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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 속으로!’ … 제24회 목사·장로 선교대회예장(통합) 영남지역노회협의회가 주최한 제24회 목사.장로 선교대회자 지난 12일 포항동부교회에서 열렸다. 최기학 총회장 예장(통합) 제24회 목사.장로 선교대회가 지난 12일 포항동부교회에서 열렸다.(사진제공=포항동부교회 박상우 집사) 예장(통합) 영남지역협의회(회장 손방호)가 주최한 제24회 영남지역 목사·장로 선교대회가 지난 12일 오전 10시부터 포항동부교회(담임목사 김영걸)에서 17개 노회 목회자와 장로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 속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선교대회에서 참석한 회원들은 교회의 본질인 선교의 사명을 재확인하고 국가와 민족, 세계선교와 지역 복음화 등을 위해 함께 협력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개회예배에서 설교를 맡은 최기학 총회장은 “현재 한국 교회의 위기가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며, “교회가 개혁을 통해 거룩성을 회복하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온 교회 성도들을 마을의 선교사로 보내고, 마을 주민들이 목회자를 존경하고 교회에 협력하는 ‘작지만 강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며 마을 목회의 비전을 제시했다. 손방호 회장의 인도로 드려진 개회예배는 수석부회장 이동아 목사의 기도, 경안노회장 권오수 목사의 성경봉독, 포항동부교회 찬양대의 찬양, 최기학 총회장의 말씀 선포, ‘국가와 민족, 북한 동포’,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 ‘신학 대학과 총회’ 등을 위한 특별기도 순서가 있었다. 이어 선교대회는 총무 김영춘 목사(경서노회장)의 진행, 손방호 대회장의 대회선언, 대회사, 이형춘 포항남노회장의 환영사, 김영걸 목사(포항동부교회)의 환영사, 전국장로회연합회장 등 각 지역협의회장의 축사, 내빈소개, 영남신학대학교 등에 장학금 전달, 진주노회와 경안노회에 선교비 전달, 이승일 목사(前 회장)의 식사기도 순으로 진행됐다. 오후에 이어진 선교특강은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와 김지연 약사(한국가족보건협회․대표이사)가 했다. 소 목사는 ‘처치 플랜터가 되라’는 제목으로 특강했고, 김 대표이사는 ‘동성애의 보건적 문제와 차별 금지법’ 등에 대해 강의했다. 영남지역노회협의회는 1993년에 창립된 이래 24회의 선교대회와 7회의 친선체육대회를 통해 지역 복음화 비전을 공유해 왔으며, 경북노회, 경동노회, 포항노회, 포항남노회, 경서노회, 경안노회, 영주노회를 비롯 영남지역 17개 노회가 소속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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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동부교회 설립 35주년 기념 및 임직감사예배 드려구미동부교회(담임목사 정희수) 설립 35주년 기념 감사예배가 지난 17일 오후 2시 교회 본당에서 지역 목회자와 성도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장로와 집사 장립과 권사 취임 등 40여 명의 임직도 함께 이뤄진 이날 예배는 밝고 은혜로운 분위기 가운데 드려졌다. 1부 예배는 정희수 담임목사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전용남 목사(구미동시찰장)의 대표기도, 할렐루야찬양대의 찬양, 김승동 목사(지도자협의회장)의 ‘교회를 세우는 지도력’(시131:1~3)이란 제목의 말씀 선포가 있었다. 2부 임직식 시간, 정희수 목사의 인도에 따라 40여 명의 임직자들이 서약과 안수기도, 취임기도를 마치자 정 목사는 임직과 취임에 대해 공포했다. 이어 우성호 목사(기성)가 장로·집사에 대한 권면을, 김성길 목사(인동)가 권사에 대한 권면을, 임종복 목사(순회선교사)가 교우 권면의 순서를 맡았다. 3부 임직자들의 감사헌금과 임직자들에 대한 교회의 축하 선물 전달(성경), 김태영 장로(경북장로회장)의 축사와 임정재 장로의 답사, 35주년 기념 영상 상영, 송운달 장로(준비위원장)의 광고, 경북노회장 김중회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모두 마쳤다. 이날 임직자들은 새로운 직분을 허락하심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예배당 내 엘리베이터 설치를 위한 헌금을 무기명으로 교회에 드렸다. ※ 이날 임직자는 아래와 같다. 구미동부교회 임직·취임 임원명단 ▲장로장립: 임정재 김보현 박명일 ▲집사취임: 권혁균 ▲집사장립: 마정호 이호완 조현진 이재광 이병석 정원윤 박정일 박용남 정순영 임춘길 장병렬 배민성 ▲권사취임: 최영혜 정경민 이은숙 장미선 한명숙 김신옥 김선희 김경희 최은희 강춘선 최화자 최성옥 지정좌 이호윤 김미향 이호정 주혜옥 이필남 전상록 ▲명예권사취임: 권영옥 박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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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 경북노회 제183회 정기노회 개최예장(통합) 경북노회 제183회 정기노회가 지난달 16일 오전 10시 대구제일교회(박창운 목사 시무)당에서 열려 신임 임원진 선출을 비롯 각종 현안을 처리했다. 회의에 앞서 열린 개회예배는 부노회장 하동오 목사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노회장 이현윤 목사의 ‘주님은 외출중’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박해욱 목사의 집례로 성찬예식을 가진 후 서기 이준엽 목사의 광고에 이어 이현윤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이어 임원 선거를 통해 노회장에 강경구 장로(내당교회), 목사 부노회장에 하동오 목사, 장로부노회장에 최성규 장로를 선출했다. 한편 정기노회에서는 조석원 목사(내당교회)가 공로목사로 추대됐다. 