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초기 안동교회1909년~1952년 예배에 관한 연구(3)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2. 이대영(2대)·정재순 목사(3대) 시대의 예배 3. 박상동(4대)·임학수(5대)·김영옥 목사(6대) 시대의 예배 4. 김광현 목사(7대) 시대의 예배 결론 1. 김영옥 목사(초대) 시대의 예배 / 1909년~1920년 말(3) 3) 수요예배 수요예배에 관해 처음으로 기록된 1917년 2월 22일 당회록에는 수요저녁예배라는 명칭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수요저녁예배에는 설교만 할 것이 아니고 모든 교인이 신구약성경 좋은 구절을 택하여 암송도 하고 통독도 하기로 결정하다.” 안동교회의 수요저녁예배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1917년에 안동교회는 수요저녁예배를 가졌는데, 수요저녁예배는 주일오전예배에 비해 보다 간단했다. 따라서 1910년대 안동교회의 수요예배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제안한 예배순서, 즉 찬송→기도→찬송→성경→강도→찬송의 틀을 그대로 유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4) 새벽기도회 길선주 목사의 특별집회 기간 중에 새벽기도회가 실시되었다. 평양 대부흥운동의 결과 한국교회의 전통으로 길선주 목사에 의해 확산된 새벽기도운동이다. 이후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 공예배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사실 평양 대부흥 이전에도 새벽기도회로 모이는 교회가 있었다. 한국 새벽기도에 관한 기록 중에서 1903년에 로스 선교사의 글에서 “왕 목사(현지인 목사)는 새벽에 일어나 손자들과 함께 새벽기도를 드렸다”라는 기록과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백홍준이 새문안교회에 출석하고 있을 때 매일 새벽기도를 가졌다. 하지만 새벽기도회는 대부흥 이후 전국 교회로 확산되었다. 기독교에 입문하기 전 도교와 선불교에서 새벽기도를 경험한 적이 있던 길선주 목사는 한국교회에 새벽기도회를 도입하였다. 길선주 목사의 집회가 시작된 다음 날 11월 14일(월) 오월번 선교사가 새벽 6시 새벽기도회(Sunrise prayer meeting)에 참석했음을 새디(Sadie)의 다이어리는 기록한다. 부흥사경회 이전까지 안동교회가 새벽기도회로 모였다는 기록은 새디의 다이어리에서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집회가 끝난 후 새벽기도회가 지속되었다는 기록 역시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길선주 목사를 통해 안동교회에 새벽기도회가 소개되어 길 목사 집회 기간 중에 한시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5) 외국인예배 외국인예배는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드린 예배였다. 새디 선교사가 안동에 도착해서 함께 동역하던 권찬영 선교사와 별리추 선교사는 모두 독신이었다. 오월번, 새디 선교사 부부만 자녀를 둔 가정이었다. 따라서 안동에서의 외국인 예배는 자연스럽게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안동에 도착한 지 1달 후인 7월 3일, 공식적으로 감격적인 첫 외국인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새디의 다이어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4시 30분을 외국인 영어 예배시간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후 예배를 마치고 선교사들이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식사한 기록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6) 주일학교 성경공부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주일학교는 1914년 2월에 준공된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에서 아침 9시 예배를 시작하여 1시간 동안 예배를 드린 후 계속해서 분반(分班)하여 지정된 교사에 의해 성경공부를 계속했다. 남장년부에는 청·장·노년의 광범위한 연령층이 함께 모여 성경공부를 했으며, 공부시간은 주일 아침 유년부(오늘의 초등학생부)의 예배와 성경공부가 끝난 뒤 곧바로 10~11시부터 예배당을 사용하였다. 성경공부교재는 아동부와 마찬가지로 선교본부로부터 가져온 교재 원본을 등사하여 담임목사와 선교사들이 교사들에게 가르친 후에 학생들과 분반공부를 하게 하였다. 여장년부는 세 부서 중에서 가장 활성화된 부서였으며, 유년부 예배가 끝난 후 남장년부와 동일한 시간에 휘장으로 분리된 예배당에서 운영되었다. 7) 예배당의 구조와 예배모습 오월번 선교사의 부인인 새디 선교사의 1910년 9월 23일 일기에는 ‘ㄱ’자 예배당 부지를 구입하여 대지를 고르게 했음을 기록한다. 당시 안동교회 성도들은 예배당 건축을 위한 헌금을 했다. 에비여사에 따르면 1910년 10월 9일 주일 오후 예배 시 16칸 ‘ㄱ’ 예배당 건축을 위해 특별헌금을 했다고 기록한다. 16칸 예배당은 30평 가까운 공간으로 결코 작지 않은 규모였다. 