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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교회 건축선교회’ 선교현장 보고-이해견 장로지난 10년 우리 선교회에서 C국 M족들에게 13개의 예배당을 지어주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갈수록 출입의 위험을 느껴 촛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나만 어떻게 되고 마는 것이 아니고, 1번부터 13번까지 내가 관계된 곳도 온전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2017년도 11월에 V국으로 옮겨서 선교 사역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손자하고 둘이 들어가 14, 15, 16호를 착공하고 돌아왔고, 이후 방송출연, 간증집회, 광고, 지인들의 후원 등으로 올해에는 5개 교회의 착공 준비를 하게 되었다. 다음은 3개 교회 헌당예배와 5개 교회 착공예배를 위해 최근 V국을 다녀온 선교현장 보고이다. 9월 17일, 목사님 두 분, 장로님 세 분, 권사님 집사님 등 모두 13명으로 이루어진 선교팀은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해마다 이쯤이면 연례행사처럼 선교지를 방문하기에 이제는 망설임, 두려움 없이 집을 나서게 된다. 그동안 혼자 가서 헌당하고 착공하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13명을 인솔하게 되서 오히려 부담되었다. 지병이 있으신 분, 노약하신 분, 해외에 처음 나가는 분 등 기도해야 할 분이 여럿 계셨다. 그러나 우리는 관광하러 가는 것도, 해외 사업을 위해 가는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선한 목적으로 가는 것이기에 크게 염려는 되지 않았다. 첫날 4시간 반 정도 걸려 하노이 공항에 도착하고, 현지 파송된 선교사님의 안내로 호텔에서 1박을 했다. 그리고 둘째 날 아침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체험했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정면으로 통과할 것으로 예보되었던 태풍 라이온의 예상 경로가 어긋난 것이다. 태풍이 북상하면서 대만과 중국 남부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날씨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태풍의 진로를 바꾸시면서까지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이 느껴졌다. 또한, 이 사역을 위해 수많은 한국의 성도들과 현지 교인들이 합심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다. 날씨가 딱 좋았다. 열대의 후덥지근한 날씨는 바람이 날려버렸고, 하늘에는 구름기둥이 덮여있었다. 7~8시간을 버스로 달려 현지 호텔 근처까지 왔을 때, 어둑어둑해지더니 금방 고산지대의 어둠이 내려 깜깜해질 무렵, 타고 간 버스가 고장이 나고 말았다. 고장 난 버스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아 현지 호텔 차를 불러놓고 바깥 깜깜한 어둠 속 길가에서 기다릴 때는 걱정 때문에 마음이 매우 힘들었다. 교회 건축은 영적 전쟁임을 실감했다. 현지 차로 응급 대치하여 겨우 호텔에 도착했다. 사역지의 첫날 밤, 힘든 여정 가운데에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며 나는 몸살약을 한 봉지 먹고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호텔에서 쌀국수 등 현지 음식으로 든든히 아침 식사를 하고 일정을 시작했다. 오전에 4개 교회, 오후에 4개 교회가 예정되었다.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는 14호 ‘넘제교회’ 헌당예배이다. 지천교회의 지원으로 건축한 교회다. 도착할 때 가슴이 뛰었다. 지난해 손자하고 와서 풀밭에서 현수막을 들고 사진 찍고 기도하던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아름답게 지어져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고 희열과 감격이 솟구쳤다.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누가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속으로 기도했다. 몰려든 현지 아이들에게 가방과 주머니에 있던 과자나 간식거리들을 나누어 주었다. 드디어 새 성전 앞에 도착했다. 출입문 기둥을 부여안고, 흐느끼며 감사의 눈물을 쏟았다. 헌당 감사예배가 시작되었다. 우리 13명은 힘차게 찬송을 불렀고, 감격해서 오열하는 권사님도 계셨다. 현지인 통역을 세워 현지 성도들과 우리 모두 은혜로운 예배가 진행되었다. 모든 진행을 맡은 나는 “N교회 성도 여러분! 교회 건축하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헌금도 많이 하셨지요? 일도 많이 하셨지요? 이렇게 아름답게 잘 지은 예배당을 볼 때마다 행복하시지요? 이곳에 와서 기도하십시오. 예배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소원에 다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나라 백성들이 다 예수 믿게 기도하십시오.”라고 당부했다. 두 번째 ‘은푹교회’로 출발했다. 이 교회는 경산계당교회 홍갑연 권사님이 12호에 이어 15호 교회를 지원하여 지으신 교회다. 내가 계당교회에 간증 갔을 때, 간증에 은혜 받았다고 하시면서 교회 헌당에 참여하신 것이다. 자동차가 현지까지 못 가서 성도들이 제공한 오토바이로 우리 13명은 ‘앵앵앵...’하며 새 성전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지원한 교회 중에 가장 넓게 잘 지은 예배당이다. 눈짐작으로 60평은 족히 될 듯하다. 권사님이 헌당 감사로 플라스틱 의자를 지원하였고, 교인도 많이 모였는데 재적 교인이 3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계당교회 이종덕 목사님은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곳에 나타나게 됨을 감사하다”며,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축복하셨다. 