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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1)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1)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 (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1. 출생과 결혼 2.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3. 여성복음전도의 선구자 4. 평양여자성경학원의 유학생 5. 담임목사의 부재(不在)를 메꾼 여성교역자 ...................................................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서론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성경 말씀 그대로 남녀노소, 빈부, 계층에 관계없이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귀족보다는 평민,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선 시대 말기의 여성은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한국 전통사회 안에 뿌리 깊은 성차별의 문화와 여필종부, 삼종지도, 칠거지악, 남녀칠세부동석, 부부유별 등의 가부장적 가치관은 여성의 인권을 철저히 억압했다. 무지와 가난, 고된 노동과 억압된 삶을 살던 여성은 한(恨)을 품은 존재였다. 조선 시대 말기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눈에는 누구보다 한국 여성들이 복음의 대상이요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보였다. 이런 환경에 있던 여성들은 한국 땅에 도착한 선교사들에게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선교대상이 되었다. 특히 1885년 4월 5일 인천항에 함께 도착한 미국 장로교와 미국 감리교 선교사는 선교대상으로서 여성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893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양 교파 연합모임에서 선언한 10가지 한국선교정책 중에서 두 번째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였다. 감리교의 경우는 의료사업, 교육사업, 자선사업, 여성의 인권회복 등에 치중했고, 여성의 계몽과 교육에 있어서 장로교에 비해 앞서 나갔다. 직접적인 복음전파를 강조한 장로교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사회 계층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성들을 선교의 타깃으로 삼았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여성들이 다른 계층에 비해 더 쉽게, 더 빨리 복음에 반응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첫 10년 동안 여성 복음화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 여성들이 소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여성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복음에 응답함으로써 복음전파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회적 활동에 수동적인 여성들이 전도사역과 계몽사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일제의 압제 가운데서 애국 여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1. 김정숙, 출생과 결혼 “임진(臨津) 이북의 땅은 다시 오랑캐의 땅이 될 터이니 몸을 보전하는 것을 논할 수 없다”는 예언으로 불안해하던 이북 사람들 중에는 이남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이들이 가장 선호한 지역은 정감록(鄭鑑錄)에서 언급하고 있는 ‘십승지’의 첫 번째 승지인 경상북도 풍기였다.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 있던 북한 사람들이 실제로 이남으로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1890년대 후반부터였고, 이어서 1920년대에는 개성·평양에서 약 100여 가구가 풍기로 집단 이주를 했다. 현재 이들 후손들이 1,000가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1907년 창립된 풍기성내교회는 지역 토착 주민들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으로 성내교회 100년사는 기록한다. 김정숙(金貞淑)은 1880년 11월 10일 김병연(金秉淵)의 장녀로 풍기에서 출생했다. 그는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정숙한 여인으로 성장했다. 김정숙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단정하고 고상하며 강직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더욱이 그는 자식과 손자뻘 되는 교역자를 존경하고 귀애했다고 안동교회 김광현 원로목사는 기억한다. 김정숙은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성숙한 성품은 지역사회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부인으로, 또한 교회에서는 전도사로서 목회 사역을 빛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김정숙은 1898년 19세 때 김규립(金奎岦)과 결혼했다. 김정숙의 시부인 김수업은 성균관 진사에 합격했으나 당시 일본과 러시아 등 열강의 침입으로 인해 정국이 어수선한 1894년, 친척들과 함께 평양에서 풍기 금계리로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김수업이 이주한 시기는 북한 사람들이 풍기로 이주한 1차 때였다. 따라서 김수업의 후손은 무려 100여 년 전 풍기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생활하고 있는 셈이 된다. 