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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3)- 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정재순 목사(鄭在淳, 1878~1948) 1900년 초 어느 날 정재순 목사는 부해리(傳海利, Henry M. Bruen) 선교사와 만났다.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정재순이 20을 갓 넘은 나이에, 경산 어느 마을에서 부해리 선교사를 만났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훗날 정재순의 행보를 보았을 때 이 만남은 우연적인 만남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묘하신 섭리 가운데서 정재순이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게 하셨다. 만남 후 정재순의 삶은 하나님께로 향한 삶이 되었다. 정재순은 이후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 따라서 언제 누구를 어디에서 만나느냐는 정말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삶의 방향과 내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이후 정재순은 단 한 번도 교회를 떠난 적이 없이 초창기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교회 안에 세워진 기독교학교의 교사생활을 시작으로 교회에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함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를 전문적인 사역자로서 훈련시키셨다. 조사로 여러 교회를 섬기던 정재순은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하여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쌓게 된다. 그러던 1914년, 그가 섬기고 있던 대구 신정교회(현 대구 서문교회)에서 장로로 임직하는데, 신정교회 초대 장로의 영예를 안게 된다. 1915년 평양신학교 제8회로 졸업한 후 목사임직을 받고 신정교회 첫 한국인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초임지인 대구 신정교회에서 정재순 목사의 사역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역이었다. 여자 청소년을 위한 야간 학교를 개설했고, 대구 3·1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1922년 6월 안동으로 사역지를 옮긴 이후, 그는 전도중심의 사역을 통해 안동 땅을 기경하기 시작했다. 계속적인 그의 관심사인 학원선교를 위해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교회분립을 통해 안동 땅의 부흥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안동을 떠난 이후 대구를 근거지로 둔 정재순 목사는 본격적인 복음전파자의 길을 걸었다. 청도, 영천, 경산, 달성, 고령, 월성, 경주, 영일, 칠곡, 상주, 군위, 선산, 의성군 등에 28개 예배처소를 개척했다. 이 때 그의 부인인 손주안 사모는 함께 교회를 개척하고, 함께 성도를 섬기고 돌봄으로써 정재순 목사의 소중한 동역자가 되었다.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서 산란하고 죽듯이 정재순 목사는 60세에 그의 첫 담임 목회지인 대구 신정교회로 돌아가 사역을 마무리했다.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정재순은 목회 전반전과 후반전을 똑같은 열정과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불꽃을 불사르며 살았을 뿐 아니라 성도들의 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믿음의 사람이었다. 이제부터 정재순에 관해 살려보자. 1. 목사 임직 이전의 인간(人間), 정재순 정재순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며 극히 단편적인 것만 알려져 있다. 그의 집안이나 근무한 기관, 그리고 섬긴 교회도 그에 관한 것과 사역한 내용 등에 관해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지금까지 그의 성장배경이나 가족 관계 등 역시 제한적인 정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결과 정재순 목사의 가정에 관한 연구는 전무하다 시피 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 교회역사 주영연구소장 이교남 목사에 의해 정재순의 가족 관계가 새롭게 밝혀졌다. 이교남 목사는 정재순 목사의 후손을 만나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정 목사에 관한 이야기나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귀한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이교남 목사는 2013년 7월 제2회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에서 발표한 ‘정재순 목사의 목회사역과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라는 소논문에서 정재순 목사의 후손을 만나 확인한 새로운 사실을 공개한 적이 있다. 새롭게 밝혀진 정재순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정재순(鄭在淳)은 1878년 5월 24일, 경상북도 경산(慶山)군 남천면 신기동에서 출생(出生)했다. 부친은 정진호(金鎭鎬), 모친은 김소사(金召史)의 2남 4녀 중 장남이며, 부인은 손주안(孫主安)이다. 