경북노회 제183-184회기 임원 노 회 장 강경구 장로(내 당) 부노 회장 최성규 장로(대구제일) 부 노 회 장 하동오 목사(효 령) 서 기 송영중 목사(복 된) 부 서 기 신경희 목사(둥 지) 회록 서기 신성재 목사(장 천) 부회록서기 김영근 목사(만 민) 회 계 황순도 장로(삼 덕) 부 회 계 이수형 장로(대구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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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노회 제62회기 성경암송쓰기대회 열려예장(합동) 경북노회주일학교연합회가 주최하는 ‘제62회기 후반기 성경암송쓰기대회’가 지난 23일 약목교회(담임목사 강경운) 예배당에서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정우혁 집사(회장)의 인도로 드려진 1부 예배는 장철 장로(증경회장)의 대표기도, 윤춘해 목사(교육부, 둔덕)의 ‘복 있는 사람’(시1편)이란 제목의 말씀 선포, 이경용 집사(총무)의 광고, 강경운 목사(약목)의 축도로 마쳤다. 윤춘해 목사는 말씀 선포에서, “참된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악인의 의도대로 따라가지 않고, 죄는 생각지도 않으며, 항상 말씀을 묵상하면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이미 하나님의 복이 임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진행된 성경암송쓰기대회는 약목교회 본당과 각 교육관에서 진행위원들의 인도에 따라 질서 있게 치러졌으며, 약목교회에서는 700여 명 참석자 전원에게 간식으로 빵과 우유를 대접했다. 이번 대회 참가자들의 성적을 합산한 결과 종합우승은 구미옥계교회, 종합2등은 약목교회, 종합3등은 구미강동교회 순이었다. 각 부문별 1등 수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초등1부 쓰기: 최지인(구미옥계) ▲초등2부 쓰기: 방은혜(구미옥계) ▲초등3부 쓰기: 강서빈(왜관) ▲초등4부 쓰기: 최예빈(구미옥계) ▲초등5부 쓰기: 강서원(왜관) ▲초등6부 쓰기: 이형준(구미옥계) ▲중등1부 쓰기: 정승환(구미옥계) ▲중등2부 쓰기: 강서정(왜관) ▲중등3부 쓰기: 김빛나(구미옥계) ▲고등1부 쓰기: 박이레(구미옥계) ▲고등2부 쓰기: 이영민(구미옥계) ▲고등3부 쓰기: 심재훈(성주중앙) ▲청년1부 쓰기: 조주은(약목) ▲청년2부 쓰기: 김윤채(약목), 장지언(동명) ▲장년1부 쓰기: 최순천(성주중앙) ▲장년2부 쓰기: 한봉애(일선) ▲장년3부 암송: 김영자(포남) ▲영어암송 초등1,2,3: 홍승현(구미옥계) ▲영어암송 초등4,5,6: 정리온(구미강동) ▲영어암송 중등: 김민아(북삼) ▲영어암송 고등: 장예은(동명) ▲유치1부 암송: 김서은(북삼제일) ▲유치2부B 암송: 문은송(구미강동) ▲유치2부A 암송: 최도현(약목) ▲유치3부B 암송: 모동수(성주중앙) ▲유치3부A 암송: 김하연(구미옥계) ▲초등1A 암송: 정찬율(약목) ▲초등1부B 암송: 권순주(구미동부) ▲초등2부B 암송: 이가영(왜관) ▲◐초등2부B 암송: 라예승(신월) ▲초등3부B 암송: 구자인(구미옥계) ▲초등3부A 암송: 전지윤(약목) ▲초등4부 암송: 성성현(구미옥계) ▲초등5부 암송: 우예진(구미옥계) ▲초등6부 암송: 박다은(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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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교직자협의회 제15회 친선체육대회 성료경북교직자협의회(대표회장 설정수 목사, 경산옥산, 이하 경북교협)가 주최하고 경북노회(노회장 김중회 목사, 북삼)가 주관한 제15회 친선체육대회가 지난 14일 경산실내체육관에서 400여 명의 목회자 부부와 장로 부부가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됐다. ‘경북의 교회여 함께 뜁시다!’란 주제로 모인 이번 대회는 교회를 섬기는데 수고하는 교직자들을 위로하고, 개인의 건강과 교회의 건강을 위해 함께 노력하며 경북지역 23개 시·군의 복음화를 위해 다시 한 번 도약하자는 취지로 축제의 장을 펼친 것이다. 1부 개회예배는 대회장인 설정수 목사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이관희 장로(경북교협 회계)의 대표기도, 박상렬 목사(부서기)의 성경봉독, 남서호 목사(동산교회 담임)의 ‘챔피언’(빌1:6)이란 제목의 메시지 선포가 있었다. 남서호 목사는 메시지 선포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날마다 순종하며 예배하는 여러분은 삶 속에서 이미 승리자”라며 참여한 교직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이어 대회장의 대회사 선언, 이기택 목사(증경회장, 구미서부)의 격려사, 김관용 경북도지사·최영조 경산시장·최경환 경산시 국회의원의 축사, 김현덕 목사(부회록 서기)와 함께 “경북의 교회여 함께 뜁시다!” 구호 제창, 이상직 목사(진행위원장)의 광고, 서귀석 목사(명예대회장)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경기 진행은 체육관 내부와 외부 경기장에서 5개 종목(배구, 족구, 줄다리기, 발볼링, 농구)으로 나뉘어 각각 진행됐다. 각 노회 회원들을 단체복을 맞춰 입고 질서 정연하게 경기에 임했으며, 소속 대표 선수가 출전하면 함께 소리높여 응원구호와 응원가를 부르는 등 즐거운 함성과 찬양소리가 뜨거웠다. 대회 종합 성적 합산 결과 구미노회가 최우수상으로 결정돼 우승기와 트로피, 상금을 받았다. 시상식 후 경품 추첨에 이어 이종형 목사(증경회장)의 폐회기도로 모든 순서를 은혜롭게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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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1)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들어가면서 안동교회 제4대 담임목사(1925~1928)로 시무한 박상동(朴尙東, 1894~1949) 목사는 아버지가 목사였고, 목사의 아들을 두었으며, 한국교회에서는 단 한 자릿수에 불과한 직계목사 손자를 둔 4대 목사 가문(家門)의 중심이었다. 