현지 성도들은 권사님 이름으로 감사패를 마련해 주었다. 준비한 헌당기념 타올을 나누어 주고 모든 행사를 끝낸 뒤 착공할 20호 ‘라오짜이교회’로 이동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1개, 2개, 또는 3개의 교회를 착공하게 해주셨다. 올해 초에도 처음에는 걱정했지만, 곧 상림교회 신일균 장로님이 은퇴기념으로 17호 ‘시온교회’를, 본회 회장 차순규 장로님도 장로은퇴기념으로 18호 ‘신짜이교회’를 지원해 주셨다. 상림교회 이종수 집사님은 100교회 건축 선교회의 광고문을 읽고 감동하여 19호 ‘쭈케오교회’를 부인 김지은 집사님 이름으로, 20호 ‘라이짜이교회’를 본인 이름으로 지원을 작정하고 건축비 전액을 입금해 주셨다. 그리고 지천교회 김귀화 권사님이 21호 ‘바오까오교회’를 결정해주셨다. 1년에 3교회 헌당에 5교회 착공이라니…. 라오짜이교회로 이동하면서 나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해외 선교는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어떤 분들은 ‘100교회 건축선교회’의 사역을 이해 못하고 조롱하는 분도 있다. 예배당 지어주는 일은 헛된 일이라고 말하는 현지 선교사도 있다. 그러나 본선교회는 지원해주신 건축비를 직접 현장에서 그 나라 돈으로 지불하고 영수증까지 받는 등 선교비 전액을 100% 선교 명목으로 지출한다. 또한, 착공하는 교회에 가서 ‘100교회 건축선교회’의 취지를 설명한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예배당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예배당을 지어가려고 합니다. 이곳에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는 여러분도 열심히 헌금 하고 땀 흘려 일도 해야 합니다. 예배당 지을 땅은 마을에서 가장 좋은 곳을 선택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성도가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원금을 한 번에 다 드리지 않습니다. 착공할 수 있게 지원 금액의 절반을 오늘 드리고, 골조 공사가 완공되면 남은 금액의 절반을 선교사님을 통해 전해드립니다. 나머지 금액은 내년 헌당 때 드립니다. 이 모든 공정을 죄송하지만 확인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똑같은 메시지를 이번에도 5개 교회에 전달했다. 본회가 지원해 헌당한 세 번째 ‘후깜교회’에서는 한 성도의 간증을 듣게 되었다. 비가 많이 오는 주일날 8시부터 예배인데 온 식구가(7~8명) 같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니까 살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산사태로 집채만 한 바위와 흙이 집을 덮쳐 버린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 가족의 생명은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다. 만약 그 집안 식구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비 오는 날 귀찮다고 식구들 중 한 명이라도 예배드리러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날 사건은 그 가족들이 큰 믿음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믿음은 곧 생명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이었다. 출국수속 후 탑승게이트에 대기하고 있을 때 권사님 한 분의 팔이 부어올랐다. 차에서 내릴 때 어딘가에 부딪혔다고 했다. 상비약을 드시게 하고 탑승구 직원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그러자 공항 의사, 담당기장, 항공사 지점장, 승무원 등이 떼로 모여들었다. 혈압측정을 하니 권사님은 당황해서 혈압이 점점 상승했다. 공항 의사는 체류하여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모두가 무사히 귀국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여러 가지 염려 속에 우리는 합심해서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채 “우리가 책임진다”는 각서를 쓰고 탑승할 수 있었다. 다행히 권사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잠이 드셨고, 우리는 4박 5일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무탈하게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100교회 건축선교회는 수많은 개미군단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이제 21개 교회가 건축돼 간다. 하나님 나라 확장에 협력하신 교회와 모든 성도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올려 드린다. 할렐루야! 100교회 건축선교회 이해견 장로 010-3531-7354 (주일오후 간증예배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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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주교회, 캄보디아 증인 뮤지컬팀 초청 “바울” 공연지난 9월 26일 신영주교회는 캄보디아 증인 뮤지컬팀을 초청, 뮤지컬 “바울” 공연을 통해 특별한 은혜의 시간을 가졌다. 10명의 캄보디아 현지 학생들로 구성된 증인팀은 50분간 진행된 공연에서 무대 대사 전체를 한국어로 선보였다. 캄보디아 세계로 선교센터에 소속된 증인팀은 현지 교회 공연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바울” 외에도 “가스펠”, “베드로” 등 한국어 뮤지컬을 준비해 2년마다 한국 순회공연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뮤지컬 “바울”은 이미 전국 30여 개의 교회를 순회공연했으며, 이날 공연에는 이웃 신광교회 교우들을 포함 300명 이상의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성황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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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굿뉴스’(gbhana.com) 인터넷신문 발행 시작인터넷신문 ‘하나굿뉴스’(발행인 윤형구)가 지난 10월 1일부터 새롭게 발행돼 독자들을 찾아가게 됐다. 