훗날 부인 손주안은 남편 정재순 목사의 동역자로 전도와 교회개척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정재순은 외동아들을 두었는데 아들은 정원조(鄭元祚), 자부는 손기순(孫琪順)이며, 그의 후손은 현재 대구에서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정재순 가문은 당시 여느 가문처럼 유학의 집안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우고 한학을 수학하며 유학을 따르는 집 안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묘는 칠곡에 있었는데, 1982년에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재순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할 때 교인으로 생존한 성도들이 기억하고 있는 정재순 목사는 천성이 어질고 중후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로부터 호감을 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 있는 정재순 목사의 사진에서 보여 지는 그의 인상(印象)은 성도들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사진으로 보여 지는 그의 인상은 후덕하고 인정이 많은 교육자요 목회자,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안동교회를 섬기는 3년 동안 성도들은 그의 신앙과 인격을 존경하며 영적 리더십에 순종했을 것이다.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고 대구제일교회 원로목사인 이상근 목사는 정재순 목사의 훈훈함을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들이 약혼한 때는 1942년 여름, 음력으로 7월 7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견우직녀라면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약혼식은 정재순 목사님의 주례로 처가 대청에서 올렸습니다.” 정재순 목사는 교인들을 포함한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주는 주의 종이었다. 2. 선교사를 만나 회심(回心)한 사람, 정재순 유교가 뿌리 깊은 가정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정재순은 처음에 기독교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증손자에 따르면 정재순이 선교사를 구타하고 쫒아내려고 선교사를 찾아갔다가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전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대구 경북 조사인물편람에 따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부해리 선교사가 ‘나의 설교 중 어느 말씀에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라고 정재순 조사에게 물었더니 정재순 조사는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부해리의 설교가 아니고 당신이 키우고 있는 사냥개 마이크가 식사 기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정재순 조사는 사냥개가 빵을 다리 위에 놓고 주인이 먹으라는 명령을 기다리는 순간을 식사 기도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미천한 개도 음식을 놓고 기도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어찌 기도하지 않겠는가? 하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개도 기도하고 난 후에 밥을 먹는데, 사람인 나는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정재순의 고백은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만이 아니라 선교사의 행동 등을 통해서도 전해질 수 있음을 알게 한다. 그렇다면 정재순은 언제 회심했을까? 정재순의 회심은 경산에서 복음이 전해진 선교사와 기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부해리 선교사는 1896년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1899년에는 뉴욕 유니언 신학교(Union Th 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한 후 그해 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해 10월 26 일 대구에 도착하였다. 결혼을 위해 대구를 떠났던 그는 1902년 5월 다시 대구 선교부에 귀환하여 경북 서부지방, 즉 김천, 선산, 군위, 고 령, 성주, 상주, 칠곡 등지에서 복음을 전해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3년 부해리 목사는 안의와(安義窩, James E. Adams)의 후임으로 대구제일교회를 담임하였고, 1904년에는 대구 성경학원의 남자 조사반을 맡았다. 또한 1916년까지 나환자 선교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2년 1월 경상노회의 조직에도 크게 기여하여 1913~14년에는 경상노회 7, 8회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5년에 대구 남산교회를 세워 1920년까지 당회장으로 시무하였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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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고품질 ‘한라봉’ 출하포항시는 북구 흥해읍 망천리 일원 아열대작물 재배 농장(한치용 농가)에서 1월부터 본격적으로 한라봉을 출하한다고 14일 밝혔다. 이번 한라봉 출하농장은 2017년 포항시로부터 아열대작물 사업비를 지원받아 한라봉 0.3ha 500주, 바나나 0.2ha 400주를 식재하였으며 식재 4년 차를 맞아 한라봉을 본격 출하하게 됐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14일 한라봉 재배 농장을 직접 방문하여 농업인과 함께 한라봉을 수확하고 택배 상자 포장을 하는 등 일손을 보태며, 포항에서 처음 아열대 작물 재배에 도전한 농가를 격려하고 재배의 어려움을 청취했다. 