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맑음속초9.9℃
  • 황사4.2℃
  • 맑음철원4.9℃
  • 구름많음동두천4.4℃
  • 구름조금파주4.9℃
  • 맑음대관령2.2℃
  • 맑음춘천6.4℃
  • 황사백령도6.3℃
  • 황사북강릉8.7℃
  • 맑음강릉11.4℃
  • 맑음동해8.8℃
  • 황사서울5.6℃
  • 황사인천5.5℃
  • 맑음원주7.1℃
  • 맑음울릉도9.8℃
  • 황사수원4.2℃
  • 맑음영월5.8℃
  • 맑음충주3.8℃
  • 맑음서산4.4℃
  • 맑음울진7.4℃
  • 박무청주7.1℃
  • 황사대전6.6℃
  • 맑음추풍령7.5℃
  • 맑음안동6.4℃
  • 맑음상주7.9℃
  • 맑음포항8.9℃
  • 맑음군산6.1℃
  • 맑음대구7.7℃
  • 박무전주7.3℃
  • 맑음울산9.7℃
  • 맑음창원7.3℃
  • 박무광주7.6℃
  • 구름조금부산10.4℃
  • 맑음통영8.9℃
  • 맑음목포8.6℃
  • 맑음여수9.9℃
  • 박무흑산도6.9℃
  • 맑음완도8.7℃
  • 맑음고창6.8℃
  • 맑음순천7.2℃
  • 황사홍성(예)5.5℃
  • 맑음5.6℃
  • 맑음제주10.4℃
  • 맑음고산10.4℃
  • 맑음성산9.7℃
  • 맑음서귀포10.1℃
  • 맑음진주6.3℃
  • 맑음강화4.6℃
  • 맑음양평5.2℃
  • 맑음이천5.3℃
  • 맑음인제7.3℃
  • 맑음홍천4.3℃
  • 맑음태백5.3℃
  • 맑음정선군5.9℃
  • 맑음제천5.4℃
  • 맑음보은4.7℃
  • 맑음천안3.7℃
  • 맑음보령5.9℃
  • 맑음부여5.1℃
  • 맑음금산3.7℃
  • 맑음5.9℃
  • 맑음부안7.1℃
  • 맑음임실4.2℃
  • 맑음정읍6.8℃
  • 맑음남원4.9℃
  • 맑음장수2.0℃
  • 맑음고창군7.1℃
  • 맑음영광군7.5℃
  • 맑음김해시8.5℃
  • 맑음순창군6.9℃
  • 맑음북창원8.4℃
  • 맑음양산시8.5℃
  • 맑음보성군7.8℃
  • 맑음강진군7.5℃
  • 맑음장흥5.5℃
  • 맑음해남7.7℃
  • 맑음고흥8.7℃
  • 맑음의령군4.9℃
  • 맑음함양군9.4℃
  • 맑음광양시8.4℃
  • 맑음진도군7.9℃
  • 맑음봉화3.4℃
  • 맑음영주7.0℃
  • 맑음문경4.5℃
  • 맑음청송군5.5℃
  • 맑음영덕8.8℃
  • 맑음의성4.7℃
  • 맑음구미5.9℃
  • 맑음영천7.9℃
  • 맑음경주시6.8℃
  • 맑음거창7.1℃
  • 맑음합천5.6℃
  • 맑음밀양6.2℃
  • 맑음산청8.3℃
  • 구름조금거제8.4℃
  • 맑음남해9.8℃
  • 구름조금8.7℃
기상청 제공
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3)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3)

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10)
김승학 목사의 논문 연재(10) - 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3)

기독청년면려회(CE)와 안대선 선교사(3)

 

김승학목사(서재)1.jpg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안대선 선교사 - 복사본.jpg

안대선 선교사(W.J.Anderson, 1890~1960)

 

 

목차

서문

1. 안대선의 출생지

2. 안대선의 출신대학과 신학대학원

3. 안대선의 결혼과 사별

4. 안대선의 안동선교부 부임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

6. 안대선과 전국기독청년면려회

7. 안대선의 그 외 사역

8. 안대선의 퇴임 및 별세

 

 

5. 안대선과 안동기독청년면려회(1)