김정숙은 결혼한 지 8년이 지난 1907년, 28세 때 병에 걸린 남편이 세상을 떠나 혼자가 되었다. 그는 슬하에 단 한 명의 자녀도 없이 청상과부로 홀로 남게 되었다. 중병(重病)에 걸린 남편을 헌신적으로 간호하면서 마지막까지 살리려고 했던 김정숙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던 열부(烈婦)였다. 당시 남편이 괴로워하며 숨을 헐떡거릴 때 약지(藥指)를 끊었다고 한다. 남편이 약지에서 나오는 피를 먹으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김정숙은 부엌으로 가서 문지방에 약지를 놓고 부엌칼로 내리쳐 쏟아지는 피를 그릇에 받아 남편에게 먹였지만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훗날 평양 여자성경학원에 입학한 김정숙은 선교사가 피아노를 배울 사람은 나오라고 했을 때 피아노 위에 놓은 손가락 중 왼손 넷째 손가락이 없는 것을 본 선교사가 이 손으로는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피아노 배우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2. 김정숙,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김정숙의 시댁(媤宅)은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 현장을 목격한 가문으로 전해진다. 그의 남편 김규립의 조부인 김승걸은 평양에서 발생한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R. J. Thomas, 1840년~1866년) 선교사의 순교를 직접 목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6년 8월, 토마스 선교사는 항해사 겸 통역관으로 제너럴 셔먼호에 탑승하여 대동강으로 올라왔다가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에게 붙잡혀 9월 5일 26세로 평양 대동강 변에서 처형을 당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칼을 겨누던 한 병사를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전달했는데 그가 바로 박춘권으로,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것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기도)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1840년 영국에서 출생한 토마스 선교사는 런던 선교회 파송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천주교인을 만난 계기로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변에 좌초되어 1866년 9월 5일 순교당했다.(사진1)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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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노회남선교회연합회 실행위원회 열려지난 3월 14일(주) 오후 5시 예천 상락교회에서 예장통합 영주노회남선교회연합회(회장 최국락 장로) 제1회 실행위원회가 열렸다. 이번 실행위원회는 코로나19로 인해 1년여 만에 개최된 것이며, “주여 이제 회복하게 하소서”(행3:19~21)라는 주제 하에 26개 교회 회원 104명이 참석해 코로나의 종식과 교회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 먼저 1부 예배는 부회장 조현범 장로 인도로, 부회장 전상욱 장로 기도, 서기 진병창 장로 성경봉독(딤후2:20~21) 후 상락교회 백승룡 목사가 “귀한 그릇은?”이라는 주제로 설교했다. 백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금 그릇이든 질그릇든 관계없이 깨끗한 그릇을 귀하게 쓰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도록 우리 자신을 구별하자”고 말씀을 전했다. 이어서 임원일동 특송, 남선교회 행동강령 낭독, 남선교회 회가 제창 후 백승룡 목사 축도로 1부 예배를 마쳤다. 2부 회의는 회장 최국락 장로 인사, 총무 송규선 장로 사업보고, 회계 최용환 장로 회계보고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특별히 남선교회연합회는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한 교회를 위해서 지난 1년 동안 방역봉사팀의 활동으로 영주노회 산하 167개 교회에 방역실시를 완료했다. ▲영주노회 남선교회연합회 임원들이 특송을 부르고 있다. 영주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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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노회남선교회의 ‘코로나19 방역’ 봉사봉화 신라교회를 찾아 방역활동 ▲남선교회연합회 방역팀이 신라교회에서 방역활동을 하고 있다. 영주노회남선교연합회 방역봉사단(팀장 김시용 장로)은 지난 13일(토) 오후 영주노회 봉화시찰 내 여러 교회의 방역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봉화시찰 관내 미자립교회인 신라교회를 찾아갔다. 봉화에서도 20km 떨어진 가장 오지인 상운면 신라교회(시무목사 승복임)는 30여 가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산촌 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방역봉사팀은 마을 입구에 세워진 아담하고 아름다운 예배당을 찾아, 방역 장비를 갖추고 구석구석 방역을 마쳤다. 마침 그날은 신라교회에서 붕어빵 전도행사를 하고 있었다. 목사님과 성도들은 교회 앞마당에서 붕어빵을 구워 동네주민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목사님은 방역팀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하며 붕어빵을 내어오셨다. 