이번 출하되는 한라봉은 포항시 자체 품질검사결과 평균 중량은 330g, 당도 14.5 브릭스, 산함량 0.78%로 고품질의 한라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울러, 포항은 해가 일찍 뜨고 일조량이 풍부하며 비교적 온화한 날씨여서 한라봉 등 아열대작물 재배지로 적합하고, KTX, 고속도로 등 잘 정비된 도로망으로 물류비를 절감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이강덕 포항시장이 한라봉을 수확하고 있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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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선교모범교회’ 수상코로나19 위기 속에도 선교 현장 선교사들에게 큰 ‘힘’ 안동교회(김승학 목사 시무)가 ‘선교모범교회’로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예장통합 교단 보도에 따르면, 지난 연말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주관한 ‘제19회 한국선교사 지도자 포럼’에서 안동교회는 ‘선교모범교회’로 선정돼 수상했다. KWMA는 선교단체와 협력기구를 통해 한국교회 전체 2만 8,039명의 선교사들을 섬기고 있으며 매년 선교모범교회를 한국교회에 소개하고 있다. KWMA는 이번 선교모범교회 시상과 관련, “안동교회가 코로나19 가운데에서도 선교에 더욱 박차를 가한 모습이 한국교회 선교 사역에 큰 위로가 되었고, 현장 선교사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면서, “코로나19로 선교의 방향을 잃은 한국교회에 안동교회의 선교방향과 창의적 방법은 대단히 좋은 도전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이날 시상식에서 KWMA 조용중 목사는 “안동교회는 111년의 역사 속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하고 담임목사가 선교사로 파송되기도 하는 등 선교에 앞장서 온 교회”라며 “앞으로도 한국교회 선교에 선한 영향력을 많이 끼쳐 주시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김승학 목사는 수상소감을 통해 “코로나로 모두가 힘들지만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선교이기 때문에 안동교회는 더욱 선교사들을 도울 것”이라면서, “모든 성도가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으로 선교적 사명을 잘 감당하겠다”며 열방에 파송된 선교사들도 더욱 힘내줄 것을 당부했다. 안동교회는 코로나의 어려움 속에서도 파송 선교사들의 현지 사역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지원했다. 안동교회는 12가정의 주 파송선교사와 29가정의 협력 선교사, 11개의 선교기관에 기도와 물질로 협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난 11월 1일 러시아와 동북아시아로 새로운 두 가정을 파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동 한상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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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군, 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 종합평가 2개소 수상북부아카데미 ‘최우수 기관’, 남부아카데미 ‘우수 기관’ 선정 ▲울진군 청소년방과후아카대미 종합평가 2개 소 수상(건전한 놀이·문화지도 및 체험 수업 모습)(사진=울진군 제공) 울진군(군수 전찬걸)이 운영하는 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가 여성가족부와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에서 주관하는 ‘2020 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 종합평가’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이번 평가에서 북부아카데미는 ‘최우수기관’으로, 남부아카데미는 ‘우수기관’으로 각각 선정됐다. 2년마다 이뤄지는 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 종합평가는 사업관리역량, 사업운영성과, 행정참여도, 주요성과운영, 기관장 사업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전국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된 북부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는 스포츠 특성화 프로그램 및 지역연계를 통한 프로그램의 우수성, 참가청소년의 생활지도, 지자체의 예산 지원을 위한 노력 등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울진군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는 지난 2006년에 북부아카데미가 개소, 2008년 남부아카데미가 개소하여 현재 150여 명의 청소년이 참여하여 운영 중이며, 전국 청소년 방과후아카데미 종합평가에서 최우수기관(북부 5회, 남부 3회) 및 우수기관(북부 4회, 남부 3회)으로 다수 선정되는 등 성과를 인정받았다. 방과후아카데미 운영일수는 주5일(토요일, 월 1회)이며, 평일은 초등 16시~20시, 중등 17시~21시, 토요일은 9시~14시 내에서 탄력적으로 운영한다. 주요기능은 △방과 후 나홀로 청소년을 위한 안전하고 안정적인 공간제공 △건전한 놀이·문화지도 및 체험 △보호자·청소년·지역사회가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지원 △학교 교육만으로 부족한 인성 및 창의성 계발 지원 △청소년자기도전포상제(봉사활동, 자기개발, 신체단련, 탐험활동) 활동을 통한 자기성장 프로그램 지원 등의 기능과 함께 균형 잡힌 급식지원 및 지도자가 동승한 귀가차량으로 안전하게 귀가지원까지 하고 있다. 청소년 방과후아카데미는 방과 후 돌봄이 필요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현재 초등4 ~ 중등 3학년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으나, 울진군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는 돌봄이 필요한 초등 1~3학년까지 확대하여 운영 중이다. 