1) 기독청년면려회

기독청년면려회는 미국에서 특정 교파를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라 청년들의 기도회를 통해 자발적으로 생겨난 운동이다. 면려운동은 미국 포틀랜드 시에 있는 윌리스톤교회를 섬기는 클락(F.E.Clark) 목사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됐다. 1881년 2월 2일 교회 청년들과 함께 기독교청년면려회(CE)를 조직한 클락 목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For Christ and the Church)라는 표어를 갖고 기도와 성경연구 전도운동에 힘을 쏟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전역에 번지게 됐다. 이후 인도, 영국, 캐나다 등에도 면려운동이 전해졌으며 1892년에는 클락 목사가 중국을 방문하면서 아시아에서도 조직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안대선은 미국에서 일어난 면려운동의 성과를 듣고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 클락 목사와 여러 차례 서신교환을 하며 그에 대한 자료를 얻어 기독청년면려회를 안동교회 청년회에 소개했다. 면려운동의 근본정신은 기독교 청년의 품격을 교육하여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데 있다. 면려회의 표어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For Christ And The Church)이다. 3대 결의로는 다음과 같다. 표어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자, 정직한 나가 되자, 사람에게 신의를 지키자”이고, 주장은 ‘쉬지 않고 나를 교양하자, 나의 교회를 돕자, 방방곡곡에 전도하자, 외지 전도에 힘쓰자’이며, 작정으로는 ‘매 회원 매년 1인 전도주의자가 되자, 회원마다 십일조를 바치자, 내 동리에 신앙운동을 일으키자, 외지의 한국 동포를 구하자’이다. 


특히 강령(綱領)은 다음과 같다. ①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 ②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③ 우리의 사명은 다음과 같다: 개혁주의 신앙의 한국교회 건설과 사회의 복음화와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 ④ 우리의 생활 원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안대선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안동교회에서 청년면려회 조직 승인을 위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게 되었다. 청년면려회원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위한 삶, 교회를 위한 삶을 살아야 했다. 특히 회원은 실생(實生)회원, 학습회원, 명예회원 등으로 구분되었다. 특히 실생(實生)회원의 자격은 나이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세례교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의 품성을 가지고 그의 삶을 본받아 살겠다(實生)고 서약해야 했다. 서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봉행(奉行)하기로 힘쓸 것. ② 내가 정한 뜻으로 매일 기도하기와 성경읽기를 끝까지 힘쓸 것. ③ 내가 있는 교회의 진흥하는 일에 힘써 그리스도인의 본분인 의무를 지키기로 힘쓸 것. ④ 내가 본회의 일체 의무를 다 실행하되 매 주일 본회 예배시간에 출석하여 찬송하며 기도하며 성경 읽고 증언하는 일분자(一分子)의 직책을 담임하기로 힘쓸 것. ⑤ 내가 매삭 헌심회(獻心會) 때에 혹 출타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든지 또는 부득이한 사고로 참회치 못할 경우에는, 호명할 때에 대답으로 성경말씀 외울 절수를 기록하여 본회 회원에게 편지로나 전편으로나 신실하게 송부하여 대신 외워 정신적으로 참석함을 표하기로 힘쓸 것. 


2) 안동교회 기독청년면려회 조직

19세기 말부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국내에 여러 회(會)를 소개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기독청년운동도 소개했지만 신앙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고 안대선은 증언한다. 하지만 3·1만세운동 후 안동의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1919년 안동의 만세운동이 안동교회의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나게 되자 의식 있는 많은 청년들이 안동교회로 모여들었고, 1920년 4월 8일 안동기독청년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독청년회는 시작할 때의 열정이 점점 식어져 유명무실한 청년회가 되었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덕이 되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안동 기독청년회 조직을 이끌어가던 회장 김원진을 포함한 다수의 회원들은 불신자로 활동의 목적이 신앙운동이 아닌 사회운동에만 전념하게 되자, 당시 안동교회 동사목사인 권찬영 선교사는 일제의 교회탄압이 심해져 신앙생활이 방해받을 것을 염려했다. 교회는 안동기독청년회를 지도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순수한 신앙중심의 청년회 조직을 새로 구상하게 되었다. 당시 청년들은 전국적인 기미년(1919년) 3·1운동의 실패로 인해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고,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 독립의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국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청년들은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교회를 통해 애국 운동을 하려는 의욕이 더해졌다. 

 

이때 안대선 선교사가 소개한 면려운동은 청년들에게 호감을 끌기에 충분했다. 안대선 선교사는 1921년 1월 하순, 청년면려회를 조직키로 작정하고, 당회의 허락을 받고 1월 23일 안동교회에서 청년면려회 창립총회를 개최하며 임원과 위원을 선정하였다. 면려운동을 활발하게 추진한 안동교회 주요회원들은 권연호, 권중윤, 김재성, 홍범순, 서순이, 장경영 등이었고, 권중윤은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초대회장에 선출되었다. 안동교회 당회는 1921년 2월 5일 전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승인함으로써 청년신앙운동으로서 교회봉사와 대사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안동교회는 한국 기독청년면려회의 발상지 교회가 되었다. 

 

image01.jpg

 안동교회 당회는 192125일 기독청년면려회 조직을 승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당시 당회장은 권찬영 선교사였으며, 안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대영 목사도 참석했다.(사진4)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관련기사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