남녀유별의 유교적 풍습에 따라 남자와 여자의 출입 동선을 분리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ㄱ’자 예배당으로 건축되었다. 또한, 50평 규모의 안동교회 두 번째 신축예배당은 1913년 11월에 공사를 착수하여 1914년 2월에 준공되었다.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가운데 남녀 분리를 위한 휘장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예배는 의자 없이 마루로 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기도할 때는 모두 꿇어앉아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는 형식을 취했다. 당시 풍속에 따라 휘장(Curtain)으로 남녀를 분리했다. 일반적으로 강대상을 바라보며 오른쪽은 여성이, 남성은 왼쪽을 사용하였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됐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Q 질문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그 영혼이 떠나갈 때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는 의미와 휘장이 둘이 됐다(마27:51)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A 답변 :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의 육체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다는 의미입니다(히10:20). 곧 전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차례 그것도 수송아지와 숫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신부나 목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만인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약하고 도무지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을 힘입어 담대히 은혜의 보좌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히4:16).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찢어진 성소의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는 커튼인데, 이를 둘째 휘장이라고도 합니다(히9:3). 왜냐하면 성소에 들어갈 때에도 휘장이 있는데, 그것을 첫째 휘장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 둘째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하는데(마27:51), 이것은 사람의 손으로 찢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찢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에서부터 찢어졌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친히 찢으셨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로써 대제사장의 역할과 구약의 제사제도는 끝나고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통해 ‘산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당을 성전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답변자 : 변종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크리스천 큐앤에이’(도서출판 등과 빛) 中 요약 발췌>
-
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2)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12) 김 승 학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3. 안동지역 최초의 학습자, 홍재삼 4.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 소텔 ............................................... 11. 안동지역 교회의 첫 당회 12. 안동지역 최초의 여전도회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13. 안동지역 최초의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 1914 (1) 1908년 안동선교부가 세워진 후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성경공부 열풍이 불게 되었다. 안동선교 초기인 1910년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영주 내매에서 개설되었던 6일간의 성경공부 모임에 무려 270여명의 남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듬해인 1911년에는 더욱 빈번한 성경공부 모임이 있어, 8차례에 걸쳐 1,340명이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했다. 