또한, 군비를 지원하여 북부지역(울진군청소년수련관)과 남부지역(후포동부초등학교) 2개소에서 교과학습 및 생활지도·상담·체험활동·급식을 무료로 지원하는 돌봄 기능 역할과 함께 청소년의 전인적 성장을 지원하고, 가정의 사교육비 경감 및 양육부담 완화에 기여하고 있다. 2020년부터는 맞벌이 가정의 건강보험료 소득기준을 보지 않도록 기준이 완화되어 맞벌이 가정에서 방과 후 돌봄이 필요한 청소년은 보호자의 동의하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현재 울진군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에서는 2021년에 참가할 청소년들을 모집하고 있으며 신청관련은 북부아카데미(☎054-783-8777), 남부아카데미(☎054-787-0924)로 문의하면 된다. 전찬걸 군수는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역 내 청소년들을 위한 노력이 큰 결실을 보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며, 청소년의 건강한 성장을 지원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방과 후 돌봄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이혜경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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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전’으로 나아가는 구미상모교회임직식 통해 75명의 장로‧집사‧권사 세워 ▲김재경 장로가 안수기도를 받고 있다. 예장합동 구미상모교회(담임목사 조준환)가 지난 10월 31일 본 성전에서 임직‧은퇴 감사예배를 드리고 총 75명의 신실한 사명자를 세웠다. 2년 전 조준환 목사가 새로 부임하여 김승동 원로목사와 아름다운 세대교체를 이뤄낸 구미상모교회는 경북을 넘어 전 세계를 향한 선교의 비전을 품고 나아가는 모범이 되는 교회이다. 무엇보다 이날 새로운 사명과 마주한 임직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과 책임을 공감하고, 교회가 새로운 비전을 향해 도약하는 일에 선한 청지기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것을 다짐했다. 임직‧은퇴식에 앞서 드려진 예배는 조준환 목사의 사회로 드려졌으며, 최성도 장로(구미노회 장로부노회장)의 기도 후, 김승동 목사(구미상모교회 원로)가 ‘새로운 도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김 목사는 “지난날 은퇴한 선배들의 눈물과 기도로 세워진 거룩한 교회이기에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이제 그 희생을 딛고 일어서서 새로운 세계와 미래를 향해 비전을 품고 뜻을 펼쳐나가는 아름다운 교회, 신실한 일꾼들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임직식에서는 김재경 장로의 장로장립과 안수, 조재화 임상조 김만승 집사의 집사취임, 김민수 집사를 비롯한 20명의 집사장립과 안수, 강수정 권사를 비롯한 51명의 권사취임 예식이 진행됐다. 이어 은퇴식에서는 박민규 전하섭 송준남 장재수 집사의 집사은퇴, 김분연 권사를 비롯한 9명의 권사은퇴 예식이 진행됐고, 이들의 헌신과 수고를 되새기며 치하했다. 이날 예식에서는 안재호 목사(구미노회 남시찰장), 이기택 목사(구미노회 증경노회장)가 권면을, 정래화 목사(구미노회 증경노회장), 정순봉 목사(구미노회 증경노회장)가 축사를, 구미노회장 강경구 목사가 예배 축도 순서를 맡았다. 예식에서는 구미노회 남시찰장 안재호 목사와 증경노회장 이기택 목사가 권면을, 증경노회장 정래화 목사와 정순봉 목사가 축사를, 구미노회장 강경구 목사가 축도 순서를 맡았다. ▲구미상모교회의 장로‧집사‧권사로 새롭게 세워진 75명의 직분자가 서약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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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르심(7)브라더 앤드류 오픈도어 설립자 내가 탄 비행기는 암스테르담까지 얌전히 날아가지 못했다. 경유지인 마드리드에서 이륙이 지연되는 바람에 우리는 항공사가 제공하는 멋진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양말만 신은 채 호텔 로비에 서 있는 내 모습이 흥미로웠는지 모두들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할 겨를이 없었다. 쿠바를 떠날 때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해준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님, 이렇게 사랑으로 모든 걸 다 주시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선교사님은 목숨만 빼고 다 주셨습니다.” 내가 더는 쿠바에 갈 수 없게 되자, 나는 유럽에 있는 성도들에게 쿠바로 갈 것을 도전했다. 쿠바 교회에는 중보 기도와 재정과 기독교 출판물이 너무나 필요했다. 내 도전에 응한 사람들 가운데 앙스와 리네라는 네덜란드인 두 명이 있었다. 모두 50대 후반의 여성으로 프랑스 산간 지방에서 함께 사는 친구 사이였고, 이미 유럽에서 오픈도어선교회 사역에 여러 차례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두 멋진 여성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현신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내가 본받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쿠바에 대해 강하게 도전했을 때 두 여성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그들에게 쿠바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단지 쿠바의 실정과 스페인어 성경과 기독교 서적 몇 권, 그리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두세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만 일러주었다. 나는 그들을 적재적소로 이끄실 하나님만 신뢰했다. 아무튼, 내가 그들에게 준 연락처는 하바나에 있는 오픈도어 교회로 알려져 있는 큰 교회였다. 두 여성은 하나바에 도착하자마자 호텔방으로 직행, 합심하여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구했다. 두 사람은 기도하다가 성령 하나님이 그들을 레닌 공원으로 이끄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은 바로 지도를 들고 레닌 공원을 찾아 나섰다. 