그의 조부(祖父)·부친(父親)뿐 아니라 그 역시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래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6개월의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극일(克日)하기 위해 박상동 목사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일본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4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며 오사카와 고베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교포를 위해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귀국한 후 안동교회를 섬기면서 전도, 사회봉사, 교회조직의 변화, 다음 세대의 신앙교육 등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의 헌신을 통해 안동교회는 새롭게 리모델링(Remodeling)되어 시대에 맞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상동 목사는 이민자의 삶의 고단함과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안동교회 사역을 중단한 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와 나고야, 그리고 인근 지방의 복음화와 교회개척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당시 한국과 재일교회를 위한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제 말엽 그는 교포들의 인권개선노력과 민족독립운동의 죄목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생사(生死)의 고비에서 해방과 함께 석방되어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끝없는 복음의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상동 목사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초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등에 십자가를 지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성도와 자녀에게는 인자하고 겸손한 목사요 아버지였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자식들에게 사랑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이 글은 박상동 목사의 일생을 기록한 소고(小考)이다. 하지만 이 글에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믿음의 가문, 믿음의 사람의 거룩한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독립운동가요, 복음전도자요, 교육자요, 아버지요, 음악을 좋아한 사람이요, 목사요, 인격자인 인간 박상동을 감사한 마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만나보자. 1. 마태복음 1장의 ‘낳고, 낳고, 낳고’를 재현(再現)한 가정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그 족보는 아담에서 시작하지 않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박상동 목사 집안도 초창기 한국교회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명문가문이다. 1) 1대 박영화 목사박상동은 1894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에서 박영화(朴永和, 1859~1923)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박영화는 1902년경에 김인옥, 이성준의 전도를 받고 전 가족(부친인 박용한과 3남 8녀)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군위군 호암교회에 출석하다가 다음 해인 1903년 쌍계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는 특별히 교육에 관심을 갖고 1910년 농촌지역 복음화와 인재양성을 위해 쌍계교회에 정림학교(1920년 폐교)를 설립하여 운영한 명망 있는 지역의 지도자였다. 이런 박영화는 1914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제11회로 졸업하고 동년 6월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쌍계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그는 1919년 3·1 의성 만세운동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경남 거제시 사능교회 초대담임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박영화 목사는 거제도와 통영 등 경남지역 초기 교회의 존경받는 목회자로 자리매김하였다. 2) 2대 박상동 목사이러한 신앙적 분위기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박상동은 아버지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대구 계성학교 출신으로, 부친과 함께 3·1 만세운동의 옥고를 치른 후 일본 고베에 있는 칼빈계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1925년 귀국하여 안동교회 강도사로 부임하였다. 박상동은 안동교회 강도사로 시무하면서 평양신학교에서 별신학(別神學) 과정 1년간을 수학하였다. 박상동 목사는 1926년 9월 경안노회(제11회)에서 목사안수 후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885년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41년 만에 직계(直系)로 부자(父子)가 목사 임직자가 됨으로써 아버지, 아들 목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3) 3대 박대선 목사경북 의성군 비안면에서 박상동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한 박대선 목사(1916~2010)는 1940년 일본관서학원대학교 영문과와 1942년 동 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미국 보스톤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전공으로는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니시노미야시 한인교회의 담임전도사로 사역했으며, 귀국하여 1942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 창광산교회, 박구리교회, 중앙교회, 서평양교회 등을 섬겼다. 박대선 목사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성화신학교 교장대리 역임,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역임, 1959년부터 1962년까지는 서울 광화문감리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했다. 