게 맡겨진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이요 일꾼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난 이후부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순간까지 오직 하나님과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살다 간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김정숙의 일생을 회고하면 할수록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10주년 사진. 김정숙 전도사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가 설립될 때 산파(産婆)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초기 경북 북부지역의 여성 복음화에 초석을 놓은 여성 지도자였다. 연합회의 초대 회장으로 수고한 김정숙 전도사는 두 번째 줄 정중앙에 앉아 있다. 맨 아래 줄 왼쪽에서 네 번째는 역시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산 증인인 김점향 권사를 볼 수 있다.(사진8)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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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이중직” 또 다른 목회 유형으로 수용해야 할까?이중직 목회자의 47%, 교회 사례비 “0원”··· 평균 사례비 40만원 불과 목회데이터연구소, 지난 25일 이중직 목회자 실태조사 발표 ▲목회데이터연구소는 지난 8월 25일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관에서 이중직 목회자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목회자가 이중직을 갖는 것에 대한 찬반의견에는 ‘목회의 새로운 유형으로 적극 시도해야 한다’는 찬성의견이 40.1%를 차지했다. 한국교회에서 출석 교인이 50명 이하인 교회의 담임목사 중 절반은 목회 이외에 다른 직업을 수행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문제 때문으로, 이중직 목회를 수행하고 있다는 목회자의 48%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전혀 받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목회데이터연구소(소장 지용근)는 지난 8월 25일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관에서 이중직 목회자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소는 지난 6월 10일부터 7월 1일까지 예장합동, 예장통합, 횃불회 소속 교회 중 출석교인 50인 이하 교회의 담임목사 400명과 이중직 담임목사 22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현재 이중직을 수행하고 있다’(31.7%)와 ‘과거에 이중직을 수행하다 지금은 목회만 하고 있다’(16.9%)를 더하면 48.6%의 목사가 이중직을 수행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이중직을 가져본 적이 없다’(51.5%)는 응답자 중에서 45.8%가 ‘이중직에 나설 의향이 있다’고 답변했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 전체적으로 목회자 이중직에 대해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의견(10.4%)보다는 ‘새로운 목회유형으로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한다’는 찬성의견(40.1%)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절반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는 조건부찬성의견(49.4%)이 차지했다. 50인 이하 교회 담임목사 49% … “이중직 수행 경험 있다” 적극 시도해야(40.1%), 조건부 찬성(49.4%), 반대(10.4%) 이중직을 찬성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경제문제 해결을 위해서’(45.2%)라는 응답이 절반 가까이 됐고,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소신껏 목회할 수 있어서’(23.3%), ‘믿지 않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선교적 교회를 위해서’(12.4%) 순이었다. 이중직 목회자 중 교회에서 사례비를 전혀 받지 못하는 경우도 무려 47.7%에 달했다. 사례비가 50만원 이하는 19.5%, 51만원~100만원은 20.9%였다. 평균 사례비는 40만원에 불과할 정도로 경제적 여건은 매우 심각했다. 이중직을 하더라도 수입이 100만원 이하인 목회자는 48.6%를 차지했다. 가족 소득이나 후원 등 기타 수입이 아예 없다는 응답도 60.9%나 됐다. 작은 교회 목회자와 가족들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요청된다. 이중직 목회자의 54.5%는 ‘목회에 지장을 주지 않는 이중직을 찾기 어려웠다’고 답했다. 지금까지 수행한 업종으로는 노무직(22.3%)이 1위였고, 자영업(15.9%), 택배·물류(15%), 학원강사 ·과외(14.1%) 대리운전·택시(9.1%) 순이었다. 이중직 목회자들의 대부분은 ‘일터도 사역지다’라고 생각하면서 목회자로서 활동 영역을 넓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중직을 계속 수행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교회 재정이 넉넉해지면 그만두겠다’는 답변이 55.5%를 차지했다. 