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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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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3)

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4)
김승학 목사의 논문 연재(4)-박상동 목사(3)

김승학목사(서재).jpg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jpg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6. 아버지 박상동
박상동은 결혼 후 늦은 나이에 대구계성학교를 졸업하였다. 장남 박상동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때 부친 박영화 목사가 한 말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부친은 아들에게 “내가 줄 돈도 없고 재물도 없지만 네게는 성경책이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고만 했다는 것이다. 식구들을 고향인 의성에 두고 유학을 떠난 박상동이 방학에 잠시 집에 들렸을 때 여섯 살 쯤 되었던 장남 박대선은 “엄마 어떤 손님이 오셨어요!”라고 외쳐 집안의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아들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박상동은 공부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해방 후 평양에서 목회하고 있던 아들 박대선은 아버지 박상동 목사를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었다. 아버지를 만나고 나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박대선을 모든 형제들이 반대하며 만류했지만 아버지 박상동 목사는 “약속은 하나님과 한 것이든 사람과 한 것이든 지켜야한다”고 하면서 박대선이 이북으로 가는 허락할 정도로 아버지 박상동 목사는 강직한 품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박상동 목사는 합리적으로 판단을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들 박대선이 나고야까지 찾아와 진로 문제에 대한 지혜를 구했을 때, 설득력 있는 말로 아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배려한 사려 깊은 아버지였다. 아들 박대선에게 있어서 아버지 박상동 목사는 태산과 같은 믿음의 선배인 동시에 존경의 대상으로서의 롤 모델(Role Model) 그 자체였다.
 
또한, 박상동 목사는 아들 박대선이 일본에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모두 선교사가 운영하는 기독교학교에 다니게 할 정도로 신앙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자녀들에게는 성수주일을 강조하였으며, 아침과 저녁으로 드려지는 가정예배는 어떤 일이 있어도 빠져서는 안 되는 철칙이었디. 이처럼 아버지 박상동 목사에게 있어서 자녀교육은 출발도 믿음이요, 마지막도 믿음이었던 것이다.
 
아버지 박상동의 거룩한 영향은 자녀들의 신앙의 뿌리가 된다. 일제 말 투옥되어 심한 고문으로 두렵고 떨릴 때 마다 아버지 박상동 목사는 창살을 붙잡고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예수님도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그 고통을 당하셨는데 나도 예수님을 위해 죽으리라.” “죽음을 각오하고 이렇게 기도하니 아무 두려움도 없었다”고 한 아버지의 말씀을 자녀들은 결코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아버지의 이 모습은 자녀들이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기억하고 예수님 뒤를 좇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도록 만들었다.
 
아버지 박상동 목사의 자녀 사랑은 3녀인 박은수 사모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추운 감옥에 갇혀 있을 당시 음식을 넣어주러 온 딸들에게, 갑작스럽게 창문을 열고 “너희 오빠들 잘 있니?”라고 안부을 물었다고 한다. 그것으로 인해 더 많은 구타를 당했지만 아들이 무사하다는 말에 마음이 평안해졌다는 박상동 목사. 이처럼 아버지 박상동 목사는 자녀들에게 부드럽게 대하지는 않았지만 자녀들을 향한 속 깊은 사랑을 갖고 있던 인자한 아버지였던 것이다.
 
7. 목사 박상동
1) 고베중앙신학교 유학시절
부친 박영화 목사는 1914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제11회로 졸업하고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의성 쌍계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목사인 동시에 독립운동가인 부친은 아들 박상동 목사의 삶과 목회사역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박상동 목사는 부친과 함께 3·1 만세시위운동에 동참했을 뿐 아니라 목회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일본으로 건너간 박상동은 고베신학교 유학생 시절부터 오사카(大阪)에 거주하는 동포 선교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일본에 도착한 1921년부터 학업을 마친 1925년 까지 구령(救靈)을 위한 투철한 소명감을 가지고 교포를 향한 목양(牧羊)을 계속하였다. 박상동은 열심히 신학공부에 임했을 뿐 아니라 당시 방적회사에서 노동으로 힘들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여공(女工)들에게 소망과 위로의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비록 적은 수였지만 가정에서 모이던 소그룹이 오사카지역의 최초교회인 오사카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2) 안동교회의 사역
① 목사안수
1925년 일본 고베신학교를 졸업한 박상동은 귀국하여 안동교회 강도사로 부임하였다가 1926년 9월 경안노회(제11회) 임시노회에서 안수 후 담임목사가 되었다.
 
② 부흥사경회
특별히 1928년은 안동교회 부흥사경회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해로 당시 한국교회의 지도자요 민족운동가인 길선주 목사가 사경회의 강사로 두 차례 안동을 방문하였다. 당시 부흥사경회를 통한 말씀사역은 안동교회의 성장에 큰 동력이 되었다. 박상동 목사는 시무하는 동안 매년 1차례 이상씩 특별강사를 초청해 사경회는 계속되었다. 박상동 목사는 자신이 부흥강사로 나가는 대신 강사를 초청에 교회의 내적 성장과 성숙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의 이러한 사역의 기조는 다른 오사카교회, 나고야교회, 나고야동부교회, 그리고 남산교회를 섬길 때도 계속되었다. 
 
③ 지역복음화 사역
교회의 부흥 뿐 아니라 박상동 목사는 안동 읍의 성시화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였다. 1925년 7월에는 안기기도실을 세웠을 뿐 아니라 안동읍을 4개 권역으로 나누어 권찰을 두었다. 또한 박상동 목사는 가정복음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동년 11월에는 불신가정의 복음화를 위해 전 교인이 합심으로 기도하게 하였다. 이후 전도 강연을 등을 통해 교회분립의 기초를 다진 후 안동교회에 출석하던 교인들의 거주지에 따라 안기기도실로 이명 시켰다. 이 안기 기도실은 1932년 독립교회가 되었고, 해방 후 안동서부교회로 개칭하였다.  
 
④ 구제사역
안동교회에 부임한 박상동 강도사는 부임 첫 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해 교회에 광고하였다. 그는 소외당하고 가난한 성도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을 실질적으로 돕기 위한 헌금을 마다하지 않았다. 더욱이 박상동 목사는 안동교회 성도들의 구제만이 아니라 계곡교회를 구제하기 위해 한주일 헌금을 실시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교회의 담을 넘어 대사회적 봉사를 통한 복음화가 박상동 목사의 주된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오늘날 강조되고 있는 교회의 공적 사명을 박상동 목사는 90년 전에 이미 시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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