이제는 정보도 무한 경쟁시대이다. 언론도 예외일 수 없다. 이에 경북하나신문 윤형구 발행인은 인터넷신문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동안 준비해 왔다. 따라서 이제는 경북하나신문의 모든 지면 기사는 더 많은 공유를 위해 ‘하나굿뉴스’(gbhana.com)를 통해 실시간으로 인터넷신문에 게시될 예정이다. 아울러 ‘하나굿뉴스’(gbhana.com)는 경북하나신문의 기사 외에도 매일 다양한 분야의 기사들이 업데이트된다. 이는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다수의 일반인 독자도 쉽게 매체를 접할 수 있기에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하나굿뉴스’의 뿌리와 정신은 경북하나신문에 두고 있기에 기독언론으로서의 목적과 방향은 경북하나신문과 다르지 않다. 윤형구 발행인은 “앞으로 경북하나신문과 하나굿뉴스가 충실한 기독언론 매체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해 경북을 넘어 한국 교계에서도 소금과 빛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는 정통언론이 되도록 교계 지도자와 성도들의 지속적인 기도와 관심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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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지방협력포럼, 성공 개최를 위한 첫발 내딛다포항시는 오는 11월 7일부터 9일까지 2박3일간 포항시 일원에서 열릴 예정인 ‘제1차 한-러 지방협력포럼’의 성공개최를 위한 추진상황 보고회 및 추진위원회 출범식이 갖고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10일 포스코 국제관에서 열린 이날 행사는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이강덕 포항시장, 장경식 경북도의회 의장, 서재원 포항시의회 의장, 김재동 포항상공회의소 회장을 비롯하여 외교부와 북방경제협력위원회 등 유관기관·단체 등이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러 지방협력포럼’의 준비상황을 소개하고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를 당부했다. 포럼 성공개최를 위한 구호 제창을 시작으로 경북도지사와 포항시장을 공동위원장으로 각 기관·단체 관계자, 전문가, 시민 등 33명으로 구성된 추진위원회를 출범하는 한편 분야별 세부추진계획을 설명하는 추진상황 보고회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한-러 지방협력포럼은 두 나라간 상생의 미래를 여는 첫걸음이자 경북도가 북방경제의 중심으로 도약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강덕 시장은 “포럼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하여 포항이 글로벌도시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무엇보다 지진과 철강경기 침체로 위축된 지역에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러 지방협력포럼’은 지난해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렸던 한-러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하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수락하는 형식으로 포럼 출범을 합의하고 공동 성명서를 채택했다. 오는 11월 포항에서 열리는 첫 포럼에는 서울특별시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17개 광역자치단체가, 러시아 측은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연방관구 소속의 9개 주 단위 지자체가 참가하는 대규모 국제행사로 치러질 예정이다. 이번 포럼은 두 나라 지방간의 경제·통상, 교육·과학, 문화·관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확대를 위한 방안들을 논의하는 상호교류의 장이 될 전망이다. 지난 2014년 첫 시장 취임부터 북방교류협력에 관심을 갖고 러시아와 중국 동북3성 등과의 발 빠른 교류를 펼쳐왔던 이강덕 시장은 약 한달 앞으로 다가온 이번 ‘한-러 지방협력포럼’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하여 포항시가 ‘환동해중심도시’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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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양검정으로 참외 건강검진 무료로 받으세요성주군(군수 이병환)은 PLS대응 안전농산물 생산과 영농비용 절감을 위해 매년 무료로 토양검정사업을 실시하여 농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시설참외 재배토양 조성시기인 10월을 토양검정 집중 홍보기간으로 설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토양검정 적기는 작물재배 전 또는 수확 후 퇴비 살포하기 전이다. 특히 시설참외가 수확이 끝나는 8~9월부터 시작하여 작물재배를 준비하는 10월 한달간 매년 많은 농가에서 토양검정 수요가 집중되고 있다. 토양검정을 통해 토양산도, 전기전도도, 유기물, 질소, 인산, 칼리, 칼슘, 마그네슘 등에 대한 시비처방서를 발급받아 적절한 토양양분 소요량을 환산하면 불필요한 비료사용을 줄여 작물에 필요한 양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고 특정양분의 부족 및 과다로 인한 장해를 사전에 예방하는 효과가 크므로,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건강검진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토양검정을 받고자 하는 농업인은 1필지 기준 5~10곳을 선정해 표면의 이물질(1cm 정도)을 제거한 후 표면에서부터 15cm 깊이로 시료 채취 후 골고루 혼합하여 500g 정도를 봉투에 담아 농업기술센터 토양검정실로 신청하면 된다. 