예장합동 교회자립개발원 이사장 이상복 목사는 “초대교회 선교사님들을 보면 목회자이면서 교사, 의사로서 이중직을 감당했다. 이제는 목회자 이중직을 선교적 마인드로 바라보며 현실적인 고민과 지원을 해야 할 때가 됐다”면서 “교단 차원에서 미자립 교회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갈 것”이라고 전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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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수운잡방’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총 114종의 음식 조리 및 관련 내용 수록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된 '수운잡방'.(사진=안동시 제공) 문화재청(청장 김현모)과 안동시(시장 권영세)는 (재)한국국학진흥원에서 보관 중인 안동 ‘수운잡방’을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했다. ‘수운잡방(需雲雜方)’은 경북 안동의 유학자 김 유(金綏, 1491∼1555)에서부터 그의 손자 김영(金?, 1577∼1641)에 이르기까지 3대가 저술한 한문 필사본 음식조리서이다. 위 책은 즐겁게 먹을 음식을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을 담고 있으며, 음식 조리서가 보물로 지정된 첫 사례이다. *제목의 ‘수운(需雲)’은『주역(周易)』의 “구름이 하늘로 오르는 것이 ‘수(需, 즉 수괘需卦)’이니, 군자가 이로써 마시고 먹으며, 잔치를 벌여 즐긴다(雲上于天, 需, 君子以飮食宴樂)”에서 유래한 것으로, 연회를 베풀어 즐긴다는 의미. 이 책은 김유가 지은 앞부분에 86항, 김영이 지은 뒷부분에 36항이 수록되어 모두 122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14종의 음식 조리 및 관련 내용이 수록되었다. 항목을 분류하면 주류(酒類) 57종, 식초류 6종, 채소 절임 및 침채(沈菜, 김치류) 14종, 장류(醬類) 9종, 조과(造菓, 과자류) 및 당류(糖類, 사탕류) 5종, 찬물류 6종, 탕류 6종, 두부 1종, 타락(駝酪, 우유) 1종, 면류 2종, 채소와 과일의 파종과 저장법 7종이다. 중국이나 조선의 다른 요리서를 참조한 예도 있지만, ‘오천양법(烏川釀法, 안동 오천 지방의 술 빚는 법)’ 등 조선 시대 안동지역 양반가에서 만든 음식법이 여럿 포함되어 있다. 또한, 조선 시대 양반들이 제사를 받드는 문화인 ‘봉제사(奉祭祀)’와 손님을 모시는 문화인 ‘접빈객(接賓客)’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우리나라 전통 조리법과 저장법의 기원과 역사, 조선 전기 음식 관련 용어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아울러 저자가 직접 쓴 원고본이며, 전사본(傳寫本, 베낀 글)도 전하지 않는 유일본으로서 서지학적 가치가 크다. ‘수운잡방’은 조선 전기 요리서로 희소성이 크며, 당시 음식 문화에서 고유의 독창성이 돋보인다.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의 음식 문화 기원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점에서 역사·문화?민속?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권영세 안동시장은 “안동의 우수한 전통 문화유산이 해마다 국가지정 및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는 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는 데 시민들께서 많은 관심을 두고 동참해 달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도시 안동의 위상을 널리 알려 나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라고 전했다. 안동 한상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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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6)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6)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 (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1. 김정숙, 출생과 결혼 2.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3. 여성복음전도의 선구자 .............................................. 7. 안동교회 최초의 전도사 8. 경안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리더 9. 일제에 저항한 애국운동가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9. 김정숙, 일제에 저항한 애국운동가 안동 3·1 만세의 1차 시위는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용(李相龍) 선생의 실제(實弟)인 이상동(李相東, 영양 포산교회, 영덕 원전교회) 조사에 의해 발생했는데, 그는 안동 장날인 3월 13일 하오 5시 반경 단독으로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체포 구속되었다. 사실 이상동 조사가 단독시위를 감행하기 전, 안동교회 김영옥 목사, 이중희 장로, 도청 서기인 김원진, 일본 유학생인 강대극 등 4인은 3월 13일 안동 장날에 거사할 것을 모의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3·1 만세운동이 주춤한 상태에 있었다. 