한편, 도시 한쪽에서는 유세비오 페레즈라는 목사님 한 분이 역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감옥에서 풀려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목사님은 매우 의기소침해져서 목회 사역을 그만두고 싶은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목회자는 사회적으로 멸시받고 공권력의 탄압에 시달리고 있었다. 기독교 신앙인이기 때문만은 아니고 목회자를 사회의 기생충으로 여기기 때문이었다. 유세비오 목사님은 소외감과 무력감을 느끼면서 신앙의 가치에 회의를 품고 있었다. 바로 그날, 유세비오 목사님은 기도 중에 성령 하나님이 자신을 레닌 공원으로 이끄시는 느낌을 받았다. 그곳에 가면 누군가가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줄 것 같았다. 그래서 목사님은 자신이 나사로라고 부르는 차를 타고 레닌 공원으로 향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1950년형 시보레 자동차가 여러 차례 폐차의 위기를 넘겼기 때문에 붙인 것이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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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교육청, ‘행복한 학교 만들기 캠페인’ 등 다양한 인성교육 강화교육공동체가 함께하는 인성교육 정책 펼쳐 ▲지난 15일 안동송현초에서 진행된 ‘행복한 학교 만들기 캠페인’에 임종식 교육감이 참석했다.(사진=경북교육청 제공) 경북교육청(교육감 임종식)은 장기간 원격수업으로 인한 대면 생활지도 부족에 따른 인성교육 어려움을 지원하기 위해 교육공동체가 함께하는 다양한 인성교육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19일 밝혔다. 교육공동체가 함께하는 인성교육은 실천‧체험 중심 인성교육을 기본으로 유튜브, SNS 등 온라인 환경을 활용한 쌍방향 소통의 인성교육을 병행하는 것을 말한다. 경북교육청은 원격수업이 지속되면서 문화‧예술 체험 기회가 부족한 학생들을 위해 찾아가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5개 권역(포항, 안동, 구미, 문경, 경산) 인성교육지원센터와 경상북도교육청연구원 인성인문학교육지원센터에서 공예, 다도, 천연염색, 저자와의 만남 등을 주제로 155개교를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다. 또한, 원격수업 시 매시간 정보통신윤리교육을 하고, 온라인 활용 칭찬 릴레이, 시낭송, 도전! 성취프로그램 등 쌍방향 소통의 인성교육을 확대하고 있다. 원격수업으로 집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가정의 인성교육 기능도 강화한다. 학부모 집중 상담주간을 학기별 1회 이상 1주일간 운영하고, 초등학교 입학생 학부모를 위한 가이드북을 제작, 온라인에 탑재할 예정이다. 조부모와 손자녀의 소통을 위해 실시한 ‘세대공감 편지쓰기’는 48,000여 통이 접수됐다. 한편, 경북교육청은 인성교육 강화를 위해 ‘행복한 학교 만들기’ 현장 캠페인을 전개했다. 지난 8일 예천초에 이어 지난 15일 안동송현초에서 등교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된 현장 캠페인은 선플달기, 바른말 고운말 쓰기, 칭찬하기 등을 주제로 실시했다. 현장 캠페인에 참여한 임종식 교육감은 “우리 아이들이 미래사회를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성역량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도록 하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교육 환경에 발맞추어 학교, 가정, 사회가 지속적으로 인성교육에 관심을 가져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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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전국 신학대 교수 378명 입장 발표 ▲(왼쪽부터) 박응규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원하 교수(고신대학교), 서창원 교수(총신대학교). 전국 36개 신학대학 378명 교수들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총신대, 고신대, 합신대, 서울신대, 아신대, 백석대 등 전국 36개교 378명의 교수들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안 반대 전국 신학대학 교수 연대’를 결성하고 11일 서울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서 이 같은 입장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교수들은 이승구 교수(공동대표)가 대표로 낭독한 입장문에서 “차별금지법은 다른 생각을 가진 국민의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법이 되기에 반대한다”면서 6가지 반대 입장을 밝혔다. 교수들은 “법안이 통과되면 동성애와 소위 제3의 성 표현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박탈되어 기독교학교의 존재 근거를 해치게 된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동성애 허용을 주장하는 이들의 사역을 막을 근거가 없다”, “공적 영역에서 동성애와 이단에 대한 바른 비판을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등의 이유로 이 법의 제정에 반대하는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이어 교수들은 신학적 입장에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해야 하는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신원하 교수(고신대신대원 원장)는 “차별금지법안에서 말하는 젠더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된 남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고 택한 것”이라면서 “이 법의 제정 시도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멸시하고 도전하는 급진적인 도발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서창원 교수(총신대신대원)는 “헌법은 성에 대해 남녀 양성을 규정하고 있기에 제3의 성을 법안에 삽입한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 교회가 동성애자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을 권면하여 탈 동성애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용규 교수(총신대신대원)는 “기독교가 2,000년의 역사 속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주요한 교리적 논쟁이 발생했을 때 성경적 가치관을 고수했기 때문”이라면서 “차별금지법은 현재의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하나 되어 단호히 맞서야 할 이슈”라고 강조했다. 