안동지역의 성경공부는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것을 본 선교사들은 앞으로 지역 교회를 지도해 갈 지도자를 양육할 목적으로 1912년 여자성경학원을 세웠다. 여자성경학원이 먼저 세워진 이유는 당시 교회에서 예배조차 중간에 휘장을 치고 드리고, 정서상 작은 공간에서 남성과 여성이 함께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여성이 여성을 가르칠 수 있는 여자성경학원이 먼저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여자성경학원은 별도로 신축된 건물이 아니라 선교사 사택을 이용하였는데 로드는 마룻바닥에 150명이 앉을 수 있는 규모였음을 밝히고 있다. 웰번 선교사의 부인인 새디(Sadie) 선교사가 1910년 6월 미국에 있는 친구들과 후원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구(舊) 안동교도소에 위치했던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여성을 위해 매주 목요일마다 부인성경공부반이 열렸는데 첫 번째 모임에 무려 75명이 모였지만 진심으로 성경공부를 원하는 사람을 추려낸 결과 25명으로 한 반을 구성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여성성경공부반은 일주일에 두 번씩 웰번 선교사 사택에서 모여 새디 선교사가 월요일에는 젊은 여성반, 목요일에는 중년 여성반을 인도하였다. 특히 1914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한 윈(Winn) 선교사는 보다 체계적이고 확대된 성경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여자성경학교는 1920년 4월 10일 남녀 성경학교로 확대개편 되었다. 이때 윈 선교사는 성경학교의 교장이었고, 당시 안동선교부에서 동역하던 크로더스 선교사와 앤더슨(W. J.Anderson) 선교사는 교사였다. 개교 첫해인 1920년 가을, 비록 독립된 학교 건물은 없었지만 무려 130명이 등록했으며 성소병원 진료실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위생, 산수, 한문, 음악, 개인전도법도 가르쳤다. 안동의 기독교를 흔히 학자들이 ‘성경 기독교’라고 하는데 이것은 1912년부터 시작된 성경학교의 공(功)이 큰것 같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경전(經典)인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대로 살 것을 가르쳤고, 이미 유교의 경전을 배우고 경전대로 살던 안동의 사람들은 이것을 비교적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이런 안동인의 정서와 초기 선교사들이 지향한 성경공부가 절묘하게 일치해 안동에 복음이 순조롭게 정착하는 데 일조하게 된 것이다. 1920년 성경학교가 개원된 후에도 윈 선교사는 교장으로서 학교에 필요한 교사와 생활관 건립을 위해서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1922년 이질로 별세한 후 이 노력은 중단되는 듯했다. 더욱이 윈 선교사의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도 평양신학교 강사로 안동을 떠났다. 이즈음 안동의 교회들은 윈 선교사를 기억하며 성경학교 건물을 건축할 계획을 세우고 모금운동을 하고 있었고, 미국으로 간 윈 선교사의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 역시 이 사실을 알고 미국 교회와 친지들로부터 모금을 해 안동으로 돌아와 성경학교를 건축하게 된 것이다. 학교 이름은 처음에 단순히 ‘성경학교(Bible Institute)’였지만, 새로운 교사와 생활관 건물이 준공된 1925년부터 ‘인노절기념성경학교(Roger E.Winn Memorial Bible Institute)’로 개명되게 되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예장합동 경북노회 제191회 정기회 개최예장합동 경북노회(노회장 박종국 목사) 제191회 정기회가 9월 5일(월) 오후 2시부터 7일(수)까지 구미옥계교회(박신득 목사 시무) 예배당에서 개최됐다. 첫날 개회예배는 노회장 박종국 목사의 인도로, 부노회장 신덕일 장로 기도, 서기 송종필 목사 성경봉독(시편16:6), 임마누엘 색소폰찬양단의 찬양, 노회장 박종국 목사의 설교, 증경노회장 홍성헌 목사의 축도 순으로 드렸다. 박종국 목사는 설교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구역이다”며 “비록 광야같고 사막같이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가는 노회원들이 되길 축복한다”고 전했다. 예배 후에는 증경노회장 김종화 목사의 집례로 성찬식이 진행됐고, 김종화 목사는 ‘성찬받은 자의 삶’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어 정기회가 개회되고 정해진 회의 순서에 따라 개회선언, 휘장분배, 목사은퇴패 전달, 각 부 보고와 청원, 각 위원회 보고, 각 시찰회 보고, 안건 청원건 처리, 안건 토의 등의 사무가 진행됐다. 한편, 둘째 날 오전 11시에 열린 목사안수식에서는 증경노회장 박신득 목사가 ‘선배 목회자 바울’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으며, 옥재호(오직은혜교회)·정연식(성주읍교회)·조동진(왜관교회) 목사가 안수를 받았다.