열심히 목회하시는 목사님에게 감명을 받은 방역팀은, 방역 봉사활동이 목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영주노회남선교회연합회 방역봉사단은 12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팀으로 나뉘어 매주 토요일 각 시찰 별로 순회하며 봉사를 하고 있다. 영주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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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교회 - 기도회코로나19와 교회 - 기도회 김승학 목사 안동교회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없다. 모든 교회는 기도하는 일에 많은 힘을 쏟는다. 한국의 교회는 거의 비슷한 형식과 종류의 기도회를 갖고 있다. 안동교회의 기도 사역도 예외는 아니다. 안동교회의 공식 기도회는 우선 매일 갖는 기도회로 새벽 5시와 6시에 있는 새벽기도회와 오후 4시에 있는 오후기도회(vesper)다. 징검다리 중보기도대실에서 기도 용사들의 기도도 매일 오전 6시부터 밤 9시까지 거의 중단 없이 계속된다. 또 매 주 금요일마다 갖는 특성화된 기도회로 매월 첫 금요일은 항존직이, 둘째 금요일은 중보기도대가, 셋째 금요일은 묵상기도회로, 넷째 금요일은 교사기도회로, 그리고 다섯째 금요일이 있을 경우는 파송·협력선교사를 위한 선교사 기도회가 있다. 또한, 교회를 방문하는 성도들은 시간에 관계없이 가장 먼저 기도실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전교인 기도손모으기’ 기도운동이 있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여러 기도회를 중단시켰다. 교회의 문을 닫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야만 하는 때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간구하는 기도회는 부담이 되었다. 우선 새벽기도회의 경우 5시에 모이는 기도회는 중단하고 6시에만 모이고 있다. 여러 제한적인 상황이 있지만, 그럼에도 예배실을 열 수 있을 때는 방역 수칙을 지키며 어김없이 새벽기도회로 모이고 있다. 또 매일 오후 기도회(vesper)는 기도실에서 모였는데, 코로나 사태 이후 기도실이 잠정적으로 폐쇄됨에 따라 모일 수 없게 되었다. 참고로 본당 1층에 위치한 우리 교회 품음터 기도실은 24시간 개방되어 등록 교회와 관계없이 안동시 안에 있는 성도들이 자주 찾는 공간이지만 안타깝게도 코로나19 이후 문을 닫고 있다. 더욱이 “10년 걱정하는 것보다 10분 기도하는 것이 낫다”는 표어로 시작한 ‘전교인 기도손모으기’는 교회에 오는 성도는 누구나 언제든 관계없이 가장 먼저 기도실로 들어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볼일을 보자는 운동인데, 기도실이 폐쇄되어 더 이상 이 운동에 참여할 수 없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른다. 더욱이 매주 금요일마다 가진 특성화 기도회의 중단은 우리 모두의 아쉬움인 동시에 아픔이기도 하다. 안동교회 금요기도회의 특징은 기도 중심으로 전체 기도회 시간이 70분 정도 된다. 그래서 찬양도, 설교도 짧다. 대신에 참석한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길다. 일반적으로 금요기도회는 찬양, 설교, 그리고 기도회의 순서로 진행되는데, 설교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다. 그러나 안동교회의 금요기도회는 설교시간이 짧은 대신 합심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비교적 길다. 그래서 기도회에 참석한 성도들은 믿음으로, 그리고 통성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 모여 기도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한다. 그래서 교회는 통성으로 하는 금요기도회를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대신 내용과 형식을 달리하는 온라인 기도회를 새롭게 시작하였다. 특성화된 금요기도회는 환경이 호전되면 재개하기로 하고 온라인 학부모기도회, 온라인 교사 한밤기도회와 온라인 선교사 기도회를 신설하였다. 매월 첫째 월요일 저녁 8시 시작하는 줌(Zoom) 온라인 학부모 온맘기도회는 1, 2부로 나누어져 있다. 온맘기도회는 다음세대교회의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 온맘으로(with all our heart) 기도하는 시간이다. 우선 1부는 약 35분 정도 진행되는 예배 시간으로 찬양, 설교, 그리고 설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기도제목·교회·가정과 부모·자녀를 위해 합심하는 기도로 구성되어 있다. 35분으로 계획된 2부 기도회는 다음세대교회의 학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속한 다음세대교회(새싹교회, 꿈나무교회, 새순·비전터교회) 소회의실로 이동한 후 이후의 순서는 지도교역자가 운영한다. 학부모들과 전(前) 월의 사역에 대한 피드백(feedback) 시간을 갖고, 새로 시작한 사역을 소개하면서 학부모들에게 협조를 당부한다. 이후 각각 다음세대교회의 기도제목을 나누고 합심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총 70분 내외로 진행되는 온라인 학부모 온맘기도회는 지도교역자와 학부모가 서로 대화를 나눔으로써 코로나19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기도사역이 시작되고 있다. 온라인 교사 한밤기도회는 매월 넷째 주 금요일 밤 8시에 시작된다. 온라인 학부모 온맘기도회와 동일한 방식인 줌(Zoom) 화상회의에 다음세대교회 교사와 장년교회 교사들을 초청하여 기도회를 갖는 것이다. 1부는 예배시간으로 찬양, 설교, 공통의 기도제목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특히 기도제목으로는 교사를 위한 기도, 부모와 가정을 위한 기도, 그리고 교사가 맡은 영혼을 위한 기도 등이다. 교사들의 사명감을 새롭게 하여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예수님의 심장을 갖고 헌신하기를 위해 기도한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믿음으로 잘 키울 수 있도록 가정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기를 기도한다. 