김정애 농업기술센터소장은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PLS제도에 대비하여 토양검정 등 과학영농기술을 통한 농업 경영비 절감과 고품질 농산물 생산기반 조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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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모유수유 100% 성공하기!영주시보건소는 10월 10일(수) 임산부의 날을 맞이해 임산부 및 가족 50명을 대상으로 “엄마사랑 아가사랑 행복교실”을 개최했다. 10월 10일은 “임산부의 날”로 풍요와 수확의 달인 10월과, 임신기간인 10개월을 의미하는 것으로 2005년에 처음 제정됐다. 영주시보건소는 임신과 출산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임산부들의 행복한 임신과 태아의 생명 존귀함을 인식하고자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매월 1회 임산부 행복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이번 산모교실은 ‘모유수유 100%성공하기(유방 마사지)’, ‘흑백모빌 만들기’프로그램을 실시해 임산부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예비 맘을 위한 이번 행복교실은 출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양육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산전․산후 정보와 지혜로운 출산준비, 건강한 출산과 태교, 바른 먹거리 이유식 만들기, 출산용품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영주시 보건소는 그 외에도 임산부 영양제 지원, 유축기 무료대여, 출산장려금 지원, 난임 부부 지원, 산모·신생아도우미 지원 사업 등 다양한 출산지원 시책과, 지역단체와 협약을 맺어 산모 홍삼미용세트지원, 산모 한방첩약지원, 출산가정 구급함지원, 기저귀지원 등의 다양한 시책을 개발하여 출산장려 분위기 조성에 적극 앞장서고 있다. 임산부 행복교실 연간 일정은 보건소 홈페이지와 임산부 SMS를 통해 안내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매회 선착순 지원으로 영주시보건소 출산장려팀(639-6433)으로 신청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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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사 봉사회 경산지구협의회, ‘사랑의 무료급식’ 행사 실시대한적십자사 봉사회 경산지구협의회(회장 이상임)는 5일 서부1동 소재 성암생활체육관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사랑의 무료급식’ 행사를 개최했다. 태풍 콩레이의 영향으로 많은 비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적십자봉사회 경산지구협의회 읍면동지역 봉사회원 등 50여 명이 참여해 어르신 300여 명에게 현장에서 정성껏 준비한 소고기국과 반찬을 배식하고, 후식으로 다양한 떡과 과일을 제공했으며, 아울러 「일곱 빛깔 색소폰 동호회」의 신명나는 색소폰 공연으로 모두가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이상임 회장은 “부족하지만 회원들이 정성껏 준비한 행사에서 서부1동 어르신들이 오늘 하루 따뜻한 점심 한 그릇과 작은 공연을 통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특히 급식 행사 준비를 위해 고생하신 서부1동 봉사회 윤분선 회장님을 비롯한 회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행사장을 찾은 최영조 경산시장은 “투철한 봉사 정신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대한적십자사 봉사회원들에게 감사한다”며, “앞으로도 소외된 이웃과 어르신들에게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통해 훈훈한 인정이 넘치는 지역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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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3)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 영 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경산사월교회, 포항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 풍기성내교회 등에서 사역 … 안정과 성장에 기여 7. 경북지역의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운 주의 종, 김영옥 김영옥 목사는 안동지역과 경북 북부지역에 산재한 지역 교회들을 든든히 세운 교회지도자였다. 그는 1921년 사임하고 1년 동안 영주, 지곡, 명동, 풍산, 수동 등 교역자가 없는 미약한 교회들을 순행하며 자청하여 순회목사로 사역함으로써 이들 교회가 중심을 잡고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그는 안동교회를 떠난 후 경북 경산사월교회, 포항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 풍기성내교회 등에서 사역함으로써 경북 북부 지역 교회가 이전보다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사월교회 9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영옥 목사는 목회뿐 아니라 경북 일대 장로교 지도자들에게 점조직으로 독립공채모집을 독려했는데, 독립공채모집운동은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태평양 국제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모금하는 운동이었다. 