한편, 교수들은 향후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에 신학대 교수 외에 기독교학교와 일반대학 교수의 참여를 권면하고 차별금지법의 문제점을 일반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일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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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탐방> - “축복의 마중물” 풍각제일교회120년간 써내려온 믿음의 행전(行傳)···‘120년사’ 출판···‘기독교 역사관’에 담다 청도의 모(母) 교회··· 1899년 3월, 김양석 영수 집에서 처음 예배 드려 첫 예배처소, 본당, 선교종 등 유산들, ‘한국기독교사적 제37호’로 지정 <풍각제일교회 120년사> 통해 선진들의 믿음‧헌신‧충성 배울 수 있기를 ▲풍각제일교회 전경.(왼쪽은 120주년 기념관, 오른쪽은 예배당 건물) 1899년 3월부터 시작된 풍각제일교회의 120년은 구한말 격동의 시기에 이어 일제 식민통치, 한반도 분단, 6‧25전쟁, 산업화 등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험난하고 변화가 많은 시기였다. 풍각제일교회는 그 어려운 시기를 고단한 백성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겨냈기에, <풍각제일교회 120년사>는 120년 동안의 예수행전(行傳)이다. 대구‧경북지역에서 네 번째로 설립된 풍각제일교회(구 송서교회)는 청도의 모(母) 교회이다. 그렇기에 풍각제일교회의 역사는 개 교회만의 역사가 아니고, 청도군 모든 교회의 역사이며, 대구‧경북지역 교회의 역사이고, 더 나아가 한국 교회의 역사이다. 풍각제일교회 김영호 목사는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고, 흩어진 역사 자료들을 수집‧발굴‧정리하여 역사적 의미를 찾아주면서 최근 <풍각제일교회 120년사>를 내놓게 됐다. 다음은 김영호 목사와의 대담을 통해 풍각제일교회의 역사, 120년사 출판 과정, 기독교 역사관 설립 배경 등에 대해 정리한 것이다. - 풍각제일교회의 설립 역사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주신다면. “1897년 봄(춘령시 기간)에 김경수(金敬守) 성도가 대구 약령시장에서 아담스 선교사에게 복음을 처음 듣고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는 친척이 사는 밀양 춘화리로 가서 복음을 전해 춘화교회가 설립되도록 하고(1897년 11월), 풍각시장에서 김양석, 조병종 두 가정을 전도해 김양석 영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1899년 3월).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송서교회(현 풍각제일교회)입니다. 교회 초기 역사를 살펴볼 때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세 분은, 복음의 열정이 뜨거웠던 김경수 성도, 첫 예배당을 지을 때 자신의 재산을 내놓은 김양석 영수, 그리고 주어진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교회에 충성한 초대 장로 최재교 장로입니다.” - <풍각제일교회 120년사> 편찬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있다면. “3년 전쯤 교회에 처음 부임하고 보니, 교회 초기의 자료가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도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묻혀 있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교회 첫 예배처소 건물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습니다. 예배처소로 사용했던 1800년대 건물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곳은 조만간 당시 초당(초가집) 모습으로 복원할 계획입니다. 또 선교사님들의 선교보고서를 통해 풍각제일교회가 대구‧경북지역에서 최초로 예배당을 건축한 교회인 것도 알게 됐습니다(1901년 예배당 건축). 이러한 교회의 역사적 가치와 믿음의 선진들의 헌신을 드러내서 오늘날 신앙의 귀감이 되도록 하자는데 온 교우들의 뜻이 모아져 편찬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교회 예배당 강단 밑에 있는 ‘기도굴’ 모습. - 예장통합 교단에서 ‘한국기독교사적 제37호’로 지정된 배경은. “풍각제일교회에 보존돼 있는 기독교 유산들에 가치를 찾아주고 싶어서 5가지에 대해 신청을 했습니다. ‘풍각제일교회 첫 예배처소(김양석 영수의 초당), 풍각제일교회 본당, 당회록,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보고서, 선교종’입니다. 첫 예배처소는 당연히 역사적 의미가 깊고, 본당도 1965년에 지어진 건물로, 당시 교회 건축의 양식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본당은 철저히 요한계시록적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예배당 입구가 성처럼 돼 있고, 양쪽에 12개씩 24개의 창문이 있고, 강대상 위에는 무지개 형상이 둘러져 있습니다. 