특히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연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다가 3선 임기 중 저항 운동에 나선 교수의 복직을 반대하던 당시 정부와 심한 불화를 겪다가 사임하였다. 4) 4대 박태기 목사박대선 목사의 차남인 박태기 목사는 공학박사로서 KIST의 책임연구원으로 있다가 소명을 받고 감신대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었다. 중진 과학자로서 인정받고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일생의 여름과 같은 때에 성직의 길에 들어섬으로써 대(代)를 이어 직계 4대 목사 가문(家門)을 이어가고 있다. 2. 애국자 박상동 의성에서 3·1 독립만세가 크게 울려 퍼진 날은 1919년 3월 12일이다. 11일에 의성군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 150여 명이 학교 뒷산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쌍계리에서 쌍계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의 중심인물은 김원휘 조사, 김충한, 쌍계교회 박영달 장로, 박영화 목사, 그리고 대구 독립만세 시위운동(3월 8일)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박상동(당시 대구 계성학교 2학년생) 등이다. 이들은 3월 12일 정오, 박영신의 집 앞에 모인 2백여 명의 시위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이렇게 촉발된 의성지역의 만세시위는 4월 3일 가음면 구천시장의 ‘1인 만세시위’까지 23일간 계속되었다. 이후 박상동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부친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박상동은 함께 의성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정이었다.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박상동은 일본을 올바로 알아야 일본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일본 고배중앙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생활은 고베, 오사카, 교토 등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동포를 위해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는 기간이었다. 졸업 후 1925년 귀국하여 3년여 동안에는 안동교회를 섬겼다. 특히 이 기간에 박상동 목사의 민족의식이 나타난 것은 1928년 3월 경안노회 여전도회 도사경회와 5월 23일부터 1주일 동안 계속된 성경사경회였다. 당시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었던 길선주 목사가 안동을 방문했다. 약 200명이 참석한 성경사경회의 주제는 ‘애굽의 금자탑’으로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는 많은 백성에게 희망을 주었다. 한편, 사경회 기간 중 길선주 목사는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구류 20일 후 출소한 길선주 목사는 예정대로 사경회를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갔는데 이 사건은 사경회에 참석한 교인에게뿐 아니라 주위 교회 성도들에게도 깊은 도전을 주었다. 이후 박상동 목사는 1928년 파송 받아 다시 오사카로 돌아가 순회목사로 교회를 섬기는 일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일제 말엽 박상동 목사는 또다시 투옥되었다. 박상동 목사는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일본 각지를 순회하며 민족의식의 고취,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통치 비판, 기독교도의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반대 등의 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1941년 나고야 동부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박상동 목사는 당시 지역 교회지도자들 10명과 함께 예비 검속되어 체포되었다. 이때 박상동, 추인봉, 김은석 목사도 포함되었다. 투옥된 박상동 목사는 밤마다 구타 등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당했다. 석방과 투옥을 반복하다가 그는 옥중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정부에서는 박상동 목사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의성군 비안면 ‘3.1운동 경상북도시발지 기념공원’에 세위진 기념탑 /논문 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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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4)- 목사 · 애국자 · 인간 박상동 목사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들어가면서 안동교회 제4대 담임목사(1925~1927)로 시무한 박상동(朴尙東, 1894~1949) 목사는 아버지가 목사였고, 목사의 아들을 두었으며, 한국교회에서는 단 한자리 수에 불과한 직계목사 손자를 둔 4대 목사가문(家門)의 중심이었다. 그의 조부(祖父)·부친(父親) 뿐 아니라 그 역시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래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6개월의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극일(克日)하기 위해 박상동 목사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일본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4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며 오사카(大版)와 고베(神戶)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교포를 위해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귀국한 후 안동교회를 섬기면서 전도, 사회봉사, 교회조직의 변화, 다음세대의 신앙교육 등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의 헌신을 통해 안동교회는 새롭게 리모델링(Remodeling)되어 시대에 맞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박상동 목사는 누구보다 재일교포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민자의 삶의 고단함과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안동교회 사역을 중단한 채 일본으로 건너간 예민한 영성의 사람이었다. 