또한, 하나님의 비전이 다음세대의 비전이 되어 미래를 잘 준비할 수 있도록 기도한다. 2부는 소회의실로 교사들이 자기가 속해 있는 다음세대교회로 이동하여 교사회의와 함께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온라인 교사 한밤기도회는 교사들이 한마음으로 기도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매 주일 오전마다 갖는 교사회와는 성격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온라인 선교사 열방기도회는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와 협력 선교사를 줌(Zoom) 화상회의에 초대하여 가진 기도회다. 참고로 안동교회는 세계 곳곳에 14가정을 파송하고 있으며, 31가정을 후원하고 있다. 선교사 열방기도회는 한국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콜롬비아, 그리고 알바니아. 우간다, 캄보디아, 필리핀과 한국에 입국해 있던 선교사들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시차를 고려하여 저녁 늦은 시간이나 이른 새벽에 시작할 수밖에 없다. 보통 예정한 기도시간은 1시간이지만 1시간을 훌쩍 넘겨 100분 정도 이어질 때도 있다. 선교지 상황, 일반적인 기도제목과 긴급한 기도제목 등 선교사들의 보고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기 때문이다. 힘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파송·협력교회가 선교사들을 잊지 않고 중보와 협력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도회에 참여한 선교사들은 감격해 한다. 또한, 선교지의 코로나 상황과 긴급한 기도제목을 공유하여 성도들이 합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선교사들에게 큰 위로가 되고 있다. 온라인 기도회에 참석한 한 선교사는 “감동적이다. 용기와 굳은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온라인 선교사 열방기도회는 코로나19라는 암초를 만났음에도 우리 교회가 계속해서 선교의 열정을 이어갈 수 있는 큰 에너지가 되고 있다. 코로나19가 교회에 모여 기도하는 것에 큰 장애가 되고 있지만, 성도들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 기도를 중단하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신 가장 강력한 무기다. 더욱이 합심기도는 큰 능력을 가진다. 따라서 한자리에 모일 수 없다면 온라인으로라도 합심하여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사역의 에너지와 활력은 기도의 골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로나19는 어떤 형태로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하나님이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온 교회가 더욱 무릎을 세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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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노회남전도회연합회, 제24대 회장에 박병윤 장로 취임“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명예회장 이준욱 장로와 신임회장 박병윤 장로(우). 예장합동 구미노회남전도회연합회는 3월 11일 선산제일교회(담임목사 박태경) 예배당에서 제24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박병윤 장로(선산제일)를 신임회장으로 선출했다. 총회에 앞서 회장 이준욱 장로의 사회로 드려진 1부 예배에서는 선산제일교회 박태경 목사가 말씀을 전했고, 구미노회장 강경구 목사가 축도했다. 박태경 목사는 “주님이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이유는, 교회 안에서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며, 결국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는 것이다. 남전도회의 모든 일들이 교회를 세우는 데 쓰임받기를 원한다”고 권면했다. 이어 2부 축하 시간에는 구미노회 전도부장 안재호 목사와 증경회장 양광조 장로가 격려사, 대구경북남전도회연합협의회장 정수만 집사가 축사를 통해 남전도회 회원들의 수고를 치하하며 격려했다. 신임회장 박병윤 장로는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인데도, 남전도회는 지난해에 해외교회 개척과 미자립교회 섬김을 계속해왔다”며 “올해도 하나님 은혜로 이 사역들이 잘 감당되도록 임원들과 최선을 다하겠다”고 인사했다. 한편, 제23회기 남전도회연합회는 지난해에 필리핀 팔라완 궁난 구미남전교회를 건축했으며, 미자립교회 돕기, 순회헌신예배, 전도 부흥집회 등을 통해 선교 사역을 펼쳤다. ▲구미노회남전도회연합회 제24회 정기총회가 3월 11일 선산제일교회에서 개최됐다. 사진은 정기총회를 마치고 내빈과 회원들의 기념촬영. 박은숙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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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교회 창립 110주년 기념 감사예배 드려원로장로 추대 및 장로 임직예식 ▲임직식에서 선임 당회원들이 신임 장로들에게 장로 가운을 착의해주고 있다. 예장(통합) 예천교회(위임목사 김영수)가 교회 창립 110주년을 맞아 2월 28일 오후 3시 본 교회 예배당에서 감사예배를 드렸다. 예천교회는 이날 권종대 원로장로 추대 및 황칠환 조동식 안경진 이용하 장로의 장로임직 예식도 같이 진행했다. 당회장 김영수 목사의 인도로 드려진 감사예배에서는 영주노회 전노회장 최갑도 목사(풍기 성내 원로)가 “역사의 도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어 원로장로 추대식과 장로 임직식은 김영수 목사의 집례로 진행됐다. 