강대상 밑에는 성도들이 마음껏 소리 내어 부르짖을 수 있는 ‘기도굴’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1916년에 당회가 구성됐는데, 1회 당회록부터 모든 당회록이 지금까지 보존돼 있어 한국 교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귀한 자료입니다. 또,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1928년)를 쓰기 위해 총회에서 노회를 통해 개 교회로 보낸 공문의 원본이 보존돼 있습니다. 당시 총회로 보냈던 ‘사기 보고서’도 분립된 교회들(화양읍교회, 오산교회, 삼신교회, 칠곡교회 등) 것까지 모두 남아있습니다. 교회의 ‘선교종’은 최소한 191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시대 때 공출을 피하기 위해 장로님들이 우물 속에 집어넣었다가 3년 뒤에 꺼내어 다시 사용하게 된 역사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자료들을 발굴해 총회에 보냈고, 2018년 제103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사적 제37호’로 지정돼 2019년 3월 창립 120주년 때 지정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사적물들은 ‘대구동노회 사적 1호’로도 지정받았습니다.” ▲2019년 3월에 열린 지정예식. 예장통합 총회는 풍각제일교회를 한국기독교사적 제37호로 지정했다. - 교회 내에 ‘청도 기독교 역사관’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작년에 창립 120주년을 기념해 <풍각제일교회 120주년 기념관>을 본당 옆에 세우게 됐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이 남긴 유물과 자료들을 잘 보존하고 널리 알리자는 취지에서 이 건물에 역사관을 마련했습니다. 역사관 이름을 ‘청도 기독교 역사관’으로 정한 이유는, 이 자료들은 풍각제일교회만의 역사가 아니고 청도에 있는 모든 교회의 역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시작 단계에 불과합니다.” ▲풍각제일교회에 있는 ‘청도 기독교 역사관’ 내부 모습.(사진 속 인물은 김영호 목사) - 120년사를 편찬하면서 가장 의미를 두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초대 장로님이신 고(故) 최재교 장로님의 후손을 찾으려고 노력하던 중에 하나님 은혜로 최 장로님의 손부이신 박종남 권사님(대구 칠곡교회)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런데 박 권사님을 통해서, 당시 최재교 장로님이 힘든 상황 속에서 장로직을 사임하게 된 사연, 평양신학교를 입학한 후에 다시 장로로 세워지게 된 일 등에 대해 자세히 듣고 왜곡된 사실들을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최 장로님은 어려운 시대 속에서 묵묵히 믿음으로 교회를 책임졌으며, 또 조사로 다섯 교회를 섬기셨던 충성스러운 분이십니다. 김경수 성도나 김양석 영수도 믿음으로 사셨던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은 천국에 가셨지만, 그분들의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인물들이 이번 작업을 통해 살아나고 재조명된 것이 무엇보다 저에게 의미 깊고 감사한 일입니다.” -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씀을 해주신다면. “한국에서 초기에 복음을 전하셨던 선교사님들의 생명을 바친 헌신, 또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교회에 대한 헌신, 충성이 모아져서 오늘의 한국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영남 지역에서도 이 부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해서 우리 다음 세대들이 신앙을 계승하고 교회를 지키고 세워나가는 데 디딤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담‧정리 =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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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9·끝)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9·끝) 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 16. 지역의 중심(中心) 교회를 섬기다 17.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다 18. 최고의 한학자(漢學者)가 되다 19. 은퇴 후에도 목회를 계속하다 20. 후학을 위해 매진하다 결론 결론 임학수 목사는 1884년 안동 녹전면 매정리에서 출생했다. 한학에 능했던 임학수는 20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리로 등용되었지만, 관직을 포기하고 후학을 기르기 위해 낙향하여 있다가 1909년 장터에서 노방 전도하는 선교사의 복음을 듣고 회심하였다. 그 결과 그는 한 가정, 심지어 매정이라는 한 마을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임학수는 그 자리에서 상투를 자르고 예수님을 영접한 결단력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기독교에 입문한 임학수는 녹전에서 20리 떨어진 영주 내매교회에 다니다가 고향인 매정교회를 개척했다. 그 후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었고, 권 선교사의 조사(助事)로 아곡교회, 원림교회, 예천군 섭밧교회, 장사리, 국곡, 덕봉, 아탑실, 수동, 하화교회 등에서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집을 섬겼다. 38세인 1921년 평양신학교 입학하여 1925년 제18회로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안동교회를 시무할 때 임학수 목사는 주일학교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소년·소녀부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임학수 목사는 모든 일을 성경과 교회 규칙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합당하게 적용하여 처리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유연하게 사역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목회자였다. 