그는 오사카와 나고야, 그리고 인근 지방의 복음화와 교회개척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겼다. 박상동 목사는 현해탄을 넘나들며 한국과 일본에 복음을 전한 위대한 전도자였던 것이다. 그는 당시 한국과 재일교회를 위한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제 말엽 그는 교포들의 인권개선노력과 민족독립운동의 죄목으로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생사(生死)의 고비에서 해방과 함께 석방되어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끝없는 복음의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상동 목사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초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등에 십자가를 지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성도와 자녀에게는 인자하고 겸손한 목사요 아버지였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자식들에게 사랑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이 글은 박상동 목사의 일생을 기록한 소고(小考)이다. 하지만 이 글에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할 믿음의 가문, 믿음의 사람의 거룩한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독립운동가요, 복음전도자요, 교육자요, 아버지요, 음악을 좋아한 사람이요, 목사요, 인격자인 인간 박상동을 감사한 마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만나보자. 1. 마태복음 1장의 ‘낳고, 낳고, 낳고’를 재현(再現)한 가정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그 족보는 아담에서 시작하지 않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비록 아담이 인류 최초의 사람이긴 하지만 범죄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믿음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육신의 족보라기보다는 믿음의 족보요 하늘나라 백성의 계보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 4대 담임목사로 사역한 박상동(朴尙東, 1894~1948) 목사 집안도 초창기 한국교회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명문가문이다. 오늘도 박상동 목사의 가문은 한국교회의 살아있는 믿음의 역사를 중단 없이 써가고 있다. 130년의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현재까지 4대 직계목사 가문을 이어가고 있고, 곧 5대 목사가 배출될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 목사의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목사 아버지는 자신이 겪은 험난한 목회의 길을 자녀들이 겪기를 원치 않을 뿐 아니라 목사 자녀들도 목사 아버지의 좁은 목회의 길을 보며 쉽게 그 길을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상동 목사는 아버지가 걸어간 목회의 길을 걸었을 뿐 아니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목사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1) 1대 박영화 목사 박상동은 1894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比安面) 쌍계리(雙溪洞)에서 박영화(朴永和, 1859~1923)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박영화는 1902년경에 김인옥, 이성준의 전도를 받고 전 가족(부친인 박용한과 3남 8녀)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군위군 호암교회에 출석하다가 그 다음 해인 1903년, 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쌍계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박영화는 1908년 세례를 받았다. 그는 특별히 교육에 관심을 갖고 1910년 농촌지역 복음화와 인재양성을 위해 쌍계교회에 정림학교(1920년 폐교)를 설립하여 운영한 명망 있는 지역의 지도자였다. 더욱이 박영화는 당시 선교사의 조사(助事, Helper)로 활발히 사역한 인물이었다. 경안노회 70년사는 그가 의성 지역의 유력한 조사였음을 밝히고 있다. 더욱이 경상노회록에 의하면 박영화는 쌍계교회 장로로 임직 받고 노회 총대로 참석할 정도로 당시 의성 지역의 교회지도자였다. 1914년 12월 30일 부산진 여학교에서 회집된 제9회 경상노회 회의록에는 그의 이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서기가 회원을 조명하니 참석원은 목사의 방혜법, 권임함, 김기원, 홍승한, 심취명, 김영옥, 왕대선, 매견시, 맹호은, 예알배, 라대벽, 권일두, 권찬영, 인로절, 제씨요. 장로의 허 일, 황재은, 정재순, 박영화, 박상순, 최경호, 리준섭, 권덕생, 김덕경, 김응진, 김복명 제씨라. 이런 박영화는 1914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제 11회로 졸업하고 동년 6월 19일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쌍계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그는 1919년 3·1 의성만세운동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룬 후 경남 거제시 사능면에 위치한 사능교회 초대담임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박영화 목사는 거제도와 통영 등 경남지역 초기 교회의 존경받는 목회자로 자리매김하였다. 