예식에서 권면과 축사 순서는 전노회장 송치수 목사, 전노회장 천정명 목사, 영주노회장 조영광 목사가 맡았으며, 예천교회 황주룡 원로목사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황칠환 장로를 비롯한 임직자들은 “부족한 저희들에게 귀한 직분을 맡겨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더욱 열심히 교회와 지역사회를 섬기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겠다”고 인사했다. 예천교회는 1911년 2월 26일, 용문금곡교회 출석 중이던 권수도 성도가 노하리 교동댁 ‘ㄱ’자형 주택을 임대하여 김분이, 최악이, 김조균, 교동댁 등과 함께 5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시작됐다. 예천교회는 이후 110년을 지나오면서 지역사회 섬김과 봉사에 앞장서 왔다. 특히 교육사업, 사회봉사 활동(늘푸른대학, 예천연탄은행, 예천문화사랑방 등), 선교활동(단독선교사 파송, 국내·외 교회 및 기관 후원 등)을 통해 하나님 나라 확장에 힘을 쓰고 있는 교회이다. 예천 남종덕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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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BTJ열방센터 방역점검 초소 재운영열방센터발 코로나19 확진자 증가에 긴급회의 개최 출입 엄격 통제, 방역지침 이행 여부도 철저히 점검키로 ▲강영석 시장은 7일 부시장과 실·국장 등 주요 간부들이 참여하는 긴급회의를 열고 강도 높은 방역 대책을 추진키로 했다.(사진=상주시 제공) 상주시가 기독교 선교시설인 화서면의 BTJ열방센터에 설치한 방역점검 초소 운영을 8일 다시 시작했다. 강영석 상주시장은 최근 BTJ열방센터 종사자와 그 가족이 코로나19에 확진되면서 확산 방지와 예방을 위해 방역점검 초소를 재운영키로 했다고 8일 밝혔다. 운영 기간은 상황 종료 시까지다. 시는 앞서 BTJ열방센터 측이 낸 집합금지 명령과 시설폐쇄명령 집행정지신청을 지난달 26일 법원이 일부 인용함에 따라 방역점검 초소 운영을 중단한 바 있다. 강영석 시장은 BTJ열방센터 관련자의 확진이 이어지자 7일 부시장과 실·국장 등 주요 간부들이 참여하는 긴급회의를 열고 강도 높은 방역 대책을 추진키로 했다. 이에 따라 시는 BTJ열방센터 내 대안학교 학생과 관계자, 센터 내 미션빌리지 거주자, 우편·택배 배달원 등 허용된 인원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기로 했다. 자가격리자에 대한 사후관리를 철저히 하고, 센터 내 거주자들의 방역지침 이행 여부도 지속적으로 점검하기로 했다. 시는 BTJ열방센터 측에 코로나19 방역에 자발적으로 협조하고 위반 시 강력하게 제재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공문을 발송했다. 강영석 시장은 “법원의 집행정지 가처분 결정을 존중해 방역점검 초소 운영을 중단했지만, 또다시 열방센터 종사자가 코로나19에 확진됐다”며 “방역점검 초소의 철저한 운영으로 지역 내에 코로나19가 재확산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한편 BTJ열방센터 관련 확진자는 지난 3일 열방센터 종사자의 확진 후 그 가족, 센터 내 미션빌리지 거주자 등이 잇따라 양성 판정을 받는 등 8일 오전 현재 열방센터와 관련해 모두 7명이 확진됐다. 시는 화서면행정복지센터에 임시선별진료소를 설치해 센터 종사자와 주민을 상대로 282명을 검사하는 등 확산 방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예진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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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8)- 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 김승학(안동교회)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선교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1908년 안동에 선교부가 세워질 당시 안동의 인구는 약 15,000명 정도였다. 안동에 체류하고 있던 장인차(張仁車, Woodbridge O. Johnson) 의료선교사가 오월번(吳越璠, Arthur G. Welbon) 선교사에게 1910년 11월 26일 쓴 편지에 의하면 안동은 소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본 도시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쾌적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고 기록할 만큼 안동은 선교사들에게 매력적인 도시였다. 안동에 도착한 최초의 선교사는 부산에 주재하고 있던 배위량(裵偉良, William M. Baird)으로 그는 1893년 4월 17일부터 5월 20일 까지 경상북도 지방을 순행하며 전도했다. 이후 1899년 대구선교부가 설치되자 안동은 대구선교부의 관할 지역이 되었고, 안동을 포함하는 경북북부지역은 대구선교부의 주된 선교 타게트(Target) 지역이 되었다. 대구선교부 주재 부해리(傅海利, Henry Munro Bruen) 선교사에 따르면 함께 안동을 순회한 방위렴(邦緯廉, William M. Barrett) 선교사는 1903년 안동의 첫 학습자이자 안동의 첫 열매를 얻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특히 미국북장로회 선교회가 1908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를 설립하기 위한 예비 작업을 결정하고 1909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설립을 최종 결정한 후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진 1. 1910년대 안동시의 모습과 생활상으로 위 왼쪽은 낙동강으로 사진 아래의 대동강은 오기로 보인다. 마을과 낙동강 사이에 논이나 밭이 보이고 도로는 동에서 서로 향하는 안동-예천 도로이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린 후 몇 차례 예배처소의 변경이 있었다.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는 안동교회가 임시 처소 까지 포함해 여섯 곳에서 예배를 드렸음을 기록한다. 