-
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2)안동선교 초기의 기독교 모습들(2)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문 1. 안동 땅을 밟은 첫 선교사, 베어드 2.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3. 안동지역 최초의 학습자, 홍재삼 4. 안동선교부 초대 주재선교사, 소텔 ............................................... 13. 최초 성경학교, 안동여자성경학교 결론 2. 안동지역의 첫 교회들, 비봉·국곡·풍산교회 / 1902년 1) 비봉교회(飛鳳敎會) 의성의 첫 교회인 비봉교회는 김수영에 의해 설립되었다. 김수영은 1900년 3월 초 청도지방에 갔다가 때마침 장날 베어드 선교사의 노방전도에서 복음을 듣고 회심하게 된다. 귀가한 김수영은 열심히 전도하여 마을 사람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 증가하게 되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비봉교회는 1902년 봄에 4칸 초가 예배당을 처음으로 건축했고, 1915년 김충한이 장로로 장립함으로써 첫 당회가 조직되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특히 김충한은 비봉교회가 낳은 걸출한 장로요 목회자다. 대구 계성학교 출신인 김충한은 1909년 비봉교회에 계신학교를 설립하여 비봉지역에 교육과 복음전파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김충한은 192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1924년 제15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1930년 제27회 경북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33년 고향인 비봉교회를 담임했으며, 1946년에는 대구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기도 했다. 그후 경북 각지에 교회를 개척하고 동산병원의 전도목사로, 김천 송천교회와 황금동교회 목사로 선교와 후배 양성에 전력했고, 1960년에는 의성성광교회와 경중노회를 섬기다가 1965년 12월 14일 83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2) 국곡교회(菊谷敎會) 국곡교회의 설립자는 권수백으로 일직의 돌고개에서 대구선교부 아담스 선교사가 전해준 쪽 복음을 읽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2년 권수백은 김병석, 김병일 등과 함께 2칸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국곡교회가 시작되었다. 국곡교회의 설립은 다른 마을에게도 영향을 미쳐 풍산교회(1902), 괴산교회(1904), 창길교회(1904), 동산교회(1905), 장사리교회(1907), 아곡교회(1911), 중률교회(1931) 등 안동지역 초기 교회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권수백은 한 교회만 머물러 있지 않고 여러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복음서를 파는 권서인으로 활동했다. 그 결과 그를 통해 여러 교회가 개척되었다. 1900년대 여러 교회가 세워지자 그의 주된 사역은 권서를 넘어 교회를 돌보는 조사로 전환되게 되었다. 1904년 안평의 괴산교회를 시작으로 경안노회 경내에서 35년 동안 50여 예배처를 섬겼다. 권수백은 1924년 장로로 임직했고, 1927년 교회 내에 민족학교인 일국서당을 개설하여 교육 사업에 힘을 썼으며,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해 일본순사들의 감시를 받았으며,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만주로 피신하는 등 평생 복음전파와 항일운동에 매진한 믿음의 선배인 동시에 국곡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할 수 있다. 3) 풍산교회(豊山敎會) 1902년 권수백의 전도로 정봉모, 김인수, 강덕수 등이 예수를 믿게 되어 풍산 하리동 강변 마을 김인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함으로 풍산교회가 시작되었다. 1903년 4월에 작은 초가집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했는데, 초가집 예배당은 지붕을 삼대로 덮고 진흙으로 깐 바닥 한가운데 휘장을 쳐서 남·여석을 구분했다. 1923년 12칸 기와집 예배당을 처음으로 건축했다. 풍산교회는 1920년 정봉모가 장로로 최초로 장립 받아 당회가 조직되었다. 특히 풍산교회는 1903년 4월 영수(Leader) 배선모를 교사로 고창서숙을 시작하여 20~30명의 학생들이 수학하였고, 1920년 배선모가 영수직을 사면 청원하기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교육정신은 후대에도 이어져 1964년부터 1979년까지 재건중학교를 운영하여 15년간 7백2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했다. 