2) 2대 박상동 목사 이러한 신앙적 분위기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박상동은 아버지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학교인 대구의 계성학교 출신으로, 부친과 함께 3·1 만세운동의 옥고를 치룬 후 일본 고베에 있는 칼빈계 고베중앙신학교(神戶中央神學校)를 졸업하였다. 졸업한 박상동은 1925년 귀국하여 안동교회 강도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6월 17일 안동교회에서 소집된 제8회 경안노회록은 “신학졸업생 박상동씨를 노회장이 임시노회를 소집하는 대로 강도사로 세워주기로 가결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박상동은 안동교회 강도사로 시무하면서 평양신학교에서 별신학(別神學) 과정 1년간을 수학하였다. 그 당시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장로교 목사가 되려면 평양신학교에 가서 1년 동안 공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1926년 6월 16일 안동교회에서 회집된 제10회 경안노회에서 안동교회는 박상동 강도사를 동사목사로 청원하였고, 노회는 임사부에 맡겨 처리하도록 결의하였다. “안동교회에서 박상동 강도사를 동사목사로 청원하노니 허락 주시되 헌법대로 오는 9월에 장립허락까지 달라는 청원은 임사부로, 박상동에 목사장립을 위하여 별노회 소집은 회장에게 위임하기로 가결하다.” 결국 1926년 9월 1일 영주읍 교회에서 개회된 경안노회(제11회) 임시노회에서 안수 후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885년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41년 만에 직계(直系)로 부자(父子)가 목사 임직자가 됨으로써 아버지, 아들 목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3) 3대 박대선 목사 박영화 목사 가문의 직계 3대 목사인 박대선 목사는 1916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에서 박상동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1928년 파송 받아 오사카에서 순회목사로 일본에 파송된 부친 박상동 목사와 함께 일본에 체류하면서 1940년 일본관서학원대학교 영문과와 1942년 동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미국 보스톤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전공으로는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에 체류할 당시인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니시노미야시 한인교회의 담임전도사로 사역했으며, 귀국하여 1942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 창광산교회, 박구리교회, 중앙교회, 서평양교회 등을 섬겼다. 박대선이 어렸을 때 사람들이 “넌 이담에 커서 무엇이 될래?”라고 물으면 서슴없이 “난 목사가 될 겁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한 이 대답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을 정도로 박대선은 소명의식이 투철했다. 특히 1945년부터 1950년 까지 평양성화신학교 교장대리로 학교를 책임지고 경영하였다. 박대선 목사는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1959년부터 1962년까지는 서울 광화문감리교회 담임으로 목회를 이어갔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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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노회, 장학금 전달식 가져예장(합동) 경북노회(노회장 김창기 목사) 장학위원회는 지난달 7일~8일 한국콘도 수안보에서 가진 교역자부부 수양회에서 장학금 수여식을 가졌다. 지난해 10월에 조직된 장학위원회(위원장 이종만 목사)는 지금까지 순회헌신예배를 통해 모여진 장학금으로 대학생 6명(각 100만 원)과 고등학생 4명(각 50만원)에게 장학증서와 함께 800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이날 학업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학생들은 부모를 통해 감사의 편지를 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다. 한동대학교 최지혜(금호교회 최기성 목사 자녀) 학생은 "이번 장학금을 계기로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고등학교 3학년 김하은(오천주안교회 김기현 목사 자녀) 학생은 "이 장학금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꼭 좋은 대학교에 합격하도록 하겠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처음 순회헌신예배 때 목회 사례비를 쾌척했던 윤성화 목사(장학위원회 서기, 구미새소망)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동참하여 선한 사업을 하게 되니 기쁘다”고 말했다. 경북노회 장학위원회는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학생들에게 앞으로도 계속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써 인재육성 사업을 펼쳐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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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내동교회 찾아 ‘예배당 지붕개량공사’ 실시목록 본문 예장(대신) 경북노회(노회장 김창기 목사) 재능봉사팀은 지난달 26일 우박으로 인해 예배당 지붕에 큰 피해를 입은 봉화군 재산면 소재 내동교회(담임목사 장주덕)를 찾아 ‘예배당 지붕개량공사’를 실시, 칭송을 받았다. 시급한 지붕공사였기에 불볕더위 속 무더위마저도 무릅써야 했던 이날 공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일정이었다. 또한 지붕개량 공사는 전문인도 직접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노회 재능봉사팀 목사들은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함께 통성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다. 