특히 이 기록은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의 기억을 토대로 한 것으로 김광현 목사는 안동선교부 최초의 선교사인 사우대(史佑大, Chase C. Sawtell)이 세상을 떠난 후 1910년 1월 안동선교부 선교사로 파송되어 1952년 한국을 떠난 권찬영(權燦永, John Y. Crothers) 선교사와 그 동안 안동지역에서 사역한 선교사들과 함께 오랜 세월 동역한 안동지역 교회의 리더였다. 김광현 목사는 일본 고베중앙신학교에서 유학 후 부산 초량교회를 섬기다가 1943년 1월 안동교회 7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후 당시 안동 주재(駐在) 선교사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통해 누구보다 안동 초기 선교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는 분이었다. 김목사는 9년 전인 2006년 12월 14일, 93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는데, 안동교회 80년사는 그의 기억이 생생할 때 쓰여진 책이다. 특히 안동교회 80년사에 기록된 안동선교와 안동교회의 초기 역사는 안동교회의 당회록, 제직회의록, 세례·학습명부, 경북노회록, 그리고 경안노회록을 기초로 김광현 목사가 안동선교 시작부터 함께 했던 여러 선교사들로부터 전해들은 내용과 자료들을 첨가한 공식적인 문서로써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안동교회의 예배장소는 임시 예배소까지 쳐서 여섯 번에 걸쳐 옮겨졌다. 첫 번째 예배처소는 1909년 8월 둘째 주일, 최초의 교인 8명이 창립예배를 드린 곳인 대석동 129번지로 옛 대석상회가 위치한 기독서원이었고, 두 번째 예배 장소는 1910년 선교사들의 거처했던 임시주택으로 안동교회 교육관 자리의 골기와 한옥(韓屋)이었으며, 세 번째의 임시 예배장소는 선교사들이 사택 건축을 위해 선교사들이 매입하여 잠시 거쳐하였던 구(舊) 교도소 자리에 있던 기와지붕 건물이었다. 네 번째 예배장소는 1910년에 건축된 안동시 광석동 214번지에 소재한 ‘ㄱ’자형의 16칸 크기 예배당이었다. 다섯 번째 예배 장소는 현재 100주년 기념관에 위치했던 2층 목조 함석지붕의 건물로 1914년 2월 준공되었다. 여섯 번째 예배처소는 현재도 주(主)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는 석조 예배당으로 1936년 초여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37년 4월 6일에 준공되었다. 본 소고는 1909년 8월 8일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된 안동교회의 예배처소 위치와 예배당의 변동을 연구함으로써 안동교회의 내·외적 변화와 부흥, 선교부의 정착과 선교사의 역할 및 생활상, 그리고 초기 안동지역의 복음화 진행과정을 살펴보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1. 첫 번째 예배처소 : 기독서원(基督書院) 100여 년 전 안동에는 성경과 기독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 존재했다. 서점의 이름은 기독서원으로 이 서점은 안동 최초의 근대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 80년사는 대구선교부의 안의와(安義窩, James E. Adams) 선교사가 서문 밖 초가 5칸을 사들여 기독서원을 개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독서원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교회 앞 도로 건너편 버스 정류장이 있는 대석동 129번지다. 당시 김병우(金炳宇)가 언제 안동지역의 매서(賣暑)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의와 선교사는 김병우를 기독서원의 매서로 활용했다. 하지만 기독서원의 정확한 개원(開院) 일자는 알 수는 없다. 다만 안동교회의 첫 예배가 기독서원에서 있었기 때문에 기독서원이 첫 예배일자인 1909년 8월 8일 이전에 개원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이 사실을 근거로 기독서원의 개원(開院)에 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1908년 9월 미국북장로회 선교회 정기 총회 이후 부산에서 열린 한국 선교 집행 위원회는 오월번과 그의 부인인 새디, 그리고 별리추 박사에게 안동의 새 지부 개설을 요청했고, 이들이 동의함으로써 안동선교부가 개설되게 되었다. 안동 주재(駐在) 최초의 선교사인 사우대(Chase C. Sawtell)은 1908년 12월 1일 대구를 출발해 안동에 도착했지만 1909년 11월 16일 장티프스로 별세하였다. 이어 1910년 상반기에 오월번과 별리추 선교사, 권찬영 선교사가 안동으로 내려옴으로써 안동에는 3명의 선교사가 주재하게 되어 완전한 선교부의 조직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안동의 기독서원을 위한 가옥구입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대구 주재 안의와 선교사에 의해 행해졌거나 안동선교부 주재 사우대, 오월번, 사우대 선교사 등에 의해 기독서원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모두 있을 것이다. 즉 안동에 선교부가 세워진 1908년 12월 이전이라면 안동이 대구선교부 관할이었기 때문에 안의와 선교사가 기독서원에 사용될 가옥을 구입했을 가능성이 크며, 1909년에 접어들어 기독서원이 개원되었다면 안동선교부에 의해 시작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에 의하면 안동에 교인이 증가하게 되자 대구선교부에서는 풍산교회 교인인 김병우를 매서인으로 하여 1909년 8월에 종교 서적을 파는 서점을 열게 했다고 증언한다. 