풍산교회는 인근 지역 복음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어 수동교회(1905년), 소산교회(1911년), 명동교회(1911년?), 하회교회(1921년), 풍북교회(1937년) 등을 분립했다. 3. 안동지역 최초의 학습자, 홍재삼(洪在參) / 1903년 대구주재 아담스 선교사가 1901~1902년 사이 안동지방을 방문한 보고에 따르면, 그는 경북 북부지방을 방문하여 9명의 관리를 만나고 많은 서적을 팔았으며, 1개월 이상 장터를 돌며 전도하면서 약 1천권 이상의 책을 팔았다고 한다. 특히 1902년 3월 조사 김기원과 함께 안동을 순행하여 구미시장 5일장 전도를 하면서 쪽 복음서를 팔았는데, 이때 와룡면에 사는 홍재삼은 아담스 선교사로부터 구입한 쪽 복음을 읽고 대구까지 가서 아담스 선교사에게 진리를 배우고 성경을 구입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홍재삼은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홍재삼은 아담스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었지만, 1903년에 당시 홍재삼 집에 머물고 있던 베렛 선교사로부터 어느 주일에 학습을 받아 경북 최초의 학습교인이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됐다. 아담스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홍재삼은 대 양반 가문 중의 한 사람으로 비록 그가 살고 있던 마을사람 대부분이 보수적이었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안동지역의 공인된 최초의 학습자가 되었다. 선교사들을 만났을 때 홍재삼의 질문은 그가 얼마나 성경을 정독했는지를 알 수 있게 했으며, 그는 헤어질 때 노잣돈도 필요 없다고 하면서 가지고 있던 모든 돈으로 몽땅 성경책을 구입했다고 한다. ▲1903년 베렛 선교사에 의해 학습을 받음으로써 경북 북부지방 최초의 학습자가 된 홍재삼으로 추정되는 인물. 에비 여사는 안동선교구역 최초의 학습자로 이 사진 속 인물이 홍재삼임을 확언하고 있다. 위 사진의 글(This gentleman was the first Christian convert in Andong's district.)은 에비 여사의 친필이다.(사진 2)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예장합동 경북노회 제189회 정기회 개최제희성 한성령 서주원 김호현 최광수 목사 임직 ▲경북노회 제189회 정기회 목사안수식에서 제희성 한성령 서주원 김호현 최광수 목사가 손을 들어 서약하고 있다. 예장합동 경북노회(노회장 김종화 목사) 제189회 정기회가 지난 9월 6일(월) 오후 2시부터 7일(화)까지 왜관교회(정옥현 목사 시무) 예배당에서 개최됐다. 첫날 개회예배는 노회장 김종화 목사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부노회장 이민호 장로 기도, 서기 최수환 목사 성경봉독(사무엘상 19:18~24), 노회장 김종화 목사의 설교 후 증경노회장 임용택 목사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김종화 목사는 ‘집단 영성’이라는 설교에서 “사무엘과 사무엘의 생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자 발버둥 치는 골짜기였던 ‘라마 나욧’은 놀라운 집단 영성의 자리였다. 그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그 은혜의 집단 영성에 매료가 되어 예언을 하게 되었다. 경북노회 산하 모든 교회가, 교회를 대표하여서 모인 모든 총대들이 라마 나욧의 영성으로 무장하게 되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예배 후에는 증경노회장 홍승표 목사 집례로 성찬식이 진행됐고, 홍승표 목사는 ‘성찬이 주는 유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어 정기회가 개회되고 정해진 회의 순서에 따라 개회 선언, 휘장 분배, 목사 은퇴패 전달, 각 부 보고와 청원, 각 위원회 보고, 각 시찰 보고, 각 기관 보고, 안건 토의 등의 사무가 처리됐다. 한편, 노회 둘째 날 오전 11시에 열린 목사안수식에는 제희성(약목) 한성령(구미강동) 서주원(왜관) 김호현(인동) 최광수(인동) 목사가 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식에서 안수위원들이 등단해 안수기도를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