무더위 속 일정이었지만 재능봉사팀은 은혜 가운데 무사히 모든 공정을 잘 마무리 했다. 내동교회 장주덕 목사의 말에 따르면 “봉화와 인근 지역인 청송과 영양, 영주지역에까지 지름5~6센티 크기의 우박들이 떨어져 인근 과수원의 농작물과 비닐하우스 등에 큰 피해를 입힌 것은 물론 예배당 지붕마저 큰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이날 재능봉사팀에 참석한 김기현 목사(포항 오천주안)는 “전문인도 쉽지 않은 지붕개량 공사를 안전하게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였다”며 “한마음으로 잘 마무리해 너무나 기쁘다”고 전했다. 경북노회 재능봉사팀은 각 노회 산하 교회 가운데 도움이 필요한 어느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하나님의 예배당을 아름답게 수리해 주고 있다. 이를 위해 재능봉사팀은 봉사단의 안전을 위한 기도와 관심 있는 분들의 재정 후원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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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자천교회(永川 慈川敎會)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2호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773 이 교회는 1903년에 미국인 선교사 어드만(Erdman)이 신자(信者)들과 합심(合心)하여 지은 것으로 전국에서 보기 드문 한옥교회이다. 건물은 동서쪽으로 약간 긴 네모형태의 우진각(모임)지붕이며, 주 출입구는 양 측면에 두었다. 내부는 후면의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중앙부는 칸막이를 설치하여 남·녀석을 구분한 예배공간을 마련하여 구한말의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였다. 구조는 나지막한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세워 절충식 지붕틀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양식의 건물은 선교 초기에 구미인(毆美人) 선교사들이 지은 한·양 절충식(韓·洋 折衷式)으로, 개신교사(改新敎史)와 건축사(建築史) 연구의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안이와 선교사와 권헌중 장로의 노고재에서 만남 자천교회 설립 이야기 자천교회 이야기는 1898년 안의와 선교사의 경북 동부와 동북 지방의 2개월 전도여행에서 시작한다. 그는 대구에서 출발하여 영천을 거쳐 청송으로 전도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 권헌중은 안의와 선교사와 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었다. 원래 자천교회 설립자 권헌중 장로는 경주의 작은 마을의 선비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 훈장이었다. 그가 서당 훈장으로 살아가고 있던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지배를 당하고 있는 시절이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 헌병들이 각 군 소재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며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지사들은 일본 헌병들과 맞서 싸웠다. 이러한 탓에 낮에는 일본 헌병의 천국이요. 밤은 의병 천지였다. 일제로부터 당하는 고통은 면소재지에 있는 양반과 천민들이나 할 것 없이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때문에 견디기 힘든 일제의 고통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자신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권헌중에게 있어서도 고통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경주에 있는 한적한 곳의 선비로서 서당 훈장의 생활을 접고 청송군 현서면 수락이라는 곳에 이주하여 살게 된다. 하지만 수락에서의 생활도 길지 않았다. 그곳의 생활도 접고 또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 현서면 수락에서 대구를 향하고 있었다. 안의와 선교사는 영천을 거처 청송으로 선교 여행을, 권헌중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서 대구로 각자의 목적을 향하여 길을 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던 이들의 만남은 영천시와 청송군의 경계를 잇는 ‘노고재’라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권헌중은 노고재에서 휴식을 하던 중 안의와 선교사를 만나게 된다. 권헌중은 당시 처음 만나는 외국 사람이었고, 모양새도 우리나라 사람과 달리 키와 눈과 코가 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말을 서툴게 한 탓에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또 권헌중과 함께 동행하던 가족들과 노비, 머슴들은 자신들의 모습과 많이 다른 안의와 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괴물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한바탕 웃는 일도 벌어졌다는 우스운 일화도 있다. 권헌중은 노고재에서 안의와 선교사와 첫 만남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에 관해서 듣게 되었다. 안의와 선교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관하여 들은 권헌중은 대구로 이주 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보현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신촌면 자천리에 작은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그곳에 머물며 안의와 선교사와 왕래하면서 성경 말씀을 배웠다. 한국 초기 교회들의 역사가 대부분 그러하듯 자천교회 역시 작은 초가집의 사랑방에서 시작이 되었다. 권헌중은 자기가 살고 있는 초가집을 예배당 겸 서당으로 사용했다. 낮에는 서당으로 사용하며 한문을 가르쳤다. 