더욱이 김영옥 목사는 교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이웃에게 인정 많은 목사였다. 그 결과 4년 동안 사월교회를 섬긴 후 포항으로 이사할 때 이삿짐을 소달구지에 싣고 많은 교인이 포항까지 따라갔다고 한다. ▲경산 사월교회 전경 또한, 포항제일교회는 1924년 1월 김영옥 목사가 부임한 이후 주일학교가 급성장했는데, 그 이유는 김 목사가 주일학교에 관심을 갖고 열심을 다했기 때문이다. 당시 포항제일교회는 오전에는 주일학교만 하고 오후에 주일예배를 드렸는데, 김영옥 목사 부임 후 학습·세례자가 매년 평균적으로 40~50명씩 증가했다. 교인의 증가로 교회를 건축할 때도 김영옥 목사는 건축기성회 회장을 맡아 교인들과 함께 건축에 적극 참여했다. 이처럼 김영옥 목사가 시무하는 동안 포항제일교회는 부흥하였고, 포항의 복음화를 위해 더 큰 준비를 하였다. ▲포항제일교회 전경 1929년 권징문제로 분열된 영주제일교회를 수습하기 위해 당시 경안노회에서 원로였던 김영옥 목사가 1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김영옥 목사의 부임과 함께 혼란했던 교회는 일단 안정을 찾게 되었다. 특히 열심히 전도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결과 많은 새신자가 교회를 찾게 되었고, 영주제일교회는 분열의 아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영주제일교회가 안정을 되찾고 다시 빠르게 부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김영옥 목사 덕분이라고 「영주제일교회 100년사」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영주제일교회 전경 1907년 설립된 풍기성내교회는 교인들 사이의 의견대립으로 1934년 6월 20일 공동의회를 통해 교회분립을 결정하였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1934년 12월 풍기성내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의 역할은 풍부한 목회경험을 바탕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던 교회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김영옥 목사가 성내교회에 시무한 기간은 단 6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지도력을 십분 발휘하여 빠르게 교회를 안정시켰다. 1935년 노회에 보고된 교세는 성찬 참여 교인의 수는 188명, 유아세례인은 51명, 학습교인은 46명, 원입교인은 287명으로 전체 교인의 수가 591명이었다. 이것은 김 목사의 부임과 함께 교회가 급속도로 안정과 평화를 찾았다는 증거가 된다. ▲풍기성내교회 전경 이처럼 경안노회 지역을 복음화하고 교회를 잘 섬기고 돌본 것을 인정하여 경안노회는 최초로 김영옥 목사를 ‘노회 공로목사’로 추대하였다. 1948년 9월 28일 개회된 제45회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안노회에서 “김영옥 씨를 공로목사로 추대하고 월 5,000원씩 사례하기로 가결”하게 된다. “신앙과 애국은 별개가 아니다” … 교회를 지키면서 독립운동에 앞장선 애국지사 8.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 김영옥 김영옥 목사는 신앙에 기초한 분명한 국가관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1906년 9월에 개최된 장로교 공의회 경성소회 회의에서 “교인으로는 교회를 순종하고 국민으로는 국가에 순종할 방침이란 문제”에 관해 발언했다. 그는 일제의 강점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지침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신앙과 애국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의식은 김영옥 목사로 하여금 비록 일제의 강압적인 지배하에서도 교회를 지키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했던 것이다. 안동지방의 기미년 3·1만세운동 시작은 두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모두 김영옥 목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첫째 인물은 당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재학생인 김재명(金在明)이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운동의 실태와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정보,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그의 부친인 김병우 장로를 통해 안동교회로 제공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인물은 당시 동경 유학생으로서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였던 강대극(姜大極)이 일본에서 안동으로 귀국하여 당시 안동군청 서기였던 김원진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들은 비교적 집회가 자유로웠던 안동교회를 찾아와 김영옥 목사와 이중희 장로 등 안동교회 지도자들과 의논한 결과 구체적으로 안동 3·1만세운동 날짜를 3월 13일 장날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동의 3·1만세운동은 3월 12일, 김영옥·이중희·강대극·김원진 등 주역 4인이 거사 하루 전날에 검거되어 조사를 당함으로써 좌절되었다. 일경은 만세운동 계획에 관한 단서를 잡지 못해 이들을 석방하게 되고, 다만 이중희 장로(당시 60세)는 투옥 중 얻은 질병으로 석방된 지 6일 만에 별세하게 된다. 첫 거사일은 놓쳤지만, 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음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계획을 수립했다. 