사진 2는 안동교회의 첫 예배처소로 추정되는 기독서원 앞에서 성도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모임의 수나 모임 사람 대다수가 남성인 것으로 볼 때 남자성경공부반으로 추정되며, 첫 예배를 드린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때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초기 한국교회가 곳곳에 세워진 것은 각 지역에 세워진 기독서원에 속한 매서와 권서의 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 교회가 없는 산간지방이나 외딴 지역에 매서를 통해 전해진 성경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매서들은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장소를 마련하고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이것이 훗날 교회로 발전했음을 여러 초기 자료들은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1909년 8월 8일 안동교회의 첫 예배가 당시 매서인 김병우에 의해 인도되었다는 것은 당시로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안동교회는 거의 1년 동안 이 기독서원에서 예배를 드렸다. 첫 예배 후 1년이 지날 즈음 교인의 수가 70명을 초과하여 예배공간이 비좁아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어 기독서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음을 권찬영 선교사는 증언하고 있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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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7‧끝)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화와 안동지역의 복음화(7‧끝)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목차 서론 1. 첫 번째: 기독서원(基督書院) 2. 두 번째: 선교사 임시주택 3. 세 번째: 선교사 주택 4. 비공식 예배처소: 텐트 교회 5. 네 번째: 16칸 ‘ㄱ’자 예배당 6. 다섯 번째: 목조 2층 예배당 7. 여섯 번째: 2층 돌집 예배당 결론 7. 여섯 번째 예배처소 : 2층 돌집 예배당(2) 1936년 6월 8일에 있던 제직회에서는 예배당 기초 공사를 배원달 씨에게 맡기기로 하고 교섭위원은 권중필 씨로 정함으로써 본격적인 건축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임학수 목사는 예배당의 정밀한 설계가 교우들의 생각에서 나왔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돌집예배당의 설계자는 미국인 보리수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건축의 심각한 문제는 돌집 예배당의 터가 습지였다는 것이다. 사실 습지라면 약한 지반을 가지고 있을 텐데 8,000여개의 화강암으로 세워진 육중한 예배당이 80년 넘게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튼튼한 기초 때문이다. 돌집 예배당이 지금까지 견고하게 서 있는 이유는 기초로 사용한 생소나무가 아직 썩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무가 썩지 않은 이유는 돌집 아래로 여전히 물이 흐르고 있고, 흐르는 물속에 생소나무가 잠겨 있기 때문이다. 안동교회는 이처럼 멈추지 않고 흐르는 생명수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김광현 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이 풍랑 인연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건축과정의 우여곡절을 밝혔다: “이렇듯 안동교회 2층 돌집 예배당은 어린이, 어른, 남, 여 노소, 뜻있는 사람들, 선교사, 선교회, 노회 경내의 교회 등 구분 없이 모두가 합심함으로써 병자년인 1936년 초여름 6월 공사를 시작하여 정축년 1937년 4월에 준공되었다. 돌집 예배당은 기초면적 160평의 2층 건물로 당시로 보면 대규모 예배당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사 기간은 삼백 삼십 여일이었고, 공사비 총액은 이만 이천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또한 지난 78년 동안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선교 중심지로 사용되었기에 돌집 예배당의 준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의 역사적인 예배당 건축은 교인, 지역교회, 안동주재 선교사, 타 지역 선교부, 성소병원에 근무했던 의사, 또한 뜻있는 사람들의 합력으로 시작되었다. 공사기간은 1936년 초여름에서 1937년 4월이었다.(사진 12) 결론 1909년 8월 8일 둘째 주일, 8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한 안동교회는 지난 106년 동안 공식적으로 6차례 예배처소를 변경하였다. 6차례의 예배처소 중 3차례는 기독서원과 선교사 주택, 그리고 나머지 3차례는 안동교인들이 직접 건축한 예배당으로 이곳에서 온 교인들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앞서 언급한 공식적인 예배당이 아닌 예배처소에서 드린 3차례 예배는 그 모두를 합해도 1년 수개월을 넘지 못한다. 반면 106년 역사 가운데 104년 9개월 여 동안 안동교회는 교인들이 직접 건축한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때 안동교회에 임(臨)한 하나님의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안동교회의 예배처소 변화는 안동 땅의 복음화 정도(程度)를 반영한다. 안동 읍에서의 공식적인 첫 예배는 5칸 기독서원에서 있었다. 기독서원은 쪽 복음 등 성경과 기독서적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안동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장소인 서원에서 안동교회가 출범했다는 것은 안동교회에게 주어진 앞으로의 사명을 뜻하는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창립한 지 1년 동안 안동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했다. 