그가 시무할 때 안동교회는 공식적으로 신학교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게 된다. 이 장학금은 안동교회가 지출한 최초의 장학금이다. 더욱이 임 목사는 환등사진을 통한 혁신적인 전도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노방전도를 통해 지역을 복음화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 사경회를 중심으로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에 집중함으로써 안동교회와 지역 교회를 말씀에 기초한 든든한 교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었다. 임 목사는 열심히 기도하는 주의 종이었다. 특별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온 교회가 함께 기도시간을 가질 정도로 기도사역에 집중했다. 임학수 목사는 교인들이 안동 읍내 전역에 퍼져 있음을 감안하여 교인들의 편의와 지역 전도를 생각하며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동·서편에 새로운 교회를 설립할 의지를 갖고 안기교회(현 안동서부교회)와 신세교회(현 안동동부교회)를 분립함으로써 안동의 복음화를 앞당겼다. 또한, 임 목사는 성탄헌금의 1/2은 노회로 보내 노회 경내의 가난한 교회를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 1/2은 교회 내의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1934년 7월 안동이 대수해로 큰 피해를 당했을 때 신속하게 수해연보를 하고, 그것을 노회로 보내 수해를 당한 교회를 도왔다. 임 목사는 전형적인 부흥강사는 아니었지만 인기 있는 성경사경회 강사였다. 그의 설교는 성령 충만했다. 언변도 뛰어났지만 그의 설교에 인품이 묻어났기 때문에 회중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웃고, 눈물을 흘렸다. 또한, 임 목사는 자신의 장점인 한학을 목회 현장에 도입하여 성도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회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현재 안동교회의 돌집예배당은 임학수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하실 때인 1936년 초여름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1937년 4월에 준공되었다. 건축을 위해 임 목사는 사재(私財)를 하나님께 드리는 솔선수범을 보였다. 성도들도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 정성스럽게 건축헌금을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다른 교회들과 선교사, 선교부도 건축에 협력했다. 교회를 건축하는데 무려 8,000여 개의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착공한 지 330여 일이 지나, 웅장하고 신비스러운 돌집예배당이 마침내 준공되었다. 임 목사는 경북 북부지역에서 풍요로운 영적 자산을 간직하게 될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 건축을 시작하고 완성한 리더였다. 임학수 목사는 경안노회 경내의 중심교회를 섬기며, 교회들이 본연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교회들을 든든히 세웠다. 안동의 안동교회, 영양의 영양읍교회, 풍기의 풍기교회, 예천의 예천교회와 상락교회 등이다. 임 목사는 작은 교회도 최선을 다해 섬겨 사명을 감당했다. 목사 임직 후 하화·옹천·지곡·연당·매정·안흥·녹내·방하교회 등을 섬겼다. 은퇴 후에도 당시 목회자가 없는 교회인 용상교회, 문수교회, 태화교회, 예천교회 등을 돌보았다. 일제 말엽 경안노회장이었던 임 목사가 일제의 정책에 협력한 것은 분명한 오점이지만, 당시 노회장으로서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려 했던 노력은 뒤늦게라도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한학자인 임 목사가 남긴 흔적은 오늘까지도 강하게 남아있다. 경안성서학원, 경안학원, 도원교회, 영광학원 등의 이름이 바로 임 목사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임 목사의 신앙은 무척 포용적이었다. 6·25 전쟁으로 먹을 것이 없던 1950년대, 열린 집 대문으로 탁발 승려가 들어와 시주하라는 말에 승려를 보지 않고 굶주리고 있는 한 사람을 먼저 보고 그에게 시주할 정도로 폭넓고 열린 신학을 갖고 있었다. 또 임 목사는 가정에서도 믿음의 삶을 살았다. 그는 날마다 새벽에 가정예배를 드림으로써 후손들에게 믿음을 유산으로 남기는 데 최선을 다했다. 특히, 임학수 목사는 은퇴한 후 쉬지 않고 후학을 위해 경안고등성경학교(현 경안신학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친 교육자였다. 안동에서 출생한 임학수 목사는 안동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경안노회 경내의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안동 땅을 사랑했고, 안동에 살고 있는 영혼을 사랑했으며, 안동의 교회들을 사랑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엇보다 귀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한눈팔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임학수 목사의 올곧은 신앙과 신실한 삶은 오늘의 교역자들과 성도들에게 거룩한 떨림과 울림을 동시에 준다. 오늘의 교회는 임학수 목사가 남긴 거룩한 흔적을 기억하며 새로운 비전과 도전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거룩한 사역을 용기 있게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안동교회 100주년기념예배에 참석한 故 임학수 목사의 가족과 금승학 목사(뒷줄 왼쪽 세번째).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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