결국 3월 18일 낮 12시경, 김병우 장로와 김익현 조사의 선창 신호에 맞춰 안동교회 교인 30여 명, 유림에 의해 주도된 다른 시위대, 그리고 장터에 모인 읍민들이 모두 합세하여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안동읍 최초의 대규모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읍민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안동교회 교인으로 김병우 장로는 2년, 김익현은 1년, 김재성·김계한·이인홍·황인규·권점필은 6개월씩 각각 복역했다. 김영옥 목사는 1922년 1~2월 경 9명의 장로교회 목사들과 함께 평북 중강진 감옥 또는 경찰서에 압송되었다. 9명은 당시 그 지역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이었는데 김영제 목사(길주 명천교회), 정덕생 목사(부산 초량교회), 이자익 목사(전북 금산교회), 최영택 목사(충북 청주읍교회), 장사성 조사(안동신세교회) 등이었다. 그들은 태평양회의와 관련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관련 피의자로 50일 동안 취조를 받고 석방되었다. 이때 일제는 각 지역에서 시무하면서 이미 요시찰 인물로 감시 대상이었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비록 청원서 명단에는 빠져 있었지만 중강진 감옥이나 경찰서로 압송해 혹독한 취조를 했던 것이다. ▲1922년 일명 태평양회의로 인해 중강진 감옥이나 경찰서로 압송되어 큰 고초를 겪는 당시 장로교 지도자들로 ①김영옥목사, ②김영제목사, ③정덕생목사, ④이자익목사, ⑤최영택목사, ⑥장사성조사 등으로 석방된 후 찍은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김영옥 목사는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를 담임으로 섬길 때 1927년 4월 교회 중직자들과 상의하여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를 포항에 설치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신간회 영일지회를 발기하고 간사로 활동하면서 대회 의장까지 지내며 책임을 다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일경으로부터 계속 감시와 탄압을 받음으로써 목회와 가정에 많은 고난을 받게 되었다. 그는 교회를 섬기면서 독립운동에 관계하다가 무려 네 번이나 일경에 체포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등 고난을 당했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어 그는 남조선과도정부 문경군과 예천군의 민선 입법의원으로 피선돼 혼란한 국가를 위해 1년 동안 봉사했다. 그는 정통보수주의 편견에서 벗어나 에큐메니칼 정신이 투철했다. 그는 교파주의의 편협한 사상에서 자유하여 교회와 국가를 함께 사랑하고 헌신 봉사한 애국지사였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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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1)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 영 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1893년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안동지역에 복음이 전해진지 124년이 지났다. 오늘의 교회는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안다. 훌륭한 믿음의 선배 중에는 교역자들 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포함된다. 이 분들의 헌신의 결과로 척박한 이곳 안동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 마을마다 교회가 서게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수고임을 알기에 감사할 뿐이다. 김영옥 목사는 한국선교 초기 거룩한 발걸음을 통해 거룩한 흔적을 남긴 위대한 선배이다. 필자는 그에 대한 조명이 너무 늦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그리고 경상북도에서 초개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며 교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김영옥 목사를 연구하여 탈고하니 그동안 목사님에게 가졌던 죄송스러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느낌이다. 이제 자애로운 아버지요 할아버지, 지역의 초대교회의 기초를 든든히 세워 중심교회로 서게 한 목사,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애국한 김영옥을 소개한다. 1.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결신한 청년, 김영옥 경상도의 첫 한국인 목사는 김영옥(金泳玉, 1871-1952)이다. 김영옥이 비록 영남지역 최초의 한국인 목사이지만 그의 고향은 북한으로, 그는 1871년 4월 12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했다. 가난했던 그는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갈 꿈을 갖고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18세가 되던 1888년 어느 날, 평산 누님 댁에 갔다가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가 소래(松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국으로 갈 방법을 찾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제시받은 김영옥은 미국 갈 결심을 포기함과 동시에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로부터 세례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전혀 뜻하지 않게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은 김영옥은 세례 까지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부로 복음사역의 적극적인 도우미가 되었다. ▲1909년 9월부터 안동의 북부지역은 사우대 선교사가, 서쪽은 오월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좌측 말에 탄 사람은 사우대 선교사이며 말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시 조사인 김영옥(1911년 안동교회 초대담임목사로 부임)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부, 그리고 오른쪽 말에 탄 사람은 오월번 선교사이다. 