진상권 목사의 시 - 부활의 고백부활의 고백 진 상 권 목사 양무리교회 봄바람 옷깃을 적시는 초저녁 음력 이월 열사흗 날에 주님의 마음이 달처럼 여시네 주님의 눈 안에 달이 비치네. 아버지의 사랑과 내 주님의 마음이 겹쳐지는 종려주일 그 길에 깔아드린 겉옷의 고백 한 주간 내내 그 절절한 고난의 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저 피맺힌 시간의 편린들, 부스러기 은혜. 잔뜩 드리워진 코로나의 장막을 십자가로 젖히소서 눌림과 매임을 겟세마네의 피눈물로 풀어 주옵소서 고난도 눈물도 배신도 죽음도 저 하늘의 아버지께 부르짖던 그 절규로 성전의 휘장처럼 젖히소서! 멈추어 지리이다! 성자 하나님! 사람으로 오셔서 걸으시던 그 길이여! 아, 골고다 언덕길 피로 물든 님의 길. 십자가에 달리신 나의 주님 십자가에서 들으시던 죄인들의 욕설, 침 뱉음, 비아냥, 그리고 저주 소리 그 안에 녹아내리던 여인들의 눈물. 십자가가 없이는 부활이 없는 내 주님의 복음이여! 고난이 없이는 영광을 꿈꿀 수 없는 우리들. 주님, 올 부활절은 더 마음이 저려옵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는데 목이 젖어옵니다. 주님 사랑하는 나의 주님 올해 주님의 부활로 우리의 믿음을 깨워 주옵소서. 부활의 증인으로 다시 달려가게 하옵소서. 그래서 매일 매 주일 그 날까지··· 주님의 부활의 길, 걷게 하옵소서 내 주님과 함께. 편집부 www.gbhana.com
-
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5)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5)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첫 번째: 기독서원(基督書院) 2. 두 번째: 선교사 임시주택 3. 세 번째: 선교사 주택 4. 비공식 예배처소: 텐트 교회 5. 네 번째: 16칸 ‘ㄱ’자 예배당 6. 다섯 번째: 목조 2층 예배당 7. 여섯 번째: 2층 돌집예배당 결론 6. 다섯 번째 예배처소 : 목조 2층 예배당(1) 16칸 ‘ㄱ’자 예배당이 준공된 1910년 10월 30일 이후 안동교회는 계속해서 부흥했다. 그 결과 새로운 예배처소를 물색하다가 오늘의 안동교회가 서 있는 부지로 이사하게 된다. 사실 이 위치는 안동선교부가 세워진 1908년, 처음으로 선교사가 임시 주택으로 사용하던 터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폭발적인 성장 속에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신축예배당은 1913년 11월에 공사를 착수하여 1914년 2월에 준공되었다. 공사가 겨울에 시작되었음에도 비교적 공사는 빠르게 진행되어 이듬해인 1914년 봄이 되기 전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참고로 이곳은 지금의 100주년 기념관이 서 있는 위치다. 그 결과 1914년 봄에 안동교회는 ‘ㄱ’자 예배당에서 새로 준공한 예배당으로 이사했다. 목조 함석지붕 2층 예배당은 길이 40-50척 크기의 비교적 큰 규모의 건축물이었다고 김형태 목사는 증언한다.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이 예배당이 존속되어 있을 때인 1924년 6월 1일~1925년 5월 31일까지의 교인 수는 장로 3인, 세례교인 152명, 교인 총수는 380명이었고, 1934년에는 159명의 아동을 포함해 총 549명으로 경안노회록에 밝히고 있으며, 따라서 평소 주일예배 시 300~4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경험이 있는 분들에 따르면 최대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보통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나 다른 형태의 집회 시에 강대상까지 올라가 앉는 것을 볼 때 더 많은 인원이 앉을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914년 2월에 준공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신축 예배당은 목조 함석지붕을 가진 건물로 반(半) 2층 구조형식으로 약 50~60평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사진 8) 두 번째 예배당 건축에도 모든 교인들이 힘을 모았을 것이다. 예배당을 신축할 때 담임인 김영옥 목사는 선교사가 사준 주택을 팔아 헌금했을 정도로 김영옥 목사의 교회 사랑과 목회 철학은 헌신적이며 희생적이었다. 두 번째 예배당을 신축하기 불과 4개월 전 안동교회는 당회가 조직된다. 당회조직은 예배당 신축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때 장로로 장립한 김병우는 이 지역 최초의 장로였고, 안동교회에는 경안지역에서 최초로 당회가 조직되었다. 당회 조직을 마친 후 1주일이 경과한 1913년 8월 14일, 안동교회는 최초의 당회가 소집되어 6명에게 세례를, 3명에게는 학습을 주기로, 또한 다음 주일인 8월 17일 성례를 베풀기로 결의했다. 교회가 설립된 후 당회가 조직되기 전까지 세례와 성찬은 오직 선교사에 의해 베풀어졌지만, 8월 17일 성례전에서 떡을 나눈 사람은 김영옥 목사, 포도즙은 오월번 선교사가 베풀었고, 성찬예식이 마쳤을 때 김영옥 목사가 축복기도를 한 후 폐회되었다. 이처럼 안동교회는 담임인 한국인 목사와 선교사들이 서로 동역하는 아름다운 교회였다. 