저녁에는 함께 성경을 공부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된 자천 교회의 당시 교인은 서당에 다니는 문동과 권헌중을 따라온 노비와 머슴들이 전부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권헌중은 당시 나라에서 처음으로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자신이 먼저 상투를 자르므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개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데리고 있던 노비들의 문서를 태워버리고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계급과 신분을 타파하고, 그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었다. 복음에 대한 권헌중의 열심에 안의와 선교사도 덩달아 신이 나서 대구에서 자천까지 열악한 도로 상황을 뒷전으로 하고 자주 방문하여 성경에 관하여 토론하며 확실한 교인들로 만들어 나갔다. 초가집 사랑방의 자천교회의 모임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신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공간이 협소하였다. 따라서 초가집 사랑방이 아니라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대구 지방의 기독교 사립학교인 희도학교가 안의와 선교사에 의해서 대구제일교회 구내 초가집에서 1900년 11월 11일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1907년 10월 23일에는 신명학교가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서 개교하게 된다. 대구를 중심으로 학교를 개교한 후 안의와 선교사는 1902-1910년 사이에 경북 각처 교회들에게 400원씩 보조하여 학교를 설립하게 하였고, 각 교회는 학부대신(현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얻어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당시 영천지방에 있는 교회도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름이 밝혀진 학교는 평천교회의 기독양덕학교, 신령교회의 흥화학교, 우천교회의 기독진도학교와 더불어 권헌중은 운영하던 서당을 폐하고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2년제 학교인 신성소학교의 설립을 하였다. 하지만 자천교회가 설립한 신성소학교의 설립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권에서 ‘1913년 남학교를 설립하여 생도(生徒) 50명을 교육하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 ‘경북교회사’에서는 ‘1914년 자천교회는 학교를 설립하여 생도 50여 명을 교육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연대를 학교의 설립 연대로 볼 수 없다. 이는 학교가 설립한 후에 노회나 총회에 보고된 연대이기 때문이다. 노회 보고 연대를 기준과 2년 재 학교라는 것을 고려하고, 초가집 교회에서 목조건물 교회 건립을 고려해 볼 때 신성소학교 설립 연대는 대략 자천교회 목조 건물을 헌당 하던 때와 비슷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권헌중 장로가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세운 신성소학교는 처음 남자 반을 모집했다. 그러던 중 안의와 선교사가 여자반도 모집할 것을 권헌중에게 권유했다. 그는 권유를 받아들여 여학생을 모집했지만 지원자가 없었다. 아무리 설득해도 지원자가 없어서 자신의 딸인 권수기씨를 입학시켜 여학생 1호가되었다. 후에 권수기씨는 신명여교에 입학하여 제2회 졸업생이 되었으며, 그 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권헌중은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신성소학교를 설립하므로 복음의 요람으로 자천교회뿐만 아니라 교육의 요람으로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용한 시골에서 글을 가르치던 선비 권헌중은 안의와로부터 받은 복음에서 출발하여 자천이라는 시골 동네에 초가집 예배당과 서당, 그리고 목조 기와의 ‘一子’형 예배당을 건립하여 복음 전도와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어 왔다. 권헌중은 새롭게 건립된 예배당에서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영수의 직분을 가지고 교회를 섬겼다. 1915년 당시 권헌중과 더불어 서석희와 정해민이 자천교회 영수로 섬기고 있었다. 세 명의 영수를 중심으로 교회가 든든히 서가던 중 첫 번째 장로를 장립 할 수 있는 시기가 자천 교회에 찾아왔다. 교회는 권헌중을 장로로 세워줄 것을 결정하고 1920년 6월 11일 제8회 경북 노회에 청원을 하여 허락을 받은 후 공부하였다. 노회의 절차를 밟아 권헌중은 장로 청원이 있은 후 1년 반이 조금 넘은 1922년 2월 26일 오전 11시 새롭게 건립된 본교회 목조 예배당에서 위철지 목사의 주례로 장로 장립을 가지게 됨으로 교회 설립이후 첫 장로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자천교회는 처음으로 당회가 조직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권헌중이 장로로 임직하던 해인 1922년 5월 13~18일까지 자천교회는 새롭게 건립된 목조 예배당에서 김성로 목사를 초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부흥회에 참석한 사람은 본 교회 성도들 50여 명과 각처 교회에서 온 신자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중에 풍성한 은혜를 받았다. 또 저녁에는 200명이 넘는 신자들이 말씀을 청강하는 동시에 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60여 명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가 40여 명이 되었다. 부흥회를 통하여 교회를 보수하기 위해서 헌금 5백10여 원이 드려지므로 더 풍성한 은혜와 결실이 있었다. 권헌중은 장로 장립을 기점으로 하여 교회의 활동도 왕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경북노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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