2. 목사 임직 이전의 복음전도자, 김영옥 회심 이후 김영옥은 복음사역을 위해 하나하나 착실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복음전파사역에 관한 김영옥의 결심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곁길로 간 적이 없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한 준비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 1년 만에 한문 신·구약 성경 모두를 통독(通讀)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한 선교사들로부터 전도법과 장로교회에 관해 배웠으며 선교사들과 간단히 대화할 수 있는 영어실력도 갖추게 되었다. 모든 과정을 이수한 김영옥은 실력 있는 매서인(賣書人)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사를 도와 공식적인 매서인으로서 사역할 수 있었다. ▲황해도 솔래(松川)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18세 때(1888년) 회심하고 결신한 김영옥은 휴식도 없이 64년(1952년) 동안 서울, 강원도 철원과 원주, 경북 안동, 사월, 포항, 영주, 경주, 풍기, 문경, 그리고 의성 삼분 등 전국에서 교회를 세우고 돌보며 애국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온 김영옥은 1893년 모삼열(Samuel. F. Moore)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순교를 각오하고 서울 종로 5가, 4가 등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몇 명의 성도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1894년 이들이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와 그의 조사(助事)인 서상륜과 함께 연지동 초가(草家)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연동(蓮洞)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또한 김영옥은 조사로서 서울의 승동교회와 동막교회 설립에 관여함으로써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쉬지 않고 감당했다. 이후 김영옥은 서울을 벗어나 더욱 활발하게 전도사역을 감당했다. 그는 경기 동쪽과 황해도 이남(以南)으로 순행하며 전도하여 백천, 평산, 금북, 금성, 양구, 화천, 양주, 포천, 등지에 여러 교회를 설립에 기여했다. 특히 김영옥은 1898년 모삼열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고 개척한 고향인 황해도 백천군 운교(雲橋)교회에서 영수(領袖)와 장로로 섬기기도 했다. 운교(구름다리)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큰 한옥을 사서 새롭게 단장하여 예배처소로 사용한 그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김영옥은 주일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는 새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신자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2주 내지 3주간씩 연속으로 사경회를 열기도 하였다. 김영옥은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한국교회 초기 매서와 조사, 그리고 영수와 장로로 초기 한국교회의 뛰어난 평신도 지도자였던 것이다. 3. 영적 지도력을 갖춘 한국 장로교 평신도 리더, 김영옥 조사(助師)는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그들의 고국과는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이 땅에서 적응해갈 수 있도록 도운 사람들이다. 선교사들은 이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부동산을 구입할 때 도움을 받았으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각 지방으로 순행할 때 큰 도움을 받았다. 만일 어느 누구도 선교사들의 복음사역과 현지 적응을 돕지 않았다면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이 땅에서 복음의 씨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영옥은 조사로서 초기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 한국선교 초기 많은 조사들이 있었지만 조선장로교사기에 따르면 김영옥은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도 영향력 있는 발언권을 가진 조사였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공식적인 회의석상에서 중요한 발언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영옥은 1903년 9월, 1904년 9월, 1906년 9월 세 차례에 걸쳐 선교사들과 함께 모인 장로교공의회 경성소회 총대 장로로 참석하여 발언하기도 했다. 1906년 9월 회의에서는 “교인으로는 교회를 순종하고 국민으로는 국가에 순종할 방침이란 문제”에 대하여 발언했는데, 이것은 분명한 기독교적 국가관을 가진 김영옥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명의 한국인 목사가 처음으로 배출되기 전 까지 김영옥은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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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우리 아이국내 다문화 학생의 수는 2010년 31,788명에서 해마다 조금씩 늘어나 2017년에 109,387명으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단순한 수치의 비교만으로도 우리나라는 다문화 학생의 비율이 점차 늘어 상대적인 비율은 급격하게 증가할 것이고 이로 인한 많은 변화가 올 것으로 예상된다. 