이러한 역할분담을 통해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는 안동교회 담임으로서의 권위와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목조 2층 예배당 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당시 교회 지도자들. 앞줄 왼쪽부터 권찬영 선교사, 인노절 선교사, 김영옥 목사, 오월번 선교사로 추측된다. 뒷줄 왼쪽 첫 번째는 김병우 장로이고, 나머지 분들은 이중희, 엄응삼 장로를 비롯해 평신도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사진 9)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이 신축됨으로써 교회와 경북북부 지역은 영적 지형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우선 교회 내적으로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넓은 공간의 확보로 인해 예배와 주일학교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예배당 신축은 주일학교가 양적으로, 또한 질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 안동교회의 주일학교는 유년부, 남장년부, 여장년부 3부서가 존재했다. 1920년 7월 제1회 여름성경학교가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에서 실시되었다. 매년 여름성경학교는 양적, 질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당시 교회 행사 중 가장 큰 규모의 행사였다. 1921년 당회록에 의하면 초기 주일학교가 조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교장, 부교장, 남장년부 반장을 임명하였지만 담임목사가 교장을 역임하지는 않았다. 담임교역자가 교장이 되어 전체 주일학교를 관장하기 시작한 것은 1926년 1월부터이다.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평신도는 부교장과 남장년부, 여장년부에 임명되었다. 주일학교는 예배당에서 아침 9시 예배를 시작하여 1시간 동안 예배를 드린 후 계속해서 분반하여 지정된 교사에 의해 성경공부를 계속했다. 1920년대 두 번째 예배당인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가운데 남녀 분리 휘장이 존재했다. 일반적으로 강대상을 바라보며 오른쪽은 여성이, 남성은 왼쪽을 사용하였다. 남장년부에는 청·장·노년의 광범위한 연령층이 함께 모여 성경공부를 했으며, 공부시간은 주일 아침 유년부(오늘의 초등학생부)의 예배와 성경공부가 끝난 뒤 곧바로 10-11시부터 예배당을 이용하여 모였다. 성경공부교재는 아동부와 마찬가지로 선교본부로부터 가져온 교재 원본을 등사하여 담임목사와 선교사들이 교사들에게 가르친 후에 학생들과 분반공부를 하게 하였다. 여장년부는 3부서 중에서 가장 활성화된 부서였으며 유년부 예배가 끝난 후 남장년부와 동일한 시간에 휘장으로 분리된 예배당에서 운영되었다. ▲목조 2층 예배당의 위치는 오늘날 안동교회가 서 있는 바로 그곳이다. 예배당 앞쪽에 많은 성도들을 볼 수 있으며, 뒤쪽 좌측은 계명학교, 뒤쪽 우측은 경안성서학원이다. 우측 언덕 위에는 종탑이 보인다. 두 번째 예배당이 준공된 1914년 2월 이후 안동교회는 경북 북부지역의 중심교회로 자리 잡게 된다.(사진 10)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예장합동 구미노회 제67회 정기노회 열려예장합동 구미노회(노회장 정래화 목사)는 지난 10월 7일~8일까지 구미상모교회(조준환 목사 시무)당에서 120여 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제67회 정기노회를 열고 중요 회무들을 처리했다. 개회예배는 노회장 정래화 목사의 사회로 드려졌으며, 부노회장 김영태 장로의 기도,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제목으로 노회장 정래화 목사의 말씀 선포, 직전노회장 정순봉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정래화 목사는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의지하는 사람이다. 어려울 때가 하나님을 만날 때이다. 요셉은 하나님 안에서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며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자”고 권면했다. 이어서 직전서기 정병석 목사의 집례로 성찬예식을 마친 후 회원호명, 개회선언, 회순채택, 휘장분배, 각부 보고와 청원, 이사 및 총대 보고, 각 기관 사업보고 등의 순서에 따라 회무를 처리했다. 7일 오후 7시 30분에는 노회장 정래화 목사의 사회로 목사 임직식 및 강도사 인허식이 진행됐으며, 증경노회장 최재덕 목사의 권면, 증경노회장 김창률 목사의 축사 등의 순서가 있었다. ▲예장합동 구미노회 제67회 정기노회가 지난 10월 7일~8일까지 구미상모교회에서 열렸다.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