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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3)- 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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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의 논문 원문(3)- 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

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3)
김승학 목사의 논문 연재(3)
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

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사람, 정재순 목사

 

 

김승학목사(서재).jpg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정재순 목사.jpg

정재순 목사
(鄭在淳, 1878~1948)

 

1900년 초 어느 날 정재순 목사는 부해리(傳海利, Henry M. Bruen) 선교사와 만났다.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정재순이 20을 갓 넘은 나이에, 경산 어느 마을에서 부해리 선교사를 만났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훗날 정재순의 행보를 보았을 때 이 만남은 우연적인 만남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묘하신 섭리 가운데서 정재순이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게 하셨다. 만남 후 정재순의 삶은 하나님께로 향한 삶이 되었다. 정재순은 이후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 따라서 언제 누구를 어디에서 만나느냐는 정말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삶의 방향과 내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이후 정재순은 단 한 번도 교회를 떠난 적이 없이 초창기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교회 안에 세워진 기독교학교의 교사생활을 시작으로 교회에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함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를 전문적인 사역자로서 훈련시키셨다. 조사로 여러 교회를 섬기던 정재순은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하여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쌓게 된다. 그러던 1914년, 그가 섬기고 있던 대구 신정교회(현 대구 서문교회)에서 장로로 임직하는데, 신정교회 초대 장로의 영예를 안게 된다. 1915년 평양신학교 제8회로 졸업한 후 목사임직을 받고 신정교회 첫 한국인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초임지인 대구 신정교회에서 정재순 목사의 사역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역이었다. 여자 청소년을 위한 야간 학교를 개설했고, 대구 3·1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1922년 6월 안동으로 사역지를 옮긴 이후, 그는 전도중심의 사역을 통해 안동 땅을 기경하기 시작했다. 계속적인 그의 관심사인 학원선교를 위해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교회분립을 통해 안동 땅의 부흥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안동을 떠난 이후 대구를 근거지로 둔 정재순 목사는 본격적인 복음전파자의 길을 걸었다. 청도, 영천, 경산, 달성, 고령, 월성, 경주, 영일, 칠곡, 상주, 군위, 선산, 의성군 등에 28개 예배처소를 개척했다. 이 때 그의 부인인 손주안 사모는 함께 교회를 개척하고, 함께 성도를 섬기고 돌봄으로써 정재순 목사의 소중한 동역자가 되었다.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서 산란하고 죽듯이 정재순 목사는 60세에 그의 첫 담임 목회지인 대구 신정교회로 돌아가 사역을 마무리했다.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정재순은 목회 전반전과 후반전을 똑같은 열정과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불꽃을 불사르며 살았을 뿐 아니라 성도들의 심장에 전도의 불을 지핀 믿음의 사람이었다. 이제부터 정재순에 관해 살려보자.   


1. 목사 임직 이전의 인간(人間), 정재순

 

정재순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며 극히 단편적인 것만 알려져 있다. 그의 집안이나 근무한 기관, 그리고 섬긴 교회도 그에 관한 것과 사역한 내용 등에 관해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지금까지 그의 성장배경이나 가족 관계 등 역시 제한적인 정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결과 정재순 목사의 가정에 관한 연구는 전무하다 시피 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 교회역사 주영연구소장 이교남 목사에 의해 정재순의 가족 관계가 새롭게 밝혀졌다. 이교남 목사는 정재순 목사의 후손을 만나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정 목사에 관한 이야기나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귀한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이교남 목사는 2013년 7월 제2회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포럼에서 발표한 ‘정재순 목사의 목회사역과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라는 소논문에서 정재순 목사의 후손을 만나 확인한 새로운 사실을 공개한 적이 있다.   

 

새롭게 밝혀진 정재순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정재순(鄭在淳)은 1878년 5월 24일, 경상북도 경산(慶山)군 남천면 신기동에서 출생(出生)했다. 부친은 정진호(金鎭鎬), 모친은 김소사(金召史)의 2남 4녀 중 장남이며, 부인은 손주안(孫主安)이다. 훗날 부인 손주안은 남편 정재순 목사의 동역자로 전도와 교회개척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정재순은 외동아들을 두었는데 아들은 정원조(鄭元祚), 자부는 손기순(孫琪順)이며, 그의 후손은 현재 대구에서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정재순 가문은 당시 여느 가문처럼 유학의 집안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우고 한학을 수학하며 유학을 따르는 집 안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묘는 칠곡에 있었는데, 1982년에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재순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할 때 교인으로 생존한 성도들이 기억하고 있는 정재순 목사는 천성이 어질고 중후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로부터 호감을 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 있는 정재순 목사의 사진에서 보여 지는 그의 인상(印象)은 성도들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사진으로 보여 지는 그의 인상은 후덕하고 인정이 많은 교육자요 목회자,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안동교회를 섬기는 3년 동안 성도들은 그의 신앙과 인격을 존경하며 영적 리더십에 순종했을 것이다.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고 대구제일교회 원로목사인 이상근 목사는 정재순 목사의 훈훈함을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들이 약혼한 때는 1942년 여름, 음력으로 7월 7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견우직녀라면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약혼식은 정재순 목사님의 주례로 처가 대청에서 올렸습니다.” 정재순 목사는 교인들을 포함한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주는 주의 종이었다. 


2. 선교사를 만나 회심(回心)한 사람, 정재순 

 

유교가 뿌리 깊은 가정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정재순은 처음에 기독교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순 목사의 증손자에 따르면 정재순이 선교사를 구타하고 쫒아내려고 선교사를 찾아갔다가 부해리 선교사를 만나 전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대구 경북 조사인물편람에 따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부해리 선교사가 ‘나의 설교 중 어느 말씀에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라고 정재순 조사에게 물었더니 정재순 조사는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부해리의 설교가 아니고 당신이 키우고 있는 사냥개 마이크가 식사 기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정재순 조사는 사냥개가 빵을 다리 위에 놓고 주인이 먹으라는 명령을 기다리는 순간을 식사 기도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미천한 개도 음식을 놓고 기도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어찌 기도하지 않겠는가? 하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개도 기도하고 난 후에 밥을 먹는데, 사람인 나는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정재순의 고백은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만이 아니라 선교사의 행동 등을 통해서도 전해질 수 있음을 알게 한다. 그렇다면 정재순은 언제 회심했을까? 정재순의 회심은 경산에서 복음이 전해진 선교사와 기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부해리 선교사는 1896년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1899년에는 뉴욕 유니언 신학교(Union Th 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한 후 그해 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해 10월 26   일 대구에 도착하였다. 결혼을 위해 대구를 떠났던 그는 1902년 5월 다시 대구 선교부에 귀환하여 경북 서부지방, 즉 김천, 선산, 군위, 고   령, 성주, 상주, 칠곡 등지에서 복음을 전해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3년 부해리 목사는 안의와(安義窩, James E. Adams)의 후임으로 대구제일교회를 담임하였고, 1904년에는 대구 성경학원의 남자 조사반을 맡았다. 또한 1916년까지 나환자 선교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2년 1월 경상노회의 조직에도 크게 기여하여 1913~14년에는 경상노회 7, 8회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5년에 대구 남산교회를 세워 1920년까지 당회장으로 시무하였다.

 

 

(이하 내용은 논문원문 첨부파일 참조)

 

편집부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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