경북교육청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다문화교육 지원 체계를 구안하는 등 선제적인 대응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북도내 다문화 학생은 전체 학생 273,336명 중 8,199명으로 약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초등학생은 129,305명 중 5,997명으로 5.0%를 넘어 이미 다문화 사회에 도달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다문화 학생의 구분은 국제결혼 가정의 자녀 중 국내에서 출생한 경우가 전체 8,199명 중 7,559명으로 92%를 차지해 가장 많으며, 이들은 한국에서 나고 한국에서 자란 일반 학생들이다.국제결혼으로 배우자가 데리고 온 중도입국 학생과 근로자 및 유학생 등이 데리고 온 외국인 가정 자녀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아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몇 년간의 다문화 학생 수와 증가율 등을 살펴보면, 다문화 학생의 수는 2010년 1,812명에서 2014년에 4,221명, 2018년에 8,199명으로 매 4년마다 2배씩 증가하고 있다.전체 학생 수에 대한 비율은 2010년 0.5%에서 2013년에 1.07%, 2016년에 2.3%, 2018년에 3.0%로 2~3년 마다 2배씩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전체 학생 수의 감소와 다문화 학생의 증가에 따른 현상이며 날로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다문화 교육의 지원은 크게 세 가지 과제로 나뉜다. 첫째, 중도입국학생 및 외국인 자녀들의 한국어와 한국문화 교육지원을 위한 맞춤형 지원둘째, 일반학생 및 교직원 대상 다문화 감수성 증진을 위한 다문화 이해교육셋째, 유관기관과의 연계를 통한 효율적인 다문화 지원 ※2018년 경상북도교육청 다문화교육 추진 내용 체계 경북교육청에서 실시 중인 맞춤형 지원사업으로는 교육부 지원 정책학교 29교(예비학교 7교, 중점학교 13교, 유치원 7교, 연구학교 2교)와, 우리도 자체 지원 사업 학교 191개교(한국어교육지원 29개교, 이중언어교육지원 30개교, 다솜이사랑방 76개교, 한울동아리 13개교, 다문화유치원 23개원)를 운영하고 있다. 다문화 이해교육으로 전학교 2시간 이상 학생교육, 연간 1회 이상 학부모교육, 교원은 15시간 이상의 연수를 권장하고 있다.다문화 이해교육의 다양화를 위하여 글로벌 진로직업 체험단 운영, 다드림캠프 운영, 맞춤형 예술교육 프로그램 운영, 맞춤형 진로직업 교육 운영 등 다양한 외부 기관 위탁사업을 운영 중이다. 다문화 정책학교 및 지원 사업에 대한 컨설팅과 일선학교 이해교육 지원을 위한 경상북도교육청 다문화교육 지원단(일명 풀꽃지원단*)을 양성하여 운영 중이다. *풀꽃은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자세히, 오래 보아야 예쁘지만 동요의 한 구절처럼 어디 피어도, 어떤 색으로 피어도 우리 산천을 가득 메운 진짜 꽃들이다. 이들처럼 다문화와 일반학생들이 모두 잘 어우러져 우리 미래를 아름답게 채우도록 지원하자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기초과정과 심화과정 연수를 거쳐 40여명이 선발되었으며, 6월부터 7월까지 정책학교 29개교에 대한 현장 집단 컨설팅을 실시하여 좋은 호응을 받았고, 이어 9월에는 지원사업 학교(한국어지원 및 이중언어 지원학교) 59개교에 대한 컨설팅을 진행 중이다. 도단위 가족센터와 연계하기 위하여 올해 연수 시에 경북다문화 가족지원센터에 우리도의 가족센터 현황에 대한 강의를 의뢰하여 참가자로부터 정말 실제로 필요한 연수라는 평을 받기도 했으며, 제6회 전국이중언어대회 경북대회 모국어심사를 또한 경북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의뢰하여 진행하였다. 다양한 지원활동에도 불구하고 아직 다문화 교육에는 다양한 문제와 한계들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맞춤형 지원의 경우 예비학교를 통해 집중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희망학교를 지원받아 소규모로 지정하는 형편이라서 경주(2교), 경산(3개교), 칠곡(1교), 의성(1개) 등에서만 운영되고 있어 예비학교가 없는 시군 학교에 대한 지원이 어려운 실태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2019년부터는 다문화 예비학교와 중점학교 등을 함께 운영하는 다문화 친화적인 학교를 지원청별 1교 이상 지정하여 거점학교로 운영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경북도내 모든 지역에 1개교 이상의 예비학교가 준비되어 비정기적인 다문화 학생의 전입 시에도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고자 한다. 거점학교는 중기적으로 지역별 지원 센터로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 한국어교육원 등을 설립하는 것이 장기적인 비전이다. 다문화 이해교육은 아직 형식적이고 단일 행사위주의 내용이 많은 편이나 풀꽃지원단의 일선학교 컨설팅 및 담당교사 연수를 강화하여 교육과정 속에서 다문화교육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마숙자 초등과장은 “다문화 학생에 대한 지원은 이미 거룩한 봉사활동이나 희생정신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아이의 미래와 직결된 어쩌면 이기적인 현실의 문제입니다. 산들에 핀 모든 꽃들은 우리를 지키는 미래이며, 모두가 함께 키워야 하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한송이의 시든 작은 풀꽃도 안타까운 것처럼, 한아이도 놓칠 수 없는 필수 교육 사업, 경상북도교육청 다문화 교육의 모토입니다.”라며 체계적이고 선제적인 다문화 교육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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