그 결과 기독서원은 비좁아 더 이상 온 교인들이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첫 예배처소를 건축할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다만 첫 예배당이 건축되기 전 까지 교인들은 옮겨 다녀야만 했으며, 그 예배처소로 선교사 임시주택을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독서원을 떠난 후 그 기간은 불과 수개월에 불과하다. 1910년 10월 30일 주일, 역사적인 16칸 ‘ㄱ’자(약 30평 규모) 예배당의 입당으로 안동교회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여성·남성 성경공부반 등을 통해 보다 체계적인 양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첫 예배당도 오래가지 못했다. 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은 다시 새로운 예배당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늘날 100주년 기념관이 서 있는 장소에 약 50평 규모의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이 1913년 11월 착공되어 1914년 2월 준공하게 되었다. 이 2층 목조 예배당은 안동지역에 대규모 집회 시대를 열게 하였다. 여름성경학교, 도사경회, 경안주일학교대회, 경안노회 등 당시 경북 북부 지역의 중요한 대형집회가 바로 이곳 목조 2층 예배당에서 개최되어 안동지역의 교회가 부흥을 위한 기초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 예배당에서 안동의 3·1 만세 운동을 모의하고 주도함으로써 교회의 존재를 지역주민들에게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신축된 이후 2층 목조예배당은 23년 동안 안동 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보다 적극적으로 뿌릴 수 있게 하였다. 안동교회 세 번째 예배당은 1937년 4월에 준공된 320평 규모의 2층 돌집예배당이다. 오늘까지 80년 넘은 세월 동안 사용하고 있는 2층 석조 예배당은 다양한 대규모 집회, 교육, 그리고 봉사 사역을 통해 안동지역의 복음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안동 지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석조예배당을 통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건강한 구원의 나무가 되었다. 안동교회 예배처소의 변동은 하나님께서 지난 106년 동안 안동 땅에서 이루신 거룩한 사역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선교 2세기를 맞는 안동 땅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거룩한 건축물을 통해 안동 땅에 새롭고 거룩한 사역을 또 다시 펼치실지 모른다. 끊임없이 이어질 걷는 믿음의 발자취, 구속의 발걸음이 안동에서 계속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랄 뿐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했던 그 때 믿음의 선배들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와 다음세대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역사에 거룩한 도구로 사용되기를 기도한다. ▲돌집 예배당이 1937년 4월 준공된 후의 사진으로 78년이 지난 오늘의 예배당과 거의 동일하다. 다만 예배당 좌측 지붕에는 두 개의 굴뚝을 볼 수 있고, 예배당 건물 왼쪽 언덕에는 종탑이 서있다.(사진 13)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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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제38회 정기총회 열려신임회장에 윤삼선 권사 추대 ▲신임회장 윤삼선 권사. 예장(통합) 영주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2월 18일(목) 오후 1시 영주 동산교회 예배당에서 제38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신임회장에 윤삼선 권사를 추대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주제 아래 모인 이번 총회는 코로나19 거리두기 지침을 지키는 가운데 진행됐으며, 영주노회(영주시, 봉화군, 예천군) 105개 지역회 304명이 참석했다. 개회예배는 회장 이설희 권사 인도로, 부회장 윤삼선 권사 기도, 김창진 목사(영주동산)가 ‘일상을 회복하는 헌신(창26:19-22)’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또 부노회장 김영수 목사(예천) 축사,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 김미순 장로 격려사, 여전도회전국연합회에서 풍기성내교회 최효열 목사에게 감사패 증정, 여전도회전국연합회에서 회장 이설희 권사에게 감사장 수여 후 김창진 목사 축도로 개회예배를 모두 마쳤다. 이어진 총회에서 신임회장으로 추대된 윤삼선 권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총회가 되게 하심을 감사한다”며 “여전도회 2,800여 회원들과 신임임원진은 본회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지상에 이루기 위해 교회와 사회에 필요한 일꾼이 되도록 섬김을 다하겠다”고 인사했다. 총회 후에는 헌신예배가 이어졌다. 예배는 신임회장 윤삼선 권사 인도로, 부회장 서순자 권사 기도, 김정옥 목사(직산교회)가 ‘혀 밑에 감추인 것은?(약3:1-12)’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으며, 작은자선교부장의 봉헌기도, 김정옥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폐했다. ◎제38회기 신임임원 ▲회장: 윤삼선(영주동산) ▲부회장: 서순자(신영주) 이승연(영주제일) ▲직전회장: 이설희(성내) ▲총무: 유은경(신영주) ▲서기: 손성순(풍기동부) <부>백점순(영주반산) ▲회의록서기: 권혜란(영주제일) <부>장혜숙(봉화제일) ▲회계: 조미희(봉화중앙) <부>석미경(신광) ▲정기총회를 마치고 내빈들과 역대회장들, 신임임원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영주 우병백 기자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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