이상동 조사가 안동교회 지도자들과 의논하여 결정한 거사 일자는 아니었지만, 안동에서 가장 먼저 만세 시위를 주도한 지도자들이 결정한 바로 그날인 3월 13일 오후 5시 반경에 안동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상동 조사는 ‘대한독립만세’가 쓰여진 태극기 모양의 종이 연을 들고 현재 신한은행 앞에서 동쪽 방향인 삼산우체국 쪽으로 달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그는 체포되어 압송되어 가는 자동차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 대한민국은 10일을 넘기지 않고 독립될 것이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만세를 불렀다. 이상동 조사의 1인 시위는 안동 3·1운동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한편으로는 위기가 되었다. 이유는 만세운동을 감행할 인물들과 안동교회가 일경에 의해 더욱 주시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동 조사의 1인 시위는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안동지역 지도자들의 검거와 조사로 위축되어 있던 모의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기폭제 역할도 하였다. 한편 안동교회 여성 지도자였던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 3인은 1911년 안동교회가 설립한 여성 초등학교인 계명학교 여학생 30여 명을 동원하여 선교사 임시주택이었던 가옥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국기를 제작하여 비밀스럽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준비를 하였다. 3·18일 만세시위가 있던 날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 3명의 여성 지도자들은 옥고(獄苦)를 각오하고 옷고름을 뗀 뒤 단추를 달고 계명학교 여학생 30여 명을 인솔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나 당시 여론을 의식한 일제는 김정숙 등 3명은 물론 학생 1명도 구속하지 못했다. 또한 안동의 3차 만세운동은 3월 23일(주일) 오후 7시 30분 무렵부터 시작됐는데 앞선 2차 시위와는 다르게 안동군의 다른 면민들이 대거 참가하는 대중적인 시위 양상을 보였다. 무려 3,000여 군중이 모여 구금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서와 법원 안동지청으로 밀고 들어갔다. 일본 경찰과 수비대와 충돌로 인해 30여 명이 죽고 50여 명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시위는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김정숙은 1919년 3월 18일의 2차 시위와 23일에 있었던 3차 시위 등 안동의 3·1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행동하는 신앙인인 동시에 애국운동가였다. 참고로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여성지도자인 김병규는 안동의 기독청년면려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의 아들 권중윤은 대구 계성학교 학생으로 대구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구속되어 6개월 동안 수형 생활 후, 학교를 졸업하고 안동으로 돌아와 계몽운동을 하던 중 1921년 2월 5일 안대선 선교사가 전국에서 최초로 안동교회 청년면려회를 조직할 때 초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그 후 안대선 선교사를 도와 경북지역 각 교회에 다니면서 청년면려회를 조직하여 1921년 6월 7일∼9일까지 26개 지회 600여 명이 모여 경북연합대회를 개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2년 청년면려회를 전국적으로 조직하기 위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안대선 선교사와 권중윤을 서울로 이주케 하여, 이들의 헌신적인 활동을 통해 1923년, 200여 교회에 청년면려회가 조직되었고, 1924년 12월 2일에는 서울 정동 피어선 성경학교에서 기독청년면려회가 조직될 수 있었다. 3·1 만세운동 당시 안동교회 교인이었던 김병규는 공식적으로 1924년 5월 22일, 안동교회에서 서울 안국동교회로 이명했다. 김병규는 이명 후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은 1925년 초 경기부인전도회의 서기를 맡을 정도로 왕성히 활동했다. 또한 김병규는 서울 승동교회에서 회집한 경기지역 12 교회 부인회의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25년 전국 부인전도회가 처음 조직할 때는 선교사 중심으로 조직되었는데, 한국인으로 임원을 구성한 2회 총회부터 김병규는 한국인으로는 제일 먼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27년 9월 9일 원산 광석동교회에서 제16회 장로회 총회 시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발기회에서 김병규는 경기 여전도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8년에 조직된 여전도회전국연합회에 경기지역 대표로 활동했다. 이처럼 김병규는 전국적으로 왕성히 활동한 여성 교역자였다. 김정숙 전도사의 애국 활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일제 말엽에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여성 지도자였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제국주의는 황민화정책과 천황숭배를 강화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굴복하여 1935년에는 천주교회가, 1936년에는 감리교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1938년에는 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일제의 극한 박해와 신사참배 문제 앞에서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신앙을 포기하고 변절과 타협의 길로 갔지만, 김정숙 전도사는 죽음도 불사하면서 마지막까지 일제에 저항했다. 참고로 경안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인물로는 이원영·강병철·박충락 목사와 권수백 장로 등이다. 특히 안동교회의 인물로는 김익현·김성규·김재성·조흥로 장로와 조춘백, 이수원·이수형 성도 등 다수가 있었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여성 교역자로는 김정숙 전도사가 유일하다. 그는 죽음도 불사한 각오로 신앙의 정조(貞操)를 지켰던 용기 있는 믿음의 여성이었다. 김정숙은 일제 압제하에서도 용기 있게 신앙에 기초하여 민족의 편에 선 여성 민족 운동가였던 것이다. ▲안동의 3·1 만세운동은 세 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1차 시위는 3월 13일 이상동의 단독시위였고, 2차 시위는 3월 18일 안동교회 주도와 유림들의 동참으로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3월 23일 3차 시위는 많은 군민들의 격렬한 시위 결과 1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었다. 3·18일 만세시위가 있던 날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 3명의 여성 지도자들은 계명학교 여학생 30여명을 인솔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위 사진은 1925년 삼산동 곡물전(현 신한은행 근처) 안동 장날의 번잡한 모습.(사진7)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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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한인세계선교사대회’ 13일~15일 한동대에서 성료한인세계선교사회, 한국선교 성찰 및 비전 제시 ▲한인세계선교사회는 7월 13일~15일 한동대에서 ‘2021 한인세계선교사대회’를 개최해 한국교회의 선교를 돌아보고 새로운 선교 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국내 최대 선교사 단체인 한인세계선교사회(KWMF)가 지난 7월 13일~15일 한동대에서 ‘2021 한인세계선교사대회’를 개최해 한국교회의 선교를 돌아보고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선교 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한국선교, 성찰과 제안’이라는 주제로 한동대와 공동으로 진행한 ‘2021 한인세계선교사대회’는 지난 1877년 미국 휘튼대학교에서 첫 대회를 연 이후 45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개최된 것이다. 선교사 300여 명이 참여한 이번 대회는 성찰, 통찰, 제안, 소망 등 4가지 주제를 선정해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진행한 선교를 회고했다. 또 한국교회의 현재, 위기 등을 공유하고 ‘위드 코로나(With Corona)’ 시대와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 시대의 선교에 대한 전망과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이번 선교대회에서는 선교가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미래지향적인 선교 계획을 수립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대두됐다. 평신도 전문인들과 협력해서 선교 사역의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대회 기간 중 열린 총회에서는 신임 대표회장에 어성호 인도네시아 선교사(기감), 공동대표회장에 이은용 케냐 선교사(예장 통합), 방도호 페루 선교사(예장 고신), 강형민 키르기스스탄 선교사(GMI선교회)가 선출됐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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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장로총연합회, 미자립교회에 후원금 지원▲후원금을 전달하고 있는 구미시장로총연합회장 이기우 장로(오른쪽). 구미시장로총연합회(회장 이기우 장로)는 지난 7월 14일(수) 구미시 소속 미자립교회 목회자 9명과 선교단체 관계자들을 초청해 후원금을 전달하고 식사를 대접하며 사역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행사는 구미시장로총연합회의 올해 국내 선교사업 일환으로 추진됐으며, 미자립교회 중심으로 교회 9곳을 선정하고, 선교단체 2곳을 선정해 지원하게 됐다. 회장 이기우 장로는 “직접 찾아뵙고 후원금을 전달하고 싶었으나 코로나로 인해 여의치 않았다”면서, “어려운 시기이지만 함께 힘을 내서 구미시의 복음화를 위해 달려가자”고 인사했다. 한편, 구미시장로총연합회는 매년 성탄트리 점등식 주최, 미자립교회 목회자 지원, 해외선교사 지원, 군부대선교 지원 등 선교사업을 하면서 지역 복음화에 힘쓰고 있다. ▲구미시장로총연합회는 미자립교회 9개 교회 목회자와 선교단체를 초청해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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